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우리가 작년 봄까지 자료가 없어서 누락했던 참고 도판 중에, '석가출가도'의 구도상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구이의 비탄' 장면이 조선 전기엔 '설산수도상'의 핵심 장면 중 하나였음을 뒷받침하는 작품이 있는데 바로 대판시립미술관(大阪市立美術館) 소장의 '불전도'이다. 우리가 이 그림을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세부를 확인할 수 있는 질 좋은 도판도 구하질 못하고 있다가, 다행히 작년 여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새 나라 새 미술' 전시에 출품이 되면서 실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위에 보시다시피 구이가 큼지막한 전각 안에서 바닥에 쓰러져 대성통곡하고 있는 장면이 화면 상단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림 우상단 첫머리가 '금도낙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석가출가도'와의 유사성은 그림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한눈에 인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나머지 부분들을 살펴보면 주로 '설산수도+수하항마+녹원전법+쌍림열반', 곧 팔상 중 후반부 절반에 해당하는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여기에 더해서 그림 하단에는 석가모니의 전생담이 합쳐진 묘한 형태이다).

   그렇다면 '구이의 비탄' 역시 '설산수도상'에 해당한다고 봐야지, 유독 이것과 '금도낙발'을 따로 떼서 '태자의 출가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의미가 없다. 팔상을 반 나눠서 그리는 전통이 조선 전기에 있었음은 일본 대덕사(大德寺)와 금강봉사(金剛峯寺)에 각각 나뉘어 소장되어 있는 1535년작 2폭 1조의 팔상도로 입증이 되거니와, '야반유성'도 포함되지 않은 그림에 '유성출가상'을 갖다붙이는 것도, 그 결과 팔상이 4:4가 아니라 3:5(혹은 3.5:4.5?)로 나뉜다는 것도 우리가 보기엔 이중으로 억지스럽기 때문이다. 성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설산'수도상에 포함되는 것이 혼란의 원인일 수 있는데, 팔상에서 유성출가~설산수도는 이렇게 공간적 배경이 오락가락하면서 계속 이어지는 스토리이기 때문에 이는 불가피하고, 1편(2024.08.31-쾰른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석가출가도 연구초 1)에서 우리가 설명했던 것처럼 저본인 석보상절 원문의 '이튿날~'을 기점으로 둘을 나누는 게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석가출가도'는 사실 절로 유성'출가'상을 연상시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름이다. 이미 이 이름으로 십 수년 이상 불려 왔고, '비람강생상'에 해당하는 그림도 지금 '석가탄생도'로 통용되고 있으니 고치는 게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게끔 최소한 전시 해설이나 도판 설명에는 팔상 중 무엇에 해당하는 내용인지 정확히 부연설명을 해주었으면 한다.

 

   이 '불전도' 자체는 16~17세기 초 사이에 그려진 그림으로 보이나 정확한 제작연대는 추정이 어렵다. 다만 범본이 된 그림의 원형은-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1460년 이후에 도화서에서 그려진 탱화로 보이는데 이는 '금도낙발' 장면을 '석가출가도'와 대조해보면 알 수 있다:

 

   위에 보다시피 태자의 발을 핥고 있는 말 건척이나, 보관을 들고 꿇어앉아 있는 차익 등은 전부 누락이 되었지만 태자의 복식만큼은- 색깔이 '강색'이 맞는지는 의심스러우나- 강사포를 베껴 그린 것이 분명하다. 한데 우리가 '부록편'(2025.03.22-쾰른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석가출가도 연구초- Appendix)에서 다뤘던 바와 같이, 조선에서 세자가 최초로 원유관복을 착용하기 시작한 것이 1460년이기 때문에, 1460년 이후 도화서에서 제작한 탱화가 이 그림의 '시조'에 해당한다는 것까지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석가출가도'가 이 그림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까지 단정짓기는 어려운데, (상기했듯이 이 그림에 '석가출가도'를 연상시키는 구석은 있으나) 일단 '석가출가도'의 가장 큰 특징인 변각구도를 채택하지 않았고, 도상의 세부 표현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전기 모든 팔상도의 원형은 1446년 소헌왕후의 추천 불사 때 "석보상절"을 꼼꼼하게 읽고 화폭에 옮겨서 제작한 탱화이고, '금도낙발'은 물론이고 '구이의 비탄' 역시 1446년부터 이미 그림 속에 존재했을 공산이 높기에 이 두 장면을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근거가 부족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림이 전반적으로 필력이 약해서 작가가 도화서 출신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서울 화가'가 맞는지도 한번 의심해봐야 하는 지경이라, 역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경우는 도화서에서 제작한 그림이 모사가 되고, 그 모사본이 다시금 모사가 되면서 퍼져 나가는 와중에 이 그림도 제작되었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계통의 범본이 자연스럽게 섞였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불전도'가 필력은 약해도 미술사적 의의는 결코 작지 않은 그림인데, 조선 전기 팔상도 자체도 희귀하지만 하단에 묘사된 본생담을 그린 그림은 더 희귀하기 때문이다. 아래 이미지 속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위에 판독이 어려운 얼룩덜룩한 무늬가 그려져 있는 붉은 옷을 입은 인물이 주인공, 곧 윤회전생하는 석가모니이다:[각주:1]

 

   보면 이 한 단에 다섯 가지 본생담을 담고 있는데, 오른쪽부터 차례로- 좀 섬뜩하긴 하지만- 다리를 자르고, 눈을 찌르고, 건물 안에서 팔을 자르고, 그 옆에서는 목을 잘라서 '보시'를 하고 있다.

   ① 처음 둘은 월인석보 권11의 협주에 들어있는 시비왕/월명왕의 보시행일 것이다. 먼저 시비왕의 보시행은 매에 쫓겨 품에 날아든 비둘기를 살리기 위해서 매에게 자기 몸의 살을 다 바친다는 이야기인데 일단 처음에 먼저 넓적다리 살을 잘라서 저울에 달았다가 모자라자 살을 계속 베어낸다는 식으로 전개가 된다. 앞에 앉은 2인은 아마도 시비왕을 시험하기 위해 각각 비둘기와 매로 변신했던 비수갈마천과 제석천이라는 설정으로 보인다. 그리고 월명왕은 길 가다 만난 맹인에게 눈을 보시하는- '이식수술'을 어떻게 했는지는 물론 나오지 않는다- 짤막한 이야기다.

   ② 다음으로 스스로 목을 베는 이야기는 기존 연구대로 월광왕의 보시행이 맞는 것 같은데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을 한 건 아니지만) 일단 지금 남아있는 월인석보 스무 권 안에는 보이지 않는다- 혹 실전된 다섯 권 안에 들어있던 건지, 아니면 '사지절단형' 본생담만 모아서 그리다가 같이 끼어들어간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③ 중간에 정자 비슷한 건물 안에서 팔을 자르는 대목은 아예 어떤 본생담인지조차 확인이 잘 안 된다. 이럴 때 상투적으로 쓰는 어구가 '학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운운인데, 이 경우는 연구를 해도 해명이 잘 안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상기했듯이 이 화가의 기량이 시원치 않아서 묘사 자체가 부정확할- 즉, 베끼다가 잘못 베꼈을-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④ 이를테면 '사지절단형' 본생담이 다 끝나면 이어지는, 위 이미지 가장 좌측의 수레를 몰고 가는 일행이 그려진 부분은 수레를 타고 가는 여정이 '메인 플롯'인 본생담이면서 월인석보 권20의 협주에 수록이 되어 있는 수대나태자의 보시행이 가장 유력하지만, 역시 화가의 표현이 두루뭉술해서 정확하게 기중 어떤 장면인지는 '확인불능'이다.

   ⑤ 마지막으로 이 그림의 본생담은 실은 위 한 단이 전부가 아니고, 맨 오른쪽 시비왕의 보시행 장면 위로 다섯 사람이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부터가 시작인데, 이것도 고증이 잘 안 된다:

 

   보면 여기도 붉은 바탕에 무늬가 그려진 옷을 입고 있는 인물이 석가모니의 전생 중 누군가일 텐데, 그 아래 무늬나 디자인은 비슷하고 색상만 다른 옷을 입고 있는 인물이 눈에 띈다. 옷이 곧 신분을 표상하고 있다고 본다면 왕족으로 보이는 2인과, 신하로 보이는 3인의 대화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단 떠오르는 것은 동생 '악우태자'가 주요 악역으로 등장하면서, 월인석보 권22에서 상당히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선우태자의 보시행'이다. 문제는 이야기 속에 이 형제가 이렇게 신하들과 앉아서 대화를 나눌 만한 장면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본생담 장면을 고증하면서 '월인석보에 실려 있는지 여부'를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은 까닭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 '불전도'의 본생담 부분도 범본은 월인석보를 저본으로 삼아 도화서에서 제작한 그림일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참고할 만한 다른 사례라면, 일본 청산문고(靑山文庫) 소장의 '안락국태자경변상도' 혹은 '사라수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림이 있다.[각주:2] '한글이 쓰여 있는 최초의 그림'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은 월인석보 권8의 협주에 실린 '원앙부인의 극락왕생'을 꼼꼼하게 그림으로 옮기고 장면마다 한글로 설명을 달았고, 기중 단문이 아닌 긴 문장들은 아예 본문의 월인천강지곡(其227~248)을 장면에 맞게 잘라서 거의 통째로 베껴적은 것이다.

