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피아노협주곡 2번 B-flat Major
음반 비교감상 2013. 3. 4. 20:08 |(원래 이 글은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 내한공연 리뷰 전에 올릴 계획이었는데, 블로그 초보라서 스킨, 글쓰기, 올리기, 뭐하나 착착 되는 게 없다보니 순서가 늦어졌습니다. 원래 취지는 공연 전에 프로그램 중에서 비교적 자주 연주되지 않는 곡목을 골라서 좋은 음반들을 소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공연 며칠 전에 편안한 마음으로 한번 듣고 가면 백가지 해설보다 감상에 더 도움이 됩니다.)
Beethoven piano concerto No.2 in B-flat Major, Op.19
I. Allegro con brio
II. Adagio
III. Rondo: Molto allegro
(i) 작품에 대해서:
● 이 작품은 실질적으로는 베토벤의 첫번째 피아노협주곡이다. 1795년 지금은 “1번”으로 되어있는 C Major Op.15보다 먼저 완성되고 초연되었지만, 두 작품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던 베토벤이 여러차례 고치기를 거듭하는 와중에 개정이 먼저 끝난 C major 협주곡이 먼저 출판되었다 한다.
● 모차르트의 그늘이 짙은 작품... 리듬과 하모니에서는 베토벤적인 특성이 나타나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모차르트 협주곡들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고, 내용적으로도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소나타형식을 따르고 있는 1악장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는 오케스트라와 독주피아노 사이에 주제들(thematic materials)을 어떻게 분배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협주곡들은 이런 점에서도 오페라틱한데, 오케스트라의 서주는 마치 오페라의 서곡과도 같이 전체 작품의 얼개를, 분위기를 다 보여주면서도 솔로 피아노의 몫을 잘 남겨놓는다. 여기서 베토벤은 이러한 모차르트의 스타일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모차르트처럼 깔끔하고 유기적으로 처리가 되기보다는 여러가지 주제들이 좀 산만하게 흩어져있는 느낌을 준다. (이는 두 작곡가들의 스타일의 차이 혹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장점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모차르트는 마치 마술사가 모자에서 끊임없이 토끼를 꺼내듯이, 새로운 멜로디를 자연스럽게 이어낸다. 발전부는 간결하게 처리되거나 제시부에서 제시된 주제 이외에 새로운 주제로 구성하는 것도 종종 볼 수 있다. 반면 베토벤의 상대적인 강점은 오페라틱하기보다는 드라마틱한, 기승전결이 탄탄한 구조와, 제시된 주제들를 풍부하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혹은 범인들은 상상해낼 수조차 없는- 가능성을 다 실현시키는 발전부에 있다.) 2악장 아다지오 역시 베토벤의 기준으로는 평균 이하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답지만 몇번 들어서 익숙해질 때까지는 다소 지루한 느낌도 들 수 있다. 3악장 론도는 구조적으로 제일 단순하고 멜로디도 가장 귀에 쉽게 붙는다.
(ii) 녹음들(피아니스트/오케스트라(지휘자)- 녹음연도 혹은 출반(release)연도순)
1. Emil Gilels/Paris Conservatory Orchestra(André Vandernoot)- 1957
길렐스는 1악장에서 베토벤적인 ‘con brio’ 지시를 살리기보다는, 서정성을 더 강조하는 접근을 선택한다. 해석에 맞춰서, 길렐스같은 강철타건의 소유자로서는 톤도 무척 곰살궂다. 다만 해석이나 톤이나, ‘절제’가 잘 되어있다기보다는, 그냥 ‘자제’되어있는 느낌이 더 짙다. 무엇보다 1,2악장에서 평균보다 느리게 노래하는 템포를 설정한 다음에 3악장에선 극적이고 화려한 마무리를 위해서 템포를 평균보다 늦추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악장 사이에 템포 밸런스가 무너져있다. 이런 류의 해석은 라이브에선 괜찮지만 집에서 조용히 감상하는 레코드의 경우에는 연주의 품이 조금 떨어지게 들릴 수 있다. 빠른 악장의 템포를 평균보다 빠르게 잡았으면, 느린 악장도 같이 당겨서 ‘역과장법(understatement)’의 효과를 노리는 게 옳고, 느리게 잡았으면, 마지막 빠른 악장도 같이 늦춰서 끝까지 노래하는 것이 옳다. Vandernoot와 파리음악원관현악단의 협주는 좋게 말해서 ‘거칠다’.
