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화를 중심으로 조각이나 공예품, 사경까지 고루 포함된 한중일 삼국 불교미술 종합전.

: 특히나 불화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가봐야 하는 전시. 동북아 고전 미술작품은 보통 어두운 조명 아래 큼지막한 진열장 저 멀리 벽 끝에 붙어 있는 그림을 유리에 달라붙어서 애처롭게 바라봐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 리움/호암미술관처럼 바로 코앞에서 그림을 볼 수 있는 환경을 갖춘 데가 거의 없다. 다른 장르의 그림도 가까이서 볼수록 좋지만 고려나 조선전기 불화는 세밀한 장식적 표현이 큰 특징이기 때문에 더욱 여기 아니면 쌍안경이라도 들고 가지 않으면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는, 그저 봤다는 데 의의가 있는 '올림픽 감상'을 하고 말게 된다.

 

아래는 하나 당 최소 10분씩은 들여다볼 가치가 있는 그림들을 우리가 다섯 점만 가려 뽑은 것.

 

 석가탄생도(후쿠오카 본악사本岳寺)/석가출가도(쾰른동아시아미술관); 첫인상이 우리가 보통 '불화'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하고는 많이 다르다- 특히 석가출가도 같은 경우는 거의 무슨 감계화나 역사화 아닌가 싶을 정도. 문자 그대로 황/청/백/적/흑의 '오방색'을 균형 있게 다 써서 화려한 색감을 낸 탓도 있고, 탄생이나 출가나 석가모니가 아직 왕자일 때 벌어진 사건임을 기화(?)로 거의 '궁중 풍속화' 기법으로 그린 탓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기엔 대략 1483~1504년 사이의 작품으로 보이는데, 다음 편에서 간단한 논증을 한번 해보고자 한다.

   한국에서 보기도 쉽지 않고, 이렇게 두 점을 나란히 같이 보기는 더 어려울 공산이 크니 기회가 있을 때 봐두는 게 좋을 것이다.

 

 이모육불도(姨母育佛圖; 보스턴미술관)/유마불이도(維摩不二圖;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왕진붕(王振鵬; ca. 1280~1329) 진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그리 흔치 않다- 이 2점만 잘 들여다봐도 티켓값은 뽑을 수 있는 전시. 왕진붕은 원대 계화 1인자이고, 백묘 인물화에서도 손꼽히는 인물. 계화는 우리가 알기로는 진품을 갖고 있는 기관이 없는데, 기왕 빌려오는 김에  이번 전시와도 무관치 않으니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14c 전칭작을 하나 같이 빌려왔으면 좋았을 것이다- 관련 내용은 역시 다음 편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그림은 한쪽이 거의 '레벨이 다르다' 싶을다 정도로 다른 하나보다 더 좋은데- 2~3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더이상의 '스포일러'는 자제할 테니 각자 한번 본인의 안목을 테스트해 보시기를....

 

수월관음도(고려, 13c 후기, 개인소장); 그림이 정말 좋다- 꼭 여기처럼 그림 보기 좋은 진열장을 갖춰 놓은 곳에서 봐야 하는 작품. 특히 이 그림이 다른 수월관음도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구도 감각'이다. 바로 옆에 걸려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품도 수월관음도들 중에선 우수한 축에 드는 것들 중 하나인데, 이 그림을 보고 나서 보면 뭔가 화면이 너무 번다해 보인다. 시대에 따른 미감의 차이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의 14세기는 선들이 이루는 조화나 은은한 멋 같은 것보담, 일단 예쁘고 알록달록한 것을 많이 그려 넣어야 사람들이 좋아하고 그림값을 비싸게 받던 시기였던 것이고, 13세기 후기는 그런 경향이 막 나타나기 시작한 정도였던 것 같다.

 

   기실 13세기 수월관음도 기준작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이 작품이 스스로 기준작이 되어야 하는 형편인데, 흥미롭게도 아래 사진 우상단에 보이는 것처럼 그림 안에 발원자로 추정되는 '崔O子甬再'라는 다섯 글자가 남아 있다. 한문은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나가므로 가로로 나란히 쓰인 ''은 각각 최모씨의 아들 최용/최재 형제로 판독이 된다.

   이렇게 보면  이 이름들이 씌어 있는 위치가 딱 선재동자 부근이라는 것도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 공교롭다. 즉, 아직 자기 이름 석자- 이 경우엔 2자-만으로 발원자가 되기엔 너무 어렸던 남자 아이 둘의 성명을, '아무개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귀여운 남자 아이의 모습으로 묘사된 선재동자 옆에 적었다는 것이다(어쩌면 아버지 최모씨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실제 발원자는 이 형제의 어머니였던 것으로 보인다- 요즘도 초파일에 어린 자식들 이름으로 연등하는 어머니들이 있으니, 아마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블로그 주인 현장 촬영)

   이제는 이 최씨 형제가 언제적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느냐가 문제인데, 도록에 실린 박은경 교수의 논고에 보면 최용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사위인 윤해(尹侅; 1307~76)의 묘지명이 용케 남아 있다.[각주:1] 물론 동명이인일 수도 있고, 사위가 장인보다 나이가 많았을 수도 있겠지만, 극단적인 경우를 배제한다면 최용은 대략 한 세대 앞인 1277~82년 주변에 태어났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 그림은 최용이 아직 꼬마일 때인 1280년대 초중반 정도에 그려졌을 거라고 보는 게 가장 '합리적인 추정치'다. 무엇보다 화풍상으로도 14세기라고 단정짓기엔 조금 튀는 구석들이 여럿 있어서, 이런 '보조증거'가 있다면 1230년 이전 양식과 14세기 양식 사이의 과도기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충분히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각주:2]

