쾰른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석가출가도 연구초 6
공연/전시 review 2026. 5. 14. 18:11 |IV. 불전도와 계화
IV. 1 연원
지금까지 이 그림에 관한 주요 논점들은 거의 다 취급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상 그림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요소는 다뤄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그냥 배경'이라고 무시되기 쉬운 계화 부분이다. 기실 '석가탄생도/출가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라면 한눈에 들어오는 큼지막한 궁궐의 정교한 묘사인 것이다.
계화(界畵)의 '계'는 자를 가리키는 '계척界尺' 혹은 직선을 그릴 때 쓰는 붓인 '계필界筆'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요는 실제로 자를 대고 그리거나, '자로 잰 듯이' 그린다는 뜻이다. 제재는 주로 건축물인 경우가 많지만 선박이나 수레처럼 정밀묘사가 가능한 모든 '인공물'이 다 해당이 된다.
그런데 이 계화가 불전도라는 장르와 본격적으로 융합된 것은 최소 10세기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북송 태종이 짓고 간행한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 권21, '어제불부(御製佛賦)'의 첫번째 판화이다1:

이 그림이 마침 지난 가을 일본 경도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송원불화' 특별전 후반부에 출품되었기 때문에 관심있는 분들은 최근에 실물을 확인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이 된다- 위에 보다시피 그림의 우측 절반 이상이 계화로 채워져 있는데, 화면 우상단 작은 원 안에 전생의 석가모니가 마야부인의 뱃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도솔천으로부터 흰 코끼리를 타고 내려오는 장면을 묘사한 것 말고는 딱히 중요한 내용도 없다(작품 속의 중요한 사건은 '비람강생상'에 해당하는 그림 왼편에서 대부분 벌어진다).
화가가 이런 구도를 채택한 이유에 대한 한 가지 가설은 그 당시 유행하던 화풍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최초의 계화 대가로 언급되는 곽충서(郭忠恕)나 위현(衛賢)이 "어제비장전"의 간행보다 살짝 앞선 10c 중반 무렵에 주로 활약한 인물들이라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최초'라고 해서 계화가 이때 시작되었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고- '계필직척(界筆直尺)'이라는 표현은 이미 당나라 장언원의 "역대명화기"에 나온다- 학자들은 보통 이것을 중국회화사에서 계화가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 10세기 중후반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동양화든 서양화든 종교화는 가장 보수적인 미술 장르중 하나지만 그렇다고 늘 똑같은 그림만 계속 그릴 수는 없다. '어제불부' 판화의 밑그림을 담당한 화가 역시 당시 유행하던 '최신식' 계화를 비중있게 도입해서 그림의 장식성도 높이고, 새로운 스타일도 보여주는 효과를 노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까닭이다.
이러한 계화와 불전도의 융합 전통에서 '어제불부' 판화의 뒤를 잇는 중요한 그림은 현재 중국 산서성(山西省) 흔주시(忻州市) 번치현(繁峙縣)에 있는 암산사(巖山寺/岩山寺)의 금대 벽화로, 1158~67년간 그려진 벽화들 중에 문수전 서벽 전체가 불전도이다. 이 작품은 우리도 현장에 가본 적이 없어 자세히 논할 수는 없는데, 도판을 보면 장면에 맞춰서 건물을 묘사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기본적으로 궁성을 묘사한 대규모 계화를 먼저 깔아놓고 사이사이에 불전의 주요 장면을 끼워넣은 구도로 되어 있다.2
이것은 경전 판화와 벽화라는 형식의 차이는 있지만 상기 '어제불부' 판화의 구도법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또한 이 그림의 대표화사 왕규(王逵; 1100~1167 이후)가 북송말에 사실상 기초 수업을 다 마친 금나라의 궁정화가였기 때문에 적어도 북송~금대까지는 이런 양식의 불전도가 꾸준히 그려졌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는 북송과 문화적 교류가 매우 깊었고, 북송 멸망 이후엔 금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다. 따라서 고려의 궁정화원들도 불전도를 그릴 때 비슷한 스타일을 구사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지적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이를 증거할 길도 없고, 또 여몽전쟁 이후, 곧 13세기 후반 이후에도 이 전통이 이어졌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어제불부' 판화의 경우는, 전체적인 인상은- 특히 '석가탄생도'와- 뭔가 공통점이 있는 듯도 보이는데 막상 세부 묘사로 들어가보면 정확히 닮은 구석이 어딘지 확실치가 않다. 