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전시 review

예브게니 키신 3.31

이현욱 2014. 4. 6. 20:02

(지난달 마지막주엔 굵직한 피아노 리사이틀이 2개- 안드라스 쉬프(3.25일)/예브게니 키신(3.30일)- 몰려 있었다. 개인사정으로 쉬프의 공연은 취소도 못하고 티켓을 날려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했지만 다행히 키신은 무사히 관람에 성공. 아래는 공연 리뷰.)

 

 

(i) 프로그램

슈베르트(Schubert) 피아노 소나타 D.850 (in D Major)

스크리아빈(Scriabin) 피아노 소나타 2번(in g-sharp minor, Op. 19)

                                  연습곡(Etudes) Op. 8-2/4/5/8/9/11/12번

 

(ii) 리뷰

- 슈베르트; 첫 악장은 아주 생기있게 시작했다. 다음 2악장은 음악의 내용상 아마도 이 곡에서 가장 중요한, 가장 잘 연주되어야 하는 악장. 형식상은 A-B-A-B-A의 론도로 볼 수도 있고 좀 크게 확장된 3부형식으로 볼 수도 있는데, 요점은 ‘B’에 해당하는 부분을 어떻게 처치할 것이냐 하는 것-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접근법은, 특히 1악장을 이날처럼 생기있게 처리한 경우에,  2악장의 'A'에서 한번 숨을 고르고 'B'에서 다시 감정이나 템포를 고조시키는, 'pace-up' 하는 것이다. 키신은 ‘B’도 계속 느리고, 무게감 있게 가는 쪽을 선택했는데 이것이 작곡가의 의도에 부합하는지는 약간 의문이었다. 이유는 슈베르트가 2악장에 안단테나 아다지오 같은 템포 지시 대신에 'con moto(with motion)’를 달아놓은 의도를, 이 'B'에서 좀더 직접적으로 감정표현을 하고 음악에 움직임을 주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딱 잘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더 무게감을 주는 것도 음악의 내용을 강조하고 대비시키는 한가지 방법이기 때문에 2악장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이것도 충분히 가능하고 들을만한 해석.

문제라면 3악장도 2악장의 분위기를 이어가서 부드럽고 충분히 무게감을 주는 연주였기 때문에 1악장의 생기발랄함은 ‘미아’가 되어서 그냥 사라져버렸다는 것. 3악장은 '스케르초scherzo'의 타이틀을 달고 있고 빠르기 지시도 1악장과 같은 알레그로 비바체allegro vivace지만, 막상 음악을 들어보면 이 리듬은 너무 급하게 가려고 하면 그렇게 효과적이지가 않아서 사실 연주 자체는 이 악장 하나만 놓고 보면 다시 한번 아주 좋았다. 하지만 악장 간의 관계, 작품 전체의 구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문제가 되는 것- 이를테면 처음에는 약간은 질풍노도의, ‘하이틴 로맨스’일 것처럼 시작했던 드라마가 갑자기 주인공 남녀의 30대 중반 삼촌과 고모의 원숙한 러브스토리로 넘어가서 그냥 그 얘기로 끝나버린다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이렇게 갈 거라면 애초에 1악장을 템포도 약간 늦추고 서정성을 보다 강조하는 쪽으로 연주하는 것이 작품 전체를 본다면 더 나았을 것인 바, 이것은 즉흥곡 4개를 모아 놓은 곡이 아니라 4개 악장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소나타이기 때문이다. 물론 슈베르트는 베토벤과 비교했을 때 이런 큰 그림을 그리고 구조를 짜는 데 약점이 있기 때문에 작품 자체의 결함이 이런 접근을 어렵게 한다고 항변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 악장마다 그 최선의 처치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4개 악장이 모여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최대한 살려보려고 노력하는 접근법이 보다 옳을 거라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각설하고, 마지막 4악장은 아마도 4개 악장 중에 가장 잘되었던 연주- 키신은  탄력있는 리듬과 아주 섬세한 다이나믹스(dynamics) 조절로 듣다 보면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고, 때로는 지루할 수도 있는 이 론도를 청중으로 하여금 끝까지 지루할 틈이 없이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 스크리아빈; 소나타 2번은 10곡의 스크리아빈 소나타 중에서도 그렇게 자주 연주된다고 볼 수 없을 것이고 음반도 스크리아빈 소나타 전곡집이 아니면 찾기가 그렇게 쉽진 않다. 다만 이날 라이브로 확인한 느낌으로는 처음에 들을 때보다 몇번 반복해서 들으면 더 괜찮게 들리는 음악이라는 것. 물론 키신 정도 레벨의 피아니스트가 들려주는 라이브가 근사하다고 해서 그 기대치를 갖고 아무 음반이나 덜컥 사면 실망하기 쉽다는 점은 주의를 요한다.

    7개의 연습곡을 듣는 동안- 사실 이날 전반부 공연부터- 우리의 눈에 들어왔던 것은 키신의 유연성이었다. 좀 뜬금없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옛날 이승엽의 스윙을- 정말 부드럽고 유연하고, 그렇지만 빠른 스윙 스피드에 완벽하게 체중을 실어서 각도만 맞으면 담장을 넘어가는- 떠오르게 했는데, 야구를 할줄 몰라도 잘하는 선수는 애초에 폼이 뭔가 달라 보이는 것처럼 우리는 피아노를 칠 줄 모르지만 키신의 폼은 뭔가 좀 달라 보였다. 팔은 마치 고무팔처럼 유연해 보였고 손목, 어깨에서 허리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군데 힘이 들어가 보이는 데가 없었지만 그러면서도 필요할 때는 체중이 완전히 실린, 엄청나게 큰 소리를 냈다. 정말 쉽게 보이고, 쉽게 들리는 연주. 음악의 내용으로 본다면, 스크리아빈의 곡 중에 아마도 가장 대중적인 8-12번도 엄청난 테크닉을 기반으로 낭만적인 열정으로 몰아가는데 더해서 여유와 부드러움을 같이 갖고 있는, 아주 고급스러운 스크리아빈이었다.

 

앵콜; Bach-Kempff siciliana(플루트 소나타 2번 BWV 1031, 2악장의 피아노 편곡)/스크리아빈 연습곡 op.42-5/쇼팽(Chopin) ‘영웅heroic’ 폴로네이즈; 조금 예상외였던 첫번째 앵콜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뭐더라, 기억해낼 수 없었던 소품- 인터넷시대가 좋은 점은 하루만 지나면 수천명 청중 중에 누군가가 리뷰에 곡명을 다 알려준다는 것이다. 키신이 투명한 사운드로 연주하는 바하는 아름다웠다. 두번째는 이날의 프로그램상 이걸 하지 않을까 짐작할 수 있었던, 8-12번 다음으로 친숙하고 스크리아빈 자신이 콘서트에서 가장 즐겨 연주했다는 그 곡.  마지막 쇼팽은 청중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가기에 충분한 파워를 보여줬지만, 가슴에 와닿는 느낌으로는 이날의 키신은 쇼팽보다는 스크리아빈을 더 잘치는 피아니스트였다. 다른 피아니스트였다면 사실 이 정도로도 꽤나 '인심 후한' 앵콜을 선사한 편에 속하겠지만 키신의 '과거'를 익히 알고 있는 청중들은 집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피아니스트든지 내한할 때마다 앵콜을 10곡씩 할 수는 없는 노릇, 이번에는 이 정도로 만족하고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