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3.1 정반왕의 십이장복에 대한 또 하나의 해석

   사실 간단하다- 굳이 조선 왕을 빗대었다고 해석할 것 없이 그냥 액면 그대로 정반왕을 (황제와 동격으로) 높이려는 의도였다고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15c~16c 초 조선에서 이런 행위는 어떤 역사적 배경, 혹은 맥락에서 이루어졌을까?

   알다시피 이 시기는 유/불/선 삼교가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해온 한반도에서 '이차돈의 사' 이후 근 900여년 만에 가장 심각한 종교적 분쟁이 일어났던 때다. 마침 실록에 당시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보인다:

 

   佛堂成, 設慶讃會 [...] 會罷, 首陽大君圖慶讃會, 又製契文, 列書與會人名, 作軸分與之。注書成任亦與焉, 首陽大君語曰: "汝謂孔子之道, 與釋迦孰優?" 任曰: "孔子之道, 吾嘗讀其書, 粗知其義, 至若釋氏, 吾不嘗見其書, 未敢知也。" 大君曰: "釋氏之道過孔子, 不啻霄壤。 先儒曰: ‘雖欲挫燒舂磨, 無所施。’ 此未知其理而妄言者也。"

 

   불당이 이룩되니 경찬회를 베풀었다. [...] 회를 파하매 수양대군이 경찬회를 그림으로 그리고, 또 계문을 지어 모임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벌여 써서 축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주서 성임도 거기에 참여하였는데 수양대군이 말하기를, "너는 공자의 도와 석가(의 도)가 무엇이 낫다고 이르느냐?" 하니 임이 가로되, "공자의 도는 제가 일찍이 그 글을 읽어서 그 뜻을 대강 알거니와, 석씨에 이르러서는 제가 일찍이 그 글을 보지 못하였으니 감히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대군이 말하기를, "석씨의 도가 공자보다 나은 것이 단지 하늘과 땅 차이 정도가 아니다. 선유가 가로되 ‘비록 토막 내고 불태우고 찧고 갈고자 할지라도, 베풀 데가 없다.’ 했으나, 이는 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말한 것이다." 하였다.[각주:1]

 

   첫머리에 '불당'이라 함은 말년에 본심을 드러낸 세종대왕의 지시로 건설된 내불당을 말하고, 끄트머리 다 와서 갑자기 '토막 살해' 비슷한 얘기(挫燒舂磨)가 나오는 건 수양대군이 소학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내용인즉 불교에선 윤회설에 따라서 자꾸 절에 와서 공덕을 많이 쌓지 않으면 죽은 다음에 지옥에 떨어져서 칼로 베이고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등 온갖 고문을 다 당한다고 겁박하는데, 실상은 사람이 죽으면 신체는 썩어 문드러지고 혼백은 흩어지는 것이니 고문을 할래야 할 데가 없다(無所施)는 것이다- 물론 독실한 불교 신자인 수양대군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망령된 유물론'이다.

   난데없이 봉변을 당한 성임(1421~1484)은 조선 초 최고 명문가의 하나인 창녕 성씨 집안이고, 비슷한 또래의 안평대군(1418~1453)/강희안(1419~1464)/이영서(?~1450)가 모두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정난종(1433~89)과 더불어 조선 제일을 다투었다는 명필이다. 수양대군이 (여러 모로 이용가치가 있을) 성임을 슬쩍 한번 떠본 것일 수는 있지만, 대화의 내용이 거의 '초딩' 수준임은- 공자하고 석가하고 싸우면 누가 이겨요?-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 기사를 읽다가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아니면 중학교 1학년 때쯤 되었던 것 같은데, 쉬는 시간에 교실에서 절에 다니는 친구와 교회에 다니는 친구가 믿음을 놓고 언쟁하는 소리가 들렸다. 교회 다니는 친구 왈, 예수님은 아빠가 목수라도 '신의 아들'이고 석가모니는 제아무리 왕자라도 '사람의 아들'이니, 예수님이 더 높다(?)는 것이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는 말도 있지만, 이 경우는 단지 어른들의- 그러나 애들보다 더 유치한- 싸움을 반영하고 있을 뿐일 것이다. 기독교도- 특히 특정 종파들은- 꽤나 호전적인 종교지만, 성리학도 유교 안에서는 '근본주의' 세력이다. '이단'을 극단적으로 배척한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그리고 성리학적 세계관에서는 중국의 천자가 '우주의 중심'이고, 정반왕은 '서역의 오랑캐 번왕'에 지나지 않는다- 역시 상하관계가 아주 명확한 것이다.

