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ebhaft, leicht.

- 1 -

   해질 무렵, 숲속에서 두 청년이 길을 잃은 듯 헤매이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명은 바로 우리의 콘라드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콘라드는 어느 새 훤칠한 장정이 되어 있었고, 옆에 있는 역시 훤칠하게 잘 생긴 젊은이는 미복 차림이었지만 지금 콘라드가 모시고 있는 왕자님이었습니다. 원래 모든 왕자님들은 궐 밖 세상이 궁금한 법인지라, 왕자님은 콘라드만 데리고 단둘이서 잠행을 나선 길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아직 대로로 통하는 길을 못 찾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앞에 장옷을 입은 처녀가 걷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요하네스, 여자다.”
   “음, 뒷모습은 그렇게 보이네요.”
   “관심 없는 척이냐?”
   “일단 가서 길이나 물어보죠.”
   막상 따라잡고 보니 호오, 이런 시골에 어울리지 않는 미인입니다. 왕자가 ‘(내가 제대로) 봤지?’하는 득의의 눈빛을 콘라드에게 보내면서 처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 근처에 사시나요?”
   그러자 처녀가 장옷을 살짝만 젖히면서 왕자를 돌아보는데 콘라드가 옆에서 보니 청춘 남녀 사이의 특유의, ‘전류가 흐르는’ 시선이 오갑니다. 왕자가 기회를 놓칠 새라 대답을 더 기다리지 않고 얼른 말을 이었습니다.
   “지나던 길손인데 길을 잃어서 그럽니다. 혹 집에 빈 방 있으면 하룻밤 신세 좀 질 수 있을까요?”
   “방이야 있죠. 하지만 권해드리고 싶진 않네요. 위험하실 거예요.”
   처녀가 아닌 척 살짝 눈을 도로 내리깔고 도도하게 매력적인 말투로 대꾸하더니 슥, 가던 길로 걸음을 빨리해서 가버립니다. 왕자님이 고개를 갸웃했고, 콘라드도 미소가 절로 나왔습니다. 재미있는 여자 같습니다.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자기네 집이? 아님 자기가?”
   “쫓아가보면 알겠죠?”
   벌써 왕자의 의중을 눈치챈 콘라드의 대답이었습니다. 사실 왕자는 이미 호기가 한껏 발동이 되어 있었는데, 어차피 달리 잘 곳을 찾기엔 날도 어둡고 숲은 외졌는데다 무엇보다 마녀의 딸이 너무나 예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우리집으로 오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좀 아리송하긴 하지만- 호의 표시까지 하는데, ‘감사합니다!’ 하고 냅다 도망가버리면 어디 사나이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 패기 있는 청춘은 못되겠지요.
   젊은 남자 둘이 풍차를 돌리듯이 빠른 걸음으로 내달으니 여자 걸음으로 아무리 서둘러봐야 따라잡히는 건 금방이었습니다. 처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좋아요, 대신 한 가지만 명심하세요. 집안에선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마시고, 내일 해가 뜨면 바로 떠나셔요.”
   이유는 물어봐야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두 남자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지요.
   “약속을 지킬 수 있다면, 저를 따라오세요.”
   사실 처녀는 새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계모가 마녀였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리고 과학적으로 더 정확히- 말하면 연구를 하다가 중간에 나쁜 길로 빠진 여자 연금술사였지요. 온갖 약을 만들어서 가끔씩 이렇게 길을 잃고 찾아드는 길손들에게 먹여서 ‘임상실험’을 하고- 대개는 ‘영약’을 만들려다 십중팔구는 ‘독약’이 되었기 때문에- 먹고 죽으면 다시 그 시체를 해부하고, 장기를 적출해서 실험을 하곤 했습니다(물론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도, 본인은 점점 늙어 가는데 불로장생약은 잘 안 만들어졌지요, 쯧쯧...).
   그래서 두 사람이 처녀를 따라 집에 당도해 보니 당장 코를 찌르는 약냄새며, 음산한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눈치 빠른 콘라드가 얼른 왕자님에게 눈짓을 했고 왕자님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처녀의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안 이상, 하룻밤 보내고 무사히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였지요- 미녀도 좋지만 일단 목이 성하게 붙어 있어야 연애질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둘이는 늦은 점심을 급히 먹어서 속이 더부룩하다고 핑계를 대고 마녀가 권하는 식사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습니다. 음료는 마시는 척하다가 슬쩍 흘렸는데- 마녀의 눈이 번득이더니만- 다시 가득 채워서 권하는 것도 밤중에 폐를 끼칠 수 없으니까 방에 가서 자리끼로 마시겠다고 슬쩍 들고 들어가서는 역시 창밖으로 다 쏟아버렸습니다.
   다음날 새벽, 문자 그대로 해가 뜨자마자 두 사람은 여정이 급하다고 수선을 떨면서 서둘러 길을 나섰습니다. 마녀는 이제 포기를 한 건지 더 권하는 것도 없고, 별 말이 없었습니다. 한데 마녀의 예쁜 수양딸이 일러준 길을 따라 숲을 거의 다 빠져나온 즈음, 길가에 통통한 산비둘기가 여러 마리 쓰러져 있는 것이 콘라드의 눈에 띄었습니다. 콘라드의 고개가 갸웃, 하고 돌아갔습니다.
