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편 마지막에 우리가 제시한 그림은 이당 전칭의 '좌석간운'(李唐 坐石看雲)이다. 역시 이당의 것은 아니지만 남송 것으로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혹 연대가 더 내려간다 하더라도 (변각구도는 공통점이지만) 통상적인 명대 마하파-절파 계통 그림하고는 세부 필법이 달라서 우리가 보기엔 장로/장숭과 연관짓기는 쉽지가 않다. 그리고 우리가 지적하고 싶은 바는- 이 ‘적벽도’가 거슬러 올라가면 남송에서 기원했다는 것이 아니라- 전편에서 이미 강조했듯이 묵법이나 필법과 결합시켜서 같이 보지 않고는 삼각형 같은 ‘기본 도형’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 그림의 구도에 관한 한 '후기 절파설'은 쓸만한 논거가 별로 없고 15세기, 그것도 거의 1470년 이전에 성립된 형태를 그대로 답습했을 것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므로 이 그림을 '절파'- 비록 이것이 실체가 아리송한, 명대 회화사를 떠도는 유령 같은 개념이라 할지라도- 계통과 연관시킬 수 있는 단서는 구도가 아니라 산수/인물의 세부 필법에서 찾거나, 혹은 (전편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모델인 '계당시의도'가 과연 대진의 진작이 맞느냐, 절파 후기 것은 아니냐는 데서 찾아야 하는데 이하에서 보면 알겠지만 두번째 문제를 추적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첫번째 문제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 한편 이번 편이 굳이 '부록'이 된 한가지 이유는 우리가 실물을 못 본- 즉, 최종확인을 거치지 않은- 그림이 여러 장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정도 해상도가 되는 이미지가 이용가능한 경우만 취급했기 때문에 실물을 보고 나서도 결론이 바뀔 가능성은 별로 없다- 사실 종이와 비단에 그린 그림은 빛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전시에 나와도 조명이 워낙 어두워서 세부 필치를 정밀하게 비교분석하는 데는 전시실에서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는 고해상도 이미지가 더 나은 면이 있다. 그리고 같은 보존상 이유로 주로 수장고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동양화는, 미술사 기본서에 수록될 정도의 작품이면 소장처에 가면 그대로 걸려 있는 경우가 많은 서양화와는 경우가 달라서, 보는 사람의 '의지'만으로는 언제 다 보고 포스팅을 할 수 있을지 기약도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용상 들어가야할 순서에 맞춰서 지금 여기에 넣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게 우리의 판단이다.)

 

2.A '계당시의도'의 정체

   일단 우리가 아는 그림 중에 '계당시의도'의 필법과 유사점이 가장 많은, '원천'으로 보이는 것이 아래 그림이다. 화가와 그림의 이름을 묻기 전에 먼저 '계당시의도'의 이미지를 다른 탭 혹은 창에 띄워놓고 'one-click'으로, 즉 잔상이 사라지기 전에 번갈아가면서 두 그림의 세부를, 준법 vs. 준법, 나무 vs. 나무, 물줄기 vs. 물줄기, 이런 식으로 비교해보길 권한다- 와인만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실 음악이든 미술이든 우리의 오감에 의존하는 대상들을 평가할 때는 '라벨'과 함께 '선입견'을 제거하고 감각에만 집중하는 것이 안목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냥 막연히 들여다보는 게 어렵다면- 그리고 이것은 이미 이 그림을 알고 있는 분들도 함께- '닮은꼴 찾기'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아래와 같은 공통점들을 한번 찾아서 확인해 보기 바란다.

