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적벽도 연구초(3/3)
(자, 드디어 이 그림의 하이라이트인 인물화 부분을 더 자세히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우선 인물 부분만 확대한 이미지를 다시 보고 시작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이미지출처; 이뮤지엄(http://www.emuseum.go.kr))
3. 인물 부분
인물화 부분에서 이 작품의 연대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흥미롭게도 '노출'이다. 위에서 보다시피 누가 보더라도 이 그림의 인물화에서 가장 특징적인 캐릭터는 한쪽 어깨부터 가슴팍이까지 완전히 드러낸- 심지어 턱수염과 잘 어울리는 풍성한 털까지 묘사했다- 사공이기 때문이다. 근데 여기서 잠깐,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사실 이 '이상한 느낌'이 우리로 하여금 이 긴 글을 쓰도록 만들었다.)
왜냐? 서양 문명은 인체의 아름다움에 탐닉했던 희랍을 뿌리로 삼았기 때문에 그림도 누드가 기본이지만, 동양화에서- 혹은 적어도 중국/한국 고전미술에서- 이 정도 노출이 허용되는 장르는 (i) (너무나도 당연한) 춘화 외엔 (ii) 도석인물화- 예를 들자면 불교가 더운 인도에서 왔기 때문에 복식 특성상 어깨나 가슴이 노출이 되는 경우가 있겠다- 그리고 (iii) 서민생활을 묘사한 사실적인 풍속화, 이 3가지 정도뿐이다. 한데 이 그림은 명백히 소동파의 '전적벽부'를 소재로 한 고사인물화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해당이 안된다. 이 그림을 보고 전혀 이상함을 못 느꼈다면- 사실 우리도 이 그림 세 번 아니면 네 번은 본 것 같은데 의심은 이번에야 들었다- 우리 문화가 이미 서양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노출 축에도 못 끼니까 당연하게 보이는 것이다. 서구 문명의 세례를 전혀 안 받은 조선 양반이 이 그림을 봤을 때 보일 수 있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반응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아마도 이런 투였을 것이다:
"근데 동파 선생 옆에 저 사공놈은 뭐야? 웃통은 왜 벗고 있어, 점잖지 못하게?"
비록 신분이 천한 사공일지라도 풍속화가 아닌 고사인물화 장르에서, 특히 적벽(부)도처럼 문학성 짙은 작품에서 이런 과감한 '체모 노출'은 자주 보이는 예가 아니다- 이런 그림은 처음부터 수요자가 글줄깨나 아는 양반들이다. 여럿이 모여서 그림 구석구석 가리켜가며, 상응하는 '전적벽부' 구절을 외워가며, 폼잡고 감상하셔야 되는데 '전적벽부' 원문에는 언급조차 없는 단역인 사공을 이렇게 그려놓으면 눈에 거슬리고 흥도 깨진다. 겉으로 근엄한 사회일수록 속으로 춘화가 유행하는 것과는 경우가 다른 것이다.
미술사는 말로 하는 것보다 언제나 그림을 제시하는 것이 '물증'도 되고 이해가 쉽다. 고로, 이번에도 그림을 하나 보자는 것이다.