   사실 마녀는 전날 밤 두 사람이 자꾸 먹을 것을 사양하는 것을 보고 이미 의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상을 치워놓고 슬며시 두 사람의 방 앞으로 나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본인의 ‘영약’을 창밖으로 다 쏟아버린 게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서 짜낸 ‘비방’으로, 이 시골에서 힘들게 구하고 만든 귀한 재료들을 몇날 며칠을 공들여서 달여가지고 완성한 것을 흙바닥에 다 먹였으니 마녀의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수양딸이야 꿀밤이나 몇 대 쥐어박고 말 일이었지만 이 객들은 괘씸해서라도 꼭 지옥의 불맛을 보여주어야겠다고 결심한 겁니다. 숲에서 빠져나가는 길이야 뻔했기 때문에 마녀는 새벽에 남모르게 일찍 일어나서 한입만 먹어도 치사량인 극독을 먹인 산비둘기를 길목에 내놓았습니다- 보아 하니 어쩌면 어제 점심부터 굶은 푼수들이었으니, 십중 팔구는 걸려들고 말리라는 계산이었지요.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한 콘라드가 주의 깊게 눈꺼풀도 뒤집어 보고 냄새도 맡아보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사실 ‘국과수’도 없던 시절에 사체가 변색이 되거나 해서 외관상 수상한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 독이라는 걸 알 길이 없었지요. 정처 없이 긴 여행을 하다 보면 늘 비상식량이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게 마련이니 그냥 버리고 가긴 아까웠습니다. 이번에야말로 걸려들고 만 걸까요?

- 2 -
   고향을 떠난 콘라드는 이름을 요하네스로 바꾸고 그동안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여러 가지 신기한 모험을- 희귀한 동물들부터 시작해서 이인들, 그리고 목숨이 위험했던 사건들을- 보고 겪었습니다. 이 왕자님의 왕국의 수도에 도착했을 때 마침 일자리가 필요했던 콘라드는 대궐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말을 듣고 바로 찾아갔는데- 어려서 궁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콘라드는 대궐의 법도를 잘 알았기 때문에 빈자리만 있다면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와보니 그 일자리라는 게 바로 말썽을 곧잘 일으켰던 이 왕자님의 시종 일이었습니다. 한데 뜻밖에도 젊은 왕자는 결코 선을 넘지는 않지만 자기한테 비굴하지 않은 콘라드를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게다가 궐 안을 답답해 하던 왕자님은 머나먼 이국들을 돌면서 펼쳐지는 콘라드의 모험담에 완전히 매료되어서 어디든 같이 데리고 다니는 단짝으로 삼았습니다. 처음엔 잠시 일하고 다시 방랑을 떠날 계획이었던 콘라드도 왕자님과 가까워지면서 점차 마음을 열고 계속 머무르게 되었고, 지금은 왕자님이 벼르고 별러 왔던 궐 밖 세상구경을,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일정도 정해지지 않은 장기 여행을 수행하는 중이었습니다.
   다음날은 길을 잃은 건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다시 한번 숲속에서 저녁때를 맞이했는데, 앞에 엉덩이가 달덩이처럼 예쁜 ‘뒤태 미인’이 보입니다. 두 청년은 이번에도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다음 얼른 뒤쫓아 갔습니다. 앞에서 보니 이번엔 기대했던 것만큼 예쁘진 않았습니다만- 어제 그 마녀의 딸이 예쁘긴 좀 너무 예뻤지요- 그래도 눈빛이 선하고 동그란 얼굴이 귀여운 풋풋한 매력이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 앞에서 봐도 몸매가 멋진- 아가씨였습니다.
   “실례지만 이 근처 사시나요?”
   아가씨는 처음엔 경계하는 표정으로 그렇다고, 바로 요 앞에 있는 여인숙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강조해서 말했는데 두 사람이 반색을 하면서 여인숙이라니 마침 잘 되었다고, 지나던 길손인데 잘 곳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고 하니 표정이 변했습니다.
   “숲을 지나서 큰길로 접어드시면 더 크고 깨끗한 여관이 있어요. 좀 멀긴 하지만 서둘러 가시면 자시 전엔 도착하셔서 하루 묵으실 수 있을 거예요.”
   “아니, 바로 코앞에 숙소를 두고 왜 밤길을 갑니까? 우린 한뎃잠도 잘 잡니다. 한 끼 잘 먹고 비바람만 피하면 돼요.”
   “… 저기요, 대접할 것이, 반찬거리가 다 떨어져서 없어요.”
   “그건 걱정 말아요.”
   콘라드가 냉큼 보따리에서 아침에 주워온 산비둘기들을 꺼내어 여인의 눈앞에 흔들어보였습니다- 역시, 부지런히 잘 주워놓으니까 쓸모가 있지 않습니까?
   말이 막힌 순진한 아가씨는 거짓말을 더 지어내지 못해서 쩔쩔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더니 털어놓는 이야기가 자기네 집은 위험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위험해?”
   콘라드와 왕자님은 서로 쳐다보며 웃었습니다.
   하지만 아가씨가 웃을 일이 아니라고 정색을 하면서 이 근방에는 평소에도 이따금씩 산적들이 출몰해서 주민인 자신들도 불안에 떨면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요는 우린 주민이라 ‘보호세’ 내고 그냥 살지만 지나던 객들은 잘못 걸리면 비명횡사 할 수도 있으니 빨리 떠나시라, 이거였지요.
   “무슨 소릴? 이래봬도 내가 별명이 ‘한방에 일곱’이에요.”
   “네?”
