(ii) 녹음들

; 참고 음반 2개를 제외하면 총 5명의 피아니스트들의 9~10개 녹음. '함머클라비어' 때는 리히터(Sviatoslav Richter)와 피셔(Annie Fischer)까지 총 7명이었는데, 이 음악은 한 수준이 더 올라가다 보니- 테크닉적으로 더 어려운 곡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지만- 음악적으로는 최고 난이도라서 추가로 두 명이 더 탈락했다.

 

1. Glenn Gould- 1956

   1악장 첫 음표부터 루바토가 들어가는 게 놀랍다면 놀라운 점이고, 굴드가 이 음악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2악장은 베토벤의 ‘최대한 빠르게(Prestissimo)’ 지시에 가장 충실한 연주- 이 스피드로 노래하기는 거의 어렵지만, 대신 음표가 살아서 튀어오르면서 리듬감과 음악의 기세가 좋아진다. 여튼 1/2악장은 음악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가장 파격적인 것은 역시 3악장. 일단 도돌이표에 의한 단순 반복은 모두 생략이다. 또 1악장 첫머리처럼, 주제도 그렇지만 특히 제1변주에는 굴드가 혹 쇼팽 녹턴을 연주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은 풍부한 루바토가 들어간다- 곧, 우리가 앞서 곡목해설에서 언급한 코르토와 같이, '쇼팽이 음악사에 들어오는 순간'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물론 굴드 본인에게 물었다면 아마도 전혀 다른, 생뚱맞게 들리는 이유를 댔을 가능성이 많다.). 제4변주는 너무 간살맞아서 못 참겠다는 듯이 '주제보다 조금 느리게'라는 베토벤의 지시는 완전히 무시하고 최대한 달린다. 4성의 빠르게 이어지는 울림은 참 좋은데- 그래서 이것 하나만으로는 충분히 말이 되지만- 악장 전체의 밸런스가 무너지게 되고, 무엇보다 이게 베토벤의 의도에 부합하는지 우리는 의문이다. 다만 마지막에 반복되는 주제를 처음과 확실히 차별화하고 싶다면 이것이 가장 잘된 녹음- 첫머리와 완전히 다른 분위기면서 '칸타빌레'는 잘 살린 연주다.

   굴드가 우리 나이로 25세일 때의  녹음이고, 나중에 다시 녹음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몹시 아쉽지만- 아마 했다면1955/81년의 2가지 버전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처럼 완전히 새로운 해석을 들려주었을 것이다-  이런 패기와 독창성은 요즘 젊은 피아니스트들한테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2. Wilhelm Backhaus- 1950

   1/2악장은 박하우스답게 날렵한 흐름과 기세를 잘 살리는 연주. 하지만 3악장은 주제부터 악보의 스포르찬도나 크레센도를 거의 무시하듯이 강약이나 볼륨대비를 확 줄여서 아주 결이 고운, 꽃향기 넘치는 연애편지 같은 음악을 만든다. 이게 주제의 첫머리에 'mezza voce(절반 정도 음량으로)' 지시어가 있기 때문에 전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간지러운 것을 싫어하는 박하우스로서는 꽤 이례적인 해석인데, 역시 우리가 앞서 언급했던 32번 2악장과의 '차별화' 문제가 있다- 녹음을 들어보면 박하우스는 32번의 아리에타를 아주 역동적인 음악으로 보기 때문에, 그에 비해 이 3악장은 한없이 다정한 음악이 된 것.

   이 3악장을 이런 관점으로 접근하면 제4변주가 무척 아름다워진다. 대신 제6변주에서 드라마가 좀 약한데, 그것은 당연히 박하우스가 클라이맥스를 만들 줄 모르는 게 아니라, '이 음악은 여기서 폭발하지 않는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의 견해는 이 3악장이 제4변주와 제 6변주에서 말하자면 'double-climax'를 갖고 있다는 것이지만, 옳든 그르든, 갑자기 제6변주에 와서 폭발한다거나 하는 그런 식으로 해석의 통일성을 깨지 않는 것이 대가다운 품이 높은 연주다.

 

3. Wilhelm Backhaus- 1961

   1악장 발전부의 클라이맥스는 외려 격하기만 한 상기 모노 버전보다 더 통제가 잘 되어서, 과도하거나 어긋남이 없이 듣는 사람을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게 만들 정도- 1악장만으로는 여기 소개된 음반 중에서도 거의 최고다. 3악장도 이쪽이 모노 버전보다 '달달한 칸타빌레'를 조금 줄여서 전체적으로 음악이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맛이 있다. 테크닉적으로는 아무래도 11년전이 조금 낫지만- 음표 하나하나가 더 고르고 정확하게 소리가 난다- 대신 음질은 이쪽이 스테레오라서 해석 외적인 면에서는 서로 일장일단이 있으되, 하나만 고르라면 역시 이쪽이 대표반.

 

4. Wilhelm Kempff- 1936

   켐프의 스테레오 베토벤 전집은 거의 늘 구할 수 있는 품목이고 1950년대 모노 전집도 잊을 만하면 한번씩 나왔지만, 이 2차대전 이전의 78 rpm 녹음은 그간 구하기 어려웠다. 2016~7년에 APR 레이블로 복각이 된 것은 한국에 수입이 안 된 것 같은데, 이 복각을 라이센스 한 것이- 이전에 나왔던 박스들을 거의 그대로 재탕해서 성의없이 합쳐 놓아서 욕먹고 있는- DG의 80장 짜리 새 켐프 에디션에 포함되어서 나왔다.

   테크닉적인 면에서 이것이 켐프의 세 녹음 중 가장 깨끗하게 연주된 음반. 모노 전집에 포함되어 있는 1951년 녹음이 음질은 좀 낫지만 어차피 같은 모노면서 해석적으로도 아래 스테레오만큼 차별화가 안 되어 있어, 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쪽을 더 추천한다.

(참고로 이 녹음도 굴드의 경우처럼 3악장 반복은 전부 생략했지만, LP 이전 시대는 레코드판 한 면에 껏해야 3~5분 들어가던 시절이라, 연주자의 음악적 판단과 무관하게 여러가지 컷이 많다. 이후의 켐프 녹음들에선 이 생략이 없다.)

 

5. Wilhelm Kempff- 1964

   가장 주목해야 할, 우리 나이로 딱 칠순이 된 켐프가 '득음'을 한 부분은 역시 3악장(주제)이다. 이전 녹음들은 박하우스만큼은 아니라도 주제 앞에 붙은 'mezza voce'에 어느 정도 신경을 썼었지만, 이제는 전혀 얽매이지 않고 액센트를 줄 때 확실하게 주고 크레센도를 충분히 살리면서 노래하는데, 들어보면 이 음악은 이렇게 해야 '숨을 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실 우리가 추측하기엔 이 'mezza voce'가, 청력을 상실한 베토벤이 비현실적인 볼륨감을 갖고 지시했을 가능성이 꽤 있다- 즉, 음량을 반으로 줄여도 음악이 충분히 숨을 쉴 만큼 강약(조절)이 청중들에게 전달될 수 있으리라고 오판했을 수 있다는 것. 사실- 특히 후기 베토벤의- 극단적인 템포나 거친 울림(sonority)나, 마음에 안 들면 다 베토벤의 '청력'에 책임을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가 보기엔 만약 청력 땜에 베토벤이 지장을 받은 게 있었다면, 이런 것들보다는 당연히 '음량'이다.

   이어지는 변주들은- 특히 제1/2 변주에서- 켐프 특유의 자연스러운 노래가 돋보인다. 다만 굴드처럼 '간살맞아서 못 참겠다'는 듯 빠르게 지나가는 제4변주는 역시 아주 효과적이진 않은데, 다만 켐프처럼 주제를 시작하면 이 편이 더 해석의 일관성이 있다는 점은 지적해주어야 한다.

   사실 켐프 베토벤이 물론 초일류이긴 한데, 악보를 보고 정밀하게 비교해서 들으면 제르킨이나 박하우스에 비해서 미세하게 밀리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이 30번은 켐프의 득의작이고, 켐프 예술을 대표하는 녹음이라고 해도 좋다.

 

6. Rudolf Serkin- 1952

   1악장은 한마디로 '맑다'- '전원'에 비유한다면 물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청정 고원의 느낌. 그리고 제2주제는 확실한 아다지오로 템포를 늦춰서, 제1주제와 제2주제간의 대비를 강조하는 관점을 대표하는 연주- 들어보면 이것도 완벽하게 말이 된다. 또, 1/3악장은 여기 소개된 녹음들 중에서 가장 느리고, 2악장은 거의 굴드 다음으로 빨라서 악장 간에도 분위기의 대비가 확실하다.

   3악장은 일단 제르킨은 주제를 경건한 음악으로 본다. 앞서 작품개요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주제가 전원교향곡 5악장 '목동의 노래(Hirtengesang)'의 주제처럼 코랄(chorale)적인 성격도 갖고 있어 이것 자체로는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다. 다만 문제는 이 음악의 성격을 이렇게 잡으면 중요한 제4변주가 상대적으로 고지식하고 재미가 없어진다는 것- 여러 대가들의 녹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 3악장은 해석의 일관성 혹은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주제와 변주 6개를 다 만족스럽게, 재미있게 연주하기가 힘든, 참 까다로운 음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7. Rudolf Serkin- 1976

   해석의 큰 틀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쪽이 노래가 더 낫다. 1악장은 제1주제와 제2주제 사이의 극단적인 대비를 조금 줄인 것이 들리고, 2악장도 프레스티시모(Prestissimo)는 포기하고 템포를 살짝 늦춰서 칸타빌레에 더 신경썼다. 3악장도 제2/4/6 변주는 확실히 이쪽이 노래가 더 좋다.

   이 음반은 사실 제르킨이 살아있을 때 출반에 동의한 녹음은 아니고, 사후에 컬럼비아의 프로듀서(Thomas Frost)가 편집해서 역시 피아니스트인 아들 피터 제르킨의 동의를 받은 것인데, 들어보면 제르킨 본인의 마음에 100% 흡족하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객관적으로 우리가 '제르킨' 이름 석 자에 기대하는 수준에는 모자람이 없다.

 

8. Rudolf Serkin- 1987 live

   제르킨 80대(정확히는 우리 나이로 85살)의 라이브. 이 녹음도 역시 가장 큰 변화는 3악장이다. 남달리 느리게 연주하던 주제의 템포가 드디어 안단테 부근까지 왔고, 이렇게 템포를 당기면서 음악은 이제 ‘경건’도 버린, 어깨에 완전히 힘을 뺀 '평담'의 경지. 그리고 라이브이기 때문에 흐름을 잘 타면서 흥이 오른 제2변주와 제5변주는 이전 녹음들보다 노래가 더 잘됐다. 제르킨의 이 곡의 대표반은 굳이 꼽자면 위 1976년 녹음이 되겠지만, 이것도 충분히 들어볼 가치가 있는 음반.

 

9. Artur Schnabel- 1932

   1악장은 이 음악이 갖고 있는 ‘환상곡풍’을 가장 잘 드러내는 연주- 이것도 '물'에 비유한다면, 아마도 '은하수'일 것이다. 2악장에서는 슈나벨이 베토벤의 가장 빠른 악장들에 대처할 때 나타나는, 미끄러지듯 달리는 독특한 리듬감각을 들을 수 있다. 취향에 따라서는 '방정맞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기운생동'이라는 관점에서, 음표가 살아서 튀어오른다는 점에서 장점이라고 본다.

   3악장 주제는 역시 경건하게 들어오지만, 제르킨보다는 촉촉하다. 제2변주는 제1변주의 녹턴적인 분위기를 잘 이어가는 터치- 사실 제1변주를 마친 다음엔 '움직임(의 개시)'만 생각하기 쉽고, 위에 소개된 녹음들도 대부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기에, 이 변주곡이 양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우쳐준 연주다. 반면 제6변주는 중간에 템포를 당겨서 더 역동적인 클라이맥스를 만들려고 시도하는데 그렇게 효과적으로 들리지 않아서, 여기는 차분하게 긴장을 쌓아올려가야 하는 음악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말하자면 '반면교사'. 전반적으로 슈나벨의 베토벤은 푸르트벵글러처럼 한 악장 안에서도 교묘한 템포 변화를 많이 주는 편인데, 이 제6변주는 완벽하게 잘 되지는 못한 경우. 다만 슈나벨의 트릴은 특별하다- ‘음악적인 트릴’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성부를 바꿔가면서 한없이 트릴이 이어지는 이 변주곡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녹음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슈나벨이 고작(?) 쉰하나일 때 녹음이고,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경우 이 곡은 일흔, 여든이 넘어도 계속 깨달음이 있는 음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역시 두번째 녹음이 없다는 점에 아쉬움이 전혀 없지는 않다.

 

 

(※ 참고 녹음)

 

10. Alfred Cortot The Master Classes

   1954~60년간 코르토가- 본인이 세운- 에콜 노르말(École Normale de Musique de Paris)에서 진행한 마스터 클래스의 녹음. 대략 30시간 정도의 원본을 진지한 음악애호가도 들을 만하도록, 음악이 많이 이어지는 부분을 골라서  1/10 분량으로 편집한 것이다. 책임 프로듀서는 다름 아닌 머레이 페라이어(Murray Perahia)- 페라이어가 코르토 아들한테 이 테이프의 존재를 듣고, 소개를 받아서 내용을 확인한 다음 소니(Sony)에 제안한 프로젝트다. CD 내지에 말하자면 코르토의 '녹취록(transcript)'과 그 영어 대역이 같이 있어,  음악을 알고 있다면 불어를 못하는 사람도 대의는 파악할 수 있다.

   디스크 석 장 중 처음 절반 정도를 코르토가 녹음을 거의 남기지 않은 바하/모차르트/베토벤에 할애했는데- 나머지는 쇼팽과 슈만이다- 그 중에 이 곡도 들어있다. 코르토는 E major(미-솔#-시), E minor(미-솔-시), 그리고 (한 옥타브 낮은) E major, 이렇게 3개의 화음이 소나타 전체의 구조를 이루는 핵심이라고 파악한다. 이런 관점에서 1악장의 제2주제도 단지 리듬, 박자 등등이 변형이 되어서 나타나는 연속적인 흐름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1악장의 두 주제 사이에 지나친 '대조'가 불필요하다고 보는 견해의 근거.

   평가할 수 없는 단편들에 불과하지만, 코르토가 베토벤에 있어서도 최고 수준의 음악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따라서 만약 전곡을 녹음했더라면 우리의 이 리스트에 틀림없이 포함되었으리라는 것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피아니스트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11. Mieczyslaw Horszowski- 1977 live

   가장 특징적인- 그리고 우리에게 충격을 준- 것은 2악장이고,  '프레스티시모'는 완전히 버리고  칸타빌레를 극대화한, 굴드와 정확하게 대척점에 있는 버전. 이 음악에서 이렇게 끊임없이 노래가 흘러나올 줄은 우리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이것은 폭풍우라기보다는 처절한 ‘인간적인 비극(human tragedy)’이고, 혹 이게 '폭풍우'라면, 이토록 우아하고 아름다운 폭풍우는 비교할 것이 아마도- 장르는 다르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 말년의 소위 '대홍수 소묘(deluge drawings)'들 밖에 없을 것이다.

   3악장 제1변주는 쇼팽에도 일가견이 있는 호르쇼프스키식 루바토를 들어볼 수 있다. 이게 재미있는 게, 처음 듣기엔 베토벤으로는 좀 과하지 않나 싶은데 이걸 듣고 나서 루바토가 없는 연주를 틀어 보면 또 딱딱하게 느껴진다- 정말로 '베토벤도 쇼팽도 아닌', 경계에 걸친 음악. 그리고 호르쇼프스키는 '폴리포니(polyphony) 감각'을 타고난 선택받은 소수에 속한다- 제3/5변주에서 양손이, 혹은 각 성부가 늘 동시에 노래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마지막 제6변주는 라이브의 열기와 흥이 더해져서, 클라이맥스가 (가속 없이) 잘 만들어진 연주- 음악은 테크닉이 다가 아니라는 걸, 때로는 미스터치가 문제가 안된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사례 중 하나이다.

   음질에 문제가 있는 라이브이고, 본인이 출반에 동의하지 않은- 그리고 동의했을지 의문인- 음반이라서 ‘참고 녹음'이 되었지만, 음악적으로 굉장히 터득이 깊은 연주.

(호르쇼프스키가 1950년대 Vox 레이블로 베토벤 소나타 29/30/32번의 스튜디오 녹음이 있긴 한데, 우리가 음반을 안 갖고 있다. 물론 애플뮤직 같은 음원 사이트에는 올라와 있지만, 클래식은 '스트리밍' 듣고는 정밀한 평가는 못한다. 검색을 해보니 Vox는 2018년에 Naxos에서 인수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옛날 음원들이 재발매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선호도: Schnabel>=Serkin1976=Kempff1964=Serkin1987>=Backhaus1961>=Backhaus1950=Serkin1952>=Kempff1936>Kempff1951>=Gould

해석의 삼각형: Gould/Backhaus/Serkin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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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작품개요(~계속)

- 2악장; 역시 간결한 소나타 형식. 보통 해설서에서는- 마단조(e minor)로 출발해서 짧은 경과구를 거쳐- 마디 안에서 도에 #이 하나 더 붙어서 나단조(b minor)로 전조되는 부분을 제2주제로 잡는데, 그렇게 봐도 무방은 한데 워낙 단일주제(mono-thematic)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음악의 내용상은 전형적인 베토벤식 스케르초에 가깝다. 독특한 발전부가 볼륨을 낮추고 쉼표를 적절히 사용해서, 마치 스케르초의 트리오와 같은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 교묘한 점.

