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zart Piano Concerto No. 20 in d minor, K. 466
 
I. Allegro
II. Romance
III. Allegro assai

 

(i) 작품개요

   1785년 2월 완성 및 작곡자 초연.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중 가장 분위기가 독특함과 동시에 단조로 된 '유이'한 작품 중 하나인데- 다른 하나는 물론 24번(c minor, K. 491)이다- 보다 대중적인 것은 이쪽이고, 사실상 태어난 이후로 '잊혀진 적이 없는' 레퍼토리이다.

 

- 1악장; 현악기만으로 나지막하게 들어오는 첫머리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혹은 '대작의 기운'이- 느껴진다. 오케스트라가 포르테로 한바탕 휘몰아친 다음 (혹 제2주제인가 싶은) 경과구와 연결구를 거쳐서 마침내 등장하는 피아노가 연주하는 새로운 주제는 또 굉장히 섬세해서, 비유하자면 이 세상에서 가장 상처받기 쉬운 영혼의 소유자가 읊조리는 독백과도 같다.

   1악장은 소나타 형식이지만 모차르트 협주곡의 경우는 거의 전부가 오케스트라와 독주 악기가 같이 시작하는 법이 없다. 오케스트라가 먼저- 때로는 마치 서주와 같은 느낌으로- 주제들을 제시하고 나면 독주 악기가 새로운 주제를 들고 등장하면서 '후반전'이 시작된다. 이렇게 제시부가 '2단 구성'으로 되어 있어도 오케스트라가 제1/2 주제를 다 제시하고, 그것을 독주 악기가 반복하는 단순한 구성은 언제나 가능하지만, 반복을 피해서 주요 주제들을 양쪽에 나눠서 배치하는 보다 복잡한- 그리고 교묘한- 구성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후자의 경우 거의 필연적으로 부주제가 여럿 필요해지기 때문에- 오케스트라가 2~3분 동안 제1주제만 연주하다가 피아노한테 배턴을 넘기기는 좀 힘들지 않겠는가?- 모차르트처럼 좋은 악상이 끊임없이 샘솟는 사람한테(만) 적합한 스타일이기도 하다.

   이 곡의 경우는 오케스트라가 제1주제와 경과주제를, 피아노가 상기 제1부주제와 제2주제를 사이좋게 반반씩 나눠 갖고 있어 밸런스가 좋다.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발전부로, 피아노가 제1부주제를 변주하는 사이사이 오케스트라는 마치 반주하듯이 제1주제를 연주하는데 서로- 무슨 '변신 합체 로봇'처럼- 아귀가 딱 맞는다. 즉, 이 제1부주제는 '1-1 주제'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제1주제와 (동기나 음형이 아닌) '내용상의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이것은 주인공의 상처/아픔과 그 원인이 되는 배경/환경일 수도 있고, 아니면 비련의 여주인공과 폭압적인 아버지가 주고받는 대화라고 상상해도 좋다- 물론 이 음악은 표제 음악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런 내용을 서사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지 '두 주제 사이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니, 각자 이해하기 편한대로 연상하면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발전부는 짧지만- 베토벤 카덴차보다도 보통 한 10~30초 정도 짧다- 음악의 내용상 긴장이 한차례 해소되고 악장 전체를 유기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런 독특한 스타일의 주제 관계를 갖는 발전부는 이후의 모차르트 협주곡에선 다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역시 뭔가 창작 배경이 되는 '특수한 상황'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해볼 수는 있지만 우리가 아는 한 단서가 전혀 없다.

  재현부는 제1주제에 피아노가 같이 참여하면서 전개가 되고- 이미 소임을 다한 제1부주제를 제외하고- 경과구, 제2주제가 차례로 취급이 된다. 카덴차는 1악장이나 3악장이나 모차르트 본인의 것은 남아 있지 않으나 대신 베토벤이 쓴 것이 남아 있어 기준이자 표준이 된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워낙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작품이라 이외에도 브람스나 부조니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이 쓴 카덴차들이 있는데, 비록 작곡이나 즉흥연주로 베토벤을 이기기는 그리 쉽지 않지만 '다양성의 보존'이라는 의미는 있겠다.

 

- 2악장;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잔잔하고 고즈넉한 음악이 펼쳐지지만 앞선 1악장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돌아올 3악장의 폭풍과 격정을 암시하는 강렬한 중간부가 있다.

   형식상은 멜로디만 따라간다면 A-B-A-C-A의 꼴이라서 론도의 일종으로 볼 여지는 있다. 그러나 악보를 살펴보면 상기 B는 모차르트가 강렬한 C에 대응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주부를 보강하기 위해서 넣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 그렇다면 이 악장은 론도가 아니라 대략 A(aa1-bb1-a)-C(c1c2)-A(aa1) 형태의 3부 형식이 되고, 이것은 음악지우사(음악세계사) 해설서(작곡가별 명곡해설 라이브러리)가 잘 봤다(참고로 이 중간부엔 c1/c2에 각각 하나씩 도돌이표가 2개가 있다- 요즘은 작곡자의 의도를 중시해서 라이브에서도 반복을 잘 생략하지 않은 게 대세지만 간혹 옛날 라이브 녹음 중엔 상대적으로 분량이 긴 c2의 도돌이표를 생략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이 악장의 구조를 론도로 파악하고 연주하는 쪽에 가깝게 된다.).

   내용적으로는 바깥 악장들뿐 아니라 이 악장 안에서도 격렬한 중간부 C와 대조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해석의 폭이 그리 넓지 않고, 다만 모차르트가 빠르기말 대신 기입한 '로망스(romance)'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는 문제가 있다. 이걸 '로망스의 어원'부터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까지 들먹이기 시작하면 얘기가 한없이 복잡해지는데, 이 곡의 경우로 한정하면 실용적인 질문은 요컨대 '사랑 노래'의 느낌을 얼마나 살릴 것이냐는 문제다. 그냥 알기 쉽게 '다정다감한' 연주를 하면 실패할 가능성은 적은데 뭔가 통속적으로 들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길 수 있다.

   여기서 역으로 생각하면 개념상으로는 아주 절제된- 혹은 냉정한- 접근법도 가능할 것 같고, 실제 피아노 독주로 시작하는 첫번째 주제까지는 이렇게 해도 들을만 하다. 하지만 음악이 전개될수록 잘 먹히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악장 끝까지 만족스럽게 잘 구현된 연주는 우리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현재로선 우리는 아마도 모차르트는 해당 부분을 작곡할 때 시쳇말로 '로맨스물'이라고 할 때의 그 '로맨스'를- 적어도 추억이나 독백의 형식으로라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 3악장; 형식상 이것은 론도도 아니고, 소나타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나타 론도'도 아니다. 이걸 무슨 '발전부 없는 소나타 형식'이라고 보기엔 '제대로 된 제2주제'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중간에- 곧, ABACA…에서 C(=A')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주제와 부주제가 충분히 발전이 되고도 남음이 있어 모차르트가 적어도 처음엔 론도 소나타를 염두에 두고 작곡을 시작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 C=A'를 무슨 '재현부 안의 보조/보충적인(subsidiary) 발전부'라고 부르는 것은 이 악장을 론도의 도식에 갖다 맞추는 것과 똑같은 견강부회요, '내로남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음악의 내용상 이 3악장에서 주부의 주제 다음으로 중요한 주제는 코데타/코다를 이끄는 대조적인, 밝고 희망찬 D major의 선율이기 때문이다. 첫번째 주제와 코다가 대조를 이루면서 핵심이 되는 음악은 론도건 소나타건 정형화된 형식으로 꿰어 맞추기는 어렵다. 즉, 모차르트가 이 단조의 비극을 '희망의 주제'로 마무리하려고 작심한 순간 이 악장의 형식은 '불규칙형'으로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모차르트엔 악곡의 형식상 변칙이 많다는 걸 우리보다 더 잘 알면서도 어떻게든 가급적이면 특정한 범주로 꿰어맞추려고 드는 것은 어쩌면 음악학자들의 '직업병'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작곡가는 '좋은 음악'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지 '곡목해설' 쓰기 좋으라고 작곡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3악장도 모차르트가 소나타 론도 형식의 뼈대만 이용해서 좋은 악상들을 음악의 내용적인 흐름에 따라 유기적으로 엮어내서 만든, 한 편의 자유로운 명작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템포에 관해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빠르기 지시에 'assai'가 괜히 붙은 게 아니라는 건 첫 주제부터 들으면 바로 알 수 있지만 이후로는 피아노가 여기저기 섬세하게 표현해야 할 게 많기 때문에 결국은 '본인이 노래할 수 있는' 템포를- 사람마다 맥박이 다르듯 조금씩 다 다르다- 선택해야 한다. 꼭 'assai'를 가속의 느낌으로 살리고 싶다면 이 곡은 거꾸로 3악장 템포부터 먼저 설정한 다음에 '상대적인 가속의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1/2악장의 템포를 설정하는 것도 한 가지 요령이 된다.

 

 

   고전파 협주곡의 소나타 형식은 사실상 이 곡에서 완성이고, 이후 24번(c minor, K. 491)/25번(C major, K. 503)에 가면 스케일이 보다 확대된다- 24번은 상대적으로 형식의 교묘함보다는 관악기의 활용을 극대화한 '교향악적 사운드'로 정평이 있고, 25번 1악장은 더 많은 수의 주제를 유기적으로 잘 엮어내서 작곡기법상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그리고 최후의 27번(B-flat major, K. 595) 1악장에 가면 베토벤도 이보다 더 잘 쓸 수 없을 정도로 제1주제만으로 탁월하게 전개한 발전부가 있다.

   해서 베토벤이 등장했을 땐 이미 협주곡이라는 장르에선 딱히 할 게 별로 없는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다. 베토벤이 작곡한 다섯 곡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 가장 잘 쓴 것은 4번(G major, Op. 58)인데, 모차르트 23번(A major, K. 488)에 견줄 만한 정도이고, 이 20번이나 24번, 혹은 27번에 비길 만한 작품은 남기지 못했다- 베토벤도 천재지만 불과 열 네 살 연상의 또 다른 천재가 남긴 거대한 유산의 무게에 짓눌려서 신음한 장르가 바로 피아노 협주곡인 것이다.