   이 '안락국태자경'의 경우는 15세기 이전에 한반도에서 성립된 위경이라는 것이 통설이기는 하나, 월인석보보다 이른 판본은 아직 발견된 바가 없기 때문에 다른 '저경'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석가탄생도/출가도'와 묶어서 생각을 해보면 도화서의 화원들은 저경이 뭐가 됐든, 또 이미 오래 전에 확립된 도상들도 석보상절/월인석보를 기준으로 디테일을 전부 맞춰서 새로 그리는 작업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상 석보상절 자체가 세종대왕의 의지로 당시 수양대군이 총책임을 맡아서 직접 펴낸 책이다- 단순히 '어제 서문'만 달랑 얹혀 있는 불서하고는 경우가 다른 것이다. 궁정화원한테 그 어떤 경전이 지금 뫼시는 상전이 만든 책보다 더 중요하겠는가? 그렇다면 석보상절이 간행된 1447년 이후, 혹은 늦어도 세조가 실권을 장악한 1453년 이후에는 도화서 화원들은 본생담을 주제로 하는 그림을 그릴 때도 석보상절/월인석보를 저본으로 삼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혹은 심지어는, 동북아시아에 벽화나 부조 외에 별 작례가 없는 본생도가 16세기 조선 회화에 다시 등장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석보상절/월인석보가 새로운 저본으로 등장하면서 준 자극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이 '불전도'가 상기했듯이 기량이 떨어지는 화가에 의해서 'N차 모사'가 된 그림이라 다른 계통/전통의 범본이 섞여들어갔을 수도 있고, 원본 그림이 어땠을지를 짐작해보기도 어렵지만, '15세기 도화서에서 제작된 본생도'의 존재를 암시하는 간접증거로는 충분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고려불화로부터 이어받은 전통에 명, 정확히는 '북경 스타일'을 가미해서 변화를 준 여타 조선전기 불화들과 비교했을 때, 석보상절/월인석보를 저본으로 한 작품들은 창작 동기와 저본에서부터 창의적인 구도에 이르기까지 가장 '조선적'인 불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도화서의 최전성기였던- 곧 회화적으로 가장 뛰어났을- 15세기 중엽의 작품은 한 점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 가석할 따름이다.

 

V. 남은 질문들 및 요약정리

; 중요하긴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획기적인(?) 새 증거자료가 발굴되지 않으면 현재로선 답변이 곤란한 질문들이 남아 있다.


V.1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는 원래 한 조였나?

   이 두 그림이 구도를 제외하면 세부필법은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팔상도 한 세트' 중 각각 '비람강생상'과 '설산수도상'이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화풍의 유사성만으로 '한 세트임'을 입증하기는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석가탄생도'가 1499년 안순왕후의 추천 불사 때 제작되었고, '석가출가도'가 1504년 인수대비의 추천 불사 때 제작되었다면, 불과 5년 상거에다 '대표화사'가 동일인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그림이 비슷해 보이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그럼 혹 '한 세트가 아님'은 입증할 수 있을까? 일단 전시장 안에서 육안으로 보기에는 '석가탄생도' 쪽이 필력이 더 나아 뵈기는 한다. 허나 '석가탄생도'가 보존상태가 월등히 낫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 결정적인 차이는 아니다. 즉, 이게 산수화 같으면 지워지고 남은 부분만 봐도 (상태가 더 좋은 그림보다) 필력이 더 낫다든가 이런 식의 판정이 가능하겠지만, 이 두 그림처럼 정밀한 묘사와 색감을 위주로 하는 경우는 당연히 보존상태가 좋은 쪽이 더 잘 그린 것처럼 보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실례로 우리가 전편에서 다뤘던 계화 부분을 살펴보자면, '석가출가도'에서 가장 큰 전각의 공포는 현재 이렇게 보이는 상태이다(직관적인 비교를 돕기 위해 전편에도 실었던 '석가탄생도'의 국부를 아래 먼저 제시했다):

 

   위에 보시다시피 얼핏 봐선 '석가탄생도'와 필법은 동일하지만 선이 삐뚤빼뚤해서 무성의하고 공력이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포 위 처마 쪽에서부터 비단이 균열이 일어나서 (색이 벗겨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표면이 일그러져 있다- 즉, 화가가 원래 선을 삐뚤게 그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사진상으로 보기엔 갈라진 비단을 억지로 끌어당겨서 기워붙인 것 같은 꼴인데 실제 상태가 어떤지, 복원이 가능한지는 보존수리 전문가가 밝은 데서 실사를 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실 이 두 그림의 가장 큰 차이는 구도에 있고, 구도가 그림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구도의 차이가 한 세트가 아님을 암시한다고 논증하는 것도 가능은 하다. 곧, '석가탄생도'의 짝은 '수평구도'로 '설산수도상'의 중요 장면을 한 폭에 다 담은 그림이어야 하고, '석가출가도'의 짝은 역시 비스듬한 변각구도로 쌍폭에 담은 '비람강생상'이어야 한다는 주장인 것인데, 이것도 아래에서 보다시피 그렇게 간단히 단정짓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

 

V.2 (한 세트건 아니건) 연작의 일부라면 몇 작품으로 이뤄진 연작인가?

  '팔'상도라면 기본적으로는 당연히 '8폭 1조'라야 맞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나) '석가출가도'가 변각구도를 채택하면서- '설산수도상'이건 '유성출가상'이건- 사실상 '0.5상'의 내용만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팔상이 다 들어가려면 최소 9폭이 필요해진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수성지보(井手誠之輔) 교수가 제기한 가설은 애초에 소헌왕후의 추천 불사 때부터 8폭 이상의 '다폭의 불전도'를 제작했으리라는 것이다.[각주:3] 이것도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나 현재로선 입증할 수 있는 증거도, 반증할 수 있는 증거도 없어 보인다. 의문점이라면 실록에 기재된 '팔상성도지도(八相成道之圖)'가 실제로는 12폭이나 14폭이었다면 왜 그냥 '세존성도지도'나 '석가성도지도'라고 부르지 않았느냐는 것과, "석씨원류" 같은 장편(?) 불전 도상이 큰 영향을 발휘하는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도 '팔상도'에 대한 끈질긴 집착이 이어지는 까닭을 '전통의 고수' 외에 과연 뭘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인데, 다만 이런 것들은 그저 '정황증거'일 뿐, 확증은 되지 못한다.

   어쩌면 정수성지보 교수는 일본 여명관(黎明館)에 소장된 13폭 짜리- 원래 최소 14폭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대 불전도 연작을 모델로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우리가 이 그림 실물을 본 적이 없어 그림에 관해서 구체적인 언급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각주:4] 단지 구도에 관해서 지적하자면, 이 연작의 제8폭 '차익환궁'이 '석가출가도'와 겉보기에 유사해 보이지만 화면 구성을 보면 4개 안팎의 장면을 위에서 아래로 단순하게 쌓아놓은 그림이다.[각주:5] 곧, 개별 장면 안에서 '대각선'이 보인다고 해도, 그림 전체적으로는 '석가출가도'처럼 대담하게 화면 전체를 반으로 가른 변각구도가 아니라 평범한 '수평구도'로 짜인 그림인 것이다.

   다만 이 불전도 연작이 도판상으로 봐선 계화 부분이라든지, 여러 모로 원대 회화의 유풍이 많이 남아 있어 명초, 곧 14c 말~ 15c 전기 작품으로는 신빙성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 '불전도'와 조선전기 팔상도에 공통적으로 영향을 준 원대 불전도가 다만 몇 폭이라도 임란 전까지 한반도에 남아 있었을 개연성은 배제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그림을 디테일까지 찬찬히 들여다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연작은 나중에 언제 기회가 되면 국내에 한번 가져와도 좋을 작품인 것이, 벽화가 아닌 축화 형태의 불전도 연작으로 '석가탄생도'/'석가출가도'와 나란히 걸어놓고 비교해 볼 만한 그림이 우리가 아는 한 별달리 없다. 또, 일본 개인이나 사설 미술관이 아닌 공공기관 소장이라 국내 대여에 비교적 협조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현시점에서 우리의 기본 가설은 1446(~7)년의 팔상도는 '8폭 1조'였고,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제작 당시의 사정에 따라서 2폭 1조나 4폭 1조, 혹은 16폭 1조와 같이 '8의 약수 혹은 배수'로 다양한 버전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석가출가도'가 제작된 15c말 ~16c 초엔 어떤 환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소헌왕후 사후에 팔상도가 제작되었다는 것 말고는 조선의 왕후 혹은 대비의 추천 불사 때 제작된 탱화의 종류나 수량을 알려주는 자료는 우리가 아는 한 남은 것이 없다. 다만 1480년대 행한 대군/공주들의 추천 불사의 경우, 인간한 불경의 권말 인기에 목록이 함께 남아있는 사례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각주:6]

