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전시 review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 2.28/3.1

이현욱 2013. 3. 3. 14:30

 

   아마도 올해 내한이 예정된 오케스트라들 중에서 이것이 상반기의 가장 중요한 공연이었을 것이다. 이유는 하이팅크(Bernard Haitink)/피레스(Maria João Pires)라는 지휘자/협연자 조합 때문이다. 오케스트라의 기량 혹은 이름값만 본다면 하반기(11월) 공연이 예정된 베를린필은 말할 것도 없고, 2.6/7일간 이미 공연을 마친 시카고심포니나 4월 공연이 예정된 뮌헨필이 더 나을 수도 있지만 하이팅크는 무려 36년, 피레스는 17년만의 내한이었다. 무티(Ricardo Muti)의 건강악화로 시카고심포니/뮌헨필 공연을 모두 지휘하게 된 로린 마젤(Lorin Maazel)도 분명 좋은 지휘자지만, 한국에 너무 자주 와서 본의 아니게 ‘희소가치’가 떨어졌다. 물론 지갑이 넉넉하거나 공짜표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좋은 음악에 ‘희소가치’ 같은 개념은 적용이 안되겠지만, 문화생활 예산을 잘 쪼개써야 하는 음악팬들에겐 의미가 있다...

(i) 프로그램
2.28: 브리튼(Britten) ‘네 개의 바다’ 간주곡(Four Sea Interludes)
         모차르트(Mozart) 피아노협주곡 17번(in G Major K.453)
         베토벤(Beethoven) 교향곡 7번(in A Major Op.92)

3.1: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2번(in B-flat Major, Op.19)
       브루크너(Bruckner) 교향곡 9번(in D minor)

(ii) 리뷰
2.28:

Britten; 거창하게 말하면 ‘관현악의 표현기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쉽고 정직하게 말하면 뭔가 이전에 듣지 못했던 새로운 소리를 들려주는 게 있냐고 한다면, 바그너(Wagner)나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드뷔시(Debussy)에서 들을 수 있는 것 외에 뭘 더한 게 있는지 의심스러운 작품. 그렇다고 음악의 내용이 별 게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음악 분위기? 그나마 전체 15분, 4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평균 4분 미만 정도의, 너무 지루하지 않은 길이인 것이 미덕.
Mozart; 피아니스트 Pires는 역시 자기만의 독특한 음색을 갖고 있었다. '옥구슬이 은쟁반에 구르는 듯하다'는 표현이 있지만, Pires의 소리는 쟁반 위에서 그냥 구르는 것이 아니라, 톡톡 튀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음 하나하나가 톡톡 두드러지면서도 고왔다. 다만 음악의 내용, 스토리에 있어서 1,2악장은 '모범적인(exemplary)’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연주, 그 이상은 아니었고 가장 좋았던 것은 마지막 3악장이었다. 각각의 변주곡들은 모두 깔끔하게 처리가 되었고, 음악은 생기를 찾았다. Mozart의 협주곡보다는 소나타나 환상곡(fantasy)같은 독주곡이, 내용이 복합적이기보다는 단순하고 생기발랄한 레퍼토리가 더 잘맞는 연주자가 아닐까하는 느낌은 들었지만 이런 것은 한 두번의 연주를 듣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LSO)가 들려준, 제1바이올린의 여리고 부드럽고 ‘달달한(mellow)’, 산도(acidity)보다는 당도(sugar)가 더 높은 음색이 아마도 이 교향악단의 본령일 것이다.

Beethoven; 1악장은 무난하게 출발했지만 가장 감정적으로 내용이 풍부한 2악장에서 하이팅크의 '중도'는 약간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이 악장은 아주 무겁고 장중한 ‘marcia funebre(장송행진곡)’일 수도 있고, 혹은 간결한 그냥 ‘알레그레토(allegretto)’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이팅크/LSO의 연주는 아주 드라마틱하고 강력하지도 않았고, 아주 간결하고 절제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주 서정적이지도 않았다. 음악의 흐름은 3악장이 진행되면서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고, LSO의 집중력은 마지막 4악장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우리는 3악장이 좀더 빠르게 휘몰아치고 4악장은 보다 여유를 가지고 장중하게 템포를 잡는 것을 선호하지만, 이 해석도 충분히 말이 되는 것이고, 특히 4악장에서 미친듯이 휘몰아치는 와중에도 하이팅크는 현의 각 파트의 밸런스를 잘 유지했다. 하이팅크는 LSO의 현에, 특히 3,4악장에서 ‘acidity’를 요구했는데, 곡의 특성상 어쩔 수 없었고 오케스트라는 최선을 다해서 반응했지만 역시 귀에 좀 거슬렸다. 이 악단에 베를린필처럼 톡 쏘면서도 모가 둥근 그런 소리까지 기대하는 것은 약간 무리일 것이다.

