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로열콘서트헤보오케스트라 4.20~23
(지난달 20(월)~23일(목), 나흘에 걸쳐서 이반 피셔/로열콘서트헤보오케스트라의 베토벤 사이클, 곧 교향곡 전곡 연주가 있었다. 베토벤이 서양고전음악에서 차지하는 위치라든지 한국에서 이런 사이클의 희소성을 감안하면 올해 한국에서 열린 가장 중요한 문화적 이벤트 중에 하나였다고 말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아래는 날짜별 간단 리뷰.)
- 4.20; 1/2/5번.
역시 좋은 오케스트라라는 것이 보통 가장 많이 긴장되는 첫곡, 첫악장부터 안정감이 있었다. 음악적으로는 5번 2악장이 노래가 제일 괜찮았다는 기억이고, 무엇보다 라이브 공연을 보러 간 보람이 있게 소리가 듣기 좋았는데 지휘자나 악단이나 음 하나하나를 고르게 만지는 능력은 없었지만 프레이즈(phrase)의 끝에서는 좋은 소리를 모아냈다. 오케스트라는 현악파트가 좋아서 저음현이 아주 탄탄했고 제2바이올린이나 비올라도 별로 밀리는 느낌이 없었다. 제1바이올린은 베를린필같은 세련미는 아니지만 관능적인 음색을 갖고 있어 듣기가 좋았다- 최근 상임지휘자 자리를 사임한 마리스 얀손스(Mariss Jansons)가 10년 이상 함께 이끌었던 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과 비교한다면, 바이에른의 제1바이올린이 조직력에서 밀린다고 할 수는 없지만 톤의 개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확실히 콘서트헤보쪽이 더 할 말이 있다는 얘기. 관파트쪽은 개인기가 아주 특별한 주자는 없었지만 우리가 바로 한달쯤 전에 들었던 LA필보다 앙상블 면에서 한수 위인 걸로 느껴졌다.
- 4.21; 3/4번
이날은 4번 2악장이 제일 좋게 들렸고, 반면 3번 4악장은 가장 좋지 않았다. 특히 중간에 푸가토fugato 부분에서 각 성부가 아주 긴밀하게 맞아들어가진 못했다는 느낌- 템포도 충분히 여유가 있었는데 구조를 명확히 하지 못하니까 결과적으로 각기 '지방방송화'하면서 리듬만 늘어지게 들렸다. 전반적으로 4일간 공연 중에 이날 연주가 가장 안 좋은 편이었다(다만 우리가 예매를 일찍 못해서 자리가 날마다 들쭉날쭉이었는데 이날이 소리가 가장 안 좋은 위치였다는 점이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 4.22; 6/7번.
음악적으로는 전9곡 중에서 이날 6번 '전원'이 가장 나았던 것 같다. 공교롭게도 2012년에 얀손스/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이 베토벤 2/3/6/7번을 들고 왔을 때도 6번이 가장 노래가 괜찮았던 기억- 같은 상임지휘자가 이끌었던 영향이 있을 수도 있겠고, 이 곡의 특성에서 이유를 찾는다면 이 '전원'은 베토벤이 친절하게 악장마다 이게 무슨 느낌인지 표제를 달아주었기 때문에 이게 어떤 감정인지 큰 그림이 파악하기 쉽다는 점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1악장의 표제는 '시골에 도착했을 때 즐거운 감정이 일어남'인데 도시생활에 찌들어있다가 경치좋은 시골에 가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베토벤시절보다 도시화가 엄청나게 진행된 오늘날에 사는 현대인들이 (연주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오히려 더 날카롭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5악장은 원래 표제가 달려 있어도 표현하기 어려운 음악이고, 이날 2악장은 시냇물이 좀 지루하게 흘러간 감이 없지 않았다.
피셔는 6번에서 목관을 쪼개서 수석들을 바순은 제1바이올린과 첼로 사이, 플륫/오보/클라리넷은 지휘자 바로 앞자리로 내렸는데- 나머지 한명씩은 원래 목관 위치에 남겨두었다- 우리는 목관이 한 칸 아래로 내려오면서 소리가 쌓이는 게 달라지는 것까지 들을 수 있을 만큼 세밀한 귀는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판단은 보류. 다만 시각적으로는 다소 혼선을 주는 게 사실이기 때문에 음악적인 이득이 확실해야만 보편적으로 다른 지휘자들에 의해서도 채택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사실 피셔는 재미있는 악기배치를 계속 실험했는데 콘트라베이스는 나흘 내내 악단 맨 뒤 정중앙에 있었고 앞서서 첫날 5번에선 4악장에만 쓰이는 트롬본 셋을 맨 뒤에 정중앙과 왼쪽/오른쪽 구석, 각기 한 명씩 벌려서 세웠웠다.).
