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thoven piano sonata No. 29 in B flat Major, Op. 106 “Hammerklavier”
I. Allegro
II. Scherzo. Assai vivace- Presto- Prestissimo- Tempo I
III. Adagio sostenuto. Appassionato e con molto sentimento
IV. Largo(-Un poco piu vivace- Tempo I- Allegro- Tempo I- Prestissimo)- Allegro risoluto
(i) 작품개요
이 곡은 어쩌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중 '최후이자 최고의' 작품이 될 수도 있었던 작품이다.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는 단지 베토벤이 죽기 전에 3개의 소나타를(Op. 109~111) 더 쓰고 죽었기 때문인 바, 그 결과 대작곡가의 ‘마지막 소나타’라는 후광 효과가 사라졌을 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꼭 최고라고 말하기는 논쟁의 여지가 있게 되었다. 여튼 일이 그렇게 된 것이 이 소나타의 책임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함머클라비어'가 마치 '에로이카'가 그전까지의 교향곡의 한계에 도전한 작품인 것처럼 피아노 소나타 내지는 피아노 자체의 한계에 도전한 작품이라는 것과, 그래서 베토벤과 피아노 음악 모두에 중요한 이정표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 1악장은 소나타형식. 교향곡까지 감안한다면 베토벤의 소나타 형식으로 가장 크거나 복잡한 악장은 아니지만 피아노 소나타들 중에서는 최대규모(사실 이 곡 전체가 베토벤의 전 32곡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최대작'이라는 타이틀은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악상 자체가 규모 혹은 볼륨감이 있어서 제1주제는 첫머리부터 피아노를 아무리 '내리 찍어도' 부족할 것 같은, 뭔가 버거운 듯한 느낌- 사실 '함머클라비어(hammerklavier)’는 단지 ‘포르테피아노(fortepiano)’를 의미하는 독일어이고 베토벤이 이미 소나타 28번(Op. 101)에도 사용했던 단어이지만 ‘해머’라는 단어의 어감, 즉 큰 쇠망치로 내려치는 듯한 그런 종류의 연상은 우리가 느끼는 것이나 유럽인들이 느끼는 것이나 비슷한 모양이어서 현재는 이 작품의 별명으로만 되어 있다.
곡의 구조는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으로 맞춰넣는데 무리가 없는데 내용상은 시작하자마자 a-b-c로 짧게 세가지 악상이 이어지면서 마치 제1주제-제2주제-코데타를 단숨에 들려주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게 특색. 폭풍같은 c가 끝난 다음에 a가 다시 들어오면서 전개가 되고, 정식 제2주제가- 사실 b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구석이 있다- 나타나면서 이후는 정상적으로 코데타까지 간 다음에 제시부 전체를 한번 반복하게 된다. 제시부가 이와 같이 길고 악상이 다양하기 때문에 (특히 라이브에서는) 반복을 지켜주는 것이 좋다. 발전부가 상대적으로 간단하지만- 이 1악장이 제시부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 규모가 작아진 이유이기도 하다- 4악장에 상응하는 제1주제의 푸가토(fugato) 처리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도 '장대함'을 강조하려고 하면 리듬이 '절뚝거리는 것 같이' 들린다는 점이 유의할 점. 이 음악이 처음부터 장대한(grand, magnificent) 음악이 아니라고 본다면 문제될 것이 없겠고, 제시부는 혹 그렇게 봐도 무방하겠지만 발전부에 오면 음악의 성격이 내용적으로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이 악장의 해석에 있어서 가장 논할 것이 많은 부분은 '템포'이다. 흥미롭게도 이 곡은 베토벤의 32개 피아노 소나타들 중에서 유일하게 '알레그로' 같은 빠르기말뿐 아니라 작곡가의 메트로놈 속도 지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럼 베토벤이 지정한 그대로 치면 될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서 상당히 긴 논증을 필요로 한다.