 

 

(ii) 녹음들
; 들을 만한 녹음은 많지만 이번에도 '음악성'을 기준으로 딱 네 명의 피아니스트로 압축을 했다. 각 악장의 주요 주제를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들이라면 이보다 더 있지만, 경과부 내지 연결구, 혹은 종결부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들, 겉보기엔 천편일률적으로 음계를 타고 오르내리거나 화음을 넣으면서 그냥 '지나가도 될 것 같은'(?) 대목들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노래가 되는 음악가들은 우리가 들어본 중에는 이 네 사람뿐이다.

 

1. Clara Haskil/Henry Swoboda/Winterthur Symphony Orchestra- 1950

   하스킬의 첫번째 스튜디오 녹음. 일단 이 음반은 스보보다가 무명 지휘자라서 해석의 주도권을 하스킬이 쥐었을 거라고 오해하기 쉬운데, 체코 출신의 스보보다는 이 음반을 낸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레이블의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이다(스보보다의 후임이 바로 명 프로듀서 쿠르트 리스트(Kurt List)였다.). 즉, 말하자면 초창기 웨스트민스터의 '감독 겸 선수' 비슷한 위치였기 때문에 고용된 오케스트라나 아티스트들이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하스킬 본인이 성격상 내가 치고 싶은 대로 치겠다고 지휘자하고 각 잡고 싸우는 캐릭터하고는 한참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지휘자들이 자기한테 새로운 자극을 주기를 바라는 스타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대개 하스킬의 협주곡 녹음들은 각각의 지휘자들과의 협력과 타협의 산물이다.

   스보보다는 이 음악을 한 편의 '비극적 오페라'처럼 보고 있는데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살짝 '신파조'에 음악에 생기가 좀 부족한 것이 단점이지만 군데군데 현악 파트 노래시키는 걸 들어보면 기본 실력은 갖춘 지휘자다. 특히 3악장의 피아노만큼은 우리가 들어본 하스킬 음반들 중에 가장 아름답다.

   카덴차는 1/3악장 모두 니키타 마갈로프(Nikita Magaloff)의 것인데 우리가 듣기에 음악적으로 특별히 뛰어나다고 보긴 어렵고, 하스킬/마갈로프/리파티(Dinu Lipatti)가 서로 다 막역한 사이였기 때문에 이 카덴차를 쓰기 시작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2. Clara Haskil/Ferenc Fricsay/RIAS Symphony Orchestra- 1954
   이것도 'studio'라고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출반용은 아니고 라디오 방송용 녹음(우리가 알기로는 1977년에 DG에서 처음 LP로 발매했다.). 이때가 54년 1월11일인데 녹음 하루 전날의 공연 실황도 음원이 남아 있어서 Audite 레이블에서 2개의 녹음을 다 모아서 발매한 것도 있다. 연주는 4년전 음반에 비하면 전반적으로 보다 간결하고 절제된 미학인데 이런 스타일로는 아래 1960년 녹음이 낫고, 보다 다정다감하고 표현이 풍부한 것은 위 녹음, 혹은 아래 소개할 카라얀과 협연한 라이브 녹음 쪽이라- 단독으로 들으면 괜찮지만- 어느 쪽이든 '비교우위'는 좀 없다. 프리차이의 모차르트는 거칠지 않은 것이 장점, 부드럽기만 하고 뼈가 없는 것이 단점이다.

 

3. Clara Haskil/Igor Markevitch/Lamoureux Orchestra- 1960

   하스킬이 남긴 이 곡의 유일한 스테레오 녹음이라 음질이 가장 좋고, 연주가 단정해서 사실상 '레퍼런스' 역할을 해온 음반. 다만 3악장은 마치 라이브 공연의 후반부에서 체력이 다 소진되었을 때처럼 중간에 한번씩 음악의 긴장이 풀려버리는 느낌이 없지 않다. 우리가 의심하기로는, 하스킬이 이 녹음을 마치고 불과 20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미 몸이 상당히 쇠약해진 상태에서 녹음을 진행하다가 막판에 체력의 한계를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해서 사연을 알고 들으면 음악이 더 처절하게 들리는 면도 없진 않으나, 필립스는 이 녹음을 조금만 더 서둘렀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한편 1악장 카덴차는 라파엘 쿠벨릭(Rafael Kubelik)이 하스킬을 위해서 작곡한 것인데, 이것을 지금 필립스에서 수십년이 넘게 하스킬 본인의 것으로 오기를 하고 있다- 우리도 계속 잘못 알고 있다가 이번에 자료 조사를 하면서 클라라 하스킬 국제 피아노 콩쿠르 조직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데이터베이스(https://db.clara-haskil.ch/)를 보고 배운 사실이다. 이 사이트에 하스킬의 음반목록(discography) 외에 자료가 남아있는 모든 콘서트의 프로그램도 올라와 있으니 하스킬의 팬이라면 한번 들러보시길 권한다.

 

4. Clara Haskil/Herbert von Karajan/Philharmonia Orchestra- 1956 live
   이것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라이브. 해석의 큰 틀은 아마도 카라얀의 것이다- 이를테면 2악장은 전형적인 '카랴얀식 로망스'고, 3악장에 바짝 당긴 템포도 카라얀이 설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하스킬이 실행에 옮기면 수준이 달라서 카라얀이 혼자서 단원들을 달달 볶아서 만든 것보다 음악이 훨씬 좋다- 카라얀의 모차르트 관현악곡은 대개 듣기 좋은 사운드 말고는 별 게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하스킬의 기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50년대 라이브라서 음질은 썩 좋지 않지만 스튜디오 음반들보다 음악에 생기가 있는 것이 큰 장점.

   여기서는 흥미롭게도 1악장은 쿠벨릭, 3악장은 마갈로프의 카덴차를 섞어 쓰고 있다. 위 1960년 녹음처럼 하스킬이 3악장 카덴차를 생략하기 시작한 최초의 자료는 우리가 알기로는 1959년 클렘페러(Otto Klemperer)와 협연한 루체른 페스티벌 라이브 녹음인데, 우리가 지금 이 CD를 안 갖고 있어서 리뷰를 쓸 수가 없다- 이게 유튜브는 물론이고 웬만한 유료 스트리밍 서비스에 음원은 다 올라와 있고, 흥미롭게도 1악장에서는 도로 마갈로프의 카덴차를 쓰고 있어서 56년 이후는 쿠벨릭 카덴차만 썼다거나 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 Mieczysław Horszowski/Jan Krenz/Great Symphony Orchestra of the Polish Radio and Television in Katowice- 1963 live

   호르쇼프스키는 이 강렬한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시로만 표현하고, 산문은 없다. 가장 빠르고 강렬한 패시지에서도 노래가 멈추질 않는데, 특히 2악장은 우리가 들어본 모든 피아니스트들 중에 최고다. 사실 종합적으로 평가했을 때, 하스킬과 호르쇼프스키는 모차르트 피아노 음악의 'H2'라고 불러도 좋은 수준이다. 호르쇼프스키의 모차르트가 오늘날까지도 하스킬만큼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은 협주곡의 스튜디오 녹음이 50년대 DG에서 나온 14번(E-flat major, K. 449) 하나밖에 없는 탓이 적지 않다. 90대에 Nonesuch 레이블에서 녹음한 F major(K. 332)/D major(K. 576) 소나타, d minor(K. 397) 환상곡은 경쟁자가 없지만- 하스킬도 소나타 녹음은 K. 280(F major)/K. 330(C major)밖에 없다- 모차르트 하면 역시 소나타보다는 협주곡이기 때문이다.

   이름이 긴 악단은 지금의 폴란드 국립 라디오 교향악단(Polish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의 전신이다. 오케스트라도 지휘자도 2류라서 귀에 거슬리는 상스러운 소리를 낼 때가 없지 않고, 무엇보다 지휘자하고 템포가 합의가 완전히 안 되어서 피아노나 오케스트라나 어느 한쪽이 쉴 때는 각자 자기 가고 싶은대로 막 나가긴 하는데 상기했다시피 호르쇼프스키 모차르트 협주곡 녹음이 희귀해서 음질이 이 정도 수준이라도 되는 것이 별로 없다.(이 음반이 2019년에 처음 나왔을 땐 유럽에서만 소량 유통되었던 것 같고, 2024년에 일본에는 들어왔지만 우리가 아는 한 한국에는 수입된 적이 없다. 관심 있는 분은 일본 타워레코드에는 아직 창고에 재고가 소량 남아있을지 모르니 한번 주문을 넣어보시기 바란다- 다만 일본이 원래 한국보다 음반 값이 비싸고, 호르쇼프스키가 1984년에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의 실황을 묶어서 2CD로 만들었기 때문에 협주곡 한 곡을 듣기 위한 가격으로는 꽤 비싸다.)

 

6. Robert Casadesus/George Szell/Columbia Symphony Orchestra- 1956

   이렇게 모아놓고 비교를 하면 까자드쉬 입장에선 굉장히 억울하겠으나, 까자드쉬는 다른 세 사람 만큼 영롱한 톤은 안 갖고 있다. 대신 주요 주제는 아주 곱고 섬세한 터치로 노래하고, 빠른 패시지는 대조적으로 액센트를 명확하게 넣고 거침없이 호쾌하게 달린다- 본인이 연주하는 음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주 명료하게 전달하는 아티스트. 또한 20세기 전반기 모차르트 연주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기도 해서, 1950년대에 모차르트 소나타 전곡 사이클을 시작한 호르쇼프스키도 사실 까자드쉬의 리사이틀을 들으러 갔다가 D major(K. 576) 소나타를 듣고 너무 아름다워서 그때부터 자기도 연주 프로그램에 넣기 시작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연주는 2악장은 우리가 여기 소개한 녹음들 중에서는 가장 빠르게 확실한 안단테 느낌으로 들어오고, 중간부 C도 거칠게 들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 과감하게 질주한다. 3악장도 알레그로 'assai'에 충실한 연주인데, 주부를 이렇게 강렬하고 직선적으로 들어오면 뒤에 가서 상기 '희망의 주제'가 대비가 더 뚜렷하게 잘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곧, 모차르트가 3악장 템포를 당긴 데에는 일리있는 이유가 있고, 이를 무시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음악적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카덴차는 모두 일평생 작곡을 겸업했던 까자드쉬 본인의 것이다.

 

7. Clifford Curzon/Benjamin Britten/English Chamber Orchestra- 1970

   반대로 이번엔 1/2악장은 여기 소개된 녹음들 중에서 가장 느린 연주- 여유있는 템포로 '세공'이 잘 되어 있는 것이 장점이다. 대신에 단점이라면 음악에 자연스러운 생기가 부족하다는 것. 이것은- 라이브와 비교했을 때- 스튜디오 녹음이 갖는 일반적인 특성이긴 한데 커즌의 경우는 녹음실에서 완벽주의가 너무 지나쳐서 음악이 경직되어 있다.

