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우리가 작년 봄까지 자료가 없어서 누락했던 참고 도판 중에, '석가출가도'의 구도상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구이의 비탄' 장면이 조선 전기엔 '설산수도상'의 핵심 장면 중 하나였음을 뒷받침하는 작품이 있는데 바로 대판시립미술관(大阪市立美術館) 소장의 '불전도'이다. 우리가 이 그림을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세부를 확인할 수 있는 질 좋은 도판도 구하질 못하고 있다가, 다행히 작년 여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새 나라 새 미술' 전시에 출품이 되면서 실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위에 보시다시피 구이가 큼지막한 전각 안에서 바닥에 쓰러져 대성통곡하고 있는 장면이 화면 상단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림 우상단 첫머리가 '금도낙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석가출가도'와의 유사성은 그림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한눈에 인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나머지 부분들을 살펴보면 주로 '설산수도+수하항마+녹원전법+쌍림열반', 곧 팔상 중 후반부 절반에 해당하는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여기에 더해서 그림 하단에는 석가모니의 전생담이 합쳐진 묘한 형태이다).

   그렇다면 '구이의 비탄' 역시 '설산수도상'에 해당한다고 봐야지, 유독 이것과 '금도낙발'을 따로 떼서 '태자의 출가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의미가 없다. 팔상을 반 나눠서 그리는 전통이 조선 전기에 있었음은 일본 대덕사(大德寺)와 금강봉사(金剛峯寺)에 각각 나뉘어 소장되어 있는 1535년작 2폭 1조의 팔상도로 입증이 되거니와, '야반유성'도 포함되지 않은 그림에 '유성출가상'을 갖다붙이는 것도, 그 결과 팔상이 4:4가 아니라 3:5(혹은 3.5:4.5?)로 나뉜다는 것도 우리가 보기엔 이중으로 억지스럽기 때문이다. 성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설산'수도상에 포함되는 것이 혼란의 원인일 수 있는데, 팔상에서 유성출가~설산수도는 이렇게 공간적 배경이 오락가락하면서 계속 이어지는 스토리이기 때문에 이는 불가피하고, 1편(2024.08.31-쾰른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석가출가도 연구초 1)에서 우리가 설명했던 것처럼 저본인 석보상절 원문의 '이튿날~'을 기점으로 둘을 나누는 게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석가출가도'는 사실 절로 유성'출가'상을 연상시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름이다. 이미 이 이름으로 십 수년 이상 불려 왔고, '비람강생상'에 해당하는 그림도 지금 '석가탄생도'로 통용되고 있으니 고치는 게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게끔 최소한 전시 해설이나 도판 설명에는 팔상 중 무엇에 해당하는 내용인지 정확히 부연설명을 해주었으면 한다.

 

   이 '불전도' 자체는 16~17세기 초 사이에 그려진 그림으로 보이나 정확한 제작연대는 추정이 어렵다. 다만 범본이 된 그림의 원형은-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1460년 이후에 도화서에서 그려진 탱화로 보이는데 이는 '금도낙발' 장면을 '석가출가도'와 대조해보면 알 수 있다:

 

   위에 보다시피 태자의 발을 핥고 있는 말 건척이나, 보관을 들고 꿇어앉아 있는 차익 등은 전부 누락이 되었지만 태자의 복식만큼은- 색깔이 '강색'이 맞는지는 의심스러우나- 강사포를 베껴 그린 것이 분명하다. 한데 우리가 '부록편'(2025.03.22-쾰른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석가출가도 연구초- Appendix)에서 다뤘던 바와 같이, 조선에서 세자가 최초로 원유관복을 착용하기 시작한 것이 1460년이기 때문에, 1460년 이후 도화서에서 제작한 탱화가 이 그림의 '시조'에 해당한다는 것까지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석가출가도'가 이 그림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까지 단정짓기는 어려운데, (상기했듯이 이 그림에 '석가출가도'를 연상시키는 구석은 있으나) 일단 '석가출가도'의 가장 큰 특징인 변각구도를 채택하지 않았고, 도상의 세부 표현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전기 모든 팔상도의 원형은 1446년 소헌왕후의 추천 불사 때 "석보상절"을 꼼꼼하게 읽고 화폭에 옮겨서 제작한 탱화이고, '금도낙발'은 물론이고 '구이의 비탄' 역시 1446년부터 이미 그림 속에 존재했을 공산이 높기에 이 두 장면을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근거가 부족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림이 전반적으로 필력이 약해서 작가가 도화서 출신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서울 화가'가 맞는지도 한번 의심해봐야 하는 지경이라, 역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경우는 도화서에서 제작한 그림이 모사가 되고, 그 모사본이 다시금 모사가 되면서 퍼져 나가는 와중에 이 그림도 제작되었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계통의 범본이 자연스럽게 섞였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불전도'가 필력은 약해도 미술사적 의의는 결코 작지 않은 그림인데, 조선 전기 팔상도 자체도 희귀하지만 하단에 묘사된 본생담을 그린 그림은 더 희귀하기 때문이다. 아래 이미지 속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위에 판독이 어려운 얼룩덜룩한 무늬가 그려져 있는 붉은 옷을 입은 인물이 주인공, 곧 윤회전생하는 석가모니이다:[각주:1]

