쾰른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석가출가도 연구초 5
공연/전시 review 2025. 5. 12. 17:17 |III. 4. 연산군과 인수대비
전편까지 관련된 역사 기록을 추적한 결과, 이 그림의 제작시기는 인수대비 사후, 즉 연산군대로 점점 좁혀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인수대비와 연산군의 사이가- 특히 말년에- 몹시 안 좋았다는 것이다. 고인의 추천을 위해서 다수의 불화와 금동불을 제작한다든지, 금자 사경을 한다든지 하는 일들은 모두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는 큰일이다. 한데 심지어 야사에는 연산군이 인수대비 가슴에 '피양 박치기'를 날려서 대비가 시름시름 앓다가 달포 뒤에 죽었다고 할 정도이니, 과연 연산군이 돌아가신 할머니 좋은 데 가시라고 성의껏 이런 불사들을 벌였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삼전(三殿) 중에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장례가 가장 성대했던 사람은 정희왕후이고, 인수대비의 경우가 가장 간소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상기 야사는 거짓이라 해도 연산군이 이복동생 안양군/봉안군을 잡아다가 야심한 밤에 인수대비의 처소를 찾아가서 패악을 부린 것이나, 대비가 승하한 다음에도 상복을 입기 싫다고 신하들한테 끝까지 억지를 썼던 것은 모두 정사에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나 연산군도 사람인데- 아무리 이 무렵엔 이미 사람을 무심히 죽일 만큼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고는 해도- 자기 친할머니한테는 애증이 교차하지 않았겠는가?
그냥 해보는 추측이 아니라 이와 관련해서 실록에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남아 있다. 인수대비가 승하한지 일주일 남짓 된 무렵, 연산군이 돌연 전교를 내려서 신하들에게 묻는다:
傳于政丞等曰: "大行大妃奠祭時, 予欲親自執爵, 於禮文何如?" 洵等啓: "執爵之事, 不載禮文。 故雖大王之喪, 亦不之行也。"
정승 등에게 전교하여 가라사대, "대행대비 제사 드릴 때에 내가 친히 술잔을 드리고자 하는데, 예문에 어떠한가?" 하니, 순(당시 좌의정 유순) 등이 아뢰기를, "술잔을 직접 드리는 일은 예문에 실려 있지 않은 고로 대왕의 상에도 행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대개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는 술 따르는 담당, 술잔 올리는 담당이 다 따로 있어 왕은 그냥 절만 하면 되는 법이다- 허나 이때가 벌써 왕 노릇 한 지 10년째인데, 연산군이 이걸 몰라서 물었겠는가? 눈치껏 알아서 적당한 근거를 찾아다 대지 못하고 이렇게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정승들한테 복장이 터진 연산군이 재차 전교한다:
"雖不載禮文, 禮緣人情。 親自執爵, 意爲無妨。" 政丞及承旨等僉啓: "上敎允當。" 禮曹判書金勘亦啓: "親自執爵當矣。"
"비록 예문에 실려 있지 않다 하더라도 예란 인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친히 잔을 받들어 드리는 것도 내 마음엔 무방하다 생각된다." 하니, 정승과 승지들이 모두 아뢰기를, "위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 김감 역시 "친히 술잔을 받들어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아뢰었다. 1
연산군일기는 반정세력의 입김이 많이 들어간 기록인데, 이런- 연산군이 '사람 같이' 보이는- 기사를 남겨둔 것은 당시의 관점에서는 이것도 연산군의 무법, 무례함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연산군의 파격은 인수대비와 화해하고 싶었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낸 것일 뿐이다. 연산군도 친할머니한테는 회한의 감정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또 하나 고려해야 할 점은 연산군의 입장에선 공식적인 상례와 추천 불사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복을 입고 있으면 당연히 행동에 제약이 많다- 그렇게 좋아하던 사냥도 할 수 없고, 미인들을 모아놓고 풍악을 울리고 음주가무를 즐길 수도 없다. 뿐만 아니라 당시 연산군은 죽은 생모의 한풀이에 한참 집착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인수대비가 훙서한 날이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숭하는 의식을 거하게 치르고 성대한 연회를 열기로 예정했던 바로 그 전날이었다. 연산군에게는 어떻게든 상복을 안 입으면 좋고, 입더라도 상기를 최대한 단축해서 빨리 벗고 싶어할 만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었던 셈이다. 반면 추천 불사는 연산군 본인을 불편하게 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 아니 할 말로 그저 '돈만 대주면' 끝나는 일이다. 한데 돈 문제에 관해서라면 조선의 왕들 중에서 연산군만큼 통 크게 자기 쓰고 싶은 대로 맘껏 국고를 탕진해본 왕이 또 있었던가?