(i) 산봉우리들이 용틀임하듯 지그재그로 쌓여올라가면서 만드는 전체적인 모양과, 또 마치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섬세한 붓질로 동심원을 그리듯 포물선을 겹겹이 쌓아서 표현한 각각의 산봉우리들

(ii) 근경의 나무의 끝쪽 가지에서 보이는 윤곽선 없이 굵고 진한 선으로 날카롭게 그은 '해조묘' 수법의 나뭇가지 표현

(iii) 마치 계화를 그리듯이 반듯한 선과 '블록'으로, 질서정연하게 정리해 놓은 폭포와 특히 시내의 물줄기 표현

(눈썰미가 있는 분들은 이상에서 열거되지 않는 공통점도 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위의 것은 명초의 궁정화가 이재의 '산장고일'(李在 山莊高逸)이다. 이재는 절강성 바로 아래 복건성 출신이고 선덕연간(1426~35)에 화원에 들어갔다. 중국이나 한국의 옛 화가들이 대개 그렇듯 '생몰미상'이지만 대략 대진(1388~1462)과 같은 세대이고, 대진이 40이 넘어서 북경에 올라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나이는 더 어릴 가능성이 있다. 화풍상으로는 명초 이곽파 산수를 대표하는 화가이고 상기 (i)의 산석 표현법은 이재가 원대 화가 성무와 주덕윤을 연구해서 합쳐서 나름 독창해낸 것이다- 모양이 독특하기 때문에 한번 눈여겨 보면 북경고궁 소장 '산촌도(山村圖)'나 '활저청봉도(闊渚晴峰圖)' 같은 그림은 산만 봐도 이재가 아니면 이재를 베낀 것이라고 쉽게 알아볼 수 있다(관심있는 사람은 북경고궁 홈페이지에서 작가 이름으로 소장품 검색을 하면 특히 '산촌도'는 충분히 확대가능한 이미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각주:1]. 이재의 산수화는 선덕화원에서 오직 대진 아래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대진이 궁정화원에 몸담았던 기간이 아주 짧았으리라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에 궁정에서 사실상 산수화 1인자였다는 이야기다- 당대에는 명성이 아주 높았다. 하지만 소주를 중심으로 한 오파가 16c 중엽에 거의 중국 화단 전체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오파 계보가 아닌 화가들은 궁정화원이건 민간의 직업화원이건 도맷금으로 평판이 바닥으로 추락하게 된다(그와 더불어서 원대 회화에 대한 평가도 오파의 '선조'에 해당하는 원4대가가 뜨고 원대 이곽파는 상대적으로 저평가, 직업화가였던 성무 같은 경우는 아예 지하로 내려간다). 이미지가 조금 잘렸지만 화면 우하단에 작게 씌여있는 다섯 글자는 '하양곽희사河陽郭熙寫'라고 적은 것이다. 즉, 이재를 알 만한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화상들에게 특히 중요하게는 비싼 값을 받을 수가 없다는 의미도 되겠다- '원조' 이곽파인 곽희 그림으로 둔갑시켜서 팔아먹었던 흔적이다.

 

   '한양이곽파'와 '북경이곽파' (1)

   : 여기서 잠시 1편의 '조춘도'를 위 '산장고일'과, 그리고 다시 2편의 '몽유도원도'와 비교해보기 바란다. 그럼 이제 왜 우리가 조선이 15세기 전기에 명나라 그림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리라, 북경 화풍을 따라가지 않았으리라고 추론하는지 단서가 보이지 않는가? 이름은 '명대 이곽파'라는데 그림을 보면 이 '산장고일'에 곽희는 흔적만 남아있고 정서적으로는 완연히 '강남스타일'이다. 아마 조선의 사신 중에 그림을 좋아했던 사람이나 사행단에 포함된 도화서 화원은 북경에 와서 틀림없이 '얘들은 요새 뭘 그리나' 궁금해서라도 그림을 얻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보고 나서는 '우리랑은 좀 다른 것 같다' 내지는 '여기선 배울 게 없다'가 결론이었을 것이다. 이쪽은 호기롭게 고려에서 물려받은 원대 화적을 연구해서 산수화의 최전성기인 북송대를 재현하겠다는 판인데 이런 '강남 향토색 짙은 복고', '성무를 이용해서 변화를 준 복고'가 눈에 찰 리가 없다.

