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보도자료 하나 없이 ‘스텔스’ 교체를 감행한, 국립중앙박물관 서화관 회화실 부정기 교체전시. 아마도 11월말에서 12월 초 사이에 교체한 것으로 보이니까 관례상 2월말정도까진 최소한 걸려있을 것이다. 아래는 실별 주요작품들.

 

I. 풍속화실

● 타작/자리짜기(단원); 계속 넘어가고 있는 단원풍속도첩중 2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백문이 불여일견.

선유도(김석신);  운치가 있는 그림. 상단의 바위나, 가운데  물결 헤치고 배 띄운 청량함, 하단에 구불구불 나무가 죽 이어지는 선들의 짜임이 모두 솜씨가 있다.  화가는 화원 김득신의 형제인데 그림은 간송 정기전에 나오는 소품들 외엔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리고 기억이 아주 확실하진 않지만 우리가 본 중엔 이게 제일 잘된 것 같다는 느낌.

경작도(작자 미상); 전체적으로 솜씨가 특별하진 않다. 다만 마지막 8폭에 산에 마치 가시를 박듯이, 두르듯이, 나무에 눈 내린 모습을 묘사한 것은 도리어 독특한 효과를 얻었는지 모른다.

 

II. 인물화실

임매 초상(한정래);  옷자락이나 서안, 그 위의 소품들은 18c 조선후기 초상화 전성기 스타일을 보여주는 탁월한 솜씨. 회화적으로만 보면 얼굴은 약간 답답한 듯, 단조로운 듯한 표정/느낌이 옷이나 소품보다 품이 떨어져 보이는데 전시설명의 자찬을 읽어 보면 약간 꽁하고 꽉막힌 구석이 없지 않은 것이 도리어 초상화의 주인공의 성격을 딱 잘 묘사한 듯 보인다. ‘시화합일’의 경지가 아니라, 보기 드문 ‘찬화합일’의 경지라고 해야할까? 그림을 보고 임매가 지은 찬문이 그림을 살린 것인지, 아니면 화가가 딱 임매의 성격을 잘 드러내게끔 그린 것인지는 잘 알 수 없다.

이사경 초상(작자 미상); 지난번 ‘조반 초상'(조선 전기)에 이어서 이것은 조선중기, 1600년대 작품. 연대가 사이에 낀 만큼 어떻게 보면 고려말/조선전기와 공통점이 있어보이고, 어떻게 보면 조선후기 초상화와  더 닮아 보인다. 세련된 18c 초상화를 보다가 보면 처음엔 투박하게만 보이지만, 어떤 의미에선 바닥에 채전이나의복의 처리같은 것은 단지 초상화의 ‘공식’이 다를 뿐일지 모른다. 얼굴도 마찬가지, 보다 표현법은 단순하지만 표정이 죽어있진 않다. 전체적으로 ‘기’, 혹은 '힘차다powerful'는 면에선 18c보다 앞선다는 느낌. 즉 18c 이후 초상화는 세련된 대신 섬약해진 것으로 보인다는 것. 16c 후반~17c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수준의 화가가 그린 초상화를 봐야 더 확실할 텐데 아마도 남은 것이 그리 많지는 않을 듯 하다.

달마도(김명국); 미술 교과서의 단골 손님이라서 누구에게나 친숙한 그림. 선 몇개로 망토같은 의복을 전부 묘사했는데 하나하나가 절묘하다. 그렇게 아꼈던 붓질이 얼굴에 눈썹이나, 콧수염, 턱수염엔 또 아낌이 없다. 그러면서 얼굴을 더 흐린 색, 옅은 색으로 처리했는데 실제 그림을 보면서 반대로 얼굴을 진하게 그리고 의복을 옅은 먹으로 그렸으면 어떻게 보였을까 상상해보기 바란다.

이길보 초상(작자미상); 풍성한 관복의 볼륨감이나 흉배/관모의 처리는 나쁘지 않고 얼굴도 전반적으로 S는 아니지만 A급. 의자의 호랑이가죽이 묘사가 좀 대충인 것이 흠일까?

