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백년의 신화(덕수궁미술관)
(아마도 이번 여름방학 시즌의 가장 중요한 전시. 아래는 대략 전시순서대로의 실별 주요 작품들이다.)
- 제1 전시실
: 이 방은 전시의 도입/소개부에 해당하고 ● 소의 초기(1941년) 스케치를 비롯한 얼마 안되는 1945년 이전 그림들과 화가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들이 있다.
먼저 ● 엽서화들은 아내 남덕에게 연애시절 보냈던 것들이고 여러가지 현대미술사조를 배웠다는 걸 알 수 있는 그림들. 보다 중요한 것은 ● 장곡천삼랑(長谷川三郞; 하세가와 사부로)가 미즈에 384호(1937)에 쓴 ‘전위미술과 동양의 고전’ 논문 페이지의 도판들/(이쾌대 소장품이었다고 하는)평양부립박물관 발행 강서고분벽화 기념엽서가 같이 들어있는 진열장인데 이중섭 예술의 다른 한쪽 근원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위에서 말한 초기작들 중 ● 묶인 새를 비롯해서 이하 다른 전시실에 있는 새 그림들의 기원은 사신도 중에 '주작도'이리라는 것을 누구나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그외 같은 진열장 옆에 ● 1941년 제1회 조선신미술가협회전 방명록 마지막 페이지가 재미있는데, 전서체를 응용한 화가의 사인이 멋지고 또 튄다- 남들하고는 좀 다른 감각.
- 제2 전시실
: 아마도 가장 중요한, 혹은 볼 것이 많은 방. 먼저 은지화들 중에서,
● 두 아이; 아이들이 주제인 그림이긴 하지만 거의 '종교적'이라 할 만한 순수함이 있다.
● 부부; 이쪽은 성인용(?), 자연스러운 에로티시즘이 좋다.
● 가족에 둘러쌓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 캔버스 안과 밖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사실 캔버스 안도 그림이고 밖도 그림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유쾌하고 좁은 은박지 안에- 게와 물고기들을 빼고도- 인물이 10명이나 등장하지만 캔버스가 구분선 내지 경계선이 되어주기 때문에 화면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은지화를 지나면 중앙의 벽쪽으로 소 그림 다섯점이 보인다. 먼저 가운데 석 점,
● 황소(서울미술관)/흰 소(홍익대학교박물관); 힘이 넘치는 선으로 골조만으로 표현한 것 같은 소가 고개를 왼쪽으로 홱 젖혀서 강렬하게 관람객을 응시한다. 오른쪽 앞발을 힘차게 박차는 자세, 그 접힌 무릎은 마치 주먹을- 즉, '니킥'이라기보다는 '어퍼컷'에 더 가까운 느낌으로- 불끈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역동적인 자세와 힘찬 붓질이 서로 어울려서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이중섭 하면 떠오르는 간판 작품들이고 전반적인 색조라든지, 형태도 머리와 어깨가 이루는 각도나 꼬리의 처리나 여러가지 차이점들이 있지만 대략 유사한 구도에 거의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 흰 소; 위의 2점과 비슷하지만 또 다른 스타일. 몸통이 굵은 '뼈대선'으로 이루어져 있다기보다는 위에 윤곽선처럼 덧칠이 된 것 같은 처리이고 짙은 파란색 바탕으로 색감도 많이 다르다. 그림은 나쁘지 않은데 아무래도 안면부쪽이 이 ‘골조 없는' 처리가 위의 그림들보다 비효과적으로 보인다.
이제 위 석점을 사이에 두고 이름이 또 '황소'인 그림이 양 끝에 한점씩 두점이다.
● 황소 2점; 이 '황소'들은 전신이 아니라 고개를 젖혀서 돌아보고 있는 황소의 머리 부분에 초점을 맞춘 유사작품들, 둘다 개인소장이라 소장처로도 구분이 안된다. 우리가 보기엔 왼쪽 작품이 더 낫고 같은 구도로 된 그림들 중에선 아마도 결정판이다. 이유라면?
먼저 오른쪽 작품부터 보면 소의 골조는 주로 수직으로 그은 세로선이고 대신 바탕색은 붓질이 주로 (살짝 끝에서 좌우로 들린) 가로선이다. 또 소의 고개는 관객이 보는 방향에서 왼쪽으로 돌렸고 대신 눈은 살짝 오른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어서 철저하게 밸런스를 맞춰서, 대비를 줘서 화면을 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처리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림은 좋고 어쩌면 이런 균형감각이 이중섭 그림의 특징 중 하나인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요점은 이런 식의 선의 짜임이 과연 그림의 주제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방식이냐는 것? 이제 왼쪽 그림을 보자.