   이 악장은 우리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주제와 재현을 '폭풍우'로, 그 사이의 발전부를 폭풍과 폭풍 사이에 잠시 오는 고요로 상정하는 것도 한가지 해석의 방법이다.

 

- 3악장; 변주곡 형식. 주제와 6개의 변주로 이루어져 있다. 주제가 각각 반복이 되는 두 도막으로- 즉, 'aa-bb'의 꼴로- 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 이어지는 변주들도 기본적으로는 a를 한번 변주하고 반복하고, b를 한번 변주하고 다시 반복하는 식으로 이 형태를 따르게 되어 있는데, 물론 기계적으로 하진 않는다.

   일단 이 곡에서는 이 3악장에만- 'Andante molto cantabile ed espressivo'라는 통상적인 이태리어 지시 외에- 'Gesangvoll mit innigster Empfindung(가장 깊은 감정으로 최대한 노래해서)'이라고 베토벤이 독일어로 쓴 지시어가 붙어 있어, 요즘 판본들은 이쪽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다. 한데 위 번역에서 보다시피 'gesangvoll'은 full-of-song, 곧 'molto cantabile'고, 'mit innigster Empfindung≒molto espressivo'여서, 사실 그 말이 그 말이다. 이 경우는 빠르기 지시 'andante'가 포함된 쪽이 외려 정보가치가 더 있다고 볼 것이다(참고로 제4변주의 빠르기 지시의 경우도 이태리어나 독어나 그 뜻이 그 뜻이지만, 아래 보다시피 이것은 독어쪽이 훨씬 더 간결하다.).

 

   주제는 사라반드(sarabande)풍. 사라반드는 3박자계면서 (첫박이 아니라) 두번째 박에 강세가 오는 것이 특징인 춤곡이다. 다름 아닌 바하 골드베르그(Goldberg) 변주곡의 주제에 해당하는 아리아(aria)가 사라반드풍이어서, 안드라스 쉬프(András Schiff)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베토벤이 아마도 골드베르그 변주곡의 존재를 알고 있지 않았겠느냐, 그렇다면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주장한다.[각주:1] 우리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멜로디 자체는 '전원교향곡'의 마지막 5악장의 주제 '목동의 노래(Hirtengesang)'과 가장 정서가 유사하기 때문에, 이 주제의 음악적 성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Hirtengesang의 sarabande화'라 할 수 있겠다.

 

VAR. I. Molt’ espressivo(아주 감정이 풍부하게).

; 이 첫번째 변주곡을 명 피아니스트 코르토(Alfred Cortot)는-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로- ‘쇼팽이 음악사에 들어오는 순간’이라고, 쉬프는 ‘오페라 아리아와 같다’고 표현한다. 음악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둘 다 일리가 있는 비유이니, 한번 음미해보기 바란다.

 

VAR. II. Leggieramente(아주 가볍게).

; '은쟁반 위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톤이 필요한 음악. 녹턴스러운 제1변주의 분위기를 이어가면서 동시에 음악에 베토벤 특유의 '움직임'이 생겨서 다음 제3변주로 이어지는 좋은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문제는 이 2가지 분위기를 동시에 표현하는 게 꽤나 어렵다는 것. 그리고 2개의 변주가 하나로 합쳐져 있기 때문에 악보를 보지 않으면 이 3악장이 '여섯 개의 변주'인지 '일곱 개의 변주'인지 헷갈리게 하는 주범. 베토벤의 초고들을 연구한 음악학자들에 따르면 베토벤은 늘 작곡된 변주곡 '후보'들 가운데서 잘된 것만 골라내고, 또 그중 일부는 합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VAR. III. Allegro vivace.

; 음악이 움직임에 가속이 붙는다. 형식적으로는 바하의 2성 인벤션(invention)과 유사한, 가장 단순한 형태의 대위법적 음악. 그리고 앞선 두 번째와 이 세 번째 변주곡은 '종지' 느낌이, 즉, 제대로 한 가락을 마무리짓는 느낌이 없이 바로 다음 변주로 넘어간다. 또,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변주곡의 연결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즉, 이 6개의 변주곡들은 1-(2/3/4)-(5/6), 이렇게 크게 세 덩어리로 나눌 수 있는 것.

 

VAR. IV. Un poco meno andante ciò è un poco più adagio come il tema(조금 덜 안단테로, 즉, 주제보다 좀 더 아다지오로). Etwas langsamer, als das thema(주제보다 조금 느리게).

; 하나의 멜로디를 서로 다른 성부에서 계속 모방해 나가긴 하지만, 굳이 '인벤션'이라거나 '푸가(토)'라고 부르긴 어려운 자유로운 양식(엄밀하게 말하면 대위법적(contrapuntal)이진 않은, 그냥 '다성음악(polyphony)'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이 두 단어가 때로는 서로 그냥 유의어처럼 쓰이기도 하기 때문에 'counterpoint' 하나로 퉁친다고 꼭 틀렸다고 할 수 있는지는 우리는 잘 모르겠다.).

   내용적으로는 첫번째 도막에선 다시 1악장의 물의 이미지로- 혹은 '시냇가 풍경(scene by the brook)'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고, 특히 두 번째 도막으로 넘어가면 '연애의 추억'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회상적이기도 하면서 매우 곰살궂은 음악. 이 악장은 여기서 한번 (감정적인) 클라이맥스를 이룬다고 봐도 좋다.

 

VAR. V. Allegro ma non troppo.

; 위풍당당한 기본 3성의 푸가토. 즉, 제3변주에 이어 다시 한 번 대위법적인 음악이다. 제4변주에서 한번 내용적으로 일단락되었다가 새 단락이 전개되는, '전환'에 해당하는 변주. 서둘지 않으면서 강력한 연주가 가장 좋지만, 'ma non troppo'는 혹 따르지 않더라도 너무 가벼우면, 힘이 실려 있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VAR. VI. Tempo primo del tema(처음 주제의 빠르기로).

; 음표가 점점 잘게 쪼개지면서 만들어내는 '점강법'- 강력하고 장대한 마무리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에선 다시 보다 선명하게 '전원(의 이미지)'로 돌아간다.

   우리보고 레슨을 하라면 큰 강가나 바닷가를 배경으로 하는 장엄한 석양을 떠올려보라고 할 것 같다. 태양이 수평선에 가까워질수록 하늘에도, 또 그것을 반사하는 물 위에도 햇빛이 이글거린다. 해가 물에 잠겨갈수록, 곧 날이 어두워질수록 그 일렁임은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마침내 완전히 해가 삼켜지고 나면 이제는 '별의 시간', 빛의 일렁임은 도로 하늘로 올라가서 'evening star' 금성을 필두로 속속 하늘을 채우는 쏟아지는 별빛들로 마무리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앞서 1악장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베토벤의 의도는 햇빛과 강물과 부서지는 별빛이, 이 장관이 내게 주는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지, 빛과 물소리 그 자체를 묘사하라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엔 주제가 다시 한번 반복되면서 마친다. 첫머리에서 제시될 때와 똑같이 노래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해서 표나게 달리 연주하는 선택도 일리가 있는데, 이 음악은 '수미상응'으로 살짝 미묘한 변화만 주어서 단정하게 처리하는 경우도 많다. 어떻게 할 것인가는 연주가 본인이 결정해야 할 몫.

 

   마치기 전에 이 3악장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해석의 주요 문제 중 하나는 바로 같은 변주곡 형식으로 된 32번(c minor, Op. 111) 2악장과의 대비이다. 우리가 전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최후의 3개 소나타'들은 처음 출판 제안이 오고가기 시작할 때부터 한 묶음으로 기획이 된 것이다- 즉, 3곡이 '한 세트'인데다 같은 종악장에 같은 형식인데, 과연 천하의 베토벤이 똑같은 걸 2번 했을까? 그렇담 반드시 ‘차별화’가 필요해 보이지 않는가?

   게다가 (적어도 20세기 초중반 이후로는) 이 3곡이 한 리사이틀 프로그램으로- 더해서 앵콜로 바가텔(Op. 126) 몇 곡 정도 해주면 금상첨화로, 좀 짧지만 아주 훌륭한 프로그램이 된다- 혹은 한 장의 CD로 종종 묶인다. 곧, 실연이건 음반이건 한자리에 앉아서 같이 듣게 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피아니스트들도 자연히 늘 차별화를 의식해서 연주할 수밖에 없는 것. 보통 32번 2악장 아리에타(Arietta)가 더 관조적인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피아니스트들은 이 30번 3악장은 액센트도 더 강하게 넣고 빠른 템포로 가고, 반면 아리에타 쪽이 더 역동적인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피아니스트들은 이 곡은 아주 조용하고 명상적으로- 내지는 심지어 다정하게-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견해는 이 문제를 '2개의 변주곡의 차별화'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역시 '주제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풀린다는 것이다. 이 3악장의 주제인,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 속으로 들어온 인간에게 산과 들판이, 숲과 시내가, 그리고 계절과 시각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들이 불러일으키는 주관적인 감정과 회상,  연상들과, 32번 아리에타의- 베토벤이 '에로이카'에선 미처 표현하지 않은- 영웅의 가장 깊은 내면적 고뇌와 갈등, 그리고 구원(의 추구)는 음악의 감정적 내용이 전연 다른 것이다.

   이렇게 표현되는 감정이, 주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안다면 형식상의 공통점은 보다 부차적인, 개의치 않아도 되는 부분이 된다. 반대로 이 음악들의 전체적인 내용이 뭐라는 걸 감을 잡지 못하고 두 변주곡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변주들에 매몰되어 있을 때는, 더욱 '차별화'를 의식하게 되지만 외려 그 목적에선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작품을 '베토벤의 후기 전원소나타'로 이해한다면 이 음악을 둘러싼 '미스테리'들도 상당한 부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긴다. 해서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관점이 베토벤의 의도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단지 우리가 피아니스트가 아니기 때문에 이 아이디어를 손수 입증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To be concluded...

 

  1. 쉬프는 2004~6년에 런던 위그모어홀(Wigmore Hall)에서 8회에 걸쳐서 베토벤 소나타 32곡 전곡의 '강의 리사이틀(lecture recital)'을 했다. 우리가 보기엔 음악학자나 평론가들이 쓴 해설보다 훨씬 내용이 좋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한번 들어보기를 권한다. 이게 위그모어홀 팟캐스트(podcast)에도 있고, 가디언(Guardian) 홈페이지에도 있는데 같은 음원이다. 구글에 ‘andras schiff beethoven lectures’ 정도 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이현욱
:

Beethoven piano sonata No. 30 in E major, Op. 109

 

 

I. Vivace ma non troppo.

II. Prestissimo.

III. Andante molto cantabile ed espressivo(Gesangvoll mit innigster Empfindung).

 

(코로나 때문에 2020년 공연계는 문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났다. 안타깝지 않은 사정이 없겠으나, 무엇보다 아쉬웠던 점은 작년이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었다는 것- 에머슨 현악사중주단의 베토벤 전곡 시리즈를 비롯해서 좋은 레퍼토리가 많았는데, 물론 거의 전부 취소되었다(에머슨은 올해 6.1~6일로 다시 예정은 되어 있지만, 성사를 장담하긴 어려워 보인다). 우리도 공연을 다니면서, 또 다니기 전에 음반을 좀 들으면서 후기 현악사중주 중 2~3곡, 그리고 가능하면 최후의 피아노 소나타 3곡까지 커버를 해볼 계획이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흐지부지되어버렸다.

   하여 이런저런 사정으로 해가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이 한 곡은 준비를 했다. 3곡 중 나머지 2곡(31/32번)은 사망 200주기가 든 2027년 한으로 미룬다.)

 

(i) 작품개요

; 1820년작. 해서 말하자면 작년이 탄생 200주년이었던 작품. 다만 베토벤이 베를린의 출판업자(Schlesinger)에게 초고를 넘긴 게 1821년 3월 이전이라는 것까지만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손을 좀 봤다고 하면 완성은 1821년 초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고- 우리가 아는 한은- 언제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실제 출판은 1821년 11월.

   상기 출판업자와 처음부터 3개의 소나타를 계약을 해서, 바로 뒤를 이어 31번(1821년)/32번(1822년)이 완성이 된다. 그래서 이들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로는 마지막 작품들이 되는데, 1820년대 베토벤이 '확장지향적인 혁신'을 추구한 것은 교향곡과 현악사중주이고, 피아노 소나타에서 이에 상응하는 마지막 대혁신은- 우리가 예전에 커버한- '함머클라비어(1817~18년)'이다. 이 최후의 3곡의 혁신이라면 외려 간결함과 압축의 '덜어내는' 미학.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이쪽이 더 '혁신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의 견해로는 이 3곡의 가치, 혹은 의의는 형식보다는 내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베토벤의 중기 내지 '본격 베토벤'으로의 돌입은 단연 교향곡 3번 '영웅(Eroica)'부터지만, 후기에 있어서는 이 3개의 피아노 소나타들이 합창교향곡(1824년)이나 후기 현악사중주(1825~26년)들과 함께 베토벤 예술의 정점을 이룬다.  즉, 음악의 내용적인 면에서 베토벤이 새로운- 그리고 결과적으로 최후의- 단계로 올라서는 기점이 되는 작품들이 바로 이 최후의 3개 소나타들인 것이다.

(베토벤의 중기는 '에로이카'가 거의 기점인 동시에 정점이고, 이후 다채로운 작품 세계가- 운명/전원/라주모프스키/발트슈타인/열정/첼로소나타 3번... 등등- 펼쳐진다. 그에 비해서 후기는 확실히 구분짓기 어려운 다년간의 탐색기를 거쳐, 1820년부터 드디어 한 꺼풀 벗고 상기한 걸작품들을 생산해내기 시작한다는 양상의 차이가 있다. 곧, 형식적인 면에서는 이 마지막 소나타들은 상기한 '함머클라비어' 뿐 아니라, 그 이전의 첼로 소나타 4/5번(Op. 102-1/2; 1815년)과 피아노 소나타 28번(Op. 101; 1816년)에서 이미 상당 부분 시험했던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물론 더 완성도 높게 가다듬어서- 보다 새롭고 깊이 있는 내용을 담아낸 작품들로 보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다.)

 

   다음으로 이 작품을 해석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열쇠이자, 이해의 핵심은 이 곡이 '후기 전원 소나타'라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 '후기'를 붙인 이유는 물론 '전원'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소나타가 이미 한 곡(15번, D major;  Op. 28)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전기) '전원' 소나타는 출판업자의 작명이지만- 음악의 내용과 제법 잘 어울리는 잘된 작명에 속한다- 저 유명한 '전원 교향곡(6번, F major; Op. 68)'은 베토벤이 직접 독어로 악장마다 표제를 붙인 공식적인 '자연 음악'이다. 공교롭게도 전자는 초기의 피아노 소나타군을 마감하는 곡이고, 후자는 중기를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이기 때문에, 베토벤은 시기별로 한 곡씩 '전원'을 주제로 작곡한 셈이 된다(이 글의 주제가 되는 곡이 마침 조성이 E major니, 베토벤의 'DEF' 전원 음악이라고 외워도 좋겠다.).

   물론 베토벤은 중기의 전원 교향곡에서 이미 이 음악은 ‘그림’이라기보다는 ‘느낌’의 표현이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고,  후기의 이 작품에 오면 더 주관성이 강한 느낌의 표현과 (비유하자면) '추상화된' 자연을 들려준다-  이 곡엔 새소리(의 모사)라거나, 들으면 쉽게 시내나 폭풍우를 연상할 수 있는, 보다 객관적이고 직접적인 묘사는 없다.

   그러나 변주곡 형식인 3악장의 주제는 전원교향곡의 5악장 '목동의 노래(Hirtengesang)'과 찬송가(hymn)적인 단순함을- 그리고 기본적인 정서를- 공유한다. 그 앞의 2악장 역시 전원교향곡의 앞선 4악장의 '폭풍우'의 절제되고 추상화된 감성으로 볼 수 있다- 자연은 평화롭고 목가적이었다가도 한순간에 광포하게 돌변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이 '천둥번개' 혹은 '폭풍우'를 늘 놓치지 않는 것이 베토벤이 자연의 본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1악장의 '미스테리'함을 관통하는 건, 무엇보다도 '물의 이미지'다.

 

   이 작품이 '후기 전원'이라는 이름을 쉽게 얻지 못한 데는 상기한 보다 주관적이고 추상화된 표현 방식 외에도, 이 곡이 베토벤의 최후의- 곧 '심오한'- 3개 소나타에 속한다는 사실에도 부분적인 원인이 있다. 즉, 이 소나타들에 접근할 때는 왠지 뭔가 종교적이고, 철학적이고, '깊은 정신적 고뇌'를  담고 있다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만 같은 선입견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이 30번의 경우에도 이런 요소들이 다 들어있는 건 맞는데, 작품 전체의 영감이자 주제는 '전원'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않고 이쪽으로만 몰아가면, 그야말로 나무만 보고 숲을 놓치는 것이다.

