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곡은 다음주 초로 다가온 2013년 베를린 필하모닉 내한공연의 핵심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요즘 개인적으로 브루크너가 특별히 '땡기거나' 혹은 브루크너가 전문연주가가 아닌 보통의 음악애호가들이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에, 이것은 이전에 이 블로그에 올린 다른 리뷰들과는 달리 최근에 정밀하게 비교해서 들었던 것이 아니라 기억에 의존한 것이고, 작품개요도 작품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브루크너 교향곡들에 대한 간단한 개관 정도다.)

 

Bruckner Symphony No. 7 in E Major

 

I. 작품개요

- 이 7번은 의심할 여지없이 브루크너 교향곡들 중에서 최고 걸작이다. 브루크너는 우리의 견해로는, 오직 8번 3악장 아다지오(Adagio)에서만 한발짝 더 진보가- 음악적으로 7번 아다지오보다 더 좋은 혹은 나은 세계로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더 넓은 세계로- 있다. 8번의 종악장은 같은 수준의 진보를 이루는 데에는 실패한 시도이고 마지막 9번에서도 더이상 새로운 것을 보여주진 못한다.

-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교향곡 1번은 스케르초, 2번은 첫악장이 제일 들을만 하고, 3번은 아다지오가 아름답다- 즉 드디어 느린 악장을 마스터하기 시작한 것. 이렇게 ‘건축자재building block’들이 하나씩  다 모이자 나온 것이 가장 대중적인 4번 “낭만적Romantische”.  전악장이 다 완성도가 있는 첫 작품인 셈인데 유감스럽게도 음악의 내용이 조금 유치하다는 것이 문제. 자꾸 들으면 질린다. 5번, 6번은 내용적으로 4번보다 더 좋은 음악이지만 7번에 가리는 측면이 있다.

-  그래서 브루크너의 대표작을 하나만 꼽으라면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7번이고, 2개만 듣겠다면 4/7번을 권하게 된다. 시기별 대표작 혹은 ‘샘플’이 되는 셈이기 때문. 이 두 곡을 듣고 브루크너에 매력을 느낀다면 (8-9)-(5,6)-3번 순으로 ‘진도’를 나가게 되고, 이걸 다 듣고도 굳이 더 궁금하다면 결국은 (간혹 ‘0번’까지 포함한) 전집이다.

 

II. 녹음들(지휘자/오케스트라- 녹음 혹은 출반연도순)

 

(i) S

1. Otto Klemperer/Philharmonia Orchestra- 1960

이 녹음의 최대 장점은, 여러가지 악상들이 구조적으로 명확하게 짜임이 해결되지 못하고 난마처럼 얽혀 있는 브루크너를 마치 원래부터 명쾌했던 음악인 것처럼 들리게 하는, '해부학'에 있다. 스코어에 대한 깊은 연구와 이해가 없다면 듣는 사람에게 이런 느낌을 절대 줄 수 없을 것이다. 클렘페러는 베토벤/브람스도 대가지만 언제나 푸르트벵글러에 가리는 느낌은 피할 수 없는데, 브루크너는 다르다. 브루크너에는 클렘페러만이 들려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2. Herbert von Karajan/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1975

카라얀과 베를린필은 정말 환상적인- 우리가 의심하기에는 어쩌면 스코어에 그려져 있는 것보다 더 근사한- 소리를 들려준다. 대신 음악의 내용이 모자라느냐? 카라얀이라는 사람이 실력에 비해서 과도한 권력과 부와 명성과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실력 자체가 없거나 부실한 지휘자는 아니다. 무엇보다 브루크너에는 카라얀이면 충분하다. 어떤 의미에선 브루크너에 푸르트벵글러를 들이대는 것은 닭잡는 데 소잡는 칼을 쓰는 격이다.