   이게 낭만주의 레퍼토리 같으면 흥분이 자제된 상태에서 음표를 차분하게 갈고 닦은 것이 외려 '절제의 미학'으로 들리는 효과가 있어서 괜찮을 수 있겠으나, 모차르트는 다채로운 톤만으로는 부족하고 '기운생동'이 꼭 필요한 음악이다- 사실 까자드쉬가 톤에 '비교 열위'가 있다면, 커즌의 경우는 다른 세 사람과 비교했을 때 리듬의 탄력 면에서 열세이기도 하다. 해서 커즌의 모차르트 협주곡들은 거의 라이브 녹음들 중에서 상태가 좋은 쪽을 고르는 게 더 나은 선택인데, 희한한 게 이 곡은 라이브가 틀림없이 하나쯤 있을 법한 레퍼토리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나와 있는 것이 없어서 달리 대안도 없다.

   3악장은 공격적이기보다는 보다 통상적인 경쾌한 론도 느낌이 강한 마무리로, 이렇게 연주하면 '해피 엔딩'이 더 강조되는 해석이 된다. 그리고 1970년쯤 되면 이른바 (작곡 당시의) '연주 관행(performance practice)'에 관한 연구 및 인식이 쌓이면서 2악장에 장식음(embellishments)가 조금씩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을 들어볼 수 있는데, 이게 잘 넣으면 듣기 좋고, 잘못 넣으면 안 넣으니만 못하니 만큼 전부 'case by case'지, 일반적인 원칙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 참고 녹음)

 

8. Mieczysław Horszowski/Frederic Waldman/Musica Aeterna Orchestra- 1962 live
   호르쇼프스키의 또 다른 라이브 녹음. 발트만은 빈 태생이고, 1940년대 미국으로 건너와서 47년부터 줄리어드 교수 및 학교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을 지냈다. 이름이 특이한 오케스트라는 발트만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정기 공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시작된 앙상블이다. 호르쇼프스키와는 주기적으로 연주를 같이 해왔기 때문에 이쪽이 지휘자와 호흡이 더 잘 맞아서 실제 공연장에서 들었다면 아마도 위 폴란드 라디오 녹음보다 연주가 더 좋았을 걸로 추측이 되지만, 이게 음원이 발트만이 개인적으로 보관하던 사설 녹음(private recording)이고 상태가 썩 좋지 않은지라- 피아노 소리가 납작하게 찌그러져 있는 관계로- 아무한테나 추천할 수 있는 음반이 못 된다. 위 폴란드 방송국 음원을 구하기 전에 우리가 아쉬움을 달래려고 가끔 한번씩 듣던 음반인데 1악장은 음악의 흐름이 이쪽이 낫고, 3악장은 폴란드 방송국 녹음 쪽이 낫게 들린다.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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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우리가 작년 봄까지 자료가 없어서 누락했던 참고 도판 중에, '석가출가도'의 구도상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구이의 비탄' 장면이 조선 전기엔 '설산수도상'의 핵심 장면 중 하나였음을 뒷받침하는 작품이 있는데 바로 대판시립미술관(大阪市立美術館) 소장의 '불전도'이다. 우리가 이 그림을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세부를 확인할 수 있는 질 좋은 도판도 구하질 못하고 있다가, 다행히 작년 여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새 나라 새 미술' 전시에 출품이 되면서 실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위에 보시다시피 구이가 큼지막한 전각 안에서 바닥에 쓰러져 대성통곡하고 있는 장면이 화면 상단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림 우상단 첫머리가 '금도낙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석가출가도'와의 유사성은 그림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한눈에 인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나머지 부분들을 살펴보면 주로 '설산수도+수하항마+녹원전법+쌍림열반', 곧 팔상 중 후반부 절반에 해당하는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여기에 더해서 그림 하단에는 석가모니의 전생담이 합쳐진 묘한 형태이다).

   그렇다면 '구이의 비탄' 역시 '설산수도상'에 해당한다고 봐야지, 유독 이것과 '금도낙발'을 따로 떼서 '태자의 출가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의미가 없다. 팔상을 반 나눠서 그리는 전통이 조선 전기에 있었음은 일본 대덕사(大德寺)와 금강봉사(金剛峯寺)에 각각 나뉘어 소장되어 있는 1535년작 2폭 1조의 팔상도로 입증이 되거니와, '야반유성'도 포함되지 않은 그림에 '유성출가상'을 갖다붙이는 것도, 그 결과 팔상이 4:4가 아니라 3:5(혹은 3.5:4.5?)로 나뉜다는 것도 우리가 보기엔 이중으로 억지스럽기 때문이다. 성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설산'수도상에 포함되는 것이 혼란의 원인일 수 있는데, 팔상에서 유성출가~설산수도는 이렇게 공간적 배경이 오락가락하면서 계속 이어지는 스토리이기 때문에 이는 불가피하고, 1편(2024.08.31-쾰른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석가출가도 연구초 1)에서 우리가 설명했던 것처럼 저본인 석보상절 원문의 '이튿날~'을 기점으로 둘을 나누는 게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석가출가도'는 사실 절로 유성'출가'상을 연상시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름이다. 이미 이 이름으로 십 수년 이상 불려 왔고, '비람강생상'에 해당하는 그림도 지금 '석가탄생도'로 통용되고 있으니 고치는 게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게끔 최소한 전시 해설이나 도판 설명에는 팔상 중 무엇에 해당하는 내용인지 정확히 부연설명을 해주었으면 한다.

 

   이 '불전도' 자체는 16~17세기 초 사이에 그려진 그림으로 보이나 정확한 제작연대는 추정이 어렵다. 다만 범본이 된 그림의 원형은-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1460년 이후에 도화서에서 그려진 탱화로 보이는데 이는 '금도낙발' 장면을 '석가출가도'와 대조해보면 알 수 있다:

 

   위에 보다시피 태자의 발을 핥고 있는 말 건척이나, 보관을 들고 꿇어앉아 있는 차익 등은 전부 누락이 되었지만 태자의 복식만큼은- 색깔이 '강색'이 맞는지는 의심스러우나- 강사포를 베껴 그린 것이 분명하다. 한데 우리가 '부록편'(2025.03.22-쾰른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석가출가도 연구초- Appendix)에서 다뤘던 바와 같이, 조선에서 세자가 최초로 원유관복을 착용하기 시작한 것이 1460년이기 때문에, 1460년 이후 도화서에서 제작한 탱화가 이 그림의 '시조'에 해당한다는 것까지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석가출가도'가 이 그림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까지 단정짓기는 어려운데, (상기했듯이 이 그림에 '석가출가도'를 연상시키는 구석은 있으나) 일단 '석가출가도'의 가장 큰 특징인 변각구도를 채택하지 않았고, 도상의 세부 표현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전기 모든 팔상도의 원형은 1446년 소헌왕후의 추천 불사 때 "석보상절"을 꼼꼼하게 읽고 화폭에 옮겨서 제작한 탱화이고, '금도낙발'은 물론이고 '구이의 비탄' 역시 1446년부터 이미 그림 속에 존재했을 공산이 높기에 이 두 장면을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근거가 부족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림이 전반적으로 필력이 약해서 작가가 도화서 출신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서울 화가'가 맞는지도 한번 의심해봐야 하는 지경이라, 역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경우는 도화서에서 제작한 그림이 모사가 되고, 그 모사본이 다시금 모사가 되면서 퍼져 나가는 와중에 이 그림도 제작되었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계통의 범본이 자연스럽게 섞였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불전도'가 필력은 약해도 미술사적 의의는 결코 작지 않은 그림인데, 조선 전기 팔상도 자체도 희귀하지만 하단에 묘사된 본생담을 그린 그림은 더 희귀하기 때문이다. 아래 이미지 속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위에 판독이 어려운 얼룩덜룩한 무늬가 그려져 있는 붉은 옷을 입은 인물이 주인공, 곧 윤회전생하는 석가모니이다:[각주:1]

 

   보면 이 한 단에 다섯 가지 본생담을 담고 있는데, 오른쪽부터 차례로- 좀 섬뜩하긴 하지만- 다리를 자르고, 눈을 찌르고, 건물 안에서 팔을 자르고, 그 옆에서는 목을 잘라서 '보시'를 하고 있다.

   ① 처음 둘은 월인석보 권11의 협주에 들어있는 시비왕/월명왕의 보시행일 것이다. 먼저 시비왕의 보시행은 매에 쫓겨 품에 날아든 비둘기를 살리기 위해서 매에게 자기 몸의 살을 다 바친다는 이야기인데 일단 처음에 먼저 넓적다리 살을 잘라서 저울에 달았다가 모자라자 살을 계속 베어낸다는 식으로 전개가 된다. 앞에 앉은 2인은 아마도 시비왕을 시험하기 위해 각각 비둘기와 매로 변신했던 비수갈마천과 제석천이라는 설정으로 보인다. 그리고 월명왕은 길 가다 만난 맹인에게 눈을 보시하는- '이식수술'을 어떻게 했는지는 물론 나오지 않는다- 짤막한 이야기다.

   ② 다음으로 스스로 목을 베는 이야기는 기존 연구대로 월광왕의 보시행이 맞는 것 같은데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을 한 건 아니지만) 일단 지금 남아있는 월인석보 스무 권 안에는 보이지 않는다- 혹 실전된 다섯 권 안에 들어있던 건지, 아니면 '사지절단형' 본생담만 모아서 그리다가 같이 끼어들어간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③ 중간에 정자 비슷한 건물 안에서 팔을 자르는 대목은 아예 어떤 본생담인지조차 확인이 잘 안 된다. 이럴 때 상투적으로 쓰는 어구가 '학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운운인데, 이 경우는 연구를 해도 해명이 잘 안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상기했듯이 이 화가의 기량이 시원치 않아서 묘사 자체가 부정확할- 즉, 베끼다가 잘못 베꼈을-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④ 이를테면 '사지절단형' 본생담이 다 끝나면 이어지는, 위 이미지 가장 좌측의 수레를 몰고 가는 일행이 그려진 부분은 수레를 타고 가는 여정이 '메인 플롯'인 본생담이면서 월인석보 권20의 협주에 수록이 되어 있는 수대나태자의 보시행이 가장 유력하지만, 역시 화가의 표현이 두루뭉술해서 정확하게 기중 어떤 장면인지는 '확인불능'이다.