   대자연은 모든 예술의 원류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는 '고급진' 안목이나 별도의 교육이 필요치 않다. 산골에 핀 복사꽃의 아름다움을 미술사학자가 촌부보다 더 잘 느끼거나 이해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또 나이와도 관계가 없다- 좋은 산수가 사춘기에만 자극과 영감을 주고, 나이가 들면 별로가 되진 않는다. 외려 이 최후의 3개 피아노 소나타가 '전원'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는, 베토벤의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할 것이다.

 

 

- 1악장; 소나타 형식. '간결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소나타 형식의 필수요소만 들어있는 악장. 제1주제가 딱 8마디 반 정도- 못갖춘마디로 시작한다- 진행이 된 다음에, 바로 제2주제(Adagio espressivo)가 훅 치고 들어온다.

   이렇게 급박하게 제2주제가 들어오면서 박자(2/4-> 3/4)와 리듬이 모두 바뀌고 빠르기(vivace-> adagio)의 변화도 극단적이기 때문에, 악보를 눈으로만 읽는 음악학자들은 ('비주얼상') 충격적인 대조로만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악보를 ‘귀’로 읽는 연주가들 중에선 상대적으로 보다 제1주제와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견해도 없지 않다. 그리고 무려 만년의 코르토(Alfred Cortot)/박하우스(Wilhelm Backhaus)/켐프(Wilhelm Kempff) 같은 대가들이 이쪽에 가담하고 보면, 어느 한쪽 편을 들기는 쉽지 않다.

   일단 곡의 흐름을 더 따라가 보자면, 이 제2주제가 좀 발전하나 싶으면 코데타, 코데타인가 싶으면 거기서 발전부 개시, 계속 이런 식이다. 이 최고의 간결함은 발전부에서 재현부로 넘어갈 때도 마찬가지여서, 마치 작은 폭포가 쏟아져 내려 다시 시원의 고요한 못을 이루듯이, 클라이맥스에서 곧장 재현부로 이어지기 때문에 ‘표현의 경제성(economy of expression)’이라는 측면에선 이보다 더 뛰어날 수 없다- 그리고 듣는 순간 이건 천재가 썼다, 이렇게 중얼거리게 된다.

 

   사실 이 간결한 스타일은 베토벤이 이미 소나타 28번(Op. 101, A major) 1악장에서 시도한 수법이다- 소나타 형식의 최소한의 골격만 남긴 채로, 제시/발전/재현부 간에 확실한 구분선이 없이- 영어라면 문자 그대로 'seamless'하게- 마치 환상곡처럼 음악이 흘러간다. 심지어 28번의 경우는 제2주제조차도 '튀지 않고' 숨어 있고, 이것이 이 30번 1악장과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우리가 유추해볼 수 있는 가설은, 소나타 28번의 작업을 복기한 후에 베토벤이 소나타 형식을 완전히 버리고 환상곡을 쓸 게 아니라면 최소한 제2주제는 '여기'라고 명확하게 표시를 해 주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곧, (제1주제와의) '대조냐 연속이냐'의 문제는, '얼마나 확실히' 제2주제를 표시해주어야 하느냐의 문제로 치환된다. 이런 경우에 늘 그렇듯이 정답은 없고, 각자가 귀로 들으면서 적절한 정도를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부수적으로 빠르기 급변의 경우는 상기했듯이 발전부의 클라이맥스에서 재현부의 제1주제/제2주제로 '논스톱'으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이 제2주제에서 확실하게 한번 숨을 골라달라는 베토벤의 주문으로도 볼 수 있다. '안단테' 정도로는 흥분한 연주자들이 악보를 무시하고, 그대로 구분없이 달릴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 1악장을 이해하는 한 가지 열쇠는- 다양한 모습과 양태로 흐르는- '물'의 이미지이다. 우리가 위에서 발전부-> 재현부로 넘어가는 수법을 '폭포와 시원의 못'에 비유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니다. 사실 베토벤이 악보 첫줄부터 지시하고 있는 'sempre legato(언제나 레가토로)'는 당연히 악기로 물의 흐름을 묘사할 때 쓰는 상용 수단이다.(음악의 성격은 다르지만 이 곡처럼 E major면서, 동시에 한없이 이어지는 슬러(slur)로 물을 묘사한, 문자 그대로 20세기 피아노 음악을 '개시'한 유명한 작품이 있는데, 정답은 각주로 달아놓을 테니 피아노 음악 애호가라면 먼저 추측을 해보시길.[각주:1])

   이 악장의 큰 이슈 중 하나인 제1주제와 제2주제의 대조 역시, 이를테면 좁은 계곡을 타고 흘러내려오던 물이 탁 트인 평지를 만났을 때의, 그 흐르는 형태와 유속의 변화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달라진 심상에 비유할 수 있다. 비슷한 스타일로 작곡된 상기 소나타 28번의 1악장과 바로 비교해서 들어보면, 이 30번 1악장이 훨씬 완성도가 높다. 이것은 베토벤이 기술적인 면에서도 늘 발전하는 작곡가라는 점도 있지만, 우리는 28번이 그냥 낭만파적인 '무드 음악(mood music)'임에 반해서, 이 30번은 전원, 특히 '물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는 사실이 곡의 논리적 통일성과- 그 결과로서- 완성도에서 차이를 가져온 한 가지 원인이라고 추측한다.

 

   마지막으로 이 1악장의 뒤에 깔린 '스토리' 내지 '드라마 아닌 드라마'를 다시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이 될 것이다.

 

   발원지가, 어디서 시작했는지 모를 물길이 빠르게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내가 폭이 넓어지면 보는 이에게 또 전혀 다른 감상을, 감흥을 안겨준다.

   다시 흐름이  빨라지면서 (작은) 폭포가 되어 쏟아지는 순간, 하나의 소(沼)를 이루었다가 '무시무종(無始無終)', 도로 처음처럼 흘러간다.

 

   물론 베토벤이 들려주는 것은 실제 이런 장면들의 묘사가 아니라, 물가를 따라 걷는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감상과 추억과 같은 감정들이다. 'sempre legato'는, 그리고 악장을 내내 관통하는 독특한 리듬은 주제를, '물의 이미지'를 환기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To be continued...

  1. 답은 물론 라벨(Maurice Ravel)의 '물의 희롱(Jeux d’eau)'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이현욱
:
(ii) 녹음들

   이번엔 보다 ‘가혹한’ 기준으로 엄선한 녹음들. 부분적으로 언급할 만한 데가 있는 음반들은 더 있겠지만 과감히 생략했다- 그 기준이 뭐냐고 묻는다면 ‘테크닉’도 ‘학식’도 아니고 오직 ‘음악성’이다.(음원을 안 갖고 있어서 취급하지 못한 녹음들 중에  이 반열에 오를 수 있는 후보라면 우리가 아는 한은 호르쇼프스키(Mieczyslaw Horszowski) 정도밖에 없다. 옛날 VOX 음원인데 90년대 CD 재발매는- 'Vox Box Legends 2CD Set' 시리즈 중에 하나였다- 한국에는 누락이 되고 수입이 안되었고 이후로는 그림도 본 적이 없다.)


1. Annie Fischer- 1978

전체적으로 베토벤 음악 특유의 기세를 살리면서, 흐름(flow)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노래가 되는 기준선에 있는 녹음. 앞에 '여류' 따위 수식어가 필요없는 피아니스트는 클라라 하스킬(Clara Haskil)외엔-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처럼 '힘이 좋다'는 의미에서 '여류'라고 부르기 민망한 경우는 제외한다면- 이 피셔뿐이다. 다만 3악장은 부분부분 노래가 나오는 대목은 있지만 여기 녹음들 중에선 가장 밋밋하고 무거운 연주.

2. Sviatoslav Richter- 1975 live

이것은 말하자면 위 피셔의 '대조군' 격인 녹음. 바깥 악장들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중에서도 리히터가 여기는 '칸타빌레'라고 늦추지 않는 빠른 악구들은- 시원하지만 노래가 잘 되지 않는다.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 빠른 데는 호쾌하게 치고 '감정을 잡으려면' 늦춰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한다면 리히터의 스크리아빈을 들어보라- 거기서는 음악이 빠르거나 느리거나 관계없이 노래가 철철 흘러나온다. 결국 자기하고 코드가 맞는 작곡가가 따로 있다는 것이고 베토벤은 리히터가 완전히 동기화가 되지 않는 작곡가다. 반면 이 녹음의 강점은 3악장에 있다- 느린 템포에서도 마치 펜을 떼지 않고 한번에 도형을 그리는 것처럼 긴 호흡으로 끝까지 긴장을 유지시키는 엄청난 집중력이 리히터의 최대 장점. 이 거대한 아다지오를 지루하지 않게 칠 수 있는 피아니스트는 그렇게 많지가 않다.

(리히터는 1975년 딱 한 시즌만 이 작품을 프로그램에 올렸고, 그 해 라이브 녹음이 3개- 프라하/런던/올드버러(Aldeburgh) 페스티벌- 남아있는데 우리가 사용한 것은 프라하 녹음이다.)

3. Glenn Gould- 1970(CBC radio broadcast)

이것은 말하자면 ‘all-poetry’, 고급스런 베토벤. 1악장 첫 12마디는 여기 소개된 녹음들 중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음악이 진행이 되면 될수록 느껴지는 것은, 이를테면 베토벤의 '영웅주의'- 내지는 굴드의 관점에서 본다면 '소영웅주의'가 되겠다- 역시 베토벤의 일부이고, 이런 부분을 쏙 빼고 베토벤의 시적이고 고귀한 면만 들려주겠다는 것도 결국은 뭔가 불만족스럽다는 것. 어떤 의미에선 아래 소개된 박하우스나 제르킨은 베토벤의 '안 고급스런' 부분도 품이 떨어지지 않게 자연스럽게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베토벤 피아노 음악의 대명사인 것인데 굴드는 성향상 잘 되지 않는다. 역시 아름답지만 기질상 잘 안 맞는 것은 3악장도 마찬가지여서 때로는 '쇼팽스럽기'까지 한 낭만주의는 굴드의 체질이 아닌 탓에 약간 딱딱하게 들린다. 하지만 4악장은 여기 소개된 녹음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최고의 연주- 굴드는 아마도 녹음이 남아있는 역사상 푸가 형식에 가장 정통한 피아니스트이고 이 복잡한 푸가를 가장 명료하게 들려준다. 3개 이상의 성부에서 진행되는 멜로디를 동시에 진행시키면서 어느 한쪽을 희생시키지 않고 강조할 부분을 강조해주는 능력도 타고났지만, 푸가는 언제나 양손이 동시에 노래하고 있지 않으면 이렇게 아름답게 연주할 수가 없다.

4. Arthur Schnabel- 1935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1악장은 베토벤의 '불가능한' 메트로놈 지시에 가장 근접한 녹음. 하지만 슈나벨은 틀린 음표를 치더라도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지금이 가는 길 중간 어디쯤인지도 다 알고 있다- 라이브에서 빨리 치다가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음악의 극적인 구조와 균형이 무너져내리면서 삼천포로 빠지는 햇병아리 피아니스트가 아니라는 얘기. 자꾸 틀린 음표를 누르는 것이 전부 다 들려서, 귀에 너무 거슬려서 이 녹음을 못 듣겠다면- 우리 귀에는 큰 '삑사리'들 말고는 잘 안 들린다- 문자 그대로 '아는 게 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3악장은 꿈결같고 환상적인 연주, 이것은 거의 슈만의 세계다. 이 음악을 해석하는 한 전형을 제시해주는 녹음이고 우리가 아는 피아니스트 중에는 이 음악을 이만큼 환상적으로 칠 수 있는 사람은 알프레드 코르토(Alfred Cortot) 뿐이다- 그리고 코르토는 이 곡을 녹음하지 않았다. 4악장은 1악장과 비슷한 논평을 할 수 있는데, 곧 본인의 테크닉으로 감당이 어려운 속도지만 대신 음악적으로 충분한 보상이 있는 선택이라는 것. 슈나벨이 아니었다면 우리도 전문가들의 말을, 이 곡을 베토벤이 지정한 템포로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그대로 믿었을지 모른다. 단순히 메트로놈만 근접한 게 아니라 우리의 견해로는 베토벤의 의도, 이상을 가장 가깝게 표현하고 있는 녹음.

5. Wilhelm Kempff- 1965

보기 드문 베토벤 스페셜리스트. 사실 작곡가마다 개성이 다 다르기 때문에 대작곡가의 음악을 잘한다고 해서 그보다 못한 다른 작곡가의 음악도 저절로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대개는 베토벤의 대가면 슈베르트나 브람스, 혹은 위로 거슬러 올라가서 하이든이라든지 뭔가 똑같이 S급인 레퍼토리가 있기 마련인데 켐프의 경우는 베토벤 이외에는 딱히 같은 레벨에 있는 것이 없다. 여튼 베토벤만큼은 초일류- 거의 본능적으로 베토벤의 시를 이해하는 것 같이 들린다. 박하우스의 테크닉이나 제르킨의 리듬감각은 안 갖고 있기 때문에 이 곡처럼 부담스러운, 스케일이 큰 대곡에는 상대적으로 비교우위가 없지만 여기저기 도처에서 아름다운 구절을 많이 들을 수 있다.

6. Wilhelm Backhaus- 1952

1악장 첫머리 a는 역시 장대하게 시작하는 것이 좋다는 선택인데, 곧 b 후반부에서부터 살짝 가속을 시작해서 c는 '건반위의 사자'라는  별명답게 폭풍처럼 몰아치는, 우리가 들은 중에 가장 짜릿한 쾌감을 주는 처리- 이렇게 첫 세 구절에서 바로 볼 수 있듯이 구절마다 효과를 극대화하는, 푸르트벵글러를 연상시키는 교묘한 템포조절이 특징이다. 3악장은 감정의 과잉이 없는 절제된 스타일로 가장 잘된 연주- 비유하자면, 슈나벨의 3악장이 슈만이라면 박하우스는 브람스다. 고음에서 특유의 맑은 톤이 울릴 때의 그 짜릿한 아름다움은 한번 들으면 잘 잊혀지지 않는다. 4악장이 상대적으로 빠르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약간의 '트릭'이 있는데, 서주를- 라르고(Largo)가 아니라 거의 비바체(Vivace) 이상의 비례로- 굉장히 간결하게 당겨서 치고 주부는 1악장과 비례가 잘 맞춰져 있는 것. 원래 '무드 잡는 것'을 싫어하는 게 박하우스 스타일이기도 하고 과하게 템포를 당기지 않으면서도 비슷한 극적인 효과를 주는 노련함이라고 볼 수도 있다.

7. Rudolf Serkin- 1969~70

제르킨 베토벤의 최대 장점 중 하나는 탁월한 리듬감각과 셈여림의 조절(dynamics)이다- 토스카니니가 베토벤 교향곡 리듬의 교과서라면 제르킨은 피아노 음악 리듬의 교과서 격. 예를 들어 어떤 의미에선 베토벤의 스포르찬도(Sforzando)를 제대로 치는 건 제르킨뿐이다- 'Sfz'가 붙은 음표의 탄력도 탄력이지만 'Sfz'와 'Sfz' 사이의, 곧 강박과 강박 사이의 약박의 탄력과 그 대비는 다른 사람이 따라하기 힘들다. 악보에 더 표시할 수도 없고 어떻게 계량할 수도 없는 미세한 차이인데 우리의 추측으론 아마도 리듬감각이란 지문처럼 타고나는 것이리라는 것. 1악장은 여기 소개된 녹음들 중에서는 굴드 다음으로 느린 템포지만 기세나 흐름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템포를 당기거나 늦춰도 리듬이 무너지지 않으면- 예전에도 한번 같은 비유를 한 적이 있지만 '해상도'가 높아서 이미지를 확대해도 '깨짐'이 없으면- 무방한 것이고 상기 리듬감각이 말을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3악장은 제르킨 특유의 불꽃 튀는 연주- 베토벤의 지시어 ‘appasionato e con molto sentimento(열정적으로, 많은 감정을 넣어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는 스타일이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 열정을 내면화해야 한다고 판단하는데 들어보면 첫머리는 확실히 내성적(introspective)으로 시작하는 게 보다 그럴 듯 하지만 발전부에서 타오르기 시작해서 재현부에서 작렬하는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내는 데는 단연 이쪽이 효과적이다. 사실 이 3악장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감정은 적어도 슈나벨/박하우스/제르킨의 3가지 서로 다른 버전을 들어야 다소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세계. 다만 마지막 4악장은 아마도 이번엔 또 ‘risoluto(단호하게, 혹은 결연하게)’를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제르킨답지 않게 리듬이 약간 딱딱한 것이 단점. 이 음악은 리듬이 좀 탄력이 있어야 하는 음악이기 때문에 아쉽다(보다 탄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단단한 연주는 상기 굴드 녹음에서 들을 수 있다).


