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조선시대 산수도 두 점(국립중앙박물관 서화관)
공연/전시 review 2018. 4. 6. 17:19 |(작년 12월 전시실 개편 공사를 마치고 다시 문을 연 첫번째 전시. 이 그림 두 점이 전시되고 있는 방은 '명품실'인데, 아마도 매번 한두 점씩 선정해서 집중조명하겠다는 취지인 것 같다.)
1. 작품개요: 한 점은 기존 소장품(유물번호: 본 2034)이고, 다른 한 점은 이번에 새로 일본에서 구입해 들여온 것(구 10086)인데, 두 그림 다 화면에 정체미상의 '학포'라는 사람이 쓴 찬시가 있어 이번에 같이 '학포찬 산수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전자는 아직 기존의 백과사전이나 웹에는 '(전) 양팽손 산수도'로 되어 있어 그 이름으로 검색을 해야 이미지 파일이나 내용을 볼 수 있는데 이유는 공교롭게도 양팽손(1480~1545)의 호가 바로 '학포'였기 때문이다.
한데 이 두 그림- 이하에선 편의상 '국박본'과 '환수본'으로 잠시 부르기로 하겠다- 분명히 제작연대도 비슷하고 '필치'도 거의 유사해 보이는데, 우리가 보기엔 유심히 보면 '필력'이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2. 필력의 차이
: 필력이 차이가 난다는 근거는 아래와 같다.
(i) 준법; 이번에 새로 구입한 환수본은 기존 국박본만큼 준법이 효과적으로 구사되지 못했다. 혹 장면이 달라졌기 때문에 표현을 달리한 것인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종이가 더 바래서- 종이 색깔이 서로 살짝 다르긴 하다- 그런 것인지, 몇 번을 들여다 보았지만 우리의 결론은 아무래도 실력에 조금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국박본의 화면 상단 중앙에 (좌상단 최고봉 아래) 나란히 선 두 봉우리에 '주름'을 잡은 부분을 눈여겨보고 나서 환수본을 죽 살펴 보면 그만큼 처리가 잘 된 곳이 없다.
(이하 (ii)/(iii)은 세부 묘사라서 조명이 어두운 전시실에서 육안으로 보긴 어렵고, 반대편에 두 작품을 고해상도로 촬영한 이미지를 대조해서 만든 2분짜리 동영상을 보는 것이 좋다- 화면을 멈출 수 있는 '정지' 기능은 없지만 가만히 앉아서 한 3번쯤 돌려보면 눈썰미 있는 사람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ii) 솔잎 표현; 기존 국박본은 솔잎 '바늘' 한개 한개를 곧고 선명하게 그었고, 또 일정한 길이와 간격을 유지해서 명확하게 타원의 형태를 만들고, 타원이 여럿 겹칠 때도 그 형태가 유지되면서 '질서'가 무너지지 않는다. 이에 비해 환수본은 솔잎의 길이와 간격이 국박본만큼 일정치가 못하고, 타원이 여럿 겹칠 때는 그냥 '난사'를 하듯이 그어서 형태가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늘' 하나하나를 똑바로 힘있게 긋지를 못했다- 즉, 작고 가는 선을 긋는 공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사실 중간 길이/굵기의 획의 수준 차이는 진짜 실력 있는 전문가가 아니면 알아보기 어렵지만 아주 크고 굵은 획이나, 혹은 반대로 확대를 해야 보일 정도로 아주 작고 가는 획은 아마추어라도 주의깊게 보면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공력의 차이가 더 잘 드러나는 법이다. 여기서도 공력의 차이가 가는 솔잎에서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
(iii) 초가지붕; 이것은 가장 쉬워서 그림 많이 안 본 사람도 고해상도 이미지만 있으면 알아볼 수 있다. 국박본은 같은 초가지붕이라도 (화면 하단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에 위치한) 사방이 터져 있는 누각 형태의 것은 윤곽선을 기와집처럼 자로 잰 듯이 반듯하게- 그래서 '계화'라는 이름이 나온 것이 아니던가?- 그렸다. 반면 환수본은 그 차이를 인지하지 못해 (이쪽은 화면 중앙 소나무 옆) 초가지붕의 윤곽선을 똑바로 긋지 못하고 선이 흔들린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초가는 분명 나무 앞이 아니라 뒤에 있건만 초가지붕의 맨 왼쪽 윤곽선이 나무를 침범해 들어갔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창작'을 할 때보다는 보고 베끼다가 범했을 확률이 훨씬 더 높은 실수다.
