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B flat Major, Op. 106 "Hammerklavier"(2/3)
음반 비교감상 2017. 4. 12. 22:04 |(i) 작품개요(~계속)
- 3악장;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들 중에서 가장 연주시간이 긴, 역시나 스케일이 큰 악장. 형식은 1악장에 이어 다시 한번 소나타형식이니까 내용이 주로 문제가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이 악장에는 형식/내용이 얽힌 문제가 있다.
우선 음악의 내용적인 측면을 먼저 살펴보면 이 3악장은 종종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의 '시원' 내지는 '발원지' 비슷한 무엇으로까지도 언급되는 악장이다(이럴 때는 보통 작곡기법적인 문제, 이를테면 재현부의 연속 32분음표 장식음군(figurations)과 같이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 들어보면 정서적/감정적으로 확연히 낭만적이어서 고전파 음악에 정통하지 않은, 낭만주의가 장기인 피아니스트들도 이 3악장 만큼은 들을 만하게 치는 경우가 더러 있고 반대로 낭만주의까지 레퍼토리가 확장이 안 되는 경우는 유독 3악장만 연주가 조금 못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기법적인 문제를 넘어서) 낭만주의를 보다 폭넓게 볼 땐 물론 선행하는 사례들이 있다.
베토벤 피아노 음악에선 이미 1816년의 28번 A major 소나타(Op. 101)부터 정서상 확연히 낭만적인데, 28번과 이 3악장의 낭만주의 사이엔 약간 미묘한 유형의 차이가 존재한다. 즉, 28번의 경우가 주관적인 느낌과 '무드(mood)'를 표현한다는 측면의 낭만주의라면 이것은 같은 주관적인 감정 표현이라도 시점이 달라져 있는 있는 음악- 비유하자면 3인칭 시점이 아니라 1인칭 시점이고, 같은 1인칭 시점이라도 독자/청중을 향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말하는, '내적 독백(interior monologue)'이다. 음악을 문학이나 문학 용어에 비유하는 것은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가 더 쉽기 때문에 바람하지 않지만- 이를테면 이게 무슨 제임스 조이스식 ‘의식의 흐름’의 음악 버전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큰일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경우는 우리는 달리 더 좋은 비유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여튼 내용 자체가 까다로운 음악이고 반대로 어떤 의미에선 베토벤의 동시대인들보다 평균적으로 자의식이 더 날카로와진 현대인들의 정신세계에 더 가까운, 시대를 앞서간 음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미묘한 '시점 이동'은 이후 베토벤의 후기 음악을 관통하는 것인데 그 기원은 1815년의 첼로 소나타 5번의 2악장이다. 베토벤을 어디까지 고전주의고 어디까지 낭만주의라고, 또 소위 베토벤의 '후기'가 언제부터 시작이라고 칼로 무 자르듯이 나누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대략 1814~16년 사이가 의미있는 과도기이고 뒷 세대의 낭만주의를 보다 확실하게 선견하는 음악을 쓰기 시작하는 시기라고 보면 큰 무리는 없다. 특히 1815년의 두 개의 첼로소나타(Op. 102의 1/2번)는 각각 막 언급한 피아노 소나타 28번과 1817~18년의 이 29번의 '프로토타입'에 해당한다. 나중에 첼로소나타 전곡을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그때 더 자세히 논하기로 하겠다.)
한데 본격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피아노 음악에는 소나타 형식이 많이 쓰이지 않는다. 그들이 보다 자유로운 형식을 많이 취하는 이유는 베토벤보다 작곡의 '스킬'이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심지어 브람스조차도 베토벤은 고사하고 모차르트가 '주피터' 교향곡이나 마지막 피아노협주곡(27번) 1악장에서 보여준 만큼의 솜씨로 소나타 형식을 다루진 못한다- 꽉 짜인 형식은 자신들의 음악의 내용/정서와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소나타 형식은 감정을 극적인 구조(dramatic structure)를 가지고 기술/표현하는데 적합한- 베토벤이 특히 잘 활용한 점이기도 하다- 형식이다. 28번 소나타까지는 '간결한 환상곡풍의 소나타 형식' 정도로 정리가 될 수 있지만 이런 ‘내적 독백’엔 그렇게 잘 맞는다고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여기가 바로 내용과 형식이 얽혀서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통상적인 소나타 형식이란 내용적으로 제1주제/제2주제/코데타가 ‘직렬’로 연결된 한 도막이다. 부주제가 아무리 많이 붙더라도, 경과구가 아무리 길더라도 마찬가지이고 1부의 서로 다른 에피소드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 3악장의 소위 ‘제시부’는 대략 a(제1주제)a1-b(경과부)-c(제2주제)의 구조인데, a-b-c가 ‘병렬’로 연결되어 있다- 제시부 안에서도 이미 서로 어느 정도 독립적인 스토리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말이다. 즉, 모양은 소나타 형식이되 속은 이미 변질되어 있고 음악을 많이 들은 사람들도 재현부를 다 듣기 전까진 이게 '이중 변주곡(double variation)'이 변형된 형태이거나 '자유로운 3부 형식'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착오(내지는 미련)을 벗어나기가 힘들다. 베토벤이 이 거대한 악장이 지루하지 않게끔 단순한 반복을 피해서 제시부에서 발전부, 발전부에서 재현부로 넘어가는 연결도 굉장히 유연하고 특히 후자는 오른손에 붙는 심도 있는 장식음으로 변화를 많이 줬기 때문에 무척 재미있지만, 이미 제시부의 긴 경과부 'b'가 다시 재현되는 대목에 이르면 이게 음악의 내용 전개상 꼭 반복이 되어야만 하는 건지 약간 의문이 들고 코다에서 제2주제/1주제 악상들이 다시 들어오는 처리까지 다 듣고 보면 결국은 중복이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처음 구상할 때부터 소나타 형식을 고집하지 않고, 이를테면 그냥 '자유로운 3부형식' 정도로 처리를 했으면 음악의 내용에 더 적합하고 매끄럽지 않았을까?