 

   보면 이 한 단에 다섯 가지 본생담을 담고 있는데, 오른쪽부터 차례로- 좀 섬뜩하긴 하지만- 다리를 자르고, 눈을 찌르고, 건물 안에서 팔을 자르고, 그 옆에서는 목을 잘라서 '보시'를 하고 있다.

   ① 처음 둘은 월인석보 권11의 협주에 들어있는 시비왕/월명왕의 보시행일 것이다. 먼저 시비왕의 보시행은 매에 쫓겨 품에 날아든 비둘기를 살리기 위해서 매에게 자기 몸의 살을 다 바친다는 이야기인데 일단 처음에 먼저 넓적다리 살을 잘라서 저울에 달았다가 모자라자 살을 계속 베어낸다는 식으로 전개가 된다. 앞에 앉은 2인은 아마도 시비왕을 시험하기 위해 각각 비둘기와 매로 변신했던 비수갈마천과 제석천이라는 설정으로 보인다. 그리고 월명왕은 길 가다 만난 맹인에게 눈을 보시하는- '이식수술'을 어떻게 했는지는 물론 나오지 않는다- 짤막한 이야기다.

   ② 다음으로 스스로 목을 베는 이야기는 기존 연구대로 월광왕의 보시행이 맞는 것 같은데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을 한 건 아니지만) 일단 지금 남아있는 월인석보 스무 권 안에는 보이지 않는다- 혹 실전된 다섯 권 안에 들어있던 건지, 아니면 '사지절단형' 본생담만 모아서 그리다가 같이 끼어들어간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③ 중간에 정자 비슷한 건물 안에서 팔을 자르는 대목은 아예 어떤 본생담인지조차 확인이 잘 안 된다. 이럴 때 상투적으로 쓰는 어구가 '학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운운인데, 이 경우는 연구를 해도 해명이 잘 안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상기했듯이 이 화가의 기량이 시원치 않아서 묘사 자체가 부정확할- 즉, 베끼다가 잘못 베꼈을-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④ 이를테면 '사지절단형' 본생담이 다 끝나면 이어지는, 위 이미지 가장 좌측의 수레를 몰고 가는 일행이 그려진 부분은 수레를 타고 가는 여정이 '메인 플롯'인 본생담이면서 월인석보 권20의 협주에 수록이 되어 있는 수대나태자의 보시행이 가장 유력하지만, 역시 화가의 표현이 두루뭉술해서 정확하게 기중 어떤 장면인지는 '확인불능'이다.

   ⑤ 마지막으로 이 그림의 본생담은 실은 위 한 단이 전부가 아니고, 맨 오른쪽 시비왕의 보시행 장면 위로 다섯 사람이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부터가 시작인데, 이것도 고증이 잘 안 된다:

 