7번은 피셔가 갑자기 엑셀을 밟은 4악장이 특기사항. 우선 지적해야 할 점은 악장간 템포 밸런스가 조금 심하게 깨졌다는 것- 이게 ‘알레그로 콘 브리오Allegro con brio’라면, 3악장의 ‘프레스토Presto’는 뭐가 되며, 1악장의 ‘비바체Vivace’는 또 왜 그렇게 늘어졌던가? 전에도 몇번 언급했던 것 같지만 베토벤은 전체를 다 보는 작곡가기 때문에 각 악장마다 별개로 효과를 극대화하는 처치를 하면 좋지 않다- 즉, 4악장을 이렇게 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스토리를 다르게 전개했어야 했다는 얘기. 보다 중요한 2번째 문제는 속도를 빨리 하는 와중에 제1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제1주제부터 마치 음표가 줄어든 신스코어로 연주하는 듯한 느낌으로 음을 뭉개고 지나갔다는 것. 사실 우리의 견해로는 베토벤이 현대의 오케스트라를 봤다면 4/7번의 4악장은 템포 지시(4번은 Allegro ma non troppo) 자체를 바꿨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베토벤시대의 음악가들보다 20c 이후의 음악가들이 더 '음악적'이라고 보긴 어렵겠지만, 대체적으로 악기나 연주기술이 모두 더 빠르고 정확한 연주를 가능하게 하는 쪽으로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베토벤이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여지가 있는 템포 지시를 남긴 이유는 이 음악들이 그 '시대악기' 수준에서 음 하나하나가 고르고 명확하게 소리가 나기를 원했고, 또 그래야 음악이 살기 때문이라고 봐야한다는 의미이고, 그렇기 때문에 역시 베토벤의 의도를 충실히 지키기 위한 기본 전제는 어떤 속도를 선택하더라도 음 하나하나가 고르고 명확하게 나야 한다는 것이다.
여하튼- 우리의 견해야 어떻든 간에- 피셔가 가장 분명하게 자기 아이디어를 표현한 것도 아마도 이 7번이었고 청중의 입장에선 이렇게 자기주장이, 개성이 분명한 연주를 들려주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의미에서 6/7번을 합쳐서 나흘 중에서 이날 연주가 가장 흥미로웠다.
- 4.23; 8/9번.
전반부 8번의 4악장은 엑센트를 뒤쪽에 주면서 묵직하게 끄는 느낌으로 어제 쾌속했던 7번의 피날레와 대조를 주는 선택이었는데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던 접근.
9번에서 피셔는 현악편성을(8번까진 기본편성으로 제1-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베이스: 12-10-8-6-5를 썼다) 2~3명씩 늘렸는데 아마도 4악장에 들어올 합창에 대응해야할 필요도 있었겠고 1~3악장에서도 스케일이 커진 곡의 특성도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9번은 3번 '영웅'에 이어서 베토벤이 한번 더 도약을 한 작품이고 음악의 내용 뿐 아니라 사운드 자체도 8번까지와는 스케일이 다르다는 걸 라이브에서 조금은 느낄 수 있었는데 4악장에 합창이 들어오고 나서는 문자 그대로 ‘중구난방’, 독창자 4명도- 메조가 그나마 가장 음악적이었는지 모른다- '노래'를 하기보다는 ‘샤우팅’을 하는 때가 더 많았다. '합창'교향곡이 정작 보컬이 들어온 다음엔 '떼창'교향곡이 되어서 끝났으니 아이러니. 베토벤은 기악과 성악, 혹은 기악/합창/독창의 비중을 적절하게 배분하고 완전히 활용해서 마지막 악장의 이 거대한 드라마를 만들었기 때문에 합창이 무너지면 오케스트라나 독창만 가지고 음악을 일으켜 세우기는 어렵다. 그래서 실력있는 합창단이 꼭 필요한 음악이고- 주최측에 물어본다면 물론 '비용 문제'라고 답하겠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다만 독창/합창단을 위해서 변명을 해준다면 이 곡의 난이도는 아마도 가수들이 기껏 고생해서 불러도 빛은 안 나고 욕만 먹는다고 기피하는, 그런 범주에 든다고 봐야 공정할 것이고 나흘 연속 공연은 보는 사람한테도 체력적으로 힘들었는데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전주에 똑같은 스케줄로 룩셈부르크에서 공연을 하고 날아왔다는데도 마지막까지 좋은 집중력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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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들과 오케스트라의 황금시대에 살았던 운좋은 사람들은 아마도 콘서트만 열심히 다니면 베토벤의 위대함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젠 그런 시대는 지난지 오래이고 베토벤의 진가를 알기 위해서는 진짜 마에스트로들의 옛 녹음들을 연구하는 것이 필수인 시대가 되었지만,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다고 해도 스튜디오 녹음이 ‘생음악’을 대체할 수는 없다- 레코드만으로는 베토벤의 ‘울림’을 다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꼭 필요했던 기획이고, 좋은 기회였다. 우리도 많은 것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