   ⑤ 마지막으로 이 그림의 본생담은 실은 위 한 단이 전부가 아니고, 맨 오른쪽 시비왕의 보시행 장면 위로 다섯 사람이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부터가 시작인데, 이것도 고증이 잘 안 된다:

 

   보면 여기도 붉은 바탕에 무늬가 그려진 옷을 입고 있는 인물이 석가모니의 전생 중 누군가일 텐데, 그 아래 무늬나 디자인은 비슷하고 색상만 다른 옷을 입고 있는 인물이 눈에 띈다. 옷이 곧 신분을 표상하고 있다고 본다면 왕족으로 보이는 2인과, 신하로 보이는 3인의 대화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단 떠오르는 것은 동생 '악우태자'가 주요 악역으로 등장하면서, 월인석보 권22에서 상당히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선우태자의 보시행'이다. 문제는 이야기 속에 이 형제가 이렇게 신하들과 앉아서 대화를 나눌 만한 장면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본생담 장면을 고증하면서 '월인석보에 실려 있는지 여부'를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은 까닭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 '불전도'의 본생담 부분도 범본은 월인석보를 저본으로 삼아 도화서에서 제작한 그림일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참고할 만한 다른 사례라면, 일본 청산문고(靑山文庫) 소장의 '안락국태자경변상도' 혹은 '사라수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림이 있다.[각주:2] '한글이 쓰여 있는 최초의 그림'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은 월인석보 권8의 협주에 실린 '원앙부인의 극락왕생'을 꼼꼼하게 그림으로 옮기고 장면마다 한글로 설명을 달았고, 기중 단문이 아닌 긴 문장들은 아예 본문의 월인천강지곡(其227~248)을 장면에 맞게 잘라서 거의 통째로 베껴적은 것이다.

   이 '안락국태자경'의 경우는 15세기 이전에 한반도에서 성립된 위경이라는 것이 통설이기는 하나, 월인석보보다 이른 판본은 아직 발견된 바가 없기 때문에 다른 '저경'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석가탄생도/출가도'와 묶어서 생각을 해보면 도화서의 화원들은 저경이 뭐가 됐든, 또 이미 오래 전에 확립된 도상들도 석보상절/월인석보를 기준으로 디테일을 전부 맞춰서 새로 그리는 작업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상 석보상절 자체가 세종대왕의 의지로 당시 수양대군이 총책임을 맡아서 직접 펴낸 책이다- 단순히 '어제 서문'만 달랑 얹혀 있는 불서하고는 경우가 다른 것이다. 궁정화원한테 그 어떤 경전이 지금 뫼시는 상전이 만든 책보다 더 중요하겠는가? 그렇다면 석보상절이 간행된 1447년 이후, 혹은 늦어도 세조가 실권을 장악한 1453년 이후에는 도화서 화원들은 본생담을 주제로 하는 그림을 그릴 때도 석보상절/월인석보를 저본으로 삼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혹은 심지어는, 동북아시아에 벽화나 부조 외에 별 작례가 없는 본생도가 16세기 조선 회화에 다시 등장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석보상절/월인석보가 새로운 저본으로 등장하면서 준 자극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이 '불전도'가 상기했듯이 기량이 떨어지는 화가에 의해서 'N차 모사'가 된 그림이라 다른 계통/전통의 범본이 섞여들어갔을 수도 있고, 원본 그림이 어땠을지를 짐작해보기도 어렵지만, '15세기 도화서에서 제작된 본생도'의 존재를 암시하는 간접증거로는 충분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고려불화로부터 이어받은 전통에 명, 정확히는 '북경 스타일'을 가미해서 변화를 준 여타 조선전기 불화들과 비교했을 때, 석보상절/월인석보를 저본으로 한 작품들은 창작 동기와 저본에서부터 창의적인 구도에 이르기까지 가장 '조선적'인 불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도화서의 최전성기였던- 곧 회화적으로 가장 뛰어났을- 15세기 중엽의 작품은 한 점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 가석할 따름이다.

 

V. 남은 질문들 및 요약정리

; 중요하긴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획기적인(?) 새 증거자료가 발굴되지 않으면 현재로선 답변이 곤란한 질문들이 남아 있다.


V.1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는 원래 한 조였나?

   이 두 그림이 구도를 제외하면 세부필법은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팔상도 한 세트' 중 각각 '비람강생상'과 '설산수도상'이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화풍의 유사성만으로 '한 세트임'을 입증하기는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석가탄생도'가 1499년 안순왕후의 추천 불사 때 제작되었고, '석가출가도'가 1504년 인수대비의 추천 불사 때 제작되었다면, 불과 5년 상거에다 '대표화사'가 동일인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그림이 비슷해 보이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그럼 혹 '한 세트가 아님'은 입증할 수 있을까? 일단 전시장 안에서 육안으로 보기에는 '석가탄생도' 쪽이 필력이 더 나아 뵈기는 한다. 허나 '석가탄생도'가 보존상태가 월등히 낫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 결정적인 차이는 아니다. 즉, 이게 산수화 같으면 지워지고 남은 부분만 봐도 (상태가 더 좋은 그림보다) 필력이 더 낫다든가 이런 식의 판정이 가능하겠지만, 이 두 그림처럼 정밀한 묘사와 색감을 위주로 하는 경우는 당연히 보존상태가 좋은 쪽이 더 잘 그린 것처럼 보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실례로 우리가 전편에서 다뤘던 계화 부분을 살펴보자면, '석가출가도'에서 가장 큰 전각의 공포는 현재 이렇게 보이는 상태이다(직관적인 비교를 돕기 위해 전편에도 실었던 '석가탄생도'의 국부를 아래 먼저 제시했다):

 

   위에 보시다시피 얼핏 봐선 '석가탄생도'와 필법은 동일하지만 선이 삐뚤빼뚤해서 무성의하고 공력이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포 위 처마 쪽에서부터 비단이 균열이 일어나서 (색이 벗겨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표면이 일그러져 있다- 즉, 화가가 원래 선을 삐뚤게 그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사진상으로 보기엔 갈라진 비단을 억지로 끌어당겨서 기워붙인 것 같은 꼴인데 실제 상태가 어떤지, 복원이 가능한지는 보존수리 전문가가 밝은 데서 실사를 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실 이 두 그림의 가장 큰 차이는 구도에 있고, 구도가 그림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구도의 차이가 한 세트가 아님을 암시한다고 논증하는 것도 가능은 하다. 곧, '석가탄생도'의 짝은 '수평구도'로 '설산수도상'의 중요 장면을 한 폭에 다 담은 그림이어야 하고, '석가출가도'의 짝은 역시 비스듬한 변각구도로 쌍폭에 담은 '비람강생상'이어야 한다는 주장인 것인데, 이것도 아래에서 보다시피 그렇게 간단히 단정짓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

 

V.2 (한 세트건 아니건) 연작의 일부라면 몇 작품으로 이뤄진 연작인가?

  '팔'상도라면 기본적으로는 당연히 '8폭 1조'라야 맞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나) '석가출가도'가 변각구도를 채택하면서- '설산수도상'이건 '유성출가상'이건- 사실상 '0.5상'의 내용만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팔상이 다 들어가려면 최소 9폭이 필요해진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수성지보(井手誠之輔) 교수가 제기한 가설은 애초에 소헌왕후의 추천 불사 때부터 8폭 이상의 '다폭의 불전도'를 제작했으리라는 것이다.[각주:3] 이것도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나 현재로선 입증할 수 있는 증거도, 반증할 수 있는 증거도 없어 보인다. 의문점이라면 실록에 기재된 '팔상성도지도(八相成道之圖)'가 실제로는 12폭이나 14폭이었다면 왜 그냥 '세존성도지도'나 '석가성도지도'라고 부르지 않았느냐는 것과, "석씨원류" 같은 장편(?) 불전 도상이 큰 영향을 발휘하는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도 '팔상도'에 대한 끈질긴 집착이 이어지는 까닭을 '전통의 고수' 외에 과연 뭘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인데, 다만 이런 것들은 그저 '정황증거'일 뿐, 확증은 되지 못한다.

   어쩌면 정수성지보 교수는 일본 여명관(黎明館)에 소장된 13폭 짜리- 원래 최소 14폭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대 불전도 연작을 모델로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우리가 이 그림 실물을 본 적이 없어 그림에 관해서 구체적인 언급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각주:4] 단지 구도에 관해서 지적하자면, 이 연작의 제8폭 '차익환궁'이 '석가출가도'와 겉보기에 유사해 보이지만 화면 구성을 보면 4개 안팎의 장면을 위에서 아래로 단순하게 쌓아놓은 그림이다.[각주:5] 곧, 개별 장면 안에서 '대각선'이 보인다고 해도, 그림 전체적으로는 '석가출가도'처럼 대담하게 화면 전체를 반으로 가른 변각구도가 아니라 평범한 '수평구도'로 짜인 그림인 것이다.

