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mas story

환상소품- I. 거위치는 소녀

이현욱 2017. 12. 12. 04:51

: Zart und mit Ausdruck.


- 1 -

   땅의 남쪽 끝으로 가면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여왕이 다스리는 마법사들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여왕에겐 외동딸이 있었는데 아직 뱃속에 있을 때 우연치 않은 기회에 평범한 인간 왕국의 왕자와 정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더 각별하고 애틋하게 딸을 키웠는데 시집을 보내야 하는 약속한 날짜가 결국 오고야 말았지요. 여왕은 혼수 격으로 금은으로 된 그릇이며 보석 장신구 따위들을 한 짐 챙기고 공주가 탈 ‘말하는 말’ 팔라다와 가는 길에 시중을 들 시녀가 탈 튼튼한 노새를 한필 준비했고, 마지막으로는 칼로 자기 엄지손가락을 살짝 베어서 깨끗한 흰 손수건에 피를 세 방울 떨어뜨린 다음 잘 접어서 딸에게 건넸습니다.
  “시댁에 도착할 때까지 꼭 품에 넣고 다니렴. 절대로 네 몸에서 떨어지게 해선 안 된다?”
  사실 그것은 부모가 자기 핏줄을 보호하기 위해 거는, 고래로 전해오는 간단하지만 아주 강력한 보호 마법이었습니다. 여왕은 딸에겐 아무 마법도 가르치지 않았는데 그것은 평범한 인간들이 사는 나라로 시집을 가서 혹- 좋은 의도일지라도- 마법을 썼다가 마녀로 오해받을까 저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녀가 잠깐 이별의 눈물을 뿌리고 나서 드디어 공주는 신행길을 나섰습니다. 처음 며칠간은 별일이 없었지요. 계절은 초봄을 막 지나서 점점 볕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공주님은 목마름을 느끼고 시녀에게 냇가를 찾아 물을 좀 떠다 달라고 말했습니다만, 돌아오는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목이 마르면 니 손으로 떠드세요?”
  곱게 자란 착한 공주님은 이런 경우를 처음 겪었기 때문에 바로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아야 한다는 생각도 못했거니와, 사실 생각을 했더라도 마법도 쓸 줄 모르는 어린 아가씨가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큰 여자가 작심하고 끝까지 대든다면 달리 혼낼 길도 없었지요.
  공주님이 꾹 참고 한동안 더 가려니 이젠 도저히 갈증을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시냇가에 이르렀는데 눈앞에 뻔히 보이는 시내에서 물을 좀 떠오라는 청에도 대답은 아까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목이 마르면 니 손으로 떠드시라니까?”
  공주님은 어이가 없어 그럼 내 손으로 떠먹을 테니 어머니가 챙겨준 금잔이라도 꺼내어 달라고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더 가관이었습니다.
  “기스 나요. 그게 누가 쓸 건데?”
  공주님은 하는 수없이 말에서 몸소 내려 시냇가로 가서 물을 마시려고 엎드렸습니다. 한데 너무도 목이 말랐던 탓에 급히 상체를 숙이고 물을 떠먹다가 그만 가슴에 넣어두었던 여왕의 손수건이 물에 빠져 시냇물을 타고 흘러내려가고 말았습니다.
  “어마, 어떡해!”
  못된 시녀가 노린 것이 바로 이때였습니다. 이제 여왕의 보호 마법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자 아예 노골적으로 본색을 드러내어 강제로 공주님의 옷을 벗겨서 자기가 입고 공주님에게는 지 보따리에서 입던 누더기 헌옷을 하나 꺼내어 던져주더니만, 앞으로는 자기를 공주님이라고 부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주가 어안이 벙벙해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니 이번에는 왕궁에서 미리 훔쳐온 마법이 걸린 종이와 펜을 내밀고는 공주를 겁박해서 서명을 시켰습니다. 내용인즉슨, 자기와 있었던 일이나 원래 신분을 발설하면 공주 모녀가 천벌을 받아서 죽게 되리라는 저주였습니다- 공주의 입막음을 위해 준비한 술책이었지요. 사실 여왕은 주의 깊게 시녀도 마법을 할 줄 모르는 시녀로 골라서 딸려 보냈는데 그게 도리어 화근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마법사들의 나라에선 시녀들도 다 조금이라도 마법을 할 줄 알았기 때문에 마법을 전연 할 줄 모르는 경우는- 약간 모자라는 사람 비슷하게- 천대와 멸시를 받는 처지였습니다. 해서 평소에 쌓인 게 많았던 이 못된 시녀는 속이 검은 부류라서 겉으로는 마치 약간 모자라긴 하지만 품성은 충직한 양 지금까지 여왕의 눈을 속여 왔던 것입니다.