 

  - 명숙공주(인수대비 장녀; 1482년 사망); 영산회도/약사회도/서방회도/천불도/팔난관음도/십육나한도/명부시왕도

  - 순숙공주(정현왕후 장녀; 1488년 사망); 원각회도/석가수도상/달마도/미륵하생회도/관음도/아미타삼존도/시왕도 

  - 월산대군(인수대비 장남; 1489년 사망); 영산회도/서방회도/행보미타/지장회도/미타팔대보살/천수관음

 

   보면 세종~문종대에 비해 전반적으로 왕실 불사가 사치스러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공주들만 해도 대략 7종의 탱화를 제작하고 있어 왕후의 경우에는 최소한 여기에 추가로 '팔상도 한 세트' 정도는 더 그려야 격이 맞아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마지막 월산대군의 경우를 보면 외려 공주들보다도 그림이 하나가 적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위선 공주들의 경우엔 제작하지 않았던 백금 불상을 다섯 구나 조성했고, 탱화도 맨 뒤에 아미타팔대보살도/천수관음도 두 점은 순금화이다. 불경도 명숙/순숙공주의 경우에는 기존의 목판을 이용해서 각각 84/42부를 인간한 게 전부이지만, 월산대군은 105부를 인간하고 거기에 더해서 화엄경 4부를 금니로 사경을 했다. 이 시기 금 시세나 물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비용이 공주들의 경우보다 최소 몇 배는(에서 어쩌면 열 배까지도) 더 들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결론은 예나 지금이나 '격'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아주 세속적으로 표현해서- '돈을 얼마나 많이 썼느냐'라는 것이다. 불상이나 사경에 충분히 많은 지출이 있었다면 탱화는 오히려 줄어들 수도 있어, 위 대군/공주들의 경우처럼 어디서 불경 뒤에 목록을 포함한 발문이나 인기라도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추측하는 것도 어렵다.

 

   넘어가기 전에 상기 목록에 대해서 간단한 부연설명을 덧붙이자면, 순숙공주를 위해서 그린 '석가수도상'에 잠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순숙공주의 경우에 새로 그린 그림은 맨 뒤의 아미타삼존도/시왕도 둘 뿐이고 원각회도~관음도까지는 태조 때 그린 그림을 보수한 것으로 밝히고 있어, 단정하긴 어려우나 어쩌면 여말선초의 선구적인 '설산수도상'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숙공주에 비해 불경도 반만 찍고 불사가 전체적으로 간소했던 것은 순숙공주가 시집도 가기 전 열살 남짓한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까닭인데, 해서 이 '석가수도상'이 굳이 추천 불사를 위한 그림으로 선택된 이유도 그림 안에 장자의 딸이 우유죽 공양을 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어서였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곧, 수리를 하면서 장자의 딸을 죽은 공주와 닮게 그리거나, 혹은 그 옆의 여백에 공주의 이름을 적어넣으면 '우리 딸이 이렇게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니 극락왕생하게 해달라'는 간단하고 직관적인 '주술적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또, 참고로 예전에 이 목록을 접한 적이 있는 분들은 월산대군을 위해서 '행보미타지장회도'를 그렸다고 알고 계셨을 수 있는데, 이는 오역이다- 설령 우리가 모르는 '아미타지장회'라는 게 정말로 있었다 한들, 그림 속 아미타불이나 지장보살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어야지 수식어로 앞에 '행보(行步)'가 붙을 수는 없다. 원문을 보면 발문을 지은 학조대사가 '영산회도/서방회도/행보미타/지장회도', 이렇게 그림 제목을 네 글자씩 맞춰서 쓴 것을, 끝에 그림 '도'자에만 신경을 써서 그만 '영산회도/서방회도/행보미타지장회도'라고 잘못 끊어 읽은 것이다. '지장회도'는 두 공주의 추천 불사 때 공통적으로 그려졌던 '시왕도'가- 죽은 사람 좋은 데 가라고 벌이는 불사이니 웬만하면 필수라고 볼 수 있다- 빠진 것으로 보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지장시왕도' 계통의 그림임이 확인되고, '행보미타'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아미타독존 내영도'류의 그림이 아니었을까 싶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상기 목록이 지금 우리의 논점에 주는 시사점이라면, 만약 우리가 추정하는 것처럼 '석가출가도'가- 최소한 원본은- 인수대비의 추천 불사 때 제작된 것이라면 아래와 같은 2가지 경우가 다 열려 있다는 것이다.

 

(i) 팔상을 모두 변각구도 쌍폭으로 제작해서 총 16폭을 그렸다: 위 명숙/순숙공주의 경우를 봤을 때 다른 불화를 그리지 않았다면 점수로 껏해야 2배 정도이니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 혹은 인수대비의 경우 조정에서 주관하는 공식적인 장례는 이전 사례보다 간소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일종의 '보상심리'로 두 며느리(정현왕후와 승평부대부인 박씨)가 불사는 더 크게 치렀을 수도 있다- 마침 승평부대부인 박씨가 바로 상기 월산대군 사후의 성대한 불사를 주관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이 경우 자연히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는 한 조는 아닌 것이 된다.

(ii) 팔상도를 다 그리지 않고 일부만 발췌해서 그렸다: 어쩌면 인수대비는 추천 불사조차도 간소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더 성대하게 치르려다 보니 (위 월산대군의 경우처럼) 불상이나 사경에 돈을 과하게 써서 탱화는 오히려 줄어들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상기 두 공주들의 불화 목록에 보이는 정도에 더해서, 왕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좌에 앉은 마야부인'이 등장하는 '비람강생상'과, 고인의 일생과 연관된 특별한 의미를 대입할 수 있는 '설산수도상'을 쌍폭으로 쪼개어 그려서 보태는 정도로 그치는 것도 가능해진다- 즉, 팔상도를 온전하게 다 그릴 때나 '8의 약수나 배수'가 적용되는 것이지, 기중 몇 개만 골라서 그린다면 폭수가 다 짝이 맞을 필요도 없고 한 폭에 '0.5상'이 들어가도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는- 불완전하나마 같이 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한 조가 맞을 것이다.

 

   얘기가 이렇게 월드컵 때마다 한국 축구 팬들을 고문하는 '경우의 수'로 끝나서 우리도 심히 유감스러운데 현재로선 이 이상 논의를 진척시킬 수 있는 근거가 없고, 어쩌면 '영구미제'로 남을 가능성도 상당해 보인다.

 

***

 

   '석가출가도'의 가장 큰 회화적 특징은- 이 장르의 그림에서 쉽게 보기 힘든- 화면을 대담하게 반으로 가른 변각구도이다. 이와 같은 구도의 선택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대각선 구도의 중심 위치, 곧 주인공의 자리를 태자비 구이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과, 화면에 담긴 장면의 수가 줄면서 생긴 남는 공간에 외견상 텍스트와 느슨한 연결관계밖에 없는 대형 연못을 배치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저본인 "석보상절"의 '설산수도상'에 해당하는 내용에 딱 한번 등장하는 연못은 태자의 출가 후에 불륜의 의심을 받던 구이와 아기가 뛰어든 불구덩이가 변해서 된 것으로 모자를 구원하는 장치이다. 화가는 여기서 연못가의 짝 잃은 공작과 연못 안의 원앙을 대비시키는 은유를 통해서 구이의 비탄을 한층 더 극적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다.

   화가의 이런 처치는 조선 팔상도의 시원이 소헌왕후의 추천 불사에 있다는 점과 맞물려서 그림의 주인공이 태자가 출가한 때와 비슷한 나이에 남편 의경세자가 요절했으며, 유복자(미래의 성종)의 어머니였던 인수대비였음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림의 제작연대로 가장 유력한 것은 인수대비의 추천 불사가 이루어진 1504년경이고, 이는 연산군 대이다. 이 그림의 또 다른 특색인 '정반왕의 십이지장복' 역시 기존의 학계 통설대로 조선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추측한 대로 성종조 말의 '금승법 파동'으로 인하여 극심해진 유불간의 감정대립의 흔적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이는 시기적으로 연산군 대를 가리킬 수밖에 없다.

   기실 기존 통설이 옳다고 해도 입만 열었다 하면 '위를 업신여기는(凌上) 풍조'를 일소하겠다고 하면서 피바람을 일으킨 사람도 바로 연산군이고, 조선을 사상적으로 지배했던 성리학적 질서와 '가장 안 친했던(?)' 왕도 연산군이기 때문에, 연산군 대는 여전히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남는다. 뿐만 아니라 이 그림의 두 번째 큰 (회화적)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지금 남아있는 여타 15세기 불화에도, 16세기 불화에도 보이지 않는 독특하고 화사한 색감 역시 그림을 끔찍이 좋아했던 연산군의 화려한 취향을 반영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 그림이 갖는 미술사적 의의는 불화/종교화의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속화에 있어서도 중대한데, 그 첫째 이유는 이렇게 문헌상으로만 희미하게 전하는 연산군 대의 화려했던 궁정회화의 편린을 간직하고 있는 사실상 유일한 자료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림 안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계화 부분 때문인데, 이성(李晟)으로 대표되는 고려불화의 전통을 잇고 있음과 동시에 원대의 발전된 왕진붕파 계화의 영향을 흡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정밀한 묘사는 이 '석가출가도'가 ('석가탄생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계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라 해도 전혀 지나침이 없는 높은 수준에 있다.

