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 5번에 나눠서 매주 금요일 혹은 토요일에 연재할 예정입니다.

 - 5편 모두 저본은 그림(Grimm)동화집에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 '동화풍'이라고 했지 '아동용'은 아닙니다. 아이들은 '독서지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III. 개똥지빠귀수염 왕; Lebhaft(Nicht zu rasch)

 

- 1 - 

   경쾌한 춤곡이 울려 퍼지는 여기는 성대한 무도회가 열리고 있는 궁궐 대연회장입니다. 궁궐의 무도회야 철따라 열리는 행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만큼은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열리는 무도회가 아니었는데 바로 예쁘기로 소문난 이 나라의 공주님에게 신랑감들을 단체로 선보이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이 공주님이 어떤 사람이냐고요? 글쎄요, 그게... 음, 정확히는 예쁜 거 빼고는 별 내세울 게 없는 공주님이라고 해야 맞겠습니다만, 어디 예쁘면서 공주 되기가 쉽습니까? 한 가지도 아니고 두 가지씩이나, 어떻게 보면 정말 대박 운 좋은 인생입니다. 여튼 이 공주님은 예쁜 걸로 국제적으로 유명해서 먼 나라에서까지 청혼이 많이 들어왔습니다만 정작 공주님 본인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꾸미고 남자들하고 춤추고 노는 건 무진장 좋아했지만 아직 시집 같은 걸 가고 싶은 생각은 전연 없었기 때문에 부왕이 괜찮은 혼처다 싶어서 의사를 물어보는 족족 다 거절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부왕도 이 예쁜 딸을 끔찍이 이뻐하는 터라 자기 의사를 강요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짝을 찾아보라고 이런 자리를 만들게 된 것이었지요.

   춤곡이 잠시 멎고 짧은 팡파르와 함께 왕과 공주가 입장하자 구혼자들은 왕과 왕자들,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같은 귀족들, 그 아래로 기사들, 이런 식으로 신분에 따라서 모여 섰고 마치 공주가 그들을 사열하는 것 같은 양상이 되었습니다. 남자들은 다들 공주의 미모의 소문을 듣고- 개중엔 이미 연모의 마음을 품고- 실물은 어떨까 설레어 하면서 왔다가 실제로 사람을 보니 과연 명불허전인지라, 이젠 어떻게 하면 경쟁자들을 제치고 공주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들뿐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공주에게 인사한 왕은 마침 70년대 사장님들처럼 배 나오고 살집 좋은 체형이었는데 공주는 보자마자 어머, 하더니 바로 면박을 주었습니다.

   “뚱뚱보네!”

   이거야 원, 꼭 앞 못 보는 사람을 보고 대놓고 장님이래야 맛입니까? 그러자 키꺽다리에 비쩍 마른 왕자가 눈치를 보면서 슬쩍 앞으로 나섰는데, 공주는 아래위로 쓱 한번 흝어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한마디 합니다.

   “넘 길다.”

   그 소리를 듣고 이번엔 옆에 기죽어 있던 땅딸막한 왕자가 반색을 하고 앞으로 나섰습니다만, 공주의 한마디에 고만 도로 풀이 죽어서 바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좀 짧다.”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지 말 짧은 생각은 전연 안하는 모양입니다. 다음 차례는 똑바로 서질 못하고 선천적으로 자세가 좀 구부정한 공작이었습니다. 공주가 또 쓱 보고 음, 거 뭐더라 하더니,

   “쌍봉낙타?”

   합니다. 글쎄요, 아마 정확히 비유를 하자면- 이것도 ‘비유’라고 한다면- ‘쌍’봉이라기보다는 ‘단’봉이 더 정확하겠습니다만,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다음 백작은 체격도 적당하고 허리도 꼿꼿했습니다만 불행히도 얼굴이 좀 많이 창백한 스타일이었습니다.

   “시체같애?”

   공주는 이마를 살짝 찌푸리면서 숨 돌릴 새도 없이 한마디로 바로 잘랐습니다. 이후에도 공주는 구혼자들의 품평에 맛을 들인 듯 온갖 동물이며 사물에 신랑감들을 비유하기 시작했습니다.

   “빨간 수탉?”

   이건 물론 얼굴빛이 붉은 인사를 보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공주님의 최고 대박, ‘히트작’은 아래턱이 꼭 새의 부리처럼 휘어진 젊은 왕이었는데 공주님이 보고는 손뼉을 치고 깔깔 웃으면서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개똥지빠귀 수염달렸네!”