   보면 여기도 붉은 바탕에 무늬가 그려진 옷을 입고 있는 인물이 석가모니의 전생 중 누군가일 텐데, 그 아래 무늬나 디자인은 비슷하고 색상만 다른 옷을 입고 있는 인물이 눈에 띈다. 옷이 곧 신분을 표상하고 있다고 본다면 왕족으로 보이는 2인과, 신하로 보이는 3인의 대화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단 떠오르는 것은 동생 '악우태자'가 주요 악역으로 등장하면서, 월인석보 권22에서 상당히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선우태자의 보시행'이다. 문제는 이야기 속에 이 형제가 이렇게 신하들과 앉아서 대화를 나눌 만한 장면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본생담 장면을 고증하면서 '월인석보에 실려 있는지 여부'를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은 까닭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 '불전도'의 본생담 부분도 범본은 월인석보를 저본으로 삼아 도화서에서 제작한 그림일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참고할 만한 다른 사례라면, 일본 청산문고(靑山文庫) 소장의 '안락국태자경변상도' 혹은 '사라수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림이 있다.[각주:2] '한글이 쓰여 있는 최초의 그림'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은 월인석보 권8의 협주에 실린 '원앙부인의 극락왕생'을 꼼꼼하게 그림으로 옮기고 장면마다 한글로 설명을 달았고, 기중 단문이 아닌 긴 문장들은 아예 본문의 월인천강지곡(其227~248)을 장면에 맞게 잘라서 거의 통째로 베껴적은 것이다.

   이 '안락국태자경'의 경우는 15세기 이전에 한반도에서 성립된 위경이라는 것이 통설이기는 하나, 월인석보보다 이른 판본은 아직 발견된 바가 없기 때문에 다른 '저경'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석가탄생도/출가도'와 묶어서 생각을 해보면 도화서의 화원들은 저경이 뭐가 됐든, 또 이미 오래 전에 확립된 도상들도 석보상절/월인석보를 기준으로 디테일을 전부 맞춰서 새로 그리는 작업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상 석보상절 자체가 세종대왕의 의지로 당시 수양대군이 총책임을 맡아서 직접 펴낸 책이다- 단순히 '어제 서문'만 달랑 얹혀 있는 불서하고는 경우가 다른 것이다. 궁정화원한테 그 어떤 경전이 지금 뫼시는 상전이 만든 책보다 더 중요하겠는가? 그렇다면 석보상절이 간행된 1447년 이후, 혹은 늦어도 세조가 실권을 장악한 1453년 이후에는 도화서 화원들은 본생담을 주제로 하는 그림을 그릴 때도 석보상절/월인석보를 저본으로 삼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혹은 심지어는, 동북아시아에 벽화나 부조 외에 별 작례가 없는 본생도가 16세기 조선 회화에 다시 등장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석보상절/월인석보가 새로운 저본으로 등장하면서 준 자극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이 '불전도'가 상기했듯이 기량이 떨어지는 화가에 의해서 'N차 모사'가 된 그림이라 다른 계통/전통의 범본이 섞여들어갔을 수도 있고, 원본 그림이 어땠을지를 짐작해보기도 어렵지만, '15세기 도화서에서 제작된 본생도'의 존재를 암시하는 간접증거로는 충분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고려불화로부터 이어받은 전통에 명, 정확히는 '북경 스타일'을 가미해서 변화를 준 여타 조선전기 불화들과 비교했을 때, 석보상절/월인석보를 저본으로 한 작품들은 창작 동기와 저본에서부터 창의적인 구도에 이르기까지 가장 '조선적'인 불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도화서의 최전성기였던- 곧 회화적으로 가장 뛰어났을- 15세기 중엽의 작품은 한 점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 가석할 따름이다.

 

V. 남은 질문들 및 요약정리

; 중요하긴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획기적인(?) 새 증거자료가 발굴되지 않으면 현재로선 답변이 곤란한 질문들이 남아 있다.


V.1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는 원래 한 조였나?

   이 두 그림이 구도를 제외하면 세부필법은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팔상도 한 세트' 중 각각 '비람강생상'과 '설산수도상'이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화풍의 유사성만으로 '한 세트임'을 입증하기는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석가탄생도'가 1499년 안순왕후의 추천 불사 때 제작되었고, '석가출가도'가 1504년 인수대비의 추천 불사 때 제작되었다면, 불과 5년 상거에다 '대표화사'가 동일인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그림이 비슷해 보이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그럼 혹 '한 세트가 아님'은 입증할 수 있을까? 일단 전시장 안에서 육안으로 보기에는 '석가탄생도' 쪽이 필력이 더 나아 뵈기는 한다. 허나 '석가탄생도'가 보존상태가 월등히 낫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 결정적인 차이는 아니다. 즉, 이게 산수화 같으면 지워지고 남은 부분만 봐도 (상태가 더 좋은 그림보다) 필력이 더 낫다든가 이런 식의 판정이 가능하겠지만, 이 두 그림처럼 정밀한 묘사와 색감을 위주로 하는 경우는 당연히 보존상태가 좋은 쪽이 더 잘 그린 것처럼 보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실례로 우리가 전편에서 다뤘던 계화 부분을 살펴보자면, '석가출가도'에서 가장 큰 전각의 공포는 현재 이렇게 보이는 상태이다(직관적인 비교를 돕기 위해 전편에도 실었던 '석가탄생도'의 국부를 아래 먼저 제시했다):