 

가운데 작은 진열장:

윤봉구 초상(작자 미상); 옷과 모자에 음영은 안 넣었을 망정 터럭이나 얼굴 묘사는 최상급. 무엇보다 약간 가늘게 뜬 눈이며 표정에서 ‘인간성’이, ‘성격’이  엿보인다. 대가의 솜씨.

신선도(전 조세걸); 이것도 전칭작이지만 바로 지난번 전시되었던 것보다 낫다(같은 화첩을 넘긴 것 같은데 혹 다른 것인지?). 그림 왼쪽 신선이 걸터앉은 바위에서부터, 아마도 동굴의 입구인양 자연스럽게 반원을 그리면서 원형으로 짜이고, 밖으로 보이는 폭포- 전반적인 구도의 짜임새가 뛰어나다. 인물, 신선들의 표정도 살아있어서 보다 화가의 명성에 부합하는 작품. 그림은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부드럽고 부티나는데 본인이 집안이 부유해서 나오는 개인적인 특색인지, 혹은 평양- 고조선시대부터 오랜 고도이고 물산이 풍부한 서북의 중심도시였던- 지방색인지?

왕희지고사인물도(심사정); 난간의 사자상이라든지 돌의 무늬라든지, 돌다리 묘사가 뛰어나다. 인물은 그 다음이지만 역시 나쁘지 않다. 재미있는, 좋은 소품.

 

III. 산수화실

산수도8폭(이인문); 보존상태가 썩 좋진 않아서 담채 효과도 잘 볼 수 없고 이인문의 것은 상태 좋고 더 잘 된 그림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있지만, 우리가 '쾌락주의 산수화'라고 부르는, 이인문의 스타일은 충분히 볼 수 있는 작품.  아래 겸재 그림과 비교해본다면 회화의 테크닉 자체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이인문이 더 나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산이 ‘살아있지’ 않고 특별하지도 않다는 것. 대신 마치 바위와 꽃과 나무와 새와 짐승을 각각 디테일을 잘 그리고 잘 배열한 화훼영모화처럼 산과 물과 집과 행인을 잘 그리고 잘 배열한, 디테일을 보고 있으면 눈에 한없는 즐거움을 주는 그런 그림.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쾌락주의 산수화'의 의미다.  

산수도/여산폭포도(겸재); 이쪽은 산이 살아있다. 보다 산수화의 본질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림들. 여산폭은 우람한 산과 웅장하게 쪼개고 내려오는 폭포의 기세가 잘 어울린다. 너무 우람해서 단조롭지 않게 산의 '어깨'에 해당하는 부문에 인공물들, 탑과 지붕들의 배치도 좋다. 이런 전체적인 구도는 혹 중국화의 선례를 그대로 베낀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소화는 완벽하다.

산수도(전 이징); 지금까지 본 이징의 전칭작 중에는 그림이나 보존상태나 가장 나았던 작품. 다만 구도가 수평선 일색, 이것을 근/중/원경으로 3겹 겹쳤기 때문에 전시설명대로 원경으로 갈 수록 강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드는 차별화가 좀 있긴 하지만 짜임이 재미가 적다. 진품인 아래 ‘화개현구장도’를 보면 같은 수평선구도에 크기는 1/3 정도밖에 안되지만 짜임이 훨씬 재미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무나 인물이나 짧은 선들도 이쪽이 전반적으로 정적이고 기세가 약하다. 솜씨 좋은 모작이 아닐까? 물론 전체적으로 그림의 분위기를 정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것일 수 있어서 어차피 답은 없는, 재미로 해보는 추측.

● 화개현구장도(이징); 이것도 화가의 실력의 전모를 알기는 부족하지만 안본 사람은 필히 한번 봐야 하는 그림. (그림 제목은 정여창의 옛 별장을 그렸다는 뜻인데 정여창은 하동 정씨, 해서 ‘화개’는 조영남이 부른 '화개장터'의, 전라/경상도 접경의 바로 그 화개다.)