   남자 어른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다 수염을 기르던 시절이라 원래 휘어진 턱에 긴 수염까지 달린 모양이 사실 좀 재미있기는 했습니다만, 갑자기 생뚱맞은 단어에 또 비유인지라 무도회장에선 한바탕 폭소가 터졌습니다. 발음이 복잡하고도 길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개똥수염왕이라느니, 개똥이왕, 지빠귀왕, ‘개지수’왕 등등 자기들 발음하기 편한 대로 마구잡이로 불러대서 공주는 한번에 별명을 한 너댓가지 넘게 선사해준 셈이 되었습니다. 당사자인 ‘개똥지빠귀수염’ 왕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어쩔 줄을 몰라 했는데, 사실 이 왕도 공주의 미모를 보고 한 눈에 반한 터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좋아하는 여인한테 이런 놀림을 당하니까 수치심을 참기가 더 힘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 ‘개똥지빠귀수염’ 왕은, 갑자기 부왕을 여의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왕권을 다지고 강력한 왕국을 건설한 훌륭한 젊은 왕이었습니다. 공주의 부왕이- 공주만 좋다고 한다면- 은근히 속으로 점찍어놓고 있었던 신랑감후보 1순위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국왕은 속으로 때늦은 후회와 한탄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손님으로 왔으니 예의상 웃어넘기고 있었지만 돌아가면 얼마나 자기 딸이 배운 것 없고 예의범절을 모른다고 욕하고, 비웃고, 손가락질을 하겠습니까?

   ‘내가 딸을 잘못 키웠구나, 잘못 키웠어. 저것이 어릴 때부터 인형같이 예뻐서 이쁘다, 이쁘다고만 했더니...’

   그날 무도회가 끝나자마자 왕은 공주님을 불러서 무지막지하게 화를 내면서 야단을 쳤습니다만, 정말로 전혀 반성의 기미 같은 것도 안 보였기 때문에 끝내는 ‘내 집 문턱을 넘어서는 첫 번째 거지한테 너를 시집보내겠노라’고 맹세를 하고서 끝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공주님은 그날 이후에도 울 아빠가 날 한번 겁줬겠거니 하고 아무 걱정 없이 이전처럼 잘 놀고, 인생을 잘 즐기고 지냈습니다. 사실 대궐이 아무나 쉽사리 드나들 수 있는데도 아니고 왕이 일부러 사람을 시켜서 불러들이기 전에야 어떤 거지가 감히 그 문턱을 넘겠습니까?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느 날 장안에 한 음유시인, 혹은 방랑가객이 나타나서 집집마다 돌면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고했던지 시종이 그 가객을 대궐로 데려왔고 공주님도 나와서 부왕과 함께 들었는데 노래를 아주 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대충 들을 만은 한 실력이었습니다. 끝나고 나서 음유시인이 모자를 벗어서 약소한 보수를 요구했는데, 국왕은 노래를 참 잘했다면서 난데없이 자기 딸을 줄 테니 데려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공주님이 깜짝 놀라서 울며불며 난리를 쳤지만 웬일인지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난 맹세를 했다. 각설이 타령하는 거지나, 노래 부르는 거지나 게서 게지.”

   그 말을 듣고 밑에 있던 음유시인이 어흠, 어흠, 헛기침을 하긴 했습니다만, 여튼 왕은 일사천리로 성직자와 법관을 불러서 그 자리에서 정말로 정식으로 두 사람을 결혼시켜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공주님에게 너는 천인하고 결혼했으니 더 이상 궁에서 살 수 없노라고, 당장 남편을 따라서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다만, 네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 한 두가지는 가져가도 좋다.”

   왕은 그래도 딸을 내쫓는 마당이라 정 위급할 때 요긴하게 쓸 귀금속이나 보물이라도 하나 챙겨가라고 한 말이었는데, 이놈의 딸년은 그런 속뜻은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가 가장 아끼는 드레스와, 가장 예쁜 구두 한 켤레를 챙겼습니다. 왕이 울화통이 터져서 말했습니다.

   “내가 저걸 진작에 내쫓았어야 했는데. 당장 나가라, 당장!”

   그렇게 해서 공주님은 음유시인 남편과 함께 태어나서 여지껏 살던 궁궐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 2 -

   슬픈 신행길이었지만 대신 대궐 밖으로 별반 나와본 적이 없는 우리 공주님은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 풍경들이 많았습니다. 끝도 보이지 않고 안에 들어서면 하늘도 잘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에 이르자 공주가 문득 궁금해져서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이 숲은 누구 거예요?”

   “올 때 들으니 사람들이 ‘개똥지빠귀수염왕’이라고 부르는 왕의 것이라고 하더군.”