   여기서 잠시 그림 안으로 돌아와서 석가탄생도의 최상단 우측을 살펴 보면, 애당초 조선의 팔상도에 십이장복이 그려지기 시작한 근본 원인으로 보이는- 즉, 처음부터 이론의 여지없이 십이장복을 입고 있어야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보시다시피 이는 바로 중국의 천자, 주 소왕이다. 십이장복의 묘사가 간소한 것은- 다만 우리가 예전에 설명했던 바와 같이 양 어깨에 해와 달은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지금 위 이미지에 보이는 주 소왕의 실제 크기가 같은 그림 속 정반왕의 1/3, 대략 머리에서 가슴팍 정도 길이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보면 뒤쪽 전각의 묘사도 상당히 간략화되어 있는데, 가용한 가장 작은 크기의 붓을 써도 이 이상의 정교한 묘사는 어려웠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자, 그럼 여기서 정반왕이 원래대로 조선 왕의 복식인 구장복을 입고 있었다면 어떻게 될까? 한 화면 안에 십이장복을 입은 주 소왕과 구장복을 입은 정반왕이 공존한다면, 이는 심지어 불전도에서도 상기한 '성리학적 위계질서'를 그대로 용인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생긴다- 정반왕도 석가모니도, 본래 '천자의 신민'임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정반왕에게 십이장복을 입힌 의미란, 말하자면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의 혈통도 서역의 천자 집안이다, 너희 성리학자들이 사모의 마음이 사무쳐서 1년에 네 번씩 예복을 갖춰 입고 (북경 방향으로) 허공에 대고 절하는- 망궐례(望闕禮)라고 한다- 중국의 천자에 꿇리지 않는다'라는 것이 된다. 좀 포장해서 말한다면, '유불이 대등하다'는 개념의 발로인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원본의 화가가 무슨 '성리학적 세계관'을 의식하고 그림 안에 주 소왕을 넣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아래 이미지에서 보다시피 석가탄생도의 왼쪽 상단엔 마왕 파순의 궁전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화가의 의도는 단순히 그림 최상단에 좌우대칭으로 번쩍번쩍한 궁전 2개를 그려서 장식하려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파순은 팔상 중에서 '수하항마상'의 주요 등장인물이기도 하므로, 여기에 미리 살짝 등장시켜 놓는 것도 이런 스토리가 있는 연작에선 좋은 구성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보고 넘어갈 수도 있을- 아니, 그렇게 넘어가야 정상일- 그림안의 디테일에 손을 댈 만큼 유불간의 감정대립이 극에 달한 계기는 무엇일까?

   이 그림의 제작시기로 유력한 성종~연산군대는 억불정책이 꾸준히 시행된 시기이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성종 23년(1492)의 '금승법(禁僧法)' 파동이다. 이는 이 파동이 유불간 갈등의 클라이맥스 중 하나임과 동시에 삼전 중에서 두 사람, 곧 인수대비와 인혜대비까지 깊숙이 개입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금승법의 배경이 바로 한 해 전인 1491년에 성종이 거의 온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북면을 방어해야 하는 평안도/황해도를 제외한 6개도에서 정규군 2만을 징발해서 함경도 국경 밖으로 대규모 정벌을 감행했다가 고작 여진족 수급 9개를 베어온 사건이다.('신해북정'이라고도 부르는 이 원정은 성종대 조선이라는 나라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갔는지 그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다만 미술에만 관심이 있고 역사에는 별 관심이 없는 분들은 아래 박스는 건너뛰어도 무방하다.)

 

- 성종과 허종의 허황한 원정 -

 

: 이 원정이 실패한 이유는 아래 3가지로 간단히 정리해볼 수 있다.

 

(i) 무모한 겨울 원정

   도원수 허종이 원정군을 끌고 두만강을 건넌 것이 음력 10월15일, 양력으로는 11월25일이었다. 위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때쯤이면 중부 이남지방의 한겨울보다도 더 추울 때다. 무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피하는 것은 용병의 기본 중 기본이다. 당장 세종/세조조에 여러 차례 북방 원정을 하면서 이렇게 늦게 출발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겨울 원정'은 성종 때만 벌어진 현상인데, 그것도 처음 성종 10년(1479)에 병력을 움직인 것은 조선이 자의로 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가 건주여진을 정벌하는 타이밍에 맞춰서 협공을 하자고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10월을 추천한 것은 허종이고 '보름날'로 날짜를 못 박은 것은 성종이니, 이는 오롯이 이 두 사람의 책임이다.