일단 먼저- 예전에도 한번 적었던 것 같지만- 우리의 템포에 관한 '일반 이론'은 '절대 템포'란 없다는 것이다. 템포란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다. 어떤 연주가 너무 느리게 혹은 너무 빠르게 들린다? '무엇'에 비해서? 그 기준이란 결국 우리의 머리속에 들어 있는- 때로는 제일 처음 들어서, 때로는 가장 많이 들어서 귀에 익은- 특정 연주의 빠르기일 뿐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어떤 곡을 통상적으로 연주하는 극단적이지 않은 평균 템포가 존재하지 않겠는가? 그것도 부분적으로는 올바른 관찰인데, 문제는 지금은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는 그 '평균' 템포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서 바뀐다는 것이다(그리고 공교롭게도 베토벤 시대 이후엔 한동안 계속 느려지는 방향이 대세였다는 것을 여기서 기억해두면 좋다.). 지금 시대의 평균 템포가 지난 시대의- 혹은 앞으로 올 시대의- 것보다 낫다거나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물론 없다. 그럼 악보에 적혀있는 템포란 아무 의미도 없는가? 있다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일단 기본적으로 작곡가가 악보에 지정한 모든 것은 해석의 출발점이 된다- 즉, '작곡가의 의도'를 추정하는 단서라는 말이다. 그 다음엔 각자의 음악적 판단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이 곡도 이 일반론에서 벗어나는 특수한 경우는 아니어서 상당히 넓은 폭의 템포 차이를 갖는 연주들이- 아래 (ii) 녹음들에서 볼 수 있듯이- 다 들을만 하고 음악적으로 말이 된다.
그럼 도대체 뭐가- 아직도- 문제란 말인가? 그것은 얄궂게도- 즉, 베토벤이 지정한 템포로 그냥 연주하면 되기는 커녕- 작곡가 자신이 지정한 템포(2분음표= 138)로는 '연주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있기- 한때는 거의 전문가들의 통설이었고 지금도 '다수설' 정도는 되지 않나 싶다- 때문이다. 이 설은 19c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거의 추리소설을 방불케 하는-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괴도 토벤' 주인공의 '138의 비밀' 정도 되겠다- 흥미로운 역사를 갖고 있는데 한동안은 체르니(C. Czerny)가 '용의자'였고- 곧 문제의 숫자가 베토벤의 것이 아니라 체르니의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것은 암묵적으로 체르니는 제대로 된 음악가가 아니고 그냥 '핫바지'였다고 상정하는 것이 된다- 문헌상의 증거로 베토벤의 지시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된 다음에도 빠르기가 틀렸다,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사실 일반적으로 베토벤이 남긴 메트로놈 빠르기들의 정확성을 의심하는 이론이 많은데- 이쪽은 거의 용의자가 칠팔명 넘게 등장하는 '메트로놈 실종사건' 수준이다- 이 곡의 경우에는 제자 리스(Ferdinand Ries) 앞으로 메트로놈이 고장이 나서 정확한 빠르기 수치를 보내줄 수 없다는 내용의 편지가 있어서 메트로놈을 원인으로 지목하긴 어렵다- 메트로놈이 고장나서 빠르기를 못 보내고 있었다니, 응당 메트로놈이 수리가 되거나 새 것을 구입하자마자 지정하지 않았겠는가?(이 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베토벤의 메트로놈이 실제로- 혹은 더 바람직하게는 종종- 고장이 났었다는 증거로 해석하고 싶어하는데, 실상 더 중요한 점은 베토벤이 '메트로놈은 고장이 나는 기계'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외에도 베토벤 시대엔 메트로놈 자체가 부정확했다, 혹은 베토벤이 메트로놈의 빠르기 수치를 박자단위에 따라 바꾸는 환산을 하다가 계산착오를 했다, 아니다, 착오는 베토벤을 돕던 어린 조카 칼이 했다, 등등 많지만 상술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결론만 간단히 언급하자면, 이런 설들이 모두 처음부터 템포가 잘못되었다는 전제하에 만들어낸 설명으로는 그럴 듯 하지만 중립적인 입장에서, 곧 템포가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전제하에서 받아들이기엔 '소설'의 수준을 많이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보다 음악적인 반론은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에게서- 물론 동시에 '체르니 용의자설'을 유포하기도 했다- 나왔는데, 폰 뷜로는 베토벤/체르니 시대 피아노의 '부족한 울림(lack of sonority)'를 한가지 원인으로 봤다. 즉, 이 곡을 이후에 나온 그랜드 피아노로 이렇게 빨리 치면 소리가 왕왕 울리면서 겹쳐서 명료하지 않게(blurring) 들린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베토벤 시대의 악기/콘서트홀의 음향조건과 지금의 조건을 비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제한적인) 타당성을 갖는 접근법이다. 