(혹 전시기간 안에 박물관을 방문할 수 없거나 동영상으로도 잘 안 보이는 경우에는 아래 링크의 논문(http://www.museum.go.kr/site/main/filedown/GoY0xSalutfJyXloQZsKBw)를 참조하기 바란다- 나중에 혹 링크가 깨질 경우에는 미술자료 제92호(2017.12)에서 '國立中央博物館 新受 學圃讚 山水圖'(이수미)를 찾으면 된다. 이것은 박물관 발간 정기간행물이라 홈페이지가 개편이 되어도 어디에든 남아있을 것이다. 초가지붕 묘사 비교는 상기 논문의 도12, 위 (ii) 솔잎 표현은 도6을 확대해서 보면 된다. 고해상도 이미지라 거의 화면을 가득 채울 만큼 확대를 해도 깨지지 않기 때문에 확실히 볼 수 있다.
또, 검색을 하다 보니 '전 양팽손 필 산수도'가 갑자기 작자미상의 '학포찬 산수도'로 둔갑을 하면서 이젠 시도 양팽손의 것이 아니라고 하니 혼란스러워하는 분들이 일부 있는 것 같은데, 위 논문이 최신 논문이고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은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차근차근 읽어 보면 대부분 납득이 갈 것이다. 이런 혼동이 일어나는 근본 원인은 한국이 출판업도 낙후되어 있고 기초 인문/자연과학 분야는 학술 수준도 인구 규모나 국민소득수준에 비해서 낮기 때문에 백과사전 같은 것이 질이 엉망이라, 위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일반인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자료들은 대부분 오류도 많고 업데이트도 잘 안 되는 낡은 것들이라는 데 있다.)
3. 학포는 알고 있었다
우리의 추측으로는 이 신원미상의 ‘학포’ 선생도 둘이 동일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는 모사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근거라면? 기존 국박본엔 학포가 오언율시 하나, 절구 하나, 시를 2수 적었지만 환수본엔 오언절구 하나뿐이다. 전자에서 처음부터- 절구가 아닌- 율시로 시작한 이유는 이 화폭이 바로 계회도 장면이 직접 묘사되어 있는 ‘메인 화면’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꼼꼼하게 화폭을 살펴서 화면의 내용에 충실하게 율시를 한 수 쓰고 나서도 다시 절구를 하나 덧붙인 것은 그림의 감동이 아직도 남아서 쓴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 시라는 게 프로나 아마추어나 마음에 감흥이 커야 쓸 것이, 할 말이 많은 법이기 때문이다. 즉, 모본보다 원본엔 그만큼 감동이 더 컸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학포는 간송 소장 윤두서 '심산지록'이라든지, 다른 곳에도 흔적을 남기고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어느 정도 안목이 있고 소장품이 상당했던 수장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많이 외람되지만- 우리가 보기에 시문의 내용상 이 학포가 그리 썩 대단한 시인은 아닌 듯 싶기 때문이다. 즉, 여기저기서 발문을 부탁받을 만한 실력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흔적이 여러 군데 남으려면- 마치 건륭제처럼- 자기 소장품에 본인이 찬문 남기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을 경우가 가능성이 높다. 늘 같이 찍혀 있는 인장을 '망치재장'으로 판독하는 것이 옳다면 거의 수장인이기 때문에 더욱 유력할 것이다.
