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 "환상소품(Fantasiestücke)", Op. 73
음반 비교감상 2018. 1. 15. 22:27 |Schumann Fantasiestücke Op. 73
I. Zart und mit Ausdruck(다정, 다감하게)
II. Lebhaft, leicht(생기있게, 가볍게)
III. Rasch und mit Feuer(빠르고 열정적으로)
(i) 작품개요
역시 1849년작, 이해부터 시작한 슈만의 '실내악 듀오곡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에 해당한다. 자필 초고의 원제는 'Soirée Pieces'('야회곡' 정도 되겠다)로, 처음부터 음악가 내지 애호가 지인들의 저녁 모임에서 연주될 것을 상정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다만 'Soirée'는 만찬 후의 여흥(을 위한 음악) 같은 것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모호성이 있고,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제목을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역시도 확실치 않다. 1
- 이 곡도 초판부터- 슈만의 동의하에- 바이올린 혹은 첼로로도 연주할 수 있도록 파트 악보들이 같이 포함이 되어 있었던 경우인데 클라리넷 혹은 첼로로 연주할 때 물론 각각 효과에 장단점이 있다. 우선 기본적으로 클라리넷을 위한 곡이기 때문에 제1곡의 중간부 같은 경우 멜로디 자체가 첼로로 연하면 약간 어색하게 넘어가는 구석이 있어서 클라리넷으로 불었을 때의,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면서 떠 가는 듯한 그 느낌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첼로의 장점은 '(왼)손으로 넣는 비브라토(vibrato)'- 음악의 성격에 따라서 계속적인 비브라토가 잘 어울리는 음악이 있고, 잘 맞지 않는 음악이 있는데 이 곡의 경우는 들어보면 비브라토가 있는 편이 더 근사한 음악이기 때문. 비브라토를 잘 쓰지 않는 경우는 템포를 조금 늦추는 것이 상대적으로 노래가 좀 낫다. 이 점도 슈만이 1악장 메트로놈 빠르기를 낮춰 잡은-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상술하겠다- 그리고 첼로 주자들보다 클라리넷 주자들이 슈만이 지정한 악보의 메트로놈 빠르기에 충실한 녹음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한가지 이유라고 우리는 추측한다. 또, 3악장 첫머리의 트레몰로(tremolo)도 이 곡을 처음부터 클라리넷 판으로 들은 사람한테는 좀 방정맞게 들릴 수 있겠지만 지시어 'rasch und mit Feuer'를 표현하는 데는 더 적합하게 들린다.
- 슈만은 젊을 때 첼로를 잠깐 배운 적이 있고- 당시 첼로의 위상을 고려한다면 특히 더- 첼로를 편애했던 작곡가이긴 하지만 사실 모든 곡을 피아노의 관점에서 쓰는 전형적인 '피아니스트-작곡가' 유형에 속한다. 그래서 이 곡도 아래 녹음을 소개한 시프린(David Shifrin)의 표현에 따르면 '쉴 틈은 고사하고 숨쉴 틈도 없게' 쓴, 관악기 주자의 사정을 거의 고려 안 한-혹은 못 한- 작곡이라는 것.