 

   위에 보시다시피 얼핏 봐선 '석가탄생도'와 필법은 동일하지만 선이 삐뚤빼뚤해서 무성의하고 공력이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포 위 처마 쪽에서부터 비단이 균열이 일어나서 (색이 벗겨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표면이 일그러져 있다- 즉, 화가가 원래 선을 삐뚤게 그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사진상으로 보기엔 갈라진 비단을 억지로 끌어당겨서 기워붙인 것 같은 꼴인데 실제 상태가 어떤지, 복원이 가능한지는 보존수리 전문가가 밝은 데서 실사를 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실 이 두 그림의 가장 큰 차이는 구도에 있고, 구도가 그림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구도의 차이가 한 세트가 아님을 암시한다고 논증하는 것도 가능은 하다. 곧, '석가탄생도'의 짝은 '수평구도'로 '설산수도상'의 중요 장면을 한 폭에 다 담은 그림이어야 하고, '석가출가도'의 짝은 역시 비스듬한 변각구도로 쌍폭에 담은 '비람강생상'이어야 한다는 주장인 것인데, 이것도 아래에서 보다시피 그렇게 간단히 단정짓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

 

V.2 (한 세트건 아니건) 연작의 일부라면 몇 작품으로 이뤄진 연작인가?

  '팔'상도라면 기본적으로는 당연히 '8폭 1조'라야 맞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나) '석가출가도'가 변각구도를 채택하면서- '설산수도상'이건 '유성출가상'이건- 사실상 '0.5상'의 내용만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팔상이 다 들어가려면 최소 9폭이 필요해진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수성지보(井手誠之輔) 교수가 제기한 가설은 애초에 소헌왕후의 추천 불사 때부터 8폭 이상의 '다폭의 불전도'를 제작했으리라는 것이다.[각주:3] 이것도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나 현재로선 입증할 수 있는 증거도, 반증할 수 있는 증거도 없어 보인다. 의문점이라면 실록에 기재된 '팔상성도지도(八相成道之圖)'가 실제로는 12폭이나 14폭이었다면 왜 그냥 '세존성도지도'나 '석가성도지도'라고 부르지 않았느냐는 것과, "석씨원류" 같은 장편(?) 불전 도상이 큰 영향을 발휘하는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도 '팔상도'에 대한 끈질긴 집착이 이어지는 까닭을 '전통의 고수' 외에 과연 뭘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인데, 다만 이런 것들은 그저 '정황증거'일 뿐, 확증은 되지 못한다.

   어쩌면 정수성지보 교수는 일본 여명관(黎明館)에 소장된 13폭 짜리- 원래 최소 14폭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대 불전도 연작을 모델로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우리가 이 그림 실물을 본 적이 없어 그림에 관해서 구체적인 언급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각주:4] 단지 구도에 관해서 지적하자면, 이 연작의 제8폭 '차익환궁'이 '석가출가도'와 겉보기에 유사해 보이지만 화면 구성을 보면 4개 안팎의 장면을 위에서 아래로 단순하게 쌓아놓은 그림이다.[각주:5] 곧, 개별 장면 안에서 '대각선'이 보인다고 해도, 그림 전체적으로는 '석가출가도'처럼 대담하게 화면 전체를 반으로 가른 변각구도가 아니라 평범한 '수평구도'로 짜인 그림인 것이다.