  자기 뜻을 다 관철한 못된 시녀는 탈 것도 서로 바꾸어서 공주는 지가 타던 노새에 타라고 하고, 바야흐로 본인은 말하는 말 팔라다에 올라타서 사기결혼을 위한 장도에 막 오를 참이었습니다. 한편 팔라다는 그때까지 이 못된 시녀가 하는 짓거리를 보고 무척 화가 나있었습니다. 다만 원래 무척 과묵한 성격이고 아직은 자기가 나설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뿐이었는데, 급기야는 이 못된 것이 흉측하게 생긴 엉덩이로 자기를 깔고 등에 올라타려고 하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질 않겠습니까?
  팔라다는 참고 참던, 잔뜩 노리고 있던 ‘분노의 하이킥’을 뒷발로 날렸는데 못된 시녀는 아직 운이 다하지 않았던지 무심결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서 직격탄은 모면하였습니다. 잠깐 비척, 했다가 중심을 잡은 뒤에 무슨 생각인지 팔라다는 그냥 놓아두고 이제는 옷을 바꿔 입고 추레해진 차림의 공주님에게 다가가서는, 머리채를 붙들고 인정사정없이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공주님은 아프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태어나서 이런 일은 처음 당해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무서워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끼야~ㄱ!”
  “자, 봤지? 고분고분히 내 신랑감이 기다리고 있는 왕국으로 날 데려다주지 않으면 이 천한 종년이 어떤 험한 꼴을 당하게 될지?”
  못된 시녀가 호기롭게 외치는 소리에 팔라다는 분노의 콧김만 쉭쉭, 내뿜을 뿐이었습니다...
  그 후로는 별일 없이 가짜 ‘공주’와 ‘가짜’ 시녀는 정혼자가 기다리고 있는 나라의 왕궁에 도착했습니다. 신랑이 될 왕자님은 아무 의심 없이 신부감을 맞아들였고 왕자가 신부를 임시로 머물 처소로 안내하자 우리 공주님은 무심코 뒤를 따랐는데, 못된 시녀는 갑자기 빽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넌 거기 그대로 서 있어!”
  그리고는 왕자님에게 저것이 오는 내내 말을 더럽게도 안 들어처먹었다고, 어머님을 모시고 있던 궁에서는 그렇게 착한 척을 하고 온갖 아양을 다 떨더니, 막상 단둘이 길을 나서니 물 한잔을 떠오라고 해도 게으름을 부리더라고 거꾸로 일러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공주님은 기가 딱 막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덜덜 떨면서 서 있었는데 사정을 모르는 이 나라 사람들 눈에는 똑 제가 지은 죄가 있어서 겁을 겁은 것 같이 보였지요. 게다가 공주님은 누더기 헌옷 차림에다 못된 시녀가 공주의 미모를 조금이라도 더 가리기 위해서 여행하는 내내 씻지도 못하게 하고, 얼굴에다가는 검댕이와 오물을 묻혀서 냄새나고 후줄근해진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조것은 제가 더 옆에 두고 부릴 수가 없으니, 아무 허드렛일이나 시키세요.”
  가짜 신부는 일단 그렇게 진짜를 왕자님 눈에 잘 안 뜨일 곳에 치워놓고, 곧 자기가 왕비가 되면 소리 소문 없이 없애서 후환을 제거할 심산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왕자는 가짜 신부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나고 불쌍한 우리 공주님은 혼자서 우두커니 서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조금 떨어진 전각 안에서 공주님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왕자의 부왕이었습니다. 부왕은 이미 나랏일은 왕자에게 다 맡겨놓고 사실상 은퇴를 한 상황이었고 그마저도 결혼식과 동시에 아들에게 양위를 하고 자신은 상왕으로 완전히 물러나겠다고 이미 선포를 해놓은 상황이었습니다. 한가하게 쉬고 있던 터라 저녁에 정식으로 상견례를 하기 전에 며느리 될 사람이 궁금해서 밖을 살짝 내다보고 있었던 것인데, 의외로 뒤에 홀로 남은 소녀가 주의를 사로잡지 않겠습니까? 겉은 지저분해도 이목구비가 아름다운 윤곽은 남아있어 범상치 않았습니다. 부왕은 시종을 시켜 그 남루한 소녀를 불러오게 해서 물었습니다.