문제는 이 경우는 음악적으로 이게 정답인지 확실치가 않다는 것이다. 왜냐면 '주선율'만 듣지 않고 '화음'을 듣는다면 적어도 우리 귀엔 첫머리의 이 코드들은- 폰 뷜로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마치 여러 개의 종이 조금씩 시차를 두고 한꺼번에 겹쳐서 울리듯, 그렇게 울리라고 쓴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제1주제의 코드들은 단순히 '선율을 받치는' 식으로 쓰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이 모든 것들이,'용의자'들이 난무하는 설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가끔 전문가들이 집단적으로 '현실 부정'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가 그 사례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의 근본 원인은 이 속도, 2분음표= 138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정말 문자 그대로 '초인적인' 테크닉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너무 빨라보이니까- 그리고 자기들은 그렇게 칠 수 없으니까- 숫자가 틀렸다, 숫자에 책임을 돌리고 여러가지 구구한 이유를 찾고, 또 거기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내가 쳐봤더니 제대로 못 치겠다고 해서 숫자가 틀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지금까지 나온 어떤 피아니스트도 제대로 연주할 수 없었다고 해도 논리적으로 오류인 것은 마찬가지다. 알프레드 브렌델(Alfred Brendel)은 소시적에 '악마라고 할지라도' 그 빠르기로는 못칠 거라고 떠벌렸다지만- 진짜 악마가 들었으면 괘씸해서 잡아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악마도 못 친다고 치고) '피아노의 신'을 누가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베토벤이 지정한 빠르기에 거의 근접한 템포로 연주한 실증 사례가 존재한다. 아래 (ii) 녹음들 4. 슈나벨(Arthur Schnabel)의 1935년 녹음이 그것이다. 이 슈나벨 버전을 '성공한 사례'라고 볼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는데 우리의 견해로는 음악적인 면에서는 완벽하게 말이 된다는 데 논쟁의 여지가 없다. 이 슈나벨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취향의 문제'라는 변명은 가능하겠으나 단순히 어떤 연주가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려서 싫다는 것은 어리석고 비논리적인 선입견에 불과하다- 이미 위에서 '절대 템포'란 없다고 충분히 설명했다. '절대 템포'가 없다는 말은, 곧 '절대로 안되는 템포'도 없다는 말이다. 단지 귀에 낯설게 들릴 뿐인 것이고 편견을 버리고 들으면- 들을 귀 있는 자에게는- '노래'가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실패 사례'라고 주장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데 상기 슈나벨 버전은 듣기에 따라서는 전형적으로 '틀린 음표를 짚거나 음표를 빼먹는 옛날 녹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슈가 '연주불가능성'이니 차라리 2분음표= 138이라는 숫자가 틀렸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볼 수 있지 않는가? 그럴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음악적으로 말이 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보기보다 중요한 것이다. 테크닉은 정 안 되면 나중에 AI(인공지능)에 '로봇팔'을 붙여서라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음악적으로 말이 되지 않으면, 곧 그 템포에서 제대로 노래할 수가 없다면 애초에 그런 빠르기로 연주하는 의미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좀 황당하다, 혹은 너무 먼 얘기라고 생각한다면 아래와 같은 간단한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을 해보면 동시에 베토벤 당시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슈나벨은 테크닉으로 한몫 보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다. 폴리니(Maurizio Pollini)라면 같은 빠르기에서 완벽하게는 못 치더라도 적어도 슈나벨보다는 훨씬 더 정확하게 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폴리니에게 부족한 것은 테크닉이라기보담 이 빠르기에서 노래할 수 있는 음악성이다. 