   “내 주먹 한방이면 일곱을 해치운다니까? 못 믿어요? 야, 이거 오늘밤 강도나 한 떼 나타났으면 좋겠다. 직접 눈으로 봐야 내 실력을 믿지.”
   얼굴은 기생 오래비 같이 곱상하게 생긴 왕자님이 눈처럼 하얀 주먹을- 사실 거친 일을 해본 적이 없으니 손은 얼굴보다 더 고왔지요- 부르쥐면서 흰소릴 늘어놓으니, 아가씨는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아가씨를 가운데 두고 양 옆에서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다 보니 바로 여인숙에 다다랐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숙은 겉보기엔 그냥 평범한 시골 여인숙이었지만 실은 강도들의 소굴이었습니다- 즉, 떼를 지어 도적질을 다니다가 털어온 물건을 갖다 숨기고, 휴식을 취하면서 정보수집도 하는 본거지였던 겁니다. 그래서 평소엔 보통 여관처럼 영업을 했지만 이따금씩 혼자 온 손님이나 있어 보이는 손님은 밤에 방에서 해치우기도 했습니다. 아가씨는 원래 고아였는데, 여인숙 주인이자 강도들의 모주가 어릴 때 주워다 키운 수양딸 격이었습니다. 여인숙의 안살림과 허드렛일을 했을 뿐 나쁜 짓은 한번도 거들어본 적이 없었고, 늘 양아버지가 강도짓을 그만두었으면 하고 속으로 바랬지만 무서워서 감히 입 밖에 내본 적은 없었습니다.
   여인숙에 들자마자 콘라드는 배낭에 든 산비둘기들부터 탈탈 털어서 주인에게 수프를 끓여달라고 내밀었습니다.
   “두 분 드실 건데 뭘 이리 많이-?”
   “고기 넉넉히 넣고 끓여서 주인장하고 따님하고 다 같이 나누어 먹으면 좋지 않겠소?”
   주인이야 뭐 수지맞았지요. 2층에 있는 그나마 깨끗하고 넓은 편인 방으로 두 사람을 안내하고 음식이 다 되면 부를 테니 내려오시라고 했습니다. 한데 주인이 내려오자마자 문밖이 시끌시끌, 도적질 나갔던 일당들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원래는 이삼일쯤 뒤에 돌아온다던 일정이었는데 이상하게 생각보다 ‘영업’이 잘 안되어서 허탕을 치는 바람에 일찍 돌아온 겁니다.
   일당이 들이닥치자마자 주인이 쉿, 하면서 눈을 찡긋하고 2층을 가리켰습니다. ‘먹잇감’이 있다는 뜻이었지요.
   “뭔데? 좀 있어 보여?”
   “변복은 했는데, 척 보니 귀티 나. 보따리에 값나는 게 좀 들었을 게야.”
   일당은 허탕치고 왔는데 마침 잘 되었다고 반색을 하고는 밤이 좀 더 깊어지면 해치우기로 하고, 먼 길 와서 배고프니 우선 먹을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해서 손님이 가져온 산비둘기 고기를 넣고 끓인 수프를 지들이 먼저 처먹었는데 아뿔싸, 물론 이게 큰 실수였지요. 마녀가 먹인 극독이 수프에 활활 제대로 풀려서 식사가 시작되고 나서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주인을 포함해서 열두 명이 모두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허무한 최후였지요.
   한편 강도의 딸은 수프를 다 끓여놓고 뒤꼍에 나가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습니다. 숲에서부터 왠지 예감이 불길해서 설마, 설마 했는데 일당이 과연 일찍 들이닥친 게 아닙니까? 착해 보이고 잘생긴 두 청년이 당할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안됐어서 살든 잡혀서 죽든 일단 도망이나 치라고 얘기를 해주어야겠다 마음을 먹고, 2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슬쩍 강도 일당의 눈치를 살피려고 부엌 쪽으로 귀를 기울였는데 이상하게 너무 조용합니다. 고개를 빼꼼 드밀어 보니 세상에나, 일당 열둘이 모두 죽어 나자빠져 있지 않겠습니까?
   “정말 ‘한방에 일곱’인가?”
   그렇다면야 물론 딱 두 방이면 심지어 두 명이 남으니까, 큰 소리 낼 것도 없이 삽시간에 금방 끝났겠지요. 여튼 정말인지 거짓말인지는 몰라도 강도들이 자살을 하진 않았을 테니 두 사람이 해치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강도의 딸은 올라가서 방문을 두드리고 두 사람에게 사실을 다 털어놓고 미리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죄를 했습니다. 그리고 금고에서 열쇠꾸러미를 꺼내어 방문을 모두 열고 그동안 일당이 도적질을 해서 모아놓은 재물을 전부 보여주고는, 이것들은 자기 것이 아니니 두 사람의 처분대로 하겠다고 말했습니다.(아마 왕자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뜻도 있었겠지요?) 대충 보아하니 상당한 재산이긴 했습니다만, 시골 강도들이 모은 재화라는 게 결국은 시골 갑부 수준인지라 어디 왕자의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하지만 강도의 딸이 마음이 참 예뻤습니다. 그냥 아가씨에게 알아서 좋은 데 쓰라고 하고, 혹 인연이 있으면 나중에 다시 보자고만 말하고 둘이는 일단 그 여인숙을 떠났지만 그리 멀리 못가서 왕자가 길을 멈추고 콘라드에게 물었습니다.
   “요하네스, 우리 저애 궁으로 데려갈까?”
   “천천히 하시죠.”
