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녹음들

; 참고 음반 2개를 제외하면 총 5명의 피아니스트들의 9~10개 녹음. '함머클라비어' 때는 리히터(Sviatoslav Richter)와 피셔(Annie Fischer)까지 총 7명이었는데, 이 음악은 한 수준이 더 올라가다 보니- 테크닉적으로 더 어려운 곡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지만- 음악적으로는 최고 난이도라서 추가로 두 명이 더 탈락했다.

 

1. Glenn Gould- 1956

   1악장 첫 음표부터 루바토가 들어가는 게 놀랍다면 놀라운 점이고, 굴드가 이 음악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2악장은 베토벤의 ‘최대한 빠르게(Prestissimo)’ 지시에 가장 충실한 연주- 이 스피드로 노래하기는 거의 어렵지만, 대신 음표가 살아서 튀어오르면서 리듬감과 음악의 기세가 좋아진다. 여튼 1/2악장은 음악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가장 파격적인 것은 역시 3악장. 일단 도돌이표에 의한 단순 반복은 모두 생략이다. 또 1악장 첫머리처럼, 주제도 그렇지만 특히 제1변주에는 굴드가 혹 쇼팽 녹턴을 연주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은 풍부한 루바토가 들어간다- 곧, 우리가 앞서 곡목해설에서 언급한 코르토와 같이, '쇼팽이 음악사에 들어오는 순간'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물론 굴드 본인에게 물었다면 아마도 전혀 다른, 생뚱맞게 들리는 이유를 댔을 가능성이 많다.). 제4변주는 너무 간살맞아서 못 참겠다는 듯이 '주제보다 조금 느리게'라는 베토벤의 지시는 완전히 무시하고 최대한 달린다. 4성의 빠르게 이어지는 울림은 참 좋은데- 그래서 이것 하나만으로는 충분히 말이 되지만- 악장 전체의 밸런스가 무너지게 되고, 무엇보다 이게 베토벤의 의도에 부합하는지 우리는 의문이다. 다만 마지막에 반복되는 주제를 처음과 확실히 차별화하고 싶다면 이것이 가장 잘된 녹음- 첫머리와 완전히 다른 분위기면서 '칸타빌레'는 잘 살린 연주다.

   굴드가 우리 나이로 25세일 때의  녹음이고, 나중에 다시 녹음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몹시 아쉽지만- 아마 했다면1955/81년의 2가지 버전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처럼 완전히 새로운 해석을 들려주었을 것이다-  이런 패기와 독창성은 요즘 젊은 피아니스트들한테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2. Wilhelm Backhaus- 1950

   1/2악장은 박하우스답게 날렵한 흐름과 기세를 잘 살리는 연주. 하지만 3악장은 주제부터 악보의 스포르찬도나 크레센도를 거의 무시하듯이 강약이나 볼륨대비를 확 줄여서 아주 결이 고운, 꽃향기 넘치는 연애편지 같은 음악을 만든다. 이게 주제의 첫머리에 'mezza voce(절반 정도 음량으로)' 지시어가 있기 때문에 전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간지러운 것을 싫어하는 박하우스로서는 꽤 이례적인 해석인데, 역시 우리가 앞서 언급했던 32번 2악장과의 '차별화' 문제가 있다- 녹음을 들어보면 박하우스는 32번의 아리에타를 아주 역동적인 음악으로 보기 때문에, 그에 비해 이 3악장은 한없이 다정한 음악이 된 것.

   이 3악장을 이런 관점으로 접근하면 제4변주가 무척 아름다워진다. 대신 제6변주에서 드라마가 좀 약한데, 그것은 당연히 박하우스가 클라이맥스를 만들 줄 모르는 게 아니라, '이 음악은 여기서 폭발하지 않는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의 견해는 이 3악장이 제4변주와 제 6변주에서 말하자면 'double-climax'를 갖고 있다는 것이지만, 옳든 그르든, 갑자기 제6변주에 와서 폭발한다거나 하는 그런 식으로 해석의 통일성을 깨지 않는 것이 대가다운 품이 높은 연주다.

 

3. Wilhelm Backhaus- 1961

   1악장 발전부의 클라이맥스는 외려 격하기만 한 상기 모노 버전보다 더 통제가 잘 되어서, 과도하거나 어긋남이 없이 듣는 사람을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게 만들 정도- 1악장만으로는 여기 소개된 음반 중에서도 거의 최고다. 3악장도 이쪽이 모노 버전보다 '달달한 칸타빌레'를 조금 줄여서 전체적으로 음악이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맛이 있다. 테크닉적으로는 아무래도 11년전이 조금 낫지만- 음표 하나하나가 더 고르고 정확하게 소리가 난다- 대신 음질은 이쪽이 스테레오라서 해석 외적인 면에서는 서로 일장일단이 있으되, 하나만 고르라면 역시 이쪽이 대표반.

 

4. Wilhelm Kempff- 1936

   켐프의 스테레오 베토벤 전집은 거의 늘 구할 수 있는 품목이고 1950년대 모노 전집도 잊을 만하면 한번씩 나왔지만, 이 2차대전 이전의 78 rpm 녹음은 그간 구하기 어려웠다. 2016~7년에 APR 레이블로 복각이 된 것은 한국에 수입이 안 된 것 같은데, 이 복각을 라이센스 한 것이- 이전에 나왔던 박스들을 거의 그대로 재탕해서 성의없이 합쳐 놓아서 욕먹고 있는- DG의 80장 짜리 새 켐프 에디션에 포함되어서 나왔다.

   테크닉적인 면에서 이것이 켐프의 세 녹음 중 가장 깨끗하게 연주된 음반. 모노 전집에 포함되어 있는 1951년 녹음이 음질은 좀 낫지만 어차피 같은 모노면서 해석적으로도 아래 스테레오만큼 차별화가 안 되어 있어, 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쪽을 더 추천한다.

(참고로 이 녹음도 굴드의 경우처럼 3악장 반복은 전부 생략했지만, LP 이전 시대는 레코드판 한 면에 껏해야 3~5분 들어가던 시절이라, 연주자의 음악적 판단과 무관하게 여러가지 컷이 많다. 이후의 켐프 녹음들에선 이 생략이 없다.)

 

5. Wilhelm Kempff- 1964

   가장 주목해야 할, 우리 나이로 딱 칠순이 된 켐프가 '득음'을 한 부분은 역시 3악장(주제)이다. 이전 녹음들은 박하우스만큼은 아니라도 주제 앞에 붙은 'mezza voce'에 어느 정도 신경을 썼었지만, 이제는 전혀 얽매이지 않고 액센트를 줄 때 확실하게 주고 크레센도를 충분히 살리면서 노래하는데, 들어보면 이 음악은 이렇게 해야 '숨을 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실 우리가 추측하기엔 이 'mezza voce'가, 청력을 상실한 베토벤이 비현실적인 볼륨감을 갖고 지시했을 가능성이 꽤 있다- 즉, 음량을 반으로 줄여도 음악이 충분히 숨을 쉴 만큼 강약(조절)이 청중들에게 전달될 수 있으리라고 오판했을 수 있다는 것. 사실- 특히 후기 베토벤의- 극단적인 템포나 거친 울림(sonority)나, 마음에 안 들면 다 베토벤의 '청력'에 책임을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가 보기엔 만약 청력 땜에 베토벤이 지장을 받은 게 있었다면, 이런 것들보다는 당연히 '음량'이다.

   이어지는 변주들은- 특히 제1/2 변주에서- 켐프 특유의 자연스러운 노래가 돋보인다. 다만 굴드처럼 '간살맞아서 못 참겠다'는 듯 빠르게 지나가는 제4변주는 역시 아주 효과적이진 않은데, 다만 켐프처럼 주제를 시작하면 이 편이 더 해석의 일관성이 있다는 점은 지적해주어야 한다.

   사실 켐프 베토벤이 물론 초일류이긴 한데, 악보를 보고 정밀하게 비교해서 들으면 제르킨이나 박하우스에 비해서 미세하게 밀리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이 30번은 켐프의 득의작이고, 켐프 예술을 대표하는 녹음이라고 해도 좋다.

 

6. Rudolf Serkin- 1952

   1악장은 한마디로 '맑다'- '전원'에 비유한다면 물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청정 고원의 느낌. 그리고 제2주제는 확실한 아다지오로 템포를 늦춰서, 제1주제와 제2주제간의 대비를 강조하는 관점을 대표하는 연주- 들어보면 이것도 완벽하게 말이 된다. 또, 1/3악장은 여기 소개된 녹음들 중에서 가장 느리고, 2악장은 거의 굴드 다음으로 빨라서 악장 간에도 분위기의 대비가 확실하다.

   3악장은 일단 제르킨은 주제를 경건한 음악으로 본다. 앞서 작품개요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주제가 전원교향곡 5악장 '목동의 노래(Hirtengesang)'의 주제처럼 코랄(chorale)적인 성격도 갖고 있어 이것 자체로는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다. 다만 문제는 이 음악의 성격을 이렇게 잡으면 중요한 제4변주가 상대적으로 고지식하고 재미가 없어진다는 것- 여러 대가들의 녹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 3악장은 해석의 일관성 혹은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주제와 변주 6개를 다 만족스럽게, 재미있게 연주하기가 힘든, 참 까다로운 음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7. Rudolf Serkin- 1976

   해석의 큰 틀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쪽이 노래가 더 낫다. 1악장은 제1주제와 제2주제 사이의 극단적인 대비를 조금 줄인 것이 들리고, 2악장도 프레스티시모(Prestissimo)는 포기하고 템포를 살짝 늦춰서 칸타빌레에 더 신경썼다. 3악장도 제2/4/6 변주는 확실히 이쪽이 노래가 더 좋다.

   이 음반은 사실 제르킨이 살아있을 때 출반에 동의한 녹음은 아니고, 사후에 컬럼비아의 프로듀서(Thomas Frost)가 편집해서 역시 피아니스트인 아들 피터 제르킨의 동의를 받은 것인데, 들어보면 제르킨 본인의 마음에 100% 흡족하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객관적으로 우리가 '제르킨' 이름 석 자에 기대하는 수준에는 모자람이 없다.

 

8. Rudolf Serkin- 1987 live

   제르킨 80대(정확히는 우리 나이로 85살)의 라이브. 이 녹음도 역시 가장 큰 변화는 3악장이다. 남달리 느리게 연주하던 주제의 템포가 드디어 안단테 부근까지 왔고, 이렇게 템포를 당기면서 음악은 이제 ‘경건’도 버린, 어깨에 완전히 힘을 뺀 '평담'의 경지. 그리고 라이브이기 때문에 흐름을 잘 타면서 흥이 오른 제2변주와 제5변주는 이전 녹음들보다 노래가 더 잘됐다. 제르킨의 이 곡의 대표반은 굳이 꼽자면 위 1976년 녹음이 되겠지만, 이것도 충분히 들어볼 가치가 있는 음반.

 

9. Artur Schnabel- 1932

   1악장은 이 음악이 갖고 있는 ‘환상곡풍’을 가장 잘 드러내는 연주- 이것도 '물'에 비유한다면, 아마도 '은하수'일 것이다. 2악장에서는 슈나벨이 베토벤의 가장 빠른 악장들에 대처할 때 나타나는, 미끄러지듯 달리는 독특한 리듬감각을 들을 수 있다. 취향에 따라서는 '방정맞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기운생동'이라는 관점에서, 음표가 살아서 튀어오른다는 점에서 장점이라고 본다.

   3악장 주제는 역시 경건하게 들어오지만, 제르킨보다는 촉촉하다. 제2변주는 제1변주의 녹턴적인 분위기를 잘 이어가는 터치- 사실 제1변주를 마친 다음엔 '움직임(의 개시)'만 생각하기 쉽고, 위에 소개된 녹음들도 대부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기에, 이 변주곡이 양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우쳐준 연주다. 반면 제6변주는 중간에 템포를 당겨서 더 역동적인 클라이맥스를 만들려고 시도하는데 그렇게 효과적으로 들리지 않아서, 여기는 차분하게 긴장을 쌓아올려가야 하는 음악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말하자면 '반면교사'. 전반적으로 슈나벨의 베토벤은 푸르트벵글러처럼 한 악장 안에서도 교묘한 템포 변화를 많이 주는 편인데, 이 제6변주는 완벽하게 잘 되지는 못한 경우. 다만 슈나벨의 트릴은 특별하다- ‘음악적인 트릴’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성부를 바꿔가면서 한없이 트릴이 이어지는 이 변주곡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녹음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슈나벨이 고작(?) 쉰하나일 때 녹음이고,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경우 이 곡은 일흔, 여든이 넘어도 계속 깨달음이 있는 음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역시 두번째 녹음이 없다는 점에 아쉬움이 전혀 없지는 않다.

 

 

(※ 참고 녹음)

 

10. Alfred Cortot The Master Classes

   1954~60년간 코르토가- 본인이 세운- 에콜 노르말(École Normale de Musique de Paris)에서 진행한 마스터 클래스의 녹음. 대략 30시간 정도의 원본을 진지한 음악애호가도 들을 만하도록, 음악이 많이 이어지는 부분을 골라서  1/10 분량으로 편집한 것이다. 책임 프로듀서는 다름 아닌 머레이 페라이어(Murray Perahia)- 페라이어가 코르토 아들한테 이 테이프의 존재를 듣고, 소개를 받아서 내용을 확인한 다음 소니(Sony)에 제안한 프로젝트다. CD 내지에 말하자면 코르토의 '녹취록(transcript)'과 그 영어 대역이 같이 있어,  음악을 알고 있다면 불어를 못하는 사람도 대의는 파악할 수 있다.

   디스크 석 장 중 처음 절반 정도를 코르토가 녹음을 거의 남기지 않은 바하/모차르트/베토벤에 할애했는데- 나머지는 쇼팽과 슈만이다- 그 중에 이 곡도 들어있다. 코르토는 E major(미-솔#-시), E minor(미-솔-시), 그리고 (한 옥타브 낮은) E major, 이렇게 3개의 화음이 소나타 전체의 구조를 이루는 핵심이라고 파악한다. 이런 관점에서 1악장의 제2주제도 단지 리듬, 박자 등등이 변형이 되어서 나타나는 연속적인 흐름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1악장의 두 주제 사이에 지나친 '대조'가 불필요하다고 보는 견해의 근거.

   평가할 수 없는 단편들에 불과하지만, 코르토가 베토벤에 있어서도 최고 수준의 음악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따라서 만약 전곡을 녹음했더라면 우리의 이 리스트에 틀림없이 포함되었으리라는 것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피아니스트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11. Mieczyslaw Horszowski- 1977 live

   가장 특징적인- 그리고 우리에게 충격을 준- 것은 2악장이고,  '프레스티시모'는 완전히 버리고  칸타빌레를 극대화한, 굴드와 정확하게 대척점에 있는 버전. 이 음악에서 이렇게 끊임없이 노래가 흘러나올 줄은 우리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이것은 폭풍우라기보다는 처절한 ‘인간적인 비극(human tragedy)’이고, 혹 이게 '폭풍우'라면, 이토록 우아하고 아름다운 폭풍우는 비교할 것이 아마도- 장르는 다르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 말년의 소위 '대홍수 소묘(deluge drawings)'들 밖에 없을 것이다.

   3악장 제1변주는 쇼팽에도 일가견이 있는 호르쇼프스키식 루바토를 들어볼 수 있다. 이게 재미있는 게, 처음 듣기엔 베토벤으로는 좀 과하지 않나 싶은데 이걸 듣고 나서 루바토가 없는 연주를 틀어 보면 또 딱딱하게 느껴진다- 정말로 '베토벤도 쇼팽도 아닌', 경계에 걸친 음악. 그리고 호르쇼프스키는 '폴리포니(polyphony) 감각'을 타고난 선택받은 소수에 속한다- 제3/5변주에서 양손이, 혹은 각 성부가 늘 동시에 노래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마지막 제6변주는 라이브의 열기와 흥이 더해져서, 클라이맥스가 (가속 없이) 잘 만들어진 연주- 음악은 테크닉이 다가 아니라는 걸, 때로는 미스터치가 문제가 안된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사례 중 하나이다.

   음질에 문제가 있는 라이브이고, 본인이 출반에 동의하지 않은- 그리고 동의했을지 의문인- 음반이라서 ‘참고 녹음'이 되었지만, 음악적으로 굉장히 터득이 깊은 연주.

(호르쇼프스키가 1950년대 Vox 레이블로 베토벤 소나타 29/30/32번의 스튜디오 녹음이 있긴 한데, 우리가 음반을 안 갖고 있다. 물론 애플뮤직 같은 음원 사이트에는 올라와 있지만, 클래식은 '스트리밍' 듣고는 정밀한 평가는 못한다. 검색을 해보니 Vox는 2018년에 Naxos에서 인수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옛날 음원들이 재발매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선호도: Schnabel>=Serkin1976=Kempff1964=Serkin1987>=Backhaus1961>=Backhaus1950=Serkin1952>=Kempff1936>Kempff1951>=Gould

해석의 삼각형: Gould/Backhaus/Serkin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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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작품개요(~계속)

- 2악장; 역시 간결한 소나타 형식. 보통 해설서에서는- 마단조(e minor)로 출발해서 짧은 경과구를 거쳐- 마디 안에서 도에 #이 하나 더 붙어서 나단조(b minor)로 전조되는 부분을 제2주제로 잡는데, 그렇게 봐도 무방은 한데 워낙 단일주제(mono-thematic)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음악의 내용상은 전형적인 베토벤식 스케르초에 가깝다. 독특한 발전부가 볼륨을 낮추고 쉼표를 적절히 사용해서, 마치 스케르초의 트리오와 같은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 교묘한 점.

   이 악장은 우리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주제와 재현을 '폭풍우'로, 그 사이의 발전부를 폭풍과 폭풍 사이에 잠시 오는 고요로 상정하는 것도 한가지 해석의 방법이다.

