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도 우리 전공이 아니지만 복식사는 아예 문외한이다. 그러나 조선 왕세자의 원유관복은 이 그림 연구에 워낙 중요한 문제다 보니, 관련 논문을 검색을 해서 찾았는데 기존 연구에 대한 요약을 포함하고 있는 비교적 최신의 논문임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기재되어 있는 중요한 사실을 누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각주:1]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돕는 차원에 더해서 혹시나 관련 학계의 연구에도 도움이 될까 해서 적는다- 주변에 복식사 전공자가 있으면 '이런 게 있다'고 알려줘도 좋을 것이다.)
1. 우선 원유관복이 구체적으로 뭔지를 그림에서 한번 확인해 보자. 기왕이면 초상화처럼 온전하게 갖춰 입은 모습으로 묘사된 것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아래 이미지가 남아 있는 전부이다:
보시다시피 석가모니의 일생 중에서 태자의 몸으로 출가한 직후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대목이다. 전편에서도 설명했듯이 '금도낙발(金刀落髮)'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도 하며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의 핵심장면 중 하나이다. 태자의 애마 건척(칸타카)가 무릎을 꿇은 채로 주인의 발을 핥으면서 슬피 울고 있는 모습의 묘사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 앞에 역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수행원 차익(찬타카)의 손에 들린 원유관을 보면 다시 한번 량이 일곱 줄- 마지막 한 줄은 모자 왼쪽 끝에 붙어서 거의 지워져 있다- 곧, 칠량원유관이다. 이 그림 속에 차익의 손에 들린 원유관이 총 3번 등장하는데 세어 보면 전부 일곱줄이다. 즉, 이건 뭐 한두 줄이 지워진 것도 아니고, 실수도 아니고, '고의'임이 거의 틀림없다- 화가는 분명 조선 세자의 복식인 칠량원유관복을 재현한 것이다.
면복이 '면류관+곤복'을 가리키는 이름이듯이 원유관복은 기본적으로 '원유관+강사포(絳紗袍)'의 조합이다. 여기서 '絳'이 붉은색 계통의 색깔을 가리키는 이름이기 때문에 강사포란 문자 그대로 붉은색 비단으로 만든 겉옷을 뜻하고 위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다양한 문양이 들어가는 곤복과는 달리- '붉은색 무지'로 된 옷이다. 면복의 치마(裳)도 같은 붉은색 계통이지만 그것은 '훈(纁)색'이라 해서 또 다른 색깔이다. 아래 오른쪽 이미지가 같은 그림 속 정반왕의 십이장복에서 잘라낸 것인데, 보시다시피 더 짙은 붉은색이다(다만 오래된 그림이라 자연히 색이 바래는 것도 있고, 또 이 작품이 육안으로만 봐도 최소 한 번 이상 수리를 거친 그림인데 '개칠'하는 과정에서 또 색이 달라졌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둘이 조선 전기의 강색/훈색과 동일하다는 보장은 없다):
이 그림 속 원유관복의 모델은 세종 20년(1438)에 명나라에서 사여받은 국왕의 원유관복이다. 왕세자의 경우 세종 10년(1428)에 문무백관의 조복과 같은 종류인 육량관복을, 세종 말년(1450)에 칠장면복을 사여받았지만 원유관복은 명나라에서 받아 온 적이 없다(고려말 공민왕 때부터 중국에서 왕/왕세자의 옷을 하사받아온 더 상세한 내력은 앞서 인용한 최연우 교수의 논문이나, 혹은 실록에선 세종 28년에 1차로 세자의 면복을 달라고 명에 주청하는 표문에 정리가 되어 있으니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시길.[각주:2]).
2. 그래서 도대체 언제부터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왕세자의 원유관복을 제작해서 쓰기 시작했느냐가 이슈가 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 현재 복식사학계의 정설은 조선의 왕세자 원유관복의 제정은 연산군 6년(1500)이고, 실제 사용이 확인되는 가장 이른 사례는 중종 17년(1522), 왕세자(후일 인종)의 관례라는 것이다.[각주:3] 그러나, 이미 15세기 중엽(1460년)에 왕세자가 원유관복을 착용했던 사실이 실록에 명백히 남아 있다:
초계의: "친영하는 날 내시부에서 전하와 중궁의 어좌를 궁중에 설치하고, 의장을 궁전 뜰의 동서에 설치하고 사옹방에서 찬탁을 준비한다. 전하는 원유관과 강사포를 입고 중궁은 예복을 입고 나오면 음악이 연주되고 어좌에 오르면 음악이 그친다. 왕세자가 면복을 입고 찬례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전각의 동문을 지나 들어가 [...] ‘예가 끝났다.’고 찬하면, 왕세자를 인도하여 나가서 곤면을 거두고, 원유관과 강사포를 갖추어 입고 친영례를 행한다."[각주:4]
'초계의(醮戒儀)'란 문자 그대로 초례를 치르기에 앞서 왕과 왕비가 세자를 훈계하는 의식이다.위 기사는 당시 세자였던 해양대군(= 후일의 예종)의 혼례 절차를 기록한 내용의 일부이고, 보다시피 세자가 칠장면복을 입고 초계의를 행한 다음 신부를 맞이하러 궐 밖으로 나갈 때는 원유관복으로 갈아입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왜 이때 갑자기 세자의 친영례에 원유관복을 쓰기 시작한 걸까? 일의 단초는 문종실록에 보인다:
임금이 가라사대, "세자가 이미 면복을 받았으니 익선관과 원룡 흉배를 착용하는 것이 옳겠는가, 옳지 않겠는가? 중국의 제도로는 세자가 친영할 때에 피변관을 쓰는데, 피변관은 현재 하사를 받지 못하였으니 면복을 착용하고 친영을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것을 의정부에 의논하라." 하니, 의정부에서 여럿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익선관은 신 등이 이 앞서도 생각하기를 비록 중국 조정에 청하지 않더라도 관을 쓸 수 있다고 여겼는데, 지금 면복을 받았으니 익선관을 쓰는 것이 실로 의심할 것이 없겠습니다. 원룡 흉배도 또한 중국 조정의 제부에서 세자가 착용하는 의복으로서 이미 면복과 같으니, 이를 입어도 무방합니다. 중국 조정의 제도는 비록 피변관 차림으로 친영하지마는, 그러나 예기에 가로되, 공자가 ‘면복 차림으로 친영해야 합니다.’ 하니, 애공이 ‘면복 차림으로 친영하는 것은 너무 중하지 않습니까?’ 하므로, 공자가 대답하기를, ‘사이좋은 두 성(姓)이 결합하여 선성의 뒤를 이어 천지·종묘·사직의 주인이 되는 것인데, 임금께서 어찌 너무 중하다고 하십니까?’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친영하실 때에 세종께서는 면복 차림으로 명하셨는데 전하께서는 양관복 차림으로 명을 받아 친영하셨으니, 그때는 동궁의 의복이 양관복보다 나은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면복을 받았으니, 면복을 착용하고 친영하시는 것이 이미 예절에 합당하므로 의심할 만한 점이 없겠습니다." 하였다.[각주:5]
평민이라도 일생에 딱 한번 사모관대 쓸 수 있는 날이 바로 혼인날이다. 문종이 즉위 전에 세자빈을 두 번 내쫓고- 사실 본인이 그런 게 아니라 세종대왕의 극성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세 번 장가를 든 사람인데, 정작 본인은 세자씩이나 되어서 아무 특별한 예복을 못 입고 그냥 양관조복 차림으로 새색시를 맞으러 갔던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해서 자기 아들은 더 좋은 옷(=면복)을 받았으니, 친영하러 갈 때 그걸 입으면 어떻겠느냐고 의정부에 의논을 시킨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위에 굵은 글씨로 강조 표시를 해놓은 바와 같이- 중국의 예법은 친영을 할 때 세자가 면복이 아니라 피변복을 입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피변관은 명나라가 홍무 말/영락 초에 의복 제도를 다시 정비하면서 원유관을 대체하여 도입한 관이다). 이때는 의정부에서 예기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까지 끌어다가 문종이 옳다, 면복을 써도 된다고 했지만 정작 문종은 아들이 장가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일찍 죽었고, 단종은왕위에 오른 다음에 혼인을 했기 때문에 직접 친영을 나가지 않고 신부집에는 신하들만 보냈다.
그래서 조선에서 1450년에 칠장면복을 사여받은 다음에 처음으로 있었던 왕세자의 혼례가 바로 상기 1460년 해양대군의 경우인데 세조와 그 신하들의 의논은 문종 때와는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즉, 중국에서 친영날 피변복을 입는다니 우리도 면복은 과하고, 그냥 피변에 대응하는 칠량원유관복을 자체적으로 새로 지어서 쓰면 되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럼 이렇게 이미 칠량원유관복을 제작해서 써먹은 전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세자의 관복 제도에 관한 논의가 성종~연산군대까지 계속 이어진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사대를 중요한 가치로 삼았던 조선 사회에서 '황제 폐하께 하사받은 옷'의 권위와 상징성이 무척 컸다는 점이다. 세종대왕도 국왕의 원유관복이나 세자의 칠장면복을 받아오려고 명나라에 여러 차례 주청을 하면서 애를 많이 썼고, 선조 같은 경우는 임진왜란 때 거의 버선발로 야반도주를 하다시피 한양을 떠나면서도 만력제가 하사해준망룡의(蟒龍衣)- 왕/세자가 상복(常服)으로 입는 곤룡포의 별칭이 아니고 황제가 번왕이나 공신들에게 특별히 내려주던 옷이다-하나만큼은 죽을 때도 꼭 이 옷을 입고 죽겠노라고 손수 챙겨갈 정도였다.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행사의 성격 내지는 특수성이다- 왕세자의 친영은 원칙적으로 일생에 한번, 곧 한 나라에서 2~30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특별 행사'인 반면, 이를테면 삭망의 조하는 한 달에 두 번씩 꼬박꼬박 문무백관을 모아놓고 치러야 하는 일상적인 공식 행사이니 맥락이 전혀 다른 것이다. 즉, 문제의 핵심은 아무리 의복 자체의 격은 원유관복이 양관복보다 더 높다고 해도 조선에서 '야매(?)로 만든 옷'으로 황제가 하사한 육량관복을 국가의 공식 행사에서 대체할 수 있느냐는 것이고, ('신랑 예복'으로 일회용으로 써먹는 정도는 무방하지만) 이것은 불가하다고 생각하는 신하들이 계속 존재했던 탓에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당이 이룩되니 경찬회를 베풀었다. [...] 회를 파하매 수양대군이 경찬회를 그림으로 그리고, 또 계문을 지어 모임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벌여 써서 축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주서 성임도 거기에 참여하였는데 수양대군이 말하기를, "너는 공자의 도와 석가(의 도)가 무엇이 낫다고 이르느냐?" 하니 임이 가로되, "공자의 도는 제가 일찍이 그 글을 읽어서 그 뜻을 대강 알거니와, 석씨에 이르러서는 제가 일찍이 그 글을 보지 못하였으니 감히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대군이 말하기를, "석씨의 도가 공자보다 나은 것이 단지 하늘과 땅 차이 정도가 아니다. 선유가 가로되 ‘비록 토막 내고 불태우고 찧고 갈고자 할지라도, 베풀 데가 없다.’ 했으나, 이는 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말한 것이다." 하였다.[각주:1]
첫머리에 '불당'이라 함은 말년에 본심을 드러낸 세종대왕의 지시로 건설된 내불당을 말하고, 끄트머리 다 와서 갑자기 '토막 살해' 비슷한 얘기(挫燒舂磨)가 나오는 건 수양대군이 소학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내용인즉 불교에선 윤회설에 따라서 자꾸 절에 와서 공덕을 많이 쌓지 않으면 죽은 다음에 지옥에 떨어져서 칼로 베이고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등 온갖 고문을 다 당한다고 겁박하는데, 실상은 사람이 죽으면 신체는 썩어 문드러지고 혼백은 흩어지는 것이니 고문을 할래야 할 데가 없다(無所施)는 것이다- 물론 독실한 불교 신자인 수양대군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망령된 유물론'이다.
난데없이 봉변을 당한 성임(1421~1484)은조선 초 최고 명문가의 하나인 창녕 성씨 집안이고,비슷한 또래의 안평대군(1418~1453)/강희안(1419~1464)/이영서(?~1450)가 모두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정난종(1433~89)과 더불어 조선 제일을 다투었다는 명필이다.수양대군이 (여러 모로 이용가치가 있을) 성임을 슬쩍 한번 떠본 것일 수는 있지만, 대화의 내용이 거의 '초딩' 수준임은- 공자하고 석가하고 싸우면 누가 이겨요?-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 기사를 읽다가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아니면 중학교 1학년 때쯤 되었던 것 같은데, 쉬는 시간에 교실에서 절에 다니는 친구와 교회에 다니는 친구가 믿음을 놓고 언쟁하는 소리가 들렸다. 교회 다니는 친구 왈, 예수님은 아빠가 목수라도 '신의 아들'이고 석가모니는 제아무리 왕자라도 '사람의 아들'이니, 예수님이 더 높다(?)는 것이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는 말도 있지만, 이 경우는 단지 어른들의- 그러나 애들보다 더 유치한- 싸움을 반영하고 있을 뿐일 것이다.기독교도- 특히 특정 종파들은- 꽤나 호전적인 종교지만, 성리학도 유교 안에서는 '근본주의' 세력이다. '이단'을 극단적으로 배척한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그리고 성리학적 세계관에서는 중국의 천자가 '우주의 중심'이고, 정반왕은 '서역의 오랑캐 번왕'에 지나지 않는다- 역시 상하관계가 아주 명확한 것이다.