   “왜? 천한, 아니 흉악한 강도의 딸이라서?”
   “반대죠. 사람이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나쁜 걸 안 봐서 곱게 자라기는 쉬워도, 매일 옆에서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살인하는 걸 보면서 착한 마음을 잃지 않는 건 몇 곱절은 어려운 겁니다. 진흙탕에서 핀 연꽃 같은 아가씹니다. 왕자님이 여자 보는 안목이 있으신 것 같아서 제가 기쁩니다.”
   “그런데 왜 나중이라는 거야?”
   “아직 왕자님과 저의 여정이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여행이라는 건 앞에 어떤 더 큰 행운이, 아님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겁니다.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 3 -
   숲에서 2번의 모험을 겪은 다음엔 콘라드와 왕자님은 큰길을 택해서 어떤 왕국의 수도에 이르렀습니다. 둘이서 간만에 보는 도시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데 기이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나라 임금님에겐 예쁜 딸이 하나 있었는데 수수께끼로 사위 취재를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듣자 하니 그 공주는 그냥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무지하게 총명한데- 소위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재원’이라는 얘기였지요- 과년하자 자기는 아무한테나 시집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수수께끼 내기를 걸었고, 그 조건은 자기가 못 푸는 수수께끼를 낼 수 있는 남자라면 신분 및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시집을 갈 것이며, 대신 자기가 수수께끼를 풀면 그 남자는 목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성질도 한 성깔해서 봐주는 것도 없어, 벌써 공주의 미모에 혹한 왕자며 대공 여러 명이 정말로 목이 달아났다질 않습니까? 사람들 틈에서 이야기를 듣던 왕자님이 슬쩍 끼어들어 물었습니다.
   “수수께끼라는 게 수학문제처럼 답이 딱 떨어지는 게 아닌데 공주님이 맞췄다고 우기면 누가 토를 달 수 있겠소?”
   “정답인지 아닌지 판정은 열두 명으로 구성된 심판들이 하는 거요, 공주님이 하는 게 아니고. 그리고 우리 공주님이 얼마나 총명하신데 우기긴 뭘 우겨? 못 맞추는 게 없는 천재라니깐, 천재!”
   또 호기심이 발동한 왕자와 콘라드는 냉큼 대궐로 향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공주인지 얼굴이나 한번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시 일이 잘못 되어서 목을 내놓게 되면? 그건 뭐, 그때 가서 대책을 강구해볼 일이었지요.(젊다는 건 이래서 좋은 겁니다, 쩝...)
   취재를 보기 전에- 그래도 (목이 나가기 전엔) 일단 사윗감 후보였으니까요- 간단히 국왕 부처와 인사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이번엔 왕자가 신분을 숨기지 않고 어느 나라에서 온 누구라고, 곧 어떤 가문, 아무 왕가의 몇 대 손 아무개 왕자라 하니 분위기가 좋았고(- 사실 나라가 크기는 왕자님 나라가 훨씬 더 컸지요-) 특히 왕비마마가 왕자님을 퍽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습니다.
   문제가 뭔지 깨달은 것은 심판들의 입회하에 당사자를 대면했을 때였습니다. 원래 똑똑한 사람들은 벌써 눈빛이 다른 법입니다- 왕자님과 콘라드는 처음엔 어디 이 공주가 얼마나 예쁜가 보자 하는 경박한 마음으로 들어왔다가 그 눈빛을 보고 속으로 ‘헉!’ 했지요. 이어서 간단하게 말 몇 마디 하는 것만 봐도 과연 소문대로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이거 잘못 걸렸는걸.’
   콘라드가 슬쩍 왕자의 눈치를 살피니, 왕자님도 역시 겉으로는 태연자약한 표정이었지만- 늘 붙어다니는 콘라드만 알아볼 수 있는- 초조할 때의 버릇이 보였습니다. 아마 왕자님도 콘라드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일 겁니다. 수수께끼에 웬만큼 자신이 있지 않으면 애초에 자기를 통째로 걸고 이런 모험을 벌일 리가 없을 터, ‘아침엔 네 발로 점심엔 두 발로 저녁엔 세 발로 걷는 것은?’ 뭐 이따위를 냈다간 스핑크스가 돌가루로 변할 때까지 얻어맞을 판입니다. 과연 이 똘똘이 공주님이 풀지 못할 수수께끼가 있다면, 도대체 무엇일까요? 콘라드는 잠깐 고민하다가 순간 떠오르는 영감이 있어 왕자님에게 귀엣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왕자님이 표정이 밝아지면서 자신 있게 입을 뗐습니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는데, 열둘을 해치웠다. 어찌된 일인가?”

   시한은 사흘이었습니다. 공주님은 갖고 있던- 본인이 이미 옛날에 다 통달한- 두꺼운 수수께끼 책을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물론 답 비슷한 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안 죽였는데 죽었다니 사람이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은 상태가 뭔가- 무슨 ‘좀비’ 같은 걸까요?- 속사정 모르는 공주님의 생각은 이런 쪽으로만 흐릅니다. 아님 남자한테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태라면 거세당한 남자? 근데 환관이라면 우리 궁궐 안에도 있지 않나? 잘들만 살던데... 아니면 손 안 대고 코푸는 방법, 이런 건가? 하지만 손을 안 댔다면 ‘내’가 죽인 게 아니지 않나?