   다만 이 불전도 연작이 도판상으로 봐선 계화 부분이라든지, 여러 모로 원대 회화의 유풍이 많이 남아 있어 명초, 곧 14c 말~ 15c 전기 작품으로는 신빙성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 '불전도'와 조선전기 팔상도에 공통적으로 영향을 준 원대 불전도가 다만 몇 폭이라도 임란 전까지 한반도에 남아 있었을 개연성은 배제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그림을 디테일까지 찬찬히 들여다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연작은 나중에 언제 기회가 되면 국내에 한번 가져와도 좋을 작품인 것이, 벽화가 아닌 축화 형태의 불전도 연작으로 '석가탄생도'/'석가출가도'와 나란히 걸어놓고 비교해 볼 만한 그림이 우리가 아는 한 별달리 없다. 또, 일본 개인이나 사설 미술관이 아닌 공공기관 소장이라 국내 대여에 비교적 협조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현시점에서 우리의 기본 가설은 1446(~7)년의 팔상도는 '8폭 1조'였고,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제작 당시의 사정에 따라서 2폭 1조나 4폭 1조, 혹은 16폭 1조와 같이 '8의 약수 혹은 배수'로 다양한 버전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석가출가도'가 제작된 15c말 ~16c 초엔 어떤 환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소헌왕후 사후에 팔상도가 제작되었다는 것 말고는 조선의 왕후 혹은 대비의 추천 불사 때 제작된 탱화의 종류나 수량을 알려주는 자료는 우리가 아는 한 남은 것이 없다. 다만 1480년대 행한 대군/공주들의 추천 불사의 경우, 인간한 불경의 권말 인기에 목록이 함께 남아있는 사례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각주:6]

 

  - 명숙공주(인수대비 장녀; 1482년 사망); 영산회도/약사회도/서방회도/천불도/팔난관음도/십육나한도/명부시왕도

  - 순숙공주(정현왕후 장녀; 1488년 사망); 원각회도/석가수도상/달마도/미륵하생회도/관음도/아미타삼존도/시왕도 

  - 월산대군(인수대비 장남; 1489년 사망); 영산회도/서방회도/행보미타/지장회도/미타팔대보살/천수관음

 

   보면 세종~문종대에 비해 전반적으로 왕실 불사가 사치스러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공주들만 해도 대략 7종의 탱화를 제작하고 있어 왕후의 경우에는 최소한 여기에 추가로 '팔상도 한 세트' 정도는 더 그려야 격이 맞아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마지막 월산대군의 경우를 보면 외려 공주들보다도 그림이 하나가 적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위선 공주들의 경우엔 제작하지 않았던 백금 불상을 다섯 구나 조성했고, 탱화도 맨 뒤에 아미타팔대보살도/천수관음도 두 점은 순금화이다. 불경도 명숙/순숙공주의 경우에는 기존의 목판을 이용해서 각각 84/42부를 인간한 게 전부이지만, 월산대군은 105부를 인간하고 거기에 더해서 화엄경 4부를 금니로 사경을 했다. 이 시기 금 시세나 물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비용이 공주들의 경우보다 최소 몇 배는(에서 어쩌면 열 배까지도) 더 들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결론은 예나 지금이나 '격'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아주 세속적으로 표현해서- '돈을 얼마나 많이 썼느냐'라는 것이다. 불상이나 사경에 충분히 많은 지출이 있었다면 탱화는 오히려 줄어들 수도 있어, 위 대군/공주들의 경우처럼 어디서 불경 뒤에 목록을 포함한 발문이나 인기라도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추측하는 것도 어렵다.

 

   넘어가기 전에 상기 목록에 대해서 간단한 부연설명을 덧붙이자면, 순숙공주를 위해서 그린 '석가수도상'에 잠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순숙공주의 경우에 새로 그린 그림은 맨 뒤의 아미타삼존도/시왕도 둘 뿐이고 원각회도~관음도까지는 태조 때 그린 그림을 보수한 것으로 밝히고 있어, 단정하긴 어려우나 어쩌면 여말선초의 선구적인 '설산수도상'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숙공주에 비해 불경도 반만 찍고 불사가 전체적으로 간소했던 것은 순숙공주가 시집도 가기 전 열살 남짓한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까닭인데, 해서 이 '석가수도상'이 굳이 추천 불사를 위한 그림으로 선택된 이유도 그림 안에 장자의 딸이 우유죽 공양을 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어서였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곧, 수리를 하면서 장자의 딸을 죽은 공주와 닮게 그리거나, 혹은 그 옆의 여백에 공주의 이름을 적어넣으면 '우리 딸이 이렇게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니 극락왕생하게 해달라'는 간단하고 직관적인 '주술적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또, 참고로 예전에 이 목록을 접한 적이 있는 분들은 월산대군을 위해서 '행보미타지장회도'를 그렸다고 알고 계셨을 수 있는데, 이는 오역이다- 설령 우리가 모르는 '아미타지장회'라는 게 정말로 있었다 한들, 그림 속 아미타불이나 지장보살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어야지 수식어로 앞에 '행보(行步)'가 붙을 수는 없다. 원문을 보면 발문을 지은 학조대사가 '영산회도/서방회도/행보미타/지장회도', 이렇게 그림 제목을 네 글자씩 맞춰서 쓴 것을, 끝에 그림 '도'자에만 신경을 써서 그만 '영산회도/서방회도/행보미타지장회도'라고 잘못 끊어 읽은 것이다. '지장회도'는 두 공주의 추천 불사 때 공통적으로 그려졌던 '시왕도'가- 죽은 사람 좋은 데 가라고 벌이는 불사이니 웬만하면 필수라고 볼 수 있다- 빠진 것으로 보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지장시왕도' 계통의 그림임이 확인되고, '행보미타'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아미타독존 내영도'류의 그림이 아니었을까 싶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상기 목록이 지금 우리의 논점에 주는 시사점이라면, 만약 우리가 추정하는 것처럼 '석가출가도'가- 최소한 원본은- 인수대비의 추천 불사 때 제작된 것이라면 아래와 같은 2가지 경우가 다 열려 있다는 것이다.