 

   물론 1230년 이전 수월관음도가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 그림의 어디까지가 1230년 이전 양식의 유풍이고, 어디까지가 13세기 후반에- 판각본이나 금동불, 동경까지 다 영감의 원천으로 동원해서- 새롭게 시도된 양식인지 확실히 알 길은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기엔 이 그림에 여몽전쟁 이전의 회화 양식임이 매우 유력한 부분이 한 군데 있는데, 어딘지 알아보시겠는지?

 

(이미지 출처= 블로그 주인 현장 촬영)

   정답은 화면 우측 가운데 삼각형으로 불쑥 튀어나온 큰 바위다- 이런 형태는 남송대부터 보이고 절파로 이어진다. 절파와는 시기적으로 무관하고, 바위의 표현법도- 금니 혹은 흰색으로 보이는 안료로 강조선이 들어가 있고, 원래는 엷게 청록으로 채색이 들어갔을 수 있어 좀 애매하긴 하지만- 꽤나 고식이라서 늦어도 12세기 후반~13세기초의 관행을 그대로 답습했을 가능성이 많다.

 

   마지막으로 위 사진엔 안 보이지만 이 그림엔 아주 흥미로운 요소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있는 듯 없는 듯한 베일'이다. 우리는 현장에서도 못 봤는데, 나중에 앞서 인용한 정우택 선생의 예전 논문을 보니 가사의 전상부(田相部)에만 희미하게 베일의 바탕무늬인 마엽문(麻葉文)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조사를 더 해보니 (역시 정우택 선생의 설에 따르면) 고려 수월관음도를 대표하는 특징 중의 하나인 이 베일의 연원이 다른 데서는 전혀 찾을 길이 없고 오직 대리국(大理國; 937~1253)의 화가 장승온의 작품인 '범상(梵像)'에만 보인다는 것이다.[각주:3]

   대리의 역사도 꽤 길지만 회화작품으로 지금 남아있는 것은 이 작품이 유일한 것으로 되어 있고, 제작연도는 우리가 알기로는 1172~76년이 현재의 정설이다. 상당히 긴 두루마리 작품인데 그 중에서 문제의 도상은 바로 이것이다:

 

(이미지 출처= 소장처= 대만 고궁박물원)

   화면을 좀 확대해서 유심히 보면 마치 거미줄이 빛의 각도에 따라서 언뜻언뜻 눈에 비치는 것처럼, 흰색(?) 안료의 선묘로 머리의 보관 위에서부터 전신을 덮은 베일을 은근하게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미지 해상도가 낮아서 더 상세히 보이진 않지만- 우리가 작년하고 2017년, 이 그림 실물을 두 번이나 봤는데 무식해서 이 대목을 찾아서 유심히 볼 생각을 못했다- 전체적인 필법으로 보아 베일에 추가적인 문양 같은 것이 들어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수월관음도 베일의 진화 단계'를 상정해볼 수 있다:

 

   대리 장승온식 단순 선묘-> 고려 13세기 후반 소심한(?) 기본 마엽문-> 14세기 마엽문에 더해서 봉황문을 비롯한 화려한 문양.

 

   현재로선 이 양식이 언제, 어떻게 대리에서 고려로 전해졌는지 알 길은 없다. 어쩌면 1230년 이전에 정상적인 교역로를 통해서, 즉, 대리에서 장강을 타고 남송으로, 남송에서 다시 바닷길로 고려로 들어왔을 수도 있고, 혹은 이를테면 1253년에 몽골이 대리를 멸망시켰을 때 약탈한 보물들 중에 베일이 있는 '관음보살도' 같은 것이 들어있다가 1270년대 초반에 고려 왕실이 원 황실과 밀착했을 때 유입된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 작품의 존재가 함의하는 바는, 적어도 1270년대 초중반까지는 이 베일이 고려에 들어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13세기 말 이후 고려불화의 큰 특징인 '고도의 장식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재발견되어, 1310년엔 이미 김우(대표화사)의 작품(현 일본 경신사鏡神社 소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완성되었다는 것이 우리가 추측하는 '수월관음도 베일의 역사'다.

 

 

~ 6.16(일)까지(석가탄생도는 5.5까지만 전시하고 철수한다니, 이제 딱 3일 남았다).

  1. 박은경, '관음과 모성: 고려 후기-조선 전기 수월관음도',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호암미술관, 2024) p. 287 [본문으로]
  2. 정우택, '신출 고려시대 수월관음도', "동악미술사학" 제2호(2001), pp. 103~120; 정우택 선생은 이 논문에서 이 그림을 14세기 전반기 것으로 봤지만, 14세기 양식과 이질적인 부분에 대한 해명은 주로 판각본이나 불상과 같은 1230년 이전의 작품들에 의지하고 있다. [본문으로]
  3. 국죽순일(菊竹淳一)/정우택, "고려시대의 불화: 해설편"(시공사, 1997) pp. 25~26 [본문으로]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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