(ii) 불필요한 대군의 동원

   원정 실패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 정규군 2만이면 15c 조선 최대의 원정이다. 이전 기록은 세종 15년(1433) 최윤덕 장군의 파저강 1차 정벌 때의 1만5천인데, 그때 병력 구성은 평안도에서 1만, 황해도에서 5천이었다- 눈치채셨는지? 이게 함경도/강원도 쪽은 인구밀도가 희박해서 당시 조선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각각 7천/1천, 합계 8천이었고 이것이 정확히 세조 6년(1460)의 '경진북정' 때 신숙주가 원정군으로 동원한 병력이다. 즉, 1만5천 이상의 대병력을 두만강 쪽으로 동원하려면 경군을 차출하는 것만으로는 턱도 없고, 충청/전라/경상도에서 대규모로 징집을 해야만 했다.

   하삼도의 병력을 이보다 더 대규모로 동원한 사례는 바로 세조 13년(1467)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인데, 이때는 함경도가 반란의 근거지라 사정상 달리 병력을 동원할 곳이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해야 할 적군의 성격인데, 이시애의 반란군은 회유나 계책에 안 넘어오고 근거지에 웅거해서 버티면 ‘포위 공격’으로 섬멸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으니 처음부터 대군을 동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상대였다. 반면 여진족의 주특기는 '게릴라전'이다. 기병 위주의 소규모 병력으로 노략질을 일삼다가 조선의 정벌군이 온다고 하면 도망치는 집단인데, 대규모 보병을 끌고 가봤자 포위 자체가 안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8~9천을 초과한 인원은 사실상 병력이 아니라 군량미만 소모하는 '짐짝'을 끌고 간 것이나 다름없는 이유다.

   이것도 원래 허종이 1만5천씩이나 달라고 한 것을 성종이 거기다 5천을 더 얹었다. 이 2만이라는 것은 전투병력이고- 정군(正軍)이라고 부른다- 전투병력 1인당 지원인력 1명을- 이쪽은 보인(保人)이라 한다- 붙이기 때문에, 실제 원정에 나선 인원은 4만이나 된다. 원래 병력수는 무조건 '다다익선'이라고 생각하는 게 무능한 지휘관들의 공통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iii) 정찰 실패 & 군량 계산 착오

   원래 두만강 북쪽은 소규모 여진 부락이 사방에 흩어져 있어서 조선군 단독으로는 발각되지 않고 정찰하기가 몹시 까다로운 지역이었다. 허종의 계획은 두만강가의 조선 국경에 걸쳐 살던 성저야인(城底野人)들 중 일부를 길잡이로 앞세운다는 것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이중간첩'일 수밖에 없다. 또, 국경밖의 여진족들이 싹 다 토벌되면 본인들의 이용가치가 없어져서 '토사구팽' 당할 것이 뻔한데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왜 거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는가?

   결국 조선군은 마지막 순간까지 목적지까지의 정확한 거리를 알지 못한 채로 원정에 돌입한다. 정벌의 목표였던 니마거(尼麻車) 올적합 부락이 대략 5~6일 노차라고 듣고 15일치- 실록에는 10일치만 가져갔다는 언급도 있는데 확실치 않다- 양식을 준비해서 갔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이미 9일이 지나버린 것이다!  이미 정보가 다 새서 전투라고는 척후대가 적과 한 두 번 부딪히고, 텅 빈 니마거 부락을 불태우고 회군하는 길에 적에게 후미를 기습당한 것이 전부였다. 중부지방 이하에서 징발된 군사들은 그저 난생 처음 겪어보는 추위에 빈속으로 행군을 하다가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

 

