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대만 고궁박물원 창립 100주년/오사카 엑스포가 겹쳐서 동북아시아에 대형 특별전이 많다. 국내에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8월말까지 하고 있는 이 '새 나라 새 미술'이나, 6월말에 끝난 호암미술관 '겸재 정선'이 다 10년에 한번 보기 힘든 전시- 볼 게 많아서 좋긴 한데 우리가 이루 다 정리할 시간이 없다. 겸재 전시도 가급적 끝나기 전에 한 편 올리려고 했는데 아직 퇴고가 다 안 됐고, '새 나라 새 미술'은 다뤄볼 만한 것이 한 서너 작품 정도 될 것 같은데, 우선 가장 간단한 것부터 올린다.)

 

   일단 오늘의 주제는 바로 이 그림이다:

 

   그림은 얌전한 솜씨고, 보시다시피 그림 아래로 참석자들의 명단인 좌목이 온전히 남아 있는 계회도인데 전시 설명에는 그냥 '16세기 후반'이라고만 되어 있다- 수상해서 우리가 좌목을 확대해서 찍은 것이 아래 이미지이다. 보면 정랑이 넷, 좌랑이 넷, 참석자가 총 8명인데, '하관(夏官)'이 주례(周禮)의 체제를 끌어다가- 이조가 천관, 호조가 지관, 예/병/형/공조가 차례로 춘/하/추/동관이다- 병조를 가리키는 이름이기 때문에 달리 부르자면 '병조낭관계회도'가 되겠다:

 

   자, 위 오른쪽부터 일곱번째줄에 '수정랑봉직랑지제교(守正郎奉直郎知製 敎) 심충겸(沈忠謙)'이 보이시는지? 이 사람이 바로 연대 추정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이다. 우선 "국조인물고"에 신흠이 지은 비명을 보면, 심충겸이 1578년에 '사간원 헌납으로 일을 논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서 병조 정랑으로 체직'되었다고 명시가 되어 있다.("국역 국조인물고"가 네이버 지식백과에 들어 있어서, 네이버 검색창에 '국역 국조인물고+사람 이름' 정도 치면 수록된 인물들은 다 검색이 된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인사이동이 잦았고 특히 낭관급은 같은 자리를 여러 번 역임하는 일이 드물지 않아서 역사 상식이 있는 분들 같으면 '그렇다고 1578년이라고 단정할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실제 심충겸도 이때 병조정랑을 처음 한 것이 아니고, 이미 신흠의 글 안에 상기 인용된 부분에 앞서- 연도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병조정랑을 지냈던 경력이 기록이 되어 있다. 허나 이 경우는 간단한 추론을 통해서 1578년이 가장 유력한 연도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① 먼저 실록을 보면 심충겸이 1574년 8월에도 사간원 정언(정6품)에 임명되고 있음이 확인이 된다.[각주:1] 그런데 육조의 정랑은 정5품 벼슬이다. 사실 심충겸은 서인의 우두머리 심의겸의 친동생이고, 1575년에 이른바 '동서분당'의 계기가 된 사건이 바로 이 사람을 후임 이조정랑으로 추천하는 문제로 김효원과 형 심의겸이 쌈이 붙은 것이다. 곧, 1575년부터 심충겸이 정5품에 해당하는 관직을 맡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실록의 또 다른 기사를 통해서 1580년 12월에 심충겸은 이미 성균관 사예(정4품)로 봉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각주:2] 신흠의 비명에 따르면 성균관 사예가 되기 전에 종4품인 제용감 첨정을 거친 것으로 되어 있어, 심충겸이 병조정랑을 할 수 있는 하한은 껏해야 1580년 초이다.

 

-> ①+②로부터, 심충겸이 병조정랑을 지낼 수 있는 기간은 1575~80년으로 좁혀진다. 사실 이 정도로도 미술사 연구 목적으로는 충분한데, 약간의 추가 조사를 거치면 정확도가 더 올라간다:

 

③ 이번에는 좌목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좌랑승의랑(佐郞承議郎) 김수(金睟)'에 주목해 보자. 김수는 1573(선조 6)년 9월 알성문과에 급제해서 벼슬길에 올랐다. 그해 12월말부터 임용이 되었다고 해도 6품으로 승급하는 데 최소 2년 6개월은 소요되었을 것이다.  마침 "국조인물고"에 역시 신흠이 쓴 김수의 비명도 남아 있는데, 병조좌랑이 되기 전에 사헌부 감찰과 호조좌랑을 거친 것으로 되어 있어 김수가 병조좌랑을 맡을 수 있었던 시기는 일러야 1576년 말이다.

④ 다시 심충겸으로 돌아와 보면, 위에서 봤다시피 좌목에 '수'정랑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수직'은 품계보다 높은 관직을 제수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반대로 품계보다 낮은 관직을 맡을 때는 '행직'이다- 상기 좌목을 보면 먼저 등장하는 고참들의 관직 이름 앞에 '행行'자가 붙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계회를 열었을 때 심충겸이 품계는 종5품 상(계) 봉직랑이면서 관직은 정5품 병조정랑이라 앞에 '수'자가 붙은 것이다. 그런데 위 에서 봤듯이 1580년엔 심충겸이 관직 자체가 정4품에 이르기 때문에 계속 품계를 뛰어넘어서 관직을 제수받았다고 해도 품계 자체가 최소 정5품 상 통덕랑 혹은 종4품 하 조봉대부 이상이었어야 한다.

 

-> ③/④로부터, 좌랑 김수와 '수'정랑 심충겸이 함께 병조에 근무할 수 있는 시기는 사실상 1577~79년으로 좁혀진다. 고로 심충겸이 병조정랑을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면서, '중간값'에 가까운 1578년이 가장 확률이 높은 해이다.

 

   임란 이전 산수화는 기년작이 희귀해서 주로 계회도에 의지하는 형편이라 소중한 자료가 하나 늘었다는 의미가 있겠다. 화풍에 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른 작품과 묶어서 16세기 후반 산수화의 특징을 한번 논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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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그림이 우리는 재작년 가을에 후쿠오카시미술관에서 처음 보고 이번이 두번째인데, 해외 소재 계회도를 소개한 홍선표 선생의 논문에 실려있지 않은 것을 보면 발굴된 지 그리 오래지 않은 작품인 것 같다.[각주:3] 해서 국내 학자들이 다룬 논문은 아직 없는 듯하고, 한국어를 못하고 조선사 상식도 부실한 일본 연구자들이 간단하게 검색이 되는 "국역 국조인물고"(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2007) 같은 자료를 놓친 것이 보다 구체적인 연대 추정에 실패한 까닭이 아닌가 한다.

   암튼- 실제로 그런 직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국립중앙박물관 '대외협력담당관' 같으면 그림만 돌려보낼 것이 아니라 선생님 그림이 1578년경 작품으로 확인되었노라고, 상기 심충겸에 관한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서 편지 한 장 동봉해서 보낼 것이다- 전시 대여를 해줬더니 그림이 연구가 되어서 돌아온다면 그야말로 빌려준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1. 선조실록 권8, 선조 7년(1574) 8월 7일 무신 1번째 기사 [본문으로]
  2. 선조실록 권14, 선조 13년(1580) 12월 6일 신축 1번째 기사 [본문으로]
  3. 홍선표, '조선 전기의 契會圖 유형과 해외소재 작품들', "미술사논단" 36호(한국미술연구소, 2013), pp. 7~31. [본문으로]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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