   “아이 씨,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 지빠귀왕한테 시집갈 걸.”

   명색이 남편이라는 사람을 앞에 놓고 이런 소리를 마구 지껄이는데 이 음유시인은 원래 사람이 좋은 건지 아님 속으로만 꽁한 건지, 아무 싫은 내색도 없이 묵묵히 앞장서서 길만 재촉합니다. 숲을 나서자 다음엔 곡식들이 가득 심어져 있는, 가도 가도 한없이 지평선으로만 이어지는 넓은 들판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 평야는 누구 거예요?”

   “이것도 ‘개똥지빠귀수염 왕’의 것이라던데.”

   “아이 씨, 이런 줄 알았으면 그때 그 지빠귀왕한테 시집갈 걸.”

   그 다음엔 드디어 무척 번화하고, 공주 나라의 수도보다도 몇 배는 더 커 보이는 대도시가 나타났습니다.

   “이 큰 도시는 누구 거예요?”

   “여기가 ‘개똥지빠귀수염 왕’의 나라의 수도라고 하던데.”

   “아이 씨, 이런 줄 알았으면 그때 그 지빠귀왕한테 시집갈 걸.”

   참을 인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지만 뒤집어서 생각하면 삼세번이면 많이 참는 거란 뜻이기도 합니다. 참는 데도 한도가 있었던지, 이 음유시인 남편이 드디어 한마디 했습니다.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걸 그랬다고? 그게 남편을 앞에 두고 할 소린가? 무슨 빠귀왕? 내가 그놈만 못한 게 뭔데?”

   공주는 속으로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노래할 때 말고는 과묵하던 남편이 갑자기 ‘버럭질’을 하니까 깜짝 놀래서 그냥 입을 다물고 쑥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한데 남편은 유감스럽게도 그 화려한 도시는 벗어나서 교외로 나가더니 인적도 없는 산골에 달랑 한 채 서 있는 조그만 오두막, 그 앞에서 딱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여기가 우리 신혼집이야.”

   공주님이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리고 서 있었더니 남편은 그냥 자기가 성큼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한마디를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왜 집이 마음에 안 드나? 지참금은커녕 혼수도 안 해온 주제에 그게 말이 되나?”

   허, 이 남자가 이제 보니 노래는 잘하는지 모르겠는데 여자 염장 지르는 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하인들은 어디 있어요?”

   공주님이 불길한 예감을 안고 혹시나 해서 물어본 말이었는데 역시나 하인 같은 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을 뿐 아니라 한술 더 떠서 배가 고프니 빨리 불 피우고 물 길어다가 저녁밥을 지으라는 겁니다. 처음에 공주님은 난 그런 일 못한다고 그냥 드러누우려고 했다가 남편 등쌀에 못 이겨서 팔을 걷긴 했습니다만 집안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공주님이 뭐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게 있을 리가 없질 않겠습니까?

   “이러다간 첫날밤부터 굶게 생겼군.”

   결국은 남편이 나섰는데 보아하니 이 방랑가객도 떠돌이 생활만 했지 ‘자취’ 경험은 별로 없는 모양인지 서툰 솜씨였습니다만 그래도 용케 불을 지펴서 어찌어찌 저녁을 해서 먹고 첫날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에도 아침부터 남편은 밥을 해라, 빨래를 해라, 청소를 해라, 공주는 해본 적도 없고 할 줄도 모른다, 둘이서 옥신각신 하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며칠 지내다 보니 원체 가난한 떠돌이 가수인지라 금방 먹을 것이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어디 가서 버들가지를 한 아름 가져오더니 공주에게 주고 바구니를 짜라고, 고리(백정) 일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난 이런 거 못해요.”

   “그럼 굶어죽을 텐가?”

   “굶어 죽으면 죽었지, 절대 못해욧!”

   “굶어 죽을 때 죽더라도 바구니는 하나 짜놓고 가라고, 나는 먹고 살아야겠으니.”

   “아우, 진짜!”

   그렇지만 고리 일은 뭐 아무나 합니까? 공주님은 하루 종일 깨작거렸지만 거친 버들가지에 손가락에 피멍만 들었지 바구니는커녕 바구니 비슷한 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습니다.

   “안되겠어, 가망이 없어. 차라리 길쌈을 해보자구.”

   “또 뭐요?”

   공주님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다음날 남편은 또 어디 가서 물레를 얻어왔는데, 이번엔 손에 피멍만 들겠습니까? 서툰 솜씨로 실을 잣다가- 혹은 정확히는 잣는 흉내를 내다가- 거친 실에 찔려서 손가락에서 피가 나고 말았고 공주님은 엉엉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남편은 와서 처음엔 호, 해주는 척 하더니 또 염장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손으로 뭐해서 먹고 살기는 글른 것 같군.”