실제로 연산군이 자금을 조달해줬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기사가 실록에 존재한다:
傳曰: "欲獻大妃殿, 生金、十品銀各百兩入內。尙衣院無儲則使富商覓入。且金銀各五十兩竝入。"
전교하여 가라사대, "대비전에 바치고자 하니 생금과 십품은(순은) 각 백 냥을 대내에 들이되, 상의원에 쌓은 것이 없으면 부상으로 하여금 구해 들이게 하라. 또 금·은 각 50냥을 아울러 들이라." 하였다. 2
여기서 '대비'란 물론 연산군의 계모, 정현왕후를 가리킨다. 인수대비는 아들 둘, 딸 하나를 전부 자기보다 앞세운 불행한 여인이기도 한데, 대비의 맏며느리는 승평부대부인 박씨지만 서열은 당연히 정현왕후가 더 높다- 연산군이 나몰라라 한다면, 유족 중에서 인수대비 추천 불사의 총책임을 맡아야 할 사람이 바로 정현왕후인 것이다. 인수대비의 두 며느리 모두 시어머니처럼 불심이 깊어서, 박씨는 월산대군의 사후에 유산을 다 털어서 남편의 묘 옆에 흥복사라는 절을 세울 정도였다. 그러니 만약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그 시절에 시어머니 죽은 지 석 달도 채 안 된 며느리가 금은을 받아서 자기 몸에 치장할 장신구 만드는 데 썼겠는가? 필시 인수대비를 위해서 사경을 하거나, 금동불을 만들거나 탱화를 그리는데 보탰을 것이다.
문제는 기사의 사실성, 정확히는 연산군의 '신용'이다. 이게 조선은 왕실이 검약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던 나라라 요즘 관점에선 왕이 그만한 돈도 못 쓰나 싶은 사안에도 '어디에 쓰실 거냐', '씀씀이가 과하다', '지금 국고가 텅 비었다'는 식의 신하들의 반대가 심했다. 해서 사치가 심했던 연산군이 자기가 쓸 금은/비단이나 기타 진귀한 물건들을 궐내에 들이라고 명할 때 신하들의 입을 막기 위해 쓰던 상투 수단이 바로 '대비전에 바치고자 한다'는 거짓말이었다. 그러니 위 기사에 나오는 금은 각 150냥이 정말로 다 정현왕후 수중에 들어갔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위 기사를 여기에 인용한 이유는 이날이 바로 정현왕후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짜의 첫번째 기사가 바로 종친 274명을 모아놓고 크게 생일 잔치를 벌였다는 내용이다. 연산군을 꺼렸던- 사실 연산군은 인수대비에게 패악을 부렸던 그 밤에 정현왕후의 침전에도 장검을 뽑아들고 쳐들어가서, 당장 문 열고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전력이 있다- 정현왕후가 연산군과 사이가 좋았던 며느리 중전 신씨나 동서 박씨를 거치지 않고, 혹은 바로 옆에 앉혀 놓고, 연산군에게 직접 자금 지원을 부탁하기엔 최고로 좋은 날이었을 것이다.