  “너, 부엌일이나 허드렛일을 하는 것보다 오늘부터 내 시중을 드는 게 어떠냐?”
  “괜찮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도 싫다는 게냐?”
  “네.”
  부왕은 조금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차림새도 누추하고 말도 짧은 이 소녀는 함부로 볼 수 없는, 거역할 수 없는 기품이 있어서 더 강요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궁궐에서 기르는 거위를 치는 일을 하도록 시켰는데 궐 안엔 이미 콘라드라는 이름의 거위치기 소년이 있었기 때문에 그냥 따라다니면서 거들기만 하면 되는, 어찌 보면 편한 일이었습니다.


- 2 -

   콘라드는 오늘도 거위장 앞에서 소녀를 기다렸습니다. 소녀가 늦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소년이 괜히 저 혼자 가슴이 설레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열심히 세수를 하고, 거위장 안을 청소하고, 부산히 거위들을 몰고 나갈 준비를 제시간보다 일찍 마치게 된 건 분명히 소녀가 온 이후부터였습니다.
  “미안, 오늘도 혼자서 다 했네, 같이 해야 하는데.”
  “아냐, 원래 내가 하던 일인 걸, 뭘.”
  하지만 매일- 콘라드의 눈엔- 샛별처럼 나타나는 소녀는 아침 인사 외엔 말수가 극히 적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면 소녀가 좋아할까, 무슨 이야기를 하면 웃을까, 콘라드는 요새 밤마다 인생 최대의 고민이 그거였습니다. 지금도 둘이 거위 떼를 몰고 궐문 밖으로, 다시 성 밖 들판으로 나가는 길에 콘라드가 용기를 내어서 이 얘기 저 얘기 붙여보고, 나름 ‘수집’한 우스개도 좀 해봤지만 소녀는 들은 척 만 척입니다. 약이 오른 콘라드는 네가 이래도 반응을 안 보일래, 하는 식으로 그동안 참아왔던 말을 덥석 내뱉고야 말았습니다.
  “얘, 넌 마녀라면서?”
  “아니야, 마녀.”
  “어쨌든 니가 마녀들 나라에서 온 건 사실이잖어?”
  “...”
  또 대답이 없습니다. 콘라드는 괜히 심술이 더 나서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힘껏 걷어찹니다- 그리고 곧 그런 말을 왜 했을까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녀는 먼 이국에서 왔다고 했고 뭔가 큰 죄를 지어서 벌로 자기와 이 일을 하게 되었다고도 했습니다. 처음 봤을 땐 온몸에서 악취가 풍겼지만, 한 2분 지나서- 코가 마비되자마자- 콘라드는 소녀의 곁에서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콘라드가 데려간 우물가에서 소녀가 세수를 하고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을 본 순간, 콘라드는 그대로 첫사랑에 빠졌습니다. 
   들판에 나가서 거위 떼를 풀어놓고 나면 사실 한동안 별로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사람도 둘이었기 때문에 한명이 거위 떼를 지키고 있으면 다른 한 사람은 ‘자유시간’이었지요. 소녀는 숙소에서 제대로 신변정리를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기댈 만한 큰 바위를 찾아 치렁치렁한 긴 금발머리를 풀어 머리를 정성스레 빗는 게 일과였습니다. 햇살을 받아 찰랑찰랑 빛나는 금빛 머리칼은 정말로 탐스럽게 아름다웠지요. 소녀가 어디 갔나 궁금해서 찾다가 그 광경을 처음 보게 된 콘라드는 매일 몰래 숨어서 소녀가 머리 빗는 모습을 훔쳐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지요- 그 머리칼을 직접 만져 보고, 한 가닥이라도 뽑아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은 큰 결심을 하고 오늘이야말로 꼭 만져보겠다, 뽑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발소리를 죽여서 살금살금 소녀에게 다가가 소녀의 머리칼을 당기려고 막 손을 뻗치는데, 그만 저도 모르게 침이 꼴깍, 하고 너무 큰 소리를 내면서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본 소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눈살을 찌푸렸고, 콘라드는 잠시 그렇게 엉거주춤, 허공에 손을 뻗은 그 자세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 있었지요. 한데 뜻밖에 소녀가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소녀는 여왕의 엄명으로 고향에서 아무런 마법도 배우지 못했지만 유일하게 할 줄 아는 마법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건 시녀들하고 궁궐의 정원에서 장난을 치며 놀다가 저절로 배운 것이었지요.

