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전시 review

국립중앙박물관 회화실 교체전시

이현욱 2013. 5. 2. 19:51

비정기적으로 교체되는, 국립중앙박물관 회화실 교체전시이다. 4.27일 현재 걸려있는 그림들. 2층의 북측이 서화관인데 크게 서예실/회화실/불교회화실로 나뉘어 있고, 회화실은 다시 주제에 따라서 풍속화/인물화/산수화/화훼영모/궁중장식화&민화, 5개의 방으로 구분된다. 

 

I. 풍속화

● 평생도(단원); 홍이상이라는 사람의 평생도. 초가건 기와집이건, 산이건 나무건, 어떤 인물군이건 모두 탁월하고, 폭마다 배경산수와 인물군을 가득 채워서 그렸지만 단원의 구도에는 짜임새가 있다. 보존상태가 안 좋은 것이 흠. 진열장에 바짝 붙어서 들여다봐야 할 정도로 희미한 부분이 많다.

● 농촌풍경/출문간월(김득신); 둘다 김득신 작품이지만, 화풍은 완전히 다르다. 농촌 풍경은 우리가 익히 연상하는 풍속화, 담채와 채색의 중간쯤 되는, 약간 짙은 채색에 자리짜기, 길쌈 등등의 풍경에 개,닭,소들까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반면 '출문간월'은 개짖는 소리를 듣고 나가보니 오동나무 가지끝에 걸린 달을 보고 개가 짖더라는, 시정(詩情). 주제에 적합한 수묵화인데, 오동잎만 먹색이 짙고 인물이나 초옥은 간결하다. 좋은 대비가 되는 전시.

 

II. 인물화

● 전 김장생초장; 관복의 흉배로 봐서 손자인 김영택의 초상일 수도 있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전신상이 아닌 반신상. 표정이 살아있다. 좋은 작품.

● 이이장초상; 작자미상이지만 조선후기 초상화로 S급 작품이다. 관복의 풍성한 볼륨감이 특히 뛰어난데, 이명기외엔 이만큼 그린 것을 보지 못했다.

 

그외 중앙의 작은 진열장엔 초본이 4점 있는데, 모두 볼 만하다.

 

III. 산수화

● 하경산수도(이인문); 바위가 ‘촉촉’하다. 이런 느낌을 낼 수 있다면, 최고의 테크니션이다. 전체적으로 농담조절 탁월한데, 원경의 먼 산은 은은한, 엷은 푸른색, 그 앞에 바위는 특히 묵색이 짙다. 이인문은 수묵화나, 같은 담채화라도 색채가 일정한 그림보다는, 이렇게 색채로 포인트를 확실히 준 작품이 낫다.

● 송하보월도(전 이상좌); 역방향으로 날카롭게 꺾인 소나무나 격한 정서표현은 남송 마원의 화풍. 안 좋게 말하면 '모방에 그쳤다'고 할 것이고, 좋게 말하자면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이상좌의 그림은 모두 전칭작이라고 하는데 진짜건 모작이건 그림 자체는 대가의 솜씨가 맞아 보인다. 보존상태가 아주 좋진 않다. 귀한 작품이니 언제든 한번 가서 봐야 할 것이다.

● 파교설후도(겸재); 매화를 찾아 눈덮인 다리를 건너가는, 당나라 시인 맹호연의 고사로부터 유래한 제목. 겸재하면 ‘진경산수’지만, 단순한 산수화가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작품. 겸재의 잘된 그림엔, 특유의 ‘sentiment’가, 정서가 있다. 눈쌓인 풍경의 묘사도 간략하고 나귀도 사람도 단순명료하게 그려져 있지만. 스토리가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림에 감정을 담을 수 있는, 담을 줄 아는 화가. 

● 설중행려도(김명국); 역시 눈덮인 날 길 떠나는 풍경. 인물이나 산수나 모두 탁월하다. 사립문을 짚고 배웅하는 동자의 표정도 살아 있다. 그러나, 겸재 그림에서 느껴지는, 묘한 미스터리(mystery)에는 약간 미치지 못한다. 겸재와 김명국 사이에 아주 약간이라도 ‘클래스(class)의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비.

● 정문입설(겸재); 정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집을 찾았다가, 스승이 눈감고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 문앞에서 무릎이 눈에 잠길 때까지 기다렸다는 고사를 그린 것. 그대로 크기만 조정해서 엽서를 만들었으면 싶은, 아취가 있는 소품이다.

● 사공도시품첩; 당말 사공도의 시 이론서 "이십사시품"을 모티브로, 원교 이광사가 원문을 적고 옆엔 겸재의 그림이다. 전시교체할 때마다 한 폭씩 넘어가는데 스타일은 대동소이하다. 한시에 무지하더라도 그림과 글씨 자체로 역시 분위기가 있는 좋은 소품.