   마침내 공주님의 추리가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자- 막장에 몰린 인생들이 가끔씩 그렇게 되듯이- 지는 걸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이 공주님의 생각은 ‘잔머리’로, 아니, 쓰다보니 이런 실례를, 그래도 왕족이니까 품위 있게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으로 흘렀습니다.
   실은 공주님에겐 ‘진실의 약’이라는, 그 약냄새를 맡으면 사람이 일종의 최면 상태에 빠져서 물어보는 대로 답을 하게 된다는 마법약이 있었습니다. 공주가 무사히 첫돌을 맞이했을 때 여러 이웃나라에서 사신과 선물을 보내어 축하했는데 그 약은 바로 마법사들의 나라의 여왕님이 보낸 선물이었습니다- 나중에 시집갈 때가 되면 요긴하게 쓰일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였지요...
   그날 밤 공주는 본인의 오른팔 격인 심복 시녀에게 약병을 들려서 왕자님이 묵고 있는 영빈관으로 보냈습니다. 방해가 없게 미리 손을 써놓고 왕자님의 객실로 잠입한 ‘공주의 오른팔’이 조심스럽게 약병 뚜껑을 열고 자리에 누워있는 왕자님의 코밑으로 갖다 대려는데, 갑자기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자던 사람이 약병을 쥔 손목을 덥석 잡는 게 아니겠습니까? 한데 그 순간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비명이 나오는 입을 틀어막아줬지요, ‘쉿’ 하면서요. 하지만 그 다음 순간엔 다시 자기 침상으로 확 당겨서 쓰러트리고 망토를 벗기는 것이었습니다. 아, 이젠 (지은 죄가 있으니) 도와달라고 소리도 못 지르고 꼼짝없이 봉변을 당하겠구나 생각을 했는데, 뜻밖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습니다.
   “뭐가 궁금해서 왔어요? 내가 다 말해줄 게요.”
   물론 그 남자는 왕자님이 아니고 우리의 콘라드였지요. 콘라드는 호승지심이 강한 공주가 무슨 수를 쓸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먹을 것, 마실 것도 극도로 조심하고, 밤엔 아예 왕자님과 방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저, 그게, 그 수수께끼- 아, 아니예요.”
   “근데 아가씨 이름은 뭐예요? 이렇게 목소리가 예쁜 아가씨는 틀림없이 얼굴도 아주 예쁘겠죠?”
   어머, 이 남자 봐라?
   “아니에요, 아침에 보시면 실망할 수도 있어요.”
   “흠, 아침까지 나랑 같이 있을려구요? 남의 눈에 뜨이면 어쩌려구?”
   “어머, 어머, 이게 무슨 못된 소리래?”
   공주가 측근에 둔 시녀들은 모두 공주의 까다로운 눈높이에 맞추어야 했기 때문에 역시 나름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재원’들이었습니다만, 하나같이 어렸을 때부터 공주님만 바라보고 곁에서 모셔온 남자를 모르는 순진한 처녀들이었지요. 반면에 콘라드는 이미 첫사랑에 가슴앓이 하던 예전의 그 콘라드가 아니었습니다- 이젠 ‘여자를 아는’ 남자였지요. 무릇 남자와 여자는 자연 상태에선 N극과 S극처럼 저절로 서로에게 끌려가기 마련인 법,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다 큰 처녀가 칠흑 같은 밤에 단둘이서만, 그것도 남자의 넓은 가슴에 안겨서 중후한 저음으로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게다가 까칠한 공주 모시기 힘들지 않느냐며 등까지 토닥여주는 데야- 어떻게 안 넘어가고 베기겠습니까? 이 남자, 목소리만 부드러운 게 아니고 손길도 아주 부드러운 것이 시녀는 점점 마음이 달뜨면서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공주에게 돌아간 ‘오른팔’은 왕자한테 약냄새를 맡게 하니 과연 조금 있다 ‘공주! 공주!’를 찾으면서 잠꼬대를 하길래 공주님인 척하고 캐묻자 이것저것 횡설수설 하더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래서 뭐 알아낸 게 있느냐?”
   “예, ‘한방에 일곱’이라고도 했고, 또, 마녀와 강도의 이야기라고도 했습니다.”
   그게 뭔 소리래니, 공주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중요한 실마리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더 자세한 건 제가 오늘밤에 한번 더 가서-”
   “됐다! 나머지는 오늘은 네가 가서 캐오도록 해라. 이 아이 얘기하는 거 다 들었지?”
   그건 ‘공주의 왼팔’ 격인 두 번째 시녀에게 명하는 말이었고, 대신 ‘오른팔’은 새로 생긴 애인을 한번 더 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가, 그만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빈 양말 받은 아이처럼 풀이 죽고 대신 볼이 산만큼 부어올랐지요.
   해서 이틀째 밤, ‘왼팔’ 시녀가 왕자님의 방에 몸을 숨겨 들어갔는데 웬걸, 이번엔 아예 문 뒤에 누가 숨어있다가 대번에 확 끌어안지 않겠습니까?
   “에그머니나!”
   물론 소리가 끝나기 전에 뒤에서 손이 나와서 입을 틀어막았지요. 한편 콘라드 입장에선 당연히 어제 그 시녀인 줄 알고 장난을 치려고 뒤에서 덥석 끌어안은 건데, 안고 보니 딴 여잡니다.
   ‘이거야 원, 공주한테 고맙다고 해야 하나, 이런 경우는?’