3. Eugen Jochum/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1964

남성적이고 강력한, 그리고 '브루크너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는 ‘확신conviction’이 느껴지는 녹음. 이런 확신은 요훔의 베토벤이나 브람스에선 결여되어 있는- 대신 '자제'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ii) A

4. Hans Knappertsbusch/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1949

연주 자체는 굉장히 아름답고, 우리가 좋아하는 음반. 그럼에도 위에 포함되지 않고 한단계 내려온 이유는 40년대 라이브 녹음의 음질도 약간 마이너스(-)지만, 그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 브루크너는 브루크너라기보다는 지나치게 바그너적이기 때문이다. 즉, 바그너에 적확한 접근법으로 브루크너를 같이 처치하는 느낌. 브루크너가 바그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는 해도 음악의 내용, 정신세계는 서로 다르다고 봐야할 것이다.

5. Sergiu Celibidache/Munich Philharmonic Orhcestra- 1994

첼리비다케는 사실 그가 필생의 적수-혹은 원수-로 여겼던 카라얀과 공통점이 적지 않다. 음악외적인 것으로 ‘독재자’ 스타일의 ‘통치’방식에서부터, 음악에 있어서는 서로 특질은 완전히 다르지만 엄청난 소리를- 때로는 음악의 내용보다는 ‘소리sound’에 더 신경을 쓰는 것처럼 들릴 정도로-  빚어내는 장인이라는 것, 본인들은 독일 교향악/지휘자 계보의 적자이고 싶었지만 정작 베토벤이나 브람스보다는 다른 음악들에 더 상대적인 강점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계보에서 유일하게 자신있고 장기라고 할 수 있는 레퍼토리가 바로 이 브루크너였다는 것. 해서 이 녹음 역시 한단계 내려온 이유를, 무론 순전히 주관적인 것이지만,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언젠가 누군가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에게 왜 브루크너를 다시 연주하지 않는지 묻자 “브루크너에는 섹스가 없어”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화인지 아닌지 출처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여기서 필요한 설명을 제공하는데 좋은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비유다. 무슨 말이고 하니 크나퍼츠부쉬나 카라얀의 버전은, 말하자면 브루크너에 없는 '베드신'을 보강한 관능적인 것이고 클렘페러나 요훔의 것은 관능적이기까지 하진 않지만 적어도 ‘육식’은 하는 브루크너라고 한다면, 이 첼리비다케 판은 섹스도 안하고 육식도 안하는 '채식주의' 브루크너라는 것- 여자와 고기를 다 좋아하는 우리가 선호하는 스타일이 전연 아니다.  다만 공정성 혹은 객관성을 위해서,  첼리비다케가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도 다 이렇게 ‘채식주의’ 스타일로 하는 지휘자가 아니라는 점, 해서 이것이 작곡가 브루크너의 원래 의도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는 판단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한다. 어쩌면 스타일이 전연 다른 토스카니니와 첼리비다케가 보는 브루크너의 본질이 똑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니 흥미롭지 않은가?

6. Wilhelm Furtwängler/Berlin Philarmonic Orchestra-1951(Cairo)

이 라이브는 아쉽게도 푸르트벵글러의 ‘베스트 컨디션’이었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가 만드는 음악에는 언제나 부분적인 것이라도 배울 것이 있어서 ‘아, 여기가 이렇게 하는 거였구나', 혹은 '이 대목을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되뇌이게 하는 부분은 충분히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7. Günter Wand/Cologne Radio Symphony Orchestra- 1980

또 하나의 ‘확신conviction’에 찬 브루크너. 자신있게 노래하고, 템포와 다이나믹스를 조절한다. 굳이 흠을 잡는다면 강렬한 개성이 좀 부족하지 않느냐, 클렘페러나 푸르트벵글러 등이 들려주지 않은 뭔가가 확실히 있느냐, 이렇게 힐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냥 듣는 순간 좋은 음악, 'good music-making'이라는 느낌이 오는 연주다. 좋은 음악에 굳이 독창성같은 것을 따질 필요가 있을까?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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