2. Emil Gilels/Cleveland Orchestra(George Szell)- 1968
1악장은 해석의 큰 틀에서 많은 변화를 보여주진 않는다. 다만 2,3악장은 거의 평균적인 템포에 가까워졌다. 약 10여년이 흐른 만큼 길렐스가 더 성숙한 부분도 있겠지만 협연자들 위에 군림하기 좋아하는 지휘자 셸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전성기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협주는 깔끔하다.
3. Wilhelm Backhaus/Vienna Philharmonic Orchestra(Hans Schimdt-Isserstedt)- 1959
박하우스는 베토벤만의 ‘con brio’ 분위기를 살리면서 서정성을 같이 살려낸다. 길렐스보다 템포를 빨리 잡지만, 더 노래가 살아있고, 고전주의의 틀 안에 있는 것 같지만 음악은 더 자유롭다. 아마도 가장 논란의 여지가 있을만한 것은 2악장 Adagio일 텐데, 박하우스의 템포는 Adagio라기보다는 Andante에 가깝다. 간지러운 것을 못 참는 박하우스는 베토벤의 느린 악장에서 평균보다 빠른 템포 선택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만 우리 취향으로는, 이 Adagio는 내용상 이렇게 간결하게 노래해도 충분해 보인다. 이세르슈테트가 이끄는 빈필은, 첫 서주부터 청중에게 쾌감을 선사한다. 이 작품은 베토벤의 기준에서 본다면 ‘범작’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베토벤은 이렇게 노래하는 것이라고 시범을 보이는 것처럼 살려낸다. 이 정도면 협연자와의 앙상블은 특별히 잘 맞춰주지 않아도 용서될 수 있다.
4. Wilhelm Kempff/Berlin Philharmonic Orcherstra(Ferdinand Leitner)- 1962 release
켐프의 해석은 주된 접근에서 박하우스보다는 길렐스에 더 가깝다. 다만 좀 인위적으로 ‘자제된’ 느낌의 길렐스 버전보다는 음악이 더 자연스럽게 흐르고, 감정을 표현한다. 이때의 베를린필은 이미 ‘카라얀의 베를린필’이고, 누가 지휘를 하더라도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낸다.
5. Claudio Arrau/Amsterdam Royal Concertgebouw Orchestra(Bernard Haitink)- 1964
이제와서는 이것도 ‘구식’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름 ‘모던’ 베토벤. 20세기 중후반의, 우리가 ‘카라얀식 미학(Karajan Aesthetic)’이라고 부르는, 그 스타일이다. ‘음악’은 아주 특별하다고 할 순 없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소리, ‘sound’들의 연속이 귀를 즐겁게 한다. 아라우의 풍성하고 모난 데 없는 톤은 라이브로 들었으면 얼마나 귀가 호사했을까 상상하게 만들 정도로 쾌감을 선사한다. 템포는 일관되게 느긋하다. 이런 말하면 화낼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의 견해로는 아라우의 장점은 진짜 명곡, 대곡보다는 살짝 B급스러운 작품을 명곡처럼 고급스럽게 들리게 하는 데 있다.
콘서트헤보는 물론 좋은 오케스트라지만 빈/베를린필을 연속으로 듣고 나면 만들어내는 소리에서 열세가 느껴진다. 콘서트헤보-하이팅크의 협주는 협연자가 쉴 때보다는 같이 연주할 때 부드럽고 성의가 느껴지는 점에서 빛난다.