  바람아 바람아 마파람아 불어라
  콘라드의 모자를 머리 위로 날려라
  바람아 불어라 마파람아 불어라
  날려서 날려서 은하수에 걸어라

   그러자 정말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람이, 그것도 콕 집어서 콘라드의 머리 위에서만 일어나 콘라드의 모자를- 원래 양치기 목동들이 쓰는 모자로 콘라드가 무척 아끼는 재산목록 1호였지요- 휙, 하고 벗겼습니다.
  “어?!”
  콘라드는 냉큼 손을 뻗어 모자를 잡으려고 했지만 바람은 딱 콘라드의 손이 닿을락말락하게, 정말 손가락 한마디 반 길이만큼만 앞으로 모자를 날려서, 콘라드는 가도 가도, 손을 두 번, 세 번, 거듭 뻗어도 모자를 낚아챌 수가 없었습니다.
  “우이씨, 어디 내가 널 잡나, 못 잡나 보자!”
  약이 바짝 오른 콘라드가 오기가 생겨 죽을 힘을 다해서 모자를 쫓았습니다만, 잡으려는 모자는 끝내 잡히지 않고 갑자기 눈앞에 별이 번쩍(!), 합니다.
  “아이쿠!”
  모자만 보고 앞으로 달리다가 그만 이마높이로 낮게 드리운 굵은 나뭇가지를 못 보고 들이박은 겁니다. 한동안 눈물이 핑 돌면서 이마를 싸쥐고 쩔쩔매고 있었는데, 그래도 그때 콘라드의 귀에 어디선가 피식,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긴 했습니다.
  소녀가 머리를 다 빗고 단정하게 정리하자마자 신기하게도 바람은 멈추고, 모자는 사뿐히 콘라드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콘라드는 하마터면 소녀에게 ‘너 진짜 마녀지?’ 하고 물을 뻔 했는데, 다행히도 이번엔 꾹 잘 참았습니다. 다음번에도, 그 다음번에도, 콘라드가 소녀의 머리칼을 뽑으려고 숨어서 몰래 다가가면 소녀는 노래를 불렀고 신기한 마법의 바람이 불어오면 콘라드는 모자를 좇아, 아니, 바람을 좇아 달리다가 바닥에 튀어나온 나무 등걸을 깜빡 못 보고 걸려 넘어지거나, 시내에 풍덩 빠지거나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바위 뒤에 숨어서 머리를 빗으면서 킥, 하고 웃는 소녀의 웃음소리를 환청처럼 들었답니다(- 혹여 웃다가 자기랑 눈이 마주치면 다시는 웃지 않을까봐, 소녀를 쳐다볼 수가 없었으니까요...).


  한편 가짜 신부인 줄도 모르고 덜컥 식을 올린 신왕은 왕비에게 자기 나라를 한번 구경시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우선 궐 밖을 한번 구경시켜줄 생각으로 차비를 시켰습니다. 왕비가 나와 보니 팔라다가 금실 은실을 수놓은 멋진 새 안장을 얹고 대기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왕비가 아차, 싶어 말했습니다.
  “저것이 아직 여기에 있었군요! 전 저놈을 다시 타고 싶지 않아요, 성질이 사나워요! 오다가 뒷발질을 해서 맞아죽을 뻔 했단 말이에요!”
  네, 이건 분명 사실이었지요, 비록 팔라다가 아무 이유 없이 걷어찬 건 아니었지만요. 여튼 신부의 눈에 거짓 없는 ‘진실한’ 분노가 보였기 때문에 뜨거운 첫날밤을 같이 보낸 지 며칠 되지 않아 아직 알콩달콩한 신혼을 보내고 있던 신왕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이쁜 신부의 청을 그대로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그 청이란 팔라다를 참수형에 처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사실이라면 왕족에게 중대한 상해를 입힐 뻔 했으니 왕조시대엔 사람이었어도 목이 나갈 만한 중범죄이긴 했습니다만, 물론 실상은 ‘말하는 말’ 팔라다의 입을 깨끗이 막아버리자는 속셈이었지요.
  그 슬픈 소식을 공주님께 전해준 사람은 물론 콘라드였습니다.
  “얘, 너네 공주님이 타고 온 말 말이야, 이름이 뭐, 팔라다?”
  “팔라다가 왜?”
  소녀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바로 되물었습니다, 호오, 이만만 해도 평소 공주님 성격으로는 아주 큰 관심을 보인 셈이었습니다. 콘라드가 약간 신이 나서 말을 이었습니다.
  “어제 그만 목이 잘렸댄다.”
  “거짓말!”