   “이건 뭐 입만 하나 늘었지 일생에 도움이 안 되잖아, 도움이. 내가 그날 당신 아버지한테 크게 당했어- 순 노랭이 장인 같으니 내 노래값이 몇 푼이나 한다고, 내가 그날 완전히 속아서 크게 밑지는 장사를 한 거야.”

   공주님은 너무너무 화가 나서 정말로 그날 밤까지 남편하고 단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다음날 남편은 이번엔 그릇을 한 짐 구해 와서는 시장에 가서 팔아오라고 그릇 장사를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공주님은 처음엔 창피해서 죽어도 시장엔 못 나가 앉겠다고 버텼지만 결국은 시장에 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우선 하루가 넘게 꼬박 굶어서 배가 너무 고팠던 데다 무엇보다도 조금 같이 살아보니 이 남자가 한번 마음먹은 것은 꼭 하고 말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는 것을, 그래서 자기를 뭘 시키는 것도 하는 시늉이라도 한번 안 해주고는 못 견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고집으로 마누라를 들들 볶지 말고 밖에 나가서 돈이나 좀 벌어오면 좋겠건만 왜 그러고 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요전날 이 소리를 덥석 내뱉었더니 이 음유시인 남편은 정말 불같이 화를 내면서 무슨 공주라는 여자가 무식하게 예술을 모르느냐는 둥, 예술은 돈을 보고 하는 게 아니라는 둥 하고 또 ‘버럭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칫, 도대체 직업이 예술인지, 외설인지, 밤마다 나 못살게 구는 것 말고는 딱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공주님은 이렇게 고시랑고시랑 하면서 그릇을 팔러 난생 처음 시장으로 나섰습니다.

   처음에 시장에 앉아서 공주님은 모기만한 소리로 ‘그릇 사세요.’ 소리도 제대로 욀까말까 하고 있으니, 물론 손님이라고는 그냥 구경 나온 파리 한 두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옷차림은 남루해졌지만 워낙 미모가 출중했기 때문에 자연히 주변 사람들과 지나가는 사람들 눈에 띄게 되었고, 점심때가 지나니까 주막에서 밥먹으면서들 이야기를 해서 소문이 퍼졌던지 ‘미녀 그릇장사’를 보러 아주 사람들이 떼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들도 난리가 났고 시장 저 반대편 끝 쪽에서 장사하던 아줌마들도 구경을 하러 왔으니, 뭐 말 다했습니다.

   “어머머, 이쁘다!”

   “그릇 파는 아낙이 어쩜 저리 예쁘대!”

   공주님은 그래도 약간 겁도 나고, 창피하기도 하고 그릇을 사라고 적극적으로 권해볼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공주가 예뻐서 사람들이 호감을 가졌기 때문에 누가 한명 사가기 시작하니까 곧 너도나도 나서서 그릇을 사갔고, 심지어 남자들은 공주가 부르는 값보다 더 쳐주고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그러면서 내일도 내가 무조건 팔아줄 테니 꼭 그릇 팔러 나오라고 신신당부하는 축들도 있었는데, 뭐 다음엔 꼭 같이 차 한 잔 하재나요 뭐래나요, 쯧쯧...). 해서 곧 물건은 매진이 되었으니 졸지에 시장의 ‘완판녀’로 등극입니다.

   “역시, 인생은 ‘한 미모’해야 살기 편하다니까?”

   그날 저녁 집에 가서 공주님이 은근히 ‘자랑질’을 하면서 남편에게 한 말이었는데, 눈치를 보아하니 남편은 이번에도 공주가 일을 제대로 못할 줄 알고 있다가 약간 놀란 표정이라 이번엔 남편 코를 좀 납작하게 만들었거니, 그게 또 통쾌했던 겁니다.

   “인생을 좀 배우라고 장사를 내보냈더니 또 뒤쪽으로 가는군.”

   남편은 또 공주는 못 알아들을 소리를 중얼거렸지만 며칠 후에 공주가 팔 새 그릇들을 구해왔는데 이번엔 지난번 팔았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많은 물량을, 그것도 어디서 큰 돌덩이에라도 한번 걸리면 바로 바퀴가 빠져 달아날 것 같은 낡은 손수레까지 하나 얻어다가 거기에 실어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장사를 잘하니 이번엔 지난번에 번 돈에 더해서 외상으로 물건을 좀 많이 땡겼어. 우리 전재산이 걸렸으니 조심하고, 그릇들을 소중히 다루라고.”