   다만 이 불전도 연작이 도판상으로 봐선 계화 부분이라든지, 여러 모로 원대 회화의 유풍이 많이 남아 있어 명초, 곧 14c 말~ 15c 전기 작품으로는 신빙성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 '불전도'와 조선전기 팔상도에 공통적으로 영향을 준 원대 불전도가 다만 몇 폭이라도 임란 전까지 한반도에 남아 있었을 개연성은 배제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그림을 디테일까지 찬찬히 들여다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연작은 나중에 언제 기회가 되면 국내에 한번 가져와도 좋을 작품인 것이, 벽화가 아닌 축화 형태의 불전도 연작으로 '석가탄생도'/'석가출가도'와 나란히 걸어놓고 비교해 볼 만한 그림이 우리가 아는 한 별달리 없다. 또, 일본 개인이나 사설 미술관이 아닌 공공기관 소장이라 국내 대여에 비교적 협조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현시점에서 우리의 기본 가설은 1446(~7)년의 팔상도는 '8폭 1조'였고,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제작 당시의 사정에 따라서 2폭 1조나 4폭 1조, 혹은 16폭 1조와 같이 '8의 약수 혹은 배수'로 다양한 버전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석가출가도'가 제작된 15c말 ~16c 초엔 어떤 환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소헌왕후 사후에 팔상도가 제작되었다는 것 말고는 조선의 왕후 혹은 대비의 추천 불사 때 제작된 탱화의 종류나 수량을 알려주는 자료는 우리가 아는 한 남은 것이 없다. 다만 1480년대 행한 대군/공주들의 추천 불사의 경우, 인간한 불경의 권말 인기에 목록이 함께 남아있는 사례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각주:6]

 

  - 명숙공주(인수대비 장녀; 1482년 사망); 영산회도/약사회도/서방회도/천불도/팔난관음도/십육나한도/명부시왕도

  - 순숙공주(정현왕후 장녀; 1488년 사망); 원각회도/석가수도상/달마도/미륵하생회도/관음도/아미타삼존도/시왕도 

  - 월산대군(인수대비 장남; 1489년 사망); 영산회도/서방회도/행보미타/지장회도/미타팔대보살/천수관음

 

   보면 세종~문종대에 비해 전반적으로 왕실 불사가 사치스러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공주들만 해도 대략 7종의 탱화를 제작하고 있어 왕후의 경우에는 최소한 여기에 추가로 '팔상도 한 세트' 정도는 더 그려야 격이 맞아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마지막 월산대군의 경우를 보면 외려 공주들보다도 그림이 하나가 적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위선 공주들의 경우엔 제작하지 않았던 백금 불상을 다섯 구나 조성했고, 탱화도 맨 뒤에 아미타팔대보살도/천수관음도 두 점은 순금화이다. 불경도 명숙/순숙공주의 경우에는 기존의 목판을 이용해서 각각 84/42부를 인간한 게 전부이지만, 월산대군은 105부를 인간하고 거기에 더해서 화엄경 4부를 금니로 사경을 했다. 이 시기 금 시세나 물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비용이 공주들의 경우보다 최소 몇 배는(에서 어쩌면 열 배까지도) 더 들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결론은 예나 지금이나 '격'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아주 세속적으로 표현해서- '돈을 얼마나 많이 썼느냐'라는 것이다. 불상이나 사경에 충분히 많은 지출이 있었다면 탱화는 오히려 줄어들 수도 있어, 위 대군/공주들의 경우처럼 어디서 불경 뒤에 목록을 포함한 발문이나 인기라도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추측하는 것도 어렵다.

 

   넘어가기 전에 상기 목록에 대해서 간단한 부연설명을 덧붙이자면, 순숙공주를 위해서 그린 '석가수도상'에 잠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순숙공주의 경우에 새로 그린 그림은 맨 뒤의 아미타삼존도/시왕도 둘 뿐이고 원각회도~관음도까지는 태조 때 그린 그림을 보수한 것으로 밝히고 있어, 단정하긴 어려우나 어쩌면 여말선초의 선구적인 '설산수도상'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숙공주에 비해 불경도 반만 찍고 불사가 전체적으로 간소했던 것은 순숙공주가 시집도 가기 전 열살 남짓한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까닭인데, 해서 이 '석가수도상'이 굳이 추천 불사를 위한 그림으로 선택된 이유도 그림 안에 장자의 딸이 우유죽 공양을 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어서였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곧, 수리를 하면서 장자의 딸을 죽은 공주와 닮게 그리거나, 혹은 그 옆의 여백에 공주의 이름을 적어넣으면 '우리 딸이 이렇게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니 극락왕생하게 해달라'는 간단하고 직관적인 '주술적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또, 참고로 예전에 이 목록을 접한 적이 있는 분들은 월산대군을 위해서 '행보미타지장회도'를 그렸다고 알고 계셨을 수 있는데, 이는 오역이다- 설령 우리가 모르는 '아미타지장회'라는 게 정말로 있었다 한들, 그림 속 아미타불이나 지장보살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어야지 수식어로 앞에 '행보(行步)'가 붙을 수는 없다. 원문을 보면 발문을 지은 학조대사가 '영산회도/서방회도/행보미타/지장회도', 이렇게 그림 제목을 네 글자씩 맞춰서 쓴 것을, 끝에 그림 '도'자에만 신경을 써서 그만 '영산회도/서방회도/행보미타지장회도'라고 잘못 끊어 읽은 것이다. '지장회도'는 두 공주의 추천 불사 때 공통적으로 그려졌던 '시왕도'가- 죽은 사람 좋은 데 가라고 벌이는 불사이니 웬만하면 필수라고 볼 수 있다- 빠진 것으로 보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지장시왕도' 계통의 그림임이 확인되고, '행보미타'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아미타독존 내영도'류의 그림이 아니었을까 싶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상기 목록이 지금 우리의 논점에 주는 시사점이라면, 만약 우리가 추정하는 것처럼 '석가출가도'가- 최소한 원본은- 인수대비의 추천 불사 때 제작된 것이라면 아래와 같은 2가지 경우가 다 열려 있다는 것이다.

 

(i) 팔상을 모두 변각구도 쌍폭으로 제작해서 총 16폭을 그렸다: 위 명숙/순숙공주의 경우를 봤을 때 다른 불화를 그리지 않았다면 점수로 껏해야 2배 정도이니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 혹은 인수대비의 경우 조정에서 주관하는 공식적인 장례는 이전 사례보다 간소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일종의 '보상심리'로 두 며느리(정현왕후와 승평부대부인 박씨)가 불사는 더 크게 치렀을 수도 있다- 마침 승평부대부인 박씨가 바로 상기 월산대군 사후의 성대한 불사를 주관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이 경우 자연히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는 한 조는 아닌 것이 된다.

(ii) 팔상도를 다 그리지 않고 일부만 발췌해서 그렸다: 어쩌면 인수대비는 추천 불사조차도 간소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더 성대하게 치르려다 보니 (위 월산대군의 경우처럼) 불상이나 사경에 돈을 과하게 써서 탱화는 오히려 줄어들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상기 두 공주들의 불화 목록에 보이는 정도에 더해서, 왕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좌에 앉은 마야부인'이 등장하는 '비람강생상'과, 고인의 일생과 연관된 특별한 의미를 대입할 수 있는 '설산수도상'을 쌍폭으로 쪼개어 그려서 보태는 정도로 그치는 것도 가능해진다- 즉, 팔상도를 온전하게 다 그릴 때나 '8의 약수나 배수'가 적용되는 것이지, 기중 몇 개만 골라서 그린다면 폭수가 다 짝이 맞을 필요도 없고 한 폭에 '0.5상'이 들어가도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는- 불완전하나마 같이 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한 조가 맞을 것이다.

 

   얘기가 이렇게 월드컵 때마다 한국 축구 팬들을 고문하는 '경우의 수'로 끝나서 우리도 심히 유감스러운데 현재로선 이 이상 논의를 진척시킬 수 있는 근거가 없고, 어쩌면 '영구미제'로 남을 가능성도 상당해 보인다.

 

***

 

   '석가출가도'의 가장 큰 회화적 특징은- 이 장르의 그림에서 쉽게 보기 힘든- 화면을 대담하게 반으로 가른 변각구도이다. 이와 같은 구도의 선택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대각선 구도의 중심 위치, 곧 주인공의 자리를 태자비 구이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과, 화면에 담긴 장면의 수가 줄면서 생긴 남는 공간에 외견상 텍스트와 느슨한 연결관계밖에 없는 대형 연못을 배치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저본인 "석보상절"의 '설산수도상'에 해당하는 내용에 딱 한번 등장하는 연못은 태자의 출가 후에 불륜의 의심을 받던 구이와 아기가 뛰어든 불구덩이가 변해서 된 것으로 모자를 구원하는 장치이다. 화가는 여기서 연못가의 짝 잃은 공작과 연못 안의 원앙을 대비시키는 은유를 통해서 구이의 비탄을 한층 더 극적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다.

   화가의 이런 처치는 조선 팔상도의 시원이 소헌왕후의 추천 불사에 있다는 점과 맞물려서 그림의 주인공이 태자가 출가한 때와 비슷한 나이에 남편 의경세자가 요절했으며, 유복자(미래의 성종)의 어머니였던 인수대비였음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림의 제작연대로 가장 유력한 것은 인수대비의 추천 불사가 이루어진 1504년경이고, 이는 연산군 대이다. 이 그림의 또 다른 특색인 '정반왕의 십이지장복' 역시 기존의 학계 통설대로 조선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추측한 대로 성종조 말의 '금승법 파동'으로 인하여 극심해진 유불간의 감정대립의 흔적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이는 시기적으로 연산군 대를 가리킬 수밖에 없다.

   기실 기존 통설이 옳다고 해도 입만 열었다 하면 '위를 업신여기는(凌上) 풍조'를 일소하겠다고 하면서 피바람을 일으킨 사람도 바로 연산군이고, 조선을 사상적으로 지배했던 성리학적 질서와 '가장 안 친했던(?)' 왕도 연산군이기 때문에, 연산군 대는 여전히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남는다. 뿐만 아니라 이 그림의 두 번째 큰 (회화적)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지금 남아있는 여타 15세기 불화에도, 16세기 불화에도 보이지 않는 독특하고 화사한 색감 역시 그림을 끔찍이 좋아했던 연산군의 화려한 취향을 반영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 그림이 갖는 미술사적 의의는 불화/종교화의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속화에 있어서도 중대한데, 그 첫째 이유는 이렇게 문헌상으로만 희미하게 전하는 연산군 대의 화려했던 궁정회화의 편린을 간직하고 있는 사실상 유일한 자료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림 안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계화 부분 때문인데, 이성(李晟)으로 대표되는 고려불화의 전통을 잇고 있음과 동시에 원대의 발전된 왕진붕파 계화의 영향을 흡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정밀한 묘사는 이 '석가출가도'가 ('석가탄생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계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라 해도 전혀 지나침이 없는 높은 수준에 있다.

 

   한 가지 단서를 단다면, 이 그림이 인수대비 추천 불사 때 제작된 원본이라는 보증은 없다는 점이다. 예전에 해당 편에서(2024.12.31-쾰른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석가출가도 연구초 3) 언급했듯이, '나 홀로 십이장복을 입고 있는 정반왕'은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왕실이 발원한 그림이 범하기엔 너무 큰 실수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실수를 연산군 대의 '나사 빠진 조선'의 산물로 해석하는 것은 유혹적이지만 진실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이를테면 이 일이 1506년쯤 한양 최고 갑부가 원본의 대표화사한테 거금을 주고 팔상탱화를 부탁하면서 '우리 정반성왕을 주 소왕과 대등한 황제로 그려달라'고 주문해서 발생한 사고라고 가정해도 최소한 똑같이 '있음직한' 시나리오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다만 이 그림이 설령 왕실에서 발원한 그림이 아니라 하더라도 15세기 말~16세기 초 도화서의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는- 원본이었다면 아마도 좀 더 그림이 좋았을 수는 있겠지만- 손색이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이 그림은 상기한 대로 보존상태가 썩 좋지는 않기에, 비록 국외에 있지만  한국에서 예산과 인력을 지원해서 수리를 해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작품이라는 점은- 만약 우리가 제대로 논증을 했다면-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모두 공감하시리라 믿는다.