(이미지출처; 이뮤지엄(http://www.emuseum.go.kr))
위의 것은 단원의 '적벽야범'이다(1편 첫머리에 언급했었지만 전시는 이미 끝난지 오래되었으나 올초에 '적벽도'와 함께 나란히 걸려 있어서 비교하기가 좋았었다). 보면 이 그림엔 사공이 없는데 사진이 너무 뿌예서 잘 안 보일 수 있겠으나- 이미지가 너무 저질이라 죄송한데 박물관에서 제공하는 게 이거밖에 없다- 자세히 보면 아직 배가 다 안 나왔다. 즉, 절벽에 가려서 잘린 배 왼쪽 끝에 사공의 존재를 암시해놓은 것이다. 단원은 왜 이런 식의 처리를 했을까? 이유는 대략 3가지 정도로 추측해볼 수 있다. 첫째, 구도상의 이유다. 이 그림의 배는 '적벽도'처럼 좌측 최하단에 안정적으로 못을 박고 있는 게 아니라 어중간하게 화면 중간에 떠 있다- 이렇게 떠 있는 배에 '과적'을 하면 배가 뒤집어질 것 같이 보이지 않겠는가? 반대로 이렇게 사공을 감추고 손님도 하나 줄이면 위아래로 툭 터진 화면구성과 가볍게 놓인 배가 잘 어울리게 된다. 둘째는- 이번에는 진짜로- 장로(張路) 스타일의, 화면 대각선으로 크게 반 갈라서 암벽 하나 그리고 나머지 반에 어부 실은 배 한척 후미가 바위에 가려서 잘려 있는 그림을 단원이 봤을 가능성이 되겠고, 마지막 셋째는 바로 이렇게 화면을 짜면 자연스럽게 사공을 감추면서 상기 '적벽도'의 '민망함'이 없는, '점잖은' 전적벽부도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우리가 말한 '조선 양반'의 정서에 딱 부합하는 셈인데, 실상 그 이유는 조선에 대한 우리의 '상식'이라는 게 보다 가까운 조선후기에 근거를 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튼 두 그림을 같이 놓고 봤을 때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적벽도'와 같은 그림은 임란 이후의 경직된 조선 사회에서는 그려졌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다른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은 우리의 '적벽도'는- 마치 지금의 우리처럼- 이런 처리가 눈에 거슬리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았던 개방적인 분위기의 사회에서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될 것이다. 송-원-명으로 이어지는- 즉, 조선 회화에 간접적으로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대인- 중국 왕조에서 송과 명은 적어도 겉으로는 근엄한 사회였고, 유목민 왕조인 원이 가장 개방적이었다. 그러니 일단은 원대 회화를 뒤져보는 게 가장 확률이 높을 것이다.
3.1 최경과 유관도
3.1.1 '소하도' 이야기
(이미지 출처= 소장처= 넬슨-앳킨스 미술관, 캔사스 시티)
위의 것은 원나라 화가 유관도의 '소하도'(劉貫道 消夏圖)이다. 화면 가운데 점잖아야 할 문사가, 그것도- 가솔들인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앞에 여자들을 놓고 적벽도의 사공처럼 한쪽 어깨와 가슴팍을 그대로 노출한 것이 보이시는지? 바로 이 정도 정서와 분위기라면, 적벽부도에서- 감히 동파 선생을 벗기면 이상할 테니까- 사공을 노출시키는 그림을 충분히 그릴 수 있을 것이다. 1 유관도 역시 '생몰미상'이고- 대략 13세기 후반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안전하다- 생애에 관한 신빙성이 있는 기록은 1279년에 쿠빌라이의 황태자의 초상을 그려서 ‘어의국사(御衣局使; 원대는 공식적으로 도화원이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받은 직위로 보인다)’로 임명이 되었다는 것 뿐이다. 사실상 '황실전속화사' 비슷한 지위에 있었던 셈인데, 다음해인 1280년에 쿠빌라이가 사냥하는 장면을 담은 출렵도를 그린 것이 유명하다. 남은 그림도 별로 없어서 우리가 알기로는 진품으로 믿을 만한 것은 상기 '소하도' 외에 막 언급한 대북고궁 소장 '원세조출렵도(元世祖出獵圖)'뿐이지만, 이 두 점만으로도 사실상 원대를 대표하는 인물화 최고수 중의 한 사람이다.