   사람이 어디서든 잘한다고 칭찬을 받으면 신이 나는 법입니다. ‘시장의 스타’인 우리 공주님도 그래서 시장에 도착하니 기분이 더 좋아져서 자리 펼 데를 찾았는데 아뿔싸, 조금 늑장을 부린 탓으로 그만 좋은 자리는 다 뺏기고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할 수 없이 길 모퉁이에 자리를 펴고 주섬주섬 그릇을 펼쳐놓고 손님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가만 있자, 오늘 이 그릇들도 다 팔면 나도 쇼핑이나 좀 할까? 아냐, 아냐, 집에 식모부터 한명 꼭 둬야 되는데, 둘다 할 수 있으려나? 뭐, 오늘 그릇 다 팔아서 집에 가면 남편이 다음엔 더 많이 가져올 테고, 그럼 오늘의 2배는 벌겠지. 그럼 다음엔 4배? 아냐, 아예 그 돈으로 시장에 그릇 가게를 하나 내는 게 낫겠다. 그럼 팔다리 아프게 고생 안 해도 되지.’

   한데 웬일인지 공주님의 기대와는 달리 막상 오늘은 바로 사람들이 몰려와서 줄을 서진 않는 겁니다. 공주는 처음엔 약간 의아했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뭐 또, 지난번처럼 장들 보고 밥 먹고 나면 여기 와서 줄서겠지? 근데 그렇게 그릇 가게 하나 내서 오다가 본 숲이며 들판이며 다 살려면 얼마나 벌어야 되지? 한 1년 걸리려나? 아니 너무 짧나, 그럼 3년?’

   이렇게 경제관념 없는 우리 공주님이 나를 내쫓아낸 울 아빠 보란 듯이 아예 내 손으로 왕국을 하나 사서 장만하리라고, 시세도 모르고 백일몽을 꾸고 있는데 갑자기 길 저편에 한눈에 보기에도 술 취한 걸로 보이는 경기병이 말을 끌고 시장통으로 그대로 돌진해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더니 공주님이 손 쓸 새도 없이, 아니, 미처 몸을 피할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 새에 공주님이 펼쳐놓은 좌판을 그대로 덮치고 지나갑니다. 공주님은 처음엔- 그래 봐야 별 소용도 없겠지만- 말이 달려간 방향으로 몇 걸음 달려나갔지만 곧 반대방향으로 도로 도망을 쳐야 했으니, 그 기병이 마치 뭘 까먹고 놓고 온 사람처럼 도로 치달려 와서 남은 그릇까지 완전히 박살을 내놓고 그대로 달려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꼴을 당하고 나니 일단 제일 먼저 떠오른 것도 남편의 얼굴이었고, 가장 두려웠던 것도 남편의 얼굴을 볼 일이었습니다. 사실 궁에서 쫓겨나기 전엔 세상에 무서운 게 없던 공주님이었지만 이제는 남편은 조금 무서웠던 것입니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잘못해서 깨뜨린 것도 아니고 말 타고 창 든 남자를 내가 쫓아가서 잡아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야단맞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만약에 때리려고 한다거나, 그런 짓을 한다면 그땐 나도 못살겠다고 하고 나와 버려야지.’

   하지만 때리는 게 아니라 그냥 좋은 말로 집에서 나가라고 내쫓는다면? 공주님은 사실 그게 더 무서웠던 것이- 내 발로 나오건 아니면 쫓겨나건, 어느 쪽이든- 그 오두막에서 나오면 갈 곳이 단 한군데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제일 불쌍한 게 바로 오갈 데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집으로 돌아온 공주에게 남편은 공주가 걱정하던 것 이상으로 화를 내진 않았고 그저 혀를 끌끌 찰뿐이었습니다.

   “원 세상에, 바글바글한 시장 길모퉁이에 깨지기 쉬운 그릇을 펼쳐놓는 바보가 어디 있누?”