또한 불과 사흘 후에 연산군이- 이번엔 '대비전'을 팔지 않고- 엽아금 백냥을 궐에 들이라는 명을 다시 내린다는 사실도 한번 새겨볼 만한 점이다. 아무리 연산군이라도 대비전을 핑계로 금은을 150냥씩 긁어들인 지 사흘 만에 또 순금 백냥은 좀 과하고, 이례적인 것이다. 3 그러므로 적어도 이날만큼은 연산군이 들이라고 한 금은의 적어도 일부는 실제로 대비전으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고, 우리는 이것이 연산군의 평소 행태를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는 상기 실록의 기사에 나오는 금을, 그림 안의 '俱夷' 같은 방제나 풍부하게 사용된 금색 안료에서 이미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연산군은 그림을 끔찍이 좋아했다. 연산군이 기질적으로 거의 정반대였던 아버지 성종을 똑 빼닮은 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그림 애호였던 것이다. 아래 실록의 기사를 보자:
戶曹啓: "今年凶甚, 宗學及外方鄕校, 請皆放學。 且停罷不急之役, 減省不緊之費何如?" 從之。 唯鷹坊犬食及內畫廳宣飯, 命勿省。
호조가 아뢰기를, "올해 흉년이 심하므로 종학(종친 학교) 및 지방 향교들을 모두 방학하라 하고, 또 급하지 않은 역사를 그만두며, 긴치 않은 비용을 줄임이 어떠하옵니까?" 하니 이를 좇았는데, 오직 응방의 개밥과 내화청에 제공하는 식사는 감하지 말라 명하였다. 4
흉년이라 대궐에서 일하던 관리들한테 제공하던 점심 예산까지 줄이는 판인데, 연산군이 유일하게 건드리지 못하게 한 성역(?)이 바로 응방에서 매랑 같이 키우던 사냥개와 궐 안에서 그림 그리는 화원들이었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사냥개와 같이 묶이다니,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조금 씁쓸할 수도 있지만 아마 당시엔 큰 광영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더 높다- 궁에 출근한 다른 관원들은 다 밥 반 공기만 먹고 일하는데 화원들만 배터지게 먹여준다면 기분 좋지 않겠는가?
그리고 기사 중의 '내화청'은 연산군 때 도화서 화원들이 궐내의 전각을 하나 따로 차지하고 상주해 있었음을 가리킨다- 곧, 궐밖에 있던 원래 도화서는 '외화청'이 되는 것이다. 내화청의 기원은 성종 때 창덕궁 구현전에 화공들을 모아놓고 살아있는 새나 초목을 사생하게 한 데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렇게 '내화청/외화청'이 공식 명칭으로 사용된 실례는 오직 연산군일기에만 보인다(아마도 중종반정 후에 '적폐청산'의 일환으로 자연스럽게 혁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5연산군이 사냥에 미쳐서 한양 근교를 전부 사냥터로 만들다시피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고, 이 기사를 보면 연산군에게 그림이 사냥 못지 않은 최고의 취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연산군의 그림 취향은 어땠을까? 전모는 알 수 없지만, 연산군이 도화서에 그림을 주문한 기록이 남아 있어 일부는 확인이 된다:
傳曰: "令圖畫署畫鸚鵡十餘, 極其精巧, 卽入內。"
전교하기를, "도화서로 하여금 앵무새 10여 마리를 그리게 하되, 그 정교함을 극하여 궐내로 들이라." 하였다. 6
앵무새는 소위 '수묵사의(水墨寫意)'풍의 화조화에서는 잘 그리지 않는 제재기 때문에 '정교함을 극하여'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실제 아주 정교한 공필에 채색이 화려한 화조화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다음 실록의 기사를 주목해 보자:
先是, 命圖畫署, 摹畫謝安携妓東山圖二十幅。至是, 提調李昌臣, 令工畫成以進。
이에 앞서 도화서에 명하여 ‘사안휴기동산도’를 20폭 모사하게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제조 이창신이 화공들을 시켜 그림을 완성하여 진상했다. 7
'사안휴기동산도' 혹은 '동산휴기도'는 오랜 고사인물화 제재 중 하나로, 후일 동진의 명재상이 되는 사안이 40세까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기생들을 데리고 동산(회계에 있는 산 이름)에 놀러 다녔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연산군은 이 '사안휴기동산도'가 몹시도 마음에 들었던지, 실록에 언급이 더 나온다:
傳曰: "內畫廳畫員等, 令提調品其所畫, 上下其職。 且畫有難易, 如携妓東山, 最難畫也。 以此等圖爲題, 各自鋪張畫入。"
전교하여 가라사대, "내화청의 화원들을 제조가 그 그린 바를 품평하여 직위를 올리고 내리게 하라. 또 그림에는 어렵고 쉬운 것이 있으니, '휴기동산' 같은 것이 제일 그리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등등의 도화를 제목으로 삼아 각자 그림으로 펼쳐내어 들이게 하라." 하였다. 8
사실 여러 가지 스타일이 다 가능한 그림이지만- 이를테면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 활약한 곽후(郭詡; 1456~1532)의 1526년작 '동산휴기도(東山攜妓圖)'는 아무 배경 없이 사안과 뒤를 따르는 기생 셋만 간단히 수묵으로 그렸다- 위 기사와, 무시로 기생들을 모아놓고 음주가무를 즐겼던 연산군의 취향을 감안하면 이 '사안휴기동산도'는 배경인 동산을 청록산수 기법으로 그리고, 그 안에 온갖 새와 짐승, 꽃과 나무들을 그려 넣고, 여기에 기생들이 풍악을 연주하는 장면을 정교하게 묘사한 화려한 채색 인물화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런 그림이라면 산수/화조/인물화에 다 능해야만 잘 그릴 수 있고, 또 '가'와 '무', 곧 2차원 평면상의 그림으로 '소리'와 '율동감'을 표현하는 것은 인물화의 가장 어려운 경지 중 하나이니, '제일 그리기 어려운 그림'으로 꼽아도 그리 지나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왕이 이렇게 그림에 관심이 많으면 궁정화원들은 다투어 왕의 취향에 맞추게 된다- 하나의 유행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제 다시 그림 안으로 돌아와 보자.