여기는 바탕색의 붓질이 소의 얼굴을 중심으로 둥글게- 그리고 소 몸통의 골조도 이에 맞춰서 자연스럽게 동심원을 그리듯 맞춰져 있다- 마치 불상의 광배처럼 배경처리가 되었다. 무엇보다 소의 (왼)눈이 이제는 오른쪽으로 시선을 분산하지 않고 정면으로 똑바로 관객을 보고 강렬한 눈빛으로 울부짖고 있다. 즉, 고개를 돌리고 있는 소의 얼굴과 시선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바탕색을 비롯한 전체적인 선의 짜임이 이렇게 되어야 최적이라는 것. 이 그림을 보게 되면 꼭 이 소와 눈을 한번 맞추어 보기 바란다- 한번 눈이 마주치면 가슴이 선뜻해지는, 한번 보면 잘 잊혀지지 않는 그런 눈빛.
이 왼쪽 작품은 1975년에 20주기 기념도록에 실린 외에 실물은 최초공개라고 설명이 붙어있는 작품인데 혹 그동안 미공개 상태라 저평가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태가 좋은 도판으로는 감정도 할 수 있지만 감상은, 예술적 가치는 역시 진짜 그림을 봐야지 사진으로는 알기 어려운 것이다.(다만 위에서 말했듯이 그림이 벽 양끝에 각각 떨어져 있어서 비교를 해보려면 왔다갔다 하는 수고는 좀 해야 한다. 나란히 놓고 비교해봐야 할 그림을 왜 굳이 좌우대칭을 맞춰서 갈라놓았는지는 의문- 우리는 무식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큐레이터'가 '인테리어'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았던가?) 다음에 다른 전시에 또 대여가 된다면 현수막이나 포스터나 도록의 표지 중에 하나는 써줘야 하는 작품. 우리에게는 이 그림 하나만으로도 이번 전시는 티켓 값어치가 있었다.
● 충렬사 풍경/선착장을 내려다 본 길/길/욕지도 풍경/까치가 있는 풍경; 소 그림들을 사이에 두고 양쪽 벽에 주로 포진한 풍경화들은 다 수준이 고르고 안정감 있는 구도가 특징- 세잔의 정물화를 연상시키는 탄탄함이 있고 하늘이건 바다건 파란색이 많을 수록 그림이 좋아 보인다.
- 제3 전시실
: 편지로 시작하는 방. 편지는 삽화를 곁들여서 읽는 재미가 있다. 편지를 지나서,
● 길 떠나는 가족; 선두에 선 아버지는 고개를 젖히고 힘차게 손을 뻗었다- 기실은 무릎을 살짝 구부린 하체에서부터 탄탄하게 올라오는 역동적인 기운이 줄을 잡고 소로, 다시 소의 꼬리를 잡은 아들에게로, 거기서 다시 한복입은 아내의 왼팔에서 아들의 오른팔로 하나의 곡선으로 단번에 이어져서 마침내 아들 손끝의 비둘기에게까지, 마치 ‘파도타기’ 응원처럼 이어진다. 그림 속에 악기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신명나게 징 치고 꽹꽈리 치는 소리가 귀에 울리는 것 같다. 인물화에서 이런 동세는 단원 김홍도 이후에 근 150여년 만에 보는 솜씨(동양화를 많이 본 사람은 우리 얘기가 지나친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 것이다). 전체적으로 흐릿한 듯 싶은 첫인상을 주는 화면은 어쩌면 스케치할 때는 신명이 났지만 이것이- 곧 헤어진 가족과의 재회가- 이미 희미해진, 본인도 인정하고 있는 반쯤 포기한 비현실적인 꿈이라는 의미인지 모른다. 하지만 관람 할 때는 흐린 색조나 희미한 형체에만 현혹되지 말고 찬찬히 그 속에 든 날렵한 선의 흐름을, '리듬'을 타는 그 움직임을 보기를 권한다.
(참고로 이것은 편지화 쪽으로 통하는 사이벽에 외따로 걸린 그림이고 벽쪽에 다른 그림들과 나란히 걸린 같은 제목의 작품은 필력이 상당히 차이가 나는 범작으로 보인다.)