   그러고는 당신은 장사도 안 되겠으니 이제 다른 할 일을 알아봐야할 터인데, 마침 오늘 이곳 궁궐에 노래를 하러 갔다가 들은 얘기가 있으니 아마도 곧 출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궁궐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겨우겨우 부탁해서 얻었다는 그 일자리는 사실 온갖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궁궐의 주방보조일 자리였습니다. 월급은 고사하고 무슨 일당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대신 공짜로 밥을 먹게 해준다는 게 전부였습니다. 곧, 공주님은 주방에서 낮 끼니는 해결하고 저녁은 대궁상을, 즉 왕족들이나 손님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얻어 와서 남편과 같이 나누어먹는 겁니다. 그래서 공주님은 옷 안주머니에다가 음식을 담을 작은 단지 2개를 얼기설기 꿰매어서 달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이제 아내의 얼굴을 팔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한 모양인지, 공주님이 궁으로 일하러는 첫날부터 온갖 털 달린 동물들의 가죽은 다 잘라다가 이어붙인 것 같은 이상한 털옷을 가져다가 입혔을 뿐 아니라 공주의 하얀 얼굴과 손발에 검댕을 칠하고 혹 같은 걸 붙여서 몰골을 알아볼 수 없게 변장을 시켰습니다. 공주님은 물론 자기가 자랑하는, 자부하는 예쁜 얼굴에 손대는 건 죽기보다 더 싫었지만, 대궐이란 본디 권력자들한테 붙어서 거들먹거리는 건달들이 늘 출입하는 곳인지라 공주의 예쁜 얼굴이 그런 자들 눈에 띄는 날이면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고 남편이 잔뜩 겁을 준 데다가, 사실 본인이 그런 일을 하러 나가는 게 창피한 마음이 컸기 때문에- 만약에 공주의 나라에서 이 나라로 귀한 손님이라도 왔다가 딱 마주친다면 얼마나 난처하겠습까?- 차라리 얼굴과 신분을 감추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주는 궁 안에서 ‘털북숭이’나 혹은 ‘숯검댕이’, 이런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일은 어떻게 했냐고요? 물론 처음엔 힘들었지요,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안 새겠습니까? 그나마 집에서 싸구려 질그릇으로 ‘설거지 기초’ 정도는 떼고 갔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궁중의 귀한 중국 도자기 다 깨먹을 뻔 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그 일이 공주의 마음에 들었던 점은 비록 먹다 남은 음식일망정 본인이 예전에 먹던 고급 궁중요리들을 다시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어느 일 많던 날, 별을 보고- 대신 음식단지 2개는 가득 채워서- 퇴근하면서 공주님이 중얼거렸습니다.

   “그래, 인생 뭐 있냐? 낮엔 맛있는 거 먹고, 밤엔... 음, 밤엔 남편하고 재미있게 놀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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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주방보조 일에 좀 적응을 해가던 어느 날, 공주님이 출근을 해보니 이날은 아침부터 일거리가 산더미인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잔치라도 벌이냐고 물었더니 드디어 이 궁궐에서도 화려한 무도회가, 그것도 오늘을 ‘전야제’격으로 해서 본 무도회가 3일, 총 4일 간에 걸쳐서 벌어진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 무렵이 되니까 왕궁의 전속악단이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주방까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엉덩이가 들썩거려서,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 없게 된 우리 공주님은 원래 ‘서빙’ 담당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은근슬쩍 음식 나르는 축을 뒤따라가서 문틈으로 살짝 무도회장을 엿보았습니다. 화려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자니 옛날 궁전에서 공주로 잘 놀던 때가 생각이 나서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한가지 신기한 것은 옛날에 그렇게 시시하게 단점만 보이던 남자들이- 이젠 유부녀가, 아줌마가 되어서 그런 걸까요?- 다 너무너무 멋있게 보이는 겁니다.

   그날 밤은 공주님에게는 잠 못 이루는 밤이었습니다. 원래 멋지게 차려입은 남자들하고 춤추고 노는 거라면 사죽을 못 쓰고 좋아하는 우리 공주님입니다. 내가 이래봬도 왈츠 스텝 좀 밟아본 여잔데, 집에 와서 자리에 누웠어도 발이 들썩들썩, 몸이 근질근질, 한번 놀고 싶어서 잠이 안 옵니다.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다음날 출근길에 공주님은 예전 집에서 쫓겨날 때 부왕한테 혼뜨검이 나면서도 꿋꿋이 챙겨온 드레스와 구두를 싼 보따리를 소중히 챙겨서 새벽같이 길을 나섰습니다. 그날따라 평소답지 않게 열심히 일을 했고, 주방장 기분 좋을 때를 골라서 딱 30분만 문 밖에서라도 무도회 구경 한번 하면 안 되겠느냐고 졸랐습니다. 사실 공주는 혹시나 싶어 일단 그냥 던져본 말이었는데 뜻밖에도 주방장은 평소에 안 쓰던 큰 선심을 써서 선뜻 허락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긴 너 같은 촌년이 제대로 된 무도회를 본 적이 없을 테지.”

   승낙도 받았겠다, 무도회가 시작할 때가 되자 공주님은 번개같이 옷 보따리를 들고 인적 드문 궁궐의 후원으로 들어가서 얼굴과 손발의 검댕이를 지우고,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빗고, 혼자서 난리를 쳤습니다.