  공주님이,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완전히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서 외쳤습니다. 사정을 모르는 콘라드가 발끈해서 말했습니다.
  “거짓말은 무슨, 얜 내가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랜다? 그놈이 그렇게 성질이 고약하다면서? 오다가 제 주인, 그러니까 우리 왕비님을 걷어차서 죽일려고 했다든데? 그래서 그 죄로 목이 잘린 거라고!”
  공주님은 이번엔 정말로 화가 나서 그날 내내 콘라드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실상은 팔라다의 일이 너무 슬프고 가슴이 아팠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날 저녁 공주님은 처음으로 콘라드에게 ‘부탁’이라는 걸 했습니다. 팔라다의 시체가 버려진 곳으로 가서 팔라다의 목을 몰래 가져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아가씨가 죽은 말대가리를 갖다 달라니, 이거야말로 마녀가 아니고서는 할 부탁이 아니질 않습니까? 뭐, 정이 많이 들었던 놈이라 양지바른 데 고이 묻어주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콘라드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습니다.
  “죽은 말대가리? 그것도 한밤중에?”
  “대신 내 머리칼 한 가닥 뽑아 줄게. 너 갖고 싶어 했잖아, 아니야?”
  “글세...”
  콘라드는 짐짓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럼 세 가닥?”
  “좋아, 그리고 내가 직접 뽑게 해줘.”
  “뭐어?”
  소녀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콘라드는 간만에 소녀에게 배짱을 한번 튕겨봅니다- 덥석 좋다고 하려다 보니 소녀의 머리칼을 만지려고 할 때 모자가 날아갔던, 약 올랐던 추억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싫음 말고~.”
  그러자 소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날 밤 콘라드는 팔라다의 목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죽은 말의 시체 따위, 말고기 장사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그렇게 신경을 쓸 리가 쓰겠습니까? ‘액션’이 어려운 게 아니라, 무섭고 끔직한 게 문제인 일이었지요. 죽은 말대가리를 오래 만지기가 싫어서 대충 보자기로 처매서 매듭을 묶어 손잡이를 만들어 들고 보니, 앞에서 보면 마치 ‘팔라다 아줌마’가 처네를 쓴 것 같은 모양이 되었습니다. 여튼 종종 걸음으로 그곳을 후닥닥 벗어나서 아는 길로 접어들고 나니 콘라드는 안심이 좀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엽기적인 부탁을 너무 쉽게 들어준 것 같습니다. 겨우 머리카락 세 가닥이라니... 그 풍만한 가슴을 만지게 해달라고 할 걸 그랬나?(사실 소녀는 팔다리만 보면 호리호리 비쩍 마른 것 같았지만 콘라드가 가까이서 보니 가슴은 꽤나 컸습니다.) 아냐, 뽀뽀? 아님 말로만 듣던 키스? 콘라드의 맥박이 빨라졌습니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몸이 후끈 달아오르면서 다리가 허공에 붕 뜨는 것 같았지요. 바로 그때 옆에서 느릿한 어조로 묻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너, 지금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게냐?”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본 게 콘라드의 실수였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냥 눈 질끈 감고 냅다 집까지 뛰는 게 정답이었지요. 왠고 하니 이놈의 모가지만 남은 말이, 즉, 말대가리가, 콘라드하고 눈이 딱 마주쳤는데도 불구하고 시치미도 한번 안 떼고, 그 왕방울만한 큰 눈을 번쩍 뜨고 어울리지 않는 묵직한 저음으로 다시 말했던 것입니다.
  “난, 지금 꼭 해야할 일이, 만나 뵈어야 하는 분이 계시다. 웬만하면 평범한 사람들한테는 말 안 하겠지만, 그래서 그래. 그러니 내 머리를 도로 내려놓으렴.”
  콘라드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바로 까무라칠 뻔했습니다. 정말 거짓말 안 하고 심장마비 온 줄 알았지요. 아마 자기 영혼을 다 빼앗겨버린 첫사랑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물론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긴 했다는 전제하에서- 달아나버렸을 겁니다.
  “나, 나는 네 옛주인의 부탁을 받고 왔어. 그러니까 믿어도 돼.”
  콘라드가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떼자 팔라다가 큰 눈을 더 번쩍 뜨면서 물었습니다.
  “내 주인이라고? 공주님 말이냐?”