   회화에서 안견이 활약하던 같은 시기에 세종대왕이 박연을 시켜서 아악을 정리할 때 주요 과제중의 하나가 바로 북송 휘종이 고려에 전해주었다는 대성(신)악의 복원이었다. 중국에도 쓸 만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원나라 임우가 편찬한 "석전악보"를 이용했다. 바로 원대 이곽파-> 곽희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방법론이다. 아악 같은 경우는 아예 최종목표는 송대도 아니고, 상기 "석전악보"나 송대 음악이론서를 이용해서 주나라 때의 옛 음악의 원형에 최대한 가깝게 가보자는 것이었다. 이제 시대 분위기가 어땠는지 조금 짐작이 가지 않는가? 하지만 곧 보게 되겠지만 회화에서는 이런 사조와 양식에 있어서의 북경과의 '분리(decoupling)' 현상은 한없이 계속될 수가 없었다...

 

   그럼 이 그림과 비교했을 때 '계당시의도'가 갖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흥미롭게도 역시 산과 바위 표현에 있다- 그외 인물이나 수지법, 물결 표현은 대부분 '이재가 도식화된' 형태로 해석 가능하기 때문이다(이를테면 금(琴)을 들고 있는 시동 같은 경우도 대진의 신빙성 있다는 그림에 자주 나타나는 소재이긴 한데 위(우하단)에서 보다시피 이재에도 다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우선 산형이 이재의 것은 포물선+직사각형이 합쳐진 형태라면 '계당시의도'는 포물선+삼각형이다. 이런 산 모양은 이재도 대진도 아닌, 이 화가만의 감각으로 봐야 한다. 다음으로 산/바위 표면의 묘사를 보면 '산장고일'은 섬세하게 먹을 먹이고, 주름을 잡았지만 '계당시의도'는 보다 분방하게, 거의 바위 위에 초서를 쓰듯이 붓을 놀린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실상 아이디어 자체는 새로운 것은 아니고, 소위 '송인구학 원인필묵(宋人丘壑 元人筆墨)' 하는 그 '원인필묵'의 명대 버전이다. 해서 대진이나 오위도 산수화를 그릴 때 다 자기 식의 '원인필묵'을 구사하지만 이 정도로 현란한 '나선형' 필법은 주단까지 와야 한다.

   주단(朱端)은- 절강성 출신이고, 역시 '생몰미상'이다- 정덕연간(1506~21)에 북경에서 가장 '핫한' 화가였다. 정덕제때부터 화원 규모가 축소되고 쇠락기로 접어들기 때문에 사실상 궁정화원의 전통을 계승한 마지막 대표주자 격이다. 실제 화풍 역시 이곽과 마하, 성무까지 명 전기 궁정회화의 주요한 흐름은 다 구사했다. 아래 이미지가 제시된 작품은 이곽파, 대북고궁의 '심매도(尋梅圖)'는 마하파 전통에 보다 가깝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서예적인 필법을 적극 활용한- 준법 아닌- 준법이 공통점이다. 주단은 묵죽에도 능했고, 묵죽에 능한 사람은 대개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는 법인지라 산수화에서도 자기 장점을 최대한 살린 필법을 구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지출처= 소장처= 스톡홀름 극동고대유물 박물관)

 

   위의 것이 바로 주단의 'Grand River-Landscape'이고- 박물관에서 붙인 명칭을 그대로 영역해서 이름이 좀 어색한데, 소장처도 유럽이고 우리가 참조한 자료는 미국 것[각주:2]이라 중화권에서 어떤 명칭으로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다- 주단식 이곽파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북경고궁 소장의 '연강원조도(烟江遠眺圖)'도 이와 대동소이한 스타일인데 소장처에서 이 정도 해상도가 되는 이미지도 제공하지 않는다). 화풍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이재의 이곽파가 '성무+주덕윤'이라면, 주단은 '성무+당체'라는 것이다. 즉, 강남의 선배 직업화가 성무의 영향은 공통적이지만 원대 이곽파 안에서 상대적으로 더 닮은 모델이 다른 것이다. 이제 국부를 확대한 이미지를 찾아서 주단의 산석묘사법을 확인해 볼 차례다.