불교의 역사가 오래다 보니 불전도에 나오는 도상들이 확립되고 동북아시아에 널리 전파된 역사도 깊어서, 이렇게 시간 간격이 먼 작품들 사이에는 '겉보기에 닮은' 정도로 직접적인 영향 관계를 확립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이 작품은 당시 도화서 화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가 맞는지부터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초조대장경은 조선초에도 이미 '희귀 고서'였을 것이고, 지금 일본 남선사에 있는 "어제비장전 권21"이 당시 조선 땅 어디에 있었을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고려말이나 조선초에 수입되었을 원/명대 판본하고는 경우가 다른 것이다. 과연 당시 조선의 화가들이 이 판화의 존재를 알고나 있었을까? 그림 안에서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대답은 '아니오'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요는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고려 후기의 '연결고리'가 존재했을 개연성은 충분하지만, 근거 자료가 없는 논증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간에 전통의 단절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계화의 비중이 높은 불전도는 다시 그려질 수 있다는 논리가 존재한다. 일단 석가모니가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난 덕분에 불전도에서 '도솔래의상'~'유성출가상'에 이르기까지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배경이 왕궁이다. 다른 한편으로 왕실 발원 회화에 궁정생활 묘사가 화려하게 들어가는 것은 장르를 불문하고 일반적인 경향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왕실 발원 불전도란 태생적으로 공급 측에서나 수요 측에서나 정교하고 화려한 계화를 넣기를 원하기 쉽다는 것이다. 상기한 것처럼 암산사 벽화를 그린 왕규도 궁정화원이었고, '어제불부'의 판화 역시 작자 미상이긴 하지만, 앞에 '어제'가 붙어있다는 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물론 전제는 화가들이 계화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다시 '석가탄생도/출가도'에 보이는 계화 양식의 기원에 관한 문제와 연결된다. 다행히 적어도 이 그림의 계화 양식의 근원은 고려불화와 원대 계화에서 추적할 수 있다.
IV. 2 왕진붕과 원대 계화의 발전
사실 중국회화사에서 계화의 발전은 북송~금대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원대에 다시 한번 새로운 정점을 찍게 되는데, 원대 계화를 대표하는 화가가 바로 왕진붕(王振鵬; 1280?~1329?)이다(왕진붕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는 우리가 본 중엔 방문(方聞; Wen Fong)이 쓴 Beyond Representation의 것이(pp. 396~7) 가장 좋다. 이 책이 한국에선 도서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에 가면 무료 PDF 파일을 제공하니 참고하시기 바란다).3
왕진붕은 중국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기 이태리에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건축 설계와 회화를 겸업했을 사람이다. 동북아에서는 화원과 대목 사이에 '직업의 분화'가 이미 오래전에 끝났기 때문에 아마도 병행을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명성은 생전에도 계화가 더 높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유감스럽게도 지금 남아있는 확실한 진적은 공교롭게도 재작년에 호암미술관이 대여해 왔던 불도인물화 2점, '이모육불도(보스턴미술관)'와 '유마불이도(메트로폴리탄미술관)'뿐이다(그외 북경고궁 소장 '백아고금도(伯牙鼓琴圖)'는 도판으로 봐선 저으기 의심스러우나, 우리가 실물을 본 적이 없어 100% 위작이라고 단정짓지는 못하겠다.).
왕진붕의 계화 화풍을 짐작해볼 수 있는 전칭작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북송 휘종 때 매년 3월 초에 황실 소유의 금명지(金明池)와 경림원(瓊林苑)을 개방해서 용선 경주를 비롯한 온갖 놀이와 기예 공연을 벌이면서 여민동락했다는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이다. 크고 작은 차이가 있는 모본이 우리가 들어본 것만 7~8종이 되고, 대만 고궁이 그 중 넉 점을 갖고 있는데 '보진경도도(寶津競渡圖)', '용지경도도(龍池競渡圖)', '금명탈금도(金明奪錦圖)', '용주도(龍舟圖)' 등으로 이름은 전부 다르다.