***


    이외에 녹음을 아예 남길 수 없었거나 사정상 남기지 못했지만 궁금한 피아니스트라면 단연 리스트(Franz Liszt)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박하우스의 스승이면서 19c 말~20c 초에 걸쳐서 베토벤 피아노 음악의 최고 권위자였던 오이겐 달베르트(Eugen d'Albert), 슈나벨이- 물론 자기 빼고 그 다음으로- 최고의 베토벤이라고 칭찬했다는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위에도 언급했던 최고의 낭만파 피아니스트 코르토(Alfred Cortot), 어쩌면 인간에게 불가능한 '완벽'이라는 단어에 가장 근접했던 리파티(Dinu Lipatti)... 그래도 우리는 아마도 우리에게 남겨지지 않은 것들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지금 갖고 있는 유산에 감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연주가/해석가들의 도움 없이 베토벤의 전기자료와 악보만 갖고 베토벤의 위대함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선호도; Schnabel>=Serkin=Backhaus>=Gould>Kempff>Fischer=Richter

해석의 삼각형; Schnabel/Gould/Richter


Posted by 이현욱
:
(i) 작품개요(~계속)
- 3악장;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들 중에서 가장 연주시간이 긴, 역시나 스케일이 큰 악장. 형식은 1악장에 이어 다시 한번 소나타형식이니까 내용이 주로 문제가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이 악장에는 형식/내용이 얽힌 문제가 있다.

   우선 음악의 내용적인 측면을 먼저 살펴보면 이 3악장은 종종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의 '시원' 내지는 '발원지' 비슷한 무엇으로까지도 언급되는 악장이다(이럴 때는 보통 작곡기법적인 문제, 이를테면 재현부의 연속 32분음표 장식음군(figurations)과 같이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 들어보면 정서적/감정적으로 확연히 낭만적이어서 고전파 음악에 정통하지 않은, 낭만주의가 장기인 피아니스트들도 이 3악장 만큼은 들을 만하게 치는 경우가 더러 있고 반대로 낭만주의까지 레퍼토리가 확장이 안 되는 경우는 유독 3악장만 연주가 조금 못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기법적인 문제를 넘어서) 낭만주의를 보다 폭넓게 볼 땐 물론 선행하는 사례들이 있다.
   베토벤 피아노 음악에선 이미 1816년의 28번 A major 소나타(Op. 101)부터 정서상 확연히 낭만적인데, 28번과 이 3악장의 낭만주의 사이엔 약간 미묘한 유형의 차이가 존재한다. 즉, 28번의 경우가 주관적인 느낌과 '무드(mood)'를 표현한다는 측면의 낭만주의라면 이것은 같은 주관적인 감정 표현이라도 시점이 달라져 있는 있는 음악- 비유하자면 3인칭 시점이 아니라 1인칭 시점이고, 같은 1인칭 시점이라도 독자/청중을 향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말하는, '내적 독백(interior monologue)'이다. 음악을 문학이나 문학 용어에 비유하는 것은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가 더 쉽기 때문에 바람하지 않지만- 이를테면 이게 무슨 제임스 조이스식 ‘의식의 흐름’의 음악 버전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큰일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경우는 우리는 달리 더 좋은 비유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여튼 내용 자체가 까다로운 음악이고 반대로 어떤 의미에선 베토벤의 동시대인들보다 평균적으로 자의식이 더 날카로와진 현대인들의 정신세계에 더 가까운, 시대를 앞서간 음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미묘한 '시점 이동'은 이후 베토벤의 후기 음악을 관통하는 것인데 그 기원은 1815년의 첼로 소나타 5번의 2악장이다. 베토벤을 어디까지 고전주의고 어디까지 낭만주의라고, 또 소위 베토벤의 '후기'가 언제부터 시작이라고 칼로 무 자르듯이 나누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대략 1814~16년 사이가 의미있는 과도기이고 뒷 세대의 낭만주의를 보다 확실하게 선견하는 음악을 쓰기 시작하는 시기라고 보면 큰 무리는 없다. 특히 1815년의 두 개의 첼로소나타(Op. 102의 1/2번)는 각각 막 언급한 피아노 소나타 28번과 1817~18년의 이 29번의 '프로토타입'에 해당한다. 나중에 첼로소나타 전곡을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그때 더 자세히 논하기로 하겠다.)
   한데 본격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피아노 음악에는 소나타 형식이 많이 쓰이지 않는다. 그들이 보다 자유로운 형식을 많이 취하는 이유는 베토벤보다 작곡의 '스킬'이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심지어 브람스조차도 베토벤은 고사하고 모차르트가 '주피터' 교향곡이나 마지막 피아노협주곡(27번) 1악장에서 보여준 만큼의 솜씨로 소나타 형식을 다루진 못한다- 꽉 짜인 형식은 자신들의 음악의 내용/정서와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소나타 형식은 감정을 극적인 구조(dramatic structure)를 가지고 기술/표현하는데 적합한- 베토벤이 특히 잘 활용한 점이기도 하다- 형식이다. 28번 소나타까지는 '간결한 환상곡풍의 소나타 형식' 정도로 정리가 될 수 있지만 이런 ‘내적 독백’엔 그렇게 잘 맞는다고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여기가 바로 내용과 형식이 얽혀서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통상적인 소나타 형식이란 내용적으로 제1주제/제2주제/코데타가 ‘직렬’로 연결된 한 도막이다. 부주제가 아무리 많이 붙더라도, 경과구가 아무리 길더라도 마찬가지이고 1부의 서로 다른 에피소드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 3악장의 소위 ‘제시부’는 대략 a(제1주제)a1-b(경과부)-c(제2주제)의 구조인데, a-b-c가 ‘병렬’로 연결되어 있다- 제시부 안에서도 이미 서로 어느 정도 독립적인 스토리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말이다. 즉, 모양은 소나타 형식이되 속은 이미 변질되어 있고 음악을 많이 들은 사람들도 재현부를 다 듣기 전까진 이게 '이중 변주곡(double variation)'이 변형된 형태이거나 '자유로운 3부 형식'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착오(내지는 미련)을 벗어나기가 힘들다. 베토벤이 이 거대한 악장이 지루하지 않게끔 단순한 반복을 피해서 제시부에서 발전부, 발전부에서 재현부로 넘어가는 연결도 굉장히 유연하고 특히 후자는 오른손에 붙는 심도 있는 장식음으로 변화를 많이 줬기 때문에 무척 재미있지만, 이미 제시부의 긴 경과부 'b'가 다시 재현되는 대목에 이르면 이게 음악의 내용 전개상 꼭 반복이 되어야만 하는 건지 약간 의문이 들고 코다에서 제2주제/1주제 악상들이 다시 들어오는 처리까지 다 듣고 보면 결국은 중복이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처음 구상할 때부터 소나타 형식을 고집하지 않고, 이를테면 그냥 '자유로운 3부형식' 정도로 처리를 했으면 음악의 내용에 더 적합하고 매끄럽지 않았을까?

   베토벤의 음악에 이렇게 내용과 형식이 서로 잘 안 맞는다는가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우리도 잘 모른다. 단지 2가지 요인을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첫째는 베토벤의 '실험정신'이다. 글 첫머리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작품은 피아노라는 악기와 피아노 소나타라는 장르의 한계에 도전하는 작품이다. 첫 악장은 규모가 확장된 소나타 형식이고, 마지막 악장은 그에 맞춰서 참신한 시도로 장대한 푸가를 넣는다. 그럼 중간의 느린 악장은? 베토벤은 첫 악장의 소나타 형식은 이미 '에로이카'에서 완성했지만 이 곡 이전에 느린 악장의 소나타 형식으로 좀 규모가 큰 것은 '전원'교향곡의 2악장과 '라주모프스키' 현악사중주(Op. 59-1~3) 1번의 2악장/3번의 3악장들 정도이고 모두 이 곡을 쓰기 근 10년전의 작업들이다. 즉, 늘 도전정신이 충만한 베토벤은 이번엔 느린 악장에서 소나타 형식을 확장하고 변형해서 바깥악장에 걸맞는 대형 악장으로 써보겠다고 마음먹었고 이 3악장은 그 결과물이라는 것. 둘째는 베토벤 본인이 뭔가 새로운 음악을 쓰고 있다는 걸 잘 의식하지 못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상기한 '시점의 차이' 같은 것은 내용적으로 미묘한 부분이다. 베토벤이 스스로 '내가 한 1815년부터 낭만주의 음악을 작곡했지'라고 생각했을 리도 만무하다. 자기가 계속 변하고 있다는 것, 작품마다 표현하는 감정과 내용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은 물론 알았겠지만 어느 순간 종류가, 심지어 '이즘(-ism)'이 달라지는 뭔가를 하고 있었다는 점은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즉, 자기가 상기 '라주모프스키' 2번 2악장보다 '성숙한' 음악을 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범주'가 다른 뭔가를 쓰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나타 형식의 확장으로 충분히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곡 이후 베토벤의 대작들(최후의 피아노 소나타 3개라든지, 후기 현악사중주나 '합창'교향곡들)의 느린 악장엔 (자유로운) 변주곡 형식을 많이 쓰고 소나타 형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본인도 애초의 기획대로 작품은 완성했고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지만, '이건 한번이면 됐다'고 생각했다는 간접증거일 수 있을까?


- 4악장; 역시나 기교적으로 어렵다- 리듬감을 살려서 깨끗하게 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처럼 들리는 것이, 치는 사람은 열심히 쳐도 듣는 사람 귀에는 뭔가 거슬리기 쉬운, 그런 까다로움이 있다. 해석적으로는 1악장과의 템포 밸런스가 지적해둘만한 점인데 요는 이 4악장을 몰아치는 강렬한 피날레로 만들고 싶다면 1악장은 상대적으로 더 빨리 쳐야 한다는 것이다. 1/3악장을 한껏 느리고 장엄하게 부풀려놓고 4악장을 빠르고 화려하게 몰아치면 이 거대한 곡 전체의 구조가 한쪽으로 기울면서 무너져내린다. 4악장은 1악장보다 같거나 느리게 칠 수는 있어도, 빠르게 치는 것은 베토벤의 의도가 아니라는 게 우리의 견해.
   형식적으로는 앞에 짧은 서주가 달려 있는 자유로운 푸가 형식인데, 라르고로 시작하는 환상곡풍의 짧은 서주는 토카타라고 부를 수도 있는 대목도 있어 복고풍 내지는- 즉, 바하의 'Toccata(or Fantasia) and Fugue'를 연상시키는- 의고풍으로 맞춘 것이 재미있는 점. 주부 알레그로는 대략 6개의 푸가가 사이에 연결부와 별도 주제의 전개를 끼고 사슬처럼 엮여서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베토벤은 내용적으로는 교묘하게 소나타 형식의 극적인 구조를 결합시켜 놓았다. 사실 감상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3성 이상의 푸가가 3분을 넘어가면 웬만한 사람한테도 헤어나기 힘든 '미로'- 대부분 처음에 주제를 좀 쫓아가다가 길을 잃기 십상이다. 이런 경우엔 '각개격파(divide & conquer)'가 그나마 이해하기에 쉬운 방법. 우리가 제시하는 최선은 내용상 크게 세 도막으로- 공교롭게도 한 도막에 푸가 2개씩이다- 나눠서 들어보라는 것이다.
제1부: 제1푸가는 일단 3개 성부에 한번씩 주제가 나타난다. 제2푸가는 주제가 2번 들어오고 나서 새로운 주제가 나타나는데 마치 소나타 형식에서 코데타를 이끄는 주제와 비슷한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주제로 '세미클라이맥스(semiclimax)'를 한번 만드는 데까지가 내용적으로 한 도막을 이룬다고 보자는 것.
② 제2부: 상기 '유사 코데타' 주제가 다시 한번 전개되면서 자연스럽게 제3푸가로 이어진다. 제3푸가는 제1푸가 주제의 '역행(retrograde; 다른 이름으로는 'cancrizans'라는 용어도 쓴다)'. 역행이라 함은 문자 그대로 '도레미파솔'은 '솔파미레도'로, 계명을 거꾸로 뒤집는 것. 처음 듣는 사람은 이게 장난이지 무슨 음악이 되겠느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된다- 실은 될 뿐 아니라 이 악장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 중에 하나. 마무리되면 다시 베이스에서 주제가 한번, 마치 제2푸가에서 빼먹은 한번을 채우듯이- 물론 굳이 이렇게 연관짓지 않고, 푸가 용어로 그냥 통상적인 주제의 '재입장(middle-entry)'으로 볼 수 있다- 들어온 다음에 제4푸가는 주제의 전회(inversion)로 만든다. '전회'란 말하자면 옥타브를 타고 올라가는, 상승하는 음형이었으면 반대로 하강을 시키는 것. '도-미-솔'로 올라갔으면 '도-라-파~' 방향으로 내려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3성부가 차례로 돌아간 다음에 두번째 세미클라이맥스를 이루는 데까지가 내용적으로 두번째 도막.
③ 제3부: 이제 음악이 고요해지면서 다시 새로운 부주제가- 엄밀히 말하면 주제에서 파생된 것이다- 들어온다. 제5푸가는 이 새 주제와 원래 주제의 단축형으로 전개하는 2중푸가이고, 제6푸가는 원래 주제와 제4푸가 주제, 곧 주제의 전회 혹은 자리바꿈형의 이중푸가인데 제2푸가에서처럼 2번만 돌아가고, 간주가 진행이 되다가 제1부에서처럼 고음부(tenor)에 주제가 들어오는 것이 '마무리신호'- 저음부(base)에 주제, 그 위에 전회된 주제로 '3번째'를 채운 다음에 주제로 3성 스트레토(stretto)가 작렬하면서 코다로 이어져서 마무리된다.
   위에서도 한번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렇게 세 도막으로 딱 끊어지는 구조가 아니라서 경계선에서 애매한 부분이 발생한다- 하나 이것이 이 악장의 극적인(dramatic) 구조를, 내용적인 큰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설명이다.


***

   이 곡이 완성된지 대략 60년 후인 1878년에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Human, All Too Human)’에서 '운명의 장난'으로 그냥 미완성작으로 남겨진 대가의 걸작들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이 작품을 베토벤이 남긴 ‘교향곡의 불완전한 피아노 축소판'의 한 사례로 언급한 적이 있다(니체는 음악을 굉장히 좋아했지만 베토벤을 아주 잘 알진 못했던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어쩌면 달리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바인가르트너(Felix Weingartner)가 관현악 버전을 만들기도 했지만 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음악은- 아무리 발상이나 스타일이 교향악적이라고 하더라도- 오로지 피아노를, 건반악기를 위한 음악이고, 만약에 피아노로 할 수 없다면 그 어떤 형태로든 완벽하게 연주될 수 없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이현욱
:

Beethoven piano sonata No. 29 in B flat Major, Op. 106 “Hammerklavier”

 

 