여기서 잠시 그림 안으로 돌아와서 석가탄생도의 최상단 우측을 살펴 보면, 애당초 조선의 팔상도에 십이장복이 그려지기 시작한 근본 원인으로 보이는- 즉, 처음부터 이론의 여지없이 십이장복을 입고 있어야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보시다시피 이는 바로 중국의 천자, 주 소왕이다. 십이장복의 묘사가 간소한 것은- 다만 우리가 예전에 설명했던 바와 같이 양 어깨에 해와 달은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지금 위 이미지에 보이는 주 소왕의 실제 크기가 같은 그림 속 정반왕의 1/3, 대략 머리에서 가슴팍 정도 길이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보면 뒤쪽 전각의 묘사도 상당히 간략화되어 있는데, 가용한 가장 작은 크기의 붓을 써도 이 이상의 정교한 묘사는 어려웠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자, 그럼 여기서 정반왕이 원래대로 조선 왕의 복식인 구장복을 입고 있었다면 어떻게 될까? 한 화면 안에 십이장복을 입은 주 소왕과 구장복을 입은 정반왕이 공존한다면, 이는 심지어 불전도에서도 상기한 '성리학적 위계질서'를 그대로 용인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생긴다- 정반왕도 석가모니도, 본래 '천자의 신민'임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정반왕에게 십이장복을 입힌 의미란, 말하자면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의 혈통도 서역의 천자 집안이다, 너희 성리학자들이 사모의 마음이 사무쳐서 1년에 네 번씩 예복을 갖춰 입고 (북경 방향으로) 허공에 대고 절하는- 망궐례(望闕禮)라고 한다- 중국의 천자에 꿇리지 않는다'라는 것이 된다. 좀 포장해서 말한다면, '유불이 대등하다'는 개념의 발로인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원본의 화가가 무슨 '성리학적 세계관'을 의식하고 그림 안에 주 소왕을 넣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아래 이미지에서 보다시피 석가탄생도의 왼쪽 상단엔 마왕 파순의 궁전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화가의 의도는 단순히 그림 최상단에 좌우대칭으로 번쩍번쩍한 궁전 2개를 그려서 장식하려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파순은 팔상 중에서 '수하항마상'의 주요 등장인물이기도 하므로, 여기에 미리 살짝 등장시켜 놓는 것도 이런 스토리가 있는 연작에선 좋은 구성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보고 넘어갈 수도 있을- 아니, 그렇게 넘어가야 정상일- 그림안의 디테일에 손을 댈 만큼 유불간의 감정대립이 극에 달한 계기는 무엇일까?
이 그림의 제작시기로 유력한 성종~연산군대는 억불정책이 꾸준히 시행된 시기이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성종 23년(1492)의 '금승법(禁僧法)' 파동이다. 이는 이 파동이 유불간 갈등의 클라이맥스 중 하나임과 동시에 삼전 중에서 두 사람, 곧 인수대비와 인혜대비까지 깊숙이 개입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금승법의 배경이 바로 한 해 전인 1491년에 성종이 거의 온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북면을 방어해야 하는 평안도/황해도를 제외한 6개도에서 정규군 2만을 징발해서 함경도 국경 밖으로 대규모 정벌을 감행했다가 고작 여진족 수급 9개를 베어온 사건이다.('신해북정'이라고도 부르는 이 원정은 성종대 조선이라는 나라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갔는지 그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다만 미술에만 관심이 있고 역사에는 별 관심이 없는 분들은 아래 박스는 건너뛰어도 무방하다.)
- 성종과 허종의 허황한 원정 -
: 이 원정이 실패한 이유는 아래 3가지로 간단히 정리해볼 수 있다.
(i) 무모한 겨울 원정
도원수 허종이 원정군을 끌고 두만강을 건넌 것이 음력 10월15일, 양력으로는 11월25일이었다. 위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때쯤이면 중부 이남지방의 한겨울보다도 더 추울 때다. 무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피하는 것은 용병의 기본 중 기본이다. 당장 세종/세조조에 여러 차례 북방 원정을 하면서 이렇게 늦게 출발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겨울 원정'은 성종 때만 벌어진 현상인데, 그것도 처음 성종 10년(1479)에 병력을 움직인 것은 조선이 자의로 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가 건주여진을 정벌하는 타이밍에 맞춰서 협공을 하자고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10월을 추천한 것은 허종이고 '보름날'로 날짜를 못 박은 것은 성종이니, 이는 오롯이 이 두 사람의 책임이다.
(ii) 불필요한 대군의 동원
원정 실패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 정규군 2만이면 15c 조선 최대의 원정이다. 이전 기록은 세종 15년(1433) 최윤덕 장군의 파저강 1차 정벌 때의 1만5천인데, 그때 병력 구성은 평안도에서 1만, 황해도에서 5천이었다- 눈치채셨는지? 이게 함경도/강원도 쪽은 인구밀도가 희박해서 당시 조선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각각 7천/1천, 합계 8천이었고 이것이 정확히 세조 6년(1460)의 '경진북정' 때 신숙주가 원정군으로 동원한 병력이다. 즉, 1만5천 이상의 대병력을 두만강 쪽으로 동원하려면 경군을 차출하는 것만으로는 턱도 없고, 충청/전라/경상도에서 대규모로 징집을 해야만 했다.
하삼도의 병력을 이보다 더 대규모로 동원한 사례는 바로 세조 13년(1467)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인데, 이때는 함경도가 반란의 근거지라 사정상 달리 병력을 동원할 곳이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해야 할 적군의 성격인데, 이시애의 반란군은 회유나 계책에 안 넘어오고 근거지에 웅거해서 버티면 ‘포위 공격’으로 섬멸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으니 처음부터 대군을 동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상대였다. 반면 여진족의 주특기는 '게릴라전'이다. 기병 위주의 소규모 병력으로 노략질을 일삼다가 조선의 정벌군이 온다고 하면 도망치는 집단인데, 대규모 보병을 끌고 가봤자 포위 자체가 안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8~9천을 초과한 인원은 사실상 병력이 아니라 군량미만 소모하는 '짐짝'을 끌고 간 것이나 다름없는 이유다.
이것도 원래 허종이 1만5천씩이나 달라고 한 것을 성종이 거기다 5천을 더 얹었다. 이 2만이라는 것은 전투병력이고- 정군(正軍)이라고 부른다- 전투병력 1인당 지원인력 1명을- 이쪽은 보인(保人)이라 한다- 붙이기 때문에, 실제 원정에 나선 인원은 4만이나 된다. 원래 병력수는 무조건 '다다익선'이라고 생각하는 게 무능한 지휘관들의 공통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iii) 정찰 실패 & 군량 계산 착오
원래 두만강 북쪽은 소규모 여진 부락이 사방에 흩어져 있어서 조선군 단독으로는 발각되지 않고 정찰하기가 몹시 까다로운 지역이었다. 허종의 계획은 두만강가의 조선 국경에 걸쳐 살던 성저야인(城底野人)들 중 일부를 길잡이로 앞세운다는 것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이중간첩'일 수밖에 없다. 또, 국경밖의 여진족들이 싹 다 토벌되면 본인들의 이용가치가 없어져서 '토사구팽' 당할 것이 뻔한데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왜 거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는가?
결국 조선군은 마지막 순간까지 목적지까지의 정확한 거리를 알지 못한 채로 원정에 돌입한다. 정벌의 목표였던 니마거(尼麻車) 올적합 부락이 대략 5~6일 노차라고 듣고 15일치- 실록에는 10일치만 가져갔다는 언급도 있는데 확실치 않다- 양식을 준비해서 갔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이미 9일이 지나버린 것이다! 이미 정보가 다 새서전투라고는 척후대가 적과 한 두 번 부딪히고, 텅 빈 니마거 부락을 불태우고 회군하는 길에 적에게 후미를 기습당한 것이 전부였다. 중부지방 이하에서 징발된 군사들은 그저 난생 처음 겪어보는 추위에 빈속으로 행군을 하다가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
전과는 너무나 약소한데 비해 예상외로 아군의 인명피해가 커지자 당황한 허종은 두만강을 건너 돌아오자마자 군마의 숫자를 제대로 점검하지도 않고 그대로 원정군을 해산해버린다. 군대 갔다 온 한국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이른바 '가라 보고(=허위보고)'를 시작하기 위한 준비였다- 곧, 처음 종사관 이수언을 한양으로 보내 상황보고를 할 때는 '전사자가 한 명도 없다'고 아뢴 것이다. 이때가 성종 22년(1491) 11월10일인데, 허종은 원래 함경도(당시 이름은 영안도) 관찰사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로 돌아와서 성종을 대면한 것은 다음해 4월이나 되어서였고, 이 자리에서는 말을 또 바꾸어 두만강을 다시 건넜을 때까지 전사자가 10여명, 동사자가 11명밖에 없었다고 보고한다. 요는 사망자가 이 숫자를 넘어간다면 그것은 전부 함경도 끝자락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죽은 것이니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더 기막힌 것은 허종이 본인은 15일치 양식에 더해서 20일치 미식(糜食: 곡식을 볶아서 가루로 만든 비상식량)을 더 가져가라고 명령했는데, 군사들이 무거운 짐을 지기 싫다고 양식을 조금밖에 안 가져갔다고 변명한 것이다. 군량미에 본인들의 목숨줄이 걸려 있는데 도원수의 명령을 군사들이 멋대로 어겼다는 것 자체도 납득이 잘 안가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 원정군은 '당나라 군대'였다는 말밖에 안 되질 않는가? 이렇게 군령이 제대로 안 서는 부대를 만든 책임이 도원수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한테 있을까?
이렇듯 사실상 본인이 원정군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다는 자복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병사들이 조선땅으로 복귀해서 부대를 해산하자마자 무더기로 죽어나가기 시작했다는 말도 한없이 미심쩍었지만 성종은 허종의 말이 다 옳다고 하고 대강 덮었다. 성종이 개인적으로 허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너도나도 반대하는 원정을 둘이 머리 맞대고 추진했을 때부터 성종과 허종은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였다- 모인 군사로 반역을 도모하거나 국왕의 명령을 중대하게 어긴 경우가 아니라면 도원수를 처벌한다는 것은 곧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성종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 대면보고 약 한달 후 허종은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만약 2년 후에 세상을 떠나지만 않았다면, 허종은 이 원정의 부원수였던 성준보다 먼저 영의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정확히 몇 명이 죽었는지는- 조선으로서는 수치스러운 기록이다- 실록에 적혀 있지 않다. 다만 강원도의 계본에 40여명이 사망했다는 기사로부터 합리적인 추정치는 내볼 수 있다:[각주:2] 즉, 강원도가 1천/2만, 곧 전체 원정군의 1/20을 감당했으므로, 단순히×20을 하면 800명이 나온다. 근데 강원도가 고산지대는 북방 지역 만만치 않게 춥고 함경도와의 이동거리도 가장 가까우니, 추위에 약하고 이동거리가 더 먼 전라/경상/충청 지역 병사들은 이보다 몇 배 더 많이 죽었을지 헤아리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복귀 중 탈영한 병사들이 각 도의 통계상 사망으로 잡힌 숫자가 상당했으리라는 점을 감안해도 위 800명은 보수적인 추정치이고, 실제로는 천 단위를 가볍게 넘어갔을 가능성이 많다. 여진족 수급 하나를 베는 데 조선군은 최소 근 백 명씩 죽은 셈이니, 참혹한 결과였다.
그러나 전쟁을 승전으로 포장하려면 마땅히 논공행상이 있어야 하는 법, 이 실패한 원정에 포상을 준다고 하자 좋은 '먹잇감'을 발견한 대간들이 득달같이 들고 일어나서 여러 차례 공방이 이어진다- 아래는 우리가 그 중에서 성종과 사간원 사간 최관, 사헌부 집의 정석견 사이에 오간 문답 중 일부만 발췌해서 정리한 것이다:[각주:3]
최관: "양식이 부족했던 것은 사졸의 잘못이 아닙니다. 만약 장수가 명령을 내렸다면 사졸이 어찌 따르지 아니하였겠습니까?"
정석견: "군사가 몇 달을 버틴 것이 아니니, 그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종: "군사의 잘못이다. 그러니 논공은 마땅히 장수에게 먼저 해야 한다." 최관: "신은 마땅히 그 죄부터 먼저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종: "군사가 많이 죽은 것을 가지고 죄줄 수는 없다. 비록 집에 있었더라도 어찌 병들어 죽는 자가 없었겠는가?"
이 정도면 거의 인면수심이다- 그럼 나라에서 애초에 가만히 집에 앉아 있어도 병들어 죽을 법한 약골들을 ‘장정’이랍시고 선발해서 천리 밖으로 원정을 보냈단 말인가? 아들 잃은 부모, 가장을 잃은 식솔들이 성종의 이 말을 직접 들었다면 아마 전부 역도로 돌변했을 것이다. 공정성을 위해서 덧붙이자면, 평소 성종의 인간성이 이렇지는 않았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나타나는, '현실 부정'의 심리가 더해져서 이렇게 '가짜 뉴스로 먹고 사는 정치 유튜버' 수준의 궤변을 늘어놓게 되었으리라.