지금 남아있는 모본들 중 최선본은 아마도 '용주도'인데, 일단 전체적으로는 대략 이렇게 생긴 그림이다:

전형적인 횡권 양식인데- 크기는 세로 32.8cm×가로 178cm이다- 여기서 위 이미지 왼쪽 끝부분의 가장 큰 누각(보진루寳津樓)를 확대해 보면 아래와 같다:

보시다시피 기본적인 명암도 다 안 들어가 있는 미완성본이기 때문에 이 그림을 진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것이 왕진붕이 사전에 제작한 초본이라고 주장하는데, 우리가 보기엔 '원작의 초본'이 아닌 '모작의 초본'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다만 다른 모본들이 명청대 모사일 가능성부터 따져봐야 하는 데 비해 이 '용주도'는 원대 것으로는 유력하다.
이번에는 또 다른 '대조군'으로, 역시 대만 고궁에 소장된 '용지경도도'의 보진루 부분이다:

두 그림의 차이는 가장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필요한 처마 아래의 공포 부분을 비교해 보면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래 왼쪽이 '용주도', 오른쪽이 '용지경도도'이다:


보시다시피 오른쪽 '용지경도도'가 일견 묘사는 더 정교한 듯하지만 사실감이나 입체감은 선은 흐려도 왼쪽 '용주도'가 보다 앞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결론은 아마도 둘 다 모작이라는 것이다- 왕진붕의 진적이라면 당연히 입체감과 정교함을 둘 다 갖추고 있어야 한다. 모작 선본들 중 어떤 것은 최대한 상세한 묘사에만 치중했고, 다른 것은 입체감을 살리는 데만 만족한 것이다.('용지경도도'의 경우엔 공포의 구조를 오해한 채로 모사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우리가 거기까지 다룰 만한 건축사 지식이 없으니, 전문 지식을 갖춘 분이 한번 연구를 해보기 바란다.)
이제 조선 화원의 솜씨를 볼 차례이다. 아래 이미지는 '석가탄생도'의 우하단, 마야부인의 가마 오른쪽으로 보이는 문루의 일부이다:

이것은 채색이 되어 있어 그냥 지나칠 수 있는데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밑그림에 꼼꼼하게 8~9개의 수평선을 자를 대고 그려서 각각의 공포를 이루는 부자재들의 높이를 다 맞추어 놓았다. 정교한 밑그림에 채색까지 더해져서 시각적인 효과가 탁월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그림의 수준을 평가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말하자면 '축척'이 다르다는 것이다. 위 '용주도'나 '용지경도도'는 그림 전체의 높이가 30~33cm에 불과한 데 비해 '석가탄생도'는 그림 전체가 145cm이고, (우리가 실측은 할 수 없었지만 사진을 놓고 대강 '비례식'으로 계산해봤을 때) 위 전각 하나만도 높이가 대략 26~7cm는 된다. 그림이 크면 정밀 묘사가 훨씬 더 쉽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외 단점으로 사실감이 부족한 부분이라면 부재 하나하나를 충실히 묘사하려다가 공포들의 너비가 불어나서 실제 건축물처럼 자로 잰듯이 일정하게 조정이 되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쯤 되면 왕진붕파의 진정한 후계자는 명나라가 아니라 조선에 있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참조할 만한 그림으로, 아래 이미지는 명사대가 중의 한 사람인 구영(仇英; c. 1494~1552)의 '한궁춘효(漢宮春曉)'의 국부인데 공포 부분을 한번 주의해서 살펴보시기 바란다:

보시다시피 그림 전체적으로는 섬세한 묘사와 색감이 돋보이는 수작이지만 공포의 입체감이나 극사실적 묘사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수법을 보면 고화에 해박했던 구영이 의도적으로 오대~북송 시기의 계화 필법을 적극적으로 섞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구영은 왕진붕을 '발전'이라고 인식하기보다는, '어쨌든 오대북송 대가들보다는 아래'로 인식했으리라는 것이다. 서양화의 세례를 받은 현대의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① '2차원의 평면에 3차원 세계를 재현한다'는 분명한 목표와, ② '투시도법'이라는 수단이 둘 다 갖춰져야만 왕진붕을 한 단계 뛰어넘는 건축화가 가능한데, 어느 쪽도 완전하지 않았던 동북아에서 왕진붕의 성취는 더 이상의 진전이 없이 그냥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실지 원대 직업 화원들의 그림이 제대로 보존이 안 되고 남은 것이 별로 없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왕진붕과 그의 직전제자 주보(朱珤; 1292–1365) 정도 외에 '용주도' 수준의 계화를 구사한 화가들이 있었다는 증거 자체가 없다.