 

 

  1. 이 그림의 본생담 해명을 시도한 연구로는 신지연, "조선시대 석가팔상도 연구"(동국대학교, 2010), pp. 47~51, 오영삼, op. cit., pp. 34~37 참조. [본문으로]
  2. 호암미술관 편, "朝鮮前期國寶展"(삼성문화재단, 1996), pp. 242~243 도판 참조. [본문으로]
  3. 정수성지보(井手誠之輔), op. cit., p. 301 참조. [본문으로]
  4. 정수성지보(井手誠之輔), '黎明館本の仏伝場面に関する覚書', 국죽순일(菊竹淳一) 편, "九州における仏敎美術の遍在と偏在"(平成7・8・9年度科学研究費補助金(基盤研究(B1))研究成果報告, 1998) [본문으로]
  5. 오영삼 교수의 책에도 이 제8폭의 작은 도판과 약간의 언급이 있다. 오영삼, op. cit., pp. 44~46 및 p. 232의 미주 34번 참조. [본문으로]
  6. 천혜봉, "한국서지학연구"(삼성출판사, 1991), pp. 696~697 및 pp. 702~703 참조. [본문으로]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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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불전도와 계화

IV. 1 연원

   지금까지 이 그림에 관한 주요 논점들은 거의 다 취급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상 그림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요소는 다뤄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그냥 배경'이라고 무시되기 쉬운 계화 부분이다. 기실 '석가탄생도/출가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라면 한눈에 들어오는 큼지막한 궁궐의 정교한 묘사인 것이다.
   계화(界畵)의 '계'는 자를 가리키는 '계척界尺' 혹은 직선을 그릴 때 쓰는 붓인 '계필界筆'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요는 실제로 자를 대고 그리거나, '자로 잰 듯이' 그린다는 뜻이다. 제재는 주로 건축물인 경우가 많지만 선박이나 수레처럼 정밀묘사가 가능한 모든 '인공물'이 다 해당이 된다.

   그런데 이 계화가 불전도라는 장르와 본격적으로 융합된 것은 최소 10세기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북송 태종이 짓고 간행한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 권21,  '어제불부(御製佛賦)'의 첫번째 판화이다[각주:1]:

 

(원본 이미지 출처= 고려대장경연구소)

   이 그림이 마침 지난 가을 일본 경도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송원불화' 특별전 후반부에 출품되었기 때문에 관심있는 분들은 최근에 실물을 확인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이 된다- 위에 보다시피 그림의 우측 절반 이상이 계화로 채워져 있는데, 화면 우상단 작은 원 안에 전생의 석가모니가 마야부인의 뱃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도솔천으로부터 흰 코끼리를 타고 내려오는 장면을 묘사한 것 말고는 딱히 중요한 내용도 없다(작품 속의 중요한 사건은 '비람강생상'에 해당하는 그림 왼편에서 대부분 벌어진다).

   화가가 이런 구도를 채택한 이유에 대한 한 가지 가설은 그 당시 유행하던 화풍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최초의 계화 대가로 언급되는 곽충서(郭忠恕)나 위현(衛賢)이 "어제비장전"의 간행보다 살짝 앞선 10c 중반 무렵에 주로 활약한 인물들이라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최초'라고 해서 계화가 이때 시작되었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고- '계필직척(界筆直尺)'이라는 표현은 이미 당나라 장언원의 "역대명화기"에 나온다- 학자들은 보통 이것을 중국회화사에서 계화가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 10세기 중후반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동양화든 서양화든 종교화는 가장 보수적인 미술 장르중 하나지만 그렇다고 늘 똑같은 그림만 계속 그릴 수는 없다. '어제불부' 판화의 밑그림을 담당한 화가 역시 당시 유행하던 '최신식' 계화를 비중있게 도입해서 그림의 장식성도 높이고, 새로운 스타일도 보여주는 효과를 노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까닭이다.

   이러한 계화와 불전도의 융합 전통에서 '어제불부' 판화의 뒤를 잇는 중요한 그림은 현재 중국 산서성(山西省) 흔주시(忻州市) 번치현(繁峙縣)에 있는 암산사(巖山寺/岩山寺)의 금대 벽화로, 1158~67년간 그려진 벽화들 중에 문수전 서벽 전체가 불전도이다. 이 작품은 우리도 현장에 가본 적이 없어 자세히 논할 수는 없는데, 도판을 보면 장면에 맞춰서 건물을 묘사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기본적으로 궁성을 묘사한 대규모 계화를 먼저 깔아놓고 사이사이에 불전의 주요 장면을 끼워넣은 구도로 되어 있다.[각주:2]

   이것은 경전 판화와 벽화라는 형식의 차이는 있지만 상기 '어제불부' 판화의 구도법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또한 이 그림의 대표화사 왕규(王逵; 1100~1167 이후)가 북송말에 사실상 기초 수업을 다 마친 금나라의 궁정화가였기 때문에 적어도 북송~금대까지는 이런 양식의 불전도가 꾸준히 그려졌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는 북송과 문화적 교류가 매우 깊었고, 북송 멸망 이후엔 금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다. 따라서 고려의 궁정화원들도 불전도를 그릴 때 비슷한 스타일을 구사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지적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이를 증거할 길도 없고, 또 여몽전쟁 이후, 곧 13세기 후반 이후에도 이 전통이 이어졌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어제불부' 판화의 경우는, 전체적인 인상은- 특히 '석가탄생도'와- 뭔가 공통점이 있는 듯도 보이는데 막상 세부 묘사로 들어가보면 정확히 닮은 구석이 어딘지 확실치가 않다. 불교의 역사가 오래다 보니 불전도에 나오는 도상들이 확립되고 동북아시아에 널리 전파된 역사도 깊어서, 이렇게 시간 간격이 먼 작품들 사이에는 '겉보기에 닮은' 정도로 직접적인 영향 관계를 확립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이 작품은 당시 도화서 화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가 맞는지부터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초조대장경은 조선초에도 이미 '희귀 고서'였을 것이고, 지금 일본 남선사에 있는 "어제비장전 권21"이 당시 조선 땅 어디에 있었을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고려말이나 조선초에 수입되었을 원/명대 판본하고는 경우가 다른 것이다. 과연 당시 조선의 화가들이 이 판화의 존재를 알고나 있었을까? 그림 안에서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대답은 '아니오'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요는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고려 후기의 '연결고리'가 존재했을 개연성은 충분하지만, 근거 자료가 없는 논증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간에 전통의 단절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계화의 비중이 높은 불전도는 다시 그려질 수 있다는 논리가 존재한다. 일단 석가모니가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난 덕분에 불전도에서 '도솔래의상'~'유성출가상'에 이르기까지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배경이 왕궁이다. 다른 한편으로 왕실 발원 회화에 궁정생활 묘사가 화려하게 들어가는 것은 장르를 불문하고 일반적인 경향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왕실 발원 불전도란 태생적으로 공급 측에서나 수요 측에서나 정교하고 화려한 계화를 넣기를 원하기 쉽다는 것이다. 상기한 것처럼 암산사 벽화를 그린 왕규도 궁정화원이었고, '어제불부'의 판화 역시 작자 미상이긴 하지만, 앞에 '어제'가 붙어있다는 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물론 전제는 화가들이 계화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다시 '석가탄생도/출가도'에 보이는 계화 양식의 기원에 관한 문제와 연결된다. 다행히 적어도 이 그림의 계화 양식의 근원은 고려불화와 원대 계화에서 추적할 수 있다.

 

IV. 2 왕진붕과 원대 계화의 발전

   사실 중국회화사에서 계화의 발전은 북송~금대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원대에 다시 한번 새로운 정점을 찍게 되는데, 원대 계화를 대표하는 화가가 바로 왕진붕(王振鵬; 1280?~1329?)이다(왕진붕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는 우리가 본 중엔 방문(方聞; Wen Fong)이 쓴 Beyond Representation의 것이(pp. 396~7) 가장 좋다. 이 책이 한국에선 도서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에 가면 무료 PDF 파일을 제공하니 참고하시기 바란다).[각주:3]

   왕진붕은 중국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기 이태리에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건축 설계와 회화를 겸업했을 사람이다. 동북아에서는 화원과 대목 사이에 '직업의 분화'가 이미 오래전에 끝났기 때문에 아마도 병행을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명성은 생전에도 계화가 더 높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유감스럽게도 지금 남아있는 확실한 진적은 공교롭게도 재작년에 호암미술관이 대여해 왔던 불도인물화 2점, '이모육불도(보스턴미술관)'와 '유마불이도(메트로폴리탄미술관)'뿐이다(그외 북경고궁 소장 '백아고금도(伯牙鼓琴圖)'는 도판으로 봐선 저으기 의심스러우나, 우리가 실물을 본 적이 없어 100% 위작이라고 단정짓지는 못하겠다.).

   왕진붕의 계화 화풍을 짐작해볼 수 있는 전칭작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북송 휘종 때 매년 3월 초에 황실 소유의 금명지(金明池)와 경림원(瓊林苑)을 개방해서 용선 경주를 비롯한 온갖 놀이와 기예 공연을 벌이면서 여민동락했다는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이다. 크고 작은 차이가 있는 모본이 우리가 들어본 것만 7~8종이 되고, 대만 고궁이 그 중 넉 점을 갖고 있는데 '보진경도도(寶津競渡圖)', '용지경도도(龍池競渡圖)', '금명탈금도(金明奪錦圖)', '용주도(龍舟圖)' 등으로 이름은 전부 다르다.

   지금 남아있는 모본들 중 최선본은 아마도 '용주도'인데, 일단 전체적으로는 대략 이렇게 생긴 그림이다:

 

이미지 출처= 소장처= 대만 고궁박물원

   전형적인 횡권 양식인데- 크기는 세로 32.8cm×가로 178cm이다- 여기서 위 이미지 왼쪽 끝부분의 가장 큰 누각(보진루寳津樓)를 확대해 보면 아래와 같다:

 

   보시다시피 기본적인 명암도 다 안 들어가 있는 미완성본이기 때문에 이 그림을 진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것이 왕진붕이 사전에 제작한 초본이라고 주장하는데, 우리가 보기엔 '원작의 초본'이 아닌 '모작의 초본'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다만 다른 모본들이 명청대 모사일 가능성부터 따져봐야 하는 데 비해 이 '용주도'는 원대 것으로는 유력하다.