우리가 그간 본 경험으로는 대개 옛 사람들이 필력을 보는 눈은 탁월하다- 다만 '고해상도 컬러 이미지'는 물론이요, 공공 박물관도 미술관도 없고, 감정학은 고사하고 미술사학이라는 개념도 정립이 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이라 그냥 필력만 좋으면 연대를 올려잡거나 유명화가의 것으로 전칭을 시킨 경우가 적지 않아서 현대 학자들이 고증을 하면 곧잘 걸린다. 대신 지금 학자들은 시대별로 유파별로 필법의 특징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알고 있지만 필력을 보는 안목, 즉 정작 '잘 그린 그림'이 뭔지 알아보는 능력은 평균적으로 옛 사람들만 못하다고 보인다. 결국 그림의 제작 연대나 화가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필력과 필치를 같이 봐야 한다- 필력이 아무리 좋아도 필치에 후대 양식이 섞여 있으면 연대를 내려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반면 필치가 아무리 유사해도 필력이 약하면 후대의 정교한 모작이거나 아니면 동시대라도 최소한 같은 화가의 작품은 아닌 것이다.
4. 모본이 존재하는 이유
그렇다면 거의 동시에 제작된 것 같이 보이는 두 작품이 서로 필력이 차이를 보이는, 곧 이본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경우에는 정답은 아마 이것이 ‘계회도’라는 데 있을 것이다. 사실 조선전기 계회도는 위에 방목을 떼면 그냥 산수도하고 구분이 잘 가지 않는데 설명을 듣고 나서 보면 기존 소장품은 화면 왼쪽 중간 작은 봉우리 위에 조그맣게- 아마도 시중드는 하인 2인을 동반해서- 네 사람이 앉아서 '계 모임'을 열고 있는 모습이 묘사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계회도란 처음부터 '정본(혹은 선본)'과 그 '모본들'이 함께 존재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장르이다- 여럿이 여행 가서 같이 사진 찍으면 서로 상대방 잘 나온 사진 뽑아서 교환하던 것이나 마찬가지 이치다. 넷이 모여서 모임을 했는데 그림은 한 명만 갖고 싶었겠는가? 그렇다면 이 모사본의 제작과정엔 2가지 가능성이 있다. (i) 원본은 솜씨가 좋은, 이름값이 좀 있는 화가에게 주문을 하고 그림을 받으면 급이 좀 낮은 다른 화가를 고용해서 모사를 시킨다- 이렇게 하면 네 벌을 장만하는데 단가가 싸게 먹힌다. 혹은 (ii) 처음부터 네 벌을 같은 화가에게 주문을 했다면, 이 화가가 원본을 그린 다음에 재미없고 지루한 반복 작업인 모사는 자기 문하생에게 시켰을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정본 내지 선본은 '물주' 혹은 모임의 '좌장'에 해당하는- 어쩌면 붉은색 채색이 된 옷을 입은 그- 인물에게로 가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조선시대 그림 발주 관행에 대한 자료가 없으면 어느 쪽인지 알 길은 없다.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면 느낌상으로는 딱 '소상팔경도'처럼 8폭 한 조였을 것 같이 보이는데- 물론 실제로는 4폭이었을 수도, 10폭이었을 수도 있다- 정말로 8폭이었다고 해도 조선전기 그림이 병풍처럼 하나로 묶여있던 것도 아니고 낱장으로 흩어졌다가 2/8, 즉 25% 확률로 살아남는다는 것이 가능은 하더라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반면 계회의 참석자 수대로 네 벌을 만들어서 각각 나누어 가졌다면, 즉 '여벌'이 있다면 당연히 생존율이 높아질 테니 보다 개연성이 높아진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 모본이라도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이고 정본이 달리 남아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희소 가치'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조선전기 이전 서화는 국내에 남아있는 것이 워낙 없어서 일본이라든지 해외에 나가 있는 것은- 옛날 제국주의 시대처럼 일본을 무력으로 정복해서 도로 찾아올 게 아니라면- 시장에 나올 때마다 능력 되는 사람이나 기관이 웃돈을 얹어서라도 사오는 것 외엔 별 뾰족한 도리가 없다.
두 작품 모두 임란 이전에 태어난 그림들이니 이후에 신세가 꽤 기구했을 것이고, 대략 18c에 학포라는 사람 손에 모였다가, 다시 흩어져서 한 점은 바다까지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둘이 무슨 '보이지 않는 실' 같은 것에 매여있는 듯 하니, 과연 기연은 기연이다.
~4.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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