해서 이 '한궁춘효'는 16세기 중반 것이라 '석가탄생도/출가도'보다도 한 세대 이상 뒤이긴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명청대 계화는 연대를 불문하고 원대 수준에 미치 못한다- 묘사가 정교할 때에도 '건축적'이라기보다는 '만화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전기 회화 자체가 희소해서 단정짓긴 어려우나, 이 '석가탄생도/출가도' 외에 이 정도 수준의 계화를 보기 어렵기 때문에 아마도 16세기초 이후는 조선에서도 점차 중국의 경향을 따라갔던 것으로 보인다.
IV.3 조선으로의 전달 경로
일단 왕진붕의 영향이 한반도에 미치기 시작한 기원은 상당히 분명하다- 왕진붕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원 인종이 친형제보다 더 가깝게 여겼던 사람이 바로 고려의 충선왕이기 때문이다. 충선왕의 그림 취향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대 대수장가로 유명했던 인종의 누이 노국대장공주 셍게라기(祥哥剌吉= Sengge Ragi)가 개최한 미술품 감상 모임에 등장한 몇 안 되는 '현대미술 작품'이 거의 모두 왕진붕의 것이었다는 점은 시사적이다.4 아마도 충선왕 역시 왕진붕의 대작 한 점 정도는 받아놓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게 아니라도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화가'의 명성이 대도에 줄을 대고 있던 고려의 세도가들의 귀에 흘러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향을 실증할 수 있는 고려회화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해외 학계에서 고려불화, 특히 일본 대고사(大高寺) 소장 '관경십육관변상도'에서 원대 계화와의 유사성을 찾은 경우가 있는데 우리가 보기엔 왕진붕과는 무관하다.5 왜냐면 대고사 '관경십육관변상도'가 13세기 것이라는 설도 유력하지만- 그것을 따질 필요도 없이- 확실한 기년작인 이성(李晟)의 '미륵하생경변상도'(1294)에 최소 동일한 수준/수법의 공포 묘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성의 그림에는 계화가 크게 두 부분이 있다. 먼저 그림 상단 배경의 큼지막한 누각은 중심부가 용화수에 가려져 있지만 양 끝쪽으로 송대 필법을 연상시키면서도 원대 스타일로 균질하게 가지런히 정돈된 공포 부분을 볼 수 있고, 다음은 그림 하단 성문의 문루로 대고사 '관경십육관변상도'와 유사한 수법은 이쪽이다.