 

- 3악장; 변주곡 형식. 주제와 6개의 변주로 이루어져 있다. 주제가 각각 반복이 되는 두 도막으로- 즉, 'aa-bb'의 꼴로- 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 이어지는 변주들도 기본적으로는 a를 한번 변주하고 반복하고, b를 한번 변주하고 다시 반복하는 식으로 이 형태를 따르게 되어 있는데, 물론 기계적으로 하진 않는다.

   일단 이 곡에서는 이 3악장에만- 'Andante molto cantabile ed espressivo'라는 통상적인 이태리어 지시 외에- 'Gesangvoll mit innigster Empfindung(가장 깊은 감정으로 최대한 노래해서)'이라고 베토벤이 독일어로 쓴 지시어가 붙어 있어, 요즘 판본들은 이쪽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다. 한데 위 번역에서 보다시피 'gesangvoll'은 full-of-song, 곧 'molto cantabile'고, 'mit innigster Empfindung≒molto espressivo'여서, 사실 그 말이 그 말이다. 이 경우는 빠르기 지시 'andante'가 포함된 쪽이 외려 정보가치가 더 있다고 볼 것이다(참고로 제4변주의 빠르기 지시의 경우도 이태리어나 독어나 그 뜻이 그 뜻이지만, 아래 보다시피 이것은 독어쪽이 훨씬 더 간결하다.).

 

   주제는 사라반드(sarabande)풍. 사라반드는 3박자계면서 (첫박이 아니라) 두번째 박에 강세가 오는 것이 특징인 춤곡이다. 다름 아닌 바하 골드베르그(Goldberg) 변주곡의 주제에 해당하는 아리아(aria)가 사라반드풍이어서, 안드라스 쉬프(András Schiff)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베토벤이 아마도 골드베르그 변주곡의 존재를 알고 있지 않았겠느냐, 그렇다면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주장한다.[각주:1] 우리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멜로디 자체는 '전원교향곡'의 마지막 5악장의 주제 '목동의 노래(Hirtengesang)'과 가장 정서가 유사하기 때문에, 이 주제의 음악적 성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Hirtengesang의 sarabande화'라 할 수 있겠다.

 

VAR. I. Molt’ espressivo(아주 감정이 풍부하게).

; 이 첫번째 변주곡을 명 피아니스트 코르토(Alfred Cortot)는-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로- ‘쇼팽이 음악사에 들어오는 순간’이라고, 쉬프는 ‘오페라 아리아와 같다’고 표현한다. 음악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둘 다 일리가 있는 비유이니, 한번 음미해보기 바란다.

 

VAR. II. Leggieramente(아주 가볍게).

; '은쟁반 위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톤이 필요한 음악. 녹턴스러운 제1변주의 분위기를 이어가면서 동시에 음악에 베토벤 특유의 '움직임'이 생겨서 다음 제3변주로 이어지는 좋은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문제는 이 2가지 분위기를 동시에 표현하는 게 꽤나 어렵다는 것. 그리고 2개의 변주가 하나로 합쳐져 있기 때문에 악보를 보지 않으면 이 3악장이 '여섯 개의 변주'인지 '일곱 개의 변주'인지 헷갈리게 하는 주범. 베토벤의 초고들을 연구한 음악학자들에 따르면 베토벤은 늘 작곡된 변주곡 '후보'들 가운데서 잘된 것만 골라내고, 또 그중 일부는 합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VAR. III. Allegro vivace.

; 음악이 움직임에 가속이 붙는다. 형식적으로는 바하의 2성 인벤션(invention)과 유사한, 가장 단순한 형태의 대위법적 음악. 그리고 앞선 두 번째와 이 세 번째 변주곡은 '종지' 느낌이, 즉, 제대로 한 가락을 마무리짓는 느낌이 없이 바로 다음 변주로 넘어간다. 또,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변주곡의 연결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즉, 이 6개의 변주곡들은 1-(2/3/4)-(5/6), 이렇게 크게 세 덩어리로 나눌 수 있는 것.

 

VAR. IV. Un poco meno andante ciò è un poco più adagio come il tema(조금 덜 안단테로, 즉, 주제보다 좀 더 아다지오로). Etwas langsamer, als das thema(주제보다 조금 느리게).

; 하나의 멜로디를 서로 다른 성부에서 계속 모방해 나가긴 하지만, 굳이 '인벤션'이라거나 '푸가(토)'라고 부르긴 어려운 자유로운 양식(엄밀하게 말하면 대위법적(contrapuntal)이진 않은, 그냥 '다성음악(polyphony)'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이 두 단어가 때로는 서로 그냥 유의어처럼 쓰이기도 하기 때문에 'counterpoint' 하나로 퉁친다고 꼭 틀렸다고 할 수 있는지는 우리는 잘 모르겠다.).

   내용적으로는 첫번째 도막에선 다시 1악장의 물의 이미지로- 혹은 '시냇가 풍경(scene by the brook)'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고, 특히 두 번째 도막으로 넘어가면 '연애의 추억'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회상적이기도 하면서 매우 곰살궂은 음악. 이 악장은 여기서 한번 (감정적인) 클라이맥스를 이룬다고 봐도 좋다.

 

VAR. V. Allegro ma non troppo.

; 위풍당당한 기본 3성의 푸가토. 즉, 제3변주에 이어 다시 한 번 대위법적인 음악이다. 제4변주에서 한번 내용적으로 일단락되었다가 새 단락이 전개되는, '전환'에 해당하는 변주. 서둘지 않으면서 강력한 연주가 가장 좋지만, 'ma non troppo'는 혹 따르지 않더라도 너무 가벼우면, 힘이 실려 있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VAR. VI. Tempo primo del tema(처음 주제의 빠르기로).

; 음표가 점점 잘게 쪼개지면서 만들어내는 '점강법'- 강력하고 장대한 마무리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에선 다시 보다 선명하게 '전원(의 이미지)'로 돌아간다.

   우리보고 레슨을 하라면 큰 강가나 바닷가를 배경으로 하는 장엄한 석양을 떠올려보라고 할 것 같다. 태양이 수평선에 가까워질수록 하늘에도, 또 그것을 반사하는 물 위에도 햇빛이 이글거린다. 해가 물에 잠겨갈수록, 곧 날이 어두워질수록 그 일렁임은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마침내 완전히 해가 삼켜지고 나면 이제는 '별의 시간', 빛의 일렁임은 도로 하늘로 올라가서 'evening star' 금성을 필두로 속속 하늘을 채우는 쏟아지는 별빛들로 마무리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앞서 1악장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베토벤의 의도는 햇빛과 강물과 부서지는 별빛이, 이 장관이 내게 주는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지, 빛과 물소리 그 자체를 묘사하라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엔 주제가 다시 한번 반복되면서 마친다. 첫머리에서 제시될 때와 똑같이 노래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해서 표나게 달리 연주하는 선택도 일리가 있는데, 이 음악은 '수미상응'으로 살짝 미묘한 변화만 주어서 단정하게 처리하는 경우도 많다. 어떻게 할 것인가는 연주가 본인이 결정해야 할 몫.

 

   마치기 전에 이 3악장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해석의 주요 문제 중 하나는 바로 같은 변주곡 형식으로 된 32번(c minor, Op. 111) 2악장과의 대비이다. 우리가 전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최후의 3개 소나타'들은 처음 출판 제안이 오고가기 시작할 때부터 한 묶음으로 기획이 된 것이다- 즉, 3곡이 '한 세트'인데다 같은 종악장에 같은 형식인데, 과연 천하의 베토벤이 똑같은 걸 2번 했을까? 그렇담 반드시 ‘차별화’가 필요해 보이지 않는가?

   게다가 (적어도 20세기 초중반 이후로는) 이 3곡이 한 리사이틀 프로그램으로- 더해서 앵콜로 바가텔(Op. 126) 몇 곡 정도 해주면 금상첨화로, 좀 짧지만 아주 훌륭한 프로그램이 된다- 혹은 한 장의 CD로 종종 묶인다. 곧, 실연이건 음반이건 한자리에 앉아서 같이 듣게 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피아니스트들도 자연히 늘 차별화를 의식해서 연주할 수밖에 없는 것. 보통 32번 2악장 아리에타(Arietta)가 더 관조적인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피아니스트들은 이 30번 3악장은 액센트도 더 강하게 넣고 빠른 템포로 가고, 반면 아리에타 쪽이 더 역동적인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피아니스트들은 이 곡은 아주 조용하고 명상적으로- 내지는 심지어 다정하게-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견해는 이 문제를 '2개의 변주곡의 차별화'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역시 '주제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풀린다는 것이다. 이 3악장의 주제인,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 속으로 들어온 인간에게 산과 들판이, 숲과 시내가, 그리고 계절과 시각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들이 불러일으키는 주관적인 감정과 회상,  연상들과, 32번 아리에타의- 베토벤이 '에로이카'에선 미처 표현하지 않은- 영웅의 가장 깊은 내면적 고뇌와 갈등, 그리고 구원(의 추구)는 음악의 감정적 내용이 전연 다른 것이다.

   이렇게 표현되는 감정이, 주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안다면 형식상의 공통점은 보다 부차적인, 개의치 않아도 되는 부분이 된다. 반대로 이 음악들의 전체적인 내용이 뭐라는 걸 감을 잡지 못하고 두 변주곡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변주들에 매몰되어 있을 때는, 더욱 '차별화'를 의식하게 되지만 외려 그 목적에선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작품을 '베토벤의 후기 전원소나타'로 이해한다면 이 음악을 둘러싼 '미스테리'들도 상당한 부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긴다. 해서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관점이 베토벤의 의도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단지 우리가 피아니스트가 아니기 때문에 이 아이디어를 손수 입증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To be concluded...

 

  1. 쉬프는 2004~6년에 런던 위그모어홀(Wigmore Hall)에서 8회에 걸쳐서 베토벤 소나타 32곡 전곡의 '강의 리사이틀(lecture recital)'을 했다. 우리가 보기엔 음악학자나 평론가들이 쓴 해설보다 훨씬 내용이 좋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한번 들어보기를 권한다. 이게 위그모어홀 팟캐스트(podcast)에도 있고, 가디언(Guardian) 홈페이지에도 있는데 같은 음원이다. 구글에 ‘andras schiff beethoven lectures’ 정도 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이현욱
:

Beethoven piano sonata No. 30 in E major, Op. 109

 

 

I. Vivace ma non troppo.

II. Prestissimo.

III. Andante molto cantabile ed espressivo(Gesangvoll mit innigster Empfindung).

 

(코로나 때문에 2020년 공연계는 문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났다. 안타깝지 않은 사정이 없겠으나, 무엇보다 아쉬웠던 점은 작년이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었다는 것- 에머슨 현악사중주단의 베토벤 전곡 시리즈를 비롯해서 좋은 레퍼토리가 많았는데, 물론 거의 전부 취소되었다(에머슨은 올해 6.1~6일로 다시 예정은 되어 있지만, 성사를 장담하긴 어려워 보인다). 우리도 공연을 다니면서, 또 다니기 전에 음반을 좀 들으면서 후기 현악사중주 중 2~3곡, 그리고 가능하면 최후의 피아노 소나타 3곡까지 커버를 해볼 계획이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흐지부지되어버렸다.

   하여 이런저런 사정으로 해가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이 한 곡은 준비를 했다. 3곡 중 나머지 2곡(31/32번)은 사망 200주기가 든 2027년 한으로 미룬다.)

 

(i) 작품개요

; 1820년작. 해서 말하자면 작년이 탄생 200주년이었던 작품. 다만 베토벤이 베를린의 출판업자(Schlesinger)에게 초고를 넘긴 게 1821년 3월 이전이라는 것까지만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손을 좀 봤다고 하면 완성은 1821년 초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고- 우리가 아는 한은- 언제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실제 출판은 1821년 11월.

   상기 출판업자와 처음부터 3개의 소나타를 계약을 해서, 바로 뒤를 이어 31번(1821년)/32번(1822년)이 완성이 된다. 그래서 이들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로는 마지막 작품들이 되는데, 1820년대 베토벤이 '확장지향적인 혁신'을 추구한 것은 교향곡과 현악사중주이고, 피아노 소나타에서 이에 상응하는 마지막 대혁신은- 우리가 예전에 커버한- '함머클라비어(1817~18년)'이다. 이 최후의 3곡의 혁신이라면 외려 간결함과 압축의 '덜어내는' 미학.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이쪽이 더 '혁신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의 견해로는 이 3곡의 가치, 혹은 의의는 형식보다는 내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베토벤의 중기 내지 '본격 베토벤'으로의 돌입은 단연 교향곡 3번 '영웅(Eroica)'부터지만, 후기에 있어서는 이 3개의 피아노 소나타들이 합창교향곡(1824년)이나 후기 현악사중주(1825~26년)들과 함께 베토벤 예술의 정점을 이룬다.  즉, 음악의 내용적인 면에서 베토벤이 새로운- 그리고 결과적으로 최후의- 단계로 올라서는 기점이 되는 작품들이 바로 이 최후의 3개 소나타들인 것이다.

(베토벤의 중기는 '에로이카'가 거의 기점인 동시에 정점이고, 이후 다채로운 작품 세계가- 운명/전원/라주모프스키/발트슈타인/열정/첼로소나타 3번... 등등- 펼쳐진다. 그에 비해서 후기는 확실히 구분짓기 어려운 다년간의 탐색기를 거쳐, 1820년부터 드디어 한 꺼풀 벗고 상기한 걸작품들을 생산해내기 시작한다는 양상의 차이가 있다. 곧, 형식적인 면에서는 이 마지막 소나타들은 상기한 '함머클라비어' 뿐 아니라, 그 이전의 첼로 소나타 4/5번(Op. 102-1/2; 1815년)과 피아노 소나타 28번(Op. 101; 1816년)에서 이미 상당 부분 시험했던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물론 더 완성도 높게 가다듬어서- 보다 새롭고 깊이 있는 내용을 담아낸 작품들로 보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다.)

 

   다음으로 이 작품을 해석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열쇠이자, 이해의 핵심은 이 곡이 '후기 전원 소나타'라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 '후기'를 붙인 이유는 물론 '전원'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소나타가 이미 한 곡(15번, D major;  Op. 28)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전기) '전원' 소나타는 출판업자의 작명이지만- 음악의 내용과 제법 잘 어울리는 잘된 작명에 속한다- 저 유명한 '전원 교향곡(6번, F major; Op. 68)'은 베토벤이 직접 독어로 악장마다 표제를 붙인 공식적인 '자연 음악'이다. 공교롭게도 전자는 초기의 피아노 소나타군을 마감하는 곡이고, 후자는 중기를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이기 때문에, 베토벤은 시기별로 한 곡씩 '전원'을 주제로 작곡한 셈이 된다(이 글의 주제가 되는 곡이 마침 조성이 E major니, 베토벤의 'DEF' 전원 음악이라고 외워도 좋겠다.).

   물론 베토벤은 중기의 전원 교향곡에서 이미 이 음악은 ‘그림’이라기보다는 ‘느낌’의 표현이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고,  후기의 이 작품에 오면 더 주관성이 강한 느낌의 표현과 (비유하자면) '추상화된' 자연을 들려준다-  이 곡엔 새소리(의 모사)라거나, 들으면 쉽게 시내나 폭풍우를 연상할 수 있는, 보다 객관적이고 직접적인 묘사는 없다.

   그러나 변주곡 형식인 3악장의 주제는 전원교향곡의 5악장 '목동의 노래(Hirtengesang)'과 찬송가(hymn)적인 단순함을- 그리고 기본적인 정서를- 공유한다. 그 앞의 2악장 역시 전원교향곡의 앞선 4악장의 '폭풍우'의 절제되고 추상화된 감성으로 볼 수 있다- 자연은 평화롭고 목가적이었다가도 한순간에 광포하게 돌변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이 '천둥번개' 혹은 '폭풍우'를 늘 놓치지 않는 것이 베토벤이 자연의 본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1악장의 '미스테리'함을 관통하는 건, 무엇보다도 '물의 이미지'다.

 

   이 작품이 '후기 전원'이라는 이름을 쉽게 얻지 못한 데는 상기한 보다 주관적이고 추상화된 표현 방식 외에도, 이 곡이 베토벤의 최후의- 곧 '심오한'- 3개 소나타에 속한다는 사실에도 부분적인 원인이 있다. 즉, 이 소나타들에 접근할 때는 왠지 뭔가 종교적이고, 철학적이고, '깊은 정신적 고뇌'를  담고 있다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만 같은 선입견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이 30번의 경우에도 이런 요소들이 다 들어있는 건 맞는데, 작품 전체의 영감이자 주제는 '전원'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않고 이쪽으로만 몰아가면, 그야말로 나무만 보고 숲을 놓치는 것이다.

   대자연은 모든 예술의 원류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는 '고급진' 안목이나 별도의 교육이 필요치 않다. 산골에 핀 복사꽃의 아름다움을 미술사학자가 촌부보다 더 잘 느끼거나 이해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또 나이와도 관계가 없다- 좋은 산수가 사춘기에만 자극과 영감을 주고, 나이가 들면 별로가 되진 않는다. 외려 이 최후의 3개 피아노 소나타가 '전원'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는, 베토벤의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할 것이다.

 

 

- 1악장; 소나타 형식. '간결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소나타 형식의 필수요소만 들어있는 악장. 제1주제가 딱 8마디 반 정도- 못갖춘마디로 시작한다- 진행이 된 다음에, 바로 제2주제(Adagio espressivo)가 훅 치고 들어온다.

   이렇게 급박하게 제2주제가 들어오면서 박자(2/4-> 3/4)와 리듬이 모두 바뀌고 빠르기(vivace-> adagio)의 변화도 극단적이기 때문에, 악보를 눈으로만 읽는 음악학자들은 ('비주얼상') 충격적인 대조로만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악보를 ‘귀’로 읽는 연주가들 중에선 상대적으로 보다 제1주제와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견해도 없지 않다. 그리고 무려 만년의 코르토(Alfred Cortot)/박하우스(Wilhelm Backhaus)/켐프(Wilhelm Kempff) 같은 대가들이 이쪽에 가담하고 보면, 어느 한쪽 편을 들기는 쉽지 않다.