- 형식은 (소소한 차이는 있지만) 3곡 모두 ABA(-Coda)의 3부 형식이라 별로 논할 것이 없다. 오히려 요점은 이 곡당 3~4분 정도 길이의 짧은 3곡간의 관계를, 전체적인 구조를 어떻게 봐야할 것이냐의 문제가 된다. 일단 곡마다 다른 주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악장 첫 A 안의 두 주제 a/b에서 3곡이 모두 파생되어 나왔다 해도 좋을 만큼 서로 악상이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세 도막으로 이뤄진 단일한 환상곡처럼 보고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는, 가능한 접근법이다. 그러나 슈만은 이 곡의 제목을 'fantasy pieces'라고 했지, 그냥 'fantasy'라고 하지 않았다- 3곡이 모두 곡마다의 '캐릭터'가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슈만의 의도는 3곡이 각자의 색깔을 가지면서 동시에 전체적으로 통일된 하나를 이루는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 이런 맥락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이 각 악장의 메트로놈 빠르기 지시이다. 이것은 1849년의 초판본엔 없었고 1852년의 개정판부터 나온다. 현재 남아있는 슈만의 자필초고에는 'M. M. ♩= '까지 적혀있지만 정작 수치는 없다. 자필초고와 초판본이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지금은 망실된- 최종원고가 있었던 것이 확실한데 거기에 있던 수치가 출판과정에서 누락이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슈만이 일단 삭제를 했다가 나중에 마음을 바꾸어서 개정판에 넣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여튼 수치는 1악장부터 순서대로 4분음표= 80/138/160이다. 즉, 갈수록 빨라지게 되어 있고 비율로 보면 상대적으로 2곡에서 가속이 심하다. 제3곡은 결과적으로 1곡보다 2배가 빠르고- 심지어 coda에 가면 거기에 더해서 'schneller(더 빨리)'가 2번이나 더 나온다- 피날레의 가속은 슈만이 좋아하는 스타일이긴 한데 이건 음악적으로 좀 심하지- 내지는 뭔가 유치하지- 않은가? 실제 녹음들을 들어보면 대개 슈만의 지시보다 압축해서, 즉 제1곡은 4분음표= 80보다 빠르게, 제3곡은 4분음표= 160보다 느리게 연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템포 차이를 줄이면 위에 언급한 단일한 세도막의 환상곡이라는 통일성이 강조되는 효과도 있다. 어찌된 일일까? 그럼 이것은- 문자 그대로 '정신이 나가기' 시작한- 슈만의 실수인가?
답은 '아니오'이다. 위에서 슈만의 의도는 '둘다'라는 취지로 이야기 했었다- 한데 '유기적 통일성'만 강조해서 템포 차이를 너무 줄이면 제2곡의 색깔이, 존재 이유가 박약해진다. 즉, 제2곡을 생략하고 1곡에서 3곡으로 바로 건너뛰어도 음악의 흐름에 딱히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CD 트랙을 건너 뛰어서 이렇게 들려줬을 때- 특히 이곡을 처음 듣거나 뚜렷한 기억을 안 갖고 있는 청중의 경우에- '이게 슈만의 원곡'이라고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어떤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을지 우리는 의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추측은 슈만도 자기 작품의 단점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출판할 만큼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은 충분히 있지만 뭔가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아 있었다는 것. 이 작품에 연이어서 작곡한 '아다지오와 알레그로'가 바로 군더더기 없이 딱 두 도막으로 된 악장 구분도 없는 단일한 환상곡이고, 1852년에 메트로놈 빠르기 숫자를 추가한 것 외엔 초판과 동일한 개정판을 낸 것도 이 뒷맛을 없애기 위한 보완 작업이었을 것이다. 곧, 슈만이 지정한 템포의 요점은 제1곡과 2곡의 성격을 확실하게 대비시키는 것이고, 또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3곡이 2곡보다도 살짝 빨라지면서- 제1곡에서 3곡으로 단번에 '2배속'으로 넘어가면 음악이 이상해지니까 2곡의 연결고리로서의 역할도 강화가 된다. 대신에 이렇게 되면 이번엔 결과적으로 제3곡이 너무 빨라지면서 선율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이 희생되는 문제는 피할 수가 없다. 결국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던 셈인데 슈만의 명예를 위해서 덧붙이자면 이해 연말에 슈만은 같은 작업에, 즉 하나의 악상에서 출발해서 '한 세트'의 유기적인 구성을 이루면서 동시에 개별 곡들이 고유의 성격을 갖고 있는 작품에 재도전해서 이번에는 완벽하게 성공한다- 그것이 바로 슈만이 남긴 가장 시적인 작품들 중 하나인 '오보에를 위한 3개의 로망스(Op. 94)'이다.
