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전시 review

베를린필하모닉오케스트라 11.11/12

이현욱 2013. 11. 20. 00:31

(지난주 베를린필 내한공연 리뷰. 지휘는 상임지휘자 사이먼 래틀(Sir Simon Rattle), 첫날 바이올린 협연은 공동악장 중 한 사람인 다이신 가지모도였다.)


 

(i) 프로그램

 11일: 슈만(Schumann) 교향곡 1번 “봄”(in B flat Major, Op.38)

         프로코피에프(Prokofiev) 바이올린 협주곡 1번(in D major, Op.19)

         스트라빈스키(Stravinsky)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

 

12일: 불레즈(Boulez) “오케스트라를 위한 노타시옹(Notations)”

         브루크너(Bruckner) 교향곡 7번(in E Major)


(ii) 리뷰

11일

- 슈만; 이 작품의 해석의 실마리는 4악장의 지시어 ‘animato e grazioso'를 키워드로 삼아서 여기서부터 풀기 시작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 그냥 말로 '생기있고 우아한'이라고 하면 봄이 원래 그런 거지 뭐가 모순이냐고 하겠지만 사실은 연주하기 상당히 까다롭다. 물 좋은 생선이 '펄떡펄떡' , 동시에 '우아하게' 뛰어야 한다고 비유하면 상상하는데 좀 도움이 될는지... 보통은 슈만의 지시대로 어떻게든 절충을 해보려고 시도하는 경우가 많고, 그게 잘 안 된다고 판단하면 'grazioso'에 더 초점을 두고 1악장 Allegro molto vivace부터 여유있게 페이스를 잡고 들어간다. 이날의 연주는 반대로 'animato'에 초점을 맞춘 쪽, 4악장은 'grazioso'에는 제1주제 들어갈 때 약간의 립서비스lip-service만 하고 이후는 줄기차게 달려나갔다. 사실 1악장부터 어느 정도 예견은 되었던 접근이고, 2악장도 그에 맞춰서 비교적 템포를 빠르게 잡고, 절제가 있는 서정성보다는 감정을 충분히 드러내는 연주. 우리는 ‘grazioso’에 더 초점을 맞춘 쪽을 선호하지만 취향문제고, 이쪽도 충분히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고, 가능한 버전. 

다만 문제라면 3악장이었을 것이다. 이 악장은 트리오가 2개 끼워진 스케르초scherzo인데, 보통의 스케르초는 중간의 트리오가 숨을 고르는 부분인 경우가 많지만  슈만의 이 스케르초는 말하자면 '도치'가 된 것이 특징- 첫부분은 리듬이 장중해서 처음 들을 땐 스케르초로는 약간 둔중하지 않나 싶을 정도인데,  계속 이어지는 트리오 부분을 들어보면 리듬이나 악상이 보통의 트리오보다 훨씬 경쾌해서 짝이 맞는다. 래틀은 이것을 굳이 통상적인 스케르초대로 빠르게 시작해서, 트리오의 첫부분은 조금 늦추다가 나중엔 가속페달을 밟고, 두번째 트리오는 더 빨라졌는데, 우리의 귀에는 이렇게 해서 음악이 더 드라마틱해진다기보다는 정돈이 안된 느낌이 더 큰 것같이 들렸다. 그 외 언급할 것이라면 오보에를 사랑하는 슈만이 여기저기 오보에 솔로를 넣어서 알브레히트 마이어(오보에 수석)의 팬들에겐 만족스러운 선곡이었을 것이라는 점. 