   이번에는 또 다른 '대조군'으로, 역시 대만 고궁에 소장된 '용지경도도'의 보진루 부분이다:

 

   두 그림의 차이는 가장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필요한 처마 아래의 공포 부분을 비교해 보면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래 왼쪽이 '용주도', 오른쪽이 '용지경도도'이다:

 

   보시다시피 오른쪽 '용지경도도'가 일견 묘사는 더 정교한 듯하지만 사실감이나 입체감은 선은 흐려도 왼쪽 '용주도'가 보다 앞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결론은 아마도 둘 다 모작이라는 것이다- 왕진붕의 진적이라면 당연히 입체감과 정교함을 둘 다 갖추고 있어야 한다. 모작 선본들 중 어떤 것은 최대한 상세한 묘사에만 치중했고, 다른 것은 입체감을 살리는 데만 만족한 것이다.('용지경도도'의 경우엔 공포의 구조를 오해한 채로 모사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우리가 거기까지 다룰 만한 건축사 지식이 없으니, 전문 지식을 갖춘 분이 한번 연구를 해보기 바란다.)

   이제 조선 화원의 솜씨를 볼 차례이다. 아래 이미지는 '석가탄생도'의 우하단, 마야부인의 가마 오른쪽으로 보이는 문루의 일부이다:

 

   이것은 채색이 되어 있어 그냥 지나칠 수 있는데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밑그림에 꼼꼼하게 8~9개의 수평선을 자를 대고 그려서 각각의 공포를 이루는 부자재들의 높이를 다 맞추어 놓았다. 정교한 밑그림에 채색까지 더해져서 시각적인 효과가 탁월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그림의 수준을 평가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말하자면 '축척'이 다르다는 것이다. 위 '용주도'나 '용지경도도'는 그림 전체의 높이가 30~33cm에 불과한 데 비해 '석가탄생도'는 그림 전체가 145cm이고, (우리가 실측은 할 수 없었지만 사진을 놓고 대강 '비례식'으로 계산해봤을 때) 위 전각 하나만도 높이가 대략 26~7cm는 된다. 그림이 크면 정밀 묘사가 훨씬 더 쉽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외 단점으로 사실감이 부족한 부분이라면 부재 하나하나를 충실히 묘사하려다가 공포들의 너비가 불어나서 실제 건축물처럼 자로 잰듯이 일정하게 조정이 되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쯤 되면 왕진붕파의 진정한 후계자는 명나라가 아니라 조선에 있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참조할 만한 그림으로, 아래 이미지는 명사대가 중의 한 사람인 구영(仇英; c. 1494~1552)의 '한궁춘효(漢宮春曉)'의 국부인데 공포 부분을 한번 주의해서 살펴보시기 바란다:

 

원본 이미지 출처= 소장처= 대만 고궁박물원

   보시다시피 그림 전체적으로는 섬세한 묘사와 색감이 돋보이는 수작이지만 공포의 입체감이나 극사실적 묘사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수법을 보면 고화에 해박했던 구영이 의도적으로 오대~북송 시기의 계화 필법을 적극적으로 섞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구영은 왕진붕을 '발전'이라고 인식하기보다는, '어쨌든 오대북송 대가들보다는 아래'로 인식했으리라는 것이다. 서양화의 세례를 받은 현대의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① '2차원의 평면에 3차원 세계를 재현한다'는 분명한 목표와, ② '투시도법'이라는 수단이 둘 다 갖춰져야만 왕진붕을 한 단계 뛰어넘는 건축화가 가능한데, 어느 쪽도 완전하지 않았던 동북아에서 왕진붕의 성취는 더 이상의 진전이 없이 그냥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실지 원대 직업 화원들의 그림이 제대로 보존이 안 되고 남은 것이 별로 없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왕진붕과 그의 직전제자 주보(朱珤; 1292–1365) 정도 외에 '용주도' 수준의 계화를 구사한 화가들이 있었다는 증거 자체가 없다.

   해서 이 '한궁춘효'는 16세기 중반 것이라 '석가탄생도/출가도'보다도 한 세대 이상 뒤이긴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명청대 계화는 연대를 불문하고 원대 수준에 미치 못한다- 묘사가 정교할 때에도 '건축적'이라기보다는 '만화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전기 회화 자체가 희소해서 단정짓긴 어려우나, 이 '석가탄생도/출가도' 외에 이 정도 수준의 계화를 보기 어렵기 때문에 아마도 16세기초 이후는 조선에서도 점차 중국의 경향을 따라갔던 것으로 보인다.

 

IV.3 조선으로의 전달 경로

   일단 왕진붕의 영향이 한반도에 미치기 시작한 기원은 상당히 분명하다- 왕진붕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원 인종이 친형제보다 더 가깝게 여겼던 사람이 바로 고려의 충선왕이기 때문이다. 충선왕의 그림 취향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대 대수장가로 유명했던 인종의 누이 노국대장공주 셍게라기(祥哥剌吉= Sengge Ragi)가 개최한 미술품 감상 모임에 등장한 몇 안 되는 '현대미술 작품'이 거의 모두 왕진붕의 것이었다는 점은 시사적이다.[각주:4] 아마도 충선왕 역시 왕진붕의 대작 한 점 정도는 받아놓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게 아니라도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화가'의 명성이 대도에 줄을 대고 있던 고려의 세도가들의 귀에 흘러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향을 실증할 수 있는 고려회화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해외 학계에서 고려불화, 특히 일본 대고사(大高寺) 소장 '관경십육관변상도'에서 원대 계화와의 유사성을 찾은 경우가 있는데 우리가 보기엔 왕진붕과는 무관하다.[각주:5] 왜냐면 대고사 '관경십육관변상도'가 13세기 것이라는 설도 유력하지만- 그것을 따질 필요도 없이- 확실한 기년작인 이성(李晟)의 '미륵하생경변상도'(1294)에 최소 동일한 수준/수법의 공포 묘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성의 그림에는 계화가 크게 두 부분이 있다. 먼저 그림 상단 배경의 큼지막한 누각은 중심부가 용화수에 가려져 있지만 양 끝쪽으로 송대 필법을 연상시키면서도 원대 스타일로 균질하게 가지런히 정돈된 공포 부분을 볼 수 있고, 다음은 그림 하단 성문의 문루로 대고사 '관경십육관변상도'와 유사한 수법은 이쪽이다.

   이게 필히 사진을 보여드리고 설명을 해야 하는 그림인데,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갖고 있는 게 없다.[각주:6] 일본 사회 특유의 폐쇄성 때문에 일본 소장품들은 온라인에서 쓸 만한 고해상도 이미지 파일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운데, 전시장을 방문한들 웬만한 기획전은 전부 '휴대폰 촬영금지'라서- 그나마 가장 개명한 편인 국립박물관들이 상설전에 촬영을 허용하는 정도이다- 일반인들은 직접 찍을 수도 없다. 여담이지만 우리가 작년 가을에 이 그림을 보러 경도국립박물관에 갔다가 빅센(Vixen) 4배율 단안경을 끼워파는 '세트 입장권' 선전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휴대폰 카메라가 워낙 성능이 좋아져서 사진 촬영만 허용해 주면 바로 현장에서 찍어서 확대를 해서 볼 수 있으니 4배 단안경 따위, 시야가 좁아서 보기만 불편하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세상이다. 그 어두운 전시실에서 휴대폰으로 사진 좀 찍는다고 그림이 아작(?)이 나는 것도 아니어서, 우리가 아는 한 지금 일본 말고 이런 미개한 방침을 고수하는 나라가 별로 없다. 한국은 뭐든지 너무 빨리 변해서 탈이고, 일본은 너무 안 변해서 탈이라 서로 반반씩 섞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아무튼 왕진붕이 소시적에 얼마나 유명한 '천재 소년'이었는지는 몰라도 이성이 1294년에 왕진붕의 그림을 보고 그렸을 확률은 거의 희박하다. 그보다 이성을 비롯한 고려불화의 계화 기법이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왕진붕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 곧, 계화의 발전이 북송 이후에 완전히 정체된 것이 아니라 13세기에도 동북아시아 전체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직업 화원들에 의해- 계속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중국에도 이를 확실히 증거할 그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성의 '미륵하생경변상도'는 여러가지로 굉장히 귀한 자료다(참고로 이 그림과 닮은 지은원 소장 '미륵하생경변상도'는 겉보기엔 묘사력이 비등해 보이지만 구석구석 꼼꼼히 들여다보면 실력차가 있어 이성과 같은 레벨의 화가의 작품은 아니고, 특히 계화 필법에 수준 차가 많이 나는 것으로 봐선 여러 화목에 두루 능해야 하는 궁정화원이 아니라 불화만 전문으로 그리던 화승이나 사화원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상황이 똑 앞서 북송/금대 불전도의 영향을 논할 때와 비슷해 보이지만 이 경우는 문헌 증거를 통해서 최소한의 '연결고리'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원대의 '누각산수' 장르의 그림들이다. 실제 중국회화사에서 왕진붕의 주요 후계자로 꼽히는 이용근(李容瑾)이나 하영(夏永)의 작품들이 전부 여기에 속하고, 아래는 그 중에서 하영 전칭의 '등왕각도(滕王閣圖)'이다:

 

원본 이미지 출처= 소장처= 프리어미술관(Freer Gallery of Art, Washington)