이게 필히 사진을 보여드리고 설명을 해야 하는 그림인데,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갖고 있는 게 없다. 일본 사회 특유의 폐쇄성 때문에 일본 소장품들은 온라인에서 쓸 만한 고해상도 이미지 파일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운데, 전시장을 방문한들 웬만한 기획전은 전부 '휴대폰 촬영금지'라서- 그나마 가장 개명한 편인 국립박물관들이 상설전에 촬영을 허용하는 정도이다- 일반인들은 직접 찍을 수도 없다. 여담이지만 우리가 작년 가을에 이 그림을 보러 경도국립박물관에 갔다가 빅센(Vixen) 4배율 단안경을 끼워파는 '세트 입장권' 선전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휴대폰 카메라가 워낙 성능이 좋아져서 사진 촬영만 허용해 주면 바로 현장에서 찍어서 확대를 해서 볼 수 있으니 4배 단안경 따위, 시야가 좁아서 보기만 불편하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세상이다. 그 어두운 전시실에서 휴대폰으로 사진 좀 찍는다고 그림이 아작(?)이 나는 것도 아니어서, 우리가 아는 한 지금 일본 말고 이런 미개한 방침을 고수하는 나라가 별로 없다. 한국은 뭐든지 너무 빨리 변해서 탈이고, 일본은 너무 안 변해서 탈이라 서로 반반씩 섞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아무튼 왕진붕이 소시적에 얼마나 유명한 '천재 소년'이었는지는 몰라도 이성이 1294년에 왕진붕의 그림을 보고 그렸을 확률은 거의 희박하다. 그보다 이성을 비롯한 고려불화의 계화 기법이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왕진붕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 곧, 계화의 발전이 북송 이후에 완전히 정체된 것이 아니라 13세기에도 동북아시아 전체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직업 화원들에 의해- 계속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중국에도 이를 확실히 증거할 그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성의 '미륵하생경변상도'는 여러가지로 굉장히 귀한 자료다(참고로 이 그림과 닮은 지은원 소장 '미륵하생경변상도'는 겉보기엔 묘사력이 비등해 보이지만 구석구석 꼼꼼히 들여다보면 실력차가 있어 이성과 같은 레벨의 화가의 작품은 아니고, 특히 계화 필법에 수준 차가 많이 나는 것으로 봐선 여러 화목에 두루 능해야 하는 궁정화원이 아니라 불화만 전문으로 그리던 화승이나 사화원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상황이 똑 앞서 북송/금대 불전도의 영향을 논할 때와 비슷해 보이지만 이 경우는 문헌 증거를 통해서 최소한의 '연결고리'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원대의 '누각산수' 장르의 그림들이다. 실제 중국회화사에서 왕진붕의 주요 후계자로 꼽히는 이용근(李容瑾)이나 하영(夏永)의 작품들이 전부 여기에 속하고, 아래는 그 중에서 하영 전칭의 '등왕각도(滕王閣圖)'이다:

보시다시피 '누각산수'가 별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누각+산수', 곧 상기 '용주도'에 나오는 것 같은 왕진붕 스타일의 대형 건물군에 (용선이나 인물군 대신) 배경 산수의 비중을 키워서 결합시킨 것이다. 15세기 조선에서 인기가 있었던 누각산수화는 아마도 하영보다는 구도나 산수 부분 필법이 이곽파 스타일로 된 그림일 가능성이 더 높겠지만 우리가 굳이 이 그림을 예시로 선택한 이유는, 첫째로는 계화에 무슨 '이곽파 계화', '동거파 계화'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서 지금 우리의 논점과 무관하고, 둘째로는 '등왕각도'가 당시 문헌에 누차 언급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신숙주가 정리한 안평대군의 소장품 목록인 '화기'를 보면 이 장르의 대가로 '필세가 정미한' 이필(李弼)의- 이 사람은 중국에도 남은 그림이나 기록이 전혀 없어서 정체가 오리무중이지만, 대도에서 한때 잘 나갔던 직업화원일 가능성이 높다- '등왕각도(滕王閣圖)'/'화청궁도(華淸宮圖)'가 있고, 안견이 안평대군을 위해 그린 그림 중에도 '등왕각(滕王閣)'과 '황학루(黃鶴樓)'가 나온다. 뿐만 아니라 성종이 '등왕각도'와 '황학루도'를 꺼내다 직접 제시를 쓰고, 승지들한테 '뽑기'를 시켜서 그림을 나눠준 기록도 있어 15세기 후반까지 내내 이 장르의 그림이 '스테디셀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묘하게 이름이 겹치기 때문에 이게 안평대군이 소장했던 안견의 그림과 동일한 것들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한데, 여말선초에 계속 그려지던 제재들이라서 단정짓긴 어렵다).6
이제 위 '등왕각도' 역시 공포 부분을 한번 확대해서 살펴볼 것인데, 보면 상당히 흥미롭다:

혹 이건 선이 너무 무질서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분이 계신다면, 옳게 바로 보신 것이다. 무론 자세히 살펴보면 나름 일정한 원칙을 갖고 그은 선들이지만, '표현 효과'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마치 남대문 앞을 지나다가 문루를 무심히 흘깃 올려다 보고 지나갈 때 받는 것과 같은, '뭔가 목재가 왕창 들어가 있다'는 느낌밖에 주는 게 없다. 그런데 원대 누각산수화들의 공포 묘사 수준이 전부 이렇게 허술하게 복잡하지 않으면 단순화/도식화가 되어 있지, '용주도' 계열 그림들의 수준에 근접한 경우가 거의 없다.