베토벤의 음악에 이렇게 내용과 형식이 서로 잘 안 맞는다는가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우리도 잘 모른다. 단지 2가지 요인을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첫째는 베토벤의 '실험정신'이다. 글 첫머리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작품은 피아노라는 악기와 피아노 소나타라는 장르의 한계에 도전하는 작품이다. 첫 악장은 규모가 확장된 소나타 형식이고, 마지막 악장은 그에 맞춰서 참신한 시도로 장대한 푸가를 넣는다. 그럼 중간의 느린 악장은? 베토벤은 첫 악장의 소나타 형식은 이미 '에로이카'에서 완성했지만 이 곡 이전에 느린 악장의 소나타 형식으로 좀 규모가 큰 것은 '전원'교향곡의 2악장과 '라주모프스키' 현악사중주(Op. 59-1~3) 1번의 2악장/3번의 3악장들 정도이고 모두 이 곡을 쓰기 근 10년전의 작업들이다. 즉, 늘 도전정신이 충만한 베토벤은 이번엔 느린 악장에서 소나타 형식을 확장하고 변형해서 바깥악장에 걸맞는 대형 악장으로 써보겠다고 마음먹었고 이 3악장은 그 결과물이라는 것. 둘째는 베토벤 본인이 뭔가 새로운 음악을 쓰고 있다는 걸 잘 의식하지 못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상기한 '시점의 차이' 같은 것은 내용적으로 미묘한 부분이다. 베토벤이 스스로 '내가 한 1815년부터 낭만주의 음악을 작곡했지'라고 생각했을 리도 만무하다. 자기가 계속 변하고 있다는 것, 작품마다 표현하는 감정과 내용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은 물론 알았겠지만 어느 순간 종류가, 심지어 '이즘(-ism)'이 달라지는 뭔가를 하고 있었다는 점은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즉, 자기가 상기 '라주모프스키' 2번 2악장보다 '성숙한' 음악을 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범주'가 다른 뭔가를 쓰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나타 형식의 확장으로 충분히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곡 이후 베토벤의 대작들(최후의 피아노 소나타 3개라든지, 후기 현악사중주나 '합창'교향곡들)의 느린 악장엔 (자유로운) 변주곡 형식을 많이 쓰고 소나타 형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본인도 애초의 기획대로 작품은 완성했고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지만, '이건 한번이면 됐다'고 생각했다는 간접증거일 수 있을까?
- 4악장; 역시나 기교적으로 어렵다- 리듬감을 살려서 깨끗하게 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처럼 들리는 것이, 치는 사람은 열심히 쳐도 듣는 사람 귀에는 뭔가 거슬리기 쉬운, 그런 까다로움이 있다. 해석적으로는 1악장과의 템포 밸런스가 지적해둘만한 점인데 요는 이 4악장을 몰아치는 강렬한 피날레로 만들고 싶다면 1악장은 상대적으로 더 빨리 쳐야 한다는 것이다. 1/3악장을 한껏 느리고 장엄하게 부풀려놓고 4악장을 빠르고 화려하게 몰아치면 이 거대한 곡 전체의 구조가 한쪽으로 기울면서 무너져내린다. 4악장은 1악장보다 같거나 느리게 칠 수는 있어도, 빠르게 치는 것은 베토벤의 의도가 아니라는 게 우리의 견해.