 

   한 가지 단서를 단다면, 이 그림이 인수대비 추천 불사 때 제작된 원본이라는 보증은 없다는 점이다. 예전에 해당 편에서(2024.12.31-쾰른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석가출가도 연구초 3) 언급했듯이, '나 홀로 십이장복을 입고 있는 정반왕'은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왕실이 발원한 그림이 범하기엔 너무 큰 실수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실수를 연산군 대의 '나사 빠진 조선'의 산물로 해석하는 것은 유혹적이지만 진실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이를테면 이 일이 1506년쯤 한양 최고 갑부가 원본의 대표화사한테 거금을 주고 팔상탱화를 부탁하면서 '우리 정반성왕을 주 소왕과 대등한 황제로 그려달라'고 주문해서 발생한 사고라고 가정해도 최소한 똑같이 '있음직한' 시나리오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다만 이 그림이 설령 왕실에서 발원한 그림이 아니라 하더라도 15세기 말~16세기 초 도화서의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는- 원본이었다면 아마도 좀 더 그림이 좋았을 수는 있겠지만- 손색이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이 그림은 상기한 대로 보존상태가 썩 좋지는 않기에, 비록 국외에 있지만  한국에서 예산과 인력을 지원해서 수리를 해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작품이라는 점은- 만약 우리가 제대로 논증을 했다면-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모두 공감하시리라 믿는다.

 

 

  1. 이 그림의 본생담 해명을 시도한 연구로는 신지연, "조선시대 석가팔상도 연구"(동국대학교, 2010), pp. 47~51, 오영삼, op. cit., pp. 34~37 참조. [본문으로]
  2. 호암미술관 편, "朝鮮前期國寶展"(삼성문화재단, 1996), pp. 242~243 도판 참조. [본문으로]
  3. 정수성지보(井手誠之輔), op. cit., p. 301 참조. [본문으로]
  4. 정수성지보(井手誠之輔), '黎明館本の仏伝場面に関する覚書', 국죽순일(菊竹淳一) 편, "九州における仏敎美術の遍在と偏在"(平成7・8・9年度科学研究費補助金(基盤研究(B1))研究成果報告, 1998) [본문으로]
  5. 오영삼 교수의 책에도 이 제8폭의 작은 도판과 약간의 언급이 있다. 오영삼, op. cit., pp. 44~46 및 p. 232의 미주 34번 참조. [본문으로]
  6. 천혜봉, "한국서지학연구"(삼성출판사, 1991), pp. 696~697 및 pp. 702~703 참조. [본문으로]
Posted by 이현욱
:

IV. 불전도와 계화

IV. 1 연원

   지금까지 이 그림에 관한 주요 논점들은 거의 다 취급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상 그림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요소는 다뤄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그냥 배경'이라고 무시되기 쉬운 계화 부분이다. 기실 '석가탄생도/출가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라면 한눈에 들어오는 큼지막한 궁궐의 정교한 묘사인 것이다.
   계화(界畵)의 '계'는 자를 가리키는 '계척界尺' 혹은 직선을 그릴 때 쓰는 붓인 '계필界筆'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요는 실제로 자를 대고 그리거나, '자로 잰 듯이' 그린다는 뜻이다. 제재는 주로 건축물인 경우가 많지만 선박이나 수레처럼 정밀묘사가 가능한 모든 '인공물'이 다 해당이 된다.

   그런데 이 계화가 불전도라는 장르와 본격적으로 융합된 것은 최소 10세기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북송 태종이 짓고 간행한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 권21,  '어제불부(御製佛賦)'의 첫번째 판화이다[각주:1]:

 

(원본 이미지 출처= 고려대장경연구소)

   이 그림이 마침 지난 가을 일본 경도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송원불화' 특별전 후반부에 출품되었기 때문에 관심있는 분들은 최근에 실물을 확인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이 된다- 위에 보다시피 그림의 우측 절반 이상이 계화로 채워져 있는데, 화면 우상단 작은 원 안에 전생의 석가모니가 마야부인의 뱃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도솔천으로부터 흰 코끼리를 타고 내려오는 장면을 묘사한 것 말고는 딱히 중요한 내용도 없다(작품 속의 중요한 사건은 '비람강생상'에 해당하는 그림 왼편에서 대부분 벌어진다).

   화가가 이런 구도를 채택한 이유에 대한 한 가지 가설은 그 당시 유행하던 화풍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최초의 계화 대가로 언급되는 곽충서(郭忠恕)나 위현(衛賢)이 "어제비장전"의 간행보다 살짝 앞선 10c 중반 무렵에 주로 활약한 인물들이라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최초'라고 해서 계화가 이때 시작되었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고- '계필직척(界筆直尺)'이라는 표현은 이미 당나라 장언원의 "역대명화기"에 나온다- 학자들은 보통 이것을 중국회화사에서 계화가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 10세기 중후반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동양화든 서양화든 종교화는 가장 보수적인 미술 장르중 하나지만 그렇다고 늘 똑같은 그림만 계속 그릴 수는 없다. '어제불부' 판화의 밑그림을 담당한 화가 역시 당시 유행하던 '최신식' 계화를 비중있게 도입해서 그림의 장식성도 높이고, 새로운 스타일도 보여주는 효과를 노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까닭이다.

   이러한 계화와 불전도의 융합 전통에서 '어제불부' 판화의 뒤를 잇는 중요한 그림은 현재 중국 산서성(山西省) 흔주시(忻州市) 번치현(繁峙縣)에 있는 암산사(巖山寺/岩山寺)의 금대 벽화로, 1158~67년간 그려진 벽화들 중에 문수전 서벽 전체가 불전도이다. 이 작품은 우리도 현장에 가본 적이 없어 자세히 논할 수는 없는데, 도판을 보면 장면에 맞춰서 건물을 묘사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기본적으로 궁성을 묘사한 대규모 계화를 먼저 깔아놓고 사이사이에 불전의 주요 장면을 끼워넣은 구도로 되어 있다.[각주:2]

   이것은 경전 판화와 벽화라는 형식의 차이는 있지만 상기 '어제불부' 판화의 구도법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또한 이 그림의 대표화사 왕규(王逵; 1100~1167 이후)가 북송말에 사실상 기초 수업을 다 마친 금나라의 궁정화가였기 때문에 적어도 북송~금대까지는 이런 양식의 불전도가 꾸준히 그려졌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는 북송과 문화적 교류가 매우 깊었고, 북송 멸망 이후엔 금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다. 따라서 고려의 궁정화원들도 불전도를 그릴 때 비슷한 스타일을 구사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지적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이를 증거할 길도 없고, 또 여몽전쟁 이후, 곧 13세기 후반 이후에도 이 전통이 이어졌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어제불부' 판화의 경우는, 전체적인 인상은- 특히 '석가탄생도'와- 뭔가 공통점이 있는 듯도 보이는데 막상 세부 묘사로 들어가보면 정확히 닮은 구석이 어딘지 확실치가 않다. 불교의 역사가 오래다 보니 불전도에 나오는 도상들이 확립되고 동북아시아에 널리 전파된 역사도 깊어서, 이렇게 시간 간격이 먼 작품들 사이에는 '겉보기에 닮은' 정도로 직접적인 영향 관계를 확립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이 작품은 당시 도화서 화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가 맞는지부터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초조대장경은 조선초에도 이미 '희귀 고서'였을 것이고, 지금 일본 남선사에 있는 "어제비장전 권21"이 당시 조선 땅 어디에 있었을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고려말이나 조선초에 수입되었을 원/명대 판본하고는 경우가 다른 것이다. 과연 당시 조선의 화가들이 이 판화의 존재를 알고나 있었을까? 그림 안에서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대답은 '아니오'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요는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고려 후기의 '연결고리'가 존재했을 개연성은 충분하지만, 근거 자료가 없는 논증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간에 전통의 단절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계화의 비중이 높은 불전도는 다시 그려질 수 있다는 논리가 존재한다. 일단 석가모니가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난 덕분에 불전도에서 '도솔래의상'~'유성출가상'에 이르기까지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배경이 왕궁이다. 다른 한편으로 왕실 발원 회화에 궁정생활 묘사가 화려하게 들어가는 것은 장르를 불문하고 일반적인 경향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왕실 발원 불전도란 태생적으로 공급 측에서나 수요 측에서나 정교하고 화려한 계화를 넣기를 원하기 쉽다는 것이다. 상기한 것처럼 암산사 벽화를 그린 왕규도 궁정화원이었고, '어제불부'의 판화 역시 작자 미상이긴 하지만, 앞에 '어제'가 붙어있다는 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물론 전제는 화가들이 계화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다시 '석가탄생도/출가도'에 보이는 계화 양식의 기원에 관한 문제와 연결된다. 다행히 적어도 이 그림의 계화 양식의 근원은 고려불화와 원대 계화에서 추적할 수 있다.

