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관이 재개관하고 전시가 개편이 되면서 '시즌 하이라이트'라는 것이 생겼다- '교체전시마다 반드시 봐야 할 서화 작품을 2~3점씩 선정'한다는 것인데, 이번 시즌엔 겸재의 '신묘년풍악도첩'(국립중앙박물관)과 '박연폭도'(개인 소장)이라고 한다. 오늘의 주인공은 그 중에서 후자이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 그림은 위작이다. 뿐만 아니라 보기 드물게 객관적으로 간단히 입증할 수 있는 위작이라- 우리가 일전에 올린 '풍악내산총람'보다도 훨씬 더 쉽다- 듣고 나면 '콜럼버스의 달걀'이 떠오를 것이다. 아래 이미지에 해답이 다 들어있는데, 자, 뭐가 문제일까?

 

   먼저 기초지식으로 그림 속 전체 풍경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박연은 폭포 위쪽이 박연이고, 폭포수가 흘러내려서 이룬 못은 고모담이라고 한다. 폭포 위아래로 검은 바위가 하나씩 그려진 것은 아마도 박연의 도암과 고모담의 대룡암일 것이다. 그림 오른쪽 상단의 성문은 대흥산성의 북문이고, 사실 박연폭포는 이 산성 안을 흐르던 시내가 폭포를 이루어 성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대흥산성'을 검색하면 박연폭포와 성문이 같이 나오게 찍은 흑백사진이 있는데, 다운로드가 안 되는 이미지이니 관심있는 분은 한번 찾아보시기 바란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295) 마지막으로 상기 '문제적 장면'에 나오는, 고모담 옆에 서 있는 정자는 이름이 범사정(泛槎亭)이다.

   위 이미지 속의 범사정을 보면- 하나는 열려 있고, 하나는 닫혀 있는-창문이 2개 나 있다. 그런데 잠깐, 정자에 '창문'이라는 것이 있는가? 더 정확히 말하면, 정자엔 당연히 '벽'이라는 것이 없다. 정자의 사전적 정의가 바로 '경치 좋은 곳에 놀거나 쉬기 위해 지은, 벽이 없이 기둥과 지붕만 있는 집'인 것이다.

   여기서 이 그림의 작가는 '벽 있는 정자'와 같은 모순을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우리와 같은 현대인이고, 그림의 제작연대는 20세기 초 이후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만약 구한말 이전의 그림이라면, 화가는 아마도 고서화상에서 사환 같은 것을 하다가 손재주 있는 것이 주인 눈에 띄여서, 가게 골방에 들어앉아 하루종일 가짜 그림만- 그것도 가짜 그림을 범본으로 삼아- 전문적으로 그리면서, 말하자면 '그림 노예' 생활을 하던 인물일 것이다.

 

   혹시라도 조선시대엔 우리가 몰랐던 '벽 있는 정자'가 있었다거나, 아니면 실제 존재하진 않았더라도 그림 속에선 이런 '정자 아닌 정자'를 그려넣은 사례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것은 실제 조선시대 박연 폭포 그림 속에서 범사정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확인해보면 검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 왼쪽은 작자미상의 '송도사장원계회도' 6폭 병풍(1612; 1772 이모) 중 '박연관폭'이고, 오른쪽은 윤제홍의 '학산묵희첩' 중의 '박연도'(c. 1812)이다. 그 아래는 아마 더 자주 보셨을, 강세황 전칭의 '송도기행첩' 중의 '박연도'이다:

이미지 출처=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보시다시피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정자를 올바르게 그렸고, 범사정 벽에 난 창문을 그려놓은 그림은 한 개도 없다. 기실- 우리가 사진을 안 갖고 있어서 못 올린- 겸재 이름으로 된 박연 폭포 그림이 두 점이 더 있는데 거기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그 중 개인 소장의 소품 '박생연도'는 우리가 본 기억이 없고, 간송미술관 소장의 '박생연도'는 길이가 1m가 조금 안 되는 축 그림인데 둘 다 마로니에북스 출판사의 블로그에서 비교적 괜찮은 사진을 볼 수 있다.[각주:1] 이외에 마지막으로 임득명의 '서행일천리장권(西行一千里長卷)' 중 '박연범사정도'(c. 1813)라는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네이버 미술백과에 '박연범차정도'로 검색하면 이미지를 볼 수 있다(제 이름을 치면 안 나오니 주의해야 한다).[각주:2]