   일단 겁먹지 않게 달래서 침상에 앉히고, 자기도 그 옆에 나란히 앉아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이후로는 뭐, 전날밤 첫번째 시녀 때와 똑같이 돌아갔지요…
   다음날 아침 공주의 방에선 다시 공주가 측근들과 머리를 맞대고 ‘정보회의’에- ‘이중간첩’들이 내놓는 '허위정보'가 난무했다는 게 함정이었지요- 한창이었습니다.
   “마녀도 죽고 강도도 죽었는데, 그 딸들은 살아남았답니다.”
   “뭐라고?”
   공주가 이맛살을 찌푸리는데 옆에서 첫 번째 시녀, ‘오른팔’이 끼어듭니다.
   “그럼 이제 둘은 알겠네요. 나머지 열 명은 누굴까요?”
   “마녀 하나, 강도 하나에, 다른 직업으로 열 명이 더 있다고? 그런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
   “알았다! 풀었어!”
   이번엔 ‘왼팔’이 무릎을 치면서 소릴 지릅니다. 공주가 못 믿겠다는 어조로 물었습니다.
   “정말 풀었다고?”
   “예. 딸들이 제 어미를 차마 직접 죽일 수는 없으니 서로 바꿔 죽인 모양이네요! 그러니 ‘나’는 안 죽였다는 거죠”
   “조용히 안 해! 그럼 넌 엄마가 여섯이니, 열둘이니?!”
   공주가 성이 나서 체통에 안 맞는 막말로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것들이 정말 뉘 편인지, 옆에서 자꾸 사람을 더 헷갈리게만 하질 않습니까?
   “저를 오늘밤에 한번만 더 보내주시면 기필코-”
   “됐다. 오늘밤엔 내가 직접 가야겠다.”
   “예?”
   멍청한 것들이 자꾸 변죽만 울리다 오는데다, 잠꼬대를 하면서 계속 자기를 부르고 시녀들이 공주인 척해야 입을 열기 시작한다니 본인이 직접 가면 캐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공주의 ‘왼팔’과 ‘오른팔’은 옆에서 말리는 척하면서 오기를 더 부추겼지요.
   한편 사흘째 밤엔 콘라드는 자기가 왕자의 침상에 대신 들지 않고 왕자가 직접 상대를 하게끔 준비를 시켰습니다.
   “정말로 올까?”
   “모르죠. 하지만 원래 똑똑한 사람은 제 꾀에 넘어가서 망하는 법입니다. 이 공주님도 자만심이 강한 성격이라 아마 못 참을지도요.”
   그날 밤 공주님은- 혼자 조마조마해 하면서- 일단 무난히 약병 뚜껑을 열고 왕자님 코밑에 갖다 대는 데까지는- ‘진실의 약’ 입장에선 사실상 ‘첫 출동’이었지요- 성공했습니다.
   “음냐, 음냐...”
   공주님이 잠시 약효가 돌기를 기다리면서 뜸을 들이고 있자니, 입술이 바짝바짝 탑니다.
   “공주, 공주! 우리 잠깐이라도 제발 얘기 좀 합시다...”
   옳거니, 이제 시작인 모양입니다. 공주님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선창을 했습니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열둘을 죽였다.”
   “하지만 열둘을 죽였다.”
   “어찌된 일인가?”
   “어찌된 일인가?”
   이런, 약을 너무 세게 쳤나요? 다시 물어봐도 똑같이 반복만 합니다. 공주는 질문을 바꾸어 봅니다.
   “이 수수께끼의 답은?”
   “이 수수께끼의 답은?”
   가망이 없나, 싶었는데 왕자가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강도가, 강도가-”
   “강도가 뭐?”
   “내 옆에 누워.”
   “강도가?”
   “그래, 공주, 내 옆에 누워. 내가 공주한테만 살짝 귀띔해 줄게.”
   이런 흉측한 화상이, 꿈속에서도 수작은? 여튼 속는 셈 치고 엉거주춤, 왕자의 옆에 반쯤 드러누웠는데 웬걸, 이 남자가 자기를 와락 끌어안는 게 아닙니까? 여자가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써보는데 남자는 자다가 갑자기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꼭 끌어안고 ‘공주!’, ‘공주!’ 하면서 안 놔줍니다. 하는 수없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이 남자가 킁킁, 하고 자기 머리냄새를 맡더니 눈을 번쩍 뜨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뿔싸, 이놈의 ‘진실의 약’이라는 게 여자 분 냄새를 맡으면 해독이 되는 모양입니다그려!
   공주님이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남자가 확 일어나서 방에 불을 켭니다. 공주님은 급한 김에 이불을 끌어다가 뒤집어썼습니다.
   “당신 누구요?”
   “...”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찾아들어가고 싶은 심정인데 남자가 이불을 잡아당깁니다. 줄다리기를 하듯이 팽팽하게 버텼지만 조금씩 땡겨지면서 결국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습니다.
   “보자, 이 미인은... 오호라, 공주님 아니신가?!”
   여자가 고개를 못 들고 수그리는데, 남자가 껄껄 웃더니 불을 확, 도로 불어서 껐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소, 공주.”
   사실 왕자님은 처음부터 콘라드가 구해온 약솜을 코에 가득 틀어막고 있었고 공주님이 약병을 코밑에 댔을 때도 숨 쉬는 시늉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공주님은 그제야 그간 자기 시녀들을- 곧 ‘오른팔’과 ‘왼팔’을- 왕자가 속였으리라고 깨닫습니다.