  “그래, 공준지 시년지는 잘 모르겠는데, 여튼 긴 금발머리를 한 청순미인 말이야. 나한테 네 죽은 모가지를, 아니지, 그러니까 뭐랄까 네 잘리고 남은 부분을, 가급적이면 머리가 있는 쪽으로 말이야, 아니 아니, 이것도 아니고 젠장, 그러니까 내 얘기는 그냥 자기가 널 볼 수 있게 우리가 거위를 몰고 나가는 길목 근처로 갖다 달라고 했다, 그 이야기야.”
  “거위를 치신다고?”
  “그래, 지금 나랑 같이 일해. 이젠 믿겠지? 그러니까 가는 도중엔 어, 그 눈 좀 도로 감고, 가급적이면 말도 좀 하지 말고, 그러자구. 아니 아니, 내 말은 너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아니고, 그냥 그러면 좋겠다는 이야기야. 근데 너 사람 말을 참 잘하는구나, 그치?”
  “...”
  “응?”
  “...”
  “도로 죽었나?”
  “말하지 말라면서?”
  팔라다가 눈은 그냥 감은 채로 특유의 느릿한 어조로 답했습니다.


   콘라드와 공주님이 거위 떼를 몰고 성 밖으로 나갈 때마다 지나야 하는 북소문이 있었습니다. 궁궐 북쪽 문과 바로 통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통행이 거의 금지된 문이었지요. 손재주가 좋았던 콘라드는 그날 밤부터 바로 작업을 해서 팔라다의 머리를 마치 겉보기엔 사슴머리 박제처럼 보이게 만들어 그 성문 위에 걸었습니다. 공주님은 그 문 아래를 지날 때마다 팔라다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습니다. 공주님이 하루 중에 유일하게 거리낌 없이 밝은 미소를 짓는 때이기도 했지요.
  “안녕, 팔라다?”
  “안녕하십니까, 공주님?”
  팔라다가 이미 콘라드와 대화를 나눴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주님은 콘라드가 옆에 있어도 거리낌 없이 팔라다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콘라드는 처음으로 둘이만 아는 큰 비밀이 하나 생긴 것 같아 은근히 기분이 좋았지요. 하지만 총명한 콘라드의 가슴 속엔 점점 더 커가는 의혹이 있었습니다...
   “팔라다, 넌 왜 그애를 공주님이라고 부르지?”
  혼자서 몰래 팔라다를 찾아간 콘라드가 대뜸 묻는 말이었지만 팔라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쉴 뿐, 선뜻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팔라다, 지금 나랑 같이 일하는 그애가 진짜 공주님이 맞는 거지? 그럼 지금 우리 왕비님은 도대체 누구야? 이 일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구?”
  이윽고 콘라드는 팔라다의 입으로 공주님과 못된 시녀가 마법사의 왕국을 출발해서 이 나라에 도착하기까지 일어난 이야기를 모두 듣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콘라드는 그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걸 믿을 수밖에 없었지요.
  “근데 왜 넌 목이 잘릴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거야?”
  “사람들이 내 말을 믿었겠어? 말에 귀신이, 아님 악마가 씌웠다고 했겠지. 아마 목을 자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에 태워 죽였을 걸?”
  콘라드가 잠깐 망설이다 팔라다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팔라다, 이걸 내가 왜 너한테 묻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만약에, 만약에 내가 너의 공주님한테 가짜 왕비를 피해서 여기를 떠나 먼 나라로 같이 도망치자고 하면, 공주님은 그러자고 할까?”
  “...”
  원래 거짓말 못하는 성격인 팔라다는 잠자코 있는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 물론 그러자곤 안하겠지. 그렇지만 만약에, 만약에 내가 억지로라도 공주님을 데리고 먼 나라로 가서, 정말로... 정말로 잘해주면, 공주님은 혹 행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넌, 우리 공주님을 참말로 좋아하는구나, 콘라드.”
  팔라다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너랑 나는 마찬가지 처지지. 목이 잘릴 때까지, 아니, (이렇게) 목이 잘린 후에도 주인에게 충성해야 하는 게 우리 운명이란다.”
  “운명이라고?”
  “그래, 세상이 완전히 거꾸로 뒤집히기 전엔, 그게 우리 운명이다.”
  순간, 콘라드의 얼굴이 슬픔과 분노로 일그러졌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아무 말도 없었지요.
  “어쩌면 다음 생엔, 네가 왕자님으로 태어날지도 모르지…”
  힘없이 돌아서는 콘라드의 뒤통수에 대고 팔라다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 3 -

   진짜 엄청난 비밀을 알고 나서 며칠 동안 콘라드의 가슴은 납덩이처럼 무거웠습니다.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오히려 소녀가 먼저 말을 걸 정도였으니까요.