   일단 곡의 흐름을 더 따라가 보자면, 이 제2주제가 좀 발전하나 싶으면 코데타, 코데타인가 싶으면 거기서 발전부 개시, 계속 이런 식이다. 이 최고의 간결함은 발전부에서 재현부로 넘어갈 때도 마찬가지여서, 마치 작은 폭포가 쏟아져 내려 다시 시원의 고요한 못을 이루듯이, 클라이맥스에서 곧장 재현부로 이어지기 때문에 ‘표현의 경제성(economy of expression)’이라는 측면에선 이보다 더 뛰어날 수 없다- 그리고 듣는 순간 이건 천재가 썼다, 이렇게 중얼거리게 된다.

 

   사실 이 간결한 스타일은 베토벤이 이미 소나타 28번(Op. 101, A major) 1악장에서 시도한 수법이다- 소나타 형식의 최소한의 골격만 남긴 채로, 제시/발전/재현부 간에 확실한 구분선이 없이- 영어라면 문자 그대로 'seamless'하게- 마치 환상곡처럼 음악이 흘러간다. 심지어 28번의 경우는 제2주제조차도 '튀지 않고' 숨어 있고, 이것이 이 30번 1악장과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우리가 유추해볼 수 있는 가설은, 소나타 28번의 작업을 복기한 후에 베토벤이 소나타 형식을 완전히 버리고 환상곡을 쓸 게 아니라면 최소한 제2주제는 '여기'라고 명확하게 표시를 해 주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곧, (제1주제와의) '대조냐 연속이냐'의 문제는, '얼마나 확실히' 제2주제를 표시해주어야 하느냐의 문제로 치환된다. 이런 경우에 늘 그렇듯이 정답은 없고, 각자가 귀로 들으면서 적절한 정도를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부수적으로 빠르기 급변의 경우는 상기했듯이 발전부의 클라이맥스에서 재현부의 제1주제/제2주제로 '논스톱'으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이 제2주제에서 확실하게 한번 숨을 골라달라는 베토벤의 주문으로도 볼 수 있다. '안단테' 정도로는 흥분한 연주자들이 악보를 무시하고, 그대로 구분없이 달릴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 1악장을 이해하는 한 가지 열쇠는- 다양한 모습과 양태로 흐르는- '물'의 이미지이다. 우리가 위에서 발전부-> 재현부로 넘어가는 수법을 '폭포와 시원의 못'에 비유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니다. 사실 베토벤이 악보 첫줄부터 지시하고 있는 'sempre legato(언제나 레가토로)'는 당연히 악기로 물의 흐름을 묘사할 때 쓰는 상용 수단이다.(음악의 성격은 다르지만 이 곡처럼 E major면서, 동시에 한없이 이어지는 슬러(slur)로 물을 묘사한, 문자 그대로 20세기 피아노 음악을 '개시'한 유명한 작품이 있는데, 정답은 각주로 달아놓을 테니 피아노 음악 애호가라면 먼저 추측을 해보시길.[각주:1])

   이 악장의 큰 이슈 중 하나인 제1주제와 제2주제의 대조 역시, 이를테면 좁은 계곡을 타고 흘러내려오던 물이 탁 트인 평지를 만났을 때의, 그 흐르는 형태와 유속의 변화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달라진 심상에 비유할 수 있다. 비슷한 스타일로 작곡된 상기 소나타 28번의 1악장과 바로 비교해서 들어보면, 이 30번 1악장이 훨씬 완성도가 높다. 이것은 베토벤이 기술적인 면에서도 늘 발전하는 작곡가라는 점도 있지만, 우리는 28번이 그냥 낭만파적인 '무드 음악(mood music)'임에 반해서, 이 30번은 전원, 특히 '물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는 사실이 곡의 논리적 통일성과- 그 결과로서- 완성도에서 차이를 가져온 한 가지 원인이라고 추측한다.

 

   마지막으로 이 1악장의 뒤에 깔린 '스토리' 내지 '드라마 아닌 드라마'를 다시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이 될 것이다.

 

   발원지가, 어디서 시작했는지 모를 물길이 빠르게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내가 폭이 넓어지면 보는 이에게 또 전혀 다른 감상을, 감흥을 안겨준다.

   다시 흐름이  빨라지면서 (작은) 폭포가 되어 쏟아지는 순간, 하나의 소(沼)를 이루었다가 '무시무종(無始無終)', 도로 처음처럼 흘러간다.

 

   물론 베토벤이 들려주는 것은 실제 이런 장면들의 묘사가 아니라, 물가를 따라 걷는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감상과 추억과 같은 감정들이다. 'sempre legato'는, 그리고 악장을 내내 관통하는 독특한 리듬은 주제를, '물의 이미지'를 환기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To be continued...

  1. 답은 물론 라벨(Maurice Ravel)의 '물의 희롱(Jeux d’eau)'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이현욱
:

(아래 괄호 안의 곡명의 한글 제목은 우리가 독어/영역/국역을 다 참조해서 번역한 것인데 의역이 꽤 있다. 원래 독해는 의역을 하기 시작하면 그게 바로 망하는 지름길인데, 노랫말이 성격상 번역이 까다롭거니와 또 이 경우는 제목을 따로 지은 것이 아니라 가사의 첫줄을 그대로 곡명으로 삼은 것들이라서 이게 직역을 잘 가다듬어서 산뜻하게 우리말로 제목처럼 들리게 하기가 쉽지가 않은 건 물론이고, 둘째줄까지 문장이 연결되어 있는 경우는 뜻도 잘 통하지 않는다.)

 

- 제1곡, Wachet auf, ruft uns die Stimme(일어나라 노랫소리 우리를 부른다) BWV 645; 이 곡은 아마도 저 유명한 d-minor "토카타와 푸가(BWV 565)"와 더불어서 바하 오르간 음악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부조니(Ferruccio Busoni; 1866~1924)가 만든 피아노 버전도 인기에 한몫 했다고 평가가 된다. 무엇보다도 오른손이 담당하는 선율이 아름답고도 사랑스러운데, 우리가 보기엔 바로 이것이 바하가 편곡의 대상으로 이 곡을 고른 이유이다.

   이 점은 모델이 된 칸타타 원곡을- 특히 편성에 유의해서- 비교해서 들어보면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는데, 원곡에선 테너가- 오르간에선 왼손이다- 코랄을 담당하고 이 오른손의 선율은 통주저음(-> 오르간에선 페달)을 제외한 나머지 현이 맡는다. 결과는? 우리의 귀는 독창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사람 목소리에 촛점을 맞추기 때문에, 현은 자연스럽게 '전주'로 인식한다. 연주하는 입장에서도 뒤에 나올 가수를 받쳐줘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므로, 이게 독주파트도 아닌데 현이 먼저 맘대로 기분을 내면서 치고 나가기는 부담스럽다. 반면 혼자서 3성부를 다 담당하는 오르간 곡이 되면 시작부터 자유롭게 노래하면서 성부 간 밸런스를 맞출 수 있다- 아니, 연주가가 원한다면 아예 주객을 전도시켜서 나중에 들어오는 코랄 선율을 부주제처럼 들리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하가 이걸 몰랐을까? 바하가 아니라도 웬만한 수준의 작곡가라면 같은 멜로디를 악기 편성을 바꾸어서 연주하면 어떤 느낌으로 바뀔지, '마음의 귀'로도 대충 안다. 대위법만 어려운 게 아니라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도 못지 않게 어려운 일이니, 어쩌면 바하는 나중에 언젠가 이 선율을 재활용해야겠다고 기억해두고 있었을지 모른다.

   음악의 내용의 핵심은 새신랑의 도착을 기다리는 처녀들의 기대와 '설렘'이다. 애초에 칸타타 원곡의 기반이 되는 같은 제목의 찬송가 가사가 이른바 '열 처녀의 우화(Parable of the Ten Virgins)'에 바탕을 두고 있긴 한데, '교훈'에 해당하는 내용은 다 빠져있고 신랑이 도착했다고 외치는 야경꾼의 노랫소리를 듣고 막 기쁘게 맞이하러 나가는 장면만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곡의- 내지는 원곡 칸타타 BWV 140 전체의- 아름다움과 인기는 그 내용이 통상적인 종교 음악과는 달리 신앙적 색채는 엷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연가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갖고 있다는 데서 기인한다고 보인다.

   곡의 구조는 A(aa)A'(a'a) 꼴. 간혹 라이브에서- 보다 드물게는 녹음에서도- 반복을 생략하면 aa'a의 세 도막이 된다. 이 a도 다시 대략 a1/a2/a3의 세 악구 정도를 가지고 조금씩 변형하고 서로 순서를 바꾸어서 왼손에 코랄 선율이 들어올 때 멋지게 맞아들어가면서 돌아간다- 악보를 읽을 줄 아는 분은 다운을 받아서 한번 악보를 보면서 들어볼 것을 권한다.

- 제2곡, Wo soll ich fliehen hin, oder Auf meinen lieben Gott(나는 어디로 벗어나야 하나? or 내가 사랑하는 신을 믿노라) BWV 646; 이 곡은 모델로 볼 수 있는 칸타타 원곡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바하의 망실된 칸타타- 적어도 수십곡 이상으로 추정한다- 중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와 오르간을 위해서 따로 작곡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같이 있는데, 아마 '영구미제'가 될 가능성도 많다. 제목이 둘인 이유는 같은 멜로디에 서로 다른 작사가가 가사를 2번 붙였기 때문이다.

   음악은 내용적으로 긴박감이 있어- 연주자의 테크닉이 허용하는 한- 빠른 템포로 연주하는 게 효과적이고 느린 템포를 선택할 경우에는 긴장(tension)을 잘 유지해야 한다. 곡의 구조는 대략 AA'A'' 꼴의  짧고 자유로운 전개.

- 제3곡, Wer nur den lieben Gott lässt walten(오직 신의 뜻을 따르는 이) BWV 647; 이 곡과 아래 제4곡, 두 곡만 4성이고 다른 곡들은 3성이다- 각각 이 곡에선 모델이 된 칸타타의 소프라노&알토 듀엣, 4곡에선 테너/알토의 듀엣을 한 손이 같이 담당하면서 성부가 하나씩 늘어난다. 원곡의 가사나 음악이 표현하는 감정이나 모두 인고의 시간에 좋은 시절을 되돌려줄 신을 믿고 견디자는 내용이다. 우리의 판단 혹은 취향으로는 위 2곡의 템포를 빨리 잡았다면, 이 곡은 살짝 늦추는 것이 효과적이다. 즉, 스토리상 '액션'은 위에서 끝났고 여기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것- 위 2곡이 '겟세마네(Gethsemane) 동산'이라면 이 3곡은 '골고다(Golgotha) 언덕'이라고 비유할 수도 있겠다. 곡의 구조는 대략 AA(반복)B(=A') 꼴이다.

- 제4곡, Meine Seele erhebt den Herren(나의 영혼이 신을 무한히 찬양하더라) BWV 648; 짧지만 전6곡 중에서 음악적으로 노래하기 가장 어렵다.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데, 비유하자면 신이 나(혹은 인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다. 그저 한번 내려다봄과 동시에 빛이 닿는 것만으로도 구원이 이루어진다. 즉, 신이 자비를 베푸는 '구원의 순간'을- 혹은 위 2/3곡의 비유를 연장한다면 '부활의 순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노래하는 음악이다. 참고로 모델이 된 동명의 원곡 칸타타(BWV 10) 5악장의 가사가 아래 단 두 줄이다.

 

   Er denket der Barmherzigkeit          (신이 (약속했던) 자비를 기억하고)

   Und hilft seinem Diener Israel auf.  (그의 종 이스라엘 백성을 일으켜 세우시다.)

 

   위 2곡과는 반대로- 음악이 늘어지지 않는 한- 충분히 느린 템포가 더 효과적이다. 곡의 구조는 대략 AA' 꼴인데, 첫머리의 신비한 느낌을 주는 페달 선율이 수미상응으로 반복이 되고 마친다.

- 제5곡, Ach bleib bei uns, Herr Jesu Christ(우리와 함께 머무소서, 예수 그리스도여!) BWV 649; 위에서 구원은 이미 받았고, 빛이 승리했다. 그래서 음악의 분위기가 밝으면서도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이 왼손의 선율은 원곡에선 '피콜로 첼로(violoncello piccolo)'로 연주되는 오블리가토(obbligato)인데, 코랄 선율도 코러스에 할당이 되어있기 때문에 사실상 기악 독주가 끌고 가는 음악이다. 본질적으로 흥겨운 음악이지만 상대적으로 느린 템포에서도 굉장히 아름다운데, 우리의 추측은 현악기가 어떻게 소리를 내는지 잘 알고 있던 바하가 리듬에 배려를 했으리라는 것이다.  왜냐면 이 피콜로 첼로가 요즘 나오는 것들은 소위 '복원품'이고, 이미 멸종된 악기라서 바하가 실제로 어떤 악기를 염두에 두고 작곡했는지 확실치는 않으나, 대략 지금의 비올라와 첼로 사이 정도 크기에 현 4~5줄짜리, 그리고 다리 사이에 끼는 것이 아니라 쿠션 같은 것을 받쳐서 세워서 연주하던 악기라고 본다면, 당대 1인자라고 하더라도 현대 첼로만큼 기민했을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이런 안배가 베토벤 이후의 '피아니스트-작곡가'들에게선 볼 수 없는 것이다.

   칸타타 원곡의 제목(Bleib bei uns, denn es will Abend werden, BWV 6)이 코랄과 살짝 다른 이유는 모델이 된 칸타타들 중에 유일하게 코랄 칸타타 형식이 아니기 때문인데, 3악장이 이 찬송가에 음악을 붙인 것(chorale-setting)으로 되어 있어 그것을 편곡한 것이다. 곡의 구조는 대략 AA'A의 꼴.

- 제6곡, Kommst du nun, Jesu, vom Himmel herunter(예수여, 이제 하늘에서 내려오소서) BWV 650; 크리스마스, 축제 분위기가 완연한 피날레. 원곡도 악기편성 자체가 트럼펫을 3대나 쓰고 팀파니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모델이 된 칸타타 다섯곡 중에 가장 화려한 것이다. 현란한 오른손의 선율은 이번엔 원곡에선 바이올린의 독주가 맡았던 파트이고, 제2곡처럼 연주자 본인이 자신있게 노래만 할 수 있다면 빠른 템포가 효과적이다. 곡의 구조는 대략 AA'A''의 세도막인데, 위 5곡처럼 마지막엔 달 세뇨(dal segno)표를 따라서 '전주'를 한번 반복하고 마친다.

   이 곡도 제목이 모델이 된 칸타타(Lobe den Herren, den mächtigen König der Ehren, BWV 137)와 다른데, 그 이유는 또 다르다. 우선 코랄 원곡은 1665년에 출판된 “Hast du denn, Jesu, dein Angesicht gäntzlich verborgen”이고, 아마도 세속음악에서 따왔으리라고 본다. 근데 이 선율 하나를 갖고 가사만 바꾸어서 1667년엔 Caspar Friedrich Nachtenhöfer라는 사람이 크리스마스 찬송가를,  다시 1680년엔 Joachim Neander라는 사람이 추수감사절 찬송가를 낸 것- 바하가 처음 코랄 칸타타를 만든 것은 Neander의 가사를 따랐기 때문에 음악의 내용에 보다 부합하는 것은 이쪽이다. 그럼 바하는 왜 이 '쉬블러 코랄'을 출판할 때 제목을 현재의 것으로 바꾸었을까?

   우리가 보기엔 이것이 이 작품의 출판시기를 더 좁혀볼 수 있는 단서이다. 비록 제목일 망정 추수감사절 찬송을 굳이 크리스마스 찬송으로 바꾸었다면 이유는 당연히 악보를 팔아야 할 철이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제1곡의 모델 칸타타가 준비된 '절기'가- 우리가 전편에 제시한 표를 참고하기 바란다- 11.25일, 정확히 크리스마스 한달 전이다. 크리스마스가 기독교 문화권에선 최대 명절이기 때문에 바로 이때부터가 행사 준비에 들어가는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전편의 첫머리에 우리가 언급했다시피 초판본 악보에 오류가 허다한 것도 그 이유의 하나가 -11월 중순에서 늦어도 12월 초중순까진 악보가 나와야 초판의 판매를 극대화할 수 있었을 테니- 바로 이 '납기'를 맞추기 위해서 서둘렀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정확한 출판일자를 알 수 있는 증거는 남아있지 않지만 만일 이 작품이 실제로는 1748년에 출판되었다면- 마치 크리스마스를 지나 새해를 넘겨서까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우리처럼- 예정된 '납기'를 넘겨서 지연된 경우일 것이고, 원래 '기획의도'는 1747년 크리스마스 시즌을 노리고 준비된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 마지막으로 다뤄야 할 것은 이 작품 전체의 구조이다. 요컨대, 이 6곡이 개별적인 코랄 프렐류드들의 수평적인 모음이냐, 아니면 어떤 유기적인 구조로 조직이 되어 있느냐, 그 문제이다. 여기서 '6'이라는 숫자에 착안해서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모델은 바로 바하의 무반주첼로모음곡이다. 이 무반주첼로모음곡들은 모두 6곡씩으로 구성이 되어 있고, 구성상 '두괄식'이다- 즉, 첫 곡인 프렐류드가 작품 전체의 성격을 대표한다. 그리고 기승전결의 '전'에 해당하는 역할은 언제나 제4곡, 사라반드(Sarabande)가- 해석의 자유야 있지만 대개 가장 느리고 관조적인 음악이다- 맡는다. 그리고 나면 남은 두 곡은 첫곡 프렐류드에서 제시한 분위기로 돌아가서 마무리가 된다. 즉, 기(제1곡)-승(제2/3곡)-전(제4곡)-결(제5/6곡)의 극적인 구조(dramatic structure)를 갖는다. 지금까지 우리의 설명을 충실히 따라왔다면, 위에 제시한 제1~6곡의 내용풀이가 이 구조와 대략 일치한다는 것을, 곧 이 작품은 바하가 6곡짜리 모음곡을 만들 때 사용하는 극적 구조를 사용하여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크리스마스 철을 맞이하여 제1곡은 '지상에 내려오는 예수를 맞이하는 기쁨'으로 설정이 되어 있고, 2/3곡에서 '수난'을 겪은 다음에 4곡의 '구원'에서 전환이 되고, 5/6곡에선 다시 1곡에 이은 축제 분위기로 마무리가 된다. 그렇다면 이 "쉬블러 코랄' 전6곡은 오르간을 위한 '크리스마스 모음곡(Christmas Suite)'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ii) 녹음들

1. Peter Hurford(/the organ in the Church of Our Lady of Sorrows, Toronto)- 1977 or 79

허포드의 바하는 음악성보다는 테크닉에 더 비교우위가 있다. 이를테면 제1곡에서 허포드가 쓰는 '루바토'는 음악의 흐름을 살리기보다는 방해하는 것처럼 들린다. 대신에 제2곡/제6곡의 빠른 템포의 깔끔한 연주는 들을 만하다.