   분위기가 좀 진정이 되자 왕자님은 자기가 공주님을 얼마나 연모하는지, 처음엔 호기심 반, 호기 반으로 도전했지만 볼수록 얼마나 총명하고 아름답게 보이던지 지금은 정말로 목숨을 건 것이 아깝지 않을 만큼 진심으로 공주와 결혼하고 싶다고, 절절하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진짜 공주가 오면 남자답게 당당하게 고백을 하라는 게 콘라드의 조언이었지요. 공주가 받아주면 일은 다 되는 것이고 수수께끼는 풀거나 말거나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안 받아들인다면 그때 미리 준비한 계책대로 밀고 나가자는 게 콘라드와 짠 작전이었습니다.
   단둘이 방안에 앉아 있어보니 공주도 왕자한테 아주 마음이 안 생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이렇게 반격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호락호락 넘어올 성격이 아니었지요, 이 공주님이. 일이 이렇게 된 김에- 본의는 아니었지만 ‘미인계’를 써서- 왕자를 잘 구슬러서 답을 캐볼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공주님은 짐짓 상냥한 목소리로 잘 생각해보겠다고, 받아들일 듯 말 듯,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간 다음에 참, 당신 수수께끼의 답은 뭐냐고, 이젠 가르쳐주어도 되지 않느냐고 슬쩍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의외로 왕자님은 두 번 다짐도 안 받고 마녀의 집과 강도들의 여인숙에서 겪었던 일들을 술술 다 이야기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남자, 보기보다 순진한 걸까요?
   “한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연 관심이 없습니까?”
   공주님이 찔끔, 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왕자님이 자기의 ‘충복’ 요하네스, 곧 우리의 콘라드 얘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살던 고향 얘기며, ‘예비 시부모님’, 부왕과 모후의 이야기며,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쭉 하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남자가 괜찮은 것 같긴 했습니다.
   근데- 공주님으로서는 곤혹스럽게도- 거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남자는 도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내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들어보라면서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느니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수 있다느니, 이런 상투적인 수작부터 시작해서 온갖- 첫 수의 첫 반절 정도 빼고는 다 즉석에서 지어낸 게 아닌가 싶은- 연애시들을 외우기 시작하는 겁니다.
   ‘참, 내가 이렇게도 좋은가?’
   처음엔 공주님도 약간 우쭐한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 두 번이라고, 끝이 나질 않으니 곧 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남자가 이렇게 수다스럽대?’
   하지만 거기도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목적 달성한 공주님은 진작부터 빨리 여길 뜨고 싶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정말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님 시로는 시간을 더 끌기가 어려웠던지 왕자님은 유명한 ‘로망스’들, 특히 전설의 사랑 이야기들로 넘어갔습니다. 란슬롯과 기네비어 왕비의 불륜, 아니 지순한 사랑 이야기며,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거기서도 밑천이 다 떨어지니까 신화 속 에로스와 프쉬케의 러브스토리까지 넘어갔는데 물론 우리 박식한 공주님은 다 아는 이야기들이었지요- 아니,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왕자님이 군데군데 잘못 알고 틀리게 얘기하는 걸 고쳐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릴 정도였습니다.(그래도 그 와중에도 공주의 체통을 지켜서, 그리고 이 남자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이렇게 떠드는 게 아닌가 싶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손만 꼭 잡고 더 이상의 ‘터치’는 잘 막긴 했습니다만...)
   그렇게 계속 종알종알 하다가 점차 목소리가 작아지고- 이젠 내용이 틀린 게 아니라 아예 단어 자체가 틀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음냐, 음냐…”
   휴, 이제 끝난 모양입니다. 그래, 실컷 잘 떠들었다, 네 모가지도 오늘로 네 몸통하고 작별이다...
   근데 공주님이 살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려다 보니 이런, 자기 망토가 없어졌습니다. 주변을 찾아보니 이 남자가 망토를 무슨 죽부인 마냥 두 다리 사이에 끼고 자고 있지 않겠습니까? 공주가 각별히 아끼는, 안개꽃 같은 신비한 색감의 우아한 회색 망토였는데 말입니다. 공주가 살짝 당겨서 빼려고 하니까 갑자기 이 남자가 ‘끙’ 하더니, 오른쪽으로 한 바퀴 반을 굴러서 아주 꽁꽁 돌려맵니다.
   공주가 이걸 어쩌나, 이맛살을 찌푸리는데, 마침 꼬끼오~ 하고 첫닭이 울었습니다. 공주님은 좀 찜찜하긴 했지만 하는 수 없이 옷은 놔두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곧 날이 밝을 텐데 공주씩이나 되어가지고 외간 남자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그게 더 큰일일 겁니다. 하지만 공주님은 지난 연이틀 밤 ‘작전’에 투입한 시녀들이 망토를 다 벗어놓고 갔다는 건 모르고 있었지요...
   다음날 오전 심판들의 입회하에 두 사람은 다시 대면했고 공주님은 의기양양하게- 전날 밤에 들은 대로- 수수께끼의 답을 이야기했습니다. 심판들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자, 왕자님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정답이 아니라는데 이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게 왕자님 발언의 요지였습니다. 심판위원장이 당연히 반문했지요.
   “(부정행위의) 증거가 있는가?”
   왕자님 측은 망토 세 벌을 증거로 제출했는데 그 중에 하나는 거기 있는 사람들은 다 알아볼 수 있는, 공주가 가장 아끼고 즐겨 입는 회색 망토였기 때문에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왕자님 측이 다시 공주님의 시녀 2명을- 물론 ‘왼팔’과 ‘오른팔’을- 증인으로 신청했고 그건 물론 나머지 2벌의 주인을 확인하자는 것이었지요.
