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전시 review

암스테르담로열콘서트헤보오케스트라(11.15/16) & 베를린필(11.19/20)

이현욱 2017. 12. 9. 00:36

(이번 가을 시즌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두 일류 교향악단의 공연이 11월 중순 한 주에 몰려있었다. 시간 및 예산 관계상 유감스러웠던 애호가들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이 된다. 아래는 간단 리뷰- 우리가 듣기에 제일 잘된 프로그램 하나와 몇 가지 단상들이다.)


I. Amsterdam Royal Concertgebouw Orchestra/Daniele Gatti(롯데콘서트홀)

- 연주는 첫날 말러(교향곡 4번) 3/4악장이 가장 좋았다. 연주시간이 가장 긴 3악장은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갈수록 오케스트라와 청중이 같이 집중도가 높아진 경우. 가티는 길게 호를 그리는 선율을 잘 끌고 나갔고 보드라운 콘서트헤보의 현이 이름값을 했다. 4악장도 간주 부분의 확실한 대조라든지 가티의 방침이 확실하게 전달이 되었던 연주.

- 둘째날 협연(베토벤 협주곡)을 한 짐머만(Frank Peter Zimmermann)은 우리가 예전에 들었을 때보다는 연주가 좋아졌다; 기억상 그때도 깔끔하긴 했지만 자기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데 있어 자신감이 이번만큼 없었다. 65년생이니 어느덧 우리 나이로 53세, 바이올린은 첼로나 피아노보다 테크닉의 쇠퇴가, 체력적인 한계가 빨리 오기 때문에 레코딩을 남기는 데 관심이 있다면 지금이 열심히 녹음을 해야할 시점일 것이다.

- 수석주자들 중에서는 바순이 가장 눈에 띄었다. 목관악기군에서 바순이 주위를 압도하는 느낌을 주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훌륭한 실력이었다; 소리도 좋지만 음악적으로도 노래가 전연 밀리지 않고 솔리스트를 탄탄하게 받쳐줬다. 그리고 첫날 팀파니와 하프가 모두 일류였다.


II.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Sir Simon Rattle(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 딱히 실패한 레퍼토리도 없고, 이거다 싶을 만큼 잘한 것도 없어서 꼽기가 애매했던 경우. 그래도 역시 R. 슈트라우스 ‘돈 후안(Don Juan)’이 제일 노래가 낫지 않았나 싶다. 스트라빈스키 '페트루슈카(Pétrouchka)'는 파트간 밸런스나 전체적인 리듬감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는데 어쩌면 베를린필에 대한 우리의 기대치가 너무 높았는지 모른다.

- 바로 사흘 전에 들었을 때 콘서트헤보도 상당히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날 베를린필을 듣고 보니 역시 거기서도 다시 실력차가 있어서 마치 잘 훈련된 군대처럼 진퇴가 아주 질서정연했고, 각각의 파트가 소리를 맞추는 것도 파트간에 서로 맞아들어가는 것도- 즉, 이를테면 한 프레이즈이나 섹션이 끝날 때 딱 소리가 모이는 것이나 각 파트들이 서로 복잡하게 선율이 얽힐  때의 대응이나- 모두 이쪽이 조직력이 한수 위였다.

- 첫날은 파후드(Emmanuel Pahud)/마이어(Albrecht Meyer)가 쉬는 날이었지만 그래도 플륫/오보에가 뒷줄보다 돋보였다- 이런 것이 베를린필의 강점인지 모른다. 현악 파트도, 이를테면 앵콜곡이었던 슬라브 무곡(Op. 72-2)에서 비올라가 잠시 주선율을 맡는 부분에 오면 정말 잘한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 실력에 밸런스면 앵콜곡으로 베토벤 후기 현악사중주 중에 한 악장- Op. 135의 2/3악장이라든지- 해도 근사하고 듣기 좋을 텐데 요즘 유행에 안 맞는 것인지?

   둘쨋날 파후드는 열심히 했지만 음량을 키우는 데 신경을 좀 과하게 썼는지 모르고 마이어는 컨디션이 아주 좋아보이진 않았다. 다만- 아래서 상술하겠지만- 좋은 홀에서 먼저 듣고 나서 나쁜 홀로 넘어오니까 관악기군이 음색이 다 죽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아쉬웠다- 만약 이게 홀의 차이가 아니고 진짜 실력이라면 베를린필이 콘서트헤보하고 (현금 왕창 얹어서) '7:7 트레이드'라도 단행해야 할 판인 것.