 

그 외엔 사계산수도병8폭(지우재 정수영); 이름을 보지 않고 그림부터 보면 약간 애매한,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작품. S급 화가의 것으로 보면 좀 범작에 속하겠지만, 이름값이 그보다 낮은 화가의 것이라면 상당한 솜씨다. 계절별로 2폭씩인데, 근경에 냇가, 중경에 안개 아스라이 낀 마을을 그린 4번째 폭과, 황량한 겨울산을 묘사한 8폭이 특히 좋다. 중앙의 진열장에 있는 윤여립의 작품도 전체 6폭 중 4폭인데, 좋은 소품. 들어가자마자 입구에 있는 사계산수도(6폭)도 겸재의 가장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산이나 바위나, 전체적인 정취가, 겸재의 팬들에겐 볼만하다.

 

IV. 화훼영모화

● 호응박토도(심사정); 매가 토끼를 잡아 누르고 있고, 아래 위로 까치와 꿩이 그려져있는데, 모두 표정이 살아있다. 특히 명이 경각에 달린 토끼의 표정이 압권인데, 공포에 질려있다기보다는,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하는 순진무구, 그 자체다. 오히려 주변에서 보고 있는 까치, 꿩들이 더 놀라거나 겁먹었다. 극적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더 현실적인 이런 대비는 범인이 생각해내긴 힘들다. 산수화 단독으로는 언제나 2% 부족한 싱거움이 있는 심사정이지만, 배경산수로는 충분한 것 이상으로 훌륭해서 흠잡을 데가 없다. 산수화도 많이 그렸지만, 심사정의 최고걸작품은 언제나 이 화훼영모 장르에 있다.

● 모견구자도(이암); 새끼 3마리를 거느리고 있는 어미개를 그렸다.  어미개나 엎드려 자고 있는 새끼의 표정에서 화가의 관찰력이 드러난다. 수종을 알 수 없는 나무 그늘도 장면에 적절하다.

● 고목우도(전 김식); 제목 그대로 고목과, 소들을 제외하면, 푸른 산과 나무들은 윤곽만 짐작이 되고, 나머지 배경은 휑하다. 하지만 전시설명대로, 전체적으로 어우러져서 묘한 정취를 낳는다.  이암의 개/변상벽의 고양이/김식,김시의 소/남계우의 나비, 영모화 계통에서 화가이름-동물 조합이라면 이 정도일까?

● 묵죽도 3점(이정); 신죽은 잎이 무성하고, 고죽은 잎이 떨어져 섬세한 잔가지들이 드러난다. 잎 하나, 잔가지 하나가 모두 기가 넘친다. 소품이지만 묵죽에선 조선 최고대가의 작품.

● 홍매도/매화도(조희룡); 이외에도 묵죽/묵매도 7폭까지, 3점이 조희룡의 작품이다. 글씨나 그림의 다른 장르는 스승인 추사의 스타일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를 받지만 매화만큼은 자기 스타일이 있고, 특히 화려하게 채색된 매화 그림은 볼 만하다. 들어가자마자 입구에 있는 홍매도가 그림이나 배경의 글씨가 가장 잘 되었고, 매화도는 붉고 흰 점으로 표현된 매화가 멀리서 보면 점묘화를 연상시키고 또 여러 폭에 걸친 크기에서 오는 쾌감이 있다. 채색이 없는 수묵화는 필선의 기가 조금 부족하기 때문에 밋밋한 느낌이 있고, 특히 묵죽은 상기한 이정의 작품과 비교해보면 수준차를 확연히 알 수 있다.

 

 그 외엔, 매화도/연화도(전기); 그냥 봐도 범상한 스타일이 아니다. 연꽃과 연잎이 하나는 윤곽만, 하나는 몰골만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만 우리는 전기의 그림들은 개성은 있으되 품이 떨어진다고 본다.

 

V. 궁중장식화 & 민화: 이 방에는 이번 교체전시에는 별로 볼 만한 것이 없다.

 

 

***

지난 교체전시들에 비해서 전시작품 수가 좀 줄었다. 가운데 진열장을 걷거나 2점 걸던 곳에 한 점이 걸려있다. 교체주기를 더 정규적으로, 빈번하게 바꾸려는 것인가? 아님 단지 작품 선정상의 문제인지, 혹은 그저 일감을 좀 줄이려는 것인지? 이것은 두고보면 알 일이고...

 

하지만 지적해야 할 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 주기적인 교체전시인데 도대체 언제부터 언제까지 하는 건지 알기가 너무 힘들다. 대만 고궁박물원 홈페이지에는 서화관 교체전시들은 전시품 목록은 물론 주요작품 이미지까지 다 올라온다. 물론 고궁박물원하고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은 가용한 인적, 물적 자원의 규모에서 비교대상이 아니다. 구체적인 수치를 확인해보지 않아도 한번 대만에 가서 그쪽 차려놓은 것을 보면 우리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잽이 안된다'는 느낌이 바로 확 온다. 그러나 가용자원이야 어찌 되었건, 전시를 주요 기능으로 하는 박물관에서 지켜야 할 기본은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검색창에 대고 쳐도 잘 안 나오는 박물관신문에 게재하면 무슨 소용인가? 그 정도 답변으로 면피를 할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관행을 올바르게 고쳐야 한다. 최소한 박물관 홈페이지 공지사항이나 "전시마당" 섹션 첫 화면에 이번 교체전시가 언제부터 언제까지고 주요작품은 뭐다,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게 올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