   전과는 너무나 약소한데 비해 예상외로 아군의 인명피해가 커지자 당황한 허종은 두만강을 건너 돌아오자마자 군마의 숫자를 제대로 점검하지도 않고 그대로 원정군을 해산해버린다. 군대 갔다 온 한국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이른바 '가라 보고(=허위보고)'를 시작하기 위한 준비였다- 곧, 처음 종사관 이수언을 한양으로 보내 상황보고를 할 때는 '전사자가 한 명도 없다'고 아뢴 것이다. 이때가 성종 22년(1491) 11월10일인데, 허종은 원래 함경도(당시 이름은 영안도) 관찰사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로 돌아와서 성종을 대면한 것은 다음해 4월이나 되어서였고, 이 자리에서는 말을 또 바꾸어 두만강을 다시 건넜을 때까지 전사자가 10여명, 동사자가 11명밖에 없었다고 보고한다. 요는 사망자가 이 숫자를 넘어간다면 그것은 전부 함경도 끝자락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죽은 것이니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더 기막힌 것은 허종이 본인은 15일치 양식에 더해서 20일치 미식(糜食: 곡식을 볶아서 가루로 만든 비상식량)을 더 가져가라고 명령했는데, 군사들이 무거운 짐을 지기 싫다고 양식을 조금밖에 안 가져갔다고 변명한 것이다. 군량미에 본인들의 목숨줄이 걸려 있는데 도원수의 명령을 군사들이 멋대로 어겼다는 것 자체도 납득이 잘 안가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 원정군은 '당나라 군대'였다는 말밖에 안 되질 않는가? 이렇게 군령이 제대로 안 서는 부대를 만든 책임이 도원수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한테 있을까?

   이렇듯 사실상 본인이 원정군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다는 자복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병사들이 조선땅으로 복귀해서 부대를 해산하자마자 무더기로 죽어나가기 시작했다는 말도 한없이 미심쩍었지만 성종은 허종의 말이 다 옳다고 하고 대강 덮었다. 성종이 개인적으로 허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너도나도 반대하는 원정을 둘이 머리 맞대고 추진했을 때부터 성종과 허종은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였다- 모인 군사로 반역을 도모하거나 국왕의 명령을 중대하게 어긴 경우가 아니라면 도원수를 처벌한다는 것은 곧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성종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 대면보고 약 한달 후 허종은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만약 2년 후에 세상을 떠나지만 않았다면, 허종은 이 원정의 부원수였던 성준보다 먼저 영의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정확히 몇 명이 죽었는지는- 조선으로서는 수치스러운 기록이다- 실록에 적혀 있지 않다. 다만 강원도의 계본에 40여명이 사망했다는 기사로부터 합리적인 추정치는 내볼 수 있다:[각주:2] 즉, 강원도가 1천/2만, 곧 전체 원정군의 1/20을 감당했으므로, 단순히 ×20을 하면 800명이 나온다. 근데 강원도가 고산지대는 북방 지역 만만치 않게 춥고 함경도와의 이동거리도 가장 가까우니, 추위에 약하고 이동거리가 더 먼 전라/경상/충청 지역 병사들은 이보다 몇 배 더 많이 죽었을지 헤아리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복귀 중 탈영한 병사들이 각 도의 통계상 사망으로 잡힌 숫자가 상당했으리라는 점을 감안해도 위 800명은 보수적인 추정치이고, 실제로는 천 단위를 가볍게 넘어갔을 가능성이 많다. 여진족 수급 하나를 베는 데 조선군은 최소 근 백 명씩 죽은 셈이니, 참혹한 결과였다.

   그러나 전쟁을 승전으로 포장하려면 마땅히 논공행상이 있어야 하는 법, 이 실패한 원정에 포상을 준다고 하자 좋은 '먹잇감'을 발견한 대간들이 득달같이 들고 일어나서 여러 차례 공방이 이어진다- 아래는 우리가 그 중에서 성종과 사간원 사간 최관, 사헌부 집의 정석견 사이에 오간 문답 중 일부만 발췌해서 정리한 것이다:[각주:3]

 

   최관: "양식이 부족했던 것은 사졸의 잘못이 아닙니다. 만약 장수가 명령을 내렸다면 사졸이 어찌 따르지 아니하였겠습니까?"

   정석견: "군사가 몇 달을 버틴 것이 아니니, 그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종: "군사의 잘못이다. 그러니 논공은 마땅히 장수에게 먼저 해야 한다."
   최관: "신은 마땅히 그 죄부터 먼저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종: "군사가 많이 죽은 것을 가지고 죄줄 수는 없다. 비록 집에 있었더라도 어찌 병들어 죽는 자가 없었겠는가?"

