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봐도 뭘 보여줄 건지 내용을 익히 짐작할 수 있는 전시. 3부(수묵채색화)를 제외하면 대략 연대순 구성이다. 아래는 전시실별 주요작품들.

 

- 제1전시실(1920~30년대)

● 친구의 초상(구본웅);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조에 코와 파이프의 흰색, 입술과 왼쪽(관람객이 보는 방향으로는 오른쪽) 눈의 빨간색이 포인트. 어떻게 보면 반쯤은 자화상같은 느낌의, 대상에 깊이 감정이입이 되어 있는 초상화.

남향집(오지호);  햇살이 환한 아름다운 어느 날을 잘 포착한 그림. 나무와 그 푸른 그림자, 문간의 붉은 옷을 입은 아이와 노란 담앞에서 자고 있는 백구, 그려진 대상들은 모두 색채로 말한다. 아마도 이 시기 한국에서 가장 색채감이 뛰어난 작가중 한사람일 것 같다. 같은 화가의 ● 처의 초상 역시 인물화로는 보통일지 모르지만 이를테면 '인물화의 형태를 빌려온 컴포지션(composition)'이라고 생각한다면 색채의 대조는 좋다.

그 외엔 ● 남자(이마동)/모자 쓴 소녀(임직순); 그림 자체는 위의 2점보다는 개성이 덜 뚜렷할지 모르지만, 각각 카페 여급깨나 울렸을 것 같은 매력적인 1930년대의 ‘모던 보이’와 이젠 흑백영상에서나 볼 수 있는 1960년대말~70년대초의 양장 소녀, 그 시대의 특징적인 인물군을 잘 포착한 작품들.

 

- 제2전시실(1940~50년대)

: 아마도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

 

황소 2점/흰소/통영앞바다/가족/길떠나는가족(이중섭); 대상을 표현하는 선과 색에 감정이 들어있는, 혹은 드러나는 그림들. 우리는 그릴 줄은 전연 모르지만 음악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연습과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재능을 타고 나야 하는 것으로 추측한다. '가족'에 감정이입이 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도- 다른 화가들의 가족 그림을 봐선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있겠지만, '통영앞바다'는 어떤가? 이 작품 외에 다른 곳에서 몇 점 본 것들을 다 포함해서 우리는 이중섭의 풍경화를 좋아하는데 늘 화면에서 어떤 감정을- 때로는 작가가 그 곳에 대해서 느끼는, 때로는 우리의 어린 시절 혹은 옛날 봤던 어떤 풍경의 아련한 추억으로부터 떠오르는-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연관된 것으로 이중섭은 ‘기운생동’이라는 관점에서 봐도 가장 뛰어난 화가다. 기본적으로 대상에 감정이입이 되어있지 않다면, '살아있는' 느낌은 당연히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동양화를 했어도 안중식(1861~1919) 이하보다는 잘하지 않았을까?) 황소는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소재. 마치 뼈만으로 표현된 것 같은, 굵은 선들이 모아서 이루어지는 황소는 누가 봐도 강렬한 느낌을 준다. 소그림 3점이 소를 표현하는 기법은 기본적으로 같지만 전신이 그려진 황소의 회색/갈색이 섞인 색조에 대비해서 옆에 걸린 포효하는, 혹은 울부짖는 것 같은 황소 옆의 붉은 배경색은 전체적인 그림의 느낌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든다. 마찬가지로 흰색, 회색을 많이 쓴 ‘흰 소’는 똑같이 한발을 들고 달려나가려고 박차를 가하려는 듯한 자세지만 또 전연 다른 느낌.

골목안/절구질하는 여인/노상/빨래터/농악(박수근); 박수근의 장점이라면 소재와 기법의 완벽한 조화- 즐겨 그리는 소재들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독창적인 기법을 얻었다, 혹은 발견했다는 것. 1전시실의 '홍선'(김인승)/'저녁준비'(조병덕)과 비교하면 박수근이 왜 대가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전시실의 두 작품도 잘 그린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 그림들을 보고 가서 다시 보면 명절에 한복입고 TV에 나와서 장기자랑하는 외국인들을 보는 느낌이 든다- 바로 정확히 소재와 기법의 ‘부조화’. 어떤 의미에선 박수근이 한 것은 본질적으로 풍속인물화- '풍속'보다는 '인물'에 강조점이 찍혀 있는- 이고, 단지 그것을 서양화기법으로 했을 뿐이다. 단원이 선과 구도의 동세로 역동적인 인물군상을 포착했다면 박수근은 선은 단순하고 직선적이고, 면의 색과 질감으로 독특한 스틸컷을 만들어낸다. 흰색과 갈색을 기본으로 인물의 형태와 원색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부터 거의 완전히 묻히는 것까지 변화하는데 우리가 보기엔 인물화의 경우에는 딱 중간 정도, 두터운 표면의 질감 안에 인물들이 살짝 숨은 듯이, 한 겹 안에 들어있는 듯이 보일 때가 가장 효과적이다. 마치 또다른 화면, 공간 안에 들어있는 느낌+ 과거 어느 순간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이 동시에 느껴지기에 명암도 원근법도 필요없다. 평면이지만 시공간을 창출해낸다.