형식적으로는 앞에 짧은 서주가 달려 있는 자유로운 푸가 형식인데, 라르고로 시작하는 환상곡풍의 짧은 서주는 토카타라고 부를 수도 있는 대목도 있어 복고풍 내지는- 즉, 바하의 'Toccata(or Fantasia) and Fugue'를 연상시키는- 의고풍으로 맞춘 것이 재미있는 점. 주부 알레그로는 대략 6개의 푸가가 사이에 연결부와 별도 주제의 전개를 끼고 사슬처럼 엮여서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베토벤은 내용적으로는 교묘하게 소나타 형식의 극적인 구조를 결합시켜 놓았다. 사실 감상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3성 이상의 푸가가 3분을 넘어가면 웬만한 사람한테도 헤어나기 힘든 '미로'- 대부분 처음에 주제를 좀 쫓아가다가 길을 잃기 십상이다. 이런 경우엔 '각개격파(divide & conquer)'가 그나마 이해하기에 쉬운 방법. 우리가 제시하는 최선은 내용상 크게 세 도막으로- 공교롭게도 한 도막에 푸가 2개씩이다- 나눠서 들어보라는 것이다.
① 제1부: 제1푸가는 일단 3개 성부에 한번씩 주제가 나타난다. 제2푸가는 주제가 2번 들어오고 나서 새로운 주제가 나타나는데 마치 소나타 형식에서 코데타를 이끄는 주제와 비슷한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주제로 '세미클라이맥스(semiclimax)'를 한번 만드는 데까지가 내용적으로 한 도막을 이룬다고 보자는 것.
② 제2부: 상기 '유사 코데타' 주제가 다시 한번 전개되면서 자연스럽게 제3푸가로 이어진다. 제3푸가는 제1푸가 주제의 '역행(retrograde; 다른 이름으로는 'cancrizans'라는 용어도 쓴다)'. 역행이라 함은 문자 그대로 '도레미파솔'은 '솔파미레도'로, 계명을 거꾸로 뒤집는 것. 처음 듣는 사람은 이게 장난이지 무슨 음악이 되겠느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된다- 실은 될 뿐 아니라 이 악장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 중에 하나. 마무리되면 다시 베이스에서 주제가 한번, 마치 제2푸가에서 빼먹은 한번을 채우듯이- 물론 굳이 이렇게 연관짓지 않고, 푸가 용어로 그냥 통상적인 주제의 '재입장(middle-entry)'으로 볼 수 있다- 들어온 다음에 제4푸가는 주제의 전회(inversion)로 만든다. '전회'란 말하자면 옥타브를 타고 올라가는, 상승하는 음형이었으면 반대로 하강을 시키는 것. '도-미-솔'로 올라갔으면 '도-라-파~' 방향으로 내려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3성부가 차례로 돌아간 다음에 두번째 세미클라이맥스를 이루는 데까지가 내용적으로 두번째 도막.
③ 제3부: 이제 음악이 고요해지면서 다시 새로운 부주제가- 엄밀히 말하면 주제에서 파생된 것이다- 들어온다. 제5푸가는 이 새 주제와 원래 주제의 단축형으로 전개하는 2중푸가이고, 제6푸가는 원래 주제와 제4푸가 주제, 곧 주제의 전회 혹은 자리바꿈형의 이중푸가인데 제2푸가에서처럼 2번만 돌아가고, 간주가 진행이 되다가 제1부에서처럼 고음부(tenor)에 주제가 들어오는 것이 '마무리신호'- 저음부(base)에 주제, 그 위에 전회된 주제로 '3번째'를 채운 다음에 주제로 3성 스트레토(stretto)가 작렬하면서 코다로 이어져서 마무리된다.
위에서도 한번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렇게 세 도막으로 딱 끊어지는 구조가 아니라서 경계선에서 애매한 부분이 발생한다- 하나 이것이 이 악장의 극적인(dramatic) 구조를, 내용적인 큰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설명이다.
***
이 곡이 완성된지 대략 60년 후인 1878년에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Human, All Too Human)’에서 '운명의 장난'으로 그냥 미완성작으로 남겨진 대가의 걸작들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이 작품을 베토벤이 남긴 ‘교향곡의 불완전한 피아노 축소판'의 한 사례로 언급한 적이 있다(니체는 음악을 굉장히 좋아했지만 베토벤을 아주 잘 알진 못했던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어쩌면 달리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바인가르트너(Felix Weingartner)가 관현악 버전을 만들기도 했지만 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음악은- 아무리 발상이나 스타일이 교향악적이라고 하더라도- 오로지 피아노를, 건반악기를 위한 음악이고, 만약에 피아노로 할 수 없다면 그 어떤 형태로든 완벽하게 연주될 수 없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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