 

   이 정도면 거의 인면수심이다- 그럼 나라에서 애초에 가만히 집에 앉아 있어도 병들어 죽을 법한 약골들을 ‘장정’이랍시고 선발해서 천리 밖으로 원정을 보냈단 말인가? 아들 잃은 부모, 가장을 잃은 식솔들이 성종의 이 말을 직접 들었다면 아마 전부 역도로 돌변했을 것이다. 공정성을 위해서 덧붙이자면, 평소 성종의 인간성이 이렇지는 않았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나타나는, '현실 부정'의 심리가 더해져서 이렇게 '가짜 뉴스로 먹고 사는 정치 유튜버' 수준의 궤변을 늘어놓게 되었으리라.

   이 신해북정에 대해서 '잘 준비된 원정도 실패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는 식의 논평도 있지만, 그것은 이 원정을 정치·외교사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전사(戰史)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은 때문이다. 병력 동원을 비롯한 원정의 준비, 원정이 종료된 직후 상황을 보고하는 계본이나 성종에게 행한 대면보고를 면밀히 살펴 보고, 또 이를 세종/세조조에 있었던 원정과 비교해 보면 조선의 국방력이 이미 성종대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음이 드러난다. 성종 때 조선이 큰 난리를 겪지 않은 것은 단지 여진과 일본이 모두 분열되어 있어 쳐들어올 만한 세력이 없었던 까닭이니, 그저 운이 좋았을 따름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원정의 실패를 성공으로 포장하는 것은 왕왕 있는 일이기에 성종만 비난할 수는 없다. 그보다 조선은 이 실패를 와해된 국방력을 재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만 했는데, 성종은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실록에서 이 원정에 관련된 기록을 찾아 읽다 보면 성종의 군사적 무능함에 치가 떨릴 지경이다. 이후에도 조선이 국방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땜질 처방에 의존하다가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III. 3.2 금승법과 인수대비 

   아무튼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허랑방탕한 원정의 '나비효과'로 금승법이 태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때 조선은 이시애의 난 이후로 거의 한 세대 동안 평화로웠는데 중부 이남 지역의 장정들을 유례없이 대규모로 북방 원정에 동원한다고 하니 아들들을 머리 깎여서 절로 들여보내는 사례가 증가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이 전쟁터에 나가서 개죽음 당하는 것을 좋아할 부모가 몇이나 되겠는가? 말하자면 '합법적인 병역 기피'였고, 도첩을 신청할 돈이 없으면 그냥 무단으로 절로 도망해서 중이 되는 경우도 이미 많았다.

   당시 성종의 최대 현안 중 하나가 국방이었고, 이 '병역 기피 사태'에 본인이 원인 제공을 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조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발단은 성종 22년(1491) 12월 2일, 성종이 당시 개성유수 유순에게 불법적으로 중이 된 자를 수색해서 역을 정하라고 하서한 것이다. 그러자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이 이를 기화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 병역 기피에 관한 성종의 관심을 이용해서, 말하자면 '억불정책의 끝판왕'을 관철시켜 보려고 시도한 것이다.

   성리학적 명분론으로 무장한 삼사의 요구사항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도첩이 없는 중을 강력한 연좌제를 적용하여, 시쳇말로 '싹 다 잡아들여서' 군역에 충당할 것. 둘째, 경국대전에서 도첩제와 승과, 그리고 중을 잡아가둘 때와 절을 수색할 때 반드시 각도 관찰사가 임금에게 계문(啓聞)하게 한 조항들을- 이는 세조가 만든 법이다- 전부 삭제해버릴 것.

   처음엔 성종과 정승들은 둘 다 반대였다- 경국대전에 손대라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불법 승려'를 추쇄하는 것도 필요한 만큼만 하면 되지 전국적으로 소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삼사에서 물러서지 않고 돌아가면서 집요하게 석 달을 간쟁한 후인 다음해(1492) 2월 초, 성종이 마침내 내놓은 방안이 도첩의 신규 발행을 중지하는 것이었다- 아마 이때는 '합법적 병역 기피'의 통로를 사태가 잦아들 때까지 막아놨다가, 나중에 형편을 봐서 다시 풀어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각주:4] 삼사에서도 요구사항은 둘 다 거부당했지만 소기의 성과는 이룬 만큼 두어 번 더 거론하다가 다른 이슈로 옮겨간다.