   이상 총 여섯 점의 박연 폭포 그림으로부터 조선 시대엔 '벽 달린 정자 그림'조차 없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실상 너무나 당연한 것이, 천하명승 박연폭포 옆에 기껏 정자를 지어놓고 벽을 쌓아서 시야를 다 막아버리는 것과 같은 '악취미'가 우리 조상들에게 있었을 턱이 있겠는가?

   재미있는 것은 이 여섯 점이 다 진적도 아니라는 것이다- 겸재 이름으로 된 그림 2점도 기초적인 진위식별부터 다시 해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 특히 강세황 전칭 '송도기행첩'은 이미 공개적으로 진위논란이 있었던 그림이다(우리가 보기에도 거의 위작이다). 즉, 위작이건 아니건, 최소한 화가가 조선시대 사람이기만 하면 이런 그림은 나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해서 상기했듯이 이 그림은 생활 양식이 완전히 바뀐 20세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외 우리가 위에서 '혹시나'의 가능성으로 '그림 노예' 이야기를 했을 때 아마도 독자들 중에는 '이 무슨 소설이냐' 생각하신 분이 없지 않을 터인데, 조선 사람이 박연 폭포 코앞에 마루 한 칸/방 한 칸 있는 '여염집'을 그려놓으려면 이만저만 무식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달리 경우의 수가 몇 가지가 없는 것이다- 설령 박연 폭포 한 번도 못 가봤다 한들, 여름에 세검정 건너편에서 정자 위의 양반들 구경하면서 발장고만 치고 놀았어도 정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게 아닌가?

 

   실은 이 그림은 시선이 정자까지 내려가기도 전에 안목 있는 분들은 벌써 소소하게 이런 데나,

 

 

   아니면, 아래 이런 데를 보면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화면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암벽 묘사 부분인데- 이것은 알아보려면 조금 더 난이도가 있긴 하지만- 붓질한 것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거의 무너져가는 담벼락에 마구잡이로 '뺑끼칠'을 해놓은 수준이다:

 

   이런 건 붓이 '힘찬' 게 아니라 '무식한' 것이고, 굳이 서양화로 비유를 하자면 '초등학생이 그린 명작 추상화'와 같다- 뭐가 '명작'인지는 보는 사람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누가' 그렸는지는 분명하게 밝히고 넘어가야 할 게 아닌가?

   이 화가가 배움이 짧다는 것은 인물화 부분을 살펴 보면 더 알기 쉽다. 그래서 첫머리에 우리가 보여드린 이미지 안에 답이 다 들어 있다고 한 것인데, '스크롤 압박'을 피해서 인물화 부분만 아래 다시 확대를 해보겠다:

 

   위 사진 맨 오른쪽 시동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자세히 보면, 오른팔이 있어야 할 부분이 명확하게 처리되지 않아서 사실상 '외팔이'가 되어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사실 이 그림은 상기한 간송 소장 '박생연'과 닮은 구석이 많은데, 거기선 범사정 옆에 모여선 인물군 3인이 아예 얼굴도 이목구비가 그려져 있지 않은 윤곽선 뿐이고, 시동은 옆모습만 보인다- 이 그림은 바로 작년 호암미술관 겸재 전시에도 나왔었는데, 우리가 보기엔 18세기 그림 자체가 아니라서 이렇게 쓸모가 생길 줄 모르고 사진을 안 찍어놓았다. 그래서 우리가 이 '박생연'은 사진이 없는데, 대신 유사한 장면이 '해악전신첩'(1747) 중의 '삼부연'에 나온다(이것은 확실한 겸재 진적이고, 겸사겸사 이렇게 확대해서 보면 점 하나 찍은 솜씨도 가짜하고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이미지를 보면, 사람 머릿수가 2배로 늘었다는 걸 제외하면 전체적인 처리 수법은 비슷하다는 걸 볼 수 있는데, 보통 이런 부류의 그림에서 인물은 주인공이 아니라 자연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한 '소품'에 더 가깝기 때문에 묘사는 간략하고 선도 많이 쓰지 않는다.