I. Allegro

II. Scherzo. Assai vivace- Presto- Prestissimo- Tempo I

III. Adagio sostenuto. Appassionato e con molto sentimento

IV. Largo(-Un poco piu vivace- Tempo I- Allegro- Tempo I- Prestissimo)- Allegro risoluto


(i) 작품개요
   이 곡은 어쩌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중 '최후이자 최고의' 작품이 될 수도 있었던 작품이다.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는 단지 베토벤이 죽기 전에 3개의 소나타를(Op. 109~111) 더 쓰고 죽었기 때문인 바, 그 결과 대작곡가의 ‘마지막 소나타’라는 후광 효과가 사라졌을 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꼭 최고라고 말하기는 논쟁의 여지가 있게 되었다. 여튼 일이 그렇게 된 것이 이 소나타의 책임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함머클라비어'가 마치 '에로이카'가 그전까지의 교향곡의 한계에 도전한 작품인 것처럼 피아노 소나타 내지는 피아노 자체의 한계에 도전한 작품이라는 것과, 그래서 베토벤과 피아노 음악 모두에 중요한 이정표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 1악장은 소나타형식. 교향곡까지 감안한다면 베토벤의 소나타 형식으로 가장 크거나 복잡한 악장은 아니지만 피아노 소나타들 중에서는 최대규모(사실 이 곡 전체가 베토벤의 전 32곡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최대작'이라는 타이틀은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악상 자체가 규모 혹은 볼륨감이 있어서 제1주제는 첫머리부터 피아노를 아무리 '내리 찍어도' 부족할 것 같은, 뭔가 버거운 듯한 느낌- 사실 '함머클라비어(hammerklavier)’는 단지 ‘포르테피아노(fortepiano)’를 의미하는 독일어이고 베토벤이 이미 소나타 28번(Op. 101)에도 사용했던 단어이지만 ‘해머’라는 단어의 어감, 즉 큰 쇠망치로 내려치는 듯한 그런 종류의 연상은 우리가 느끼는 것이나 유럽인들이 느끼는 것이나 비슷한 모양이어서 현재는 이 작품의 별명으로만 되어 있다.
   곡의 구조는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으로 맞춰넣는데 무리가 없는데 내용상은 시작하자마자 a-b-c로 짧게 세가지 악상이 이어지면서 마치 제1주제-제2주제-코데타를 단숨에 들려주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게 특색. 폭풍같은 c가 끝난 다음에 a가 다시 들어오면서 전개가 되고, 정식 제2주제가- 사실 b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구석이 있다- 나타나면서 이후는 정상적으로 코데타까지 간 다음에 제시부 전체를 한번 반복하게 된다. 제시부가 이와 같이 길고 악상이 다양하기 때문에 (특히 라이브에서는) 반복을 지켜주는 것이 좋다. 발전부가 상대적으로 간단하지만- 이 1악장이 제시부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 규모가 작아진 이유이기도 하다- 4악장에 상응하는 제1주제의 푸가토(fugato) 처리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도 '장대함'을 강조하려고 하면 리듬이 '절뚝거리는 것 같이' 들린다는 점이 유의할 점. 이 음악이 처음부터 장대한(grand, magnificent) 음악이 아니라고 본다면 문제될 것이 없겠고, 제시부는 혹 그렇게 봐도 무방하겠지만 발전부에 오면 음악의 성격이 내용적으로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이 악장의 해석에 있어서 가장 논할 것이 많은 부분은 '템포'이다. 흥미롭게도 이 곡은 베토벤의 32개 피아노 소나타들 중에서 유일하게 '알레그로' 같은 빠르기말뿐 아니라 작곡가의 메트로놈 속도 지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럼 베토벤이 지정한 그대로 치면 될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서 상당히 긴 논증을 필요로 한다.
   일단 먼저- 예전에도 한번 적었던 것 같지만- 우리의 템포에 관한 '일반 이론'은 '절대 템포'란 없다는 것이다.[각주:1] 템포란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다. 어떤 연주가 너무 느리게 혹은 너무 빠르게 들린다? '무엇'에 비해서? 그 기준이란 결국 우리의 머리속에 들어 있는- 때로는 제일 처음 들어서, 때로는 가장 많이 들어서 귀에 익은- 특정 연주의 빠르기일 뿐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어떤 곡을 통상적으로 연주하는 극단적이지 않은 평균 템포가 존재하지 않겠는가? 그것도 부분적으로는 올바른 관찰인데, 문제는 지금은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는 그 '평균' 템포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서 바뀐다는 것이다(그리고 공교롭게도 베토벤 시대 이후엔 한동안 계속 느려지는 방향이 대세였다는 것을 여기서 기억해두면 좋다.). 지금 시대의 평균 템포가 지난 시대의- 혹은 앞으로 올 시대의- 것보다 낫다거나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물론 없다. 그럼 악보에 적혀있는 템포란 아무 의미도 없는가? 있다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일단 기본적으로 작곡가가 악보에 지정한 모든 것은 해석의 출발점이 된다- 즉, '작곡가의 의도'를 추정하는 단서라는 말이다. 그 다음엔 각자의 음악적 판단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이 곡도 이 일반론에서 벗어나는 특수한 경우는 아니어서 상당히 넓은 폭의 템포 차이를 갖는 연주들이- 아래 (ii) 녹음들에서 볼 수 있듯이- 다 들을만 하고 음악적으로 말이 된다.
   그럼 도대체 뭐가- 아직도- 문제란 말인가? 그것은 얄궂게도- 즉, 베토벤이 지정한 템포로 그냥 연주하면 되기는 커녕- 작곡가 자신이 지정한 템포(2분음표= 138)로는 '연주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있기- 한때는 거의 전문가들의 통설이었고 지금도 '다수설' 정도는 되지 않나 싶다- 때문이다. 이 설은 19c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거의 추리소설을 방불케 하는-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괴도 토벤' 주인공의 '138의 비밀' 정도 되겠다- 흥미로운 역사를 갖고  있는데 한동안은 체르니(C. Czerny)가 '용의자'였고- 곧 문제의 숫자가 베토벤의 것이 아니라 체르니의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것은 암묵적으로 체르니는 제대로 된 음악가가 아니고 그냥 '핫바지'였다고 상정하는 것이 된다- 문헌상의 증거로 베토벤의 지시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된 다음에도 빠르기가 틀렸다,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사실 일반적으로 베토벤이 남긴 메트로놈 빠르기들의 정확성을 의심하는 이론이 많은데- 이쪽은 거의 용의자가 칠팔명 넘게 등장하는 '메트로놈 실종사건' 수준이다- 이 곡의 경우에는 제자 리스(Ferdinand Ries) 앞으로 메트로놈이 고장이 나서 정확한 빠르기 수치를 보내줄 수 없다는 내용의 편지가 있어서 메트로놈을 원인으로 지목하긴 어렵다- 메트로놈이 고장나서 빠르기를 못 보내고 있었다니, 응당 메트로놈이 수리가 되거나 새 것을 구입하자마자 지정하지 않았겠는가?(이 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베토벤의 메트로놈이 실제로- 혹은 더 바람직하게는 종종- 고장이 났었다는 증거로 해석하고 싶어하는데, 실상 더 중요한 점은 베토벤이 '메트로놈은 고장이 나는 기계'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외에도 베토벤 시대엔 메트로놈 자체가 부정확했다, 혹은 베토벤이 메트로놈의 빠르기 수치를 박자단위에 따라 바꾸는 환산을 하다가 계산착오를 했다, 아니다, 착오는 베토벤을 돕던 어린 조카 칼이 했다, 등등 많지만 상술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결론만 간단히 언급하자면, 이런 설들이 모두 처음부터 템포가 잘못되었다는 전제하에 만들어낸 설명으로는 그럴 듯 하지만 중립적인 입장에서, 곧 템포가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전제하에서 받아들이기엔 '소설'의 수준을 많이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보다 음악적인 반론은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에게서- 물론 동시에 '체르니 용의자설'을 유포하기도 했다- 나왔는데, 폰 뷜로는 베토벤/체르니 시대 피아노의 '부족한 울림(lack of sonority)'를 한가지 원인으로 봤다. 즉, 이 곡을 이후에 나온 그랜드 피아노로 이렇게 빨리 치면 소리가 왕왕 울리면서 겹쳐서 명료하지 않게(blurring) 들린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베토벤 시대의 악기/콘서트홀의 음향조건과 지금의 조건을 비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제한적인) 타당성을 갖는 접근법이다. 문제는 이 경우는 음악적으로 이게 정답인지 확실치가 않다는 것이다. 왜냐면 '주선율'만 듣지 않고 '화음'을 듣는다면 적어도 우리 귀엔 첫머리의 이 코드들은- 폰 뷜로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마치 여러 개의 종이 조금씩 시차를 두고 한꺼번에 겹쳐서 울리듯, 그렇게 울리라고 쓴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제1주제의 코드들은 단순히 '선율을 받치는' 식으로 쓰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이 모든 것들이,'용의자'들이 난무하는 설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가끔 전문가들이 집단적으로 '현실 부정'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가 그 사례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의 근본 원인은 이 속도, 2분음표= 138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정말 문자 그대로 '초인적인' 테크닉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너무 빨라보이니까- 그리고 자기들은 그렇게 칠 수 없으니까- 숫자가 틀렸다, 숫자에 책임을 돌리고 여러가지 구구한 이유를 찾고, 또 거기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내가 쳐봤더니 제대로 못 치겠다고 해서 숫자가 틀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지금까지 나온 어떤 피아니스트도 제대로 연주할 수 없었다고 해도 논리적으로 오류인 것은 마찬가지다. 알프레드 브렌델(Alfred Brendel)은 소시적에 '악마라고 할지라도' 그 빠르기로는 못칠 거라고 떠벌렸다지만- 진짜 악마가 들었으면 괘씸해서 잡아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악마도 못 친다고 치고) '피아노의 신'을 누가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베토벤이 지정한 빠르기에 거의 근접한 템포로 연주한 실증 사례가 존재한다. 아래 (ii) 녹음들  4. 슈나벨(Arthur Schnabel)의 1935년 녹음이 그것이다. 이 슈나벨 버전을 '성공한 사례'라고 볼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는데 우리의 견해로는 음악적인 면에서는 완벽하게 말이 된다는 데 논쟁의 여지가 없다. 이 슈나벨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취향의 문제'라는 변명은 가능하겠으나 단순히 어떤 연주가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려서 싫다는 것은 어리석고 비논리적인 선입견에 불과하다- 이미 위에서 '절대 템포'란 없다고 충분히 설명했다. '절대 템포'가 없다는 말은, 곧 '절대로 안되는 템포'도 없다는 말이다. 단지 귀에 낯설게 들릴 뿐인 것이고 편견을 버리고 들으면- 들을 귀 있는 자에게는- '노래'가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실패 사례'라고 주장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데 상기 슈나벨 버전은 듣기에 따라서는 전형적으로 '틀린 음표를 짚거나 음표를 빼먹는 옛날 녹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슈가 '연주불가능성'이니 차라리 2분음표= 138이라는 숫자가 틀렸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볼 수 있지 않는가? 그럴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음악적으로 말이 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보기보다 중요한 것이다. 테크닉은 정 안 되면 나중에 AI(인공지능)에 '로봇팔'을 붙여서라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음악적으로 말이 되지 않으면, 곧 그 템포에서 제대로 노래할 수가 없다면 애초에 그런 빠르기로 연주하는 의미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좀 황당하다, 혹은  너무 먼 얘기라고 생각한다면 아래와 같은 간단한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을 해보면 동시에 베토벤 당시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슈나벨은 테크닉으로 한몫 보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다. 폴리니(Maurizio Pollini)라면 같은 빠르기에서 완벽하게는 못 치더라도 적어도 슈나벨보다는 훨씬 더 정확하게 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폴리니에게 부족한 것은 테크닉이라기보담 이 빠르기에서 노래할 수 있는 음악성이다. 그렇다면 슈나벨의 음악성과 폴리니의 테크닉을 동시에 가진 피아니스트라면 의심할 여지 없이 슈나벨을 뛰어넘는, 아마도 지금까지 녹음된 어떤 버전도 뛰어넘는 연주가 가능할 것이다. '로봇팔'이 없이도 베토벤의 의도에 인간의 능력 범위 안에서 좀 더 접근해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빙긋이 웃음을 짓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또한- 우리 생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아마도 더 먼 미래에도- 실제로 이런 피아니스트가 태어나리라는 데에는 회의적이다. 그 이유는 물론 어느 한쪽만도 쉽게 태어나는 재능은 아니라는 것도 있고 테크닉과 음악성이 이렇게 완전히 별개로 잘라서 더해질 수 있는 것이라는 관점 자체가 오류라는 것도 있지만, 더 큰 것은 '서양고전음악'이라는 장르 자체가 이미 절정기를 지났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예술 장르도 사람에게 생로병사가 있듯이 태어났다 전성기를 지나서 점차 소멸하는 운명을 벗어나진 못한다. 천재들은 절정기에 몰려서 나타나고 곧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면서 뜸해지다가 결국은 완전히 사라져서 찾아보기 힘들게 된다. 하지만 베토벤은 자기 장르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는 와중에 살았던- 어쩌면 본인의 손으로 정점을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실제로 이후 베토벤보다 더 위대한 작곡가는 나오지 않았지만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도 연주 기술도 분명 베토벤 시대보다 진보가 있었다. 그러니 베토벤이 말하자면 이 '추세선'을- 나중에 실제로 일어난 것보다 더- 위로 연장해서, 한 50년이나 백년쯤 지나면 이 음악을 자기가 바라는 대로 완벽하게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상정했다고 한들 그게 그렇게 무리한, '황당무계'한 가정이었을까? 베토벤이 머리속에 설정한 이상적인 템포가 2분음표= 138이 맞다는 사실에 대해선 이제 더 이견이 없을 것으로 우리는 생각한다.


   위에서 템포에 관한 일반론을 이야기할 때도 잠시 언급했지만 물론 '숫자가 틀렸다'에 집착하지 않아도 음악적으로 다른 해석의 여지는 여전히- 그리고 폭넓게- 남아 있다. 이를테면 상기 폰 뷜로의 경우에도 사실 음향(acoustic)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고 너무 빠른 템포는 감정적/내용적으로 첫머리 제1주제의 '묵직한 에너지(ponderous energy)'를 표현하는데 적합치 않다는 것이 우리가 이해하기엔 반론의 핵심이다. 이후에도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에 동의했고 이것은 일리가 있다. 일반적으로 대작곡가의 작품일수록 그렇지만, 베토벤의 경우에도 한 사람이 한번에 다 표현하기 힘든 복합적이고 때로는 서로 상충하는 듯 보이는 면을- 시와 강력한 파워, 생동하는 기세와 영웅적인 장대함- 동시에 갖고 있어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그리고 템포는 그 다양성을 표현하는 주된 수단 중에 하나가 된다.). '작곡가의 의도'는 해석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귀착점이지만 그 사이가 '일직선'이라는 뜻은 아니다. 중간에 여러 다양한 경로가 있고 그 길을 더듬어 찾아가는 것이 바로 연주가 혹은 '해석가(interpreter)'의 몫이다. 그러나 음악적 판단으로 '2분음표= 92'를 선택한다는 것과- 전혀 '반역사적'이지도, 미학적으로 잘못된 판단인 것도 아니다- '2분음표= 138'은 틀렸다, 그냥 '베토벤의 실수다'라고 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비유하자면 '해석가'란 작곡가의 '사냥개'와 비슷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냥터에서 '목줄'이 안 매여있다고 해서- 이를테면 '악마'를 운운하면서- 아무리 세상 모르고 날뛰어봤자 사냥감을 물고 나서는 주인에게로 돌아가야만 하는 존재인 것- 결국 언제나 '주인(master)'은 베토벤이다.


- 2악장; 가운데 트리오(Trio)를 낀 ABA 형태의 통상적인 스케르초로 볼 수 있지만 트리오가 2단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 곧, 한발을 묶고 뛰듯이 살짝 엇박자로 진행하는 스케르초 주부의 리듬을 보상하는 듯한, 질주하는 섹션이 끼워넣어져 있다. 이 음악이 절대적으로 쉬운 건 아니지만 나머지 3개 악장이 워낙 중압감이 크다 보니 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상대적으로 '쉬어가는 페이지'처럼 여겨진다. 아마도 베토벤 역시 1/3악장 사이에서 뭔가 한번 숨을 고를 필요성이 있다는 의도가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 2악장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로는 18번(Op. 31-3) 이후 처음 등장하는 스케르초(인 동시에 '마지막’이라고 하지만 실상 그 정신은 30/31번의  ‘초간결 소나타 형식’의 2악장들과 공유하는 바가 있다).


To be continued...


  1. 물론 가끔 있어 보이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테면 모차르트 g minor 교향곡(40번)의 2악장 안단테는 음악적으로 일정 속도 이상 빨리 연주하면 안될 것 같이 들린다- 예술에 '절대적 법칙'이란 없는 법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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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0(월)~23일(목), 나흘에 걸쳐서 이반 피셔/로열콘서트헤보오케스트라의 베토벤 사이클, 곧 교향곡 전곡 연주가 있었다. 베토벤이 서양고전음악에서 차지하는 위치라든지 한국에서 이런 사이클의 희소성을 감안하면 올해 한국에서 열린 가장 중요한 문화적 이벤트 중에 하나였다고 말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아래는 날짜별 간단 리뷰.)

 

- 4.20; 1/2/5번.

   역시 좋은 오케스트라라는 것이 보통 가장 많이 긴장되는 첫곡, 첫악장부터 안정감이 있었다. 음악적으로는 5번 2악장이 노래가 제일 괜찮았다는 기억이고, 무엇보다 라이브 공연을 보러 간 보람이 있게 소리가 듣기 좋았는데 지휘자나 악단이나 음 하나하나를 고르게 만지는 능력은 없었지만 프레이즈(phrase)의 끝에서는 좋은 소리를 모아냈다. 오케스트라는 현악파트가 좋아서 저음현이 아주 탄탄했고 제2바이올린이나 비올라도 별로 밀리는 느낌이 없었다. 제1바이올린은 베를린필같은 세련미는 아니지만 관능적인 음색을 갖고 있어 듣기가 좋았다- 최근 상임지휘자 자리를 사임한 마리스 얀손스(Mariss Jansons)가 10년 이상 함께 이끌었던 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과 비교한다면, 바이에른의 제1바이올린이 조직력에서 밀린다고 할 수는 없지만 톤의 개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확실히 콘서트헤보쪽이 더 할 말이 있다는 얘기. 관파트쪽은 개인기가 아주 특별한 주자는 없었지만 우리가 바로 한달쯤 전에 들었던 LA필보다 앙상블 면에서 한수 위인 걸로 느껴졌다.

 

- 4.21; 3/4번

   이날은 4번 2악장이 제일 좋게 들렸고, 반면 3번 4악장은 가장 좋지 않았다. 특히 중간에 푸가토fugato 부분에서 각 성부가 아주 긴밀하게 맞아들어가진 못했다는 느낌- 템포도 충분히 여유가 있었는데 구조를 명확히 하지 못하니까 결과적으로 각기 '지방방송화'하면서 리듬만 늘어지게 들렸다. 전반적으로 4일간 공연 중에 이날 연주가 가장 안 좋은 편이었다(다만 우리가 예매를 일찍 못해서 자리가 날마다 들쭉날쭉이었는데 이날이 소리가 가장 안 좋은 위치였다는 점이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 4.22; 6/7번.

   음악적으로는 전9곡 중에서 이날 6번 '전원'이 가장 나았던 것 같다. 공교롭게도 2012년에 얀손스/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이 베토벤 2/3/6/7번을 들고 왔을 때도 6번이 가장 노래가 괜찮았던 기억- 같은 상임지휘자가 이끌었던 영향이 있을 수도 있겠고, 이 곡의 특성에서 이유를 찾는다면 이 '전원'은 베토벤이 친절하게 악장마다 이게 무슨 느낌인지 표제를 달아주었기 때문에 이게 어떤 감정인지 큰 그림이 파악하기 쉽다는 점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1악장의 표제는 '시골에 도착했을 때 즐거운 감정이 일어남'인데 도시생활에 찌들어있다가 경치좋은 시골에 가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베토벤시절보다 도시화가 엄청나게 진행된 오늘날에 사는 현대인들이 (연주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오히려 더 날카롭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5악장은 원래 표제가 달려 있어도 표현하기 어려운 음악이고, 이날 2악장은 시냇물이 좀 지루하게 흘러간 감이 없지 않았다.