   이 정도로 마무리 되나 싶던 사태가 급속히 악화된 것은 이 해 10월이었다. 성종이 전격적으로 작년 12월부터 석달 간 그토록 거부하던, 강력한 연좌제를 적용한 추쇄를 재가한 것이다.[각주:5] 성종이 심경변화를 일으킨 이유는 실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데, 어쩌면 도첩 발행을 정지한 후에도 병역 기피가 줄고 있지 않다는 보고가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2월 초까지만 해도 성종이 북정으로 인한 아군의 손실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원정군의 인원 점검을 마친 각도의 계본이 1차로 올라온 것은 늦어도 3월초 이전이지만, 제때 복귀하지 못하고 뒤에 처진 병사들의 명단과 이를 다시 대조하는 작업은 4월에 도원수 허종이 복귀한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몰자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한 후에는 성종의 심산이 달라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즉- 상기한 우리의 추정치가 옳다면- 본인이 무리한 원정으로 축낸 군사의 숫자를 벌충하려면 도첩이 없는 중을 최소 1천 명 이상 잡아들여야 겨우 '본전'이 된다. 여기에 원정 직전과 그 이후에 이루어진 병역 기피까지 감안하면 적어도 한동안은 강력한 추쇄를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금승법을 성종~중종조에 지속적으로 억불정책이 강화되는 흐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틀리지는 않는데, '왜 하필 1492년이었느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한 해 전 북방 원정의 내막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좌제라는 게 이만저만한 수준이 아니고, 도첩 없이 몰래 중이 되겠다는 자를 제자로 받아준 중과 그 절의 주지는 도첩이 있어도 군역에 넣고, 심지어 한번 검거되었다가 다시 도망친 중을 숨겨준 절은 아예 그 절의 중들을 통채로 잡아다가 군역에 넣는다는 식이었다. 이에 참고 있던 불교계의 불만이 폭발한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라에서 정한 법을 뒤집을 수단이 있을까? 불교를 깊이 신봉하면서 성종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당시 조선 유일의 인물, 바로 인수대비였다.

   약 한 달후인 성종 23년(1492) 11월 21일, 전례없던 진풍경이 펼쳐진다. 성종이 인수대비와 인혜대비가 '공동 명의'로 언문으로 내린 교지를 승정원을 시켜 한문으로 번역하게 한 다음, 조정에 토론을 붙인 것이다.[각주:6] 내용은 물론 새로 내린 조치들을 모두 철회하고 '(경국)대전대로만 하라'는 것이었다(원래 대전에도 당연히 도첩이 없는 승려에 대한 단속 조항이 있었다). 정승들이 다시 한번 '바람잡이' 역할을 하고 성종이 모후의 뜻을 거스를 수 없으니 이에 따르겠다고 해서 그 다음날 금승법이 정말로 뒤집힌다.

   물론 삼사도 뒤집어졌다. 날마다 상소가 3건씩 올라오고 나흘 뒤인 11월 25일 경연에서 또 말이 나오자 성종이 대비께 다시 아뢰겠다 하더니만, 인수대비에게 받은 한글 편지를 또(!) 삼사에 보여준다. 이 편지에서 직전의 교지에 없었던 새로운 내용이라면, 문제의 근본은 백성들이 수령의 침학을 못 견뎌서 중이 되는 것이니 금승법만 시행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는 일침이었다- 환언하면 '중들 때려잡을 시간 있으면 너네들 부정부패부터 척결하라'는 말씀이 되시겠다.

