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전시 review

쾰른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석가출가도 연구초 2

이현욱 2024. 9. 30. 23:59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기본적으로 그림의 모든 장면들이 각기 어떤 내용을 묘사하고 있는지는 이해가 완료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데는 별로 논란의 여지가 없고, 딱 두 장면만 추가 해명이 필요한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아래 이미지 속의 장면이다:

 

이미지 출처= 블로그 주인 현장 촬영

   보시다시피 화면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문루 위에 독려하듯이 한 사람이 올라가 있고, 다른 사람들은 막 말을 타고 분주히 궁문을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저본인 석보상절 권3에는 이렇게 사람들이 출가한 태자를 찾으러 가는 대목이 두 군데 나온다. 그 중 하나는 전편에서도 우리가 인용했던,

 

   [...] 태자가 아침 새 800리를 가서 설산 고행림에 도착하셨다.

   이튿날에 구이 자다가 일어나시어 땅에 거꾸러져 우시며, 왕과 대애도도 슬퍼하여 우시며 나라의 사람이 다 슬퍼하여 두루 찾아다녔다.

 

이 대목이고, 다른 하나는 태자를 설산 고행림까지 수행했던 차익이 환궁한 뒤에 이어진다:

 

   왕이 차익이 보시고는 태자 가신 데 가려 하시니 신하들이 사뢰되, "가지 마소서, 우리가 가서 추심(推尋)하겠습니다." 하고 모두 추심해 가니, 한 나무 밑에 계시거늘 [...][각주:1]

 

   요는 이것이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여 두루 찾아다니는' 장면이냐, 아니면 신하들의 '추심' 장면이냐는 문제이다. 사실 이렇게 원문을 대조해 놓고 맥락을 따져보면 어느 쪽인지 거의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본인의 언어추론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다면 여기서 읽기를 중지하고 아래 그림만 다시 한번 보고 답을 맞춰 보시기 바란다).  

   허나 조선시대에도 석보상절을 구해다 펼쳐놓고 그림과 맞춰 보는 경우가 어디 흔했겠는가? 애초에 '나는 저본대로 그렸으니, 헷갈리면 니들이 알아서 책을 찾아봐라'는 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만약 있다면 무조건 삼류화가일 것이다- 가능한 한 그림만 봐도 뜻이 명확하게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 화가의 책무인 것. 따라서 그림만 보고 풀 수 있도록 문제의 형태를 바꾸어 보자면,

 

이렇게 수평으로- 관객이 보는 방향에서-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진행되는 사건이냐, 아니면, 

 

이렇게 수직으로 이어지되, 아래에서 위로 진행되는 사건처럼 보이느냐는 문제가 된다. 어떻게 보이시는지?

   그림 안에서 화가의 처치를 확인해 보면 우선 첫째로 '시제'를 차별화했다. 보면 태자를 찾으러 나가는 사람들 손에 다 촛불 혹은 횃불이 들려 있다. 즉, 새벽에 구이가 잠에서 깨어나면서 궁 안에 난리가 났고, 날이 밝기도 전에 사람들이 급하게 태자를 찾으러 나섰다는 설정이다.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원문에 구체적으로 구이가 깨어난 시점이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이튿날'은 자정이 지나면 그때부터 이튿날이니 이렇게 처리한다고 해서 원문에 어긋나는 것도 없다.

   한데 이것만으로는 완벽하지가 않다. 이를테면 차익이가 늦은 오후쯤 돌아왔다 치면 정반왕이 급한 마음에 다음날 아침까지도 못 기다리고 바로 그날 밤에 신하들을 급파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화가가 준비한 두번째 처치 방안이 바로 등장 인물들의 '복색'이다.

   자, 위 '가로 이미지' 하단 가운데 쯤, 구이가 바닥에 쓰러져서 통곡을 하고 있는 전각 앞에 차례로 녹색/붉은색/푸른색/(옅은)분홍색 옷을 입고 꿇어 앉아 있는 내관 넷이 보이시는지? 그대로 시선을 따라서 왼쪽으로 가보면 녹색 옷을 입은 사람은 문루 위에 올라가 있고, 붉은색과 분홍색 옷을 입은사람은 말을 타고 있으며, 그 옆으로 청록색 옷을 입은 새로운 인물이 보인다. 말하자면 푸른 옷은- 아마도 대전에- 급보를 알리러 갔고, 나머지 세 사람은 가다가 청록색 옷을 입은 내관을 한 명 더 데리고 태자를 찾으러 출발한다는 설정이다. 근데 화가가 유독 푸른색 옷을 찍어서 보낸 이유가 있다.

   여기서 세로 이미지를 보면, 화면 아래 오른쪽에 서 있는 세 명이- 사진이 어두워서 잘 안 보이시겠으나- 일산과 (봉황이 그려진) 부채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내관들인데, 모두 푸른색 옷을 입고 있다! 예를 들어 위 분홍색 옷 대신 푸른 옷이 그려져 있다면 혹시라도 셋 중 하나가 위로 이동한, 곧 세로로 연결되는 사건으로 오인될까봐 아예 옷 색깔이 하나도 겹치지 않게끔 그린 것이다.