   보시다시피 '누각산수'가 별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누각+산수', 곧 상기 '용주도'에 나오는 것 같은 왕진붕 스타일의 대형 건물군에 (용선이나 인물군 대신) 배경 산수의 비중을 키워서 결합시킨 것이다. 15세기 조선에서 인기가 있었던 누각산수화는 아마도 하영보다는 구도나 산수 부분 필법이 이곽파 스타일로 된 그림일 가능성이 더 높겠지만 우리가 굳이 이 그림을 예시로 선택한 이유는, 첫째로는 계화에 무슨 '이곽파 계화', '동거파 계화'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서 지금 우리의 논점과 무관하고, 둘째로는 '등왕각도'가 당시 문헌에 누차 언급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신숙주가 정리한 안평대군의 소장품 목록인 '화기'를 보면 이 장르의 대가로 '필세가 정미한' 이필(李弼)의- 이 사람은 중국에도 남은 그림이나 기록이 전혀 없어서 정체가 오리무중이지만, 대도에서 한때 잘 나갔던 직업화원일 가능성이 높다- '등왕각도(滕王閣圖)'/'화청궁도(華淸宮圖)'가 있고, 안견이 안평대군을 위해 그린 그림 중에도 '등왕각(滕王閣)'과 '황학루(黃鶴樓)'가 나온다. 뿐만 아니라 성종이 '등왕각도'와 '황학루도'를 꺼내다 직접 제시를 쓰고, 승지들한테 '뽑기'를 시켜서 그림을 나눠준 기록도 있어 15세기 후반까지 내내 이 장르의 그림이 '스테디셀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묘하게 이름이 겹치기 때문에 이게 안평대군이 소장했던 안견의 그림과 동일한 것들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한데, 여말선초에 계속 그려지던 제재들이라서 단정짓긴 어렵다).[각주:7]

   이제 위 '등왕각도' 역시 공포 부분을 한번 확대해서 살펴볼 것인데, 보면 상당히 흥미롭다:

 

   혹 이건 선이 너무 무질서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분이 계신다면, 옳게 바로 보신 것이다. 무론 자세히 살펴보면 나름 일정한 원칙을 갖고 그은 선들이지만, '표현 효과'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마치 남대문 앞을 지나다가 문루를 무심히 흘깃 올려다 보고 지나갈 때 받는 것과 같은, '뭔가 목재가 왕창 들어가 있다'는 느낌밖에 주는 게 없다. 그런데 원대 누각산수화들의 공포 묘사 수준이 전부 이렇게 허술하게 복잡하지 않으면 단순화/도식화가 되어 있지, '용주도' 계열 그림들의 수준에 근접한 경우가 거의 없다.

   여기서 15세기말~16세기초의 조선화원이 어떻게 '석가탄생도/출가도' 수준의 계화를 그리게 되었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즉, 왕진붕파 계화의 필법을 그의 영향을 받은 원대 누각산수화를 보고 익힌 다음, 공포의 구체적인 모양이라든지 용마루의 치미, 추녀의 잡상 같은 디테일은, 말하자면 '실사구시'를 해서 당시 조선의 건축양식을 참고해서 채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밀도의 개선'이 15세기 말에 이뤄진 배경은 무엇일까? 한 가지 가능한 가설은 이것이 성종~연산군대 운영되었던 '내화청'의 유산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전편에서 언급했던 대로 내화청의 기원은 성종대 화원들을 창덕궁 구현전에 상주시키면서 살아있는 새나 초목을 사생하게 한 것이다- 여기서 '사생'의 대상을 주변 건축물로 확장하면 자연스럽게 계화의 표현력도 향상된다. 이용근이나 하영 같은 원대 누각산수의 공포 표현에 사실감이 다소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실력있는 화가라면 누구나 포착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선 대가들의 관행에 도전하기 위해선, 최소한 '새로운 창작 환경' 정도의 자극은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아마도 내화청의 화원들도 그림을 끔찍이 좋아하는 임금들 덕분에 궐내에 근무하면서 '특식'을 받아먹었으면, 그에 상응하는 밥값(?)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지 않았을까? 또한 보다 치밀한 사생으로 공포의 사실감을 개선하면 그림의 장식성이 강화된다는 것과, 이것이 '석가탄생도/출가도'에서 볼 수 있는 남달리 화려한 색감과 궤를 같이한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조선이 명나라보다 최소 반세기~한 세기 더 늦게까지 계화에 천착했던 배경을 추측해보자면, 아마도 근대 학문으로서 미술사가 도입되기 이전에 계화의 대명사는 곽충서였다는 데서, 곧 곽희의 산수화, 이공린의 백묘인물화와 함께 북송 회화가 남긴 전범으로 묶을 수 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 이미지는 곽충서 전칭의 '설제강행도(雪霽江行圖)'로 진적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원대 것이 아닌 북송~금대 작품으로는 신빙성이 있다:

 

이미지 출처= 소장처= 대만 고궁박물원

   이 대만 고궁 소장품은 사실 오른쪽 절반 정도가 잘려나간 것으로, 그림이 잘리기 전에 모사한 버전이 미국 넬슨-앳킨스 미술관(Nelson-Atkins Museum of Art)에 소장되어 있다(이쪽은 다운로드는 안 되지만 시카고대 동아시아미술센터에서 운영하는 'East Asian Scroll Paintings'  웹사이트(https://scrolls.uchicago.edu)에서 상당히 질 좋은 이미지 파일을 볼 수 있다.). 해서 이 그림도 왕진붕의 '용주도'처럼 모본이 많이 돌아다녔던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안평대군도 같은 제목의 그림을 하나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 신숙주의 ‘화기’에서 확인이 된다. 계화가 산수나 인물처럼 위상이 높은 장르는 아니지만 조선에서도 곽충서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소략하지만 연구자료도 갖고 있었다는 증거이다(참고로 현재 통용되는 '화기' 번역본에서 안평대군의 소장품 중에 또 하나의 곽충서 작품으로 '휘종의 어필이 붙은' '고각임강도(高閣臨江圖)'가 있다고 한 것은 오역임을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보다시피 아무 내용이 없는 '설제강행도 곽충서진적(雪霽江行圖 郭忠恕真跡)' 10글자만 휘종의 수금체(瘦金體)를 흉내내어 적었기 때문에 신숙주가 '설제강행도'를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그림 위에 휘종의 어필이 있다(上有宋徽宗御筆)'고 덧붙인 것이지, 이게 바로 뒤에 나오는 '고각임강도'에 붙는 수식어구가 아닌 것이다.).

   위 '설제강행도'를 유심히 살펴 보면 건축화가 아니라서 제재는 다르지만, 실제 관찰에 바탕을 둔 정교한 선박 장구의 묘사가 뛰어나서 정밀도가 상당히 높은 그림이다. 안평대군의 소장품이 수준이 어느 정도나 되었을지는 미지수이나 아마도 원대 모작들 중 선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견이 원대 이곽파를 연구해서 ‘오리지널’ 곽희의 재현을 추구했듯이, 곽충서의 전칭작이나 원대 화가들의 누각산수 진적을 통한 계화의 연구 역시 북송 회화에 접근하려는 시도였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영락제/선덕제 시기의 북경에서도 조맹부 스타일의 복고를 다시금 지향하긴 했으되 이민족을 몰아내고 다시 세운 한족 왕조로서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이 강했다면, 세종조의 문예부흥은 '문예 사조로서의 복고주의'를 더 철저하고 집요하게 추구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영향력이 점차 감소했을지언정 조선 전기 내내 전범으로서의 위상은 잃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우리의 사견이다.

 

***

 

- 대만 고궁박물원 2층의 208 전시실은 국보 서화 한 점을 집중 조명하는 방인데, 마침 지금 상기 '용주도'가 주인공이다. 회화실(210/212 전시실)에서 '獨騷-楚辭文化意象與龍舟'라는 제목으로 테마전을 열고 있기 때문에 보조를 맞춘 것이고, 212엔 '보진경도도'도 출품이 되어 있어, '용지경도도'까지 같이 안 나온 것은 조금 아쉽지만 두 작품을 비교해볼 수 있다. 여기가 컬렉션이 워낙 방대해서, 모르긴 해도 1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이니 관심 있는 분들은 한번 가보시기 바란다. 이 두 전시는 6.21(일)에 끝난다.

- 그리고 서예 쪽에선 7.5(일)까지 '真假乾隆-清高宗的御筆與代筆'이라는 제목으로 건륭제의 진적과 대필, 그리고 대필자들이 자기 이름으로 쓴 글씨를 나란히 보여주는 전시를 한다. 고궁 서예실은 사실 이런 테마전보다는 그냥 상설 교체 전시가- 한국 관광객들 중에 나름 식자들이 설마 이런 게 상설전에 나올 리가 있나 싶어 간혹 '복제품'으로 오인하는, 당/송/원 대가들의 희귀한 묵적이 뭐든 최소 하나 이상 나온다- 훨씬 더 볼 만하긴 하지만, 그림이든 글씨든 기초적인 진위식별도 제대로 안 하는 한국에선 보기 힘든 유형의 전시이니 방문하실 분은 그냥 지나치지 말고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번 봐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오랫동안 건륭제의 '대표작' 행세를 해온 작품도 실은 대필이었음을 알 수 있으니 전시설명을 보지 말고 한번 맞춰 보시기 바란다).

 

   다음 편에선 누락된 부분들을 좀 보충한 다음, 간단히 요약/정리를 하고 마치려고 한다….

 

To be concluded...

 

  1. '어제불부'/'어제전원가' 판화의 전체적인 내용에 관하여는, 김자현, '日本 南禪寺 소장  御製秘藏詮 의 「御製佛賦·御製詮源歌」 판화 연구', "미술사학" 25(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1), pp. 35~68과, 이영종, op. cit., pp. 181~191 참조. [본문으로]
  2. "中國寺觀壁畫全集 vol. 1. 早期寺院壁畫"(廣東教育出版社, 2011), pp. 216~274, 문수전 서벽 전도는 pp. 242~243 도판 참조. [본문으로]
  3. https://www.metmuseum.org/met-publications/beyond-representation-chinese-painting-and-calligraphy-eighth-fourteenth-century [본문으로]
  4. "公主的雅集—蒙元皇室與書畫鑑藏文化"(臺北 : 國立故宮博物院, 2016), p.259, 또 이 아집의 감상품 목록은 pp. 227~228 참조. [본문으로]
  5. 陳韻如, '再探《唐僧取經圖冊》:元代的視覺敘事與新解', "國立臺灣大學美術史研究集刊" 58(國立臺灣大學藝術史研究所, 2025), pp. 229~230 참조. [본문으로]
  6. 이성의 미륵하생경변상도 중 상단의 누각부분은 "宋元仏画─蒼海を越えたほとけたち"(京都 : 京都国立博物館, 2025), p. 152의 도판, 하단의 문루 부분은 "高麗仏画 : 香りたつ装飾美"(京都 : 泉屋博古館, 2016), p. 21의 도판을 '확대기'를 동원해야 보인다. 대고사 '관경십육관변상도'는 원래 계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고려불화대전”(국립중앙박물관, 2010), pp. 41~45의 도판을 참조하면 충분하다. [본문으로]
  7. 성종실록 권100, 성종 10년(1479) 1월 10일 정묘 3번째 기사 [본문으로]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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