위 '소하도'의 주인공은 머리맡에 놓인 악기로 보아- 이 목이 긴 비파의 조선 이름은 월금(月琴)이고, 지금 중국에서 월금이라고 하는 것은 외려 원형에서 이탈해서 목이 짧다-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완함이라는 설도 유력한데, 그렇게 보면 더 재미있는 해석도 가능하다. "세설신어" '임탄(任誕)' 편에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일화가 전하기 때문이다: 2
완함이 자기 고모집의 선비족 여종과 정분이 나 있었는데, 완함이 모친상을 당하고서 아직 상중이었을 때 고모가 멀리 이사를 가게 되었다. 고모가 말로는 여종은 남겨두고 가마, 하고는 막상 떠날 때는- 아마도 집안의 창피거리를 멀리 떼놓으려는 목적으로- 이 문제의 여종을 데리고 갔다. 완함이 이 소식을 듣고 상복을 입은 채로 그길로 고모를 추격해서 마침내 여종을 찾아 나귀 한마리에 둘이 사이좋게 앞뒤로 나란히 타고 돌아왔고, 후에 여종이 아들을 낳았다. '오랑캐 여종'하고 이런 행각을 벌이고서야- 물론 미국의 '국부' 중 한 사람인 토마스 제퍼슨도 흑인(혼혈) 노예와의 사이에 애가 있었다- 세인의 구설에 오르지 않을 길이 없었다(혹시 그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시다면, 이름은 완부이고 글공부를 가르쳐서 나중에 동진의 고위 관직을 지냈다).
다시 그림을 보면 우측의 여인 둘 중에 보따리- 혹은 포대기?- 하나를 안고 있는 여인은 바로 이 선비족 출신 시녀를 은근히 빗댄 것 같이- 아니면 '본처'가 정면을 보고 있고 선비족 여인이 부채를 들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보이지 않는가? 근데 이쯤 되면 고지식한 성리학자의 눈으로 본다면 이 '소하도'는 춘화보다도 더 '못된 그림'이고, 거의 '불온 서화'에 해당한다. 사실 지금 남아있는 원대 회화를 보면 송대나 명대보다 일반적으로 더 '문란하다'거나, 그런 경향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한가지 이유는 바로 원대 화단의 혁신을 주도했던 문인화가들은- 관리건 사인이건- 속성상 이런 면에서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지배층은 관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화가들이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한 것이나 비슷한 결과가 된 셈이다. 그래서 이런 '표현의 자유'는 유관도나 그를 추종했던 대도의 직업화가들만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가지 이유는 이들이 그린 그림도 이후에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원말에 이미 화북지방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피폐했고, 하북성 출신인 유관도나 대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들의 명성도 같이 사그러들었다. 명이 들어서면서 다시 사회분위기가 근엄해진 다음엔, 정말로 그냥 '무명화가의 저질 그림'으로 보였을 거라는 이야기다. 어떤 의미에서 이 '소하도'는 정말 운좋게 살아남은 '생존자'인 것이다.
그리고 유관도의 이런 화풍은 물론 단순한 '노출을 위한 노출'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원대의 자연주의/사실주의 인물화풍을 대표하는 화가로 봐야 공정할 것이다. 위 '소하도'에서 주인공의 노출은 기실 여름의 폭염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원세조출렵도'의 쿠빌라이는 못생긴 데다 위엄도 별로 없어서 타고 있는 말과 복식이 아니면 황제라고 알아보기 쉽지 않다- 명대 황제 초상화들하고는 팔팔결 다른 것이다(명 태조 주원장을 이 '출렵도'의 쿠빌라이처럼 그렸다간 정말로 화가가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렸을 수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의 초상화도 ‘미화’를 좋아하지도 높이 치지도 않는다는 것인데,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같은 북방 유목민 계열의 'DNA', 미감의 차이 때문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적벽부'는 시간적 배경이 7월16일 밤이다- 음력 칠월이면 양력으로 8월 중순에서 9월 초순 사이이고, 적벽은 고사하고 위도가 더 높은 서울에서도 아직 한참 더울 때다. 