  “너 어디 아파?”
  “아니, 괜찮아.”
 하지만 일단 결심을 하고 나자 콘라드는 주저하지 않고 어느 달 밝은 밤 궁궐 뜨락을 걷고 있던 상왕을 찾아가 죽을 각오를 하고 대뜸 앞을 가로막고 엎드렸습니다.
  “상왕 전하께만 은밀히 고할 말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같이 거위를 치라고 제게 보내신 여자아이 이야깁니다.”
  “넌, 콘라드 아니냐?”
  몇 번을 고개를 갸웃하다 겨우 이름을 생각해낸 상왕은 주위를 물리치고 콘라드의 사연을 들었습니다. 처음 본 그날부터 왠지 며느리와 그 여자아이의 일이 석연치 않았던 것입니다.
  상왕은 콘라드의 말에서 진실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만, 사안이 워낙 중차대한 만큼 경솔하게 처리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콘라드에게 평소처럼 행동하라고 말한 다음 몰래 둘의 뒤를 밟았습니다. 상왕은 성문에 매달린 팔라다의 목과 공주가 인사하는 걸 볼 수 있었고 그날 간만에- 그리고 슬프게도 마지막으로- 콘라드가 소녀가 머리를 빗고 있는 동안 다가가서 둘이 종종 하던 장난을 거는 것을, 그래서 소녀의 노래가 불러오는 바람과, 그 바람이 콘라드의 모자를 날리는 광경을 모두 보았습니다. 그날 저녁 상왕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콘라드가 모시고 팔라다에게로 안내하겠다고 하자 상왕은 손을 내저었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네 말이 사실이란 걸 믿는다. 그리고 어차피 그 말대가리는 사람들 앞에서 증언을 시킬 수가 없다. 그보다 그 애를 은밀히 내게 데려오너라.”
  하지만 진짜 공주님은 상왕이 묻는 말에 단 한마디도 답하지 않았습니다. 공주님은 마법을 쓸 줄은 몰랐어도 자기가 서명한 그 마법의 문서가 무서운 저주의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든, 상왕이 아니라 콘라드건, 아님 심지어 길가의 아무 코흘리개에게라도 고자질을 하면 자신은 물론이고 엄마의 목숨이 위험했습니다.
  당사자가 이렇게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을 안 하니 상왕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가짜 아내를 굳게 믿고 있는 신왕에게 뭐라고 말을 할 것이며, 어떻게 설득을 하겠습니까?

  “이제 말해도 된다니까? 아니, 차라리 죽더라도 말은 하고 죽어야 할 거 아니야?”
  “...”
  답답해하는 콘라드에게도 소녀는 답이 없습니다. 다만 갈림길에 와서 이렇게 한마디를 던질 뿐이었습니다.
  “고마워. 네가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애써줄 줄 몰랐어. 정말 고마워.”
  말을 마칠 땐 희미한, 그리고 아주 애처롭게 창백한, 미소가 소녀의 입가에 살짝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거기서 그만 콘라드는 확 피가 끓어오르고야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천사를 위해서 이젠 정말 뼈가 으스러지더라도 어떻게든 끝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소녀가 조금 부끄러워하면서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근데 너 말이야, 왜 내 머리칼 달라고 안 해?”
  “머, 머리카락?”
  “그래, 그때 약속했었잖아, 우리...”
  아, 그게 팔라다의 목을 가져오던 그날 밤은 말하는 말대가리를 보고 혼비백산해서 머리카락 뽑아달랠 생각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고 나니까 괜히 어색해서, 입이 부끄러워서 말을 못하고, 그 다음날도 입을 떼려다 못 떼고,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었지요. 며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새삼 말 꺼내기가 더 뭣한 것이, 여자한테 케케묵은 빚을 갚아내라고 하면 사나이가 좀 쪼잔해 보이지 않겠습니까?(적어도 그때 콘라드의 마음엔 분명히 그랬지요...)
  그날 밤 드디어 콘라드는 그 빛나는 금빛 머리칼을 만져볼 수 있었습니다. 그 보드라운 감촉이며, 향수가 있을 턱이 없는데 풍겨 나오는 알 수 없는 향기에 콘라드는 온몸의 혈관이 팽창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멈춘 것처럼 넋을 잃고 있는데, 일깨우듯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빨리 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소녀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긴 머리칼의 뿌리를 찾아서 단번에 뽑아내는 건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습니다.
  “지금 열심히 찾고 있어... 이건가?”