 

IV. 2 왕진붕과 원대 계화의 발전

   사실 중국회화사에서 계화의 발전은 북송~금대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원대에 다시 한번 새로운 정점을 찍게 되는데, 원대 계화를 대표하는 화가가 바로 왕진붕(王振鵬; 1280?~1329?)이다(왕진붕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는 우리가 본 중엔 방문(方聞; Wen Fong)이 쓴 Beyond Representation의 것이(pp. 396~7) 가장 좋다. 이 책이 한국에선 도서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에 가면 무료 PDF 파일을 제공하니 참고하시기 바란다).[각주:3]

   왕진붕은 중국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기 이태리에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건축 설계와 회화를 겸업했을 사람이다. 동북아에서는 화원과 대목 사이에 '직업의 분화'가 이미 오래전에 끝났기 때문에 아마도 병행을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명성은 생전에도 계화가 더 높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유감스럽게도 지금 남아있는 확실한 진적은 공교롭게도 재작년에 호암미술관이 대여해 왔던 불도인물화 2점, '이모육불도(보스턴미술관)'와 '유마불이도(메트로폴리탄미술관)'뿐이다(그외 북경고궁 소장 '백아고금도(伯牙鼓琴圖)'는 도판으로 봐선 저으기 의심스러우나, 우리가 실물을 본 적이 없어 100% 위작이라고 단정짓지는 못하겠다.).

   왕진붕의 계화 화풍을 짐작해볼 수 있는 전칭작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북송 휘종 때 매년 3월 초에 황실 소유의 금명지(金明池)와 경림원(瓊林苑)을 개방해서 용선 경주를 비롯한 온갖 놀이와 기예 공연을 벌이면서 여민동락했다는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이다. 크고 작은 차이가 있는 모본이 우리가 들어본 것만 7~8종이 되고, 대만 고궁이 그 중 넉 점을 갖고 있는데 '보진경도도(寶津競渡圖)', '용지경도도(龍池競渡圖)', '금명탈금도(金明奪錦圖)', '용주도(龍舟圖)' 등으로 이름은 전부 다르다.

   지금 남아있는 모본들 중 최선본은 아마도 '용주도'인데, 일단 전체적으로는 대략 이렇게 생긴 그림이다:

 

이미지 출처= 소장처= 대만 고궁박물원

   전형적인 횡권 양식인데- 크기는 세로 32.8cm×가로 178cm이다- 여기서 위 이미지 왼쪽 끝부분의 가장 큰 누각(보진루寳津樓)를 확대해 보면 아래와 같다:

 

   보시다시피 기본적인 명암도 다 안 들어가 있는 미완성본이기 때문에 이 그림을 진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것이 왕진붕이 사전에 제작한 초본이라고 주장하는데, 우리가 보기엔 '원작의 초본'이 아닌 '모작의 초본'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다만 다른 모본들이 명청대 모사일 가능성부터 따져봐야 하는 데 비해 이 '용주도'는 원대 것으로는 유력하다.

   이번에는 또 다른 '대조군'으로, 역시 대만 고궁에 소장된 '용지경도도'의 보진루 부분이다:

 

   두 그림의 차이는 가장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필요한 처마 아래의 공포 부분을 비교해 보면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래 왼쪽이 '용주도', 오른쪽이 '용지경도도'이다:

 

   보시다시피 오른쪽 '용지경도도'가 일견 묘사는 더 정교한 듯하지만 사실감이나 입체감은 선은 흐려도 왼쪽 '용주도'가 보다 앞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결론은 아마도 둘 다 모작이라는 것이다- 왕진붕의 진적이라면 당연히 입체감과 정교함을 둘 다 갖추고 있어야 한다. 모작 선본들 중 어떤 것은 최대한 상세한 묘사에만 치중했고, 다른 것은 입체감을 살리는 데만 만족한 것이다.('용지경도도'의 경우엔 공포의 구조를 오해한 채로 모사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우리가 거기까지 다룰 만한 건축사 지식이 없으니, 전문 지식을 갖춘 분이 한번 연구를 해보기 바란다.)

   이제 조선 화원의 솜씨를 볼 차례이다. 아래 이미지는 '석가탄생도'의 우하단, 마야부인의 가마 오른쪽으로 보이는 문루의 일부이다:

 

   이것은 채색이 되어 있어 그냥 지나칠 수 있는데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밑그림에 꼼꼼하게 8~9개의 수평선을 자를 대고 그려서 각각의 공포를 이루는 부자재들의 높이를 다 맞추어 놓았다. 정교한 밑그림에 채색까지 더해져서 시각적인 효과가 탁월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그림의 수준을 평가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말하자면 '축척'이 다르다는 것이다. 위 '용주도'나 '용지경도도'는 그림 전체의 높이가 30~33cm에 불과한 데 비해 '석가탄생도'는 그림 전체가 145cm이고, (우리가 실측은 할 수 없었지만 사진을 놓고 대강 '비례식'으로 계산해봤을 때) 위 전각 하나만도 높이가 대략 26~7cm는 된다. 그림이 크면 정밀 묘사가 훨씬 더 쉽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외 단점으로 사실감이 부족한 부분이라면 부재 하나하나를 충실히 묘사하려다가 공포들의 너비가 불어나서 실제 건축물처럼 자로 잰듯이 일정하게 조정이 되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쯤 되면 왕진붕파의 진정한 후계자는 명나라가 아니라 조선에 있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참조할 만한 그림으로, 아래 이미지는 명사대가 중의 한 사람인 구영(仇英; c. 1494~1552)의 '한궁춘효(漢宮春曉)'의 국부인데 공포 부분을 한번 주의해서 살펴보시기 바란다:

 

원본 이미지 출처= 소장처= 대만 고궁박물원

   보시다시피 그림 전체적으로는 섬세한 묘사와 색감이 돋보이는 수작이지만 공포의 입체감이나 극사실적 묘사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수법을 보면 고화에 해박했던 구영이 의도적으로 오대~북송 시기의 계화 필법을 적극적으로 섞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구영은 왕진붕을 '발전'이라고 인식하기보다는, '어쨌든 오대북송 대가들보다는 아래'로 인식했으리라는 것이다. 서양화의 세례를 받은 현대의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① '2차원의 평면에 3차원 세계를 재현한다'는 분명한 목표와, ② '투시도법'이라는 수단이 둘 다 갖춰져야만 왕진붕을 한 단계 뛰어넘는 건축화가 가능한데, 어느 쪽도 완전하지 않았던 동북아에서 왕진붕의 성취는 더 이상의 진전이 없이 그냥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실지 원대 직업 화원들의 그림이 제대로 보존이 안 되고 남은 것이 별로 없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왕진붕과 그의 직전제자 주보(朱珤; 1292–1365) 정도 외에 '용주도' 수준의 계화를 구사한 화가들이 있었다는 증거 자체가 없다.

   해서 이 '한궁춘효'는 16세기 중반 것이라 '석가탄생도/출가도'보다도 한 세대 이상 뒤이긴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명청대 계화는 연대를 불문하고 원대 수준에 미치 못한다- 묘사가 정교할 때에도 '건축적'이라기보다는 '만화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전기 회화 자체가 희소해서 단정짓긴 어려우나, 이 '석가탄생도/출가도' 외에 이 정도 수준의 계화를 보기 어렵기 때문에 아마도 16세기초 이후는 조선에서도 점차 중국의 경향을 따라갔던 것으로 보인다.

 

IV.3 조선으로의 전달 경로

   일단 왕진붕의 영향이 한반도에 미치기 시작한 기원은 상당히 분명하다- 왕진붕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원 인종이 친형제보다 더 가깝게 여겼던 사람이 바로 고려의 충선왕이기 때문이다. 충선왕의 그림 취향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대 대수장가로 유명했던 인종의 누이 노국대장공주 셍게라기(祥哥剌吉= Sengge Ragi)가 개최한 미술품 감상 모임에 등장한 몇 안 되는 '현대미술 작품'이 거의 모두 왕진붕의 것이었다는 점은 시사적이다.[각주:4] 아마도 충선왕 역시 왕진붕의 대작 한 점 정도는 받아놓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게 아니라도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화가'의 명성이 대도에 줄을 대고 있던 고려의 세도가들의 귀에 흘러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향을 실증할 수 있는 고려회화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해외 학계에서 고려불화, 특히 일본 대고사(大高寺) 소장 '관경십육관변상도'에서 원대 계화와의 유사성을 찾은 경우가 있는데 우리가 보기엔 왕진붕과는 무관하다.[각주:5] 왜냐면 대고사 '관경십육관변상도'가 13세기 것이라는 설도 유력하지만- 그것을 따질 필요도 없이- 확실한 기년작인 이성(李晟)의 '미륵하생경변상도'(1294)에 최소 동일한 수준/수법의 공포 묘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성의 그림에는 계화가 크게 두 부분이 있다. 먼저 그림 상단 배경의 큼지막한 누각은 중심부가 용화수에 가려져 있지만 양 끝쪽으로 송대 필법을 연상시키면서도 원대 스타일로 균질하게 가지런히 정돈된 공포 부분을 볼 수 있고, 다음은 그림 하단 성문의 문루로 대고사 '관경십육관변상도'와 유사한 수법은 이쪽이다.