아무리 강바람이 좋은 밤이라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노를 저어야 하는 사공은 당연히 웃통을 벗었을 것이다. 이게 장르가 (풍속화가 아니라) 고사인물화라고, 동파 선생이 옆에서 점잖게 옷을 갖춰 입었다고 해서 사공도 옷을 입혀놓는 게 과연 이치에 부합하는가? 유관도라면 당연히 아니라고 답했을 것이고, 여기 조선의 16c 그림이 똑같은 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중국에 남아있는 적벽부도 중에도 사공이 이 정도 수위의 노출을 선보이는 그림은 잘 없는데, 그 1차적인 이유는 '후적벽부'를- 이것은 배경이 석달 뒤인 음력 10월15일이다- 주제로 한 그림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지만, '전적벽부도'에서도 찾기 쉽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자기 검열'이건 남의 시선을 의식했건, 관행에 굴복한 그림들이 절대다수라는이야기다. 다시 한번 위 단원의 '적벽야범'이 묘수인 이유도 여기에 있으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 곧- 여름밤에 사공이 옷을 껴입고 있다는- '이치에 닿지 않는' 부분이 없이 조선 후기의 시대 정서에 반하지 않는 구도를 짜낸 것이다. 3
자, 그럼 이 '적벽도'의 화가는 이 유관도의 화풍을 누구한테 배웠을까? 일단 원-> 고려로 넘어가는 경로는 명확하다. 상기한 유관도의 출세작의 주인공인 쿠빌라이의 황태자는 바로 고려 충선왕의 둘째 외삼촌이 된다. 충선왕이 세자로 책봉된 후에 3년(1292~95)간 대도에 머물렀고, 미숙한 쿠데타를 일으켜서 잠시 왕위에 올랐다가 노련한 충렬왕의 반격을 받고 대도로 소환된 1298년 이후에는 주활동무대가 대도였으니 서화를 좋아했던 충선왕이 '황실전속화사' 유관도를 몰랐을 수가 없다- 이때 유관도가 살아만 있었다면 아마 불러다가 대면도 하고 그림도 주문했을 것이다. 곧, 조맹부/선우추의 글씨, 당체/주덕윤 같은 원대 이곽파가 유입된 것과 같은 경로인 것이다. 일단 유입된 이후엔 고려는 원래 풍속이 개방적인 나라였으니 위 '소하도' 스타일의 화풍이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적벽도'가 15세기 전기 그림만 되어도 논증은 이걸로 끝이다. 즉- 조선초에 아직 남아있었던- '고려의 유풍'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전편에서 봤듯이 이 그림은 주단 필법이 섞여 있는 16세기 것이기 때문에, 14세기 전반기 고려와의 사이에 15세기의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적벽도'가 갖는 가장 중요한 미술사적 의의가 발생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3.1.2 최경의 이야기
일단 15세기 조선에서 인물화의 대명사였던 화가는 바로 최경이다. '안견의 산수/최경의 인물'로 나란히 병칭되었던 인물이니, 15세기 후반/16세기 초기의 조선 화원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안견의 산수와 최경의 인물화를 공부했을 것이다. 한데 화풍을 논하기는 고사하고 최경의 그림은 지금 하나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최경의 화풍에 대해서 이공린/유송년을 배웠으리라는 언급이 있어 우리가 근원을 따라가봤더니 우선 전자는 박팽년의 유고에 안평대군이 새로 구한 이공린필 '삼소도'를 최경을 시켜서 중모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이 갖는 의미는 최경이 안평대군-안견 서클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실제 최경이 이공린이나 그 전칭작을 정확히 모사할 수 있었던 밑천은 아마도 왕진붕이나 그 문하생들의 것과 같은 원대 백묘화법을 마스터했던 데서 나왔을 것이다. '모사'하고 자기 '창작'은 또 스타일이 달라질 수 있어 단언하긴 어렵지만, '최경의 백묘인물화'는 실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4
다음으로 후자는 "고화비고"에 최경의 '채문희귀한도(蔡文姬歸漢圖)'라는 그림이 있는데 '유송년 등에 유사하다(似)'는 언급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사실상 최경의 그림을 보고 화풍을 기록한 유일한 자료이다. 유관도가 아니고 유송년이라... 근데 위 '소하도'가 1935년에 당시 소장자가 그림 속에 조그맣게 숨겨서 적은 '관도' 두 글자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바로 유송년의 전칭작이었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 기묘하지 않은가?