 

(이미지출처= 소장처= 스톡홀름 극동고대유물 박물관)

 

   보면 우상단의 키작은 두번째 봉우리라든지, 여기저기서 부분적으로 초서를 연상시키는 '현란한' 붓질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계당시의도'의 기법/필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곧, 이재식 '크레이프 케이크'를, 각 한겹 한겹은 (이재가 아니라) 주단식 필법으로 그려서 쌓아올린 것이다. 단순하게 한 화가를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나름 응용/융합이 되었기 때문에 알아보기 조금 까다로운 경우다.

   한데 왜 주단이었을까? 그것은 이미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대로 주단이 명대 이곽파의 사실상 마지막 주자였기 때문이다. 즉, 말하자면 당시의 '신이곽파(=주단)' 기법을 섞어서 '구이곽파(=이재)'의 그림을 재해석한 것이다. 결국 '계당시의도'는 철저히 명대 이곽파의 전통 안에 있는 그림이고, 대진의 '대'자 하고도 관계가 없다- 연관시킬 수 있는 부분은 사실상 '문진사文進寫'라고 쓴 가짜 서명과 도장 2개뿐이다. 연대나 시대분위기상-명청회화란 한마디로 '혼성모방'의 시대다- 대진이 그림 공부를 위한 습작이건 친분있는 수장가에게 모사를 부탁받았건 이곽파 화풍의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지만, 대진 정도 수준의 화가라면 이곽파를 해도 '대진식'으로 해야 말이 된다. 예를 들어 이재와 동시대에 활약한 마식의 '춘오촌거'(馬軾 春塢村居)는 언뜻 보기엔 위 '산장고일'과 아주 비슷하게 보인다- '같은 세대'고, '같은 (이곽)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준법이나 수지법이나 물결표현이나 세부 필치는 전부 다르다. 마식이 무슨 이재의 문하생도 아닌데 당연히 마식한테는 마식의 습성이, '마식 스타일'이 있는 것이다. 반대로 이 '계당시의도'처럼 겉보기엔 좀 달라 보이는데 구석구석 들여다보니까 이재 필법이 나온다는 것은, 그냥 문자 그대로 '언어도단'이다. 해서 이 그림은 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굳이 대진 필법을 찾아볼 필요조차 없는 경우다- 설사 찾아낸다고 해도 당연한 논리적인 귀결은 이재와 대진을 같이 섞어서 배운 후학의 그림이라는 것이 되지, 대진(혹은 이재)의 작품이 되진 않기 때문이다(학생들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 대진의 신빙성 있다는 작품들을 죽 펼쳐놓고 이 '계당시의도'에서 '이재에는 없고 대진에만 있는' 필법을 한번 찾아보면 눈을 훈련시키는데 좋은 공부가 될 테니 한번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하 2.B/2.C에서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계당시의도'에 주단 필법이 섞여있다는 것은 16c초 이후의- 공교롭게도 주단이 북경 화원에 들어간 해가 기록에 의하면 정확히 1501년이다- 작품이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우리의 주제인 '적벽도'의 제작연대의 상한 역시 아무리 일러도 1501년일 것이다.  또한 상기했듯이 15세기식 구도를 그대로 답습했다는 점과 전편에서 설명했듯이 모델이 될 만한 절파 회화의 부족으로 인한 '돌려막기'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은 16c 전반기에서도 다시 앞쪽 절반, 1525년경 이전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함의할 것이다.

   이제 우리의 주제에 필요한 핵심정보는 다 얻은 셈이지만, 아직 연관된 상고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남아있다. 곧, '계당시의도'가 과연 적벽도의 모델이 된 그 그림이 맞느냐는 것이다.