이 신해북정에 대해서 '잘 준비된 원정도 실패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는 식의 논평도 있지만, 그것은 이 원정을 정치·외교사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전사(戰史)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은 때문이다. 병력 동원을 비롯한 원정의 준비, 원정이 종료된 직후 상황을 보고하는 계본이나 성종에게 행한 대면보고를 면밀히 살펴 보고, 또 이를 세종/세조조에 있었던 원정과 비교해 보면 조선의 국방력이 이미 성종대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음이 드러난다. 성종 때 조선이 큰 난리를 겪지 않은 것은 단지 여진과 일본이 모두 분열되어 있어 쳐들어올 만한 세력이 없었던 까닭이니, 그저 운이 좋았을 따름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원정의 실패를 성공으로 포장하는 것은 왕왕 있는 일이기에 성종만 비난할 수는 없다. 그보다 조선은 이 실패를 와해된 국방력을 재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만 했는데, 성종은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실록에서 이 원정에 관련된 기록을 찾아 읽다 보면 성종의 군사적 무능함에 치가 떨릴 지경이다.이후에도 조선이 국방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땜질 처방에 의존하다가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III. 3.2 금승법과 인수대비
아무튼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허랑방탕한 원정의 '나비효과'로 금승법이 태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때 조선은 이시애의 난 이후로 거의 한 세대 동안 평화로웠는데 중부 이남 지역의 장정들을 유례없이 대규모로 북방 원정에 동원한다고 하니 아들들을 머리 깎여서 절로 들여보내는 사례가 증가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이 전쟁터에 나가서 개죽음 당하는 것을 좋아할 부모가 몇이나 되겠는가? 말하자면 '합법적인 병역 기피'였고, 도첩을 신청할 돈이 없으면 그냥 무단으로 절로 도망해서 중이 되는 경우도 이미 많았다.
당시 성종의 최대 현안 중 하나가 국방이었고, 이 '병역 기피 사태'에 본인이 원인 제공을 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조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발단은 성종 22년(1491) 12월 2일, 성종이 당시 개성유수 유순에게 불법적으로 중이 된 자를 수색해서 역을 정하라고 하서한 것이다. 그러자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이 이를 기화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 병역 기피에 관한 성종의 관심을 이용해서, 말하자면 '억불정책의 끝판왕'을 관철시켜 보려고 시도한 것이다.
성리학적 명분론으로 무장한 삼사의 요구사항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도첩이 없는 중을 강력한 연좌제를 적용하여, 시쳇말로 '싹 다 잡아들여서' 군역에 충당할 것. 둘째, 경국대전에서 도첩제와 승과, 그리고 중을 잡아가둘 때와 절을 수색할 때 반드시 각도 관찰사가 임금에게 계문(啓聞)하게 한 조항들을- 이는 세조가 만든 법이다- 전부 삭제해버릴 것.
처음엔 성종과 정승들은 둘 다 반대였다- 경국대전에 손대라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불법 승려'를 추쇄하는 것도 필요한 만큼만 하면 되지 전국적으로 소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삼사에서 물러서지 않고 돌아가면서 집요하게 석 달을 간쟁한 후인 다음해(1492) 2월 초, 성종이 마침내 내놓은 방안이 도첩의 신규 발행을 중지하는 것이었다- 아마 이때는 '합법적 병역 기피'의 통로를 사태가 잦아들 때까지 막아놨다가, 나중에 형편을 봐서 다시 풀어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각주:4]삼사에서도 요구사항은 둘 다 거부당했지만 소기의 성과는 이룬 만큼 두어 번 더 거론하다가 다른 이슈로 옮겨간다.
이 정도로 마무리 되나 싶던 사태가 급속히 악화된 것은 이 해 10월이었다. 성종이 전격적으로 작년 12월부터 석달 간 그토록 거부하던, 강력한 연좌제를 적용한 추쇄를 재가한 것이다.[각주:5]성종이 심경변화를 일으킨 이유는 실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데, 어쩌면 도첩 발행을 정지한 후에도 병역 기피가 줄고 있지 않다는 보고가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2월 초까지만 해도 성종이 북정으로 인한 아군의 손실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원정군의 인원 점검을 마친 각도의 계본이 1차로 올라온 것은 늦어도 3월초 이전이지만, 제때 복귀하지 못하고 뒤에 처진 병사들의 명단과 이를 다시 대조하는 작업은 4월에 도원수 허종이 복귀한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몰자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한 후에는 성종의 심산이 달라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즉- 상기한 우리의 추정치가 옳다면- 본인이 무리한 원정으로 축낸 군사의 숫자를 벌충하려면 도첩이 없는 중을 최소 1천 명 이상 잡아들여야 겨우 '본전'이 된다. 여기에 원정 직전과 그 이후에 이루어진 병역 기피까지 감안하면 적어도 한동안은 강력한 추쇄를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금승법을 성종~중종조에 지속적으로 억불정책이 강화되는 흐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틀리지는 않는데, '왜 하필 1492년이었느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한 해 전 북방 원정의 내막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좌제라는 게 이만저만한 수준이 아니고, 도첩 없이 몰래 중이 되겠다는 자를 제자로 받아준 중과 그 절의 주지는 도첩이 있어도 군역에 넣고, 심지어 한번 검거되었다가 다시 도망친 중을 숨겨준 절은 아예 그 절의 중들을 통채로 잡아다가 군역에 넣는다는 식이었다. 이에 참고 있던 불교계의 불만이 폭발한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라에서 정한 법을 뒤집을 수단이 있을까? 불교를 깊이 신봉하면서 성종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당시 조선 유일의 인물, 바로 인수대비였다.
약 한 달후인 성종 23년(1492) 11월 21일, 전례없던 진풍경이 펼쳐진다. 성종이 인수대비와 인혜대비가 '공동 명의'로 언문으로 내린 교지를 승정원을 시켜 한문으로 번역하게 한 다음, 조정에 토론을 붙인 것이다.[각주:6] 내용은 물론 새로 내린 조치들을 모두 철회하고 '(경국)대전대로만 하라'는 것이었다(원래 대전에도 당연히 도첩이 없는 승려에 대한 단속 조항이 있었다). 정승들이 다시 한번 '바람잡이' 역할을 하고 성종이 모후의 뜻을 거스를 수 없으니 이에 따르겠다고 해서 그 다음날 금승법이 정말로 뒤집힌다.
물론 삼사도 뒤집어졌다. 날마다 상소가 3건씩 올라오고 나흘 뒤인 11월 25일 경연에서 또 말이 나오자 성종이 대비께 다시 아뢰겠다 하더니만, 인수대비에게 받은 한글 편지를 또(!) 삼사에 보여준다. 이 편지에서 직전의 교지에 없었던 새로운 내용이라면, 문제의 근본은 백성들이 수령의 침학을 못 견뎌서 중이 되는 것이니 금승법만 시행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는 일침이었다- 환언하면 '중들 때려잡을 시간 있으면 너네들 부정부패부터 척결하라'는 말씀이 되시겠다.
이에 대한 삼사의 직접적인 반응은 '정말로 침학하는 자가 있는지는 신은 모르겠다'는 둥, '어찌 모든 수령이 다 백성을 침학하겠느냐'는 둥, 눈 가리고 아웅하는 소리들밖에 없다.[각주:7]그런데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조선은 토호를 지방관으로 임명하던 나라가 아니다. 당시 지방에 널린 탐관오리들 중에 틀림없이 누군가는 대간들과 과거시험 동기던지, 동문수학한 사이던지, 아니면 심지어 동료 대간으로 같이 근무를 했던지, 그게 아니라도 한 두어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일 터, '아무개가 어느 지방 원으로 가더니 본가로 재물을 바리바리 실어들인다'는 소문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되면 신하들이 쉽게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되어버렸다. 바로 다음날부터 금승법의 찬반을 넘어서 '대비가 정사에 간여하는 게 옳으냐'는 직격이 들어간다- 달리 보자면 이제 인수대비가 확실히 정치판이라는 링 위에 올라온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중뿔나게 나서기 좋아하는- 전직 도원수이자 현직 우의정- 허종이 다시 등장한다. 본인이 직접 대비전에 가서 두 대비를 설득하겠다고 성종에게 고한 것이다. 섭정 중인 대비도 아닌데 대신이 왕을 건너뛰고 모후를 만나서 정사를 의논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라 승정원에서도 말리는데 성종은 허락한다- 그 기막힌 이유인즉슨, 못하게 하면 신하들이 자꾸 대비한테 똑바로 아뢰지 않는다고 자기만 타박을 할 테니, 한번 직접 가서 고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허종이 우참찬 유지와 함께 창경궁으로 가서 금승법 때문에 조정이 너무 시끄럽다고 아뢰니 인수대비가 다시 한글로 장문의 글을 써서 허종에게 내린다.[각주:8] 이 글에서 인수대비는 만연한 수령의 부정부패 외에 또 새로운 논증을 들고 나오는데, 바로 성종대 득세한 간관들의 행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대간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매양 공격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바른 의논을 듣지 못하게 한다', '주상이 간관을 대우하여, 사정을 두고 부드러운 말로 어린아이를 달래듯 하니 대간이 일마다 번거롭게 계달한다', 심지어 '정권이 대간에게 있으면 예로부터 그르다 했다'는 극언을 서슴치 않은 것이다. 이에 훈계만 듣고 빈손으로 물러난 허종이 윤허를 얻지 못했다고 보고하는데 성종의 답이 걸작이었다- "경 등이 예전에 내가 (대비에게) 아뢰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제는 알았을 것이다." 행간에 담긴 성종의 속내를 점잖을 필요가 없는 상것들의 말로 번역하자면, '우리 엄마 말발을 직접 당해보니 맛이 어떻더냐?'는 뜻이 되겠다.
인수대비가 굉장히 똑똑한 여자고, 이 금승법 파동 때 써보인 글들을 보면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해서 이번에도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지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어버렸다- 이런 공격을 받고도 대간이 그냥 물러난다면 그간 본인들이 잘못해왔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요, 그것도 왕도 아닌 대비의 손에 길들여지는 꼴이 아니겠는가? 일단 화살이 바람잡이 역할을 한 영의정 윤필상과 좌의정 노사신에게 돌아가서 대간은 물론 성균관 유생들까지 나서서 탄핵하니 의정부가 사실상 마비상태에 빠지고, 연이은 논란으로 온 조정이 요동을 치자 결국 사흘 후인 12월 5일, 성종이 금승법을 다시 세울 것을 명하게 된다.
금승법 폐지라는 목적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잇단 공격으로 조정 신료들을 자극한 것은 인수대비의 정치적 미숙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성종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는 한, 처음부터 인수대비에게는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인수대비가 무슨 병권을 쥐고 있는 상왕도 아니고, 인사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성종이 확실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않는다면) 달리 무엇으로 신하들과 싸우겠는가? 인수대비의 공격은 신하들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라, 정치에 관심은 많아도 정사에 간여할 수 없는 처지라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들을 이 기회에 쏟아낸 측면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물론 세운 지 한달 남짓한 법을 '엄마가 하지 말랜다'고 엎었다가, 그것을 다시 2주만에 '조정이 너무 시끄럽다'고 도로 뒤집으면서 시종 철저한 책임회피로 일관한 성종에게 있다. 애초에 미성년자도 아니고 우리 나이로 서른 여섯 살이나 먹은 왕이 '어마마마, 이것만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하고 말을 못했다는 것도 우습기 짝이 없지만, 성종이 진짜 효자였다면 인수대비의 두번째 편지나, 허종의 알현은 중간에서 다 막고 본인이 직접 신하들을 설득했어야 했다. 설득은커녕 신하들 앞에서는 '내가 아니고 대비가 한 것'이라 극구 강조하고, 대비한테는 '조정 공론'을 운운하면서 번복을 해달라고 했으니 이는 대비와 신하들을 쌈 붙여놓고 팔짱 끼고 구경한 것이나 마찬가지요, 국왕으로서의 체모나 위신은 온데간데 없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1492년에 인수대비는 '불교계의 성녀'였다- 아들 성종이 수수방관하는 가운데 불교계를 위해서 단신으로 우의정 이하 온 조정의 신하들과 2주간 '맞짱'을 뜬 것이다. 성종이 일을 아주 시끄럽게 처리했기 때문에 허종과 유지가 직접 찾아와서 논쟁을 벌인 일도 대궐이나 조정 대신들에게 연줄이 닿는 승려들을 통해서'우의정과 우참찬이 금승법을 도로 시행해야 한다고 대비전에 아뢰러 온 것을, 대비마마가 호되게 꾸짖어서 쫓아버렸다'는 식으로 산사까지 소문이 퍼졌을 가능성이 높다- 자고로 지도자는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야 '지지층이 결집'하는 법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1504년에 인수대비가 승하했을 때 불교계의 추모하는 마음이 특별했으리라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전편에서 우리는 태자비 구이를 주인공의 자리에 배치한 이 그림의 구도상 특징이 인수대비의 일생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왕실에서 추천 불사를 벌일 때는 대개 실무를 담당하는 '중간 관리자'가 있게 마련이고, 이런 실무를 맡는 사람들은 당연히- 드러내놓고 믿었건, 몰래 믿었건 간에- 모두 불교 신자들이다. 불화를 그리거나 불상을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장인들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다. 만약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이 그림의 실무자와 작가에게 구도의 특이점에 대해 묻는다면, '대비께서는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라고 답하지 않을까?