그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그림에 대해서 살펴보자면 이 '문희귀한도' 제재는 당나라 때 염립본이 그리기 시작했다고 전하지만 지금 남아있는 것은 남송 때 것부터 있고, 십중팔구는 ('진당 스타일'을 추구하는) 공필의 채색인물화로 그린다- 바로 딱 위 '소하도'와 같은 화풍이다. 부차적으로는 내용도 같은 부류로 묶을 수 있다: '문희귀한'이란 한나라 말에 채문희가 남흉노 좌현왕의 측실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조조가 집권한 후에 아버지 채옹과의 옛정을 생각해서 기꺼이 거액의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마침내 고향에는 돌아올 수 있게 되었지만, 이미 거기에 아이를 둘 낳아놓고 있었기 때문에 자식들하고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즉, '소하도'처럼 대략 위진시대 고사이면서 내용에 '드라마'가 있는 제재인 것이다. 그럼 남은 건 (i) "고화비고"에서 '유관도'가 '유송년'이 된 이유와, (ii) 최경 입장에선 '유관도'지 '유송년'일 수 없음을 밝히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그림이 없는 순수한 논증이기 때문에 논리는 더 정교해야 하고 배경까지 꼼꼼하게 다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분량은 길지만 차근차근 단서를 좇아서 한단계씩 나가면 어렵지 않다.)
먼저 (i)에 관해서는 상기 "고화비고"는 20세기 초에 간행된 일본 자료이고, 일본과 우리는 중국과 교류한 경로가 달랐다는 것이 요점이다- 일본은 조공무역을 할래도 무조건 일단 뱃길로 강남에 상륙한 다음에 북상하는 경로이니, 해로든 육로든 강남을 거칠 필요 없이 바로 수도에서 수도로, 곧 개경/한양-> 대도/북경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우리하고는 문화교류의 주된 창구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즉, 13c 말 이후로 고려나 조선에서 '중국'이라 함은 연경을 의미했지만, 일본에서 '중국'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언제나 교류가 가장 밀접했던 강남지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규나 유송년 같은 남송화가들은 일본에선 오랫동안 친숙한 이름이었고, 혹 가끔 법상(목계)나 안휘처럼 대륙에서 잊혀진 화가의 명성이 일본에선 잘 유지가 되고 작품도 더 많이 남아있는 사례를 볼 수 있는데 역시 강남 출신이거나 강남 지방을 근거로 활동했던 화가들이라는 게 공통점이다. 그러나 유관도처럼 하북성에서 태어나서 대도를 중심으로 활동을 했던 화가는 본토에서 잊혀지면 그걸로 끝이지 일본에서도 따로 알 길이 없으니, 이 사람들 눈에는 최경이 유관도 필법으로 그린 고사인물화는 유송년하고 비슷해보일 수밖에 없다- 그림은 좋고 명대 필법은 아닌데, 유관도를 모르면 원대 화가들 중에서는 적당한 이름은 못 찾겠고, 그럼 화풍이나 연대나 제일 비슷하게 때려맞출 수 있는 유명화가가 남송의 유송년밖에 없는 것이다(원대 그림이라도 아마 유송년의 아류가 아니겠는가?)- 바로 '소하도'가 유송년의 전칭이 된 것과 정확히 같은 과정이다.