- 프로코피에프; 작곡가가 청년시절(20대 중반)에 작곡한 이 협주곡은 프로코피에프의 재능, 혹은 ‘포텐’(potential)- 아마도 끝내 다 성취되지는 못했던- 을 보여주는, 자유롭게 노래하는 시정poetry이 돋보이는 작품. 이것을 살리지 못하면 이 곡을 연주하는 의미가 반감된다. 특히 3악장은 말하자면  '부주제'에 해당하는- 해설서에는 이 악장이 변주곡형식으로 나와있지만, 형식에 맞추기보다는 내용에 맞춰서 자유롭게 연결되어 있어서 사실 이름 붙이기도 애매하다-  부분도, 눈물을 삼키고 연회에 불려가서 연주하는 집시 피들러fiddler를 연상시키는(사실 이 작품 전체가 방랑하는 음악가의 정서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잘 연주되면 듣는 사람도 눈물이 핑 돌만큼 슬픈 음악. 이날 가지모도가 처리한 것처럼 마치 그 다음을 노래하기 위해서 잠깐 에너지를 비축하는 듯한 그런 느낌은 아니다. 우리는 가지모도를 요즘 솔로로 횡행하는 다른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들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바이올린 연주의 테크닉을 잘 알지도 못하고 사실 어떤 의미에선 그런 비교는 공평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정서적인 표현의 폭이 좁았다는 점만큼은 지적할 수 있다. 가지모도의 스타일로 봐선 프로코피에프는 1번보다는 2번이 보다 들을만 했을 것 같다.

- 스트라빈스키; 이 발레모음곡은 전곡을 일관되게 격하고 원시적인 에너지의 표출로, 고갱의 그림같은 느낌으로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거의 드뷔시적인 느낌으로 할 때도 있다. 바순이 처음에 들어오는 느낌으로는 굉장히 농도 짙은, 진한 버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후는 각개 약진, 파트나 악구마다 다른 느낌의 처치를 들려줬다. 의도적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 악단은 지휘자가 명확한 비전만 제시해준다면 어떤 스타일이든 다 통일되게,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쉬웠던 부분. 하지만 비평은 이걸로 되었고, 30분이 넘는- 그것도 아름다운 멜로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승전결이 뚜렷한 구조가 있는 것도 아닌, 그저 스트라빈스키가 꿈에서 봤다는 이교도들의 의식이라는 느슨한 플롯으로 엮여 있을 뿐인- 음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연 지루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음표, 소리들을 다 쫓아가지 못하고 지나간 것 같아서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는 것은 이 악단의 모든 파트가 정말로 환상적인 소리를 만들어냈다는 충분한 증명일 것이다.  이 소리가 기억에서 충분히 잊힐 만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당분간 스트라빈스키 CD는 못 듣는다.

 

12일

- 불레즈; 불레즈는 확실한 자기만의 개성을 갖고 있는 좋은 지휘자다. 평생 현대음악을 위해서 싸워온 '대의'는 옳았지만- 왜 옳다고 생각하는지는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짤막하게 써서 올리고자 한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이를테면 베토벤이나 브람스 전집 녹음에도 시간을 좀 할애하는 것이 후세를 위해서는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 현대음악을 위한 투쟁의 결과 혹은 성과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건 우리는 '좋은' 현대음악이 '대중의 몰이해' 때문에 소외되고 있다는 주장에 전연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라면? 음, 짝사랑이라면 대부분 사람들이 다 해봤을 텐데, 혹 마음속에 품고만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쫓아가본 일도 있으신지? 제발 한번 만나나 보자고, 알고 보면 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좋아질 거라고... 그녀의 대답: "알고 싶어야, 애시당초 알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만나죠?"...

최소한 상대방한테 알고 싶은 마음이 들게는 해야 사랑할 자격이 있다. 이것도 못하면서 상대방의 안목을 탓하는 것은 어린애들이 하는 짓이다. 하물며 '반강제적인' 만남을 한번 가졌는데도 안 궁금해진다면야... 이 곡도 무대가 비좁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관악기와 타악기군을 편성해서 처음 듣는 신기한 소리를 많이 들려주긴 했지만, 이렇게 '끼워팔기'로 한번씩 콘서트에서 듣는 정도 이상으로는 잘 궁금해지지 않을 것 같다. 