   이에 대한 삼사의 직접적인 반응은 '정말로 침학하는 자가 있는지는 신은 모르겠다'는 둥, '어찌 모든 수령이 다 백성을 침학하겠느냐'는 둥, 눈 가리고 아웅하는 소리들밖에 없다.[각주:7] 그런데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조선은 토호를 지방관으로 임명하던 나라가 아니다. 당시 지방에 널린 탐관오리들 중에 틀림없이 누군가는 대간들과 과거시험 동기던지, 동문수학한 사이던지, 아니면 심지어 동료 대간으로 같이 근무를 했던지, 그게 아니라도 한 두어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일 터, '아무개가 어느 지방 원으로 가더니 본가로 재물을 바리바리 실어들인다'는 소문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되면 신하들이 쉽게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되어버렸다. 바로 다음날부터 금승법의 찬반을 넘어서 '대비가 정사에 간여하는 게 옳으냐'는 직격이 들어간다- 달리 보자면 이제 인수대비가 확실히 정치판이라는 링 위에 올라온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중뿔나게 나서기 좋아하는- 전직 도원수이자 현직 우의정- 허종이 다시 등장한다. 본인이 직접 대비전에 가서 두 대비를 설득하겠다고 성종에게 고한 것이다. 섭정 중인 대비도 아닌데 대신이 왕을 건너뛰고 모후를 만나서 정사를 의논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라 승정원에서도 말리는데 성종은 허락한다- 그 기막힌 이유인즉슨, 못하게 하면 신하들이 자꾸 대비한테 똑바로 아뢰지 않는다고 자기만 타박을 할 테니, 한번 직접 가서 고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허종이 우참찬 유지와 함께 창경궁으로 가서 금승법 때문에 조정이 너무 시끄럽다고 아뢰니 인수대비가 다시 한글로 장문의 글을 써서 허종에게 내린다.[각주:8] 이 글에서 인수대비는 만연한 수령의 부정부패 외에 또 새로운 논증을 들고 나오는데, 바로 성종대 득세한 간관들의 행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대간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매양 공격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바른 의논을 듣지 못하게 한다', '주상이 간관을 대우하여, 사정을 두고 부드러운 말로 어린아이를 달래듯 하니 대간이 일마다 번거롭게 계달한다', 심지어 '정권이 대간에게 있으면 예로부터 그르다 했다'는 극언을 서슴치 않은 것이다. 이에 훈계만 듣고 빈손으로 물러난 허종이 윤허를 얻지 못했다고 보고하는데 성종의 답이 걸작이었다- "경 등이 예전에 내가 (대비에게) 아뢰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제는 알았을 것이다." 행간에 담긴 성종의 속내를 점잖을 필요가 없는 상것들의 말로 번역하자면, '우리 엄마 말발을 직접 당해보니 맛이 어떻더냐?'는 뜻이 되겠다.

   인수대비가 굉장히 똑똑한 여자고, 이 금승법 파동 때 써보인 글들을 보면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해서 이번에도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지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어버렸다- 이런 공격을 받고도 대간이 그냥 물러난다면 그간 본인들이 잘못해왔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요, 그것도 왕도 아닌 대비의 손에 길들여지는 꼴이 아니겠는가? 일단  화살이 바람잡이 역할을 한 영의정 윤필상과 좌의정 노사신에게 돌아가서 대간은 물론 성균관 유생들까지 나서서 탄핵하니 의정부가 사실상 마비상태에 빠지고, 연이은 논란으로 온 조정이 요동을 치자 결국 사흘 후인 12월 5일, 성종이 금승법을 다시 세울 것을 명하게 된다.

   금승법 폐지라는 목적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잇단 공격으로 조정 신료들을 자극한 것은 인수대비의 정치적 미숙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성종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는 한, 처음부터 인수대비에게는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인수대비가 무슨 병권을 쥐고 있는 상왕도 아니고, 인사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성종이 확실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않는다면) 달리 무엇으로 신하들과 싸우겠는가? 인수대비의 공격은 신하들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라, 정치에 관심은 많아도 정사에 간여할 수 없는 처지라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들을 이 기회에 쏟아낸 측면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물론 세운 지 한달 남짓한 법을 '엄마가 하지 말랜다'고 엎었다가, 그것을 다시 2주만에 '조정이 너무 시끄럽다'고 도로 뒤집으면서 시종 철저한 책임회피로 일관한 성종에게 있다. 애초에 미성년자도 아니고 우리 나이로 서른 여섯 살이나 먹은  왕이 '어마마마, 이것만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하고 말을 못했다는 것도 우습기 짝이 없지만, 성종이 진짜 효자였다면 인수대비의 두번째 편지나, 허종의 알현은 중간에서 다 막고 본인이 직접 신하들을 설득했어야 했다. 설득은커녕 신하들 앞에서는 '내가 아니고 대비가 한 것'이라 극구 강조하고, 대비한테는 '조정 공론'을 운운하면서 번복을 해달라고 했으니 이는 대비와 신하들을 쌈 붙여놓고 팔짱 끼고 구경한 것이나 마찬가지요, 국왕으로서의 체모나 위신은 온데간데 없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1492년에 인수대비는 '불교계의 성녀'였다- 아들 성종이 수수방관하는 가운데 불교계를 위해서 단신으로 우의정 이하 온 조정의 신하들과 2주간 '맞짱'을 뜬 것이다. 성종이 일을 아주 시끄럽게 처리했기 때문에 허종과 유지가 직접 찾아와서 논쟁을 벌인 일도 대궐이나 조정 대신들에게 연줄이 닿는 승려들을 통해서 '우의정과 우참찬이 금승법을 도로 시행해야 한다고 대비전에 아뢰러 온 것을, 대비마마가 호되게 꾸짖어서 쫓아버렸다'는 식으로 산사까지 소문이 퍼졌을 가능성이 높다- 자고로 지도자는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야 '지지층이 결집'하는 법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1504년에 인수대비가 승하했을 때 불교계의 추모하는 마음이 특별했으리라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전편에서 우리는 태자비 구이를 주인공의 자리에 배치한 이 그림의 구도상 특징이 인수대비의 일생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왕실에서 추천 불사를 벌일 때는 대개 실무를 담당하는 '중간 관리자'가 있게 마련이고, 이런 실무를 맡는 사람들은 당연히- 드러내놓고 믿었건, 몰래 믿었건 간에- 모두 불교 신자들이다. 불화를 그리거나 불상을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장인들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다. 만약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이 그림의 실무자와 작가에게 구도의 특이점에 대해 묻는다면, '대비께서는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라고 답하지 않을까?