- 사소하다면 사소한 부분이지만 오케스트라 전체적으로 몸을 흔드는 동작들이 좀 과했고 특히 악장을 비롯해서 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 수석들, 맞은편의 비올라 수석 한명까지 앞에 의자가 안 놓여있는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왼쪽과 오른쪽 다리를 번갈아 내뻗으면서 아주 '현란한 푸트웍(footwork)’을 보여줬는데, 단원들의 아이디어인지 래틀이 시킨 건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개다리' 만큼은 자제를 시키는 게 좋을 것이다- 바이올린을 발로 켜는 것도 아닌데 청중의 시선을 다리로 끌고 내려가면 정작 봐야 할 것을 못 보게끔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 홀 음향에 관해서 좀 더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롯데홀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은 처음 들었는데- 파이프오르간 공연만 한 두번 갔었다-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하고는 굳이 비교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지금 한국에서 여기가 제일 좋은 홀이고 그것도 '동급에서 제일 나은(first-among-equals)' 정도가 아니라, 아예 레벨이 다르다. 여기가 울림도 더 좋고 오케스트라의 각 파트도 더 명료하게 들리기 때문에 서로 가감해서 비교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얘기. 음악을 감상하는 데 있어 질적으로 더 중요한 점은 이 롯데홀에선 톤 컬러가, 악기마다 연주자마다의 음색이 들린다는 것이다. 위에서 관악기군 음색 이야기도 언급했지만, 이 홀에선 콘서트헤보 제1바이올린 사운드가- 때로는 거의 관능적으로 느껴질 만큼- 비단결 같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는데 원래 세계일류 오케스트라의 제1바이올린은 이런 톤이 들려야 정상이다(물론 비단도 여러 종류다. 곧, 각기 ‘실키(silky)함’의 차이, 개성은 있다는 이야기).

   비유하자면, 롯데홀이 컬러 TV라면 예술의 전당은 흑백 TV라는 것- 사물의 윤곽선, 인물의 표정 정도만 보이지 색채감은 없다. 여튼 이제 비행기를 타고 나가지 않아도 좋은 오케스트라의 제대로 된 음색을 들을 수 있는 홀이 한국에도 겨우 하나 생긴 셈이고, 기획사들도 이제 한번 잘 생각해봐야 할 것이 음질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제 좋은 연주자/단체일수록 공연은 이쪽으로 옮겨야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헐리우드 최고의 섹스 심벌이 나오는 영화를 수입해다가 관객들한테 흑백으로 보여주면, 그게 바로 ‘변태 취미’다.

- 특히나 음악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반드시 이 홀에 와서 좋은 오케스트라/악기 주자는 소리가 이렇게 난다는 걸, 이런 고운 톤을 낸다는 걸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상기 콘서트헤보 공연 첫날 빈 자리가 많이 보였던 것이 아쉬웠다. 왜 이렇게 사람이 없나 해서 롯데홀 홈페이지를 뒤져봤더니 '러시티켓'이라고 만24세 이하 학생할인제도가 있긴 있는데 할인율이 고작 50%였다. 이 공연은 제일 싼 표가 7만원짜리였는데 반값이래도 3만5천원이면 학생들 일주일치 점심값이다. 그 다음 등급은 15만원인데, 7.5만원이면 새해부터 올려준다는 최저임금으로도 근 8시간 알바를 해야 이 공연 한번 본다는 이야기- 이게 '청소년' 혜택이 맞는가? '청소년' 앞에 괄호 쳐놓고 '중산층 이상만'이라고 단서조항을 붙여놓은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이렇게 좋은 오케스트라를 불러다 놓고 빈자리를 이렇게 많이 남겨놓는 건 '죄악'이라고 느껴야 '문화사업' 할 자격이 있다. 그리고 자리를 채울 거라면 공짜표를 막 돌리는 것보다 학생들한테 만원 한장 받고 표 내주는 게 관람 분위기도 좋아진다. '말 나오고 귀찮은 건 싫다'는 식이라면 2류 조직이다. 모처럼 좋은 홀 지어놓고 기왕 일을 할 바엔 제대로 하면 좋지 않나 싶다.

- 예술의 전당은 ‘리노베이션’ 정도로 될 게 아니라 거의 다 때려부수고 새로 짓다시피 해야 할 텐데 그럴 역량이 되는지 의문. 민간에서 '통큰 기부'를 하면 일이 좀 쉬워질 텐데- 그 돈을 제대로 쓸 역량이 되는지도 의문이기 때문에 돈 내는 사람이 감독을 잘 해야하긴 할 것이다- 외국같으면 거대기업들이 홀 지어주고 ‘롯데홀’ 이름 붙이는 정도로 만족을 하겠지만 한국은 전재산 기부하는 사람은 대개 김밥 할머니요, 자기 재산의 상당부분을 기부하는 사람은 중소기업주 정도까지고, 그 위로는 돈이 많을수록 점점 더 인색해진다. 당장 이 홀도 롯데 소유 재산으로 지은 거고, 미술품 같은 경우도 거의 자기 핏줄한테 물려주기 위해서 모으는 거지 이름만 대도 알 만한 아무개가 미술관 지어서 통째로 기부했다는 얘기는 우리는 못 들어봤다. 내 손으로 일군 게 남의 손에 들어가서 잘 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오로지 내 핏줄이 물려받아서 망하는 게 낫다는 이 사고방식을 고치지 않으면 한국은 지금이 한계지 선진국될 가망은 없다. 당장 국민소득은 3만불에 육박하지만 문화예술 인프라 수준은 만불짜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지금 한국에 국부가 모자라는가? 아니다. 사람들이 돈을 쓸 줄 모르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것도 '유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