 

(i) 팔상을 모두 변각구도 쌍폭으로 제작해서 총 16폭을 그렸다: 위 명숙/순숙공주의 경우를 봤을 때 다른 불화를 그리지 않았다면 점수로 껏해야 2배 정도이니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 혹은 인수대비의 경우 조정에서 주관하는 공식적인 장례는 이전 사례보다 간소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일종의 '보상심리'로 두 며느리(정현왕후와 승평부대부인 박씨)가 불사는 더 크게 치렀을 수도 있다- 마침 승평부대부인 박씨가 바로 상기 월산대군 사후의 성대한 불사를 주관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이 경우 자연히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는 한 조는 아닌 것이 된다.

(ii) 팔상도를 다 그리지 않고 일부만 발췌해서 그렸다: 어쩌면 인수대비는 추천 불사조차도 간소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더 성대하게 치르려다 보니 (위 월산대군의 경우처럼) 불상이나 사경에 돈을 과하게 써서 탱화는 오히려 줄어들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상기 두 공주들의 불화 목록에 보이는 정도에 더해서, 왕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좌에 앉은 마야부인'이 등장하는 '비람강생상'과, 고인의 일생과 연관된 특별한 의미를 대입할 수 있는 '설산수도상'을 쌍폭으로 쪼개어 그려서 보태는 정도로 그치는 것도 가능해진다- 즉, 팔상도를 온전하게 다 그릴 때나 '8의 약수나 배수'가 적용되는 것이지, 기중 몇 개만 골라서 그린다면 폭수가 다 짝이 맞을 필요도 없고 한 폭에 '0.5상'이 들어가도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는- 불완전하나마 같이 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한 조가 맞을 것이다.

 

   얘기가 이렇게 월드컵 때마다 한국 축구 팬들을 고문하는 '경우의 수'로 끝나서 우리도 심히 유감스러운데 현재로선 이 이상 논의를 진척시킬 수 있는 근거가 없고, 어쩌면 '영구미제'로 남을 가능성도 상당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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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출가도'의 가장 큰 회화적 특징은- 이 장르의 그림에서 쉽게 보기 힘든- 화면을 대담하게 반으로 가른 변각구도이다. 이와 같은 구도의 선택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대각선 구도의 중심 위치, 곧 주인공의 자리를 태자비 구이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과, 화면에 담긴 장면의 수가 줄면서 생긴 남는 공간에 외견상 텍스트와 느슨한 연결관계밖에 없는 대형 연못을 배치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저본인 "석보상절"의 '설산수도상'에 해당하는 내용에 딱 한번 등장하는 연못은 태자의 출가 후에 불륜의 의심을 받던 구이와 아기가 뛰어든 불구덩이가 변해서 된 것으로 모자를 구원하는 장치이다. 화가는 여기서 연못가의 짝 잃은 공작과 연못 안의 원앙을 대비시키는 은유를 통해서 구이의 비탄을 한층 더 극적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다.