● 투계/부부/환희; 모두 소처럼 선묘로, 골조로 해부해서 그린 새 그림들. 아마도 '투계'가 가장 잘 되었고 반대로 '부부'는 새들이 다른 2점에 못 미치는 희미한 필력.(이 작품은 리움 소장품 중에도 같은 제목, 같은 구도로 된 것이 있어 위작 시비가 있었던 모양이고 네이버에 '이중섭 부부'로 검색을 해보면 '위작과 졸작사이 II...'라는 제목으로 최광진 미술평론가의 블로그에- 아마도 예전에 잡지에 발표했던- 글이 올려져 있다. 우리가 보기엔 위작까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그림이 필력이 약한 범작으로 보이는 이유는 눈이 뒤통수에 달린 사람이 아니라면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명쾌하게 조목조목 설명이 되어 있는 글이니 관심있는 분은 한번 찾아서 읽어보시길- 우리에게 이견이 있다면 단지 '회화성' 항목에서 배경의 기계적으로 배열된 수평선을 지적한 부분인데 수직 구도를 이루는 부부(혹은 '닭들')에- 대비시킨 배경의 수평선들은 위 '황소'에서 보는 것처럼 전체적인 화면에 조화를 주기 위해서 이중섭이 실험했던 방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튼 리움에서 대여를 거절한 건지 애초에 주최측에서 달라고 안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둘 중 어느 쪽이든 두 작품을 이번 전시에서 함께 볼 수 없었던 점은 유감- 구경꾼의 욕심일 수도 있겠으나 나란히 놓고 보는 게 의미가 있는 경우의 유사 작품들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기회에 비교전시하는 게 옳을 것이다.)
- 제4 전시실
● 자화상;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자화상인 듯. 요즘 기준으로는 갓 마흔이 된 사람치고는 얼굴이 조금 늙었는지 모르지만 눈빛은 아직 살아있다.
● 왜관성당부근; 앞 전시실의 풍경화들과 비교해 보면 크고 작은 삼각형으로 쌓아 올린 안정감 있는 구도는 여전하되 분위기는 누가 봐도 쓸쓸하다. 정서는 다르지만- 혹은 다르기 때문에- 화가의 풍경화 수작 중 하나로 꼽아야 할 작품.
● 소; 화가가 건강 문제로 필력이 약해진 듯도 보이나 가까이서 보면 돌아보고 있는 소의 얼굴은 여전히 격렬하다. 이 피 흘리는 소는 또 전신을 묘사한 소 그림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진행방향이 좌에서 우로 바뀌어 있는, ‘역주행’하고 있는 소이기도 하다. 이 방엔 배경음악으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중 ‘비들로(Bydlo)’를 작게 틀어놓아도 좋을 것이다- 걸린 작품들의 분위기와 대략 어울릴 것이고 음악이 그림을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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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지화를- 혹은 그외 남겨진 그림들의 상당수까지 포함해서- 이해하기 위한 중요단서 중 하나는 화가가 나중에 벽화를 그리기 위한 밑그림이라고 말하곤 했다는 증언이다. 사실 대다수의 은지화들은 좁은 화면에 비해 등장인물은 많고 선은 복잡다기하다(그래서 우리가 위에 고른 3점은 등장인물의 수가 적거나 상대적으로 선이 깨끗하게 잘 정리된 것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화면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벽에, 그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단지 그중에 일부를 차지하게 될 부분의 밑그림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을 비롯한 인물들을 그리는 수법은 누구나 초등학교 때 한번쯤 만들어봤을 '찰흙 인간'을 꼭 닮았다. 거대한 벽에 그려진 아이들과 게와 물고기가 서로 겹치고 끈으로 이어진 군상은 마치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부조처럼 보였을 것이고, 골조로 표현된 황소와 닭들은 애초부터 벽화에서 기원한 것이면서 또한 무척 조각적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구도가 탄탄한 풍경화는 멋진 배경이 될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가? 어쩌면 이중섭은 화면이 클수록 그림이 더 좋은 작가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지도 모른다’일 뿐이다. 누가 알 수 있겠는가?