아마도 굳이 단점을 지적한다면, 상대적으로 작품세계가 좁아 보인다는 것- 그림마다 질감은 달라도 어떻게 보면 다 똑같은 그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이중섭이 처음부터 ‘경양식’ 간판을 내걸고 여러가지 '경양식’ 메뉴로 영업했던- 우리나라의 '중국집'에서 파는 요리가 진짜 '중국'요리가 아니듯이, ‘경양식’도 ‘양식’은 아니다- 식당 주인이라면, 박수근은 압력솥에 가스렌지, 수입쌀과 고기를 썼지만 사실은 ‘장국밥’ 메뉴 한개만 팔았던 식당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다 '한식'임은 물론이요, 어쩌면 한식 요리 혹은 식자재를 모티브로 예쁘게 꾸민 코스 요리를 내놓는 수상한 '한식 세계화' 집들보다도 훨씬 더 한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외엔 ●가로수/가족도/모기장(장욱진; ‘모기장’의 해학에 오면 빙그레 안 웃고 버틸 사람이 있을까?), ● 절규(권옥연; 관객에게 수수께끼를 던지는데 성공한 작품), ●길동무/군상(김흥수) 등이 볼 만한 작품들이고 유영국의 '산'도 같은 화가의 4전시실 작품들보다는 이쪽이 나아 보인다.

 

- 제3전시실(수묵채색화)

전통기법에 충실한 그림들은 '화려했던 옛 영화'에 자꾸 비교가 되고, 가려지고, 반면 서양화 기법을 도입한다든지 뭔가 새로운 '현대화' 시도를 한 그림들은 완전히 성공적이진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 군작도/아악의 리듬/보리타작(김기창); 한 눈에 들어오는 개성은 있지만 품은 떨어진다는 느낌.

 

- 제4전시실(1960~70년대; 추상화)

● 폐왕의 환상/애정/태고상(남관); 적어도 ‘표현효과’라는 것을 얻고 있는, 인간의 시각이라는 감각에 어떻게 하면 충격 혹은 인상을 줄 수 있는지를 체득하고 있는 작품들. 이 방의 다른 작품들은 이 3점에 비하면 엷거나 힘이 약해 보인다.

 

***

 

- 작년 이맘때 이곳 덕수궁미술관에서 체코 프라하국립미술관 소장품전을 했었다. 그쪽은 '근대미술전'이라 우리보다 대략 한 세대 이상 연대가 빨랐던 것 같긴 하지만 성격이 비슷한 전시여서 자연스럽게 비교를 하게 되었는데 기억이 확실친 않으나 전반적으로 보면 기술적으로 그쪽이 우위에 있었다는 느낌. 체코가 우리 인식엔 주변부 같아도 동일한 유럽 문화권 안에서 흡수하고 같이 쌓아온 전통의 차이가 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궁금한 점은 그때 전시에서 체코의 국민화가라는 바츨라프 슈팔라의 풍경화가 기억에 남는 작품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서는 ‘금수강산’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아주 잘 된 풍경화는 보지 못했다는 것. 어쩌면 3부(수묵채색화)에 '풍경화'라고도 볼 수 있는 산수화들이 많이 몰려 있으니까 서양화 쪽에서는 다른 장르에 더 초점을 맞춘 작품선정상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혹 우리나라에는 아직 슈팔라만한 풍경화가 없는 것인지?

 

- 연대를 위로 더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겸재나 단원을 능가하는 동양화를 이 땅에서 다시 볼 수 있을지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선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고 전통의 무게가 비교적 가볍다는 것은 미래의 한국(서양)화가들에게는 행운일지도 모른다. 불과 1백년을 했을 뿐이니, 앞으로 어떤 천재가 나올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한국 서양화의 전성기는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있을 것이고, 이 전시의 이중섭과 박수근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3.30(일)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요금은 어른 기준 6천원. 자세한 정보는 공식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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