피셔는 6번에서 목관을 쪼개서 수석들을 바순은 제1바이올린과 첼로 사이, 플륫/오보/클라리넷은 지휘자 바로 앞자리로 내렸는데- 나머지 한명씩은 원래 목관 위치에 남겨두었다- 우리는 목관이 한 칸 아래로 내려오면서 소리가 쌓이는 게 달라지는 것까지 들을 수 있을 만큼 세밀한 귀는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판단은 보류. 다만 시각적으로는 다소 혼선을 주는 게 사실이기 때문에 음악적인 이득이 확실해야만 보편적으로 다른 지휘자들에 의해서도 채택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사실 피셔는 재미있는 악기배치를 계속 실험했는데 콘트라베이스는 나흘 내내 악단 맨 뒤 정중앙에 있었고 앞서서 첫날 5번에선 4악장에만 쓰이는 트롬본 셋을 맨 뒤에 정중앙과 왼쪽/오른쪽 구석, 각기 한 명씩 벌려서 세웠웠다.).

   7번은 피셔가 갑자기 엑셀을 밟은 4악장이 특기사항. 우선 지적해야 할 점은 악장간 템포 밸런스가 조금 심하게 깨졌다는 것- 이게 ‘알레그로 콘 브리오Allegro con brio’라면, 3악장의 ‘프레스토Presto’는 뭐가 되며, 1악장의 ‘비바체Vivace’는 또 왜 그렇게 늘어졌던가? 전에도 몇번 언급했던 것 같지만 베토벤은 전체를 다 보는 작곡가기 때문에 각 악장마다 별개로 효과를 극대화하는 처치를 하면 좋지 않다- 즉, 4악장을 이렇게 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스토리를 다르게 전개했어야 했다는 얘기. 보다 중요한 2번째 문제는 속도를 빨리 하는 와중에 제1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제1주제부터 마치 음표가 줄어든 신스코어로 연주하는 듯한 느낌으로 음을 뭉개고 지나갔다는 것. 사실 우리의 견해로는 베토벤이 현대의 오케스트라를 봤다면 4/7번의 4악장은 템포 지시(4번은 Allegro ma non troppo) 자체를 바꿨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베토벤시대의 음악가들보다 20c 이후의 음악가들이 더 '음악적'이라고 보긴 어렵겠지만, 대체적으로 악기나 연주기술이 모두 더  빠르고 정확한 연주를 가능하게 하는 쪽으로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베토벤이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여지가 있는 템포 지시를 남긴 이유는 이 음악들이 그 '시대악기' 수준에서 음 하나하나가 고르고 명확하게 소리가 나기를 원했고, 또 그래야 음악이 살기 때문이라고 봐야한다는 의미이고, 그렇기 때문에 역시 베토벤의 의도를 충실히 지키기 위한 기본 전제는 어떤 속도를 선택하더라도 음 하나하나가 고르고 명확하게 나야 한다는 것이다.

여하튼- 우리의 견해야 어떻든 간에- 피셔가 가장 분명하게 자기 아이디어를 표현한 것도 아마도 이 7번이었고 청중의 입장에선 이렇게 자기주장이, 개성이 분명한 연주를 들려주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의미에서 6/7번을 합쳐서 나흘 중에서 이날 연주가 가장 흥미로웠다.

 

- 4.23; 8/9번.

   전반부 8번의 4악장은 엑센트를 뒤쪽에 주면서 묵직하게 끄는 느낌으로 어제 쾌속했던 7번의 피날레와 대조를 주는 선택이었는데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던 접근.

   9번에서 피셔는 현악편성을(8번까진 기본편성으로 제1-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베이스: 12-10-8-6-5를 썼다) 2~3명씩 늘렸는데 아마도 4악장에 들어올 합창에 대응해야할 필요도 있었겠고 1~3악장에서도 스케일이 커진 곡의 특성도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9번은 3번 '영웅'에 이어서 베토벤이 한번 더 도약을 한 작품이고 음악의 내용 뿐 아니라 사운드 자체도 8번까지와는 스케일이 다르다는 걸 라이브에서 조금은 느낄 수 있었는데 4악장에 합창이 들어오고 나서는 문자 그대로 ‘중구난방’, 독창자 4명도- 메조가 그나마 가장 음악적이었는지 모른다-  '노래'를 하기보다는 ‘샤우팅’을 하는 때가 더 많았다. '합창'교향곡이 정작 보컬이 들어온 다음엔 '떼창'교향곡이 되어서 끝났으니 아이러니. 베토벤은 기악과 성악, 혹은 기악/합창/독창의 비중을 적절하게 배분하고 완전히 활용해서 마지막 악장의 이 거대한 드라마를 만들었기 때문에 합창이 무너지면 오케스트라나 독창만 가지고 음악을 일으켜 세우기는 어렵다. 그래서 실력있는 합창단이 꼭 필요한 음악이고- 주최측에 물어본다면 물론 '비용 문제'라고 답하겠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다만 독창/합창단을 위해서 변명을 해준다면 이 곡의 난이도는 아마도 가수들이 기껏 고생해서 불러도 빛은 안 나고 욕만 먹는다고 기피하는, 그런 범주에 든다고 봐야 공정할 것이고 나흘 연속 공연은 보는 사람한테도 체력적으로 힘들었는데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전주에 똑같은 스케줄로 룩셈부르크에서 공연을 하고 날아왔다는데도 마지막까지 좋은 집중력을 보여줬다.

 

***

지휘자들과 오케스트라의 황금시대에 살았던 운좋은 사람들은 아마도 콘서트만 열심히 다니면 베토벤의 위대함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젠 그런 시대는 지난지 오래이고 베토벤의 진가를 알기 위해서는 진짜 마에스트로들의 옛 녹음들을 연구하는 것이 필수인 시대가 되었지만,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다고 해도 스튜디오 녹음이 ‘생음악’을 대체할 수는 없다- 레코드만으로는 베토벤의 ‘울림’을 다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꼭 필요했던 기획이고, 좋은 기회였다. 우리도 많은 것을 배웠다.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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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녹음들

(i) S

1. Arturo Toscanini/NBC Symphony Orchestra- 1953

1악장은 전기했던 'fast & furious' 진영이지만 빨라도 노래를 놓치지 않는다- 즉, 강력한 힘과 서정성을 같이 갖고 있다는 것이 토스카니니를 차별화시키는 최대 장점 중 하나(아주 다른 종류의 힘과 서정성이지만, 즉, '힘'과 '서정성'의 내용 혹은 종류는 다르지만 이것은 푸르트벵글러에게도 같이 적용할 수 있는 설명이다). 2악장 장송행진곡은 중도적인 스타일로 가장 잘된 연주. 제시부/중간부는- 아래 1939년 version에 비하면 특히 더- 절제되어서 들어온다. 발전부에서 처음엔 살짝 가속을 하다가 감정이 완전히 고조된 순간 감속을 해서 절정을 만들어내는 교묘한 템포 조절이 있고 이렇게 클라이맥스가 잘 만들어진 이후는 전환부/종결부까지 계속 음악의 흐름이 좋다. 3악장 스케르초의 현의 고무공같은 탄력은 최고, 따라하기 힘들다. 베토벤은 서양 고전음악에서 기악의 리듬을 혁신한 사람이기도 한데 토스카니니는 아마도 가장 리듬감각이 뛰어난 지휘자- 낡은 모노 녹음은 아무리 리마스터링(remastering)을 해도 소리가 많이 찌끄러져 있지만 리듬은 잔존하고 있기 때문에 교과서적인 모범을 보여준다. 지휘자가 우리 나이로 87세에 만들어낸 득의작.

2. Arturo Toscanini/NBC Symphony Orchestra- 1939

이쪽은 아직 보다 젊은 시절의- '젊을 때'라봐야 73세지만- 토스카니니. 취향에 따라서는 위 1953년 녹음보다 이쪽을 선호할 수도 있는데 드러나게 감정표현을 하는 것이 더 많고 또 NBC 교향악단은 초창기가 기술적으로는 더 낫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차이는 2악장인데 1악장 대비 충분히 느린 템포로, 감상적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토스카니니 특유의- 반드시 긍정적이지는 않은 의미에서 비평가들이 'Italian lyricism'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서정성을 강조하고 있는 연주. 사실 이미 1악장 첫머리부터 1953은 달라진 2악장과 궤를 같이해서 보다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노래로 개념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1/2악장은 절제되고 담백하게 다듬고 반대로 1939에서 강력하게 몰아치던 3/4악장은 보다 여유있고 노래가 더 나온다. 1953이 전체적인 밸런스와 품격이 좋아진 버전이지만 이것도 충분히 훌륭하다.

3. Wilhelm Furtwängler/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1944(“Urania”)

1악장은 푸르트벵글러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있는 두드러진 템포 변화를 잘 들어볼 수 있는 예의 하나. 왜 이렇게 바꾸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베토벤이 갖고 있는 '힘과 시(power and poetry)'를 다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극적인 효과를 살리는 가속과 느려진 부분의 노래가 다 좋다. 2악장 장송행진곡은 절대 서두는 법이 없고 발전부 클라이맥스도 두드러지게 대조를 시키기보다는 딱 필요한 만큼만 만든다. 종결부는 마치 영웅이 천천히 숨을 거두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처럼 음악은 느려지지만 감정적으로는 점점 엄숙해지는데 우리의 취향으로는 부분부분은 다 좋지만 뒤쪽을 이렇게 긴 호흡으로 끌고 가려면 그 앞에 좀더 강렬한 클라이맥스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3악장은 '베토벤의 스케르초가 이렇게 시적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연주. 4악장은 두번째 부분 푸가토에서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고 3번째 도막 'Poco andante'에서는 템포를 충분히 늦춰서 강조해서 노래한다- 앞서 작품개요에서 이 스타일은 우리의 취향이 아니라고 했지만 노래가 굉장히 아름다워서 별로 문제가 되는 것 같지가 않다.

4. Wilhelm Furtwängler/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1952(EMI studio)

푸르트벵글러도 이미 60대 후반에 접어들었고 '베토벤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겠다'는 듯한 50대와는 다르다. 1악장에 템포변화는 있지만 극적인 가속은 줄였고 강조를 위한 감속이 더 많다. 그래서 확실히 '유장하고 시적인' 스타일로 바뀌었고 아마도 이 스타일로 가장 잘된 연주- 가장 시적인 베토벤을 찾는다면 단연 푸르트벵글러다. 2악장은 큰 개념은 유사하지만 위 1944년 녹음보다 전체적으로 더 간결한 느낌으로 처리하고 4악장도 극단적인 템포 변화는 줄어들어서 'Poco andante' 이후를 보다 빠르고 간결하게 처리한 버전인데 노래는 그대로 좋다. 1944와 비교하면 1악장은 덜 재미있게 들리지만 사실 이하 2~4악장의 해석의 기조를 감안하면 1944의 1악장은 좀 튀기 때문에 전체적인 밸런스는 1952가 좋아서 일장일단이 있다. 만들어내는 소리는 전혀 다르지만 노년으로 접어들수록 보다 담백한 음악을 추구하는 것은 토스카니니와 공통적인 방향이고, 우리가 이 녹음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계속 진화하고 있는 대가의 음악이다. 

5. Carl Schuricht/Paris Conservatory Orchestra- 1959

슈리히트는 특별한 음악가- 마치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것처럼 지휘봉을 들기만 하면 그냥 노래가 흘러 나오는 것 같이 들린다(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이런 자연스러운 음악의 특성이 가장 빛나는 것은 2악장인데 전혀 감상적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감정이 풍부한, 슬픈 음악을 들려준다-  이만큼 연주할 수는 있어도 이보다 잘 연주할 수 없는, 그런 장송행진곡. 지휘자에 따라서는 꽤 거친 음악을 들려주는 이 오케스트라를 이렇게 노래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1악장은 'fast & furious' 진영이고 3/4악장 역시 1악장에서 잡은 개념과 밸런스가 맞춰져 있다. 템포와 관계없이 언제나 노래가 나오는 지휘자고 4악장 서주 부분에 약간 고색창연함이 있지만 귀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뭐라고 반대할 게 잘 없는 연주.

6. Otto Klemperer/Philharmonia Orchestra- 1959

1악장은 '유장하고 강력한' 스타일로 가장 잘된 연주. 속도나 음량을 앞세우는 게 아니라 느리지만 촘촘하게 소리를 빼먹지 않고 다 쌓아올려서, 그것들이 누적되어서 나오는 강력한 힘이기 때문에 한번 소리에 빠져들면 망치로 뒤통수를 때리는 정도가 아니라- 벅스 버니나 톰과 제리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상대방이 땅바닥에 완전히 파묻힐 때까지 망치로 내리치는 것 같은 충격을 준다. 2악장 장송행진곡은 힘있지만 절제되고 간결한 스타일의 표본(여기서 '간결함'의 기준은 앞선 1악장에 대비해서다). 3악장은 전체적인 밸런스를 맞춰서 서둘지 않고 트리오를 부드럽게 확실히 대조를 주는 스타일이고 4악장은 상기 ‘침착/치밀함’이 다시 한번 한마디 하는데, 특히 두번째 도막 푸가토의 구조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주면서 동시에 강력하다. 적어도 바깥악장들에 있어서는 베토벤 해석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한 연주.

 

(ii) A

7. Carl Schuricht/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1964 live

슈리히트가 50년대 말에 파리음악원 관현악단과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대부분 경쾌한 템포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선입견이 생길 수 있는데 이 라이브 녹음의 1악장은 느긋하게 노래하는 '유장하고 시적인' 스타일. 2악장도 궤를 같이 해서 진행하다가 발전부에서 격렬한 가속이 있다- 라이브에서는 효과가 좋았을 것인데 녹음으로 들으면 템포가 오가면서 약간 정돈이 안된 느낌. 해서 완성도는 위 녹음보다 조금 못할 수 있지만 훌륭한 음악가들은 같은 곡이라도 늘 새롭게 연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음반.

8. Otto Klemperer/Vienna Symphony Orchestra- 1963 live

전체적으로 큰 개념은 위 1959년 녹음과 거의 같다. 차이라면 오케스트라- 빈심포니는 빈필만큼 기술적으로 우수하지는 않지만 베토벤이라는 레퍼토리에 관한 한 '빈 기질'은 틀림없이 갖고 있어서 필하모니아하고는 색깔이 다르다. 특히 3악장은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연주된 것 같은 느낌. 클렘페러가 조금 차갑다고 생각한다면 한번 들어보면 생각이 좀 달라질 수도 있는 녹음.

9. Herman Scherchen/Vienna State Opera Orchestra- 1953

음악에 생기가 불어넣어져 있다는 것이 최대 장점- 위에도 적었지만 베토벤을 잘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 뛰어난 리듬감각인데 바로 셰르헨의 강점이기도 하다. 단점이라면 2악장 발전부의 가속이 아주 효과적으로 들리지는 않는다는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4악장 'Poco andante'에서 느리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1악장부터 좀 폭넓게 여유를 만들어두지 않고 마지막에 이렇게 들어오면 전체적인 밸런스가 깨진다는 문제- 다만 부분적으로 노래는 다 좋기 때문에 단지 '2%'의 단점인 것.

10. Lovro von Matačić/Czech Philharmonic Orchestra- 1959

스타일은 다르지만 음악에 생기가 있고 노래가 되는 또 하나의 녹음. 중도적인 범위 안이지만 셰르헨이 '중도좌파'라면 마타치치는 '중도우파'일 것이다- 보다 유장하고 힘있는 쪽. 2악장도 1악장의 흐름을 그대로 이어서 음악의 맥박을 일정하게 잘 유지하는 미덕이 있는데 다만 다채로운 드라마를 만들지는 않기 때문에 템포를 좀더 당겼으면 보다 효과적이었을지 모른다. 단점이라면 4악장, 'Poco andante' 이후는 노래도 되고 음악의 흐름이 좋지만 그 앞 부분들은 어떻게 노래해야 하는지 마타치치가 방침을 확실히 정하지 못한 것처럼 들린다. 

11. Leopold Stokowski/London Symphony Orchestra- 1974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을 노래하게 만드는 게 가장 어렵다고 본다면, 스토코프스키는 언제나 'S급' 지휘자- 한 등급 내려온 이유는 단지 베토벤이 스토코프스키가 장기로 하는 레퍼토리가 아니기 때문. 2악장 장송행진곡은 처음부터 안단테 느낌으로 시작해서 발전부에서 더 가속을 하기 때문에 클라이맥스가 되는 효과가 약하게 들리지만, 템포를 대조시키는 것 외엔 아무런 과잉이 없다- 93세의 지휘자가 이 음악에 대해서 찾아낸 최대한의 정직한 처치. 1악장은 '유장하고 서정적인' 스타일, 발전부 이하로 음악이 펼쳐질수록 흐름이 좋고 2악장을 징검다리로 3/4악장은 보다 경쾌하게 처치하면서 언제나 노래를 살리고 있다. 사실 정말로 '음악적인' 베토벤은 여기까지.