다른 한편으로 1492년 이후 불교계의 감정이 격앙되었으리라는 것 역시 명백하다. 사찰이나 교단도 주기적으로 '신입'이 들어와야 돌아가는 사회 조직이다. 헌데 금승법의 시행에 따라 신입은 물론 받아준 승려들까지 자동으로 '범법자'가 되었고, 사력을 다한 최후의 로비는 잠깐 성공하는 듯했지만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이게 15c 전기만 해도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릴 때는 통상 '그 폐단은 자심하지만, 워낙 오래 되고 믿는 사람이 많아 하루 아침에 없앨 수는 없으니...' 이런 식으로 단서를 달고 들어왔는데, 성리학이 승리에 승리를 거듭한 성종 말에 이르면 아예 '중들의 씨를 말리자'고 나오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최소한의 공존도 거부하고 아예 숨통을 끊겠다고 덤벼드는 상대에게 과연 어떤 감정을 느꼈겠는가?
우리가 보기엔 이것이 바로 '주 소왕 아래 정반왕'이라는 서열을 그림 속에서조차 용납할 수 없게 된 배경이다. 그리고정반왕의 십이장복의 의미를 이렇게 파악하면 그림에 보이는 태자의 칠량원유관복의 모순, 즉, 왜 '아빠는 황제인데 아들은 세자'인 실수를 범했는지에 대한 보다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해진다. 만약 정반왕의 십이장복이 정말로 조선 왕의 권위를 높이는 사업이었다면, 왕조시대에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가 적발이 되면 목이 달아나진 않더라도 끌려가서 곤장 40대쯤 맞고 볼기에 피 터지는 건 일도 아니다- 화가도 눈에 불을 켜고 혹시 뭐가 잘못됐나,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 화가는 요구 받은 것 이외 그림의 다른 디테일에 손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화가가 실제로 받은 주문은 (조선 왕실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정반왕을 서역의 천자로 만들라'는 취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 '석씨의 가문을 모독했다'고 화원을 죄주자 할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
자, 이제 역사 공부를 해야 할 차례다. 다만 지금 우리는- 그림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 시대를 공부하는 것뿐 아니라- 그림이 언제 제작된 것인지를 추측해내기 위해서 역사 기록에서 단서를 찾는 작업을 같이 하고 있다.
성종실록에 밥 먹듯이 나오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검색해보면 기사가 130개 나온다- 바로 '삼전(三殿)'이다. 삼전이라 함은 '삼대비전'의 준말쯤 되겠고, 곧 성종이 지극정성으로 모셔야 했던 할머니(세조비)/어머니(인수대비)/작은어머니(예종비), 세 여인을 가리킨다. '석가출가도'의 가장 유력한 제작시기 후보가 바로 이 세 대비의 국상이다. 왜냐하면 팔상도의 제작과 석보상절/월인석보의 저작, 이 모든 일의 근원이 1446년 소헌왕후의 승하였기 때문이다.
III. 1. 조선 팔상도의 기원
일의 전말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기록은 수양대군이 쓴 석보상절의 서문이다:
[...] 이 사이 추천(追薦)하는 일로 해서 이제 여러 경전에서 가려 내어 따로 한 책을 만들어 이름 지어 가로되 '석보상절'이라 하고, 이미 차례를 헤아려 만든 바에 의지하여 세존이 도를 이루신 일의 양자(樣子)를 그려 이루고, 또 정음으로써 한문을 따라 더 번역하여 새기노니 사람마다 쉽게 알아 삼보에 나아가 의지하게 되기를 바라노라.[각주:1]
먼저 한자어 2개만 해설이 필요한데, '추천(追薦)'은 죽은 사람 좋은 데 가라고 유족들이 불사(佛事)를- 절에 가서 재를 지내고, 사경을 하거나 탱화나 불상을 봉헌하는 일 등등을 다 통틀어서 말한다- 벌이는 것이다. 대비되는 개념은 예수(預修)인데 이것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예금'하듯이 미리 공덕을 쌓는 것을 가리킨다(혹시 여기서 예전 기독교에서 팔던 '면죄부'가 연상되신다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다음으로 '양자(樣子)'는 '모양/모형/틀'을 뜻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 일의 양자(=모양)을 그려 이루었다' 함은 현대어로는 딱 '시각적으로 형상화했다'는 의미가 된다.
상기 서문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이 이루어진 '순서'다- 곧, 먼저 (1) 한역 불전/불경들을 편집해서 한문본 석보상절을 만든 다음, (2) 그 한문본을 대본으로 ① 팔상도를 그리고, ②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후 (3) 수양대군이 바친 한글 석보상절을 보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세종대왕이 "월인천강지곡"을 지어 간행하고, (4) 거기서 다시 10여년이 지난 후에 세조가 아들 의경세자의 이른 죽음을 계기로 월인천강지곡의 노랫말을 본문으로, 대폭 수정증보한 석보상절을 본문 사이사이에 끼워넣은 긴 주석의 형태로 합본한 "월인석보"를 간행하게 된다.
혹 위 인용문에서 언급된 '시각적 형상화' 작업이 서문 바로 앞에 있는 팔상 판화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승정원에 의논하여 가라사대, "소헌왕후가 승하한 후에 왕후를 위해 팔상성도(八相成道)의 그림을 제작했는데 지금 이 그림을 다시 만드는 것은 불가하다. 안평대군 용이 금자 화엄경을 이루고자 하여 종이를 제조한 것이 절반 이상이 되고, 사경할 황금이 40냥쭝이 넉넉히 쓰이는데 지금 이미 13냥쭝은 준비되었으니 이것으로 해서 그 부족분만 보태서 이 경(經)을 이룩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또 대자암의 무량수전은 단 2칸뿐이니, 지금 부왕을 위하여 1칸을 더 짓고 석가·관음의 두 불상을 만들어 들여서 봉안시키는 것이 또한 어떻겠는가?"[...] [각주:2]
이것은 이번에는 세종대왕이 승하한 이후에 문종이 아버지의 추천을 위해서 진행할 불사를 의논하는 내용을 담은 기록이다. 사경/불상과 나란히 논하는 문맥상, 문종이 말한 소헌왕후를 위해 그렸다는 '팔상성도의 그림'이 판화가 아니라 탱화임이 명백하다. 또한 석보상절 자체가 소헌왕후의 추천에서 비롯된 사업이니, 그 서문에서 '이 사이 추천하는 일로' 인해서 만들었다고 밝힌 그 그림이 이것과 다른 그림이었으리라고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곧, 이것은 서로 다른 2가지 기록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경우이다.
(역사공부를 하는 김에 한 가지 보태자면, 위 기록만 보면 마치 일이 그대로 진행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화엄경은 사경을 하지 않고 인쇄해서 간행했다. 이때 완성된 사경 목록이 도승지 이사철의 발문과 함께 실록에 남아 있는데, 보면 법화경 7권/범망경 2권/능엄경 10권/미타경 1권/관음경 1권/지장경 3권/참경(懺經) 10권/십육관경 1권/기신론 1권이다.[각주:3] 이유는 추측의 영역인데, 이 경전들을 다 합쳐도 분량이 화엄경 80권본에는 꽤 못 미치는 것으로 보아 더 빨리, 더 적은 비용으로 추천에 적합한 공덕을 쌓을 수 있는 방도로 조언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법화경은 사경만 한 것이 아니라 화엄경과 같이 인간도 했기 때문에 '극락왕생에는 법화경이 최고'라는 당시의 인식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추론해낼 수 있는 바는 팔상 탱화가 판화의 저본이 되었으리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팔상 탱화의 일부를- 곧 각기 핵심적인 장면을- 책의 크기에 맞춰서 판각용 밑그림으로 제작하는 것까지가 화가의 담당일 텐데, 이는 탱화가 아니라 탱화의 초본만 완성이 되었어도 할 수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망자의 추천'이라는 게 세월아 네월아 하고 늑장을 부릴 수 있는 성격의 일이 아닌데다, 무슨 '컴퓨터 조판'이 있던 시대도 아니고 한글본 석보상절의 초고가 완성이 된 후에도 인쇄까지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을 것까지 감안한다면 탱화를 아예 만든 적이 없다면 모를까, 판각에 들어가기 전까지 탱화의 초본조차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관해선 탱화가 판화보다 앞설 것이라는 취지의 정수성지보(井手誠之輔)교수의 지적이 옳다(다만 판화의 성립을 1447년까지 올려보는 것까지 재검토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석보상절 권1이 현재 전해오지 않는 까닭에 확증은 없지만- 월인석보 초간본 맨 앞에 차례로 실린 '세종어제훈민정음'/팔상도/'석보상절서'는 석보상절 초간본에서 그대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내용의 개정에 맞춰서 팔상 판화도 일부 수정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각주:4]
그렇다면 이 그림이나 석가탄생도 역시 제작연대가 월인석보(1459)보다 늦다 하더라도, 그 구도는 1446~7년작 팔상 탱화의 모방/변형이지, 팔상 판화를 베낀 다음에 거기에 뭘 더 추가한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특히 석가탄생도는우리가 보기엔- 이야말로 '물증'은 없지만- 구도는 원작을 거의 그대로 베끼고 색감이나 인물의 복식, 건물의 장식 같은 세부묘사만 유행에 따라서 고쳐 그렸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III. 2. 누구를 위한 그림인가?
물론 팔상도가 꼭 누구 장례식 때만 그려야 하는 그림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소헌왕후의 국상 때를 제외하면 16c 초 이전에언제 온전한 팔상도 한 세트를 그렸다는 기록조차 전하지 않는다- '소설'을 쓰려는 게 아니라면, 최소한의 '비빌 언덕'도 달리 없다는 뜻이다. 또 상식적으로 왕실이 아니라 사가라 할지라도, "지난번에 증조할머니 돌아가셨을 땐 팔상도를 그려서 부처님께 바쳤는데 이번에는 우리 (할머니를 위해서) 뭐할까?" 이렇게 얘기가 돌아가는 게 자연스럽다. 다른 대안이나 사정이 없다면 한번 더 제작해서 사찰에 봉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증거라면 석가탄생도의 경우에는 바로 아래 이미지, 탄생단에 보이는 대좌에 앉은 마야부인의 모습이다. 팔상 판화의 경우에 이 이미지가 소헌왕후와 관련되었으리라는 것은 이미 지적된 바 있다.[각주:5]
이렇게 출산 직후에 점잖게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마야부인은 사실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실제 마야부인은 산후 후유증으로 일주일 만에 숨을 거뒀다- '비람강생상'의 내용을 설명하는데 그렇게 핵심적인 것도 아니다. 굳이 초상화를 연상시키는 이런 장면을 넣은 이유는 이 그림의 원작이 소헌왕후를 위해 그려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유력한 설명이 된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은 석보상절이 저본으로 삼은 석가보/석가씨보와는 달리 마야부인의 사인에 대해서는 딱히 따로 설명하지 않고 은근슬쩍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각주:6] 이 모든 것이 소헌왕후를 위한 추천 사업이고, 본인들이 지금 소헌왕후를 마야부인에 비기고 있다는 작가들의 암묵적 인식이 표현이나 서술방식에 공통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6c초 이전의 도화서 화원들 역시 이 '대좌에 앉은 마야부인'의 의미를 몰랐을 리가 없을 것이다. 이 도상은 - 이를테면 일본에서 17세기 이후에 숱하게 제작된 모사본들처럼- 단순히 원본을 모방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은 경우일 수도 있지만, 도상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작가라면 그림의 제작 목적이 달라짐에 따라 과감하게 빼고 다른 장면으로 대체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바꾸어 말하면, 이 '대좌에 앉은 마야부인'이 그려져 있다고 해서 반드시 죽은 왕후를 위해 그려진 그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왕후의 추천을 위한 그림이 될 수 있는 '필요조건'은 충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석가출가도'의 경우엔 석가탄생도와 한 세트인지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대신 전편에 우리가 설명한 바와 같이 태자비 구이를 주인공으로 구도를 짰다는 특징이 있다. 일단 여기서 먼저 삼전의 인적사항을 아주 간략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세 사람의 사망 연도에 주목해 보면 1483~1504년 사이이고, 한 세대 안이기 때문에 단순한 화풍 분석만으로는 이 이상 좁히기도 어려운 범위인데 보시다시피 가운데에 유독 이력서(?)가 복잡한 사람이 눈에 띈다- 바로 인수대비다.
인수대비는 남편 의경세자(1438~1457)가 일찍 죽은 탓에 실제 중전의 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이- 아들 성종이 역시 스무살에 요절한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 때- 바로 대비가 된 사람이다. 여기서 전편에서 우리가 언급한 바와 같이 저본인 석보상절은 이 시기 조선의 상식에 따라 석가모니가 19세에 출가했다고 전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19세에 '속세를 떠난' 태자와 우리 나이로 스무살에 '세상을 떠난' 의경세자가 묘하게 겹치지 않는가?
그렇다면 '석가출가도'가 묘사하고 있는 '설산수도상'의 전반부는 불전의 한 장면임과 동시에 인수대비의 일생에서 가장 슬펐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바닥에 쓰러져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구이의 묘사가 갖는 의미가 각별해진다. 또한 구이가 서열을 뛰어넘어 화면 안에서 구도상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설명할 수 있다- 만약 이 그림이 인수대비를 위한 것이라면, 구이(=인수대비)가 당연히 주인공이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라 '비람강생상'에선 아마도 인수대비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 곧 성종의 출산을 빗대어 표현할 수 있다. 팔상도 안에 고인의 일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과 슬펐던 순간이 다 들어가니, 인수대비의 명복을 비는 데 더욱 남다른 의미가 있는 그림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일단 이 그림의 제작년도는 1504년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유비 추리'외에 다른 근거는 없을까? 있다. 바로 조선왕이 황제의 옷을 입고 있다고 난리가 난, 복식에 관련된 문제다.