   화가의 이런 처치는 조선 팔상도의 시원이 소헌왕후의 추천 불사에 있다는 점과 맞물려서 그림의 주인공이 태자가 출가한 때와 비슷한 나이에 남편 의경세자가 요절했으며, 유복자(미래의 성종)의 어머니였던 인수대비였음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림의 제작연대로 가장 유력한 것은 인수대비의 추천 불사가 이루어진 1504년경이고, 이는 연산군 대이다. 이 그림의 또 다른 특색인 '정반왕의 십이지장복' 역시 기존의 학계 통설대로 조선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추측한 대로 성종조 말의 '금승법 파동'으로 인하여 극심해진 유불간의 감정대립의 흔적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이는 시기적으로 연산군 대를 가리킬 수밖에 없다.

   기실 기존 통설이 옳다고 해도 입만 열었다 하면 '위를 업신여기는(凌上) 풍조'를 일소하겠다고 하면서 피바람을 일으킨 사람도 바로 연산군이고, 조선을 사상적으로 지배했던 성리학적 질서와 '가장 안 친했던(?)' 왕도 연산군이기 때문에, 연산군 대는 여전히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남는다. 뿐만 아니라 이 그림의 두 번째 큰 (회화적)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지금 남아있는 여타 15세기 불화에도, 16세기 불화에도 보이지 않는 독특하고 화사한 색감 역시 그림을 끔찍이 좋아했던 연산군의 화려한 취향을 반영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 그림이 갖는 미술사적 의의는 불화/종교화의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속화에 있어서도 중대한데, 그 첫째 이유는 이렇게 문헌상으로만 희미하게 전하는 연산군 대의 화려했던 궁정회화의 편린을 간직하고 있는 사실상 유일한 자료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림 안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계화 부분 때문인데, 이성(李晟)으로 대표되는 고려불화의 전통을 잇고 있음과 동시에 원대의 발전된 왕진붕파 계화의 영향을 흡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정밀한 묘사는 이 '석가출가도'가 ('석가탄생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계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라 해도 전혀 지나침이 없는 높은 수준에 있다.

 

   한 가지 단서를 단다면, 이 그림이 인수대비 추천 불사 때 제작된 원본이라는 보증은 없다는 점이다. 예전에 해당 편에서(2024.12.31-쾰른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석가출가도 연구초 3) 언급했듯이, '나 홀로 십이장복을 입고 있는 정반왕'은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왕실이 발원한 그림이 범하기엔 너무 큰 실수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실수를 연산군 대의 '나사 빠진 조선'의 산물로 해석하는 것은 유혹적이지만 진실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이를테면 이 일이 1506년쯤 한양 최고 갑부가 원본의 대표화사한테 거금을 주고 팔상탱화를 부탁하면서 '우리 정반성왕을 주 소왕과 대등한 황제로 그려달라'고 주문해서 발생한 사고라고 가정해도 최소한 똑같이 '있음직한' 시나리오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다만 이 그림이 설령 왕실에서 발원한 그림이 아니라 하더라도 15세기 말~16세기 초 도화서의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는- 원본이었다면 아마도 좀 더 그림이 좋았을 수는 있겠지만- 손색이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이 그림은 상기한 대로 보존상태가 썩 좋지는 않기에, 비록 국외에 있지만  한국에서 예산과 인력을 지원해서 수리를 해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작품이라는 점은- 만약 우리가 제대로 논증을 했다면-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모두 공감하시리라 믿는다.

 

 

  1. 이 그림의 본생담 해명을 시도한 연구로는 신지연, "조선시대 석가팔상도 연구"(동국대학교, 2010), pp. 47~51, 오영삼, op. cit., pp. 34~37 참조. [본문으로]
  2. 호암미술관 편, "朝鮮前期國寶展"(삼성문화재단, 1996), pp. 242~243 도판 참조. [본문으로]
  3. 정수성지보(井手誠之輔), op. cit., p. 301 참조. [본문으로]
  4. 정수성지보(井手誠之輔), '黎明館本の仏伝場面に関する覚書', 국죽순일(菊竹淳一) 편, "九州における仏敎美術の遍在と偏在"(平成7・8・9年度科学研究費補助金(基盤研究(B1))研究成果報告, 1998) [본문으로]
  5. 오영삼 교수의 책에도 이 제8폭의 작은 도판과 약간의 언급이 있다. 오영삼, op. cit., pp. 44~46 및 p. 232의 미주 34번 참조. [본문으로]
  6. 천혜봉, "한국서지학연구"(삼성출판사, 1991), pp. 696~697 및 pp. 702~703 참조. [본문으로]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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