12. George Szell/Cleveland Orchestra- 1957

장점은 적어도 우리의 취향으로는 베토벤에 잘 어울리는 굉장히 좋은 소리를 만들어낸다는 것. 그래서 그냥 일정한 템포로 연주한다는 기분으로- 정말 똑같은 템포로 끝까지 연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좋은 소리와 흐름을 계속 이어가면 좋을 것 같은데, 셀은 뭔가 노래를 해보겠다고 개입해서 스스로 음악의 흐름을 뚝뚝 끊는데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 그래도 2악장은 제시부/중간부는 같은 문제를 갖고 있지만 클라이맥스는 탄탄하게 잘 만들었고 이후는 뒤로 갈수록 음악의 흐름이 좋다- 이 정도면 수준급. 셀로서는 생애의 녹음이라고 할 만하다.

13. Erich Kleiber/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1953

전체적으로 (A급에서는) 노래가 약한 것이 가장 큰 단점. 일종의 밸런스 문제인데 제1바이올린만 너무 노래를 시키고 다른 파트들은 마치 '화음'만 넣는 것 같이 들린다(대신 제1바이올린만 놓고 보면 이보다 잘된 연주도 찾기 힘들다- 베를린필도 잘하지만 이렇게 톡 쏘는 맛은 없다.). 하지만 언제나 베토벤에 충실하려고 애쓰는 정직함이 느껴지는 품이 높은 음악. 4개 악장이 다 수준이 고르고 1악장은 '빠르고 경묘한' 스타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iii) B

14. Felix Weingartner/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1935

연주를 공정하게 평가할 만한 수준의 음질은 아니지만 크게 보면 1악장은 'fast & furious' 진영이고 장송행진곡은 빠르고 간결한 터치로 지나가는 스타일. 전반적으로 빠른 패시지(passage)들은 음악의 기세나 흐름이 괜찮은데 느린 쪽이 색깔이 확실치 않게 들린다. 베토벤 교향곡 전집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15. Hermann Abendroth/Berlin Radio Symphony Orchestra- 1954

2악장은 처음엔 거의 'adagio affetuoso' 느낌이고 계속 직설적으로 감정표현을 하는 낭만적인 버전, 특색이 있다. 전체적으로 아벤트로트는 음악의 기세가 좋은데 다만 템포조절이나 강약 대비가 푸르트벵글러처럼 교묘하게 되지 않고 약간 거친 느낌. 연주는 이날의 방송의 첫 곡이었던지 1악장은 몸이 좀 덜 풀린 듯하고 3/4악장 쪽이 더 낫다.

16. Jascha Horenstein/Southwest German Radio Symphony Orchestra(Baden-Baden)- 1957

상대적인 비교우위는 2/3악장 쪽에 있는 녹음이고 2악장이 아이디어가 있는 연주. 4악장은 클렘페러 스타일의 느리고 치밀한 스타일인데 클렘페러보다 힘과 '해부학'에서 다소 열세로 들린다. 더 좋은 오케스트라와 더 좋은 환경에서 녹음할 자격이 있었던 지휘자.

17. Paul Kletzki/Czech Philharmonic Orchestra- 1964~1968(?)

연주는 'fast & furious' 스타일의 1악장이 가장 잘 되었고 체코필의 저력을 보여주는 솜씨. 2악장도 처음과 끝이 조금 너무 간결하게 처리된 느낌이 있지만 가운데는 발전부 클라이맥스라든지 괜찮은 처리. 다만 3/4악장으로 가면 밸런스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고 음악의 흐름이 잘 살지 않는다.

18. Franz Konwitschny/Leipzig Gewandhaus Orchestra- 1959~1961(?)

오케스트라도 좋지만 콘비츠니도 개성있는 자기만의 소리를 만드는 지휘자다. 1악장은 유장한 흐름이고 2악장은 1악장 대비 빠르고 간결한 스타일인데 절제라기보다는 그냥 자연스러운 천진함, 순박함이라서 감상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4악장은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한 질주가 균형을 조금 잃은 느낌.

19. André Cluytens/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1960

클뤼탕은 세밀하기보다는 큰 그림을 잘 그리는 지휘자고 클뤼탕이 지휘하는 베를린필은 카라얀이나 켐페가 지휘할 때만큼 음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연주하진 않는다. 그러나 2악장 장송행진곡이 그렇게 감상적이지 않으면서 극적인 구조를 살린 잘된 연주고, 전체적으로 정직하게 직선적으로 접근하는 베토벤.

20. Herbert von Karajan/Philharmonia Orchestra- 1953

2악장은 제시부/중간부까지 무난하고 발전부의 절정은 오페라틱하게 잘 만들었는데, 전환부 혼/트럼펫 강타를 강조한 이후부터 과하게 감속을 하면서 '후반전'을 만드는 음악의 흐름이 너무 인위적이어서 찬성하기 힘들다. 4악장이 음악의 흐름이 가장 살아 있고 필하모니아의 반응도 일사불란하고 침착하다.

21. Herbert von Karajan/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1984

가장 카라얀적인 베토벤. 베를린필의 연주도 가장 좋은 것이 애증의 30여년을 겪고 나서 이젠 카라얀이 원하는대로 노래가 나오는 것- 1악장에서 이것을 가장 명확하게 느낄 수 있고 노래도 가장 좋다.  2~4악장에서 '카라얀 엑스터시(Ecstasy)'는 확실히 들을 수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음악에는 어울리지가 않는다.

22. Sergiu Celibidache/Munich Philharmonic Orchestra- 1987

정서적으로 베토벤과 잘 안맞는 것은 카라얀과 마찬가지지만 이 곡의 경우는 첼리비다케 쪽이 더 살아있는, '촉촉한' 소리를 만든다고 평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들어본 가장 느린 에로이카지만 전체적인 템포 밸런스는 대략 맞춰져 있는데 마지막에 4악장 'Poco andante' 이후 늘어지는 것은 음악적으로 실익이 없이 좀 과하다.

23. Georg Solti/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1959

잘 연주되고 잘 지휘된 음반- 빈필이 원래 좋은 오케스트라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아무한테나 복종하는 오케스트라도 아니기 때문에 지휘자로서 솔티의 능력을- 혹은 이때는 잠재력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음악적으로는 약간 무색무취하고 각 악장별 처치에 집중해서 전체적인 밸런스가 깨져있는 편이지만 소리가 워낙 좋다.

24. Nikolaus Harnoncourt/Chamber Orchestra of Europe- 1990

'소리sound'는 새롭지만 음악적인 아이디어는 평범하다. 초반에 기세좋게 출발하는 것에 비해선 3/4악장이 너무 늘어지고 또 4악장은 소리도 어울리지 않게 너무 레가토 느낌이 많다-  '청개구리형' 지휘자. 사실 이미 여기쯤 오면 '포장'을 바꾸는 것 외엔 내용은 해석의 한계에 왔다는 징표로 보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25. David Zinman/Zürich Tonhalle Orchestra- 1998

이것은 '포장'을 넘어서 스코어를 갈아치우기 시작한 단계. 즉, 악보 자체가 다른 판본인데 세세한 차이는 전문가들의 영역이고 크게 우리의 귀에 들리는 것은 2가지- 우선 3악장 스케르초의 트리오 다음에 전반부를 통째로 반복하는 것은 별로 묘미가 없고 보다 흥미로운 것은 4악장 두번째 변주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거의  현악 각 파트의 수석들만 연주하는 듯한데 원래 여기를 현이 단체로 달려들면- 특히 수준이 좀 떨어지는 악단의 경우에- 뭔가 울림이 어설프게 들리는 느낌이 있는데 비해서 이것은 소리가 깨끗하고 또 이어지는 3번째 변주 혹은 오보에/클라리넷의 제2주제 다음의 오케스트라의 총주와 대조가 되는 효과도 좋다.

Posted by 이현욱
:

Beethoven Symphony No. 3 in E-flat Major, Op. 55 “Eroica”

 

I. Allegro con brio

II. Marcia Funèbre(Adagio assai)

III. Scherzo- Allegro vivace

IV. Finale(Allegro Molto- Poco Andante- Presto)

 

 

I. 작품개요

   이것은 서양 고전음악에서 처음 표현되는 감정이다. 1악장을 듣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혹은 어쩌면 범상치 않은 첫 코드부터- 이미 하이든/모차르트의 교향곡들과는 다른, 전연 새로운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i) 우선 하이든/모차르트에 비해서 한발짝 더 나아간 거칠고 격한 감정표현은 초연 당시의 청중들의 귀에는 승화되지 않은, '야한' 것으로 들렸지 모른다. 베토벤은 말하자면 서양 고전음악에서 ‘노출’의 수위를 높인 사람인 셈인데 물론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베토벤이 남긴 작품들은 다 그냥 '시'지만 지금 보면 하나도 야하지 않은 소설이나 영화가 처음엔 외설로 취급받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  브람스처럼 중용을 추구하는 작곡가도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무척 격렬한 음악을 남긴 것은 베토벤의 영향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ii) 이것은 자의식을 가진 인간이 (외부)세계에 대해서 가하는 일격 혹은 외침이다. 위 (i)만이라면 이것은 단지 표현방식의 차이, 혹은 표현 강도의 차이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처음 표현되는 '감정'이 아니라, 처음 '표현'되는 감정이 아니냐는 말이다(이것, 곧 '표현의 혁신'이라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리고 하이든/모차르트까지 내려오기도 전에 이미 요한 세바스찬 바하에 인간의 모든 감정이 다 들어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음악의 차이라면 '나'를 날카롭게- 아마도 거의 신경증적으로- 타인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분리해서 인식하기 시작한 인간이 느끼고 표현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즉,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감정 역시 다른, 새로운 종류가 되는 것. 이런 의미에서 서양 고전음악에서 ‘근대modern’의 기점은 베토벤이고  나중에 후기 피아노소나타와 현악사중주로 가면 베토벤은 이 날카로운 자의식을 가진 근대인의 내면적인 고뇌를, 내밀한 정신세계와 그 감정을 표현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iii) 베토벤이 여기에 써놓은 것은 장대한 서사시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음유시인의 버전에서 반주가 빠진 것이 아니라 반대로 거기서 언어가 제거된, 음악만으로 된 서사시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인물들도 사건들도 없지만 이 음악엔 '플롯plot'이 있고 기-승-전-결의 극적 구조가, 긴장이 쌓였다가 해소되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때문에 나폴레옹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음악에 온갖 표제를 갖다붙이려는 유혹이 끝이 없는 반면, 또 어떤 언어나 음악외적인 의미부여와 무관한 가장 우월한 예술장르로서 '절대음악'의 대표로도 역시 베토벤의 교향곡들이 내세워진다- 둘다 삼천포로 빠진 것은 매한가지지만 베토벤과 베토벤의 교향곡들의 위대함을 입증하는 증거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오라토리오도 오페라도 아니지만 질과 양, 양면에서 모두 그만큼의 내용(substance)를 담고 있고 우리는 별다른 과장 없이 이 에로이카가 교향곡을 서양고전음악의 핵심적인 장르의 하나로 온전히 확립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음악의 내용상 이보다 위대한- 그리고 어려운- 교향곡은 9번 '합창' 뿐이다. 5번이나 7번을 잘하는 지휘자들은 꽤 많다. 하지만 이 3번에 오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9번에 이르면 제대로 지휘하는 지휘자는 아마도 단 두명뿐이다.

 

   이제는 '표현의 혁신', 혹은 형식의 혁신 부분이다. 모든 탁월한 예술이 그렇듯이 이 작품도 새로운 형식만도 감정의 과잉만도 아닌, 새로운 감정과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그에 걸맞는 새로운 형식의 결합이다. 매 악장마다 베토벤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도입하거나 전통을 혁신한다: 

- 1악장; 소나타 형식이지만- 적어도 당시의 기준으로는- 가능한 한 최대로 확장된 것이다. 이 확장을 위해서 베토벤은 첼로가 바로 연주하는 제1주제와 목관이 연주하는 제2주제 사이에 ‘부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2개 더 넣고 있다. 이 부주제들을 잘 챙겨 들어야 하는 이유는 발전부에서 이것들이 남김없이 다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시부가 구조가 단순하지 않아서 한번에 듣고 파악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반복을 지키는 것도 일리가 있는데, 워낙 유명한 곡이고 길이 부담이 있기 때문에 생략하는 것도 유력하다. 발전부는 제1주제와 상기 부주제들이 서로 엮이고 변형되면서 클라이맥스를 2번 만들어 낸다. 그래서 이 발전부는 크게 3도막으로 나뉘는 셈인데 3번째 도막이 시작될 때 새로운 주제라고 볼 수 있는 멜로디가 나타나는 것이 특색 중 하나. 발전부 초반에 새 주제를 도입해서 전개시키는 것은 모차르트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이 주제는 재현부에서 제시부의 코데타(codetta)까지를 다 반복한 다음에 코다의 끝부분이 시작될 때 다시 등장해서 마치 발전부와 재현부의 마지막 큰 도막을 표시하는 '사인'처럼 기능하기 때문에 흥미롭다.

해석의 큰 갈래는 최소한 4가지다. 베토벤의 알레그로(Allegro)를 얼마나 빨리 해야하는지는 늘 논쟁거리이고 여기서도 예외가 아닌데 문제의 템포와 지배적인 정서를 기준으로 하면 각각  'fast & furious(빠르고 격렬한)'/빠르고 경묘한/유장하고 시적인(혹은 서정적인)/유장하고 강력한 스타일로 나눠볼 수 있다. 우리의 견해는 베토벤의 원래 의도는 상당히 빠른 쪽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인데 상대적으로 빠르게- 연주시간 14분 안팎 이내로- 연주했을 때 오케스트라의 서로 다른 파트들이 '메기고 받는' , 서로 주고받고 이어지는 부분이 울림이 더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테면 푸르트벵글러나 클렘페러가 이 곡을 빠르게 연주하지 않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느리게 연주했을 때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이 음악의 또다른 부분들, 성격들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곧, 좋은 울림은 다소 희생하더라도 '반대급부'가 있다는 것- 아니면 설마 이 대음악가들이 (당신의 귀에도 들리는) 이걸 들을 귀가 없어서 천천히 한다고 생각하는지? 결국 베토벤에는 이 네 가지가 다 있다고 볼 수 있다- 위대한 예술작품이란 늘 풍부한 해석의 여지를 갖고 있는 복합적인 것이어서 한 명의 지휘자가 한 번의 연주나 녹음으로 모든 걸 동시에 다 들려주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 2악장; 역시 거대한 길이나 감정의 진폭에서 그때까지의 교향곡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음악. 형식면에서는 3부형식을 축으로 한 변형이라고 보기엔 변형의 정도가 너무 크게 벗어난다. 론도 소나타에 더 가깝다고 볼 여지도 있는데 역시 잘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우리의 견해로는 그냥 음악의 내용 혹은 극적 구성에 따라서 아래와 같이 5단 구성으로 파악하는 게 음악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아래 대략 연주 소요시간을 참고삼아 적어놓았지만 굳이 시간을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감정의 변화에 따라서 도막을 쪼갤 줄 알아야 음악의 내용을 알고 듣는 사람이다.)

① 제시부; 주제를 제시하고 '대주제' 혹은 제2주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나온 다음엔, 현과 관이 서로 주제를 바꿔서 반복한다. 즉 대략 a-b-a-b 형태. 이 음악을 어떻게 볼 건지 개념을 잡아야 하는- 혹은 제시해주어야 하는- 부분이다. 연주에 따라서 대략 첫 4분10초~ 5분10초 사이 정도를 차지한다.

② 중간부; 이어지는 'c' 부분. 제시부와 감정적으로 대조가 되는 동시에 다음 발전부 이전에 잠시 긴장을 풀어주는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의 취향으로는 일정한 느낌을 주는 템포로 연주하든지, 아니면 템포를 바꿀 거라면 여기서 가속을 해야지 템포를 늦춰서 느리게 노래해서 대조를 주려고 하면 효과적이지 않다.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비유하자면 여기는 느리게 출발한 장례행렬이 빨라지는 지점이라면 몰라도 느려지는 지점은 아니라는 것. 길이는 대략 제시부의 절반 안팎이라고 보면 된다. 즉 연주에 따라서 2분~ 2분 40초 정도, 앞에서부터 누적으로는 6분20~7분40초 정도까지다.

③ 발전부; 첫 주제 a가 돌아와서 푸가 스타일(fugato)로 전개가 된다. 무엇보다 여기서 확실히 클라이맥스를 만들어주어야 하는 음악- 그래야만 마치 꽃봉우리가 오므라들듯이 결말이 잦아들면서 끝까지 음악의 흐름이 좋다. 반대로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이하 전환부/종결부가 단순한 반복, 재현에 가까워지면서 중복의 느낌, 음악이 지루해지기 쉽다. 소요시간은 대략 2분20초~3분 사이 정도.

④ 전환부; 푸가토가 일단락된 다음, 제1주제가 짧게 돌아온 후에 저음현/혼/트럼펫의 강타가 차례로 이어지면서 시작하는 부분. 약 1분 10~40초 안팎, 길어도 2분이 채 안되는 이 부분은 앞뒤로 잘라 넣을 수도 있지만- 그럼 4단 구성이 된다- 굳이 나눈 이유는 여기를 기점으로 마치 ‘전반전’과 ‘후반전’을 나누듯이 곡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지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카라얀이 대표적이다.