III. 4.1 구름의 계보
'석가탄생도/출가도'가 다른 조선전기 불화들과 구분되는 회화적 특징 중 하나라면 바로 관람객의 첫인상을 지배하는 화사한 색감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장 잘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이 채운(彩雲), 곧 색색 구름의 표현이다:
위 왼쪽 이미지는 역시 이번 전시에 나왔던, 인수대비의 딸이자 성종의 누나인 명숙공주가 발원한 1477년작 '약사여래삼존십이신장도'의 구름 부분이고 오른쪽은 석가탄생도의 좌측 상단, 마왕 파순의 궁전 옆에 그려진 오색구름이다. 9 '약사여래삼존십이신장도'는 우리가 사진을 잘못 찍어서 더 뿌옇게 보이는 것도 있지만, 보시다시피 이를 감안하더라도 기본적인 색감의 차이는 명확하다. 게다가 조선전기 불화의 다른 주요 기년작인 이맹근의 1465년작 '관경16관변상도', 1483년작 '삼제석천도' 역시 구름의 색감에는 큰 차이가 없다(언급된 도판들을 일목요연하게 좍 보여드렸으면 제일 좋겠는데 국내 사립미술관들, 또 국외에서도 중국/일본 소재 작품들은 저작권 제약이 없는 고해상도 이미지를 구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대신 각주에 우리가 아는 범위에서 그나마 가장 상태가 좋은 도판을 포함하고 있는 책을 적었다.). 10 즉, 1460~80년대초까지 최소 한 세대 동안은 같은 양식이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조선의 이 1460~80년대 양식의 가장 직접적인 기원은 어디일까? 조선전기 회화는 작품이 남은 수효가 적어서 늘 중국 회화사를 참고해서 같이 볼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보기엔 일단 출발점은 법해사의 명대 벽화(1443)이다- 연대도 연대지만 이 절이 북경에 있어서 사신 행차를 따라갔던 화원들이 접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벽화 실물은 본 적이 없으나 도판을 보면 기본 적/녹/황 삼색의 구성에 청색이 가끔 쓰이고, 구름의 모양은 상기 '관경16관변상도'나 '삼제석천도'와 흡사하다. 11
다행히 이 법해사 벽화와 구름의 표현법이 대동소이한 탱화가 남아있는데, 바로 1454년 명 황실에서 제작한 수륙도이다. 아래 그림은 그 연작 중- 원래 전체 60점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현재 파리 기메 미술관에 34점, 클리블랜드 미술관에 2점, 캔사스대 미술관에 1점, 총 37점이 남아있는 걸로 되어 있다- '등각위십지보살도'인데, 구름 부분을 살펴 보면 위 법해사 벽화와 유사해서 이것이 15세기 중엽 '북경 스타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시다시피 구름은 적/황색 계통의 2색이 중심이고, 위쪽엔 배경의 청색을 추가로 활용했다. 조선의 1460~80년대 양식이 갖는 차이점이라면 황색이 보이지 않고 적/녹색과 거기서 파생된 분홍이나, 풀색에 가까운 짙은 녹색으로 3색을 이룬다는 것인데 작품 수가 너무 적어서 큰 의미를 부여하긴 어렵다.