III. 3. 정반왕의 십이장복(十二章服)
먼저 '십이장복'이라 하면 문양(章)이 12 종류 들어간 곤복을 의미한다. '곤복'은 편복(=일상복)인- 그리고 사극을 통해서 우리에게 친숙한- 곤룡포를 뜻하기도 하므로 주의를 요하는데 이때는 면류관과 한 세트로 착용하는 황제의 정복, 곧 가장 격식을 차린 옷을 가리킨다. 이 세트를 '곤면'이라고 부를 때도 있고, 모자의 이름을 따서 '면복'이라고 부를 때도 있어서 십이장복은 '십이장면복'의 준말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12'라는 숫자가 중요한 이유는신분사회에선 옷이 곧 그 사람의 신분의 표식인지라 신분에 따라 꾸밀 수 있는 무늬와 장식의 한도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명나라 제도엔 황제의 숫자가 12, 황태자/친왕은 9, 정1품이 8 내지 7... 이렇게 내려간다. 그래서 황제의 면복은 곤복만 무늬가 12장인 게 아니라 면류관 앞뒤로 구슬을 끼워 내린 '류'도 12줄이고, 마찬가지로 황태자/친왕은 9류에 9장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일단 아래 이미지에서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위 이미지는 석가탄생도에서 채녀(=나인)이 정반왕에게 태자의 탄생을 보고하는 장면으로 정반왕의 십이장복을 가장 자세히 볼 수 있는 부분이라 우리가 골랐다.(눈썰미가 있으신 분은 아무리 세어봐도 옷에 무늬가 9~10가지밖에 안 보인다고 할 터인데 지금 하의의 붉은색 치마 맨 윗단에 한 종류가 상의 소맷단에 가려서 안 보인다는 설정이고, 등 한복판에 산 무늬, 그리고 목 뒤에 북두칠성 별자리 표시하듯흰 점과 선을 연결한 별 무늬가 들어간다. 그래서 12장복과 9장복을 쉽게 구분하는 요령은- 무늬의 갯수를 세는 게 아니라- 양 어깨에 해/달 무늬가 들어가 있느냐, 아니냐이다.)
당시 조선의 건축 양식이나 복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림 안에서 이렇게 유독 정반왕이 십이장복을 입고 있기 때문에 연구자마다 이구동성으로 이는 '조선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라고 한다. 한데 이게 얼핏 듣기는 그럴 듯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앞뒤가 안 맞는 것투성이다.
우선 조선은 고려와는 달리 그 어떤 척도로 봐도 '외왕내제(外王內帝)' 국가가 아니었다. '사대'란 어떤 의미에선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 내재된 논리다. 말하자면 조선이란 나라는 '우리는 제후국이니 분수에 어긋나는 참람한 짓은 하지 말자'고, 적어도 태종 때부터는 군신간에 합의가 되어 있던 나라다- 왕의 권위를 높인답시고 12장복을 입힌 그림이라니, 세종대왕이 봤으면 대노했을 것이다. 즉, 소헌왕후 사후 제작된 원본에 없던 표현임은 거의 틀림이 없다.
여기서 역사 상식이 있는 분이라면 조카의 왕위를 가로챈 세조(와 그 뒤를 이은 예종) 때는 약화된 왕권의 정통성을 보강하기 위해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실효성' 내지는 '현실성'이다. 예를 들어 묘호나 시호를 과하게 올리는 것은 신하들에게 천명하는 '전시효과'라도 있다. 한데 무슨 괘불처럼 들고 정기적으로 한양도성 안을 돌아다닐 것도 아니고, 아마도 만들자마자 왕실 원찰에 조용히 봉안했을 그림 안에 작게 그려진 정반왕에게 12장복을 입힌들, 과연 왕실의 권위가 한 자 반 치라도 올라가겠는가?(조선 왕실의 불사는 전부 왕실에서 사적으로 주관하는 형식을 취했고- 이렇게 해도 '허탄한 짓을 당장 그만두시라'고 신하들이 숱하게 '상소질'을 했다- 왕이 실무를 맡긴 담당자들 외엔 문무백관은 참석할 의무도 없을 뿐 아니라, 혹 참석해서 불상 앞에서 절이라도 올리면 다른 사대부들한테 손가락질을 받았다.)
정말로 왕의 권위를 높이고 싶다면 고려 전기의 왕들처럼 황색 용포를 입고 '짐'이라 칭하고, '조칙'을 내리면 될 것이다. 이런 것까지는 과하다 할지언정, 현실에선 입지도 못하고 입어본 적도 없는 예복을 그림 안의 인물, 그것도 액면은 조선 왕도 아닌 정반왕한테 입혀놓고 '조선 왕의 권위가 올라갔다'고 희희낙락한다니, 그럼 조선은 15c부터 '정신승리'로 살아가는 阿Q들의 나라였단 말인가? 실제 세조는 최소한 고려 왕들처럼 원구단에서 직접 하늘에 제사를 지낼 정도의 과단성은 있었다.
결론은 '정신이 제대로 박힌' 왕실이라면 이런 수단으로 권위를 올리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 '의상으로 권위 올리기' 아이디어는 완벽하게 실행이 되질 못했다. 자, 아래 이미지들을 한번 살펴보자.
우선 아래 첫번째 이미지는 차익이 설산에서 태자와 이별하고 보관/영락을 받아 챙겨서 궁으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여기서 차익이 들고 있는 관은 '원유관(遠遊冠)'이다(강사포와 한 세트를 이루는 원유관복은 면복과 편복 사이, 곧 면복을 입을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편복보다는 격식을 차려야 할 때 입는 옷이라고 일단 이해하면 된다). 이 관이 원유관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바로 아래 두번째 이미지로, 국조오례의서례(1474) 권2 가례의 관복도설에 실려 있다. 보시다시피 아래쪽 끈이 보이지 않게 잘 정리해서 안으로 넣으면 거의 똑같이 생겼으므로 화가의 고증은 정확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두 개의 원유관 사이엔 유의미한 차이가 딱 한 가지 있는데, 알아보시겠는지? 두번째 이미지, 곧 국조오례의서례에 실린 원유관은 조선 왕이 쓰던 '구량(九梁)원유관'이다. 여기서 '량'은 모자 위에 그려진 '세로줄'로 표현이 되어 있는데, 그 위의 둥근 점은- 면류관과 마찬가지로- 옥을 달아서 꾸민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첫번째 그림 속에서 차익이 들고 있는 관은 몇 번을 세어 보아도 일곱 줄, 곧 '칠량원유관'이다. 이는 왕의 아들, 곧 세자가 쓰는 관이다.
그럼 뭐가 문제일까? 지금 정반왕이 황제가 입는 12장복을 입고 있으니, 태자는 당연히 황태자/친왕이 쓰는 9량원유관을 쓰고 있어야 격이 맞는다- 황제의 아들이 '세자'일 수는 없질 않은가? 이게 우리는 현대인이니까 보고 나서도 그러려니 하고 말지만, 곤룡포에 그려진 용의 발톱 갯수까지 따지는 신분사회에선 말도 안 되는 실수다. 말하자면 지금 이 그림 속의 정반왕은 '벌거벗은 임금님'이 아니라 '(나홀로) 십이장복 입은 임금님'인 것이다(1897년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서- 당시 황태자 순종은 조선 왕세자 복식 그대로인 채로- 자기 혼자만 황색 용포에 통천관을 쓰고 앉아 있었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였을지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란다).만약 명나라 사신이 와서 이 그림을 봤다면, 참람하다고 평하기보담 그냥 크게 소리내어 비웃었을것이다.
혹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확대 이미지'나 마찬가지이니, 실제 그림 안에선 '그냥 작은 모자'라서 신경을 못 쓴 게 아닐까 의심이 든다면 위 정반왕의 이미지에서 면류관을 한번 잘 살펴보기 바란다. 십이장복은 12류에 줄마다 옥구슬도 12개를 끼우게 되어 있어서 정확하게 그리려면 12×12= 144개의 흰 점을 촘촘하게 찍어야 하는데, 보면 아주 공들여서 꼼꼼하게 찍었다. 반면 차익이 들고 있는 원유관엔 여전히 여백이 많이 보이니, 이것은 분명히 화가가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다.
만약 이 '석가탄생도/출가도'가 중국 그림이었다면, 이런 빈틈이 발견된 경우엔 제일 먼저-이를테면 소주편(蘇州片)과 같은-위작이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한데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조선 그림 중에서 이렇게 정교한 위작은 본 적이 없다.(대개는 허술한 가짜에 겸재니 단원이니, 오원이니 하는 유명 화가의 위조 서명이 들어가 있으면 거기서부터 사달이 나기 시작한다- 가능한 한 어떻게든 진짜로 만들려는 '노력'이 시작되는 것이다. 특히 이게 새로 나타난 그림이 아니라 이미 박물관/미술관에 들어가 있거나, 미술사 교과서에라도 실려 있으면 일종의 '기득권' 비슷한 것이 되면서 웬만해선 고치려고 들지를 않는다. 2024년 현재 동아시아의 중국/대만/일본/한국 네 나라 중에서 위작 문제에 관한 한 가장 미개한 나라가 한국인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것 같다.)
물론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조선에도 소주편 뺨치는 가짜 전문 공방이 있었다가 난리통에 '기술자의 맥'이 싹 끊어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게 현재로선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일단 이 그림들이 위작이라고 판정할 근거는 박약하다고 보고, 이후의 논증도 (적어도 원본은) 왕실에서 발원하고 도화서에서 제작했으리라는 암묵적인 전제를 깔고 진행할 것이다.
그럼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실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만일 이 그림이 팔상도 연작의 일부라면, '사문유관'에선 태자가 원유관을 쓰고 화면 안에서 대문짝만하게 4번 등장해야 한다. 고로 '사문유관'에서도 7량원유관을 쓰고 있다면 실수라기보다는 아예 화가가 정반왕의 십이장복과 격식이 맞게 고쳐 그릴 의도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그림들과 한 세트였을지 모를 '사문유관상'은 적어도 현재까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팔상 판화 중 '사문유관'에서 해당 부분을 찾아 살펴보면 이렇다:
먼저 위 이미지 속에서 태자가 쓰고 있는 관을 조복과 짝인 양관(梁冠)으로- 합쳐서 '금관조복'이라고도 한다- 오인할 수 있겠는데, 유심히 보면 모자 뒷면에 장식판이 없을 뿐 아니라 꼭대기에 '동그라미 장식'이 7개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시 옥구슬 장식을 표현한 것으로 양관에는 이런 옥을 달지 못한다- 곧, 세밀한 묘사가 불가능한 판화에서 원유관/통천관 계열과 양관을 구분하는 방법이 바로 이 동그라미다. 또한 간략한 판화선이긴 하지만 작가가 '9량원유관'을 표현할 의도가 없었던 것도 분명해 보인다.(엄밀히 말하면 지금 이 판화 속의 원유관은 석가출가도 속의 원유관과 모양이 같지 않다. 이는 조선에선 1460년 이전에 왕세자가 원유관복을 입은 적이 없었던 탓에 작가가 그림 속의 관행이나 상상을 동원해서 그렸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부록편'에서 설명하겠다.)
이것은 적어도 월인석보 초간본이 간행된 1459년까지는 태자의 복식에 손을 댈 필요가 없었음을 의미하고, 이는 다시 정반왕도 그때까지 구장복을 입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함의한다. 그러다가 이 '석가탄생도/출가도'를 제작한 시점에 모종의 이유로 정반왕의 복식만 십이장복으로 개작하면서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혹 같은 탱화 연작 안의 '사문유관'에서도 7량원유관으로 그려 놓았다면 그냥 실수도 아니고 문자 그대로 '대형사고'인데, 어느 쪽이든 이런 '허술한 참람함'은 상식적으로는 성종 때보다는 연산군 시절에 벌어졌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의 제작년도 역시 정희왕후가 승하한 때인 1483년보다는, 안순왕후/인수대비의 국상 때인 1499년이나 1504년이 더 유력해 보인다. 하지만 성종의 성군 이미지도, 1503년 이전 연산군의 폭군 이미지도 사실보다 많이 과장되어 있기 때문에 이 논증은 단순한 '확률' 정도 이상의 의미는 갖지 못한다. 관련된 해당 시기의 역사를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To be continued...