   이게 필히 사진을 보여드리고 설명을 해야 하는 그림인데,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갖고 있는 게 없다.[각주:6] 일본 사회 특유의 폐쇄성 때문에 일본 소장품들은 온라인에서 쓸 만한 고해상도 이미지 파일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운데, 전시장을 방문한들 웬만한 기획전은 전부 '휴대폰 촬영금지'라서- 그나마 가장 개명한 편인 국립박물관들이 상설전에 촬영을 허용하는 정도이다- 일반인들은 직접 찍을 수도 없다. 여담이지만 우리가 작년 가을에 이 그림을 보러 경도국립박물관에 갔다가 빅센(Vixen) 4배율 단안경을 끼워파는 '세트 입장권' 선전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휴대폰 카메라가 워낙 성능이 좋아져서 사진 촬영만 허용해 주면 바로 현장에서 찍어서 확대를 해서 볼 수 있으니 4배 단안경 따위, 시야가 좁아서 보기만 불편하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세상이다. 그 어두운 전시실에서 휴대폰으로 사진 좀 찍는다고 그림이 아작(?)이 나는 것도 아니어서, 우리가 아는 한 지금 일본 말고 이런 미개한 방침을 고수하는 나라가 별로 없다. 한국은 뭐든지 너무 빨리 변해서 탈이고, 일본은 너무 안 변해서 탈이라 서로 반반씩 섞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아무튼 왕진붕이 소시적에 얼마나 유명한 '천재 소년'이었는지는 몰라도 이성이 1294년에 왕진붕의 그림을 보고 그렸을 확률은 거의 희박하다. 그보다 이성을 비롯한 고려불화의 계화 기법이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왕진붕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 곧, 계화의 발전이 북송 이후에 완전히 정체된 것이 아니라 13세기에도 동북아시아 전체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직업 화원들에 의해- 계속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중국에도 이를 확실히 증거할 그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성의 '미륵하생경변상도'는 여러가지로 굉장히 귀한 자료다(참고로 이 그림과 닮은 지은원 소장 '미륵하생경변상도'는 겉보기엔 묘사력이 비등해 보이지만 구석구석 꼼꼼히 들여다보면 실력차가 있어 이성과 같은 레벨의 화가의 작품은 아니고, 특히 계화 필법에 수준 차가 많이 나는 것으로 봐선 여러 화목에 두루 능해야 하는 궁정화원이 아니라 불화만 전문으로 그리던 화승이나 사화원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상황이 똑 앞서 북송/금대 불전도의 영향을 논할 때와 비슷해 보이지만 이 경우는 문헌 증거를 통해서 최소한의 '연결고리'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원대의 '누각산수' 장르의 그림들이다. 실제 중국회화사에서 왕진붕의 주요 후계자로 꼽히는 이용근(李容瑾)이나 하영(夏永)의 작품들이 전부 여기에 속하고, 아래는 그 중에서 하영 전칭의 '등왕각도(滕王閣圖)'이다:

 

원본 이미지 출처= 소장처= 프리어미술관(Freer Gallery of Art, Washington)

   보시다시피 '누각산수'가 별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누각+산수', 곧 상기 '용주도'에 나오는 것 같은 왕진붕 스타일의 대형 건물군에 (용선이나 인물군 대신) 배경 산수의 비중을 키워서 결합시킨 것이다. 15세기 조선에서 인기가 있었던 누각산수화는 아마도 하영보다는 구도나 산수 부분 필법이 이곽파 스타일로 된 그림일 가능성이 더 높겠지만 우리가 굳이 이 그림을 예시로 선택한 이유는, 첫째로는 계화에 무슨 '이곽파 계화', '동거파 계화'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서 지금 우리의 논점과 무관하고, 둘째로는 '등왕각도'가 당시 문헌에 누차 언급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신숙주가 정리한 안평대군의 소장품 목록인 '화기'를 보면 이 장르의 대가로 '필세가 정미한' 이필(李弼)의- 이 사람은 중국에도 남은 그림이나 기록이 전혀 없어서 정체가 오리무중이지만, 대도에서 한때 잘 나갔던 직업화원일 가능성이 높다- '등왕각도(滕王閣圖)'/'화청궁도(華淸宮圖)'가 있고, 안견이 안평대군을 위해 그린 그림 중에도 '등왕각(滕王閣)'과 '황학루(黃鶴樓)'가 나온다. 뿐만 아니라 성종이 '등왕각도'와 '황학루도'를 꺼내다 직접 제시를 쓰고, 승지들한테 '뽑기'를 시켜서 그림을 나눠준 기록도 있어 15세기 후반까지 내내 이 장르의 그림이 '스테디셀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묘하게 이름이 겹치기 때문에 이게 안평대군이 소장했던 안견의 그림과 동일한 것들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한데, 여말선초에 계속 그려지던 제재들이라서 단정짓긴 어렵다).[각주:7]

   이제 위 '등왕각도' 역시 공포 부분을 한번 확대해서 살펴볼 것인데, 보면 상당히 흥미롭다:

 

   혹 이건 선이 너무 무질서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분이 계신다면, 옳게 바로 보신 것이다. 무론 자세히 살펴보면 나름 일정한 원칙을 갖고 그은 선들이지만, '표현 효과'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마치 남대문 앞을 지나다가 문루를 무심히 흘깃 올려다 보고 지나갈 때 받는 것과 같은, '뭔가 목재가 왕창 들어가 있다'는 느낌밖에 주는 게 없다. 그런데 원대 누각산수화들의 공포 묘사 수준이 전부 이렇게 허술하게 복잡하지 않으면 단순화/도식화가 되어 있지, '용주도' 계열 그림들의 수준에 근접한 경우가 거의 없다.

   여기서 15세기말~16세기초의 조선화원이 어떻게 '석가탄생도/출가도' 수준의 계화를 그리게 되었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즉, 왕진붕파 계화의 필법을 그의 영향을 받은 원대 누각산수화를 보고 익힌 다음, 공포의 구체적인 모양이라든지 용마루의 치미, 추녀의 잡상 같은 디테일은, 말하자면 '실사구시'를 해서 당시 조선의 건축양식을 참고해서 채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밀도의 개선'이 15세기 말에 이뤄진 배경은 무엇일까? 한 가지 가능한 가설은 이것이 성종~연산군대 운영되었던 '내화청'의 유산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전편에서 언급했던 대로 내화청의 기원은 성종대 화원들을 창덕궁 구현전에 상주시키면서 살아있는 새나 초목을 사생하게 한 것이다- 여기서 '사생'의 대상을 주변 건축물로 확장하면 자연스럽게 계화의 표현력도 향상된다. 이용근이나 하영 같은 원대 누각산수의 공포 표현에 사실감이 다소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실력있는 화가라면 누구나 포착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선 대가들의 관행에 도전하기 위해선, 최소한 '새로운 창작 환경' 정도의 자극은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아마도 내화청의 화원들도 그림을 끔찍이 좋아하는 임금들 덕분에 궐내에 근무하면서 '특식'을 받아먹었으면, 그에 상응하는 밥값(?)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지 않았을까? 또한 보다 치밀한 사생으로 공포의 사실감을 개선하면 그림의 장식성이 강화된다는 것과, 이것이 '석가탄생도/출가도'에서 볼 수 있는 남달리 화려한 색감과 궤를 같이한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조선이 명나라보다 최소 반세기~한 세기 더 늦게까지 계화에 천착했던 배경을 추측해보자면, 아마도 근대 학문으로서 미술사가 도입되기 이전에 계화의 대명사는 곽충서였다는 데서, 곧 곽희의 산수화, 이공린의 백묘인물화와 함께 북송 회화가 남긴 전범으로 묶을 수 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 이미지는 곽충서 전칭의 '설제강행도(雪霽江行圖)'로 진적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원대 것이 아닌 북송~금대 작품으로는 신빙성이 있다:

 

이미지 출처= 소장처= 대만 고궁박물원

   이 대만 고궁 소장품은 사실 오른쪽 절반 정도가 잘려나간 것으로, 그림이 잘리기 전에 모사한 버전이 미국 넬슨-앳킨스 미술관(Nelson-Atkins Museum of Art)에 소장되어 있다(이쪽은 다운로드는 안 되지만 시카고대 동아시아미술센터에서 운영하는 'East Asian Scroll Paintings'  웹사이트(https://scrolls.uchicago.edu)에서 상당히 질 좋은 이미지 파일을 볼 수 있다.). 해서 이 그림도 왕진붕의 '용주도'처럼 모본이 많이 돌아다녔던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안평대군도 같은 제목의 그림을 하나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 신숙주의 ‘화기’에서 확인이 된다. 계화가 산수나 인물처럼 위상이 높은 장르는 아니지만 조선에서도 곽충서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소략하지만 연구자료도 갖고 있었다는 증거이다(참고로 현재 통용되는 '화기' 번역본에서 안평대군의 소장품 중에 또 하나의 곽충서 작품으로 '휘종의 어필이 붙은' '고각임강도(高閣臨江圖)'가 있다고 한 것은 오역임을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보다시피 아무 내용이 없는 '설제강행도 곽충서진적(雪霽江行圖 郭忠恕真跡)' 10글자만 휘종의 수금체(瘦金體)를 흉내내어 적었기 때문에 신숙주가 '설제강행도'를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그림 위에 휘종의 어필이 있다(上有宋徽宗御筆)'고 덧붙인 것이지, 이게 바로 뒤에 나오는 '고각임강도'에 붙는 수식어구가 아닌 것이다.).