그렇다면 슈나벨의 음악성과 폴리니의 테크닉을 동시에 가진 피아니스트라면 의심할 여지 없이 슈나벨을 뛰어넘는, 아마도 지금까지 녹음된 어떤 버전도 뛰어넘는 연주가 가능할 것이다. '로봇팔'이 없이도 베토벤의 의도에 인간의 능력 범위 안에서 좀 더 접근해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빙긋이 웃음을 짓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또한- 우리 생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아마도 더 먼 미래에도- 실제로 이런 피아니스트가 태어나리라는 데에는 회의적이다. 그 이유는 물론 어느 한쪽만도 쉽게 태어나는 재능은 아니라는 것도 있고 테크닉과 음악성이 이렇게 완전히 별개로 잘라서 더해질 수 있는 것이라는 관점 자체가 오류라는 것도 있지만, 더 큰 것은 '서양고전음악'이라는 장르 자체가 이미 절정기를 지났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예술 장르도 사람에게 생로병사가 있듯이 태어났다 전성기를 지나서 점차 소멸하는 운명을 벗어나진 못한다. 천재들은 절정기에 몰려서 나타나고 곧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면서 뜸해지다가 결국은 완전히 사라져서 찾아보기 힘들게 된다. 하지만 베토벤은 자기 장르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는 와중에 살았던- 어쩌면 본인의 손으로 정점을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실제로 이후 베토벤보다 더 위대한 작곡가는 나오지 않았지만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도 연주 기술도 분명 베토벤 시대보다 진보가 있었다. 그러니 베토벤이 말하자면 이 '추세선'을- 나중에 실제로 일어난 것보다 더- 위로 연장해서, 한 50년이나 백년쯤 지나면 이 음악을 자기가 바라는 대로 완벽하게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상정했다고 한들 그게 그렇게 무리한, '황당무계'한 가정이었을까? 베토벤이 머리속에 설정한 이상적인 템포가 2분음표= 138이 맞다는 사실에 대해선 이제 더 이견이 없을 것으로 우리는 생각한다.
위에서 템포에 관한 일반론을 이야기할 때도 잠시 언급했지만 물론 '숫자가 틀렸다'에 집착하지 않아도 음악적으로 다른 해석의 여지는 여전히- 그리고 폭넓게- 남아 있다. 이를테면 상기 폰 뷜로의 경우에도 사실 음향(acoustic)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고 너무 빠른 템포는 감정적/내용적으로 첫머리 제1주제의 '묵직한 에너지(ponderous energy)'를 표현하는데 적합치 않다는 것이 우리가 이해하기엔 반론의 핵심이다. 이후에도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에 동의했고 이것은 일리가 있다. 일반적으로 대작곡가의 작품일수록 그렇지만, 베토벤의 경우에도 한 사람이 한번에 다 표현하기 힘든 복합적이고 때로는 서로 상충하는 듯 보이는 면을- 시와 강력한 파워, 생동하는 기세와 영웅적인 장대함- 동시에 갖고 있어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그리고 템포는 그 다양성을 표현하는 주된 수단 중에 하나가 된다.). '작곡가의 의도'는 해석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귀착점이지만 그 사이가 '일직선'이라는 뜻은 아니다. 중간에 여러 다양한 경로가 있고 그 길을 더듬어 찾아가는 것이 바로 연주가 혹은 '해석가(interpreter)'의 몫이다. 그러나 음악적 판단으로 '2분음표= 92'를 선택한다는 것과- 전혀 '반역사적'이지도, 미학적으로 잘못된 판단인 것도 아니다- '2분음표= 138'은 틀렸다, 그냥 '베토벤의 실수다'라고 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비유하자면 '해석가'란 작곡가의 '사냥개'와 비슷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냥터에서 '목줄'이 안 매여있다고 해서- 이를테면 '악마'를 운운하면서- 아무리 세상 모르고 날뛰어봤자 사냥감을 물고 나서는 주인에게로 돌아가야만 하는 존재인 것- 결국 언제나 '주인(master)'은 베토벤이다.
- 2악장; 가운데 트리오(Trio)를 낀 ABA 형태의 통상적인 스케르초로 볼 수 있지만 트리오가 2단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 곧, 한발을 묶고 뛰듯이 살짝 엇박자로 진행하는 스케르초 주부의 리듬을 보상하는 듯한, 질주하는 섹션이 끼워넣어져 있다. 이 음악이 절대적으로 쉬운 건 아니지만 나머지 3개 악장이 워낙 중압감이 크다 보니 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상대적으로 '쉬어가는 페이지'처럼 여겨진다. 아마도 베토벤 역시 1/3악장 사이에서 뭔가 한번 숨을 고를 필요성이 있다는 의도가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 2악장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로는 18번(Op. 31-3) 이후 처음 등장하는 스케르초(인 동시에 '마지막’이라고 하지만 실상 그 정신은 30/31번의 ‘초간결 소나타 형식’의 2악장들과 공유하는 바가 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