 

   2.B '추림독서도'의 존재

   사실 '물리적'으로는 아니라는 게 자명한 것이, 맞다면 지금 요녕성박물관에 있는 '계당시의도'가 조선으로 건너왔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압록강 건너로 되돌아갔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썰렁했다면 미안한데, 요새 날씨가 너무 더워서 우리도 글쓰기가 힘들다). 즉, 지금 문제의 요점은 '계당시의도'의 모사본이 조선으로 건너와서 '적벽도'의 모델이 된 것이냐, 아니면 어떤 '공통의 조상'에서 각자 갈라져나온 것이냐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는 이번에는 중국도 한국도 아닌, 일본에 있는 주덕윤 전칭의 '추림독서도'(朱德潤 秋林読書圖)라는 작품이다.[각주:3]

 

(이미지출처= 소장처= 동경국립박물관)

 

   소장처에서 제공하는 이미지가 좀 저질이긴 하지만- 놀랍게도 촬영일자는 2013년이다. 우리는 사진만 봤을 땐 동경국립박물관에서 한 90년대말이나 2000년대 초쯤 찍어서 올린 건 줄 알았다- 이 상태로만 봐도 '계당시의도'와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것과, 필력이 느슨한 2류 화가의 솜씨라는 것을 알아보는 데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다. 화면 좌상단의 주덕윤의 자제는 물론 위조된 것이고 이 작품은 박물관측도 위작이라고 이미 인정한 그림이다.

   그나저나 형제처럼 닮은 그림이 중국에 하나, 일본에 하나 있고, '닮은꼴'을 모델로 삼은 것이 명백한 그림이 한국에 또 하나 있다- 이 정도면 애초에 최소한 수십 장은 그려서 팔았다는 의미이고, 그것도 무슨 가게에 들어가면 주인이 펼쳐서 보여주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북경 번화가에 노점을 벌여놓고 지나가던 외국인들 호객해서 팔아먹은 수준이다. 조선인도 왜인도 최소한 한명씩 걸려든 셈인데, 아마 산 사람은 처음부터 가짜인 줄 알고 샀을 가능성도 많다.(봉고차에 싣고 다니면서 파는 명품백 순진하게 진짜로 알고 사는 사람 몇이나 되겠는가?) 또 흥미로운 점은 이재: 곽희= 이재 아류: 주덕윤이라는 '비례식'이다- 즉, '짝퉁'에도 '레벨'이라는 게 다 있다는 이야기다. 이재나 그 모사본을 곽희로 속여서 팔아먹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이재를 베꼈지만) 필력이 많이 처지는 그림을 다시 곽희로 팔아먹을 수는 없으니까, 이건 말하자면 한 등급 아래인 원대 이곽파 주덕윤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원래 위작엔 '증거능력'이라는 게 없다. 이를테면 흥미롭게도 이 '추림독서도'와 '계당시의도'가 서로 가장 닮지 않은 부분도 1사분면의 산봉우리 부분이고 해당 부분이 '계당시의도'보다 이재의 산을 더 닮아 있기 때문에 원본은 이재일 수 있다는 우리의 추측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보는 것이 유혹적이지만, 작자가 처음부터 주덕윤으로 속여서 팔아먹기 위해서 '계당시의도'를 모델로 역으로 1사분면만 이재와 비슷한- 상기했듯이 이재의 '이곽파'가 주덕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기 때문에- 산봉우리들로 '갈아끼워서' 그린 것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입증하려면 굉장히 까다로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속담에 개똥도 약에 쓸 데가 있다고, 이 '추림독서도'가 이 경우엔 아주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준다. 주목해야할 것은 화면 중앙에서 출발하는 첫번째 봉우리의 생김새이다. 무슨 얘긴지는- 우리한테 평소에 정말 없는 '서비스 정신'으로- 아래에 해당 부분만 이미지를 잘라내서 나란히 붙여놓았으니 일단 한번 비교해보길 바란다.

 

 