- 브루크너; 보통은 음악의 길이와 내용의 중요성 사이에 비례관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 곡의 경우는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 핵심은 앞의 두 악장이고, 하나만 전력을 다해서 제일 잘 연주해보라고 한다면  2악장 아다지오다. 이 날의 연주는 템포가 좀 빠르게 느껴졌는데 시계를 들고 체크해보진 않았지만 연주회가 끝난 시간으로 짐작해봤을 때는 정말 많이 빨랐다기보다는 감정의 진폭을 크게 그리지 않고 가벼운 터치로 일관되게 진행해나간 이유가 더 큰 걸로 짐작한다. 한데 브루크너는 베토벤이 아니기 때문에 흐름flow를 살리는 것만으로는 노래가 잘 나오지 않고,  이렇게 빗자루질을 하듯이 음표들을 슥슥 쓸고 지나간다고 해서 절제understatement의 효과가 생기지도 않는다. 브루크너에 지휘자가 뭔가 조미료를 더 치거나, 안 치거나는 해석상의 선택의 문제이지만 아무리 길어도 음표 하나하나를 좀더 소중하게, 명확하게 노래해주어야 하지 않았을지. 여기서 내용상 이날의 음악적 승부는 결정이 된 셈. 하지만 우리는 비평을 하러 간 것이 아니라 콘서트를 즐기러 간 것- 베를린필의 관은 이틀 연속 귀를 호사시켜주었고 오늘도 소리만 듣고 있어도 별로 지루할 틈이 없었다. 2악장의 거대한 아다지오에 이끌려서 3악장 스케르쪼는 약간 늘어지게 시작하는 듯 싶었지만- 라이브에서는 그렇게 심하게 비판받을 일은 아니다. 음악가들은 사람이지 미리 입력한 그대로 감정을 조절해서 연주하는 재생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바로 한 악장 안에서 뒤로 갈수록 긴장과 집중력을 회복해냈다. 4악장에선 듣는 우리가 집중력이 떨어졌는데, 아무래도 평일 일과를 다 마치고 이틀 연속 공연관람은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었던 모양.

 

***

 

돌이켜보면 연주는 2005년이 가장 좋았고, 2008년은 2005년보다, 2011년엔 2008년만도 못했고, 이번엔 지난번과 비슷한 수준, 더 나빠진 것 같진 않다. 이번에 처음 베를린필을 들은 사람이라면 세상에 지금도 이렇게 잘하는데 2005년엔 그럼 얼마나 잘했다는 말이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사실'이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현의 섬세함을 너무 잃은 것- 여러가지 의미일 수 있는데, 음색도 두께만, ‘글래머’만 너무 강조하는 사운드로 변한 느낌이고, 또 마치 거대한 바이올린 한개로 연주하는 것처럼 음 하나가 끝날 때까지 파트의 모든 구성원들이 집중해서, 부드럽게 '종료시키고', 다시 다음 음이 시작되는, 음과 음 사이의 간격까지 미세하게 통제하던 그 조직력은 딱히 '반대급부' 없이 상실되었다: 현악기는 손과 도구(활)을 써서 소리를 내기 때문에 소리를 곱게 내기 위한 이런 극단적인 통제가 가능은 하지만,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숨을 쉬지 않으면 결국은 노래도 자연스럽게 들리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카라얀이- 그리고 어느 정도는 아바도 역시- 음악이 ‘차갑다’는 느낌, 평가를 받는 이유중에 하나가 바로 이 현이 자연스럽게 숨쉬지 않는, 인공미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기한 '반대급부'라면 인공미 없는 자연스러움일텐데, 지금은 소리가 더 자연스러워진 것은 별반 없고 그냥 예전보다 거칠어졌을 뿐이다. 

 

최근 내한하는 오케스트라들을 보면 수준을 잘 유지하고 있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같은 예외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는 미국이나 유럽이나 결국은 지휘자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퇴보한 것이 시차를 두고 영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일류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늘 지난 세기에는 지휘자들을 과도하게 '스타'로 만들었고, 독재자가 있어야 오케스트라가 잘된다는 것도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하는 것 같은데, 둘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야구는 감독이 아니라 선수가 하는 것이고 꼭 독재를 하지 않아도 '형님 리더십'으로 명장이 된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잘 나가던 팀이 바닥으로 추락했을 때, 명감독이- 혹은 메이저리그라면 명단장이라도- 없이 선수들끼리 알아서 팀을 재건할 수 있을까? 손뼉도, 아니 심벌즈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