앙코르(encore)는 멘델스존(Mendelsshon) 극부수음악 “한여름밤의꿈”(incidental music to “A Midsummer Night’s Dream”) 중 스케르초(scherzo)였다. 이 곡은 진짜 ‘마에스트로(maestro)’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가 좋아해서 여러 차례 녹음했다. Toscanini 버전은 현의 탄력있는 리듬감이 압권인데, 이날 하이팅크-LSO의 연주는 호흡이 느긋하고 유려한 스타일이었다. 늘 무대에 서는 직업연주자들도 긴장과 떨림은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앙코르를 연주할 때 음악이 더 자연스럽고 편안한 경우가 많은데, 이날 런던심포니의 연주도 이 scherzo에서 가장 그러했다.

3.1:

Beethoven; 피레스의 1,2악장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모범적인’ 연주. 다만 3악장 론도(Rondo)는 어제와는 반대로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고, 생기있다기보다는 약간 조급하게 처리되는 느낌이 더 강했다. 그래도 피레스만의 독특한, 쟁반 위에 튀는 톤의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Bruckner; 아마도 이날 전체의 하이라이트는 3악장 Adagio였다. 하이팅크/LSO는 1,2악장보다 3악장에 훨씬 많은 리허설 시간을 할애했음이 틀림없다. 앙상블이나, 시작부터 현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질 자체가 확연히 차이가 났다. 하이팅크가 상임이었거나 충분히 리허설을 할 시간이 많았다면, 1,2악장도 더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2악장은 부분부분 노래를 만들어내는 곳은 있었지만, 앙상블이나 각 파트가 만들어내는 소리의 질이 베를린필(같은 9번)이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8번)가 예전에 내한해서 들려준 수준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반면 이 3악장은, 여전히 연주 자체는 베를린필이 당연히 더 낫지만, 브루크너에 별로 정통하지 못한 선장(Simon Rattle) 밑에서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더 '노래'가 나오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음악이 좋았다. 더 마음에 감동을 주는 연주를 고르라면 우리는 단연 이쪽을 택하겠다.

(붙임; 간단한 총평)

LSO; 최근 얀손스(Mariss Jansons)가 한번씩 함께 내한했던 콘서트헤보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비교한다면 역시 관이나 현이나 모두 열세인데, 아쉬운 점이라면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 사이에 기량차가 현저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다른 악단과의 비교와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오케스트라의 등급을 한등급 낮추는 요인이다. 강점은 제1 바이올린의 반응성이 아직 살아있는, 지휘자가 ‘노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악단이라는 것이다.
Haitink;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의 제1지휘자가 된 것이 1959년, 우리 나이로 서른 한 살이었다(하이팅크가 ‘공동’상임 딱지를 뗀 해에 네 살 어린 아바도는 아직 지휘콩쿨에 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하이팅크의 출세가 얼마나 빨랐던가 알 수 있다). 카라얀, 클렘페러, 뵘, 요훔같은 거장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던 시절. 동년배라면 한 살 어린 카를로스 클라이버(1930~2004)와 로린 마젤이 있고, 사실상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손을 댄 모든 레퍼토리에서 하이팅크보다 뛰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늘 최고의 악단들과 함께 작업을 했고, 녹음도 많이 남겼지만 늘 상대적으로 묻힐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클라이버가 세상을 뜬지 10년이 다 되어가고, 마젤의 ‘forte’는 20c 이후의 음악이라고 본다면 아마도 이제 와선, 베토벤/브루크너에 관해선, 거의 마지막 권위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Pires; 아마도 이날 연주를 들은 사람들 중에 혹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연주 좋았는데, 피아노 잘 쳤는데 왠 시비?’라는 반응이 나올 것인데, 그것도 옳은 말이다. 비교의 ‘기준’이 무엇이냐의 문제- 지금까지 나왔던 최고수준의 모차르트/베토벤 해석과 비교했을 때 단지 ‘모범적’이었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선 에디슨의 축음기발명은 연주자들에겐 저주 혹은 재앙인데, 레코드에 있어서는 ‘피아니스트들의 신전’에 들어가 있는 고인들과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음반들을 뛰어넘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해도-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해석들과 ‘다르면서’, 대등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버전을 내놓을 수 있는가? 웬만한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세트는 다 갖고 있다는 컬렉터가 아니라면, 굳이 피레스의 녹음이 새로 나온다고 했을 때 그것을 사야 하느냐, 추천해야 하느냐- 아마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녹음이 아니라 라이브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언제 다시 내한할지는 모르겠지만, 티켓값이 너무 비싸지만 않다면, 피레스 리사이틀은 ‘강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