   한데 '박연폭도'의 화가는 이것과 비슷하게 생긴 그림 속 장면을 보고 베껴 그리면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동의 얼굴이 온전히 보일 정도로 몸을 정면으로 돌려놓고는, 자연스럽게 따라 나타나야 할 오른팔은 제대로 그려놓지 않아서 '외팔이'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골방에 들어앉아서 매일같이 하던 '그림 노예' 노릇이 지겨워서, 심심파적으로 지인의 초상 혹은 본인의 '자화상'이라도 그려넣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화가가 인물의 각도를 틀었다고 묘사를 제대로 못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거니와, 시동 바로 옆 주인의 왼팔 도포 소매에 주름 잡아놓은 솜씨만 보더라도 한마디로 '요령부득'이라, 이 작가가 인물화 묘법을- 다른 화가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하든, 아님 중국 화보를 보고 공부를 하든- 체계적으로 공부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아마도 인물화 역시 이를테면 '단원 가짜' 같은 것을 보고 베끼면서 배운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 전시는 4.26(일)까지. '법수 없는 위작은 이렇게 생겼다'는 걸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특히 관련 분야를 전공할 뜻이 있는 학생들은 놓치지 말고 전체적인 인상 뿐 아니라 암벽/나무/인물 등등, 그림을 요소요소로 나눠서 눈여겨 봐두면 좋을 것이다. 제대로 교육받은 화가가 그린, 화법에 어긋남이 없는 그림을 겸재 것으로 둔갑시킨 것은 당연히 알아보기가 더 어렵고, 그것도 겸재와 연대가 겹치는 18세기 중후반 이전 그림이라면 더욱 더 어려워진다. 이렇게 눈썰미와 손재주만 갖고 남의 그림 베끼기만 해서 그린 그림부터 알아보는 게 가장 기본이다.

 

***

 

   전시가 개편이 되면서 서화관에서 다만 몇 점이라도 서예 작품을 더 볼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처럼 서예 전시가 부실한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서예박물관에 제대로 된 서예사 전시가 사라진 지도 벌써 꽤 됐다.

   혹자는 한글이라는 완벽한 문자를 가진 덕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이를테면 일본이 가나를 버리고 한글을 수입해다 쓴다 할지라도 그들의 '서도사'를 한국처럼 천대할 것 같진 않다. 우리가 예전에 듣기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엔 서예사를 전공한 연구 인력이 없다고 했다- 아직도 없으면 지금이라도 자리를 만들어서 한 명 뽑아야 하고, 그새 한 명이라도 뽑았다면 두 명으로 늘려야 한다.

   한국인에게는 활 잘 쏘고 글씨 잘 쓰는 DNA가 있다. 허나 만약 '양궁'이라는 게 없었다면, 아니 그 양궁이 올림픽 종목이 아니었더라면 한반도에 '명궁'은 진작에 대가 끊겼을 것이다. 서예는 무슨 서구의 'calligraphy'와는 사촌뻘조차도 아니고, '올림픽'이라는 것도 당연히 없다. 명필의 대는 이미 끊긴 것이나 마찬가지고, 보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서예사조차도 망각의 늪으로 빠질 것이다. 김생부터만 쳐도 최소 1300년이 넘는 서예사가 곧 국민들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질 판인데, '국립중앙'박물관이 안 나서면 이걸 누가 하겠는가? 이런 일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나서서 한 마디씩 해야지 서예가 내 전공이 아니라고 나 몰라라 한다면, '자살의 현장'을 방조하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가 서예는 아직 회화보다도 공부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따로 글을 잘 쓰진 않는데, 이 이야기는 안 하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마침 생각난 김에 몇 자 적었다.

 

Posted by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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