- 강서대묘의 사신도는 잘된 모사도나 해상도 높은 실물 크기 사진으로만 봐도 원시적인 힘으로 강렬한 충격을 주는 그림이다. 그 힘이란 아직 '문명에 물들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인간과 신이 분리되기 이전의- 즉,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이 분리되기 이전의- 괴력이다. 우리는 동양화건 서양화건 회화에서는 이런 파워를 본 적이 없고 단지 상/주 청동기 중의 대작들에서만 비슷한 기운을 보았을 뿐이다. 해서 이중섭의 힘이 넘치는 선의 근원이 어디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물론 그대로 베낀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사신도를 처음 봤을 때 또다른 신기한 점은 청룡이나 주작 뿐 아니라 체구를 우람하게 그릴 수 있는 백호나 현무도 몹시 날씬하다는 것인데 이중섭의 소 그림은 날렵한 몸통에 윤곽선이 아니라 체구는 살리고 그 속에 든 해부학적인 골조를 묘사하는 강렬한 선으로 표현했으니 이것을 이중섭식의 '(동서양의) 융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고, 또 이것이 이중섭의 황소가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새로운 문명, 혹은 예술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전통이 만났을 때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혹은 이중섭의 황소는 전통은 끊어지고 남의 앞선 문명은 ‘캐치업(catch-up)’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허덕이는 한국사회에 날리는 ‘어퍼컷’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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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작년에 가장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20세기 서양미술 전시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전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거기서 본 로스코의 작업은 한마디로 비유하자면 색과 면으로 감정의 코드(chord)를 만드는 것이었다. 사람은 특정한 색깔을 보면 그에 연상되는 어떤 느낌 또는 감정을 갖게 되고 그 색을 담고 있는 형태(면적을 포함해서)에 따라서, 또 다른 색과의 대비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진다- 곧, 서로 다른 음을 쌓아서 만든 각각의 코드마다 특정한 분위기가 생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색채(관계)와 면' 외에 더 표현되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림은 단순하고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감정을 때리기 때문에 오히려 더 ‘뭔가’가 있어보이고 ‘신화화’의 대상이 되기 쉽지만 실상은 로스코의 그림엔 '신기'한 건 있을지 몰라도 '신비'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비유를 연장한다면 '코드 (진행) 위에 멜로디 얹는' 작곡도 아니고, 그냥 코드들 뿐이다. 물론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내는 게 쉬운 건 절대 아니다. 아무나 건반위의 음표를 무작위로 서너 개씩 눌러본다고 해서 들을 만한 게 튀어나오진 않는다. 그러나 작곡가로 '타고난다'는 것은 머리 속에서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선율이 솟아나오는 그런 재능을 말하는 것이다. 작곡법을 배우는 것은 단지 그 선율을 완벽한 작품으로 완성시키기 위해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중섭의 '황소'에는, '길 떠나는 가족'에는 화가의 머리와 가슴 속에 떠오른 멜로디가 있다. 그리고 모든 선과 색의 배열은 그 멜로디를 구성한다.
이 사람은 미남에다 그림 재주를, 그것도 일단 ‘뜨기만' 하면 소수의 애호가 뿐 아니라 다수 대중의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그런 스타일을 지녔다. 때와 장소만 잘 만났으면, 그리고 운만 좀 따랐으면 ‘셀리브리티(celebrity)’ 화가로 거액의 돈을 만지면서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대를 잘못 만났고, 잘못된 장소에서 태어났다. 먹을 것만 주면 벽화를 있는 대로 그리고 싶었다는 이 화가가 사실상 먹을 게 없어서 죽었다는 사실은 가슴아픈 일이긴 하지만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고 곤궁 속에서 죽은 예술가는 드물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후에라도 온전한 평가를 받을 만큼 충분한 창작의 기회를 부여받았느냐는 것이다. 한데 조국이라고 돌아온 이곳은 곧 내전을 벌여서 처음엔 문자 그대로 '원산 폭격'을 선사해서 삶의 근거를 빼앗았고, 끝내 담뱃갑을 펴서 수백장을 스케치한 이 화가에게 굴다리 밑 담벼락 하나 내주지 않았다. 차라리 언제든 일본에 눌러앉았더라면? 그래도 생전에 떴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추측도 무의미한 것이지만 일본으로 귀화만 했다면 본인이 그리고 싶은 매체에 그림은 양껏 그릴 수 있었으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애국자에게는- 일본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을 만큼은 개방적이었다고 해도- 귀화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결국 단 한번(혹은 두번)의 개인전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에 이 화가는 자신감을 상실하고 '내가 후일 무엇이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노라고 했다지만, 속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중섭은 세상을 속이지 않았다. 마크 로스코가 ‘거장’이고 앤디 워홀 따위가 ‘천재’라면 이 정직한 화가는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이중섭의 신화'화'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혹간 잊혀지는 때가 있더라도 결국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