   망토가 정말로 증인의 것이 맞는가?
   “제 것이 맞습니다.”
   그럼 간 이유는?
   “공주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더는 말 못합니다.”
   두 번째 시녀의 답도 똑같았고, 물론 새벽까지 소곤소곤, 도란도란 하면서 콘라드와 짠 그대로였지요. 공주님이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이라고 강력히 부인하자- 뭐, 이제 와선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왕자님이 짧고 굵게 한마디 했습니다.
   “여자가 줄 거 다 줬는데 무슨 수수께끼를 더 풉니까? 어이가 없는 건 납니다, 나!”
   공주님은 너무 화가 나서 거의 입에 거품을 물 지경이었습니다. 이 남자가 이렇게 뻔뻔하게 나올 줄 몰랐습니다- 아니, 다 주긴 뭘 다 줍니까? 그렇다고 이 마당에 ‘아니에요, 우린 손만 꼭 잡고 밤새 얘기만 했단 말이에요!’하고 소리칠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심판위원장이 급히 의사봉처럼 생긴 방망이를 두드렸습니다.
   “에헴, 지금부터 회의는 심판들끼리만 비공개로 진행하겠습니다.”
   심판들의 회의가 예상외로 무척 길어지자 약간 불안해진 왕자가 콘라드에게 속삭였습니다.
   “요하네스, 이거 말하자면 적진으로 원정을 온 셈인데 시간을 끈다는 건 우리한테 불리한 징조가 아닐까?”
   “아마 괜찮을 겁니다. 제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이 궁 안에 공주님 편이 별로 없습니다.”
   “편이 없다니? 이건 내가 왕자라서 잘 아는데, 세상에 힘센 부모 빽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나?”
   “바로 거기가 문제죠. 시집을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아예 안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몇 년씩 이 난리법석을 벌이고 있으니 어떤 부모가 좋아하겠습니까?”
   “아하~”
   마침내 회의가 끝나자 심판위원장이 나와서 ‘이것이 판결입니다.’ 하고는 시종을 시켜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망토를 하나 좍~ 펼치게 했습니다. 그건 바로 공주님의 회색 망토였는데, 자세히 보니 금실과 은실로 새로이 화려하게 수가 놓아져 있었습니다- 곧, 신부가 입을 ‘결혼 예복’이라는 뜻이었지요. 이윽고 궁에선 왕실의 경사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습니다...
   식이 끝나고도 달포를 더 처가에서 머무른 뒤에야 왕자님은 신부를 데리고 고국으로 출발했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콘라드에게 이제 두 시녀와 결혼식을 올리는 게 어떠냐고 권하자 콘라드가 말했습니다.
   “왕자님, 주인보다 하인이 마누라가 더 많으니 이래서야 나라에 기강이 안 서질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왕자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그럼 하나는 버리겠다는 이야기냐?”
   “하나를 버리긴요? 전하, 오다가 만난 마녀와 강도의 딸들은 벌써 잊으셨습니까?”
   왕자가 껄껄 웃으면서 답했습니다.
   “네 말이 옳다, 역시 넌 충신이야.”
   왕자는 즉시 부하들을 보내 마녀의 딸과 강도의 딸을 찾아 데려와서 후궁으로 삼았고, 콘라드와 두 시녀의 결혼식도 함께 성대하게 치러주었답니다.

Nach und nach ruhiger
   그리고는 한동안 평안한 세월이 계속되었습니다- ‘유부남’이 된 두 사람은 방랑은 멈추고, 가정(들)에 충실했으니까요. 왕자는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콘라드는 이제 ‘요하네스 경’으로 불리우고 있었습니다. 마치 진짜 동화(fairy tale)의 결말처럼, ‘다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날 것처럼 보였지요.
   하지만 20년이 채 되지 않아 왕자님, 아니 국왕은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죽을병이 들었다는 걸 직감한 왕에게는 오직 한 가지 걱정이 있었으니, 바로 자기 뒤를 이어야 할 어린 아들이었습니다. 뒤를 부탁할 사람이라면 당연히 요하네스였지요. 왕은 은밀히 침실로 요하네스를 불러서 자기 아들을 부탁했습니다.
   “자네 친아들처럼 생각하고 잘못하면 꾸짖어 가면서 가르쳐주게, 내가 왕자에겐 자네를 양아버지처럼 받들라고 단단히 일러놓고 가겠네.”
   “전하, 제가 어찌 감히-”
   요하네스가 깜짝 놀라 말했지만 왕은 힘겹게 손을 내저어 요하네스의 말을 끊고 자기가 하고 싶던 말을 이어갔습니다.
   “요하네스, 자네가 늘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네. 늘 나 때문에 발목이 잡혀 있었지. 내가 죽으면 자넨 가족들을 데리고 이 나라를 떠날 작정이었지?”
   “전하, 저 세상을 가도 제가 먼저 갈 겁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은-”
   “조금만 천천히 떠나주면 안 되겠나? 왕자가 철이 들 때까지만 말이야. 날 봐서, 우리의 우정을 생각해서 들어주게, 내 마지막 부탁일세.”
   “전하, 신이 목숨을 걸고 왕자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요하네스가 눈물을 흘리면서 왕에게 약속할 수밖에 없었고, 유언을 마친 그날 밤 왕은 편안하게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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