2. André Isoir(/Organ Joseph Gabler, Weingarten(남부 독일))-1988

이조아르도 테크닉에 더 비교우위가 있는 바하인데, 이번에는 '음색(timbre)'이다.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예라면, 제1곡/제6곡의 'A', 첫번째 도막에서 같은 악구가 반복될 때 두번째는 음색을 바로 바꿔주지 절대 똑같이 소리내는 법이 없다. 근데 이게 듣는 재미는 있는데, 바하에 쓰기엔 좀 과한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페달이 상대적으로 잘 안 들리는 밸런스도 단점- 라이브 같으면 이 정도도 들을 만하겠으나 집에서 듣는 녹음으로는 불만족스럽다.

3. Simon Preston(/Metzler Organ, Trinity College Chapel, Cambridge)- 1999

문자 그대로 '모범적(exemplary)'이고 깔끔한 연주. 웬만한 사람한테 다 추천할 수 있는 무난한 스타일- 그러나 굉장히 음악적이고, 특히 제3곡이 무척 아름답다. 전체적으로 아주 서정적인 바하인데 음악이 곱기만 하고 '뼈'가 좀 없는 게 아쉬운 점.

4. Jean Guillou(/Great Kleuker-Steinmeyer Organ of the Tonhalle, Zürich)- 1990

모던한 느낌의, 아주 명료한 바하. 탁월한 리듬감을 바탕으로 바하의 '그루브(groove)'를 느끼게 해주는 연주다. 제2/제3곡에서 왼손의 음색을 통주저음(basso continuo) 담당의 저음 현을 모방해서 선택한 것도 독특하면서도 매우 효과적이다.

   노익장을 과시하던 이 오르간의 대가도 2019년 1월에 고인이 되었다(동갑내기 허포드도 3월에 세상을 떠났다). 2016년 롯데콘서트홀 개관했을 때가 결국 마지막 내한이 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때 앵콜곡이었던 "Wir danken dir, Gott, wir danken dir(BWV 29)"의 신포니아(Sinfonia)가- 아마 이 곡은 원곡인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제3번 프렐류드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더 많을 것 같다- 악기 종류를 불문하고 우리가 지난 십 수년 동안 라이브로 들은 바하 중에 최고였다. 바하를 제대로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마치 '유체이탈'을 해서 하늘로 두둥실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참고로 도리안(Dorian) 레이블에서 나온 이 음원엔 BWV 645~47, 3곡밖에 없다. 원래는 바하 전집으로 기획이 되었다가 중단된 것으로 보이고, 대신 필립스(Philips) 레이블로 1999년 11~12월에 걸쳐서 라이브로 녹음한 것이 CD 12장 분량이 있는데 이게 한국에 수입된 적이 있는지도 확실치가 않다. 1960~70년대 필립스에서 녹음한 LP도 상당한 분량이 되기 때문에, 묶어서 '추모 박스세트'로 재발매를 기대했는데 소식이 없다.)

5. Michel Chapuis(/Andersen Organ of St. Benedikt’s Church, Ringsted, Denmark)- 1970

샤퓌는 곡 전체의 구조를 독특하게 본다. 제1곡은 중도적으로 하고, 제2~4곡을 하나로 묶어서 빠른 템포로 극적인 서사를 강조하는 연주를 하고, 5곡에선 템포를 늦춰서 한숨 돌린 다음에 6곡에서 경쾌하게 마무리하는 방식- 즉, 기(1)-승(2/3/4)-전(5)-결(6)로 나누는 것이다. 그냥 극적인 구조만 보면 이것도 일리는 있는데 완급조절이 'slow-fast-slow-fast'에서 'fast'가 3곡이 연속이 되다 보니 제4곡쯤 오면 중복이라서 효과적이지가 않다는 문제가 있다. 위 이조아르 음반과 함께 페달부 밸런스가 안 좋은 녹음에 속한다.

6. Marcel Dupré(/the gallery organ of the church of Saint-Sulpice, Paris)- 1959

여기 소개된 오르가니스트들 중에 유일하게 19세기에 태어난 사람(1886~1971)이면서 '오르간의 전설'. 우리가 보는 뒤프레는 본질적으로는 낭만주의자다. 낭만파 성향의 연주가들이 강점을 갖는 바하는 사실 이런 코랄 계통 소품보다는 스케일이 큰 판타지아(fantasia) 같은 종류지만, 역시 '대가'란 어려운 곡일 수록 잘하는 법이라- 우리가 위에서 가장 노래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했던- 제4곡만큼은 신비감을 자아내는 데 있어서 이보다 앞서기 힘든, 가장 잘된 연주에 속한다. 그리고 제1곡의 경우에 코랄 선율이 들어오기 이전의 '전주' 부분에서 페달이 상승했다가 하강하는 음형을 연주하는 부분을 강조해줘야 음악에 입체감이 생기는데, 페달을 부각시키는 수법이 탁월하다.

7. Marie-Claire Alain(/organ Marcussen & Søn, Sct. Jacobi Kirke, Varde, Denmark)- 1959

3번에 걸쳐서 전곡 녹음을 한 알랭의 나이 30대에서 40대 초반에 걸친(1959~67) 첫번째 전집. 오래 묻혀있다가 2018년에 리마스터링을 해서 CD로 발매가 되었다. 각 성부간 밸런스 감각도 좋고, 이쪽도 아주 명료한 바하. 거의 80% 정도 분량이 일곱 군데의 덴마크 오르간으로 녹음이 되었는데 소리가 세련되진 않았지만 맑은 시골처녀 같은 상큼하고 신선한 매력이 있다.

8.  Marie-Claire Alain(/Schwenkedel organ, Collégiale de Saint-Donat, Drôme, France)- 1978~80

첫번째 녹음 후에 10년 이상 지나서 재시도한 두번째 전집. 이제 알랭이 음악적으로 보다 원숙하고 자유롭게 노래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보통 '명가수'라는 사람들이 자기 노래도 악보 대로 부르는 경우가 잘 없다- 기악도 마찬가지로 음악이 완전히 자기 것이 되면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면서 리듬이 살짝살짝 악보에서 벗어나서 변형이 되는데, 이 녹음을 듣고 나서 바로 위의 녹음을 이어서 들으면 상대적으로 따박따박 국어책을 읽는 듯한, 약간 고지식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제3곡만은- 아마도 '고난의 행군'을 묘사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은데- 리듬이 약간 부자연스럽게 절뚝거리는 느낌이 있다.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아진 버전.

9. Marie-Claire Alain(/organ of the Stiftskirche Grauhof, Goslar, Germany; built by Christoph Treutmann, 1734~37)- 1993

제3곡은 확실히 개선이 된, 알랭의 '결정판'인데 반해 제4곡은 우리의 취향으로는 되레 '개악'이 된 경우. 전체적으로 음악적으로는 위 2번째 전집 대비 큰 변화는 없다. 전곡 박스세트는 작품 하나로 우열을 논할 순 없고, 어차피 지금 낱장으로 구할 수 있는 CD도 거의 없긴 하지만 이 "쉬블러 코랄" 만큼은 우리는 위 2번째 전집의 것을 권하고 싶다.

10. Helmut Walcha(Silbermann Organ in the church of Saint-Pierre-le-Jeune, Strasbourg)- 1971

제1곡부터 들리는, 발하의 '절도있는' 레가토(legato)는 '바하에 레가토가 너무 많으면 안된다'라든가 하는 속설은 융통성 없는 바보들이나 하는 소리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솜씨. 가운데 제3/제4곡은 모두 템포를 당겨서 감정이 절제된 스타일이고, 상대적으로 느긋한 템포의 제5곡은 음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빛나는, 이보다 아름다운 연주를 기대하기 힘든 수준. 우리가 위에서 추론한 바하의 의도와는 차이가 있지만, 어차피 바하나 베토벤의 위대함은 이런 '뒤집기'가 가능하다는 데, 곧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2가지 해석이- 제대로만 한다면- 모두 완벽하게 음악적으로 말이 된다는 데 있는 것이다.

 

선호도: Walcha=Guillou=Allain1978>=Preston=Allain1959=Allain1993>Chapuis>=Dupré>=Isoir=Hurford

해석의 삼각형: Guillou/Dupré/Chapuis

Posted by 이현욱
:

Bach 6 Schübler Chorales BWV 645~650

 

 

I. Wachet auf, ruft uns die Stimme BWV 645

II. Wo soll ich fliehen hin, oder Auf meinen lieben Gott BWV 646

III. Wer nur den lieben Gott lässt walten BWV 647

IV. Meine Seele erhebt den Herren BWV 648

V. Ach bleib bei uns, Herr Jesu Christ BWV 649

VI. Kommst du nun, Jesu, vom Himmel herunter BWV 650

 

(지금껏 이 블로그에서 '음반 비교감상'이라는 항목으로 근 20곡 정도 다룬 것 같은데 바하는 이번이 처음이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우리가 바하 음악을 논할 실력이 되는가, 한 20년은 더 기다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해서였다. 어렵기는 베토벤도 어렵지만 베토벤은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음악이라서 후기의 가장 어렵다는 작품도 표현하는 내용은 실상은 가장 인간적인 고뇌이다. 이것은 물론 바하가 비인간적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우리와 다른 시대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베토벤은 확실한 '근대(modern)인'이지만, 연대가 한 세기쯤 앞서는 바하의 시대는 아직 과도기이다- 우리랑 세계관과 삶의 양식이 많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이 음악이 표현하는 감정이 우리가 느끼는 그게 맞는지 한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기술적으로는 현재 우리 귀에 익숙한 음악들은 대중음악이건 클래식이건 '멜로디에 코드 얹는' 식의 짜임이 많기 때문에 바하처럼 대위법을 기반으로 하는 음악은 따라가려면 '정신사납다'. 아마도 '다성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polyphonic ear)'라는 것도- 음악에 관한 거의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처음부터 타고 나는 능력이고, 단지 연습/훈련을 통해서 스스로가 타고난 한계 혹은 잠재력에 어디까지 도달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음악의 내용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지어 자기가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음악에 관해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는 것은 그냥 무의미한 정도가 아니고, 문자 그대로 '비의미적인(nonsensical)' 행위가 된다. 하지만 최근 들어 무작정 미뤄놓는 것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써보고 나중에 '깨달음'이 오면 다시 고치자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연주가들도 일단 최소 환갑 넘을 때까지 최대한 본인이 준비되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3~40대부터 한 10년에 한번씩 녹음을 하면서 답을 찾아가는 스타일도 있다. 뭐가 더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고 그때그때 각자 입장에 맞게 선택할 일일 것이다.)

 

(i) 작품개요

; 먼저 제목[각주:1]부터 설명하자면 '슈블러(Johann Georg Schübler)'는 출판업자의 이름이다. 즉, 1747~48년 8월 사이에 나온 이 곡은 바하 생전에 출판된 몇 안 되는 작품들- 오르간 곡으로는 클라비어연습곡 3권(Clavier-Übung III)과 '저 천상으로부터 나는 나려왔다(Vom Himmel hoch da komm’ ich her)' 주제에 의한 카논 변주곡, 그리고 이 작품까지 딱 셋이다- 중 하나다. 근데 이 슈블러씨가 그냥 출판업자가 아니고 바하의 라이프치히 시절에 음악을 배운 제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인맥의 힘'으로 이 출판이 이루어지긴 했는데 조판(=engraving)이라든가 여러 모로 썩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았던지 초판본은 기초적인 오류가 많다고 평가된다. 이 작품은 바하의 자필 초고가 발견된 바가 없으나 다행히도 작곡가에게 보내진 초판본에 바하가 오류를 수정해놓은 것이 보존되어 있어- 중간에 사라졌다가 1975년에 다시 나타나서 지금은 프린스턴 대학 도서관(Scheide Collection)에 기증되어 있는데 사전허가 없이는 출입이 안 되는 컬렉션으로 되어 있다- 19세기 중엽 이후의 악보들은 이것을 근거로 한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상기한 대로 '나름 음악가'이기도 한 슈블러가 바하의 지시를 받아서 편곡 작업까지- 왜 편곡이 필요했는지는 아래에서 설명한다- 수행한 것으로 추정하는 설도 유력한데, 바하가 인쇄 전에 교정을 보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히 입증이 되지만 편곡을 누가 했는지까지 100% 확실한 것은 아닌 걸로 보인다.

   다음으로 '코랄(chorale)'은 기본적으로 '루터파 (교회의) 찬송가'라고 이해하면 음악감상 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 바하 시대 독일 종교음악은 이 코랄을 기반으로 한 것이 많아서 '코랄 칸타타(cantata)', '코랄 전주곡(prelude)', '코랄 환상곡(fantasia)'처럼 여러 장르로 가지치기가 되는데, 곡의 짜임은 주로 대위법의 원리를 따른 다성음악이다. 만드는 방법의 간략한 개요는 바탕이 되는 코랄 선율을 한 성부에 놓고 그에 맞춰서 새로운 선율들을 다른 성부에 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코랄을 맨 위 소프라노에 놓고 아래로 선율들을 덧붙일 수도 있고, 최저음 베이스에 놓고 위로 쌓아올릴 수도- 시대에 따라서, 작업에 따라서 달라진다- 혹은 중간 성부에 놓을 수도 있고, 더해지는 선율들도 코랄에서 파생된 비슷하게 단순한 것일 수도, 그것이 현란하게 변주되거나 혹은 아예 새로운- 뒤의 둘 사이의 경계는 미묘하다- 선율들이 다 가능하다.

   이때 이 바탕이 되는 코랄 선율을 가리킬 때 'cantus firmus'라는 용어를 쓴다. 단어 자체는 라틴어이고 영어로 (어순까지) 직역하면 'song fixed'인데, 우리가 방금 설명한 대로 '받쳐 놓고' 거기에 새 선율이 더해진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별 무리가 없다. 다만 영어사전의 설명에서 'fixed'보다 더 중요한 건 'pre-existing'이라는 어구다. 즉, 'cantus firmus'란 창작하는 게 아니고 원래 있던 가락을 가져다 쓰는 것이다. 유행가라도 기존의 선율을 대위법에서 작곡의 기본으로 가져다 쓰면 다 'cantus firmus'인 것이고, '코랄 ~'이라고 불리는 음악들은 대개 특정 코랄 선율이 'cantus firmus'로 사용된 대위법적 음악이라고 이해하면 된다(참고로 이것을 정선율()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아마도 일본애들이 1:1 대응을 시켜서 한자어로 옮긴 걸로 보이고 한글 사전에 '정한가락'이라고 나오는 건 (일본식) 한자어를 순화하시겠다고 한번 더 바꾼 것으로 보이는데, 나쁜 번역이다- '정定'에 '하다'를 붙여서 활용을 시킨 다음에 띄어쓰기 무시하고 4글자짜리 명사로 붙여만든 게 무슨 '순화'인가? 그냥 정선율이라고 하든지, 순우리말을 쓰겠다면 차라리 '밑가락'이라고 하는 게 나을 것이다. 대선율(律) 마찬가지로 '대한가락'- 이것은 '대한늬우스'에 나오는 배경음악인가?- 같은 엉터리 용어를 만들 게 아니라 '맞가락' 혹은 '댓가락' 정도면 적당할 것이다. 즉, 원래 있던 '밑가락'을 가져와서 한 성부를 맡기고, 그 위아래로 '맞가락'을 만들어서 붙이는 요령이 바로 대위법이고, 그 결과물이 대위법적으로 작곡된 다성음악이다.).

   'cantus firmus'니, '정선율'이니 하는 용어들은 한번 읽고 잊어버려도 상관없지만 실제 음악감상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음악을 듣다 보면 중간에 어디선가- 왼손/오른손/페달 어디서든- 딱 들어도 찬송가에서 따온 것 같은 단순(무식?)한 선율이 출현하는 것이 귀에 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이 단순한 선율들이 그냥 '화음 맞추러'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곡의 기본 단위이기 때문에, 음악이 한 단락지어지는 느낌이 들더라도 이 '찬송가 선율'이 안 나오면 말하자면 그냥 '전주'가 끝난 것이지 온전한 한 도막이 끝난 게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아래 우리가 여섯곡마다 각각 'AA(반복)B'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곡의 구조를 표시해놓았는데 이 6곡은 푸가처럼 복잡하지도 않고 또 짤막한 소품이기 때문에 큰 도막만 인지하는 정도로 충분하겠으나, 그보다 각 성부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그러면서 또 전체를 들어야 한다- 훈련이 중요할 터, 둘 다를 위해서 코랄 선율을 담당하는 한 성부의 존재를- 중간에 좀 쉬더라도-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게 좋다.