박종국, 허웅, 장세경, "역주 월인석보 제1·2"(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2) pp. 23~26 참조. 현대어역은 우리가 조금 손을 봤다. [본문으로]
문종실록 권1,문종 즉위년(1450) 2월 18일 계사 6번째 기사. 이하 실록 기사 번역 역시 전부 우리가 군데군데 손을 봤다.[본문으로]
문종실록 권1, 문종 즉위년(1450) 4월 10일 계미 2번째 기사; 화엄경과 법화경을 인간했다는 것은 문종실록 권1, 문종 즉위년(1450) 3월 1일 을사 5번째 기사 중간에 나온다.[본문으로]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기본적으로 그림의 모든 장면들이 각기 어떤 내용을 묘사하고 있는지는 이해가 완료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데는 별로 논란의 여지가 없고, 딱 두 장면만 추가 해명이 필요한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아래 이미지 속의 장면이다:
이미지 출처= 블로그 주인 현장 촬영
보시다시피 화면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문루 위에 독려하듯이 한 사람이 올라가 있고, 다른 사람들은 막 말을 타고 분주히 궁문을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저본인 석보상절 권3에는 이렇게 사람들이 출가한 태자를 찾으러 가는 대목이 두 군데 나온다. 그 중 하나는 전편에서도 우리가 인용했던,
[...] 태자가 아침 새 800리를 가서 설산 고행림에 도착하셨다.
이튿날에 구이 자다가 일어나시어 땅에 거꾸러져 우시며, 왕과 대애도도 슬퍼하여 우시며 나라의 사람이 다 슬퍼하여 두루 찾아다녔다.
이 대목이고, 다른 하나는 태자를 설산 고행림까지 수행했던 차익이 환궁한 뒤에 이어진다:
왕이 차익이 보시고는 태자 가신 데 가려 하시니 신하들이 사뢰되, "가지 마소서, 우리가 가서 추심(推尋)하겠습니다." 하고 모두 추심해 가니, 한 나무 밑에 계시거늘 [...][각주:1]
요는 이것이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여 두루 찾아다니는' 장면이냐, 아니면 신하들의 '추심' 장면이냐는 문제이다. 사실 이렇게 원문을 대조해 놓고 맥락을 따져보면 어느 쪽인지 거의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본인의 언어추론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다면 여기서 읽기를 중지하고 아래 그림만 다시 한번 보고 답을 맞춰 보시기 바란다).
허나 조선시대에도 석보상절을 구해다 펼쳐놓고 그림과 맞춰 보는 경우가 어디 흔했겠는가? 애초에 '나는 저본대로 그렸으니, 헷갈리면 니들이 알아서 책을 찾아봐라'는 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만약 있다면 무조건 삼류화가일 것이다- 가능한 한 그림만 봐도 뜻이 명확하게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 화가의 책무인 것. 따라서 그림만 보고 풀 수 있도록 문제의 형태를 바꾸어 보자면,
이렇게 수평으로- 관객이 보는 방향에서-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진행되는 사건이냐, 아니면,
이렇게 수직으로 이어지되, 아래에서 위로 진행되는 사건처럼 보이느냐는 문제가 된다. 어떻게 보이시는지?
그림 안에서 화가의 처치를 확인해 보면 우선 첫째로 '시제'를 차별화했다. 보면 태자를 찾으러 나가는 사람들 손에 다 촛불 혹은 횃불이 들려 있다. 즉, 새벽에 구이가 잠에서 깨어나면서 궁 안에 난리가 났고, 날이 밝기도 전에 사람들이 급하게 태자를 찾으러 나섰다는 설정이다.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원문에 구체적으로 구이가 깨어난 시점이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이튿날'은 자정이 지나면 그때부터 이튿날이니 이렇게 처리한다고 해서 원문에 어긋나는 것도 없다.
한데 이것만으로는 완벽하지가 않다. 이를테면 차익이가 늦은 오후쯤 돌아왔다 치면 정반왕이 급한 마음에 다음날 아침까지도 못 기다리고 바로 그날 밤에 신하들을 급파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화가가 준비한 두번째 처치 방안이 바로 등장 인물들의 '복색'이다.
자, 위 '가로 이미지' 하단 가운데 쯤, 구이가 바닥에 쓰러져서 통곡을 하고 있는 전각 앞에차례로 녹색/붉은색/푸른색/(옅은)분홍색 옷을 입고 꿇어 앉아 있는 내관 넷이 보이시는지? 그대로 시선을 따라서 왼쪽으로 가보면 녹색 옷을 입은 사람은 문루 위에 올라가 있고, 붉은색과 분홍색 옷을 입은사람은 말을 타고 있으며, 그 옆으로 청록색 옷을 입은 새로운 인물이 보인다. 말하자면 푸른 옷은- 아마도 대전에- 급보를 알리러 갔고, 나머지 세 사람은 가다가 청록색 옷을 입은 내관을 한 명 더 데리고 태자를 찾으러 출발한다는 설정이다. 근데 화가가 유독 푸른색 옷을 찍어서 보낸 이유가 있다.
여기서 세로 이미지를 보면, 화면 아래 오른쪽에 서 있는 세 명이- 사진이 어두워서 잘 안 보이시겠으나- 일산과 (봉황이 그려진) 부채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내관들인데, 모두 푸른색 옷을 입고 있다! 예를 들어 위 분홍색 옷 대신 푸른 옷이 그려져 있다면 혹시라도 셋 중 하나가 위로 이동한, 곧 세로로 연결되는 사건으로 오인될까봐 아예 옷 색깔이 하나도 겹치지 않게끔 그린 것이다.
그럼 정반왕이 앉아 있는 전각 앞에 꿇어 앉아 있는 다섯 사람은 위와 옷 색깔이 겹치는데, 이건 괜찮은가? 이들은 추심을 나섰다가 고행림에 남아서 나중에 태자의 6년 고행까지 함께하게 되는 교진여 등 다섯 신하들인데, 모두 내관이 아니고 조관(朝官)들이다. 즉, 위에서 말을 타고 태자를 찾으러 나선 사람들을 모두 환관으로 처리한 것부터가 장면의 의미를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한 화가의 안배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문제가 이렇게 복잡해진 것도 화가가- 석가탄생도처럼 수평으로 층층이 쌓아올린 구도를 쓰지 않고- 변각 구도를 썼기 때문이다. 변각 구도를 쓰면 자연히 관객의 시선이 대각선 축을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 한데 마침 사람들이 태자를 '두루 찾아다니는' 장면과 정반왕이 교진여 등 다섯 신하를 파견하는 장면이 이 축선상에 이어져 있으니, 화가도 이러한 구도상의 약점을 인식하고서 혼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한 것이다.
암튼 이렇게 신경을 써놓았는데도 못 알아봐 주면 죽은 화가가 무덤 안에서 돌아눕는다- 그림을 좀 더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이다. 남은 한 장면은 전편에도 잠깐 언급했던 그림 우하단의 연못인데, 이것은 이번 편의 주제와 자연스럽게 연관이 되기 때문에 아래에서 함께 다루겠다.
II. Cui bono
이 '석가출가도', 혹은 정확히는 '석가여래 설산수도상'의 제1폭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태자비인 구이가 그림에서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시 그림을 하나 더 보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지 출처= 소장처= 대만 고궁박물원
위 그림은 '각좌도(卻坐圖)'이다. 한 문제가 후궁인 신부인을 총애해서 늘 황후와 나란한 자리에 앉혔는데, 어느날 상림원에 놀러갔을 때 원앙(爰盎)이 슬쩍 신부인의 자리를 물렸다. 이에 신부인이 노해서 즐겨 앉지 않고, 문제 또한 성을 내자 원앙이 '존비유서(尊卑有序)'라고 간했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전편에 소개한 '절함도'와 더불어 이 둘이 남송대 감계화 장르의 정품인데 황제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그림 오른쪽 중단으로 거의 동일하다- 이곳이 바로 변각구도에서 주인공의 자리, 상석인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떤 구도를 쓰든 시각적으로 주인공은 가운데, '센터' 부근에 위치해 있는 것이 상례인데 변각구도는 화면을 대각선으로 나눴기 때문에 상중앙으로 더 올라가기엔 공간이 너무 좁다. 반대로 하단으로 내려갈수록 공간은 넓어지지만 위치가 너무 바닥으로 치우친다. 황제가 앉을 자리가 달리 없는 것이다.
구이가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정반왕이 그림의 최하단으로 밀려난 것이 특이하다는 점은 석가탄생도의 화면 배치와 비교해도 드러난다. 아래 이미지는 태자의 탄생 장면 바로 아래에 위치한 두 단으로 윗단은 정반왕이 출산 소식을 듣고 람비니원으로 향하는 장면이고, 아랫단은 그보다 앞서 출산 전에 수레를 탄 마야부인이 람비니원으로 이동하는 장면이다.
이 두 단은 위아래로 서로 자리를 바꾸어도 전체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 화가가 이 배치를 선택한 것은 왕은 왕비보다 '위'에, 그리고 화면 전체에서 더 '가운데'에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석가탄생도에 관해서 오영삼 교수는 아예 한발 더 나아가서 이 그림의 탄생단 아랫부분 전체가 강한 위계질서를 표현하고 있다는 견해이다.[각주:2])
아니면 달리 화가로 하여금- 결과적으로- 이런 '하극상의 구도'를 선택케 한 이유가 있을까?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답은 연작에서 나타날 수 있는 '구도상의 연계'이다. 곧, 이 그림에 선행하는 유성출가상의 두번째 폭과 어우러지는 화면의 짜임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위 이미지는 유성출가 판화의 두 번째 면인데, 보시다시피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전 구이와 나인들의 모습이 그려진 전각이 화면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우리의 추측이 맞다면 이 전각이 역시 대각선 구도로 그린 유성출가상의 제2폭의 좌하단을 차지하고, 그 대각선 너머로 태자가 말을 타고 성을 넘어가는 유성 장면이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즉, 만약 병풍처럼 두 그림을 이어붙인다면, 궁성이 '∧' 모양을 이루면서 동일한 전각이 시점을 달리 해서 대칭이 되는- 바꾸어 말하면 세로로 반 접으면 겹치는-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구도상의 '하극상'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연작의 대칭을 맞추기 위한 우연의 일치였을 뿐인 걸까? 적어도 그게 다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아래 이미지 속, 문제의 연못 주변 장면이다.
남편이 즐겨 앉던, 이제는 텅 빈 의자 앞 바닥에 쓰러져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구이의 아래로, 연못 옆에 공작새가 외톨이로 서 있다. 한데 연못 안의 원앙은 누구나 알다시피 '금슬지락'의 상징이다(위에 우리가 찍은 사진은 화질이 안 좋아서 원앙이 잘 안 보일 텐데, 보다 선명한 사진은 정우택 선생이 낸 석가탄생도 연구서에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란다.[각주:3]). 공작은 마치 원앙이 보기 싫어 연못을 외면하는 듯, 혹은 집 떠난 태자를 그리며 성문 쪽을 바라보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있다. 즉, 이 공작과 원앙은 모두 구이의 슬픔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서 화가가 동원한 장치이다. 남편한테 버림받아 울고 있는 아내 앞에 이런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이게 장르가 불화라고 무조건 '소의경전'만 찾고 있으면 당연히 그림이 해명이 안 될 수밖에 없다.
굳이 경전에서 찾는다면, 석보상절 권3의 유성출가/설산수도상에 해당하는 내용 중에 딱 한 군데 연못이 등장하는 대목이 있다:
태자가 출가하시고 여섯 해에 야수타라(耶輸陁羅)가 아들을 낳으시니 석종들이 노하여 죽이려 하였는데 야수[=야수타라=구이]가 불 피운 구들 구덩이에서 맹세하시기를, "내가 잘못이면 아기와 나와 함께 죽고, 옳으면 하늘이 본증을 하실 것이다." 하시고 아기 안고 뛰어 들어가시니 그 구덩이가 연못이 되어 연꽃이 몸을 받으니 왕이시며 나라 사람들이 그제서야 의심하지 않았다.[각주:4]
얘기가 뭔가 뜬금없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석가모니의 생애에 대한 상식과 15c 조선의 상식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현대의 상식은- 초기불교 문헌의 다수설에 따라- 태자가 29세에 출가해서 35세에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지만 15c 버전은 '19세 출가- 30세 성도'이다. 한데 여기서 29세 출가설은 통상 태자가 속된 표현으로 '남자로서 할 수 있는 놀이란 놀이'는 다 해본 뒤에 무상함을 느껴서 출가한다는 식의 전개이고 아들(라후라)도 출가 전에 이미 태어나 있는 반면, 석보상절이 채택하고 있는 설은 태자가 17세에 장가든 다음에도 19세에 출가할 때까지 구이를 계속 멀리했다고 되어 있다- 후대로 갈수록 '인간 싯다르타'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타락한 적이 없는 성자'가 된 것.
그럼 라후라는 어떻게 생겼느냐? 출가 전에 태자가 태자비의 배를 가리키며 말로 '수태고지(Annunciation)'를 하고 떠나면- 그러니 정말로 '동정녀 구이' 혹은 '성모 구이'의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그 6년 후에 구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남편 없이 독수공방을 하던 여인이 애를 배었으니 당연히 왕실에서 난리가 나야 맞을 것이고, 거기서 이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위에 인용된 '연못의 기적'이다. 아무튼 결론은 저본인 석보상절과 연관시켜 보더라도 이 연못은 구이에 연관된 코드라는 것이다- 화가는 적극적으로 '왕의 자리' 주변을 완벽하게 구이를 위한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논점을 되새기면서 아래 '축소판 전도'를 보고 작가가 화면을 짠 수법을 다시 음미해보기 바란다:
보면 한 가지 더 화면 구성이 기막히게 된 것이, '구이의 공간'에서 딱 대각선 건너에 금도낙발 장면이 있다는 점이다. 출가한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의 가슴에 가장 칼을 꽂는 장면이라면 바로 남편이 삭발을 하는 모습일 테니, 구이가 대성통곡하는 이유를 어떻게 이 한 장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겠는가? 작품의 종교적 내용을 잠시 접어두고 이 그림에 제목을 붙인다면 아마도 '구이의 비탄'일 것이다.