   다른 한편으로 1492년 이후 불교계의 감정이 격앙되었으리라는 것 역시 명백하다. 사찰이나 교단도 주기적으로 '신입'이 들어와야 돌아가는 사회 조직이다. 헌데 금승법의 시행에 따라 신입은 물론 받아준 승려들까지 자동으로 '범법자'가 되었고,  사력을 다한 최후의 로비는 잠깐 성공하는 듯했지만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이게 15c 전기만 해도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릴 때는 통상 '그 폐단은 자심하지만, 워낙 오래 되고 믿는 사람이 많아 하루 아침에 없앨 수는 없으니...' 이런 식으로 단서를 달고 들어왔는데, 성리학이 승리에 승리를 거듭한 성종 말에 이르면 아예 '중들의 씨를 말리자'고 나오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최소한의 공존도 거부하고 아예 숨통을 끊겠다고 덤벼드는 상대에게 과연 어떤 감정을 느꼈겠는가?

   우리가 보기엔 이것이 바로 '주 소왕 아래 정반왕'이라는 서열을 그림 속에서조차 용납할 수 없게 된 배경이다. 그리고 정반왕의 십이장복의 의미를 이렇게 파악하면 그림에 보이는 태자의 칠량원유관복의 모순, 즉, 왜 '아빠는 황제인데 아들은 세자'인 실수를 범했는지에 대한 보다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해진다. 만약 정반왕의 십이장복이 정말로 조선 왕의 권위를 높이는 사업이었다면, 왕조시대에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가 적발이 되면 목이 달아나진 않더라도 끌려가서 곤장 40대쯤 맞고 볼기에 피 터지는 건 일도 아니다- 화가도 눈에 불을 켜고 혹시 뭐가 잘못됐나,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 화가는 요구 받은 것 이외 그림의 다른 디테일에 손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화가가 실제로 받은 주문은 (조선 왕실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정반왕을 서역의 천자로 만들라'는 취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 '석씨의 가문을 모독했다'고 화원을 죄주자 할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

 

To be continued...

 

  1. 세종실록 권122, 세종 30년(1448) 12월 5일 정사 1번째기사 [본문으로]
  2. 성종실록 권263, 성종 23년(1492) 3월 7일 정축 1번째 기사 [본문으로]
  3. 성종실록 권265, 성종 23년(1492) 5월 7일 병자 1번째 기사 [본문으로]
  4. 성종실록 권262, 성종 23년(1492) 2월 3일 갑진 3번째 기사 [본문으로]
  5. 성종실록 권270, 성종 23년(1492) 10월 23일 경신 1번째 기사 [본문으로]
  6. 성종실록 권271, 성종 23년(1492) 11월 21일 무자 4번째 기사 [본문으로]
  7. 성종실록 권271, 성종 23년(1492) 11월 25일 임진 3번째 기사나, 11월 26일 계사 2번째 기사 중 대간들의 발언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8. 성종실록 권272, 성종 23년(1492) 12월 2일 무술 5번째 기사 [본문으로]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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