 

- 이 작품은 상기한 코랄을 기반으로 한 악곡들 중에서, 다양한 스타일의 오르간용 소품들을 일컫는 코랄 프렐류드에 속한다. 그래서 형식상으로는 코랄 프렐류드들의 모음인데 실제로는 오르간을 위해서 새로 작곡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바하가 작곡한 기존의 칸타타들에서 한 악장씩 뽑아서 편곡해서 만든 것이다(여기서 자연스럽게 바하가 이 작품을 출판한 목적이 당시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칸타타 작품들 중에 '인기곡'을 골라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버전으로 보급하는 데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는데, 이 이상의 확실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여튼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모델이 된 작품을- 악기편성이나 가사 등등-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마침 영문 위키피디아에 하나로 잘 정리된 표가 있어서 아래에 우리가 거의 전재를 했다.

 

BWV

#

Title

Model

Date

Tune

645

1

Wachet auf, ruft uns die Stimme

BWV 140/4

25 November 1731

Zahn No. 8405

646

2

Wo soll ich fliehen hin (oder)

Auf meinen lieben Gott

(unknown  or None )

Zahn No. 2164

647

3

Wer nur den lieben Gott lässt walten

BWV 93/4

9 July 1724

Zahn No. 2778

648

4

Meine Seele erhebt den Herren

BWV 10/5

2 July 1724

9th psalm tone

649

5

Ach bleib bei uns, Herr Jesu Christ

BWV 6/3

2 April 1725

Zahn No. 493

650

6

Kommst du nun, Jesu, vom Himmel herunter

BWV 137/2

19 August 1725

Zahn No. 1912a

(표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Schübler Chorales' 항목) 

 

   참고로 표 맨 오른쪽에 나열된 ‘Zahn 번호’는, 독일의 신학자 Johannes Zahn(1817~1895)이 독일 루터파 찬송가들을 모아서 정리해서 펴낸 책(Die Melodien der deutschen evangelischen Kirchenlieder Vol. I~VI)에서 붙인 번호를 따르는 것이고, 그 왼쪽 칸의 날짜는 모델이 된 칸타타가 초연된 날짜라고 생각하면 된다(원래는 이게 말하자면 '기독교 달력'을 따라서 돌아가는 칸타타 사이클이라서, 초연이 아니라 딱 그 날짜에 해당하는 '절기'를 위해서 작곡이 되는 것인데, 지금 우리의 주제가 칸타타가 아니기 때문에 거기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여타 내용은 아래 각 작품별로 관련되는 바를 설명한다.

(- 그리고 종교 음악도 사실 오페라랑 다를 것이 없어서 성악 파트가 있고 유의미한 가사가 있으면 작곡가는 그 가사 내용과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붙이게 마련이라, 음악의 내용을 짐작하려면 칸타타의 해당 악장의 가사를 읽어보는 것이 좋다. 우리가 아는 가장 유용한 웹사이트는 bach-cantatas.com이고, 홈페이지에서 왼쪽 "Background Information" 탭 하위항목으로 'Texts and Translations'나 'Chorale Texts'에 보면 각종 자료들이 모아져 있다.)

 

To be concluded...

  1. 초판 원제는 "Sechs Chorale von verschiedener Art auf einer Orgel mit 2 Clavieren und Pedal", 즉, "2단 건반과 페달이 있는 오르간을 위한 서로 다른 유형의 6개의 코랄"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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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umann Fantasiestücke Op. 73


I. Zart und mit Ausdruck(다정, 다감하게)

II. Lebhaft, leicht(생기있게, 가볍게)

III. Rasch und mit Feuer(빠르고 열정적으로)

 

 

(i) 작품개요

   역시 1849년작, 이해부터 시작한 슈만의 '실내악 듀오곡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에 해당한다.[각주:1] 자필 초고의 원제는 'Soirée Pieces'('야회곡' 정도 되겠다)로, 처음부터 음악가 내지 애호가 지인들의 저녁 모임에서 연주될 것을 상정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다만 'Soirée'는 만찬 후의 여흥(을 위한 음악) 같은 것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모호성이 있고,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제목을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역시도 확실치 않다.

-  이 곡도  초판부터- 슈만의 동의하에- 바이올린 혹은 첼로로도 연주할 수 있도록 파트 악보들이 같이 포함이 되어 있었던 경우인데 클라리넷 혹은 첼로로 연주할 때 물론 각각 효과에 장단점이 있다. 우선 기본적으로 클라리넷을 위한 곡이기 때문에 제1곡의 중간부 같은 경우 멜로디 자체가 첼로로 연하면 약간 어색하게 넘어가는 구석이 있어서 클라리넷으로 불었을 때의,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면서 떠 가는 듯한 그 느낌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첼로의 장점은 '(왼)손으로 넣는 비브라토(vibrato)'- 음악의 성격에 따라서 계속적인 비브라토가 잘 어울리는 음악이 있고, 잘 맞지 않는 음악이 있는데 이 곡의 경우는 들어보면 비브라토가 있는 편이 더 근사한 음악이기 때문. 비브라토를 잘 쓰지 않는 경우는 템포를 조금 늦추는 것이 상대적으로 노래가 좀 낫다. 이 점도 슈만이 1악장 메트로놈 빠르기를 낮춰 잡은-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상술하겠다- 그리고 첼로 주자들보다 클라리넷 주자들이 슈만이 지정한 악보의 메트로놈 빠르기에 충실한 녹음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한가지 이유라고 우리는 추측한다. 또, 3악장 첫머리의 트레몰로(tremolo)도 이 곡을 처음부터 클라리넷 판으로 들은 사람한테는 좀 방정맞게 들릴 수 있겠지만 지시어 'rasch und mit Feuer'를 표현하는 데는 더 적합하게 들린다.

- 슈만은 젊을 때 첼로를 잠깐 배운 적이 있고- 당시 첼로의 위상을 고려한다면 특히 더- 첼로를 편애했던 작곡가이긴 하지만 사실 모든 곡을 피아노의 관점에서 쓰는 전형적인 '피아니스트-작곡가' 유형에 속한다. 그래서 이 곡도 아래 녹음을 소개한 시프린(David Shifrin)의 표현에 따르면 '쉴 틈은 고사하고 숨쉴 틈도 없게' 쓴, 관악기 주자의 사정을 거의 고려 안 한-혹은 못 한- 작곡이라는 것.

 

- 형식은 (소소한 차이는 있지만) 3곡 모두  ABA(-Coda)의 3부 형식이라 별로 논할 것이 없다. 오히려 요점은 이 곡당 3~4분 정도 길이의 짧은 3곡간의 관계를, 전체적인 구조를 어떻게 봐야할 것이냐의 문제가 된다. 일단 곡마다 다른 주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악장 첫 A 안의 두 주제 a/b에서 3곡이 모두 파생되어 나왔다 해도 좋을 만큼 서로 악상이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세 도막으로 이뤄진 단일한 환상곡처럼 보고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는, 가능한 접근법이다. 그러나 슈만은 이 곡의 제목을 'fantasy pieces'라고 했지, 그냥 'fantasy'라고 하지 않았다- 3곡이 모두 곡마다의 '캐릭터'가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슈만의 의도는 3곡이 각자의 색깔을 가지면서 동시에 전체적으로 통일된 하나를 이루는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 이런 맥락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이 각 악장의 메트로놈 빠르기 지시이다. 이것은 1849년의 초판본엔 없었고 1852년의 개정판부터 나온다. 현재 남아있는 슈만의 자필초고에는 'M. M. ♩= '까지 적혀있지만 정작 수치는 없다. 자필초고와 초판본이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지금은 망실된- 최종원고가 있었던 것이 확실한데 거기에 있던 수치가 출판과정에서 누락이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슈만이 일단 삭제를 했다가 나중에 마음을 바꾸어서 개정판에 넣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여튼 수치는 1악장부터 순서대로 4분음표= 80/138/160이다. 즉, 갈수록 빨라지게 되어 있고 비율로 보면 상대적으로 2곡에서 가속이 심하다. 제3곡은 결과적으로 1곡보다 2배가 빠르고- 심지어 coda에 가면 거기에 더해서 'schneller(더 빨리)'가 2번이나 더 나온다- 피날레의 가속은 슈만이 좋아하는 스타일이긴 한데 이건 음악적으로 좀 심하지- 내지는 뭔가 유치하지- 않은가? 실제 녹음들을 들어보면 대개 슈만의 지시보다 압축해서, 즉 제1곡은 4분음표= 80보다 빠르게, 제3곡은 4분음표= 160보다 느리게 연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템포 차이를 줄이면 위에 언급한 단일한 세도막의 환상곡이라는 통일성이 강조되는 효과도 있다. 어찌된 일일까? 그럼 이것은- 문자 그대로 '정신이 나가기' 시작한- 슈만의 실수인가?

   답은 '아니오'이다. 위에서 슈만의 의도는 '둘다'라는 취지로  이야기 했었다- 한데 '유기적 통일성'만 강조해서 템포 차이를 너무 줄이면 제2곡의 색깔이, 존재 이유가 박약해진다. 즉,  제2곡을 생략하고 1곡에서 3곡으로 바로 건너뛰어도 음악의 흐름에 딱히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CD 트랙을 건너 뛰어서 이렇게 들려줬을 때-  특히 이곡을 처음 듣거나 뚜렷한 기억을 안 갖고 있는 청중의 경우에- '이게 슈만의 원곡'이라고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어떤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을지 우리는 의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추측은 슈만도 자기 작품의 단점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출판할 만큼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은 충분히 있지만 뭔가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아 있었다는 것. 이 작품에 연이어서 작곡한 '아다지오와 알레그로'가 바로 군더더기 없이 딱 두 도막으로 된 악장 구분도 없는 단일한 환상곡이고, 1852년에 메트로놈 빠르기 숫자를 추가한 것 외엔 초판과 동일한 개정판을 낸 것도  이 뒷맛을 없애기 위한 보완 작업이었을 것이다. 곧, 슈만이 지정한 템포의 요점은 제1곡과 2곡의 성격을 확실하게 대비시키는 것이고, 또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3곡이 2곡보다도 살짝 빨라지면서- 제1곡에서 3곡으로 단번에 '2배속'으로 넘어가면 음악이 이상해지니까 2곡의 연결고리로서의 역할도 강화가 된다. 대신에 이렇게 되면 이번엔 결과적으로 제3곡이 너무 빨라지면서 선율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이 희생되는 문제는 피할 수가 없다. 결국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던 셈인데 슈만의 명예를 위해서 덧붙이자면 이해 연말에 슈만은 같은 작업에, 즉 하나의 악상에서 출발해서 '한 세트'의 유기적인 구성을 이루면서 동시에 개별 곡들이 고유의 성격을 갖고 있는 작품에 재도전해서 이번에는 완벽하게 성공한다- 그것이 바로 슈만이 남긴 가장 시적인 작품들 중 하나인 '오보에를 위한 3개의 로망스(Op. 94)'이다.

 

(ii) 녹음들

   (좋은 녹음들은 대부분 망라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리스트들이 늘 그렇듯 누락이 좀 있다. 우리가 음원을 안 갖고 있어서 커버하지 못한 녹음이 2개가 있는데 첼로는 Daniil Shafran/Felix Gottlieb(1978),  클라리넷은 Karl Leister/Ferenc Bognár(1992)이다. 전자는 Melodiya 음원인데 CD는 한국에 수입이 안 되고 요즘 새로 찍은 고가 LP로 잠깐 보였었고, 후자는 Camerata 레이블인데 역시 한국엔 수입이 안 되었던 것 같다.)

1. Pierre Fournier/Babeth Léonet- 1946

이 곡은 진짜 첼로 대가들의 녹음은 생각보다 적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푸르니에가 2번을 녹음했다. 이것이 첫번째 버전. 이쪽이 소리는 더 풍성한데 모노 시대의 것이고, 아래 스테레오 버전은 소리가 건조해서 일장일단이 있다. 전형적으로 3곡 간의 빠르기 차이를 압축해서 1악장은 악보보다 빠르게, 2/3악장은 상대적으로 템포를 느리게 잡고 슈만의 서정성을 부각시키는, 노래하는데 집중하는 스타일의 연주.

2. Maurice Gendron/Jean Françaix- 1952

거친 소리를 거의 내지 않는 첼로. 현악기는 소리를 모를 너무 둥굴리면 '성형미인' 같은 인공적인 맛이 나는데, 이 사람은 자연스럽게 숨을 쉬면서도 부드럽고 고운 톤을 이어내는 것이 거의 신기에 가깝다. 큰 틀에선 유사하지만 푸르니에보다도 더 슈만의 서정성과 시적인 면을 강조한 연주. 음악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좋지만 감정의 기복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이 곡에선 단점일 수도 있고 특히 3악장은 'mit Feuer'가 너무 자제되었는지 모른다.

3. Pierre Fournier/Jean Fonda- 1967

곡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푸르니에 음악은 노년으로 갈수록 점점 고전적이고 간결해진다. 위 1946년 녹음과 비교하면 3악장은 그대로 두고 1/2악장은 더 빠르게 당겨서 전체적으로 단일한 환상곡의 느낌이 가장 강한 버전. 1악장은 여기 소개된 녹음들 중에서 가장 빠른 템포의 연주인데 중간부 B 후반부에서 다시 A로 이어지는 음악의 흐름도 가장 좋다. 반면 상대적으로 느리게 느껴지는 3악장은 아무나 따라하기 힘든, 품이 높은 'mit Feuer'.

 

4. David Shifrin/Carol Rosenberger- 1984

해석 아이디어는 별로 특별한 게 없지만, 곱고 달콤한 톤은 인상적- 사람마다 목소리가 다 다르지만 청중의 뇌리에 남는 개성있는 음색이 드물 듯이 악기 연주자가 자기만의 개성있는 톤을 낸다는 것도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연습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5. Anatoly Kamyshev/Andrei Gavrilov- 1982

아마도 악보의 빠르기 지시에 가장 근사한-혹은 전부 더 빠른- 녹음. 가브릴로프는 아마도 스튜디오에서 이 작품을 녹음한 피아니스트들 중에 가장 테크닉이 뛰어난 연주자-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은근슬쩍 뭉개고 지나가는 셋잇단음표들을 하나하나 고르고 깨끗하게 소리낸다. (원칙적으로는) 악보에 불필요한 음표란 없기 때문에 가능한 한 악보의 음표들을 최대한 청중에게 들려주는 게 듣기가 좋다. 카미셰프도 들어보면 굉장한 테크니션이고, 해서 3악장은 '우리 러시아의 테크닉을 한번 보여주마' 하는 것처럼 현란한 스피드로 들어오는데 들어보면 노래가 잘 안된다. 빠른 템포라는 게 반대로 음표를 살짝 빼먹더라도 음악적으로 말이 되어야 시도해볼 가치가 있는 것인데, 역시 이 경우는 그런 경우가 아니고 템포를 늦춰서 노래하는 게 음악적으로 이득이라는 게 잠정적인 우리의 결론.

6. Eduard Brunner/Robert Levin- 1995

브루너의 생각은 제3곡이 악보에 지정된 빠르기대로 연주하는 것이 음악적으로 효과적이지 않아서 템포를 늦춰야 한다면 아예 3개 악장 전체를- 한 20%쯤- 늦춰서 슈만이 의도한 악장간 빠르기의 '비례'는 지키자는 것- 한번 시도해 볼 만한, 재미있는 아이디어. 평가는 제1곡에 달렸는데 너무 늘어져서 청승맞다고 느낄 수도 있고 아니면 리히터(Sviatoslav Richter)의 슈베르트(D. 960 소나타의 1악장)처럼 참신하다고 볼 수도 있어 사람에 따라 갈릴 것이다.

7. Gervase de Peyer/Lamar Crowson- 1967

이 클라리넷의 대가도 작년에 세상을 떠나서 이제는 고인이 되었다. 시프린의 톤이 달콤하고 브루너는 가볍고 맑고 마른 쪽이라면, 드 페이어는 밝고 상큼하면서도 촉촉한, 양감이 있는 소리를 내는데 우리 취향으로는 이 작품에는 이 음색이 더 잘 맞지 않나 싶다. 제1곡과 2곡은 대략 악보 템포에 근접하고, 3곡만 살짝 더 늦춰서 노래를 살리는 선택을 한 연주.

8. Reginald Kell/Gerald Moore- 1940

제1곡은 부드럽게 노래하지만 다감하진 않고, 작품 전체적으로 절제되고 단아하게 노래하는 연주. 템포 차이를 많이 줄인 제1곡과 2곡은 다른 클라리넷 주자들보다는 오히려 푸르니에나 장드롱과 보는 관점이 더 비슷한 면이 있다. 제3곡은 상당히 빠르지만 여유를 잃지 않는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중간부 처리도 돋보이는데, 이 B를 '불꽃튀는' 주부 A에 대조되는  '고요하고 서정적이기만한'  부분으로 보는 것은 우리가 보기엔- 이를테면 B의 첫번째 도돌이표가 나오는 부분에서 피아노가 박차를 가하듯, 말발굽을 쳐올리듯 액센트가 들어가는 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슈만의 의도가 아니다. '무드의 전환'은 맞지만 다른 종류의 긴장이지, '긴장의 완화'는 아닌 것.