   그럼 정반왕이 앉아 있는 전각 앞에 꿇어 앉아 있는 다섯 사람은 위와 옷 색깔이 겹치는데, 이건 괜찮은가? 이들은 추심을 나섰다가 고행림에 남아서 나중에 태자의 6년 고행까지 함께하게 되는 교진여 등 다섯 신하들인데, 모두 내관이 아니고 조관(朝官)들이다. 즉, 위에서 말을 타고 태자를 찾으러 나선 사람들을 모두 환관으로 처리한 것부터가 장면의 의미를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한 화가의 안배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문제가 이렇게 복잡해진 것도 화가가- 석가탄생도처럼 수평으로 층층이 쌓아올린 구도를 쓰지 않고- 변각 구도를 썼기 때문이다. 변각 구도를 쓰면 자연히 관객의 시선이 대각선 축을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 한데 마침 사람들이 태자를 '두루 찾아다니는' 장면과  정반왕이 교진여 등 다섯 신하를 파견하는 장면이 이 축선상에 이어져 있으니, 화가도 이러한 구도상의 약점을 인식하고서 혼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한 것이다.

   암튼 이렇게 신경을 써놓았는데도 못 알아봐 주면 죽은 화가가 무덤 안에서 돌아눕는다- 그림을 좀 더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이다. 남은 한 장면은 전편에도 잠깐 언급했던 그림 우하단의 연못인데, 이것은 이번 편의 주제와 자연스럽게 연관이 되기 때문에 아래에서 함께 다루겠다.

 

II. Cui bono

   이 '석가출가도', 혹은 정확히는 '석가여래 설산수도상'의 제1폭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태자비인 구이가 그림에서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시 그림을 하나 더 보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지 출처= 소장처= 대만 고궁박물원

   위 그림은 '각좌도(卻坐圖)'이다. 한 문제가 후궁인 신부인을 총애해서 늘 황후와 나란한 자리에 앉혔는데, 어느날 상림원에 놀러갔을 때 원앙(爰盎)이 슬쩍 신부인의 자리를 물렸다. 이에 신부인이 노해서 즐겨 앉지 않고, 문제 또한 성을 내자 원앙이 '존비유서(尊卑有序)'라고 간했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전편에 소개한 '절함도'와 더불어 이 둘이 남송대 감계화 장르의 정품인데 황제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그림 오른쪽 중단으로 거의 동일하다- 이곳이 바로 변각구도에서 주인공의 자리, 상석인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떤 구도를 쓰든 시각적으로 주인공은 가운데, '센터' 부근에 위치해 있는 것이 상례인데 변각구도는 화면을 대각선으로 나눴기 때문에 상중앙으로 더 올라가기엔 공간이 너무 좁다. 반대로 하단으로 내려갈수록 공간은 넓어지지만 위치가 너무 바닥으로 치우친다. 황제가 앉을 자리가 달리 없는 것이다.

   구이가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정반왕이 그림의 최하단으로 밀려난 것이 특이하다는 점은 석가탄생도의 화면 배치와 비교해도 드러난다. 아래 이미지는 태자의 탄생 장면 바로 아래에 위치한 두 단으로 윗단은 정반왕이 출산 소식을 듣고 람비니원으로 향하는 장면이고, 아랫단은 그보다 앞서 출산 전에 수레를 탄 마야부인이 람비니원으로 이동하는 장면이다.

 

   이 두 단은 위아래로 서로 자리를 바꾸어도 전체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 화가가 이 배치를 선택한 것은 왕은 왕비보다 '위'에, 그리고 화면 전체에서 더 '가운데'에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석가탄생도에 관해서 오영삼 교수는 아예 한발 더 나아가서 이 그림의 탄생단 아랫부분 전체가 강한 위계질서를 표현하고 있다는 견해이다.[각주:2])

   아니면 달리 화가로 하여금- 결과적으로- 이런 '하극상의 구도'를 선택케 한 이유가 있을까?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답은 연작에서 나타날 수 있는 '구도상의 연계'이다. 곧, 이 그림에 선행하는 유성출가상의 두번째 폭과 어우러지는 화면의 짜임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위 이미지는 유성출가 판화의 두 번째 면인데, 보시다시피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전 구이와 나인들의 모습이 그려진 전각이 화면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우리의 추측이 맞다면 이 전각이 역시 대각선 구도로 그린 유성출가상의 제2폭의 좌하단을 차지하고, 그 대각선 너머로 태자가 말을 타고 성을 넘어가는 유성 장면이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즉, 만약 병풍처럼 두 그림을 이어붙인다면, 궁성이 '∧' 모양을 이루면서 동일한 전각이 시점을 달리 해서 대칭이 되는- 바꾸어 말하면 세로로 반 접으면 겹치는-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구도상의 '하극상'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연작의 대칭을 맞추기 위한 우연의 일치였을 뿐인 걸까? 적어도 그게 다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아래 이미지 속, 문제의 연못 주변 장면이다.