   “아이 씨, 이 드레스 벌써 유행 지난 거 아냐?”

   유행이야 지났는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옷이 날개라고, 좋은 옷 차려입고 나서니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시간도 없고 몸단장 도와주는 시녀도 없고, 대충 갈래갈래 빗은 머리였지만 원체 미인이다 보니 그게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보였고 무도회장 입구의 문지기도, 시종장도 감히 초대장 같은 걸 보자는 말도 못 꺼낼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이렇게 예쁘고 분위기 있고, 또- 적어도 외모 상으로는- 고급스러운 아가씨가 공주가 아니라면 누가 공주겠습니까?

   “진짜 공주같이 생긴 여자는 오늘 첨 봤다.”

   공주님을 들여보내고 나서 시종장이 중얼거리는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일단 무도회장 안에 들어가고 나니, 이거야 말로 물을 만난 고기가 따로 없습니다. 곧 눈부신 미모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독점하게 되었고 무도회장 안의 모든 남자들이 다 공주와 춤을 추고 싶어 했는데, 공주님은 그 중에서 가장 잘 생기고, 체격 좋고 옷맵시 나는 - 옷차림새만 봐선 어디 왕자같이 보이는- 남자의 청을 받아들여서 같이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맞춰보지만 스텝도 잘 맞고, 물찬 제비 같은 한쌍이 무도회장을 누비자 다들 춤추는 것보담 구경하는데 더 정신이 팔릴 지경이었습니다. 공주님이 간만에 짜릿한 흥분과 쾌감을 느끼면서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싶은데, 음악은 그만 끝나고 맙니다.

   ‘아이, 딱 한곡만 더 췄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여자들이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대충 머리 빗는 데만도 30분은 넘게 걸리는 법이니, 아무리 서둘렀다고 해도 이미 허락받은 30분은 훌쩍 넘긴 시간입니다. 공주님의 원래 계획은 화장실이라도 가는 척 슬그머니 무도회장을 빠져나와서 빨리 아까 그 후원으로 가서 옷 갈아입고 주방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는데, 나가다가 느낌이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니 자기랑 같이 춤추던 그 남자가 뒤를 따라오려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참, 그 짧은 시간에 또 나한테 반해버리다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비밀이 탄로날까 깜짝 놀라서 달음박질을 하는 서슬에 공주님은 그만 계단에서 구두가 한 짝 벗겨지고 말았는데, 남자가 뒤에서 쫓아오니 미처 줏을 새도 없습니다. 급한 마음에 그냥 남은 구두 한 짝을 마저 벗어서 손에 쥐고 나는 듯이 달려서 후원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렇게 겨우 ‘변장’을 마친 후에 주방으로 돌아와서- 왜 이렇게 늦었냐고 또 눈물이 쏙 빠지게 주방장한테 한바탕 야단을 맞고- 생각해보니 놓고 온 구두 한 짝이 너무너무 아깝습니다. 공주님이 정말 너무나도 아끼는 물건이었는데, 이젠 도저히 다시 살 형편도 안 되는 것을 잃어버린 겁니다. 

   하지만 성격 하나는 원래 낙천적인 우리 공주님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가만, 이거 어릴 때부터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아까 그 잘 생긴 남자, 외모만 봐선 딱 나한테 어울리는 왕자같이 보였는데 만약에 구두 주인을 찾으러 온다면? 이렇게 우리 공주님이 신분상승을- 아니 원래 공주였으니까 '신분복원'을- 꿈꾸면서 잠시나마 마냥 신나하고 있었는데 에그머니나, 빨리도 왔습니다. 위에서 주방장하고 ‘털북숭이’(내지는 공주님)을 찾는다는 겁니다.

   “잠깐만요!”

   왕자님이 자기를 찾는 모양인데 이 털북숭이 꼴로 그 자리에 나갈 수가 있습니까? 급히 주방 옆 다락으로 들어갔는데 미처 옷을 다 갈아입을 새가 없어서 그냥 입은 옷 그대로 위에 드레스를 걸치고 얼굴과 손발에 검댕만 대충 지우고 나섭니다. 구두도 안 신겨보고 날 어떻게 찾았을까, 그건 생각도 안 해볼 정도로 정신이 없습니다.

  

   “데려왔는가?”