9. Reginald Kell/Joel Rosen- 1953

10여년이 지난 뒤에 켈은 생각을 달리 해서 제1/3곡은 위 1940년 녹음보다 살짝 늦추고 대신 2곡을 확 당겼다- 즉, 슈만의 의도대로 '차별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2악장 중간부 B의 처리도 재미있는데 대부분 다른 연주자들이 살짝 가속을 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서, 켈은 말하자면 여기를 스케르초의 트리오 같은 성격으로 보아 표나게 감속을 해서 아름답게 노래한다. 제2곡을 1곡보다 상당히 빠르게 해서 대비를 준다면 그 중간부는 이렇게 감속을 해야 고저장단이 맞는 의미가 있어서 이중으로 효과적이다. 전체적으로 '중용지도'를 잘 취한 해석. 켈은 우리가 들어본 중엔 가장 음악성이 탁월한 클라리넷 주자- 평범한 음악가들하고는 아이디어가, 생각하는 차원이 다르다. 피아노의 로젠도 녹음이 많지 않은데 우리가 듣기엔 상당히 음악적인, 감각 있는 반주자여서 종합적으로 여기 소개한 녹음들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버전이다.

 

해석의 삼각형; Fournier1967/Kamyshev/Brunner

  1. 작품번호는 작년에 소개한 '아다지오와 알레그로'(Op. 70; 2.13~17 작곡)이 더 빠르지만 실제 작곡은 이곡(2.12~13)이 살짝 빠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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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녹음들

   이번엔 보다 ‘가혹한’ 기준으로 엄선한 녹음들. 부분적으로 언급할 만한 데가 있는 음반들은 더 있겠지만 과감히 생략했다- 그 기준이 뭐냐고 묻는다면 ‘테크닉’도 ‘학식’도 아니고 오직 ‘음악성’이다.(음원을 안 갖고 있어서 취급하지 못한 녹음들 중에  이 반열에 오를 수 있는 후보라면 우리가 아는 한은 호르쇼프스키(Mieczyslaw Horszowski) 정도밖에 없다. 옛날 VOX 음원인데 90년대 CD 재발매는- 'Vox Box Legends 2CD Set' 시리즈 중에 하나였다- 한국에는 누락이 되고 수입이 안되었고 이후로는 그림도 본 적이 없다.)


1. Annie Fischer- 1978

전체적으로 베토벤 음악 특유의 기세를 살리면서, 흐름(flow)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노래가 되는 기준선에 있는 녹음. 앞에 '여류' 따위 수식어가 필요없는 피아니스트는 클라라 하스킬(Clara Haskil)외엔-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처럼 '힘이 좋다'는 의미에서 '여류'라고 부르기 민망한 경우는 제외한다면- 이 피셔뿐이다. 다만 3악장은 부분부분 노래가 나오는 대목은 있지만 여기 녹음들 중에선 가장 밋밋하고 무거운 연주.

2. Sviatoslav Richter- 1975 live

이것은 말하자면 위 피셔의 '대조군' 격인 녹음. 바깥 악장들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중에서도 리히터가 여기는 '칸타빌레'라고 늦추지 않는 빠른 악구들은- 시원하지만 노래가 잘 되지 않는다.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 빠른 데는 호쾌하게 치고 '감정을 잡으려면' 늦춰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한다면 리히터의 스크리아빈을 들어보라- 거기서는 음악이 빠르거나 느리거나 관계없이 노래가 철철 흘러나온다. 결국 자기하고 코드가 맞는 작곡가가 따로 있다는 것이고 베토벤은 리히터가 완전히 동기화가 되지 않는 작곡가다. 반면 이 녹음의 강점은 3악장에 있다- 느린 템포에서도 마치 펜을 떼지 않고 한번에 도형을 그리는 것처럼 긴 호흡으로 끝까지 긴장을 유지시키는 엄청난 집중력이 리히터의 최대 장점. 이 거대한 아다지오를 지루하지 않게 칠 수 있는 피아니스트는 그렇게 많지가 않다.

(리히터는 1975년 딱 한 시즌만 이 작품을 프로그램에 올렸고, 그 해 라이브 녹음이 3개- 프라하/런던/올드버러(Aldeburgh) 페스티벌- 남아있는데 우리가 사용한 것은 프라하 녹음이다.)

3. Glenn Gould- 1970(CBC radio broadcast)

이것은 말하자면 ‘all-poetry’, 고급스런 베토벤. 1악장 첫 12마디는 여기 소개된 녹음들 중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음악이 진행이 되면 될수록 느껴지는 것은, 이를테면 베토벤의 '영웅주의'- 내지는 굴드의 관점에서 본다면 '소영웅주의'가 되겠다- 역시 베토벤의 일부이고, 이런 부분을 쏙 빼고 베토벤의 시적이고 고귀한 면만 들려주겠다는 것도 결국은 뭔가 불만족스럽다는 것. 어떤 의미에선 아래 소개된 박하우스나 제르킨은 베토벤의 '안 고급스런' 부분도 품이 떨어지지 않게 자연스럽게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베토벤 피아노 음악의 대명사인 것인데 굴드는 성향상 잘 되지 않는다. 역시 아름답지만 기질상 잘 안 맞는 것은 3악장도 마찬가지여서 때로는 '쇼팽스럽기'까지 한 낭만주의는 굴드의 체질이 아닌 탓에 약간 딱딱하게 들린다. 하지만 4악장은 여기 소개된 녹음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최고의 연주- 굴드는 아마도 녹음이 남아있는 역사상 푸가 형식에 가장 정통한 피아니스트이고 이 복잡한 푸가를 가장 명료하게 들려준다. 3개 이상의 성부에서 진행되는 멜로디를 동시에 진행시키면서 어느 한쪽을 희생시키지 않고 강조할 부분을 강조해주는 능력도 타고났지만, 푸가는 언제나 양손이 동시에 노래하고 있지 않으면 이렇게 아름답게 연주할 수가 없다.

4. Arthur Schnabel- 1935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1악장은 베토벤의 '불가능한' 메트로놈 지시에 가장 근접한 녹음. 하지만 슈나벨은 틀린 음표를 치더라도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지금이 가는 길 중간 어디쯤인지도 다 알고 있다- 라이브에서 빨리 치다가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음악의 극적인 구조와 균형이 무너져내리면서 삼천포로 빠지는 햇병아리 피아니스트가 아니라는 얘기. 자꾸 틀린 음표를 누르는 것이 전부 다 들려서, 귀에 너무 거슬려서 이 녹음을 못 듣겠다면- 우리 귀에는 큰 '삑사리'들 말고는 잘 안 들린다- 문자 그대로 '아는 게 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3악장은 꿈결같고 환상적인 연주, 이것은 거의 슈만의 세계다. 이 음악을 해석하는 한 전형을 제시해주는 녹음이고 우리가 아는 피아니스트 중에는 이 음악을 이만큼 환상적으로 칠 수 있는 사람은 알프레드 코르토(Alfred Cortot) 뿐이다- 그리고 코르토는 이 곡을 녹음하지 않았다. 4악장은 1악장과 비슷한 논평을 할 수 있는데, 곧 본인의 테크닉으로 감당이 어려운 속도지만 대신 음악적으로 충분한 보상이 있는 선택이라는 것. 슈나벨이 아니었다면 우리도 전문가들의 말을, 이 곡을 베토벤이 지정한 템포로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그대로 믿었을지 모른다. 단순히 메트로놈만 근접한 게 아니라 우리의 견해로는 베토벤의 의도, 이상을 가장 가깝게 표현하고 있는 녹음.

5. Wilhelm Kempff- 1965

보기 드문 베토벤 스페셜리스트. 사실 작곡가마다 개성이 다 다르기 때문에 대작곡가의 음악을 잘한다고 해서 그보다 못한 다른 작곡가의 음악도 저절로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대개는 베토벤의 대가면 슈베르트나 브람스, 혹은 위로 거슬러 올라가서 하이든이라든지 뭔가 똑같이 S급인 레퍼토리가 있기 마련인데 켐프의 경우는 베토벤 이외에는 딱히 같은 레벨에 있는 것이 없다. 여튼 베토벤만큼은 초일류- 거의 본능적으로 베토벤의 시를 이해하는 것 같이 들린다. 박하우스의 테크닉이나 제르킨의 리듬감각은 안 갖고 있기 때문에 이 곡처럼 부담스러운, 스케일이 큰 대곡에는 상대적으로 비교우위가 없지만 여기저기 도처에서 아름다운 구절을 많이 들을 수 있다.

6. Wilhelm Backhaus- 1952

1악장 첫머리 a는 역시 장대하게 시작하는 것이 좋다는 선택인데, 곧 b 후반부에서부터 살짝 가속을 시작해서 c는 '건반위의 사자'라는  별명답게 폭풍처럼 몰아치는, 우리가 들은 중에 가장 짜릿한 쾌감을 주는 처리- 이렇게 첫 세 구절에서 바로 볼 수 있듯이 구절마다 효과를 극대화하는, 푸르트벵글러를 연상시키는 교묘한 템포조절이 특징이다. 3악장은 감정의 과잉이 없는 절제된 스타일로 가장 잘된 연주- 비유하자면, 슈나벨의 3악장이 슈만이라면 박하우스는 브람스다. 고음에서 특유의 맑은 톤이 울릴 때의 그 짜릿한 아름다움은 한번 들으면 잘 잊혀지지 않는다. 4악장이 상대적으로 빠르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약간의 '트릭'이 있는데, 서주를- 라르고(Largo)가 아니라 거의 비바체(Vivace) 이상의 비례로- 굉장히 간결하게 당겨서 치고 주부는 1악장과 비례가 잘 맞춰져 있는 것. 원래 '무드 잡는 것'을 싫어하는 게 박하우스 스타일이기도 하고 과하게 템포를 당기지 않으면서도 비슷한 극적인 효과를 주는 노련함이라고 볼 수도 있다.

7. Rudolf Serkin- 1969~70

제르킨 베토벤의 최대 장점 중 하나는 탁월한 리듬감각과 셈여림의 조절(dynamics)이다- 토스카니니가 베토벤 교향곡 리듬의 교과서라면 제르킨은 피아노 음악 리듬의 교과서 격. 예를 들어 어떤 의미에선 베토벤의 스포르찬도(Sforzando)를 제대로 치는 건 제르킨뿐이다- 'Sfz'가 붙은 음표의 탄력도 탄력이지만 'Sfz'와 'Sfz' 사이의, 곧 강박과 강박 사이의 약박의 탄력과 그 대비는 다른 사람이 따라하기 힘들다. 악보에 더 표시할 수도 없고 어떻게 계량할 수도 없는 미세한 차이인데 우리의 추측으론 아마도 리듬감각이란 지문처럼 타고나는 것이리라는 것. 1악장은 여기 소개된 녹음들 중에서는 굴드 다음으로 느린 템포지만 기세나 흐름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템포를 당기거나 늦춰도 리듬이 무너지지 않으면- 예전에도 한번 같은 비유를 한 적이 있지만 '해상도'가 높아서 이미지를 확대해도 '깨짐'이 없으면- 무방한 것이고 상기 리듬감각이 말을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3악장은 제르킨 특유의 불꽃 튀는 연주- 베토벤의 지시어 ‘appasionato e con molto sentimento(열정적으로, 많은 감정을 넣어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는 스타일이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 열정을 내면화해야 한다고 판단하는데 들어보면 첫머리는 확실히 내성적(introspective)으로 시작하는 게 보다 그럴 듯 하지만 발전부에서 타오르기 시작해서 재현부에서 작렬하는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내는 데는 단연 이쪽이 효과적이다. 사실 이 3악장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감정은 적어도 슈나벨/박하우스/제르킨의 3가지 서로 다른 버전을 들어야 다소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세계. 다만 마지막 4악장은 아마도 이번엔 또 ‘risoluto(단호하게, 혹은 결연하게)’를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제르킨답지 않게 리듬이 약간 딱딱한 것이 단점. 이 음악은 리듬이 좀 탄력이 있어야 하는 음악이기 때문에 아쉽다(보다 탄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단단한 연주는 상기 굴드 녹음에서 들을 수 있다).


***


    이외에 녹음을 아예 남길 수 없었거나 사정상 남기지 못했지만 궁금한 피아니스트라면 단연 리스트(Franz Liszt)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박하우스의 스승이면서 19c 말~20c 초에 걸쳐서 베토벤 피아노 음악의 최고 권위자였던 오이겐 달베르트(Eugen d'Albert), 슈나벨이- 물론 자기 빼고 그 다음으로- 최고의 베토벤이라고 칭찬했다는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위에도 언급했던 최고의 낭만파 피아니스트 코르토(Alfred Cortot), 어쩌면 인간에게 불가능한 '완벽'이라는 단어에 가장 근접했던 리파티(Dinu Lipatti)... 그래도 우리는 아마도 우리에게 남겨지지 않은 것들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지금 갖고 있는 유산에 감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연주가/해석가들의 도움 없이 베토벤의 전기자료와 악보만 갖고 베토벤의 위대함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선호도; Schnabel>=Serkin=Backhaus>=Gould>Kempff>Fischer=Richter

해석의 삼각형; Schnabel/Gould/Richter


Posted by 이현욱
:
(i) 작품개요(~계속)
- 3악장;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들 중에서 가장 연주시간이 긴, 역시나 스케일이 큰 악장. 형식은 1악장에 이어 다시 한번 소나타형식이니까 내용이 주로 문제가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이 악장에는 형식/내용이 얽힌 문제가 있다.

   우선 음악의 내용적인 측면을 먼저 살펴보면 이 3악장은 종종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의 '시원' 내지는 '발원지' 비슷한 무엇으로까지도 언급되는 악장이다(이럴 때는 보통 작곡기법적인 문제, 이를테면 재현부의 연속 32분음표 장식음군(figurations)과 같이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 들어보면 정서적/감정적으로 확연히 낭만적이어서 고전파 음악에 정통하지 않은, 낭만주의가 장기인 피아니스트들도 이 3악장 만큼은 들을 만하게 치는 경우가 더러 있고 반대로 낭만주의까지 레퍼토리가 확장이 안 되는 경우는 유독 3악장만 연주가 조금 못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기법적인 문제를 넘어서) 낭만주의를 보다 폭넓게 볼 땐 물론 선행하는 사례들이 있다.
   베토벤 피아노 음악에선 이미 1816년의 28번 A major 소나타(Op. 101)부터 정서상 확연히 낭만적인데, 28번과 이 3악장의 낭만주의 사이엔 약간 미묘한 유형의 차이가 존재한다. 즉, 28번의 경우가 주관적인 느낌과 '무드(mood)'를 표현한다는 측면의 낭만주의라면 이것은 같은 주관적인 감정 표현이라도 시점이 달라져 있는 있는 음악- 비유하자면 3인칭 시점이 아니라 1인칭 시점이고, 같은 1인칭 시점이라도 독자/청중을 향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말하는, '내적 독백(interior monologue)'이다. 음악을 문학이나 문학 용어에 비유하는 것은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가 더 쉽기 때문에 바람하지 않지만- 이를테면 이게 무슨 제임스 조이스식 ‘의식의 흐름’의 음악 버전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큰일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경우는 우리는 달리 더 좋은 비유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여튼 내용 자체가 까다로운 음악이고 반대로 어떤 의미에선 베토벤의 동시대인들보다 평균적으로 자의식이 더 날카로와진 현대인들의 정신세계에 더 가까운, 시대를 앞서간 음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미묘한 '시점 이동'은 이후 베토벤의 후기 음악을 관통하는 것인데 그 기원은 1815년의 첼로 소나타 5번의 2악장이다. 베토벤을 어디까지 고전주의고 어디까지 낭만주의라고, 또 소위 베토벤의 '후기'가 언제부터 시작이라고 칼로 무 자르듯이 나누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대략 1814~16년 사이가 의미있는 과도기이고 뒷 세대의 낭만주의를 보다 확실하게 선견하는 음악을 쓰기 시작하는 시기라고 보면 큰 무리는 없다. 특히 1815년의 두 개의 첼로소나타(Op. 102의 1/2번)는 각각 막 언급한 피아노 소나타 28번과 1817~18년의 이 29번의 '프로토타입'에 해당한다. 나중에 첼로소나타 전곡을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그때 더 자세히 논하기로 하겠다.)
   한데 본격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피아노 음악에는 소나타 형식이 많이 쓰이지 않는다. 그들이 보다 자유로운 형식을 많이 취하는 이유는 베토벤보다 작곡의 '스킬'이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심지어 브람스조차도 베토벤은 고사하고 모차르트가 '주피터' 교향곡이나 마지막 피아노협주곡(27번) 1악장에서 보여준 만큼의 솜씨로 소나타 형식을 다루진 못한다- 꽉 짜인 형식은 자신들의 음악의 내용/정서와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소나타 형식은 감정을 극적인 구조(dramatic structure)를 가지고 기술/표현하는데 적합한- 베토벤이 특히 잘 활용한 점이기도 하다- 형식이다. 28번 소나타까지는 '간결한 환상곡풍의 소나타 형식' 정도로 정리가 될 수 있지만 이런 ‘내적 독백’엔 그렇게 잘 맞는다고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여기가 바로 내용과 형식이 얽혀서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통상적인 소나타 형식이란 내용적으로 제1주제/제2주제/코데타가 ‘직렬’로 연결된 한 도막이다. 부주제가 아무리 많이 붙더라도, 경과구가 아무리 길더라도 마찬가지이고 1부의 서로 다른 에피소드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 3악장의 소위 ‘제시부’는 대략 a(제1주제)a1-b(경과부)-c(제2주제)의 구조인데, a-b-c가 ‘병렬’로 연결되어 있다- 제시부 안에서도 이미 서로 어느 정도 독립적인 스토리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말이다. 즉, 모양은 소나타 형식이되 속은 이미 변질되어 있고 음악을 많이 들은 사람들도 재현부를 다 듣기 전까진 이게 '이중 변주곡(double variation)'이 변형된 형태이거나 '자유로운 3부 형식'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착오(내지는 미련)을 벗어나기가 힘들다. 베토벤이 이 거대한 악장이 지루하지 않게끔 단순한 반복을 피해서 제시부에서 발전부, 발전부에서 재현부로 넘어가는 연결도 굉장히 유연하고 특히 후자는 오른손에 붙는 심도 있는 장식음으로 변화를 많이 줬기 때문에 무척 재미있지만, 이미 제시부의 긴 경과부 'b'가 다시 재현되는 대목에 이르면 이게 음악의 내용 전개상 꼭 반복이 되어야만 하는 건지 약간 의문이 들고 코다에서 제2주제/1주제 악상들이 다시 들어오는 처리까지 다 듣고 보면 결국은 중복이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처음 구상할 때부터 소나타 형식을 고집하지 않고, 이를테면 그냥 '자유로운 3부형식' 정도로 처리를 했으면 음악의 내용에 더 적합하고 매끄럽지 않았을까?