 

   남편이 즐겨 앉던, 이제는 텅 빈 의자 앞 바닥에 쓰러져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구이의 아래로, 연못 옆에 공작새가 외톨이로 서 있다. 한데 연못 안의 원앙은 누구나 알다시피 '금슬지락'의 상징이다(위에 우리가 찍은 사진은 화질이 안 좋아서 원앙이 잘 안 보일 텐데, 보다 선명한 사진은 정우택 선생이 낸 석가탄생도 연구서에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란다.[각주:3]). 공작은 마치 원앙이 보기 싫어 연못을 외면하는 듯, 혹은 집 떠난 태자를 그리며 성문 쪽을 바라보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있다. 즉, 이 공작과 원앙은 모두 구이의 슬픔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서 화가가 동원한 장치이다. 남편한테 버림받아 울고 있는 아내 앞에 이런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이게 장르가 불화라고 무조건 '소의경전'만 찾고 있으면 당연히 그림이 해명이 안 될 수밖에 없다.

   굳이 경전에서 찾는다면, 석보상절 권3의 유성출가/설산수도상에 해당하는 내용 중에 딱 한 군데 연못이 등장하는 대목이 있다:

 

   태자가 출가하시고 여섯 해에 야수타라(耶輸陁羅)가 아들을 낳으시니 석종들이 노하여 죽이려 하였는데 야수[=야수타라=구이]가 불 피운 구들 구덩이에서 맹세하시기를, "내가 잘못이면 아기와 나와 함께 죽고, 옳으면 하늘이 본증을 하실 것이다." 하시고 아기 안고 뛰어 들어가시니 그 구덩이가 연못이 되어 연꽃이 몸을 받으니 왕이시며 나라 사람들이 그제서야 의심하지 않았다.[각주:4]

 

   얘기가 뭔가 뜬금없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석가모니의 생애에 대한 상식과 15c 조선의 상식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현대의 상식은- 초기불교 문헌의 다수설에 따라- 태자가 29세에 출가해서 35세에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지만 15c 버전은 '19세 출가- 30세 성도'이다. 한데 여기서 29세 출가설은 통상 태자가 속된 표현으로 '남자로서 할 수 있는 놀이란 놀이'는 다 해본 뒤에 무상함을 느껴서 출가한다는 식의 전개이고 아들(라후라)도 출가 전에 이미 태어나 있는 반면, 석보상절이 채택하고 있는 설은 태자가 17세에 장가든 다음에도 19세에 출가할 때까지 구이를 계속 멀리했다고 되어 있다- 후대로 갈수록 '인간 싯다르타'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타락한 적이 없는 성자'가 된 것.

   그럼 라후라는 어떻게 생겼느냐? 출가 전에 태자가 태자비의 배를 가리키며 말로 '수태고지(Annunciation)'를 하고 떠나면- 그러니 정말로 '동정녀 구이' 혹은 '성모 구이'의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그 6년 후에 구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남편 없이 독수공방을 하던 여인이 애를 배었으니 당연히 왕실에서 난리가 나야 맞을 것이고, 거기서 이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위에 인용된 '연못의 기적'이다. 아무튼 결론은 저본인 석보상절과 연관시켜 보더라도 이 연못은 구이에 연관된 코드라는 것이다- 화가는 적극적으로 '왕의 자리' 주변을 완벽하게 구이를 위한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논점을 되새기면서 아래 '축소판 전도'를 보고 작가가 화면을 짠 수법을 다시 음미해보기 바란다:

 

 

   보면 한 가지 더 화면 구성이 기막히게 된 것이, '구이의 공간'에서 딱 대각선 건너에 금도낙발 장면이 있다는 점이다.  출가한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의 가슴에 가장 칼을 꽂는 장면이라면 바로 남편이 삭발을 하는 모습일 테니, 구이가 대성통곡하는 이유를 어떻게 이 한 장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겠는가? 작품의 종교적 내용을 잠시 접어두고 이 그림에 제목을 붙인다면 아마도 '구이의 비탄'일 것이다.

   그래서 처음 이 그림을 보고 나서는 우리도 설산수도상에서 이 금도낙발 한 장면만 따와서 유성출가상에 덧붙인 것 같다고 추측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저본을 꼼꼼히 읽어보면 주로 설산수도상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내용을 여백을 넉넉히 써서 충실하게 한 화면에 집어넣었을 뿐이다. 이 화가는 팔상의 경계를 무너뜨린 '혁명가'까지는 아니지만, 변각 구도의 특성을 십분 이해하고 '구이의 비탄'이라는 주제를 아주 드라마틱하게 부각시키는 데는 성공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을 제작하게 만든 '조선의 구이'는 대체 누구였을까?

 

To be continued...

  1. 김성주·안양규, op. cit., pp. 329~331 참조. [본문으로]
  2. 오영삼, "다섯 가지 數"(단국대학교출판부, 2020) pp. 41~42 참조. [본문으로]
  3. 정우택, "(朝鮮前期) 釋迦誕生圖 : 福岡 本岳寺"(한국미술연구소CAS, 2020), pp. 256~257. [본문으로]
  4. 김성주·안양규, op. cit., pp. 344~349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