   한데 무도회장 앞에서 공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무척 화려한 왕의 복식을 하고 있는 남자는 아까 공주와 춤을 췄던 그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그 왕을 보자 공주님의 머릿속에는 예전에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 두세 개 지나갔는데, 복장으로 봐선 이 사람은... 옳지, 예전에 자기가 망신을 준 그 ‘개똥지빠귀수염’ 왕이 틀림없었습니다. 공주님이 큰일 났다 싶어서 ‘잠깐만요’ 하고 뒤돌아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하루에 2번씩이나 도망을 친단 말입니까? 금세 손목을 꽉 잡혔는데 돌아보니 시위도 아니고 왕이 직접 쫓아와서는 공주님의 손목을 꽉 잡고 무도회장 안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공주님은 이거 놓으라고 실랑이를 하고 발버둥을 치다가 그만 드레스가 찍~하고 찢어지면서 반대편으로 나동그라졌는데, 그 서슬에 아까 미처 갈아입지 못한 속의 털옷이 노출된 건 또 그렇다 해도 옷 안주머니에 박음질한 작은 음식단지들까지 깨져서 수프며 음식 부스러기들이 온통 바닥에 공주님과 함께 나뒹굴고 말았으니, 그 우스꽝스러운 모양을 보고 무도회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나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냥 털북숭이 옷을 입고 오는 건데 겉에는 화려한 드레스를- 그것도 이젠 찢어진 채로- 걸치고, 맨 얼굴을 다 드러내고, 이게 다 뭡니까?

   “저 구두는 네 것이 틀림없겠지?”

   왕이 묻습니다. 네, 뭐 신겨보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공주가 증거삼아 긴 드레스를 믿고 한쪽만 신고 온 구두도 이젠 다 노출이 되고 말았으니까요.

   “한데 저 구두를 슬쩍 떨어뜨리고 간 까닭이 무엇이냐? 혹, 저 남자와 맺어지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 처녀가 직접 말하기 수줍어서 징표로 남기려고 그리 한 것이라면 솔직히 말을 하여라.”

   아, 결정적인 순간인데 그만 주방장이 그만 눈치없이 끼어들지 않겠습니까?

   “황공하오나, 그 주방보조는 남편이 있는 여인인 것으로 아뢰오!”

   “무엇이, 그럼 남편을 두고도 부정한 마음을 먹고 그리 하였단 말이냐?”

   아차, 그러고 보니 내가 남편이 있었지? 그제서야 공주는 잠시 새까맣게 잊고 있던 남편 생각이 났는데, 어, 갑자기 이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게다가 아니, 이건 정말 억울합니다. 분명히 처음엔 마음이 급해서, 주방으로 빨리 돌아가야 하니까 뛰다가 벗겨진 거지 징표는 뭔 놈의 징표란 말입니까? 아, 뭐 그리고 나서 잠깐 단꿈을 꾸긴 했지만, 무슨 성인도 아닌 보통 남녀가 어떻게 평생 마음으로도 한번도 간음을 안 합니까?

   “소녀는, 그런 것이 절대 아니오라, 소녀는...”

   공주가 온통 머리가 혼란한 가운데 상태에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는데 뜻밖에도 왕이 껄껄 웃으면서 아주 너그러운 목소리로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뭐, 별로 곧이들리지는 않지만 나도 쭉 그대를 속인 잘못이 있으니 이걸로 서로 비긴 셈으로 치고 연극은 이만하기로 하지. 그대의 힘든 고난의 시절은 이제 모두 끝이 났소.”

   그 말을 듣고서 둘러보니 어느새 부왕을 비롯해서 공주의 가족들이 다 도착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이게 처음부터- 공주만 빼고- 다 짜고서 벌인 일이었고 공주와 춤을 춘 그 남자도 실은 왕의 가장 잘 생긴 시종이었던 것입니다. 부왕이 웃으면서 물었습니다.

   “인석아, 이젠 반성을 좀 했느냐?”

   “칫, 반성은 무슨? 그냥 다 짜증나요!!!”

   공주님은 그동안 창피하고, 억울하고, 분했던 것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면서 눈물로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한참을 엉엉 울고 나서 공주님답지 않은 넓은 아량으로 다 용서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아마도 함께 지내던 어느 새부턴가 이 남편이 딱히 마음에 드는 구석은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조건이 최악이었지만-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어렴풋이 느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하여 곧 궁전엔 다시금 경쾌한 춤곡이 울려퍼지기 시작했고, 3일에 걸쳐서 성대한 ‘진짜’ 결혼식과 피로연이 벌어졌습니다.

 

   이후에도 우리 공주님은 끝내 철이 아주 많이 들진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확실히 달라진 것 2가지는 있었으니 하나는 절대로 바로 앞에 있는 사람에게 대놓고  험담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를 모시는 아랫사람들에게 무척 너그러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 훌륭한 왕비님 소리를 들으면서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다는 이야깁니다.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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