여기서 15세기말~16세기초의 조선화원이 어떻게 '석가탄생도/출가도' 수준의 계화를 그리게 되었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즉, 왕진붕파 계화의 필법을 그의 영향을 받은 원대 누각산수화를 보고 익힌 다음, 공포의 구체적인 모양이라든지 용마루의 치미, 추녀의 잡상 같은 디테일은, 말하자면 '실사구시'를 해서 당시 조선의 건축양식을 참고해서 채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밀도의 개선'이 15세기 말에 이뤄진 배경은 무엇일까? 한 가지 가능한 가설은 이것이 성종~연산군대 운영되었던 '내화청'의 유산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전편에서 언급했던 대로 내화청의 기원은 성종대 화원들을 창덕궁 구현전에 상주시키면서 살아있는 새나 초목을 사생하게 한 것이다- 여기서 '사생'의 대상을 주변 건축물로 확장하면 자연스럽게 계화의 표현력도 향상된다. 이용근이나 하영 같은 원대 누각산수의 공포 표현에 사실감이 다소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실력있는 화가라면 누구나 포착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선 대가들의 관행에 도전하기 위해선, 최소한 '새로운 창작 환경' 정도의 자극은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아마도 내화청의 화원들도 그림을 끔찍이 좋아하는 임금들 덕분에 궐내에 근무하면서 '특식'을 받아먹었으면, 그에 상응하는 밥값(?)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지 않았을까? 또한 보다 치밀한 사생으로 공포의 사실감을 개선하면 그림의 장식성이 강화된다는 것과, 이것이 '석가탄생도/출가도'에서 볼 수 있는 남달리 화려한 색감과 궤를 같이한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조선이 명나라보다 최소 반세기~한 세기 더 늦게까지 계화에 천착했던 배경을 추측해보자면, 아마도 근대 학문으로서 미술사가 도입되기 이전에 계화의 대명사는 곽충서였다는 데서, 곧 곽희의 산수화, 이공린의 백묘인물화와 함께 북송 회화가 남긴 전범으로 묶을 수 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 이미지는 곽충서 전칭의 '설제강행도(雪霽江行圖)'로 진적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원대 것이 아닌 북송~금대 작품으로는 신빙성이 있다:

이 대만 고궁 소장품은 사실 오른쪽 절반 정도가 잘려나간 것으로, 그림이 잘리기 전에 모사한 버전이 미국 넬슨-앳킨스 미술관(Nelson-Atkins Museum of Art)에 소장되어 있다(이쪽은 다운로드는 안 되지만 시카고대 동아시아미술센터에서 운영하는 'East Asian Scroll Paintings' 웹사이트(https://scrolls.uchicago.edu)에서 상당히 질 좋은 이미지 파일을 볼 수 있다.). 해서 이 그림도 왕진붕의 '용주도'처럼 모본이 많이 돌아다녔던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안평대군도 같은 제목의 그림을 하나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 신숙주의 ‘화기’에서 확인이 된다. 계화가 산수나 인물처럼 위상이 높은 장르는 아니지만 조선에서도 곽충서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소략하지만 연구자료도 갖고 있었다는 증거이다(참고로 현재 통용되는 '화기' 번역본에서 안평대군의 소장품 중에 또 하나의 곽충서 작품으로 '휘종의 어필이 붙은' '고각임강도(高閣臨江圖)'가 있다고 한 것은 오역임을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보다시피 아무 내용이 없는 '설제강행도 곽충서진적(雪霽江行圖 郭忠恕真跡)' 10글자만 휘종의 수금체(瘦金體)를 흉내내어 적었기 때문에 신숙주가 '설제강행도'를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그림 위에 휘종의 어필이 있다(上有宋徽宗御筆)'고 덧붙인 것이지, 이게 바로 뒤에 나오는 '고각임강도'에 붙는 수식어구가 아닌 것이다.).