  “아야!”
  “미안, 아파?”
  “아파, 살살 해.”
  “좀 참아봐, 어떻게 더 살살 해?”
  그건 콘라드에겐 슬프고도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이후 며칠간 콘라드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말 못하는 소녀를 구하려면 자기가 직접 마법사들의 나라로 찾아가야 하나, 근데 길은 엄청나게 멀고 가봐야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는데 어떻게 찾나, 또 혹여나 내가 없는 새 가짜 공주가 진짜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그럼 차라리 가짜를- 지금은 무려 왕비였지요- 납치해다 목에 칼이라도 들이대고 네 죄를 자백하라고 협박이라도 해야 하나, 별별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다 해가며 밤새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했지만 아무 뾰족한 수를 생각해낼 수가 없었던 거지요. 허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사람이 한 가지만 오로지 집중해서 고민을 하다보면 ‘유레카!’를 외치게 되는 순간이 오는 법입니다. 콘라드의 ‘유레카’는 목욕탕이 아니라 창고에서 왔지요. 바야흐로 계절이 바뀔 때가 되어서 창고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큼지막한 쇠난로를 보고 기막힌 방법이 떠올랐던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제 날씨가 꽤 쌀쌀해져서 난로를 다시 놓아야 할 때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콘라드는 보여줄 게 있다고 공주님의 손목을 잡고 궐 안의 외따로 떨어진 빈 전각으로 끌고 가서는, 다시 반강제로 공주님을 쇠난로 안에 밀어넣고 밖에서 문을 닫았습니다.
  “그 안에서 혼자서 실컷 울고 나와. 그럼 속이 시원해질 거야.”
  공주님은 처음엔 열어달라고 문을 두들겼지만 콘라드는 정말로 가버렸는지 밖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두컴컴한데 홀로 갇혀 있자니 서서히 그간 참아왔던 설움이 북받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공주님은 울면서 마치 엄마가 실제로 옆에서 듣고 있는 양, 그간의 모든 억울하고 아팠던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한 두 시간이나 지났을까요? 갑자기 쇠난로의 문이 밖에서 열렸고 공주님이 눈이 부셔서 눈을 겨우 반쯤 뜨고서 밖으로 나왔는데 거기에 상왕이 시종들을 거느리고 서 있었습니다.
  “아가, 이젠 되었다. 더 이상 울 필요가 없다.”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그 쇠난로의 몸통에서부터 벽을 뚫고 밖으로 이어진 연통의 끝에선 상왕과 신왕이 귀를 기울이고 이 모든 얘기를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처음엔 믿지 않다가 아버지의 강권을 못 이겨서 여기까지 끌려나온 아들은 이젠 아버지의 말을 믿어야만 했지요(그리고 나중에 누추한 옷을 벗고 공주에게 걸맞는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난 진짜 공주님의 눈부신 미모를 보고는 완전히 확신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날 저녁 상왕은 아들인 신왕과 가짜 며느리를 불러서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자리가 적당히 무르익자 상왕은 들은 이야기라면서 은근슬쩍 말을 꺼냈습니다.
  “제 주인을 배신하고, 모욕하고, 심지어 바꿔치기를 해서...”
  상왕은 그렇게 못된 시녀의 악행과 죄목을 낱낱이 열거한 후에 대놓고 물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하겠느냐?”
  가짜 공주는 속으로 ‘그럴 리 없어’, ‘말했을 리 없어’를 반복하며 애써 아닌 척을 하려다보니 입에서 자기도 생각지 못한 말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 못된 것은 발가벗겨서 못을 가득 박은 상자 안에 처넣고, 그 상자를 말에 매달아서 죽을 때까지 장안을 빙빙 끌고 다녀야죠!”
  그 말을 들은 상왕이 냉소하면서 시종에게 눈짓을 하자 본디 모습을 찾은 진짜 공주님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물론 가짜는 쓰러지기 직전이었지요.
  “나를 너무 잔인하다고 원망 마라. 지금 네 죄에 대한 판결은 네 입으로, 네 스스로 내렸다!”
  그리하여 가짜 왕비, 곧 못된 시녀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고 신왕은 진짜 정혼자인 공주를 맞이해서 새로이, 이전보다 몇 배는 더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그 성대한 잔치가 열리던 날 밤 콘라드는 왕궁을, 그리고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고향 나라를 떠났습니다. 물론 길을 떠나는 콘라드의 품속에는 공주님의 황금빛 머리카락 세 가닥이 종이로 겹겹이 잘 싸여서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었지요…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