(ii) 녹음들
(좋은 녹음들은 대부분 망라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리스트들이 늘 그렇듯 누락이 좀 있다. 우리가 음원을 안 갖고 있어서 커버하지 못한 녹음이 2개가 있는데 첼로는 Daniil Shafran/Felix Gottlieb(1978), 클라리넷은 Karl Leister/Ferenc Bognár(1992)이다. 전자는 Melodiya 음원인데 CD는 한국에 수입이 안 되고 요즘 새로 찍은 고가 LP로 잠깐 보였었고, 후자는 Camerata 레이블인데 역시 한국엔 수입이 안 되었던 것 같다.)
1. Pierre Fournier/Babeth Léonet- 1946
이 곡은 진짜 첼로 대가들의 녹음은 생각보다 적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푸르니에가 2번을 녹음했다. 이것이 첫번째 버전. 이쪽이 소리는 더 풍성한데 모노 시대의 것이고, 아래 스테레오 버전은 소리가 건조해서 일장일단이 있다. 전형적으로 3곡 간의 빠르기 차이를 압축해서 1악장은 악보보다 빠르게, 2/3악장은 상대적으로 템포를 느리게 잡고 슈만의 서정성을 부각시키는, 노래하는데 집중하는 스타일의 연주.
2. Maurice Gendron/Jean Françaix- 1952
거친 소리를 거의 내지 않는 첼로. 현악기는 소리를 모를 너무 둥굴리면 '성형미인' 같은 인공적인 맛이 나는데, 이 사람은 자연스럽게 숨을 쉬면서도 부드럽고 고운 톤을 이어내는 것이 거의 신기에 가깝다. 큰 틀에선 유사하지만 푸르니에보다도 더 슈만의 서정성과 시적인 면을 강조한 연주. 음악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좋지만 감정의 기복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이 곡에선 단점일 수도 있고 특히 3악장은 'mit Feuer'가 너무 자제되었는지 모른다.
3. Pierre Fournier/Jean Fonda- 1967
곡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푸르니에 음악은 노년으로 갈수록 점점 고전적이고 간결해진다. 위 1946년 녹음과 비교하면 3악장은 그대로 두고 1/2악장은 더 빠르게 당겨서 전체적으로 단일한 환상곡의 느낌이 가장 강한 버전. 1악장은 여기 소개된 녹음들 중에서 가장 빠른 템포의 연주인데 중간부 B 후반부에서 다시 A로 이어지는 음악의 흐름도 가장 좋다. 반면 상대적으로 느리게 느껴지는 3악장은 아무나 따라하기 힘든, 품이 높은 'mit Feuer'.
4. David Shifrin/Carol Rosenberger- 1984
해석 아이디어는 별로 특별한 게 없지만, 곱고 달콤한 톤은 인상적- 사람마다 목소리가 다 다르지만 청중의 뇌리에 남는 개성있는 음색이 드물 듯이 악기 연주자가 자기만의 개성있는 톤을 낸다는 것도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연습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5. Anatoly Kamyshev/Andrei Gavrilov- 1982
아마도 악보의 빠르기 지시에 가장 근사한-혹은 전부 더 빠른- 녹음. 가브릴로프는 아마도 스튜디오에서 이 작품을 녹음한 피아니스트들 중에 가장 테크닉이 뛰어난 연주자-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은근슬쩍 뭉개고 지나가는 셋잇단음표들을 하나하나 고르고 깨끗하게 소리낸다. (원칙적으로는) 악보에 불필요한 음표란 없기 때문에 가능한 한 악보의 음표들을 최대한 청중에게 들려주는 게 듣기가 좋다. 카미셰프도 들어보면 굉장한 테크니션이고, 해서 3악장은 '우리 러시아의 테크닉을 한번 보여주마' 하는 것처럼 현란한 스피드로 들어오는데 들어보면 노래가 잘 안된다. 빠른 템포라는 게 반대로 음표를 살짝 빼먹더라도 음악적으로 말이 되어야 시도해볼 가치가 있는 것인데, 역시 이 경우는 그런 경우가 아니고 템포를 늦춰서 노래하는 게 음악적으로 이득이라는 게 잠정적인 우리의 결론.