   보시다시피 왼쪽부터 추림독서도-적벽도-계당시의도 순이다. 먼저 '추림독서도'를 보면 가운데에서 약간 위쪽으로 마치 '풀밭'같이 생긴 부분이 눈에 띌 것이다. 그럼 여기가 '유사 반두(礬頭)'처럼 처리된 이 봉우리의 정상인 걸까? 그렇다면 그 위로 '혹처럼' 붙어서- 더 검고 진하게- 처리된 부분은 과연 뭔가? 이쪽이 정상이고 앞의 '유사 반두'는 오르는 와중에 나타난 지형인 걸까? 어느 쪽인지 제대로 못 알아보겠다고 해도 너무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이건 보는 눈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린 사람이 처음부터 명료하지 않게 잘못 그린- 아마도 이 경우는 베끼다 잘못 베낀-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오른쪽 '적벽도'를 보면, 아예 '풀밭' 주위에 윤곽선을 진하게 긋고 이어지는 '혹' 부분은 생략해서 여기가 정상이라고, 확실하게 봉우리 하나를 마무리지어 놓았다. 그 옆에 '계당시의도'의 경우는 반대로 '풀밭'은 단절되지 않게 하고 음영을 진하게 넣은 '혹' 부분을 그 주위로 완전히 감싸서 아래위를 이었지만 역시 하나의 봉우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게 처리를 했다. 상기한 대로 '추림독서도'는 2류 화가의 솜씨기 때문에 불명료한 처리를 남겨놓았고 밥값을 하는 화가들은 '말이 안 되는' 부분을 딱 알아보고 '말이 되게' 고쳐 그린 것이다. 여튼 이거야말로 컨닝을 하다 보니 '로댕'이 '오댕'되고, '오댕'이 다시 '덴뿌라'로 변했다는 바로 그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결론은 셋다 원본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원본을 직접 보고 그린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적벽도'는 '계당시의도'와 주단식 필법을 공유하기 때문에 같은 계통인 것은 틀림없지만 '공통의 조상'을 가진 것이지 '계당시의도'나 그 모사본을 보고 그렸다고 할 순 없다. 우리도 '추림독서도'를 보기 전엔-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계당시의도'를 누가 잘못 베낀 것이 조선에 흘러들어와서 이런 차이가 났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위에서 보다시피 '계당시의도'의 처리는 너무나 명료해서, 이걸 보고 '추림독서도' 같이 모호한 버전을 그리려면 '2류' 화가로도 부족하고 3류, 4류로 더 내려가야 하니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보다는- '추림독서도'처럼- 원본을 잘못 베낀 모사를 공통의 조상으로 해서 '계당시의도'와 '적벽도' 계통이 갈라져나왔다고 보는 것이 더 개연성이 높은, 합리적인 설명이다. 그리고 원본은 틀림없이 겉보기엔 살짝 모호한 듯 하지만 곰곰히 잘 들여다 보면 이해가 가는 그런 종류의 '모호함'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겉보기 모호함'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를테면 아래 그림 상단 중앙의 주봉과 유사한 경우일 것이다. 

(이미지출처= 소장처= 동경국립박물관)

 

   보시다시피 정면 중간에서부터 무슨 '둘레길'처럼 나선형으로 감아올라가는 이 산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이해하려면 한동안 머리를 긁적이게 된다. 이 그림은 바로 이재의 '산수도山水圖'(http://www.emuseum.jp/detail/100827/001/001?x=-172&y=-73&s=1)이다.

   자, 이제 '계당시의도'의 원본이 대진이 아니라 이재라는 게 더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가? 하지만 이게 확실치가 않다- 우리도 마음 같아선 판이 유리할 때 여기서 이만 접었으면 좋겠는데, 중국 그림 보러 다니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만 사실 중국 회화사에 '확실함' 같은 것이 잘 없다- 아직 제3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이다...

 

To be continued...

  1. 우리가 보기엔 두 작품 모두 '산장고일'과 필력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모사거나 원본을 이용한 '재창작품'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본문으로]
  2. 이 그림과 주단식 이곽파 필법에 관해서는 James Cahill, "Parting at the Shore : Chinese Painting of the Early and Middle Ming Dynasty, 1368-1580"(Weatherhill, 1978) pp. 127~28 참조. 카힐이 글쓰는 요령이 좋은 사람이라 짤막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다. [본문으로]
  3. Richard M. Barnhart, Mary Ann Rogers and Richard Stanley-Baker, "Painters of the Great Ming : the Imperial Court and the Zhe School"(Dallas Museum of Art, 1993) p.194 참조; 미주 11번에 이 그림의 존재와 Rogers의 간단한 촌평이 들어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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