산수도(작자미상); '학포사(학포가 그렸다)'고 되어 있고 낙관도 있는데 전시설명에 '작자미상'으로 해놓은 것을 보면 학포는 양팽손의 호가 맞지만 진짜라고 확증할 수 있는 근거는 없는 모양. 그림은 좋아서 품이 있는 산수화고 단점이라면, ‘3단분할’은 했지만, 근경부터 원경까지 바위산들이 크기나 준법이나 크게 차별화된 것이 없어서 공간감을 주는데 실패했다는 점. 이외 다른 디테일은 흠잡을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여기도 가운데 작은 진열장:

풍악도첩중 금강내산총도(겸재); 36세때 작품. 전시설명에 따르면 기년이 있는 것 중 가장 빠르다고 한다. 겸재의 작품으로 잘된 쪽에 속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산/바위/나무/집 묘사에서 이미 기본적인 기법은 다 볼 수 있다.

북관수창도중 조일헌(한시각); 1644년작. 풍속화실에 안료설명과 함께 고정인 '북새선은도'와 같은 화가가 같은 기회에 그린 것이다. 그림은 부감법을 모범적으로 사용한, 보는 재미가 있는 그림. 능란한 솜씨.

 

IV. 화훼영모사군자실

화조도6폭(신명연); 바위나 새는 유치함을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고 화사한 꽃이 가장 좋다.

화접도대련(남계우); 이 방에 안 걸려있을 때보다 걸려 있을 때가 더 많은 그림. '남나비'의 실력을 볼 수 있는 대표작이긴 하다.

묵모란도(심사정); 이것도 최근 격년에 한번쯤은 걸렸던 것 같은 이 방의 단골 손님. 풍성한 모란이 멀리서 봐도 좋고 가까이서 봐도 좋다.  ‘발묵법’의 진수- 어떤 채색모란도 이보다 더 화려하진 않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심사정은 산수화 제작은 좀 줄이고 이런 것을 더 많이 그렸으면 후세를 위해선 더 좋았을지 모른다. 아무나 이만큼은 못 그리는 그림.

화조영모10폭병풍(장승업); 개든 게든, 꽃이든 나무든 바위든, 보는 눈에 즐거움을 주는 그림. 장승업의 화조영모 중에서도 잘된 작품에 속할 것이다.

묵란도(전 흥선대원군); 왜 묵란도에, 더 나아가서는 사군자에 ‘여백’이라는 게 있는지 반면교사가 되는 작품. 허공에 떠 있는 난초들이 구도상 어우러짐이 없이 좀 뜬금없다. 진짜가 아니거나 흥선대원군의 실패한 실험작이거나, 둘 중 하나일 듯.

 

여기도 가운데 소품 진열장:

● (선면)화조도(신명연); 우아함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신명연 작품으로는 본 중에 가장 품이 있는 그림.

흑구도(김두량); 흠잡을 데가 별로 없다. 주인공인 '검둥이'는 말할 것도 없고 배경도 위의 나무나 아래 풀이나 선이 간략하지만 형태의 핵심을 놓치지 않고 또 살아있다. 능란한 화가.

 

한가지, 여기저기 전시설명에 제시의 번역을 친절하게 잘 달았는데 기왕 일하는 김에 한자원문부터 다시 인쇄하고, () 안에 독음, 그 다음에 번역, 이 순으로 설명을 작성하면 더 좋을 것이다.

 

V. 궁중기록화/민화실

사직단국왕친향도(8폭병풍); 지금은 대충 복원의 ‘시늉’은 해놓은 사직공원의 옛 모습을 그린 것 외에도 제례의 절차를 빼곡하게 적은 병풍. 회화적인 것보다 중요한 기록으로서 사료가치가 더 클 것 같다.

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 제목만 보면 어디 관청이나 누각이나 이런 곳이 배경그림이어야 할 것 같은데 서왕모 요지연도 형식을 그대로 빌려온 것이 흥미롭다. 그림 자체는 훈련받은 화원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볼 만한 수준.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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