6. Eduard Brunner/Robert Levin- 1995
브루너의 생각은 제3곡이 악보에 지정된 빠르기대로 연주하는 것이 음악적으로 효과적이지 않아서 템포를 늦춰야 한다면 아예 3개 악장 전체를- 한 20%쯤- 늦춰서 슈만이 의도한 악장간 빠르기의 '비례'는 지키자는 것- 한번 시도해 볼 만한, 재미있는 아이디어. 평가는 제1곡에 달렸는데 너무 늘어져서 청승맞다고 느낄 수도 있고 아니면 리히터(Sviatoslav Richter)의 슈베르트(D. 960 소나타의 1악장)처럼 참신하다고 볼 수도 있어 사람에 따라 갈릴 것이다.
7. Gervase de Peyer/Lamar Crowson- 1967
이 클라리넷의 대가도 작년에 세상을 떠나서 이제는 고인이 되었다. 시프린의 톤이 달콤하고 브루너는 가볍고 맑고 마른 쪽이라면, 드 페이어는 밝고 상큼하면서도 촉촉한, 양감이 있는 소리를 내는데 우리 취향으로는 이 작품에는 이 음색이 더 잘 맞지 않나 싶다. 제1곡과 2곡은 대략 악보 템포에 근접하고, 3곡만 살짝 더 늦춰서 노래를 살리는 선택을 한 연주.
8. Reginald Kell/Gerald Moore- 1940
제1곡은 부드럽게 노래하지만 다감하진 않고, 작품 전체적으로 절제되고 단아하게 노래하는 연주. 템포 차이를 많이 줄인 제1곡과 2곡은 다른 클라리넷 주자들보다는 오히려 푸르니에나 장드롱과 보는 관점이 더 비슷한 면이 있다. 제3곡은 상당히 빠르지만 여유를 잃지 않는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중간부 처리도 돋보이는데, 이 B를 '불꽃튀는' 주부 A에 대조되는 '고요하고 서정적이기만한' 부분으로 보는 것은 우리가 보기엔- 이를테면 B의 첫번째 도돌이표가 나오는 부분에서 피아노가 박차를 가하듯, 말발굽을 쳐올리듯 액센트가 들어가는 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슈만의 의도가 아니다. '무드의 전환'은 맞지만 다른 종류의 긴장이지, '긴장의 완화'는 아닌 것.
9. Reginald Kell/Joel Rosen- 1953
10여년이 지난 뒤에 켈은 생각을 달리 해서 제1/3곡은 위 1940년 녹음보다 살짝 늦추고 대신 2곡을 확 당겼다- 즉, 슈만의 의도대로 '차별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2악장 중간부 B의 처리도 재미있는데 대부분 다른 연주자들이 살짝 가속을 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서, 켈은 말하자면 여기를 스케르초의 트리오 같은 성격으로 보아 표나게 감속을 해서 아름답게 노래한다. 제2곡을 1곡보다 상당히 빠르게 해서 대비를 준다면 그 중간부는 이렇게 감속을 해야 고저장단이 맞는 의미가 있어서 이중으로 효과적이다. 전체적으로 '중용지도'를 잘 취한 해석. 켈은 우리가 들어본 중엔 가장 음악성이 탁월한 클라리넷 주자- 평범한 음악가들하고는 아이디어가, 생각하는 차원이 다르다. 피아노의 로젠도 녹음이 많지 않은데 우리가 듣기엔 상당히 음악적인, 감각 있는 반주자여서 종합적으로 여기 소개한 녹음들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버전이다.
해석의 삼각형; Fournier1967/Kamyshev/Brunner
- 작품번호는 작년에 소개한 '아다지오와 알레그로'(Op. 70; 2.13~17 작곡)이 더 빠르지만 실제 작곡은 이곡(2.12~13)이 살짝 빠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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