6. Glenn Gould/Columbia Symphony Orchestra(Leonard Bernstein)- 1957
‘젊은’ 굴드가 ‘젊은’ 베토벤을 연주한다. 템포는 가장 빠르고, 그러면서도 물론 굴드답게 시적이다. 다만 다 듣고 나면 단조로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57년에 우리 나이로 26세. 나중에 다시 녹음했다면 또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들려주었을 것이다. 번스타인과 컬럼비아심포니는 여기서는 자신들의 장점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같은 CD의 3번 2악장에서는 ‘노래하는 오케스트라’임을 보여준다).
7. Rudolf Serkin/Philadelphia Orchestra(Eugene Ormandy)- 1965
제르킨은 길렐스-켐프 라인보다는, ‘con brio’를 살리는 박하우스 접근법에 가깝다. 박하우스만큼은 아니지만, 2악장 Adagio도 평균보다는 빠르다. 특징적인 것은 3악장이다. ‘Molto’는 ‘매우’로 번역될 수 있는, 빠르기를 강조하는 말이다. 즉 3악장 ‘Molto Allegro’는 통상적으로는 1악장 Allegro보다 더 빨라야 한다. 그러나 제르킨은 음악의 내용상, 그냥 무식하게 내달려서는 안되고, 베토벤이 ‘molto’를 붙인 이유는, 너무 위엄있고 당당하게 시작하려다가 템포가 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판단한다. Backhaus도 같은 의견인데, 제르킨쪽이 좀더 확연하게 느긋하다. 실제로 들어보면, 3악장 론도의 첫 주제를 너무 빨리 연주하면, 리듬의 무게감이 잘 살지 않는다. 해서 템포 설정 자체는 설득력이 있지만, 문제는 1악장은 물론 2악장 Adagio도 평균보다 템포를 당겨놓았기 때문에, 밸런스가 살짝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르킨의 가장 성공적인 녹음은 아니다.
8. Rudolf Serkin/Boston Symphony Orchestra(Seiji Ozawa)- 1984
제르킨이 1903년생이니까 80대의 녹음이다. 팔십노인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테크닉을 잘 보존하고 있지만, 터치가 약해진 것은 확연하다. 이 글에서 커버한 8개 녹음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그리고 아마도 인간이 들려줄 수 있는 한계내에서 이보다 더 아름답기는 힘든- 아다지오를 들려준다. 2악장 하나만으로도 일당백의 가치가 있다. 빨리 치기가 힘들어졌고, 해석도 살짝 바뀌었기 때문에 1,2악장의 템포가 3악장보다 느려진 정도가 더 커서 상기한 밸런스의 문제도 해소되어 있다.
● 선호도: Backhaus=Serkin(1984)>Arrau>=Serkin(1965),Gould,Kempff>2 Gilels
● 해석의 삼각형: Gould/Gilels(1968)/Arrau
(참고) 선호도는 당연히 주관적이고 들을 때마다 바뀔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수준에서 좋은 음반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리뷰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좋은 음반을 리뷰에서 빼먹는 일은 종종 일어나겠지만, 실린 경우는 본문에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모두 훌륭한 음악과 음악가들입니다.
(참고2) ‘해석의 삼각형’이란, 선호도와 관계없이 이 세 녹음을 들으면 이 작품에 대한 가능한 해석, 접근법들을 파악할 수 있다는, 즉 이 작품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법들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녹음들을 3가지 골라서 머리 속에서 ‘삼각형’을 구성해 보는 것입니다. 다른 녹음들은 이 ‘삼각형’의 범위 안에서, 서로 다른 접근법들을 절충한 것으로 위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녹음은 다 서로 다른 것이지만, 원래 ‘분류’라는 게 이해의 편의성을 위해서 어느 정도는 자의적으로 나누는 것임을 감안하면 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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