   베토벤의 음악에 이렇게 내용과 형식이 서로 잘 안 맞는다는가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우리도 잘 모른다. 단지 2가지 요인을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첫째는 베토벤의 '실험정신'이다. 글 첫머리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작품은 피아노라는 악기와 피아노 소나타라는 장르의 한계에 도전하는 작품이다. 첫 악장은 규모가 확장된 소나타 형식이고, 마지막 악장은 그에 맞춰서 참신한 시도로 장대한 푸가를 넣는다. 그럼 중간의 느린 악장은? 베토벤은 첫 악장의 소나타 형식은 이미 '에로이카'에서 완성했지만 이 곡 이전에 느린 악장의 소나타 형식으로 좀 규모가 큰 것은 '전원'교향곡의 2악장과 '라주모프스키' 현악사중주(Op. 59-1~3) 1번의 2악장/3번의 3악장들 정도이고 모두 이 곡을 쓰기 근 10년전의 작업들이다. 즉, 늘 도전정신이 충만한 베토벤은 이번엔 느린 악장에서 소나타 형식을 확장하고 변형해서 바깥악장에 걸맞는 대형 악장으로 써보겠다고 마음먹었고 이 3악장은 그 결과물이라는 것. 둘째는 베토벤 본인이 뭔가 새로운 음악을 쓰고 있다는 걸 잘 의식하지 못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상기한 '시점의 차이' 같은 것은 내용적으로 미묘한 부분이다. 베토벤이 스스로 '내가 한 1815년부터 낭만주의 음악을 작곡했지'라고 생각했을 리도 만무하다. 자기가 계속 변하고 있다는 것, 작품마다 표현하는 감정과 내용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은 물론 알았겠지만 어느 순간 종류가, 심지어 '이즘(-ism)'이 달라지는 뭔가를 하고 있었다는 점은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즉, 자기가 상기 '라주모프스키' 2번 2악장보다 '성숙한' 음악을 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범주'가 다른 뭔가를 쓰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나타 형식의 확장으로 충분히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곡 이후 베토벤의 대작들(최후의 피아노 소나타 3개라든지, 후기 현악사중주나 '합창'교향곡들)의 느린 악장엔 (자유로운) 변주곡 형식을 많이 쓰고 소나타 형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본인도 애초의 기획대로 작품은 완성했고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지만, '이건 한번이면 됐다'고 생각했다는 간접증거일 수 있을까?


- 4악장; 역시나 기교적으로 어렵다- 리듬감을 살려서 깨끗하게 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처럼 들리는 것이, 치는 사람은 열심히 쳐도 듣는 사람 귀에는 뭔가 거슬리기 쉬운, 그런 까다로움이 있다. 해석적으로는 1악장과의 템포 밸런스가 지적해둘만한 점인데 요는 이 4악장을 몰아치는 강렬한 피날레로 만들고 싶다면 1악장은 상대적으로 더 빨리 쳐야 한다는 것이다. 1/3악장을 한껏 느리고 장엄하게 부풀려놓고 4악장을 빠르고 화려하게 몰아치면 이 거대한 곡 전체의 구조가 한쪽으로 기울면서 무너져내린다. 4악장은 1악장보다 같거나 느리게 칠 수는 있어도, 빠르게 치는 것은 베토벤의 의도가 아니라는 게 우리의 견해.
   형식적으로는 앞에 짧은 서주가 달려 있는 자유로운 푸가 형식인데, 라르고로 시작하는 환상곡풍의 짧은 서주는 토카타라고 부를 수도 있는 대목도 있어 복고풍 내지는- 즉, 바하의 'Toccata(or Fantasia) and Fugue'를 연상시키는- 의고풍으로 맞춘 것이 재미있는 점. 주부 알레그로는 대략 6개의 푸가가 사이에 연결부와 별도 주제의 전개를 끼고 사슬처럼 엮여서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베토벤은 내용적으로는 교묘하게 소나타 형식의 극적인 구조를 결합시켜 놓았다. 사실 감상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3성 이상의 푸가가 3분을 넘어가면 웬만한 사람한테도 헤어나기 힘든 '미로'- 대부분 처음에 주제를 좀 쫓아가다가 길을 잃기 십상이다. 이런 경우엔 '각개격파(divide & conquer)'가 그나마 이해하기에 쉬운 방법. 우리가 제시하는 최선은 내용상 크게 세 도막으로- 공교롭게도 한 도막에 푸가 2개씩이다- 나눠서 들어보라는 것이다.
제1부: 제1푸가는 일단 3개 성부에 한번씩 주제가 나타난다. 제2푸가는 주제가 2번 들어오고 나서 새로운 주제가 나타나는데 마치 소나타 형식에서 코데타를 이끄는 주제와 비슷한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주제로 '세미클라이맥스(semiclimax)'를 한번 만드는 데까지가 내용적으로 한 도막을 이룬다고 보자는 것.
② 제2부: 상기 '유사 코데타' 주제가 다시 한번 전개되면서 자연스럽게 제3푸가로 이어진다. 제3푸가는 제1푸가 주제의 '역행(retrograde; 다른 이름으로는 'cancrizans'라는 용어도 쓴다)'. 역행이라 함은 문자 그대로 '도레미파솔'은 '솔파미레도'로, 계명을 거꾸로 뒤집는 것. 처음 듣는 사람은 이게 장난이지 무슨 음악이 되겠느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된다- 실은 될 뿐 아니라 이 악장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 중에 하나. 마무리되면 다시 베이스에서 주제가 한번, 마치 제2푸가에서 빼먹은 한번을 채우듯이- 물론 굳이 이렇게 연관짓지 않고, 푸가 용어로 그냥 통상적인 주제의 '재입장(middle-entry)'으로 볼 수 있다- 들어온 다음에 제4푸가는 주제의 전회(inversion)로 만든다. '전회'란 말하자면 옥타브를 타고 올라가는, 상승하는 음형이었으면 반대로 하강을 시키는 것. '도-미-솔'로 올라갔으면 '도-라-파~' 방향으로 내려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3성부가 차례로 돌아간 다음에 두번째 세미클라이맥스를 이루는 데까지가 내용적으로 두번째 도막.
③ 제3부: 이제 음악이 고요해지면서 다시 새로운 부주제가- 엄밀히 말하면 주제에서 파생된 것이다- 들어온다. 제5푸가는 이 새 주제와 원래 주제의 단축형으로 전개하는 2중푸가이고, 제6푸가는 원래 주제와 제4푸가 주제, 곧 주제의 전회 혹은 자리바꿈형의 이중푸가인데 제2푸가에서처럼 2번만 돌아가고, 간주가 진행이 되다가 제1부에서처럼 고음부(tenor)에 주제가 들어오는 것이 '마무리신호'- 저음부(base)에 주제, 그 위에 전회된 주제로 '3번째'를 채운 다음에 주제로 3성 스트레토(stretto)가 작렬하면서 코다로 이어져서 마무리된다.
   위에서도 한번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렇게 세 도막으로 딱 끊어지는 구조가 아니라서 경계선에서 애매한 부분이 발생한다- 하나 이것이 이 악장의 극적인(dramatic) 구조를, 내용적인 큰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설명이다.


***

   이 곡이 완성된지 대략 60년 후인 1878년에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Human, All Too Human)’에서 '운명의 장난'으로 그냥 미완성작으로 남겨진 대가의 걸작들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이 작품을 베토벤이 남긴 ‘교향곡의 불완전한 피아노 축소판'의 한 사례로 언급한 적이 있다(니체는 음악을 굉장히 좋아했지만 베토벤을 아주 잘 알진 못했던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어쩌면 달리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바인가르트너(Felix Weingartner)가 관현악 버전을 만들기도 했지만 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음악은- 아무리 발상이나 스타일이 교향악적이라고 하더라도- 오로지 피아노를, 건반악기를 위한 음악이고, 만약에 피아노로 할 수 없다면 그 어떤 형태로든 완벽하게 연주될 수 없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이현욱
:

Beethoven piano sonata No. 29 in B flat Major, Op. 106 “Hammerklavier”

 

 

I. Allegro

II. Scherzo. Assai vivace- Presto- Prestissimo- Tempo I

III. Adagio sostenuto. Appassionato e con molto sentimento

IV. Largo(-Un poco piu vivace- Tempo I- Allegro- Tempo I- Prestissimo)- Allegro risoluto


(i) 작품개요
   이 곡은 어쩌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중 '최후이자 최고의' 작품이 될 수도 있었던 작품이다.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는 단지 베토벤이 죽기 전에 3개의 소나타를(Op. 109~111) 더 쓰고 죽었기 때문인 바, 그 결과 대작곡가의 ‘마지막 소나타’라는 후광 효과가 사라졌을 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꼭 최고라고 말하기는 논쟁의 여지가 있게 되었다. 여튼 일이 그렇게 된 것이 이 소나타의 책임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함머클라비어'가 마치 '에로이카'가 그전까지의 교향곡의 한계에 도전한 작품인 것처럼 피아노 소나타 내지는 피아노 자체의 한계에 도전한 작품이라는 것과, 그래서 베토벤과 피아노 음악 모두에 중요한 이정표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 1악장은 소나타형식. 교향곡까지 감안한다면 베토벤의 소나타 형식으로 가장 크거나 복잡한 악장은 아니지만 피아노 소나타들 중에서는 최대규모(사실 이 곡 전체가 베토벤의 전 32곡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최대작'이라는 타이틀은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악상 자체가 규모 혹은 볼륨감이 있어서 제1주제는 첫머리부터 피아노를 아무리 '내리 찍어도' 부족할 것 같은, 뭔가 버거운 듯한 느낌- 사실 '함머클라비어(hammerklavier)’는 단지 ‘포르테피아노(fortepiano)’를 의미하는 독일어이고 베토벤이 이미 소나타 28번(Op. 101)에도 사용했던 단어이지만 ‘해머’라는 단어의 어감, 즉 큰 쇠망치로 내려치는 듯한 그런 종류의 연상은 우리가 느끼는 것이나 유럽인들이 느끼는 것이나 비슷한 모양이어서 현재는 이 작품의 별명으로만 되어 있다.
   곡의 구조는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으로 맞춰넣는데 무리가 없는데 내용상은 시작하자마자 a-b-c로 짧게 세가지 악상이 이어지면서 마치 제1주제-제2주제-코데타를 단숨에 들려주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게 특색. 폭풍같은 c가 끝난 다음에 a가 다시 들어오면서 전개가 되고, 정식 제2주제가- 사실 b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구석이 있다- 나타나면서 이후는 정상적으로 코데타까지 간 다음에 제시부 전체를 한번 반복하게 된다. 제시부가 이와 같이 길고 악상이 다양하기 때문에 (특히 라이브에서는) 반복을 지켜주는 것이 좋다. 발전부가 상대적으로 간단하지만- 이 1악장이 제시부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 규모가 작아진 이유이기도 하다- 4악장에 상응하는 제1주제의 푸가토(fugato) 처리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도 '장대함'을 강조하려고 하면 리듬이 '절뚝거리는 것 같이' 들린다는 점이 유의할 점. 이 음악이 처음부터 장대한(grand, magnificent) 음악이 아니라고 본다면 문제될 것이 없겠고, 제시부는 혹 그렇게 봐도 무방하겠지만 발전부에 오면 음악의 성격이 내용적으로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이 악장의 해석에 있어서 가장 논할 것이 많은 부분은 '템포'이다. 흥미롭게도 이 곡은 베토벤의 32개 피아노 소나타들 중에서 유일하게 '알레그로' 같은 빠르기말뿐 아니라 작곡가의 메트로놈 속도 지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럼 베토벤이 지정한 그대로 치면 될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서 상당히 긴 논증을 필요로 한다.
   일단 먼저- 예전에도 한번 적었던 것 같지만- 우리의 템포에 관한 '일반 이론'은 '절대 템포'란 없다는 것이다.[각주:1] 템포란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다. 어떤 연주가 너무 느리게 혹은 너무 빠르게 들린다? '무엇'에 비해서? 그 기준이란 결국 우리의 머리속에 들어 있는- 때로는 제일 처음 들어서, 때로는 가장 많이 들어서 귀에 익은- 특정 연주의 빠르기일 뿐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어떤 곡을 통상적으로 연주하는 극단적이지 않은 평균 템포가 존재하지 않겠는가? 그것도 부분적으로는 올바른 관찰인데, 문제는 지금은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는 그 '평균' 템포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서 바뀐다는 것이다(그리고 공교롭게도 베토벤 시대 이후엔 한동안 계속 느려지는 방향이 대세였다는 것을 여기서 기억해두면 좋다.). 지금 시대의 평균 템포가 지난 시대의- 혹은 앞으로 올 시대의- 것보다 낫다거나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물론 없다. 그럼 악보에 적혀있는 템포란 아무 의미도 없는가? 있다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일단 기본적으로 작곡가가 악보에 지정한 모든 것은 해석의 출발점이 된다- 즉, '작곡가의 의도'를 추정하는 단서라는 말이다. 그 다음엔 각자의 음악적 판단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이 곡도 이 일반론에서 벗어나는 특수한 경우는 아니어서 상당히 넓은 폭의 템포 차이를 갖는 연주들이- 아래 (ii) 녹음들에서 볼 수 있듯이- 다 들을만 하고 음악적으로 말이 된다.
   그럼 도대체 뭐가- 아직도- 문제란 말인가? 그것은 얄궂게도- 즉, 베토벤이 지정한 템포로 그냥 연주하면 되기는 커녕- 작곡가 자신이 지정한 템포(2분음표= 138)로는 '연주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있기- 한때는 거의 전문가들의 통설이었고 지금도 '다수설' 정도는 되지 않나 싶다- 때문이다. 이 설은 19c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거의 추리소설을 방불케 하는-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괴도 토벤' 주인공의 '138의 비밀' 정도 되겠다- 흥미로운 역사를 갖고  있는데 한동안은 체르니(C. Czerny)가 '용의자'였고- 곧 문제의 숫자가 베토벤의 것이 아니라 체르니의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것은 암묵적으로 체르니는 제대로 된 음악가가 아니고 그냥 '핫바지'였다고 상정하는 것이 된다- 문헌상의 증거로 베토벤의 지시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된 다음에도 빠르기가 틀렸다,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사실 일반적으로 베토벤이 남긴 메트로놈 빠르기들의 정확성을 의심하는 이론이 많은데- 이쪽은 거의 용의자가 칠팔명 넘게 등장하는 '메트로놈 실종사건' 수준이다- 이 곡의 경우에는 제자 리스(Ferdinand Ries) 앞으로 메트로놈이 고장이 나서 정확한 빠르기 수치를 보내줄 수 없다는 내용의 편지가 있어서 메트로놈을 원인으로 지목하긴 어렵다- 메트로놈이 고장나서 빠르기를 못 보내고 있었다니, 응당 메트로놈이 수리가 되거나 새 것을 구입하자마자 지정하지 않았겠는가?(이 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베토벤의 메트로놈이 실제로- 혹은 더 바람직하게는 종종- 고장이 났었다는 증거로 해석하고 싶어하는데, 실상 더 중요한 점은 베토벤이 '메트로놈은 고장이 나는 기계'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외에도 베토벤 시대엔 메트로놈 자체가 부정확했다, 혹은 베토벤이 메트로놈의 빠르기 수치를 박자단위에 따라 바꾸는 환산을 하다가 계산착오를 했다, 아니다, 착오는 베토벤을 돕던 어린 조카 칼이 했다, 등등 많지만 상술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결론만 간단히 언급하자면, 이런 설들이 모두 처음부터 템포가 잘못되었다는 전제하에 만들어낸 설명으로는 그럴 듯 하지만 중립적인 입장에서, 곧 템포가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전제하에서 받아들이기엔 '소설'의 수준을 많이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보다 음악적인 반론은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에게서- 물론 동시에 '체르니 용의자설'을 유포하기도 했다- 나왔는데, 폰 뷜로는 베토벤/체르니 시대 피아노의 '부족한 울림(lack of sonority)'를 한가지 원인으로 봤다. 즉, 이 곡을 이후에 나온 그랜드 피아노로 이렇게 빨리 치면 소리가 왕왕 울리면서 겹쳐서 명료하지 않게(blurring) 들린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베토벤 시대의 악기/콘서트홀의 음향조건과 지금의 조건을 비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제한적인) 타당성을 갖는 접근법이다. 문제는 이 경우는 음악적으로 이게 정답인지 확실치가 않다는 것이다. 왜냐면 '주선율'만 듣지 않고 '화음'을 듣는다면 적어도 우리 귀엔 첫머리의 이 코드들은- 폰 뷜로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마치 여러 개의 종이 조금씩 시차를 두고 한꺼번에 겹쳐서 울리듯, 그렇게 울리라고 쓴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제1주제의 코드들은 단순히 '선율을 받치는' 식으로 쓰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이 모든 것들이,'용의자'들이 난무하는 설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가끔 전문가들이 집단적으로 '현실 부정'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가 그 사례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의 근본 원인은 이 속도, 2분음표= 138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정말 문자 그대로 '초인적인' 테크닉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너무 빨라보이니까- 그리고 자기들은 그렇게 칠 수 없으니까- 숫자가 틀렸다, 숫자에 책임을 돌리고 여러가지 구구한 이유를 찾고, 또 거기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내가 쳐봤더니 제대로 못 치겠다고 해서 숫자가 틀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지금까지 나온 어떤 피아니스트도 제대로 연주할 수 없었다고 해도 논리적으로 오류인 것은 마찬가지다. 알프레드 브렌델(Alfred Brendel)은 소시적에 '악마라고 할지라도' 그 빠르기로는 못칠 거라고 떠벌렸다지만- 진짜 악마가 들었으면 괘씸해서 잡아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악마도 못 친다고 치고) '피아노의 신'을 누가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베토벤이 지정한 빠르기에 거의 근접한 템포로 연주한 실증 사례가 존재한다. 아래 (ii) 녹음들  4. 슈나벨(Arthur Schnabel)의 1935년 녹음이 그것이다. 이 슈나벨 버전을 '성공한 사례'라고 볼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는데 우리의 견해로는 음악적인 면에서는 완벽하게 말이 된다는 데 논쟁의 여지가 없다. 이 슈나벨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취향의 문제'라는 변명은 가능하겠으나 단순히 어떤 연주가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려서 싫다는 것은 어리석고 비논리적인 선입견에 불과하다- 이미 위에서 '절대 템포'란 없다고 충분히 설명했다. '절대 템포'가 없다는 말은, 곧 '절대로 안되는 템포'도 없다는 말이다. 단지 귀에 낯설게 들릴 뿐인 것이고 편견을 버리고 들으면- 들을 귀 있는 자에게는- '노래'가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실패 사례'라고 주장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데 상기 슈나벨 버전은 듣기에 따라서는 전형적으로 '틀린 음표를 짚거나 음표를 빼먹는 옛날 녹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슈가 '연주불가능성'이니 차라리 2분음표= 138이라는 숫자가 틀렸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볼 수 있지 않는가? 그럴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음악적으로 말이 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보기보다 중요한 것이다. 테크닉은 정 안 되면 나중에 AI(인공지능)에 '로봇팔'을 붙여서라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음악적으로 말이 되지 않으면, 곧 그 템포에서 제대로 노래할 수가 없다면 애초에 그런 빠르기로 연주하는 의미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좀 황당하다, 혹은  너무 먼 얘기라고 생각한다면 아래와 같은 간단한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을 해보면 동시에 베토벤 당시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슈나벨은 테크닉으로 한몫 보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다. 폴리니(Maurizio Pollini)라면 같은 빠르기에서 완벽하게는 못 치더라도 적어도 슈나벨보다는 훨씬 더 정확하게 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폴리니에게 부족한 것은 테크닉이라기보담 이 빠르기에서 노래할 수 있는 음악성이다. 그렇다면 슈나벨의 음악성과 폴리니의 테크닉을 동시에 가진 피아니스트라면 의심할 여지 없이 슈나벨을 뛰어넘는, 아마도 지금까지 녹음된 어떤 버전도 뛰어넘는 연주가 가능할 것이다. '로봇팔'이 없이도 베토벤의 의도에 인간의 능력 범위 안에서 좀 더 접근해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빙긋이 웃음을 짓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또한- 우리 생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아마도 더 먼 미래에도- 실제로 이런 피아니스트가 태어나리라는 데에는 회의적이다. 그 이유는 물론 어느 한쪽만도 쉽게 태어나는 재능은 아니라는 것도 있고 테크닉과 음악성이 이렇게 완전히 별개로 잘라서 더해질 수 있는 것이라는 관점 자체가 오류라는 것도 있지만, 더 큰 것은 '서양고전음악'이라는 장르 자체가 이미 절정기를 지났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예술 장르도 사람에게 생로병사가 있듯이 태어났다 전성기를 지나서 점차 소멸하는 운명을 벗어나진 못한다. 천재들은 절정기에 몰려서 나타나고 곧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면서 뜸해지다가 결국은 완전히 사라져서 찾아보기 힘들게 된다. 하지만 베토벤은 자기 장르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는 와중에 살았던- 어쩌면 본인의 손으로 정점을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실제로 이후 베토벤보다 더 위대한 작곡가는 나오지 않았지만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도 연주 기술도 분명 베토벤 시대보다 진보가 있었다. 그러니 베토벤이 말하자면 이 '추세선'을- 나중에 실제로 일어난 것보다 더- 위로 연장해서, 한 50년이나 백년쯤 지나면 이 음악을 자기가 바라는 대로 완벽하게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상정했다고 한들 그게 그렇게 무리한, '황당무계'한 가정이었을까? 베토벤이 머리속에 설정한 이상적인 템포가 2분음표= 138이 맞다는 사실에 대해선 이제 더 이견이 없을 것으로 우리는 생각한다.