그래서 처음 이 그림을 보고 나서는 우리도 설산수도상에서 이 금도낙발 한 장면만 따와서 유성출가상에 덧붙인 것 같다고 추측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저본을 꼼꼼히 읽어보면 주로 설산수도상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내용을 여백을 넉넉히 써서 충실하게 한 화면에 집어넣었을 뿐이다. 이 화가는 팔상의 경계를 무너뜨린 '혁명가'까지는 아니지만, 변각 구도의 특성을 십분 이해하고 '구이의 비탄'이라는 주제를 아주 드라마틱하게 부각시키는 데는 성공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을 제작하게 만든 '조선의 구이'는 대체 누구였을까?
(원래는 호암미술관 전시 리뷰에 붙여서 간단하게 석가탄생도/석가출가도 두 그림의 제작연대를 고찰하고, 그림에 보이는 원대 회화의 영향을 밝히고 끝내려는 계획이었는데 도록 뒤의 논고를 읽고, 또 혹시나 해서 월인석보 및 석보상절의 주해서를 찾아 관련된 부분까지 다 읽고 나니 생각보다 문제가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이웃 일본에 있는 석가출가도와는 달리 머나먼(?) 쾰른에 있는 석가출가도는 단독으로 변변히 연구된 논문이 없는 것 같아 글을 한 편 따로 쓰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석가탄생도에 관해서는 원래대로 필요한 만큼만 짧게 다룰 작정이다.)
우선 이 두 작품처럼 화기나- 위조되지 않은- 관서가 없는 경우에는 그 어떤 질문에 대해서든 그림 안에서 단서를 찾는 수밖에 없으니, 일단 그림부터 먼저 대략 보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이미지 출처: 블로그 주인 현장 촬영이미지 출처: 블로그 주인 현장 촬영
순서대로 위가 석가탄생도(일본 本岳寺 소장), 아래는 석가출가도이다. 이 둘은 함께 팔상도의 한 조를 이루었을 가능성도 제기되는 그림인데- 이때 전자는 팔상 중에 '비람강생', 후자는 '유성출가'로 보는 게 통설이다- 보시다시피 세부 필법은 유사하지만 첫인상은 꽤 차이가 난다. 그럼 이 두 그림의 외관이 차별화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정답은 바로 '구도'이다. 석가탄생도는 화면 상중앙에 중심이 되는 탄생 장면을 넣고, 그 아래위로 대략 4~6단 정도로 공간을 나눠서 화면을 층층이 쌓아올린 반면, 석가출가도는 전각-궁장-산줄기로 이어지는 선으로 화면을 비스듬하게 반분한 대각선 구도를 썼다.
위의 그림은 '절함도(折檻圖)'이다. 한 성제 때 주운이 황제에게 간하다가 끌려나가면서 어전의 난간(檻)을 붙들고 버티어서 종내는 난간이 부러져버렸다. 어사가 주운을 끌고 나간 다음에 좌장군 신경기가 관모를 벗고 바닥에 머리를 찧어 피가 날 때까지 구명을 해서 주운은 겨우 사면을 받았는데, 나중에 성제가 마음이 풀린 다음에 난간을 새 것으로 바꾸지 말고 그대로 이어붙여서 직언을 한 신하를 표창하라 했다는 내용이다.
그림에 관서는 없지만 화풍이나 필력으로 보아 역시 남송 궁정화원의 작품이리라는 데 큰 이견이 없는데, 보면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어전'이 아니라 '어화원'으로 바꾸어서 변각구도의 배경 안에 등장인물들을 '들어 앉힌' 방법으로 구도를 짰다. 해서 변각구도의 산수인물화는 물론이고 고사인물화도 그렇게 찾아보기 어렵진 않은데, 문제는 석가출가도는 절함도처럼 그림 안에 한 장면만 그려진 것이 아니라 한 화면에 여러 사건/장면을 압축시켜서 표현한 불전도(佛傳圖)라는 점이다.
한 화면 안에 많은 장면을 그려 넣으려면 화면을 수평/수직으로, 곧 크고 작은 (직)사각형으로 분할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 위 석가탄생도 역시 한 '층'을 다시 세로로 쪼개서 한 단에 여러 장면을 표현하고 있고,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불화 중에서도 표현할 내용이 많은 관경십육관변상도 같은 경우엔 아예 노골적으로 화면을 네모지게 구획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반면 화면을 사선으로 반 나누면 불가피하게 쓸모 없는 '자투리' 공간이, 여백이 생긴다- 애초에 마하파가 대각선 구도를 들고 나온 것도 정면대칭구도의 빽빽한 북송식 포국에서 벗어나 여백을 넓게 쓰고자 한 이유가 컸을 것이다. 여백/공간의 활용을 염두에 두고 석가출가도를 다시 살펴 보면, (관객이 보는 방향에서) 그림의 좌상단 절반은 설산의 구릉 묘사가 쓸데없이 많은데 비해 사건은 몇 장면 되지 않는다. 대궐 안을 묘사한 우하단은 보다 분주하지만, 오른쪽 끝에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연못은 도대체 석보상절의 어느 대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인지 요령부득이다- 즉, '남는 공간'을 작가가 연못으로 채웠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실제 전시도록에 실린 구주(九州)대학 정수성지보(井手誠之輔)교수의 논고에 따르면, 석가탄생도가 저본인 월인석보/석보상절의 내용 중 21대목 정도를 묘사하고 있는데 비해 석가출가도는 그 절반인 10 대목밖에 되지 않는다.[각주:1]
그렇다면 이 석가출가도의 화가는 왜 뜬금없이 변각구도를 들고 나왔을까? 최소 7~8장면을 포함하고 있는 그림을 변각구도로 그린 사례는 우리가 실물을 본 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웬만한 주요 박물관의 소장품 도록을 다 뒤져봐도 찾지 못했다. 하여 우리가 보기에 이 그림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열쇠는 그림의 형식상 가장 큰 특징인 변각구도를 해명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쾰른본과 대조를 이루는 또 다른 한 폭의 존재'를 상정한 정수성지보 교수의 추측은 일리가 있다.[각주:2] 즉, 원래 한 폭에 들어있던 내용을 반으로 나누어 쌍폭으로 만들기 위해서 여백을 넓게 쓸 수 있는 변각구도를 채택했다는 것이 유력한 한 가지 설명이 된다- 한데 문제는 이 경우에 이 그림은 팔상도 중 '유성출가'의 두번째 폭이 아니라, '설산수도'의 첫번째 폭이라는 것이다.
I. '석가출가도'의 정체
내용을 처음 접하는 분들을 위해서 아주 간단히 배경 설명을 하자면, 먼저 '팔상(八相)'이란 석가모니가 태어나서 득도하고, 포교 활동을 하다가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생애 중 여덟 대목을 가려뽑은 것이다. 즉, '석가의 일생'을 아래와 같은 여덟 장면으로 요약한 것이고, 이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 바로 팔상도이다.(참고로 실록에서 유일하게 언급될 때의 이름은 '八相成道之圖'다.)
① 도솔래의(兜率來儀): 도솔천의 보살이었던 전생의 석가가 여섯 어금니가 달린 흰 코끼리를 타고 내려와 가비라국의 왕비인 마야부인의 배 속으로 들어가는 대목.(월인석보 권2)
② 비람강생(毘藍降生): 마야부인이 람비니원에서 석가를 출산하는 대목.(월인석보 권2)
③ 사문유관(四門遊觀): 가비라국의 태자로 장성한 석가가 성밖 구경을 나가 동/남/서문 밖에서 차례로 노(老)/병(病)/사(死)를 목도하고 번뇌에 빠졌다가, 마지막 북문 밖에서 사문(沙門)을 만나 출가를 결심하는 대목.(석보상절 권3)
④ 유성출가(逾城出家): 태자가 제천과 사천왕의 도움으로 아버지 정반왕을 비롯한 왕실의 제지를 뚫고 성을 넘어 '가출'에 성공하는 대목.(석보상절 권3)
⑤ 설산수도(雪山修道): 설산으로 출가한 석가가 여러 선인들을 찾아 배움을 얻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고행림에서 6년 고행을 마치는 대목.(석보상절 권3)
⑥ 수하항마(樹下降魔): 석가가 마침내 보리수 아래서 여러 가지 방해를 일삼는 마왕을 항복시키고 정각을 이루는 대목.(월인석보 권4)
⑦ 녹원전법(鹿苑轉法): 깨달음을 얻은 석가가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통해 교진여를 비롯한 다섯 비구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최초의 교단(승가)를 결성하는 대목.(텍스트 실전, 석보상절 권5 추정; 팔상 판화 중 '화엄대법'에 해당하는 대목은 월인석보 권4)
⑧ 쌍림열반(雙林涅槃): 사라쌍수(娑羅雙樹)가 동서남북으로 에워싼 자리에서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는 대목.(석보상절 권23)
여기서 석가출가도가 팔상도의 일부라면 ④ 유성출가(逾城出家)에 해당하는 것이냐, 아니면 ⑤ 설산수도(雪山修道)에 포함되는 것이냐가 이 장의 논점이다.
먼저 가장 알기 쉽게, 화면 좌상단에 출가한 태자가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장면은- '금도낙발(金刀落髮)'이라는 명칭도 쓴다- 아래 이미지 하단에서 보시다시피 월인석보(1459)에 삽입된 팔상 판화에선 엄연히 '설산수도'에 들어있다. 금도낙발 위로는 까치가 머리에 둥지를 짓고 새끼를 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는 태자의 6년 고행 장면이고, 그림 왼쪽이 잘린 듯 보이는 것은- 우리의 편집이 아니라- 이것이 팔상 하나당 각 2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판화의 첫번째 면이기 때문이다.(이하 팔상 판화 도판은 중간본 석보상절 권11에 들어 있는 것으로, 서강대 도서관에 소장된 초간본 월인석보 권1에 수록된 판화와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이 권11은 원래 삼성미술관 소장이었는데 아마 거기 그대로 있었다면- 거의 일본 스타일로 '디지털화'에 약한- 기관 특성상 이 정도 고해상도 이미지는 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2021년에 소위 '이건희 컬렉션'의 일부로 기증되어서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아무나 무제한 다운로드 가능하다.)
이미지 출처=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뿐만 아니라 태자가 사냥꾼을 만나서 옷을 바꿔 입고, 차익이 태자의 보관/영락을 받아들고 환궁하는 장면들, 즉 석가출가도의 화면을 거의 40% 이상 차지하는 사건들이 모두 '설산'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반대로 유성출가상의 핵심인 '유성', 곧 태자가 제천과 사천왕의 도움을 받아 성을 넘는 장면은 말꼬리 하나 안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유성'은 빠지고 '설산'이 대신 들어간 '설산출가상'인가? 그런데 이런 '조합'이 가능하긴 한 것일까?
답은 이 그림의 저본인 석보상절 권3을 찬찬히 읽어보면 알 수 있다. 팔상 중에서 사문유관-유성출가-설산수도는 한 권 안에서 연이어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에 15c 당시의 화가도 필시 텍스트를 받아들고서 어디까지를 유성출가에 넣고, 어디까지를 설산수도에 넣을 것인가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니 같은 마음으로 유성출가와 설산수도가 이어지는 문제의 대목을 한번 읽어보자는 것이다:
[...] 불성(沸星)이 돋아 달과 어울리거늘 제천들이 크게 이르되, "불성이 이미 어울었으니 이제 때이니 빨리 나가소서." 다시금 사뢰었다.
그때 오소만[졸음의 신령]이 와 있으므로 성안의 사람이며 공작이며 새들에 이르기까지 몹시 피곤해 잤다. 태자가 차익이 부르시어 건척이 길마 지어 오라 하시니 그때에 말도 울고 차익이도 울거늘, 태자가 다 울지 말라 하시고 방광하시어 시방을 다 비추시고 사자 목소리로 이르시기를, "옛날의 부처 출가하심도 이리 하셨다."
태자가 말을 타고 나가시니 제천이 말 발을 받치고 차익이조차 잡으며 개(蓋) 받치고, 범왕은 왼쪽 곁에 서고 제석은 오른쪽 곁에 서고 사천왕이 시위하여 허공으로 성 넘어 나가셨다. 태자가 이르시되, "보리를 못 이루면 아니 돌아오리라." 제천이 이르되, "좋으시구나!" 하였다. 태자가 아침 새 800리를 가서 설산 고행림에 도착하셨다.
이튿날에 구이 자다가 일어나시어 땅에 거꾸러져 우시며, 왕과 대애도도 슬퍼하여 우시며 나라의 사람이 다 슬퍼하여 두루 찾아다녔다.