위 '설제강행도'를 유심히 살펴 보면 건축화가 아니라서 제재는 다르지만, 실제 관찰에 바탕을 둔 정교한 선박 장구의 묘사가 뛰어나서 정밀도가 상당히 높은 그림이다. 안평대군의 소장품이 수준이 어느 정도나 되었을지는 미지수이나 아마도 원대 모작들 중 선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견이 원대 이곽파를 연구해서 ‘오리지널’ 곽희의 재현을 추구했듯이, 곽충서의 전칭작이나 원대 화가들의 누각산수 진적을 통한 계화의 연구 역시 북송 회화에 접근하려는 시도였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영락제/선덕제 시기의 북경에서도 조맹부 스타일의 복고를 다시금 지향하긴 했으되 이민족을 몰아내고 다시 세운 한족 왕조로서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이 강했다면, 세종조의 문예부흥은 '문예 사조로서의 복고주의'를 더 철저하고 집요하게 추구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영향력이 점차 감소했을지언정 조선 전기 내내 전범으로서의 위상은 잃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우리의 사견이다.
***
- 대만 고궁박물원 2층의 208 전시실은 국보 서화 한 점을 집중 조명하는 방인데, 마침 지금 상기 '용주도'가 주인공이다. 회화실(210/212 전시실)에서 '獨騷-楚辭文化意象與龍舟'라는 제목으로 테마전을 열고 있기 때문에 보조를 맞춘 것이고, 212엔 '보진경도도'도 출품이 되어 있어, '용지경도도'까지 같이 안 나온 것은 조금 아쉽지만 두 작품을 비교해볼 수 있다. 여기가 컬렉션이 워낙 방대해서, 모르긴 해도 1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이니 관심 있는 분들은 한번 가보시기 바란다. 이 두 전시는 6.21(일)에 끝난다.
- 그리고 서예 쪽에선 7.5(일)까지 '真假乾隆-清高宗的御筆與代筆'이라는 제목으로 건륭제의 진적과 대필, 그리고 대필자들이 자기 이름으로 쓴 글씨를 나란히 보여주는 전시를 한다. 고궁 서예실은 사실 이런 테마전보다는 그냥 상설 교체 전시가- 한국 관광객들 중에 나름 식자들이 설마 이런 게 상설전에 나올 리가 있나 싶어 간혹 '복제품'으로 오인하는, 당/송/원 대가들의 희귀한 묵적이 뭐든 최소 하나 이상 나온다- 훨씬 더 볼 만하긴 하지만, 그림이든 글씨든 기초적인 진위식별도 제대로 안 하는 한국에선 보기 힘든 유형의 전시이니 방문하실 분은 그냥 지나치지 말고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번 봐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오랫동안 건륭제의 '대표작' 행세를 해온 작품도 실은 대필이었음을 알 수 있으니 전시설명을 보지 말고 한번 맞춰 보시기 바란다).
다음 편에선 누락된 부분들을 좀 보충한 다음, 간단히 요약/정리를 하고 마치려고 한다….
To be concluded...
- '어제불부'/'어제전원가' 판화의 전체적인 내용에 관하여는, 김자현, '日本 南禪寺 소장 『 御製秘藏詮 』의 「御製佛賦·御製詮源歌」 판화 연구', "미술사학" 25(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1), pp. 35~68과, 이영종, op. cit., pp. 181~191 참조. [본문으로]
- "中國寺觀壁畫全集 vol. 1. 早期寺院壁畫"(廣東教育出版社, 2011), pp. 216~274, 문수전 서벽 전도는 pp. 242~243 도판 참조. [본문으로]
- https://www.metmuseum.org/met-publications/beyond-representation-chinese-painting-and-calligraphy-eighth-fourteenth-century [본문으로]
- "公主的雅集—蒙元皇室與書畫鑑藏文化"(臺北 : 國立故宮博物院, 2016), p.259, 또 이 아집의 감상품 목록은 pp. 227~228 참조. [본문으로]
- 陳韻如, '再探《唐僧取經圖冊》:元代的視覺敘事與新解', "國立臺灣大學美術史研究集刊" 58(國立臺灣大學藝術史研究所, 2025), pp. 229~230 참조. [본문으로]
- 성종실록 권100, 성종 10년(1479) 1월 10일 정묘 3번째 기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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