   위 '설제강행도'를 유심히 살펴 보면 건축화가 아니라서 제재는 다르지만, 실제 관찰에 바탕을 둔 정교한 선박 장구의 묘사가 뛰어나서 정밀도가 상당히 높은 그림이다. 안평대군의 소장품이 수준이 어느 정도나 되었을지는 미지수이나 아마도 원대 모작들 중 선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견이 원대 이곽파를 연구해서 ‘오리지널’ 곽희의 재현을 추구했듯이, 곽충서의 전칭작이나 원대 화가들의 누각산수 진적을 통한 계화의 연구 역시 북송 회화에 접근하려는 시도였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영락제/선덕제 시기의 북경에서도 조맹부 스타일의 복고를 다시금 지향하긴 했으되 이민족을 몰아내고 다시 세운 한족 왕조로서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이 강했다면, 세종조의 문예부흥은 '문예 사조로서의 복고주의'를 더 철저하고 집요하게 추구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영향력이 점차 감소했을지언정 조선 전기 내내 전범으로서의 위상은 잃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우리의 사견이다.

 

***

 

- 대만 고궁박물원 2층의 208 전시실은 국보 서화 한 점을 집중 조명하는 방인데, 마침 지금 상기 '용주도'가 주인공이다. 회화실(210/212 전시실)에서 '獨騷-楚辭文化意象與龍舟'라는 제목으로 테마전을 열고 있기 때문에 보조를 맞춘 것이고, 212엔 '보진경도도'도 출품이 되어 있어, '용지경도도'까지 같이 안 나온 것은 조금 아쉽지만 두 작품을 비교해볼 수 있다. 여기가 컬렉션이 워낙 방대해서, 모르긴 해도 1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이니 관심 있는 분들은 한번 가보시기 바란다. 이 두 전시는 6.21(일)에 끝난다.

- 그리고 서예 쪽에선 7.5(일)까지 '真假乾隆-清高宗的御筆與代筆'이라는 제목으로 건륭제의 진적과 대필, 그리고 대필자들이 자기 이름으로 쓴 글씨를 나란히 보여주는 전시를 한다. 고궁 서예실은 사실 이런 테마전보다는 그냥 상설 교체 전시가- 한국 관광객들 중에 나름 식자들이 설마 이런 게 상설전에 나올 리가 있나 싶어 간혹 '복제품'으로 오인하는, 당/송/원 대가들의 희귀한 묵적이 뭐든 최소 하나 이상 나온다- 훨씬 더 볼 만하긴 하지만, 그림이든 글씨든 기초적인 진위식별도 제대로 안 하는 한국에선 보기 힘든 유형의 전시이니 방문하실 분은 그냥 지나치지 말고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번 봐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오랫동안 건륭제의 '대표작' 행세를 해온 작품도 실은 대필이었음을 알 수 있으니 전시설명을 보지 말고 한번 맞춰 보시기 바란다).

 

   다음 편에선 누락된 부분들을 좀 보충한 다음, 간단히 요약/정리를 하고 마치려고 한다….

 

To be concluded...

 

  1. '어제불부'/'어제전원가' 판화의 전체적인 내용에 관하여는, 김자현, '日本 南禪寺 소장  御製秘藏詮 의 「御製佛賦·御製詮源歌」 판화 연구', "미술사학" 25(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1), pp. 35~68과, 이영종, op. cit., pp. 181~191 참조. [본문으로]
  2. "中國寺觀壁畫全集 vol. 1. 早期寺院壁畫"(廣東教育出版社, 2011), pp. 216~274, 문수전 서벽 전도는 pp. 242~243 도판 참조. [본문으로]
  3. https://www.metmuseum.org/met-publications/beyond-representation-chinese-painting-and-calligraphy-eighth-fourteenth-century [본문으로]
  4. "公主的雅集—蒙元皇室與書畫鑑藏文化"(臺北 : 國立故宮博物院, 2016), p.259, 또 이 아집의 감상품 목록은 pp. 227~228 참조. [본문으로]
  5. 陳韻如, '再探《唐僧取經圖冊》:元代的視覺敘事與新解', "國立臺灣大學美術史研究集刊" 58(國立臺灣大學藝術史研究所, 2025), pp. 229~230 참조. [본문으로]
  6. 이성의 미륵하생경변상도 중 상단의 누각부분은 "宋元仏画─蒼海を越えたほとけたち"(京都 : 京都国立博物館, 2025), p. 152의 도판, 하단의 문루 부분은 "高麗仏画 : 香りたつ装飾美"(京都 : 泉屋博古館, 2016), p. 21의 도판을 '확대기'를 동원해야 보인다. 대고사 '관경십육관변상도'는 원래 계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고려불화대전”(국립중앙박물관, 2010), pp. 41~45의 도판을 참조하면 충분하다. [본문으로]
  7. 성종실록 권100, 성종 10년(1479) 1월 10일 정묘 3번째 기사 [본문으로]
Posted by 이현욱
:

   서화관이 재개관하고 전시가 개편이 되면서 '시즌 하이라이트'라는 것이 생겼다- '교체전시마다 반드시 봐야 할 서화 작품을 2~3점씩 선정'한다는 것인데, 이번 시즌엔 겸재의 '신묘년풍악도첩'(국립중앙박물관)과 '박연폭도'(개인 소장)이라고 한다. 오늘의 주인공은 그 중에서 후자이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 그림은 위작이다. 뿐만 아니라 보기 드물게 객관적으로 간단히 입증할 수 있는 위작이라- 우리가 일전에 올린 '풍악내산총람'보다도 훨씬 더 쉽다- 듣고 나면 '콜럼버스의 달걀'이 떠오를 것이다. 아래 이미지에 해답이 다 들어있는데, 자, 뭐가 문제일까?

 

   먼저 기초지식으로 그림 속 전체 풍경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박연은 폭포 위쪽이 박연이고, 폭포수가 흘러내려서 이룬 못은 고모담이라고 한다. 폭포 위아래로 검은 바위가 하나씩 그려진 것은 아마도 박연의 도암과 고모담의 대룡암일 것이다. 그림 오른쪽 상단의 성문은 대흥산성의 북문이고, 사실 박연폭포는 이 산성 안을 흐르던 시내가 폭포를 이루어 성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대흥산성'을 검색하면 박연폭포와 성문이 같이 나오게 찍은 흑백사진이 있는데, 다운로드가 안 되는 이미지이니 관심있는 분은 한번 찾아보시기 바란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295) 마지막으로 상기 '문제적 장면'에 나오는, 고모담 옆에 서 있는 정자는 이름이 범사정(泛槎亭)이다.

   위 이미지 속의 범사정을 보면- 하나는 열려 있고, 하나는 닫혀 있는-창문이 2개 나 있다. 그런데 잠깐, 정자에 '창문'이라는 것이 있는가? 더 정확히 말하면, 정자엔 당연히 '벽'이라는 것이 없다. 정자의 사전적 정의가 바로 '경치 좋은 곳에 놀거나 쉬기 위해 지은, 벽이 없이 기둥과 지붕만 있는 집'인 것이다.

   여기서 이 그림의 작가는 '벽 있는 정자'와 같은 모순을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우리와 같은 현대인이고, 그림의 제작연대는 20세기 초 이후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만약 구한말 이전의 그림이라면, 화가는 아마도 고서화상에서 사환 같은 것을 하다가 손재주 있는 것이 주인 눈에 띄여서, 가게 골방에 들어앉아 하루종일 가짜 그림만- 그것도 가짜 그림을 범본으로 삼아- 전문적으로 그리면서, 말하자면 '그림 노예' 생활을 하던 인물일 것이다.