   위에서 템포에 관한 일반론을 이야기할 때도 잠시 언급했지만 물론 '숫자가 틀렸다'에 집착하지 않아도 음악적으로 다른 해석의 여지는 여전히- 그리고 폭넓게- 남아 있다. 이를테면 상기 폰 뷜로의 경우에도 사실 음향(acoustic)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고 너무 빠른 템포는 감정적/내용적으로 첫머리 제1주제의 '묵직한 에너지(ponderous energy)'를 표현하는데 적합치 않다는 것이 우리가 이해하기엔 반론의 핵심이다. 이후에도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에 동의했고 이것은 일리가 있다. 일반적으로 대작곡가의 작품일수록 그렇지만, 베토벤의 경우에도 한 사람이 한번에 다 표현하기 힘든 복합적이고 때로는 서로 상충하는 듯 보이는 면을- 시와 강력한 파워, 생동하는 기세와 영웅적인 장대함- 동시에 갖고 있어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그리고 템포는 그 다양성을 표현하는 주된 수단 중에 하나가 된다.). '작곡가의 의도'는 해석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귀착점이지만 그 사이가 '일직선'이라는 뜻은 아니다. 중간에 여러 다양한 경로가 있고 그 길을 더듬어 찾아가는 것이 바로 연주가 혹은 '해석가(interpreter)'의 몫이다. 그러나 음악적 판단으로 '2분음표= 92'를 선택한다는 것과- 전혀 '반역사적'이지도, 미학적으로 잘못된 판단인 것도 아니다- '2분음표= 138'은 틀렸다, 그냥 '베토벤의 실수다'라고 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비유하자면 '해석가'란 작곡가의 '사냥개'와 비슷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냥터에서 '목줄'이 안 매여있다고 해서- 이를테면 '악마'를 운운하면서- 아무리 세상 모르고 날뛰어봤자 사냥감을 물고 나서는 주인에게로 돌아가야만 하는 존재인 것- 결국 언제나 '주인(master)'은 베토벤이다.


- 2악장; 가운데 트리오(Trio)를 낀 ABA 형태의 통상적인 스케르초로 볼 수 있지만 트리오가 2단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 곧, 한발을 묶고 뛰듯이 살짝 엇박자로 진행하는 스케르초 주부의 리듬을 보상하는 듯한, 질주하는 섹션이 끼워넣어져 있다. 이 음악이 절대적으로 쉬운 건 아니지만 나머지 3개 악장이 워낙 중압감이 크다 보니 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상대적으로 '쉬어가는 페이지'처럼 여겨진다. 아마도 베토벤 역시 1/3악장 사이에서 뭔가 한번 숨을 고를 필요성이 있다는 의도가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 2악장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로는 18번(Op. 31-3) 이후 처음 등장하는 스케르초(인 동시에 '마지막’이라고 하지만 실상 그 정신은 30/31번의  ‘초간결 소나타 형식’의 2악장들과 공유하는 바가 있다).


To be continued...


  1. 물론 가끔 있어 보이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테면 모차르트 g minor 교향곡(40번)의 2악장 안단테는 음악적으로 일정 속도 이상 빨리 연주하면 안될 것 같이 들린다- 예술에 '절대적 법칙'이란 없는 법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이현욱
:

Schumann "Adagio und Allegro" for horn(ad libit. violin or cello) and piano, Op. 70


: Langsam, mit innigem Ausdruck- Rasch und feurig- Etwas ruhiger- Im ersten Tempo- Schneller

(느리게, 내밀한 표현으로- 빠르고 격렬하게- 약간 고요하게- 앞서 빠르기로- 보다 빠르게)/

(A-flat Major, 4/4박자)


(i) 작품개요

   1849년작. 슈만은 이 해에 피아노 반주를 낀 다양한 악기를 위한 듀오곡들을 작곡했다. 그 중에 '환상소품(Fantasiestücke, Op. 73)'은 클라리넷, '세 개의 로망스(Drei Romanzen, Op. 94)'는 오보에를 위한 곡이지만 모두 이 곡과 마찬가지로 현악기(바이올린 혹은 첼로)로도 연주할 수 있는데 우리의 취향으로는 '환상소품'은 관악기든 첼로든 뭘로 해도 다 좋지만 이 곡의 경우는 첼로 버전을 더 선호한다.[각주:1] 호른은 이 음악을 표현하는데 음색에- 특히 알레그로에서 빠른 템포를 더 매끄러운 사운드로 처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첼로는 현악기 중에서 가장 사람의 목소리에 가까운 악기인 동시에 활로 현을 긁어서 내는 쪽이- 당신이 대가이기만 하다면- 상대적으로 표현의 여지가 넓어서 특히 아다지오에서 더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들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레그로의 주부에서도 첼로는 상대적으로 소리가 거친 대신 더 격정적인 감정의 표출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반면 마지막 '세 개의 로망스' 경우는 관악기, 특히 오보에가 아니면 맛을 살릴 수 없는 구절들이 있어 오보에로 하는 것이 가장 듣기 좋다.


   곡목은 ‘아다지오와 알레그로’지만 실제 악보에 I. Adagio/II. Allegro, 이렇게 되어있는 건 아니다. 상기한 독일어로 된 빠르기 지시만 적혀 있고 거기서 'Lansgam'이 아다지오에, 'Rasch und feurig~' 이하가 알레그로에 해당하는데, 사실 듣다 보면 저절로 전반부는 아다지오/후반부는 알레그로라고 귀에 들어오게 된다.

- 아다지오; 단일주제(a)에 의해서 자유롭게 전개되는데 내용상 AA'-coda, 즉 두 번 악상이 전개된 다음에 다시 a를 이용해서 짧게 마무리 하는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아다지오는 악보를 보지 않으면 확실히 외워지지 않는 헷갈리는 멜로디. 첫머리에 제시된 짧은 주제가 조금씩 변형이 되면서, 계속 반음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도- 밸브 호른이 당시로는 '신개발품' 에 속했기 때문에 새 악기의 기능성을 충분히 활용하려는 의도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혼동이 되지만 피아노와 첼로(혹은 호른)이 계속 대화를 하듯이, 돌림노래를 하듯이 주고 받으면서 진행이 되기 때문에 나중에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하면 중간에 어느 한쪽을 끈을 놓치기 쉬운 짜임인 것. 내용적/감정적으로도 짤막한 소품이지만 표현하기 굉장히 어려운 음악이다. 어떤 갈망인 것도 같고, '다정도 병인 양'하는 그런 정서인 듯도 싶은데 손에 쥐여질 듯 빠져나가는 느낌이면서, 또 그런 음악.

- 알레그로; 거의 (a-b-a)-c-(a-b-a)의 론도 형식. 가운데 c는 다시 아다지오 주제의 변형으로 되어 있어 전곡이 사실상 2개의 주제로 이루어져 있는 셈. 이 c에서 '약간 고요하게'의 '약간(etwas)'이 도대체 '얼마나 약간'이냐는 문제가 있는데, 슈만이 빠르기 지시를 적어넣었을 당시의 의도는 여기서 음악이 전진하는 흐름을 너무 꺾지 말고 다시 론도 주제로 복귀한 후에 마지막엔 'schneller(더 빠르게)'로, 즉 전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력한 드라이브를 주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러 녹음들을 들어보면 c에서 템포도 충분히 늦추고 앞뒤의 론도 주제와 확실하게 대조를 주어도 다 들을 만하고 특히 마지막 'schneller'는 확실히 표나게 지키는 경우가 오히려 소수파- 대개 가속을 하는 경우에는 한 도막 앞에서 미리 들어가고 마지막엔 오히려 숨을 조금 고르는 경우가 많다. 이 편이 음악이 여유와 품위가 있다, 막판의 갑작스런 가속은 좀 유치하다는 것이 적어도 20c 초중반 이후의 미학인데, 물론 슈만이 악보에 적은 대로 연주하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가 어떻게 소화하느냐의 문제다.


(ii) 녹음들

1. Mstislav Rostropovich/Martha Argerich- 1980

아다지오는 첫 A는 소리도 죽여서 곱고 '야들야들'하게 가고, A'에 오면 특유의 크고 두툼한 사운드로 보다 남성적으로 연주한다. 늘 이렇게 대조를 많이 주는 것이 로스트로포비치 해석의 특징 중 하나이고 지루하지 않다는 게 장점이지만 반복해서 들을 수록 음악이 좀 인공적으로 들린다는 게 단점. 알레그로에서도 가운데 c에서 충분히 템포도 늦추고 론도 주제 a와 대조를 많이 주는 선택인데 c는 아름답지만 a는 노래가 다 되지 않고 서두르는 것처럼- 마치 아르헤리치가 잠깐 첼로를 맡은 듯이- 들리는 것이 아쉬운 점.

2. Daniil Shafran/Anton Ginzburg- 1996

같은 '러시아 스타일'의 연주. 아다지오는 거의 안단테 느낌으로 템포를 당기고 알레그로는 가운데 c에서 템포 대비를 심하게 주는 것도 공통점이고, 무엇보다 느린 부분에서 러시아 사람들 특유의 '칸타빌레'가 있다. 하지만 '러시아 스타일'이라는 것은 '범주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 로스트로포비치나 샤프란은 서로 완전히 다른 개성을 갖고 있는 음악가들이고 우리의 취향으로는 이 곡은 구절마다 독특한 개성을 불어넣는 샤프란식의 낭만주의에 더 잘 맞는다.

3. André Navarra/Annie d’Arco- 1978

이것은 두 러시아 거장들과는 전연 다른 스타일의 해석. 아다지오는 충분히 느린, 여유있는 템포로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음악을 추구하고 알레그로 중간부 c도 상대적으로 과하게 대조를 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음악의 흐름을 이어가는 쪽이다. 다만 이 곡은 객관적인 스토리를 갖고 있다기보다는 주관적으로 연주자가 감정이입을 해서 채워야 하는 음악에 더 가까워서, 이런 접근이 품은 높지만 약간 싱거울 수 있다는 것은 단점.

4. Pierre Fournier/Lamar Crowson- 1971

아다지오는 위 나바라 녹음에 비해서는 보다 낭만적이고 감정을 더 많이 드러내는 쪽이고, 알레그로는 템포를 당겨서 날렵하면서 힘있는 리듬으로 a를 만든다- 중도를 잘 성취한 연주. 다만 크로우슨의 피아노는 슈만이 요구하는 섬세한 감수성이 모자라서 여기 녹음들 중에선 가장 처지는 점이 유감.

5. Pablo Casals/Clifford Curzon- 1956 live

프라드 페스티벌(Prades Festival) 실황. 80대의 녹음(1876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81살)이고 기술적으로는 이미 예전의 카잘스가 아니다(알레그로에선 중간에 한번 '더듬은' 다음에 살짝 기분이 상하신 듯한 대목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아다지오는 여기 소개된 녹음들은 물론 우리가 들어본 연주들 중에서는 단연 최고. 슈만의 지시어- 위에서 우리가 '내밀한 표현으로'라고 번역했던- 'mit innigem Ausdruck'이 뭔지를 가장 잘 표현한 연주다. 보통의 첼리스트가 이 음악을 연주하는 걸 들을 때 '이게 뭐지?'하는 느낌이었다면, 이 연주를 들으면 마치 수수께끼가 다 풀리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은 느낌. 레퍼토리에 따라서 달라지는 문제이긴 하지만 카잘스는 다른 첼로의 대가들보다도 해석력이, 생각의 깊이 자체가 한수 위라고 느껴지는 때가 이따금씩 있다- 어떤 의미에선 첼리스트로는 그릇이 컸던 예술가.

6. Pablo Casals/Mieczyslaw Horszowski- 1961 live

아다지오는 위의 녹음처럼 낭만적이고 마술적이기보다는 상대적으로 간결하고 담백한 처치- 정서상 상기 나바라 버전과 가까운 데가 있다. 알레그로는 위의 것보다 안정적인, 더 깨끗한 연주라서 전체적인 완성도는 이쪽이 더 높게 들린다. 이 녹음은 케네디 대통령 때 백악관 실황음반에 들어있는 음원이고 편안한 분위기의 프라드 페스티벌보다는 백악관 공개 연주 쪽이 아무래도 준비에 신경을 더 썼는지 모른다.


7. Dennis Brain/Gerald Moore- 1952

정말로 쉽게 분다- 대개 우리 같은 비전문가가 들었을 때 쉽게 하는 것처럼 들리는 경우가 정말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경험칙 중의 하나. 기본적으로 호른을 위한 음악인 만큼 슈만이 어떤 효과를 원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 음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호른 버전을 들어봐야 하는데, 우리는 신뢰할 만한 반주자(제럴드 무어)까지 감안했을 때 슈만의 듀오곡 연주에 단연 최적의 조합이라고 생각해서 이 옛 모노 녹음을 선택했지만 취향에 따라서 스테레오 시대 이후에 나온 음질이 깨끗한 연주들 가운데 골라서 들어도 대개는 무난할 것이다.


  1. 가끔 음반에 따라서 그뤼츠마허(Friedrich Grützmacher) 'Arr.(arrangement)'라고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오기. 방금 말했듯이 이 곡은 처음부터 호른 또는 현악기로도 연주할 수 있도록 슈만이 지정한 것이다- 그뤼츠마허가 슈만의 첼로곡들을 모아서 '편집'한 악보(Leipzig C.F. Peters Edition)가 있을 뿐이지, 무슨 그뤼츠마허의 ‘편곡’이 아닌 것. [본문으로]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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