이쯤 되면 위에서 본 석가탄생도의 구름의 색감이 15세기 동북아에서도 가장 화려한 축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적/녹/청/황, 기본 4색에, 여기서 파생된 분홍/보라, 거기다 구름 중심의 '동심원'에 더한 금니까지 더하면 이건 그냥 오색구름도 아니고 무려 '칠색구름'이다.
혹 이것이 15세기말에 나타나서 16세기로 이어지는 '신양식'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16세기의 희귀한 팔상도 작품으로 원래 한 세트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은 일본 대덕사(大德寺)와 금강봉사(金剛峯寺)에 각각 한 폭씩 소장되어 있는 1535년작 '석가팔상도'가 있는데- 구성은 석보상절/월인석보의 판화를 각각 4상씩 그대로 베껴서 화폭에 옮겨놓은 것이라 딱히 흥미로운 점이 없다- 도판에서 구름의 표현을 보면 기본 적/녹/황 삼색에 색조 변화가 추가되는 구성이다- 사실상 근 백년 전의 법해사 양식과 대차가 없는 것이다. 12
이렇듯 1483~1535년 사이, 성종대에서 중종대로 넘어가는 새중간에 색감이 가장 튀는 그림이 그려진 것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가 생각하기에 유일한 논리적 가능성은, 이 오색찬란한 구름이 근검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일하게 화려함을 숭상했던- 그리고 위 실록의 기사들에서 보았다시피 그림 취향에서도 이를 추구했던- 연산군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아래 이미지는 '석가탄생도' 중 구름 위에 나타난 제천이다. 상기 '칠색구름'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볼 수 있다는 것 외에도, 다섯 천신들이 입고 있는 옷의 색감을 눈여겨보기 바란다- 화려한 것은 위 명나라 '등각위십지보살도'도 충분히 화려하지만 이런 알록달록, 간질간질한 고운 색감과는 결이 확실히 다르다. 화가가 여기서는 장르가 장르인만큼 얌전하게 그렸지만, 이 정도 색감과 유려한 필치를 갖춘 솜씨라면 '사안휴기동산도' 역시- 연산군이 원하는 대로- 정말로 화사하게 잘 묘사해낼 것 같아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방금 본 것은 연산군 시절 조선에서 갓 10여년 짧게 유행했다가 중종반정 이후에 바로 뒤집어진, 화려한 (세속) 채색인물화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일한 간접 증거가 될 것이고, '석가탄생도/출가도'가 불화라는 장르를 넘어서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미술사적 의의도 바로 여기에 있다.
To be concluded...
- 연산군일기 권53, 연산 10년(1504) 윤4월 5일 을축 3번째 기사 [본문으로]
- 연산군일기 권54, 연산 10년(1504) 6월 25일 갑신 2번째 기사 [본문으로]
- 연산군일기 권54, 연산 10년(1504) 6월 28일 정해 2번째 기사 [본문으로]
- 연산군일기 권32, 연산 5년(1499) 3월 18일 정축 1번째 기사 [본문으로]
- 성종실록 권95, 성종 9년(1478) 8월 4일 계사 3번째 기사 [본문으로]
- 연산군일기 권35, 연산 5년(1499) 12월 25일 기유 1번째 기사 [본문으로]
- 연산군일기 권48, 연산 9년(1503) 2월 7일 갑진 3번째 기사 [본문으로]
- 연산군일기 권51, 연산 9년(1503) 12월 17일 경술 2번째 기사 [본문으로]
- '약사여래삼존십이신장도'의 전체 도판은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호암미술관, 2024), pp. 208~211 참조. [본문으로]
- '관경16관변상도'는 "고려불화대전"(국립중앙박물관, 2010), pp. 232~236, '삼제석천도'는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호암미술관, 2024), pp. 212~215 도판 참조. [본문으로]
- "中國寺觀壁畫全集 vol. 6. 明清寺院圓覺, 諸天圖"(廣東教育出版社, 2011), pp. 41~57 참조. [본문으로]
- 박은경, "조선 전기 불화 연구"(시공사, 2008), pp. 48~49 도판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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