태자가 보관, 영락을 차익이 주시고 이르시되, "네 가 왕께 사뢰라, 정각을 이루면 돌아가리라." 차익이도 울고 말도 꿇어 태자의 발을 핥으며 울었다. 태자가 왼손으로 머리를 잡으시고 발원하시되, '이제 머리를 밀어 중생들과 함께 번뇌를 쓸어버릴 것이다.' 하시고 손수 잘라 허공에 던지셨는데 [...][각주:3]
보이시는지? 유성출가 대목은 '태자가 ~ 설산 고행림에 도착하셨다'로 딱 끝이다. 우리가 볼드체로 굵게 표시한 '이튿날'부터는 전부 설산수도 대목인 것이다. 또한 상기 인용 부분 뒤로 제석이 태자의 머리카락을 받아 도리천에 가서 탑을 세우고, 태자가 사냥꾼과 옷을 바꾸어 입고, 차익이 환궁하는 사건들이 이어지기 때문에 석가출가도에 묘사된 모든 장면들 역시 이 '이튿날에~' 이후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야기의 주인공인 태자가 설산으로 이동을 완료한 시점부터 설산수도상이 개시되는 것이 논리적으로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애초에 판화는 달랑 책 두 면이 전부라 화면이 좁다. 석가탄생도와 비람강생 판화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탱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만 간추려서 판화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1459년(혹은 1447년) 당시에 설산수도의 핵심 장면 중 하나라고 판단한 금도낙발을 포함하고 있는 그림은 설산수도상의 탱화라고 봐야 상식적이다.
반면 석가출가도 안에 월인석보에 실린 '유성출가' 판화와 겹치는 장면은 단 하나도 없다. 혹 아래 판화 이미지 우하단에 말 앞에 꿇어앉아 울고 있는 차익의 모습을 '차익사환(車匿辭還)' 혹은 '차익환궁(車匿還宮)' 장면의 묘사로 오해할 수도 있겠으나, 둘 다 아니다. 왜냐? 둘 중 하나가 되려면 차익의 손에 태자가 썼던 보관이 들려 있어야 하는데- 혹은 명대 간행된 "석씨원류(釋氏原流)"를 베꼈다면 말 안장 위에 얹혀 있다- 보시다시피 말이나 사람이나 둘 다 빈손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알아챘겠지만, 이 장면은 위에 인용된 석보상절의 본문 중에 태자가 차익이를 불러서 말 안장 지워오라 하니 말 건척이와 차익이가- 주인이 집을 떠나려는 게 슬퍼서- 울었다는 대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지금 그림 왼쪽 가에 서 있는 사람이 태자이고, 그 옆으로는 사천왕 중 지국천왕과 증장천왕이 권속을 거느리고 태자를 시위하기 위해 도착한 모습이다(나머지 두 사천왕은 판화의 둘째 면에 그려져 있다). 애당초 아직 허공으로 뜨기도 전의 태자를 바로 앞에 놓고 설산에서 귀환하는 차익을 그려넣는다는 것은, 소위 이시동도법(異時同圖法)의 남용 내지는 아주 '엽기적인' 용례가 될 터이니 두말할 것도 없이 화가의 본래 의도가 아닌 것이다.
한데 이런 오해는 연원이 깊다. 아래 그림은 조선 후기 순천 송광사 팔상도(1725) 중 '유성출가'인데, 그림 상단 중앙에 태자가 성벽을 넘는 장면 오른쪽에 엉뚱하게 차익환궁을 그려넣었다(보면 우상단 전각 안에 정반왕을 비롯한 가족들이 위치해 있고, 계단 아래 무릎을 꿇은 차익이 태자의 의관을 바치는 구성이다). 그림을 좀 더 살펴보면 하단에 성을 넘기 직전 장면은 월인석보의 판화를 주로 베껴서 넣고- 곧, 석씨원류의 '차익사환'과는 무관하다는 말이다- 차익환궁은 별도로 한 장면을 구성했기 때문에 이것은 이시동도법의 남용까지는 아니고 자체로는 가능한 구성이지만, 석보상절 원문의 흐름과는 거리가 멀다.
이미지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한편 조선 후기 작품들 중에 예천 용문사 팔상도(1709)처럼 차익환궁을 '설산수도'에 포함시킨 경우도 존재하긴 한다. 아래 왼쪽 이미지를 보면- 일견 석가출가도 비슷하게- 화면 최하단에 차익환궁 장면을 배치하고, 그 위로 금도낙발/차익사환/6년고행 장면을 차례로 쌓아올려서 화면을 구성했다. 그럼 이 용문사 팔상도의 작가는 석보상절의 내용을 알고 그린 것일까? 아니다. 오른쪽 '유성출가'에서 문제의 장면을 찾아보면- 이미지 상태가 불량해서 잘 안 보이시겠으나- 생뚱맞게 '초계출가(初啓出家)'라고 적혀 있다. 이게 초계출가라면 정반왕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설마 태자가 무릎 꿇은 차익이한테 처음으로 출가를 고하는 장면이라서 초계출가인가?
이 화가가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석씨원류이다- 석씨원류는 명나라에서 15c에 간행된 책이지만, 조선에서는 17c 후반에 번각된 이후로 큰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일단 판화에서 그림은 베껴 놓고 봤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고, 석씨원류에 '야반유성(夜半逾城)'의 바로 앞 장면이 초계출가이니, 그냥 그대로 따서 갖다붙인 것이다.(조선에서 번각한 석씨원류는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검색하면 관외 아무 데서나 디지털화한 이미지를 열람할 수 있고, 뷰어 안에 이미지 저장 기능도 따로 있다. 좀 더 일목요연하게 '썸네일' 식으로 각 장면들이 정리된 표를 보고 싶다면 이영종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의 부록을 참조하기 바란다.[각주:4])
(이미지 출처= 예천문화원)
거슬러 올라가면 이 모든 일의 근본 원인은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잿더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석보상절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이 전 24권 중 10권, 월인석보는 25권 중 20권 정도로 여기저기 한두 권, 많아야 서너 권씩 흩어져 있다. 17세기 후반~18세기 초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달랐을 것 같지는 않다- 300년 넘게 세월이 흐른 만큼 지금보다 남아 있던 권수는 더 많았겠지만, 어느 사찰/기관이든 완질을 갖추고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러니 혹 어느 누가 운 좋게 책머리에 판화가 붙어 있는 석보상절 권11을 입수했다 한들, 설산수도/유성출가 내용이 들어 있는 권3은 조선 팔도 어느 산골에 처박혀 있는지조차 거의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책이 있어야 내용을 대조해볼 생각이라도 하지 않겠는가?
조선 후기 이후 저본에 대한 이해 부족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팔상 판화의 설산수도상 중 '발가선림(跋伽仙林)' 장면이다. 아래 이미지가 판화의 두번째 면이므로 우리가 위에 제시한 첫번째 면과 연결해 보면 무려 설산수도상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는 대목인데, 송광사나 용문사 팔상도에선 아예 전체가 생략이 되어있다- 이유라면 판화가 도대체 무슨 내용을 묘사하고 있는지 이해를 못 했거나, 아니면 뭔지 알았더라도 이 대목을 왜 이렇게 중요하게 취급했는지를 납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기실 조선 전기의 작가들이 이 장면을 이렇게 비중 있게 다룬 이유는 간단하다- 설산수도상에 해당하는 석보상절 본문 중에서 이 발가선림 대목이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태자가 발가선림(跋伽仙林)에 가시니 저 수풀에 있는 기러기, 오리와 앵무와 공작과 구욕과 원앙과 가릉빈가와 명명과 가비라 등 여러 새들이 태자를 보고 각각 훌륭한 울음을 울며, 저 수풀에 있는 벌레, 짐승들도 다 기뻐하여 태자께 왔다.
그때 그 수풀에 바라문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소젖을 짰는데 그 젖이 짜도 한가지로 나오므로 선인들이 '하늘의 신령이로구나' 여겨 태자를 청하여다가 앉히니, 선인들이 다 나무껍질과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꽃과 과실과 풀과 나무를 먹는 이도 있으며, 물과 불과 해와 달을 섬기는 이도 있으며, 물과 불과 재와 가시나무에 눕는 이도 있었는데, 태자가 그 뜻을 물으시니 대답하기를, "하늘에 나고자 합니다."
태자가 이르시되 "네가 구하는 일이 종내 수고를 여의지 못할 것이니 하늘이 아무리 즐거워도 복이 다하면 돌아내려 마침내는 수고로운 길로 가니, 어찌 수고로운 인연을 닦아 수고로운 과보를 구하는가?" 하시어 저물도록 힐난하시고, 이튿날에 "가노라." 하신대 선인이 사뢰기를 "닦는 도리가 다르니 계시라 못합니다." 하였다.[각주:5]
보시다시피 그림 내용에 대한 설명은 위 인용문에 다 들어있다. 우리는 지금 협주(夾注)를 제외하고 본문만 옮겼는데 협주까지 다 포함하면 원문 네 면이 넘는(3:32 ㄱ 뒷부분~ 3:34ㄱ까지) 분량이다. 설산수도상 안에 단일 에피소드로 이보다 분량이 긴 것이 없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내용을 보면 오리나 공작 외에도 가릉빈가(화면 가운데 오른쪽에 새의 몸에 사람의 얼굴이 붙어 있는 새)나 명명(가릉빈가 아래에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인 새) 같은 상상 속의 새들이나, 기이한 옷을 입고 고행을 하고 있는 선인들의 모습처럼 인물/화조/영모에 두루 걸쳐 화가가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는 장면이 많다- 이게 지금 판화라서 만화 같이 보이지 실제 탱화는 위 석가탄생도 같은 공필의 화려한 채색화가 꽤나 볼 만 했을 터, 저본의 분량 배분에 충실하면서 본인(들)의 솜씨도 한껏 뽐낼 수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석보상절이 아니라 단지 팔상 판화와 석씨원류, 그리고 본인들이 알고 있던 석가모니의 생애에 대한 지식에 의존했던 조선 후기 화가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석가출가도'와 짝을 이루는 나머지 한 폭, 즉, 실상은 변각구도의 쌍폭으로 그린 설산수도의 두번째 폭이 대략 어떻게 생겼을지를 추정해볼 수 있다. 우선 판화의 첫 면에 보이는 이련하(尼連河)의 물줄기와 산과 구릉으로 (관객이 보는 방향에서) 우하에서 좌상으로 화면을 대각선으로 반 나눴을 것이고, 상기 발가선림 장면이 그 중 어느 한쪽을 차지하면서 전체 화면의 40% 이상을 점유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태자의 6년 고행과 그 후의 목욕, '우유죽 공양', 이 세 장면은 반드시 들어가야 하고, 좌상단 맨 위쪽엔 태자가 그 죽을 마시고 강물에 던진 바리를 제석이 도리천으로 가져가 세운 금탑이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즉, 지금 이 '석가출가도'의 우상단에 그려진, 삭발한 태자의 머리칼을 가져다 세운 금탑과 어우러져 번쩍번쩍하게 좌우대칭이 되도록 맞춘 구성이다(참고로 한 폭으로 완결된 비람강생상인 석가탄생도는 그림 상단 좌우에 마왕 파순의 궁전과 주 소왕의 궁전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글 첫머리의 사진에서 다시 한번 확인해보기 바란다- 원래 한 폭이었던 설산수도상을 반 나눈 것이라는 우리의 논지를 보다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외 태자의 고행 중에 정반왕 등이 양식을 실은 수레를 보내오는 장면이나, 우유죽을 마시고 나서 태자가 홀로 필발라수로 이동하는 동안 벌어지는 몇몇 사건들이 추가로 들어갈 수 있는 후보인데, 이것은 어디서 새로 그림이 발견되기 전에는 알 길이 없다.
이 장의 논점을 검토하면서 우리가 느낀 것은 '선입견의 무서움'이다. 조선 전기 팔상도는 상기 월인석보/석보상절의 판화를 제외하면 지금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거기에 위 석가탄생도가 1990년대 후반, 석가출가도는 2007년경이나 되어서야 그 존재가 국내에 알려졌다. 즉, 연구자들의 머릿속에 조선 후기 팔상도들이 먼저 입력된 뒤에 이 그림이 나타났을 때, 차익환궁 장면을 포함해서 전각이 그득히 그려져 있는 불전도는 조선 후기 유성출가도와 가장 비슷하게 보였으리라는 것이다- 화면 상단에 태자가 성을 넘어 나가는 장면은 없고 대신 금도낙발이 들어가 있는 게 이상하긴 한데, 아마도 출가 직후의 상황들을 더 중점적으로 묘사한 독특한(?) 출가도가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넘어간 것이다.
한데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출가 이후를 묘사한 출가도'란 표현 자체가 '붕어가 안 든 붕어빵'과가 아니라 '단팥이 안 든 단팥빵'과다- 어불성설인 것이다. 위 첫번째 석보상절 인용문에서 보듯이 유성출가상이 끝나면 바로 설산수도상이 이어지지, 그 '사이'라고 할 수 있는 영역이 사실상 없다. 산수를 배경으로 하는 그림의 절반은- 야반유성 직후에 태자가 성 앞 어디서 머리를 깎고, 옷을 바꾸어 입고 떠나간 게 아니라- 전부 성에서 800리 떨어진 '설산 고행림'에서 '다음날 아침'에 벌어진 일들임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차익환궁이 유성출가상에 들어가 있는 것 또한 단지 조선 후기에 가장 유행했던 팔상도의 한 가지 버전일 뿐이다. 저본인 석보상절/월인석보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있었던 조선 전기, 적어도 16c 초까지는 다른 버전/해석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석가출가도'이다. 이 그림을 독립된 작품으로 본다면 '출가도'라는 명칭을 계속 써도 되겠으나 팔상도 연작의 하나로 본다면 그 정확한 이름은 '설산수도'일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변각 구도가 그림의 내용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To be continued...
정수성지보(井手誠之輔), '석보상절의 불전도: 혼가쿠지본과 쾰른동아시아미술관본',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호암미술관, 2024), pp. 297~301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