 

   혹시라도 조선시대엔 우리가 몰랐던 '벽 있는 정자'가 있었다거나, 아니면 실제 존재하진 않았더라도 그림 속에선 이런 '정자 아닌 정자'를 그려넣은 사례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것은 실제 조선시대 박연 폭포 그림 속에서 범사정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확인해보면 검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 왼쪽은 작자미상의 '송도사장원계회도' 6폭 병풍(1612; 1772 이모) 중 '박연관폭'이고, 오른쪽은 윤제홍의 '학산묵희첩' 중의 '박연도'(c. 1812)이다. 그 아래는 아마 더 자주 보셨을, 강세황 전칭의 '송도기행첩' 중의 '박연도'이다:

이미지 출처=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보시다시피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정자를 올바르게 그렸고, 범사정 벽에 난 창문을 그려놓은 그림은 한 개도 없다. 기실- 우리가 사진을 안 갖고 있어서 못 올린- 겸재 이름으로 된 박연 폭포 그림이 두 점이 더 있는데 거기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그 중 개인 소장의 소품 '박생연도'는 우리가 본 기억이 없고, 간송미술관 소장의 '박생연도'는 길이가 1m가 조금 안 되는 축 그림인데 둘 다 마로니에북스 출판사의 블로그에서 비교적 괜찮은 사진을 볼 수 있다.[각주:1] 이외에 마지막으로 임득명의 '서행일천리장권(西行一千里長卷)' 중 '박연범사정도'(c. 1813)라는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네이버 미술백과에 '박연범차정도'로 검색하면 이미지를 볼 수 있다(제 이름을 치면 안 나오니 주의해야 한다).[각주:2]

   이상 총 여섯 점의 박연 폭포 그림으로부터 조선 시대엔 '벽 달린 정자 그림'조차 없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실상 너무나 당연한 것이, 천하명승 박연폭포 옆에 기껏 정자를 지어놓고 벽을 쌓아서 시야를 다 막아버리는 것과 같은 '악취미'가 우리 조상들에게 있었을 턱이 있겠는가?

   재미있는 것은 이 여섯 점이 다 진적도 아니라는 것이다- 겸재 이름으로 된 그림 2점도 기초적인 진위식별부터 다시 해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 특히 강세황 전칭 '송도기행첩'은 이미 공개적으로 진위논란이 있었던 그림이다(우리가 보기에도 거의 위작이다). 즉, 위작이건 아니건, 최소한 화가가 조선시대 사람이기만 하면 이런 그림은 나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해서 상기했듯이 이 그림은 생활 양식이 완전히 바뀐 20세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외 우리가 위에서 '혹시나'의 가능성으로 '그림 노예' 이야기를 했을 때 아마도 독자들 중에는 '이 무슨 소설이냐' 생각하신 분이 없지 않을 터인데, 조선 사람이 박연 폭포 코앞에 마루 한 칸/방 한 칸 있는 '여염집'을 그려놓으려면 이만저만 무식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달리 경우의 수가 몇 가지가 없는 것이다- 설령 박연 폭포 한 번도 못 가봤다 한들, 여름에 세검정 건너편에서 정자 위의 양반들 구경하면서 발장고만 치고 놀았어도 정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게 아닌가?

 

   실은 이 그림은 시선이 정자까지 내려가기도 전에 안목 있는 분들은 벌써 소소하게 이런 데나,

 

 

   아니면, 아래 이런 데를 보면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화면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암벽 묘사 부분인데- 이것은 알아보려면 조금 더 난이도가 있긴 하지만- 붓질한 것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거의 무너져가는 담벼락에 마구잡이로 '뺑끼칠'을 해놓은 수준이다:

 

   이런 건 붓이 '힘찬' 게 아니라 '무식한' 것이고, 굳이 서양화로 비유를 하자면 '초등학생이 그린 명작 추상화'와 같다- 뭐가 '명작'인지는 보는 사람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누가' 그렸는지는 분명하게 밝히고 넘어가야 할 게 아닌가?

   이 화가가 배움이 짧다는 것은 인물화 부분을 살펴 보면 더 알기 쉽다. 그래서 첫머리에 우리가 보여드린 이미지 안에 답이 다 들어 있다고 한 것인데, '스크롤 압박'을 피해서 인물화 부분만 아래 다시 확대를 해보겠다:

 

   위 사진 맨 오른쪽 시동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자세히 보면, 오른팔이 있어야 할 부분이 명확하게 처리되지 않아서 사실상 '외팔이'가 되어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사실 이 그림은 상기한 간송 소장 '박생연'과 닮은 구석이 많은데, 거기선 범사정 옆에 모여선 인물군 3인이 아예 얼굴도 이목구비가 그려져 있지 않은 윤곽선 뿐이고, 시동은 옆모습만 보인다- 이 그림은 바로 작년 호암미술관 겸재 전시에도 나왔었는데, 우리가 보기엔 18세기 그림 자체가 아니라서 이렇게 쓸모가 생길 줄 모르고 사진을 안 찍어놓았다. 그래서 우리가 이 '박생연'은 사진이 없는데, 대신 유사한 장면이 '해악전신첩'(1747) 중의 '삼부연'에 나온다(이것은 확실한 겸재 진적이고, 겸사겸사 이렇게 확대해서 보면 점 하나 찍은 솜씨도 가짜하고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이미지를 보면, 사람 머릿수가 2배로 늘었다는 걸 제외하면 전체적인 처리 수법은 비슷하다는 걸 볼 수 있는데, 보통 이런 부류의 그림에서 인물은 주인공이 아니라 자연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한 '소품'에 더 가깝기 때문에 묘사는 간략하고 선도 많이 쓰지 않는다.

   한데 '박연폭도'의 화가는 이것과 비슷하게 생긴 그림 속 장면을 보고 베껴 그리면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동의 얼굴이 온전히 보일 정도로 몸을 정면으로 돌려놓고는, 자연스럽게 따라 나타나야 할 오른팔은 제대로 그려놓지 않아서 '외팔이'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골방에 들어앉아서 매일같이 하던 '그림 노예' 노릇이 지겨워서, 심심파적으로 지인의 초상 혹은 본인의 '자화상'이라도 그려넣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화가가 인물의 각도를 틀었다고 묘사를 제대로 못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거니와, 시동 바로 옆 주인의 왼팔 도포 소매에 주름 잡아놓은 솜씨만 보더라도 한마디로 '요령부득'이라, 이 작가가 인물화 묘법을- 다른 화가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하든, 아님 중국 화보를 보고 공부를 하든- 체계적으로 공부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아마도 인물화 역시 이를테면 '단원 가짜' 같은 것을 보고 베끼면서 배운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 전시는 4.26(일)까지. '법수 없는 위작은 이렇게 생겼다'는 걸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특히 관련 분야를 전공할 뜻이 있는 학생들은 놓치지 말고 전체적인 인상 뿐 아니라 암벽/나무/인물 등등, 그림을 요소요소로 나눠서 눈여겨 봐두면 좋을 것이다. 제대로 교육받은 화가가 그린, 화법에 어긋남이 없는 그림을 겸재 것으로 둔갑시킨 것은 당연히 알아보기가 더 어렵고, 그것도 겸재와 연대가 겹치는 18세기 중후반 이전 그림이라면 더욱 더 어려워진다. 이렇게 눈썰미와 손재주만 갖고 남의 그림 베끼기만 해서 그린 그림부터 알아보는 게 가장 기본이다.

 

***

 

   전시가 개편이 되면서 서화관에서 다만 몇 점이라도 서예 작품을 더 볼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처럼 서예 전시가 부실한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서예박물관에 제대로 된 서예사 전시가 사라진 지도 벌써 꽤 됐다.

   혹자는 한글이라는 완벽한 문자를 가진 덕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이를테면 일본이 가나를 버리고 한글을 수입해다 쓴다 할지라도 그들의 '서도사'를 한국처럼 천대할 것 같진 않다. 우리가 예전에 듣기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엔 서예사를 전공한 연구 인력이 없다고 했다- 아직도 없으면 지금이라도 자리를 만들어서 한 명 뽑아야 하고, 그새 한 명이라도 뽑았다면 두 명으로 늘려야 한다.

   한국인에게는 활 잘 쏘고 글씨 잘 쓰는 DNA가 있다. 허나 만약 '양궁'이라는 게 없었다면, 아니 그 양궁이 올림픽 종목이 아니었더라면 한반도에 '명궁'은 진작에 대가 끊겼을 것이다. 서예는 무슨 서구의 'calligraphy'와는 사촌뻘조차도 아니고, '올림픽'이라는 것도 당연히 없다. 명필의 대는 이미 끊긴 것이나 마찬가지고, 보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서예사조차도 망각의 늪으로 빠질 것이다. 김생부터만 쳐도 최소 1300년이 넘는 서예사가 곧 국민들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질 판인데, '국립중앙'박물관이 안 나서면 이걸 누가 하겠는가? 이런 일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나서서 한 마디씩 해야지 서예가 내 전공이 아니라고 나 몰라라 한다면, '자살의 현장'을 방조하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가 서예는 아직 회화보다도 공부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따로 글을 잘 쓰진 않는데, 이 이야기는 안 하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마침 생각난 김에 몇 자 적었다.

 

Posted by 이현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