⑤ 종결부; 이미 위 전환부에서 'a' 주제가 다시 제시가 되어 있고 여기는 제1바이올린이 제시부의 ‘b’ 주제를 연주하는 부분부터 시작해서 끝까지다. 이 부분 안에 앞서의 중간부 'c'에 대칭되는 아주 짧은 'd'가 들어 있어서 사실 더 잘게 나눌 수도 있지만, 구조가 선명해지는 것보다 번다함이 더 큰 느낌.

해석의 갈래는 나누기조차 어렵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장송행진곡이니까 '슬픈' '행진곡'인 셈인데, 우선 얼마나 슬퍼야 하는가? 거의 '오페라틱'한, 감상적인 버전에서부터 담백하고 간결한 스타일까지, 그 사이에 넓은 스펙트럼과 '그라데이션gradation'이 있다. 너무 감상적이면 싸구려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만약 7번 2악장이 'marcia funèbre'가 아니라 그냥 ‘allegretto’라면 역으로 이건 그냥 ‘adagio assai’가 아니고 'marcia funèbre'라고 주장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행진곡 느낌은? 현이 연주하는 운명교향곡의 그것과 유사한 리듬을 강력하게 부각시키는 스타일부터 거의 '안단테 칸타빌레andante cantabile' 수준까지 다 있다. 위에서 교향곡 5/7번과는 달리 3번에 오면 잘하는 지휘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고 이야기했는데 대개 주로 이 2악장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눈물나게' 어려운 음악. 

 

- 3악장; 교향곡 1번의 3악장이 '미뉴엣의 탈을 쓴' 스케르초이고 2번 3악장이 ‘아직 미뉴엣의 흔적이 남은’ 스케르초라면 이것은 진정한 베토벤식 스케르초, 그 완성을 본 작품. 대신 구조는 중간에 트리오(Trio)가 끼워진 스케르초, 가장 간단하다. 해석의 갈래는 스케르초의 강렬한 리듬과 드라이브를 강조하느냐 유장하게 노래하느냐인데 결국 1악장을 어떻게 연주했느냐에 따라서 궤를 같이 하게 된다. 다른 이슈라면 트리오의 처치이고, 곧 확실하게 템포를 늦춰서 대조를 주느냐 아니면 그대로 달리느냐의 문제. 우리의 견해로는 적어도 1악장부터 템포를 빠르게 설정한 경우는 후자가 낫다는 것이다. 1악장과 마찬가지로 템포를 늦추지 않을 때 관악기간, 또 관과 현이 이어지는 '메기고 받는' 울림이 더 좋고 반면에 소리가 늘어지면서 얻는 '반대급부'가 이 경우는 확실하게 큰 것으로 들리지 않는다. 

 

- 4악장; 자유로운 변주곡 형식. 서주와 그것을 이용한 코다가 달려 있고 그 사이에 베토벤이 1/2악장의 스케일과 맞먹는, 그에 합당한 피날레를 위해서 의식적으로 심혈을 기울인 장대한 변주가 진행된다. 주제가 2개라고 볼 수도 있고 처음 제시되는 것은 주제의 베이스 부분만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역시 주요 멜로디를 기억한 다음엔 음악의 내용에 따라서 대략 3,4 도막 정도로 나눠서 파악하는 것이 낫다. 3도막으로 나눈다면 첫째 부분은 주제와 변주가 2개 정도 진행이 되고 나서 3번째에서 오보에/클라리넷으로 2번째 주제까지 온전히 다 제시가 되는 부분이고, 둘째 부분은 2악장과 마찬가지로 푸가토(fugato)를 사용해서 전개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Poco andante' 전까지, 마지막 셋째 부분은 'Poco andante'로 음악이 느려지는 부분에서 상기 코다 앞까지가 된다.

음악의 성격에 관해서 우선 언급할 만한 점이라면 베토벤을 고전-낭만주의에 걸친, 양쪽의 특성을 다 갖고 있는 작곡가로 볼 때 이 악장은- 물론 베토벤의 색깔이 더해져 있지만- 전곡에서 가장 고전적인 음악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이든/모차르트에 강점이 있는 지휘자가 이 악장도 (음악의 성격을 올바로 파악하기만 한다면) 잘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는 구석이 있고, 반대로 베토벤을 로맨틱한 관점에서만 본다면 이 악장에서 고전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이 음악을 까다롭게 만드는 또 하나의 포인트.

해석의 갈래는 1악장과 궤를 같이 해서 전체적인 밸런스를 맞춰야 한다는 점은 3악장과 마찬가지이고 역시 3번째 부분, 'Poco andante' 이하를 어떻게 보느냐가 가장 결정적인 갈림길이 된다. 이 부분을 2악장의 장송행진곡과 상응하는 이 4악장의 핵심, 클라이맥스로 파악하는 경우는 거의 '아다지에토adagietto' 수준으로 템포를 늦춰서 충분히 노래해주게 된다. 반대로 이 3번째 부분에 차별화된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액면 그대로 'Poco andante'로, 살짝만 느려지는 느낌으로 보다 가벼운 터치를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후자 쪽을 선호하는 편인데 이 4악장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one-climax'를 갖는다기보다는 'multi-climax'를 갖는, 자연스럽게 등고선을 그려나가야 하는 음악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가 2악장과 상응한다면 아마도  문자 그대로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짧은 회상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II. 녹음들

(약 40여종의 음반을 대부분 최소한 2번 이상 들었지만 이 곡은 아직도 적어도 '한 다스'는 더 포함시켜야 최소한의 리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녹음의 숫자가 워낙 방대하다. 하지만 우리의 호주머니 사정도 있고 폐반 혹은 절판된 것들은 언제 다시 구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것도 있기 때문에 우선 이대로 하고 나중에 기회가 닿는대로 보충을 해야할 듯 하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원래 별점 같은 것을 별로 신봉하지 않는 주의지만 이 곡의 녹음들은 어떻게든 정리를 하려면 '급수' 정도는 나누는 것이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S'는 우리에게 가장 충격을 많이 준 동시에 반복해서 들을수록 더 좋았던, 여운이 있는 녹음들이고 'A'는 역시 좋지만 S에 넣기에 뭔가 2% 부족한 느낌이, 요소들이 있는 것들. 마지막으로 'B'는 선호도를 기준으로 했다기보다는 뭔가 언급할 점이 있는 녹음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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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글은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 내한공연 리뷰 전에 올릴 계획이었는데, 블로그 초보라서 스킨, 글쓰기, 올리기, 뭐하나 착착 되는 게 없다보니 순서가 늦어졌습니다. 원래 취지는 공연 전에 프로그램 중에서 비교적 자주 연주되지 않는 곡목을 골라서 좋은 음반들을 소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공연 며칠 전에 편안한 마음으로 한번 듣고 가면 백가지 해설보다 감상에 더 도움이 됩니다.)

 

Beethoven piano concerto No.2 in B-flat Major, Op.19

I. Allegro con brio
II. Adagio
III. Rondo: Molto allegro

(i) 작품에 대해서:

 

● 이 작품은 실질적으로는 베토벤의 첫번째 피아노협주곡이다. 1795년 지금은 “1번”으로 되어있는 C Major Op.15보다 먼저 완성되고 초연되었지만, 두 작품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던 베토벤이 여러차례 고치기를 거듭하는 와중에 개정이 먼저 끝난 C major 협주곡이 먼저 출판되었다 한다.
● 모차르트의 그늘이 짙은 작품... 리듬과 하모니에서는 베토벤적인 특성이 나타나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모차르트 협주곡들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고, 내용적으로도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소나타형식을 따르고 있는 1악장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는 오케스트라와 독주피아노 사이에 주제들(thematic materials)을 어떻게 분배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협주곡들은 이런 점에서도 오페라틱한데, 오케스트라의 서주는 마치 오페라의 서곡과도 같이 전체 작품의 얼개를, 분위기를 다 보여주면서도 솔로 피아노의 몫을 잘 남겨놓는다. 여기서 베토벤은 이러한 모차르트의 스타일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모차르트처럼 깔끔하고 유기적으로 처리가 되기보다는 여러가지 주제들이 좀 산만하게 흩어져있는 느낌을 준다. (이는 두 작곡가들의 스타일의 차이 혹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장점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모차르트는 마치 마술사가 모자에서 끊임없이 토끼를 꺼내듯이, 새로운 멜로디를 자연스럽게 이어낸다. 발전부는 간결하게 처리되거나 제시부에서 제시된 주제 이외에 새로운 주제로 구성하는 것도 종종 볼 수 있다. 반면 베토벤의 상대적인 강점은 오페라틱하기보다는 드라마틱한, 기승전결이 탄탄한 구조와, 제시된 주제들를 풍부하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혹은 범인들은 상상해낼 수조차 없는- 가능성을 다 실현시키는 발전부에 있다.) 2악장 아다지오 역시 베토벤의 기준으로는 평균 이하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답지만 몇번 들어서 익숙해질 때까지는 다소 지루한 느낌도 들 수 있다. 3악장 론도는 구조적으로 제일 단순하고 멜로디도 가장 귀에 쉽게 붙는다.

(ii) 녹음들(피아니스트/오케스트라(지휘자)- 녹음연도 혹은 출반(release)연도순)

1. Emil Gilels/Paris Conservatory Orchestra(André Vandernoot)- 1957
길렐스는 1악장에서 베토벤적인 ‘con brio’ 지시를 살리기보다는, 서정성을 더 강조하는 접근을 선택한다. 해석에 맞춰서, 길렐스같은 강철타건의 소유자로서는 톤도 무척 곰살궂다.  다만 해석이나 톤이나, ‘절제’가 잘 되어있다기보다는, 그냥 ‘자제’되어있는 느낌이 더 짙다. 무엇보다 1,2악장에서 평균보다 느리게 노래하는 템포를 설정한 다음에 3악장에선 극적이고 화려한 마무리를 위해서 템포를 평균보다 늦추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악장 사이에 템포 밸런스가 무너져있다. 이런 류의 해석은 라이브에선 괜찮지만 집에서 조용히 감상하는 레코드의 경우에는 연주의 품이 조금 떨어지게 들릴 수 있다. 빠른 악장의 템포를 평균보다 빠르게 잡았으면, 느린 악장도 같이 당겨서 ‘역과장법(understatement)’의 효과를 노리는 게 옳고, 느리게 잡았으면, 마지막 빠른 악장도 같이 늦춰서 끝까지 노래하는 것이 옳다. Vandernoot와 파리음악원관현악단의 협주는 좋게 말해서 ‘거칠다’.
2. Emil Gilels/Cleveland Orchestra(George Szell)- 1968
1악장은 해석의 큰 틀에서 많은 변화를 보여주진 않는다. 다만 2,3악장은 거의 평균적인 템포에 가까워졌다. 약 10여년이 흐른 만큼 길렐스가 더 성숙한 부분도 있겠지만 협연자들 위에 군림하기 좋아하는 지휘자 셸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전성기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협주는 깔끔하다.
3. Wilhelm Backhaus/Vienna Philharmonic Orchestra(Hans Schimdt-Isserstedt)- 1959
박하우스는 베토벤만의 ‘con brio’ 분위기를 살리면서 서정성을 같이 살려낸다. 길렐스보다 템포를 빨리 잡지만, 더 노래가 살아있고, 고전주의의 틀 안에 있는 것 같지만 음악은 더 자유롭다.  아마도 가장 논란의 여지가 있을만한 것은 2악장 Adagio일 텐데, 박하우스의 템포는 Adagio라기보다는 Andante에 가깝다. 간지러운 것을 못 참는 박하우스는 베토벤의 느린 악장에서 평균보다 빠른 템포 선택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만 우리 취향으로는, 이 Adagio는 내용상 이렇게 간결하게 노래해도 충분해 보인다. 이세르슈테트가 이끄는 빈필은, 첫 서주부터 청중에게 쾌감을 선사한다. 이 작품은 베토벤의 기준에서 본다면 ‘범작’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베토벤은 이렇게 노래하는 것이라고 시범을 보이는 것처럼 살려낸다. 이 정도면 협연자와의 앙상블은 특별히 잘 맞춰주지 않아도 용서될 수 있다.

4. Wilhelm Kempff/Berlin Philharmonic Orcherstra(Ferdinand Leitner)- 1962 release
켐프의 해석은 주된 접근에서 박하우스보다는 길렐스에 더 가깝다. 다만 좀 인위적으로 ‘자제된’ 느낌의 길렐스 버전보다는 음악이 더 자연스럽게 흐르고, 감정을 표현한다. 이때의 베를린필은 이미 ‘카라얀의 베를린필’이고, 누가 지휘를 하더라도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낸다.
5. Claudio Arrau/Amsterdam Royal Concertgebouw Orchestra(Bernard Haitink)- 1964
이제와서는 이것도 ‘구식’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름 ‘모던’ 베토벤. 20세기 중후반의, 우리가 ‘카라얀식 미학(Karajan Aesthetic)’이라고 부르는, 그 스타일이다. ‘음악’은 아주 특별하다고 할 순 없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소리, ‘sound’들의 연속이 귀를 즐겁게 한다. 아라우의 풍성하고 모난 데 없는 톤은 라이브로 들었으면 얼마나 귀가 호사했을까 상상하게 만들 정도로 쾌감을 선사한다. 템포는 일관되게 느긋하다. 이런 말하면 화낼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의 견해로는 아라우의 장점은 진짜 명곡, 대곡보다는 살짝 B급스러운 작품을 명곡처럼 고급스럽게 들리게 하는 데 있다.
콘서트헤보는 물론 좋은 오케스트라지만 빈/베를린필을 연속으로 듣고 나면 만들어내는 소리에서 열세가 느껴진다. 콘서트헤보-하이팅크의 협주는 협연자가 쉴 때보다는 같이 연주할 때 부드럽고 성의가 느껴지는 점에서 빛난다.
6. Glenn Gould/Columbia Symphony Orchestra(Leonard Bernstein)- 1957
‘젊은’ 굴드가 ‘젊은’ 베토벤을 연주한다. 템포는 가장 빠르고, 그러면서도 물론 굴드답게 시적이다. 다만 다 듣고 나면 단조로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57년에 우리 나이로 26세. 나중에 다시 녹음했다면 또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들려주었을 것이다. 번스타인과 컬럼비아심포니는 여기서는 자신들의 장점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같은 CD의 3번 2악장에서는 ‘노래하는 오케스트라’임을 보여준다).
7. Rudolf Serkin/Philadelphia Orchestra(Eugene Ormandy)- 1965
제르킨은 길렐스-켐프 라인보다는, ‘con brio’를 살리는 박하우스 접근법에 가깝다. 박하우스만큼은 아니지만, 2악장 Adagio도 평균보다는 빠르다. 특징적인 것은 3악장이다. ‘Molto’는 ‘매우’로 번역될 수 있는, 빠르기를 강조하는 말이다. 즉 3악장 ‘Molto Allegro’는 통상적으로는 1악장 Allegro보다 더 빨라야 한다. 그러나 제르킨은 음악의 내용상, 그냥 무식하게 내달려서는 안되고, 베토벤이 ‘molto’를 붙인 이유는, 너무 위엄있고 당당하게 시작하려다가 템포가 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판단한다. Backhaus도 같은 의견인데, 제르킨쪽이 좀더 확연하게 느긋하다. 실제로 들어보면, 3악장 론도의 첫 주제를 너무 빨리 연주하면, 리듬의 무게감이 잘 살지 않는다. 해서 템포 설정 자체는 설득력이 있지만, 문제는 1악장은 물론 2악장 Adagio도 평균보다 템포를 당겨놓았기 때문에, 밸런스가 살짝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르킨의 가장 성공적인 녹음은 아니다.
8. Rudolf Serkin/Boston Symphony Orchestra(Seiji Ozawa)- 1984
제르킨이 1903년생이니까 80대의 녹음이다. 팔십노인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테크닉을 잘 보존하고 있지만, 터치가 약해진 것은 확연하다. 이 글에서 커버한 8개 녹음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그리고 아마도 인간이 들려줄 수 있는 한계내에서 이보다 더 아름답기는 힘든- 아다지오를 들려준다. 2악장 하나만으로도 일당백의 가치가 있다. 빨리 치기가 힘들어졌고, 해석도 살짝 바뀌었기 때문에 1,2악장의 템포가 3악장보다 느려진 정도가 더 커서 상기한 밸런스의 문제도 해소되어 있다.

● 선호도: Backhaus=Serkin(1984)>Arrau>=Serkin(1965),Gould,Kempff>2 Gilels
● 해석의 삼각형: Gould/Gilels(1968)/Arrau

(참고) 선호도는 당연히 주관적이고 들을 때마다 바뀔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수준에서 좋은 음반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리뷰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좋은 음반을 리뷰에서 빼먹는 일은 종종 일어나겠지만,  실린 경우는 본문에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모두 훌륭한 음악과 음악가들입니다.
(참고2) ‘해석의 삼각형’이란, 선호도와 관계없이 이 세 녹음을 들으면 이 작품에 대한 가능한 해석, 접근법들을 파악할 수 있다는, 즉 이 작품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법들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녹음들을 3가지 골라서 머리 속에서 ‘삼각형’을 구성해 보는 것입니다. 다른 녹음들은 이 ‘삼각형’의 범위 안에서, 서로 다른 접근법들을 절충한 것으로 위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녹음은 다 서로 다른 것이지만, 원래 ‘분류’라는 게 이해의 편의성을 위해서 어느 정도는 자의적으로 나누는 것임을 감안하면 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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