(ii) 반면 15c 조선(과 최경)의 입장에서는 유송년은 배울 길도, 의지도 없었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데는 2가지 역사적 특수성이 작용한다. 첫째는 여몽전쟁이다. 어떤 미술품이든지 보통은 '현대 미술'일 때 가장 싸게- 이것은 1980년대 이후의 '스타 미술가'들에게는 적용이 안될 가망이 더 많겠다- 그리고 많은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 법이다. 임진왜란은 7년, 여몽전쟁은 1259년에서- 고려의 세자, 후일의 원종이 쿠빌라이를 찾아가서 강화를 성립시킨 해다- 잘라도 그 네곱배기 28년을 했고, 성을 함락한 다음에 불지르기 좋아하는 것은 왜군보다 몽골군이 더 심했다. 지금 고려 서화가 괜히 씨가 말랐겠는가? 고려가 배로 남송에서 직수입한 서화들은 이때 거의 다 없어졌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둘째는 이 전쟁이 끝나는 시점에 원과 고려의 특수관계와 중국미술사의 변곡점이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발생한다. 후자부터 이야기하자면, 조맹부(1254~1322)가 등장해서 진당 인물/청록산수와 이곽/동거, 사실상 북송대까지의 거의 모든 주요한 미술사조를 복고/융합의 대상으로 삼아서, 말하자면 '신미술'을 주창하고 나섰을 때 유일하게 배격의 대상이었던 '구미술'이- 딱 요즘 시쳇말로 '적폐'가 되겠다- 바로 남송원체화였다. 1286년에 조맹부가 원 조정에 출사하면서 이 조맹부식 복고주의가 강남에서 북상해서 대도를 완전히 점령하게 된다(남송원체화는 강남의 직업화원들에 의해서 '지역전통'으로 맥을 이어간다). 자, 13세기말/14세기초 고려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제 '컬렉팅'도 전후의 잿더미에서 다시 시작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중국에 가보니 이를테면 곽희의 산수, 문동의 묵죽은 여전히 평판도 높고 금/원대 모작이나 위작도 많이 돌아다니는데 남송화가들만 평판이 바닥에다 '시장에서 잊혀진 존재'인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14c 고려 컬렉션은 '현대 미술'인 원대 회화를 주력으로 해서 (아마도 주로 모작들 중에서 골라서 사들인) 북송 회화가 일부, 남송 회화 부류는 있다고 해도 극소수를 차지하게 되고, 15c 조선이 이걸 물려받게 된다- 이렇게 되면 15c 조선에 유송년 진적이 있기나 했는지 그것 자체가 의문인 것이다. 그림이 없는데 대체 뭘 보고 유송년 필법을 배운단 말인가?
한편 1314년에 고려 충선왕이 대도에 만권당을 차리고 이제현을 불러들인다- 삼한의 상왕이 중국 대륙왕조의 수도에 터잡고 '학술문화교류센터'를 차린 셈인데, 물론 충선왕이 쿠빌라이의 외손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기한 대로 1298년에 개경에선 아버지한테 밀려났지만 대도에서는 바로 원 황족들의 '이너 서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충렬왕이 아들한테 소박맞은 며느리(계국대장공주)를 이용해서 세자 자리도 뺏아보려고 끝까지 공작은 했지만, 순수한 고려 왕씨가 무슨 황실의 방계 혈족도 아닌 쿠빌라이의 진짜 외손자를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무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원 황위계승 분쟁에까지 깊숙히 개입하게 된 충선왕이 1307년에 원 인종을 도와 무종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우고 이듬해 심양왕으로 봉해진 다음엔 1320년 인종이 죽을 때까지 황제의 최측근 중 한명이었기 때문에- 곧 '실세'였다는 말이다- 만권당엔 원 조정의 명망 높은 인사들이 다 드나들었는데, 물론 그 중에 조맹부가 있었다. 이제현은 6년 동안 만권당에서 조맹부를 비롯한 대도의 문예 명사들과 얼굴 맞대고 서화에 관해서 토론을 할 수 있었으니- 깎아내리는 것 같이 들릴 수도 있겠는데, 추사 김정희는 연경에 6개월 다녀온 게 평생 자랑거리였고, 그 이전에 강세황은 늘그막까지 죽기 전에 중국에 한번이라도 가보는 게 소원이었다- 이제 대도의 미술에 관련된 모든 지식을 개경도 알게 된 것이다. 원/고려는 명/조선처럼 쇄국정책을 쓰지 않은 개방적인 나라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지식의 전파는 민간 무역이나 인적 교류를 통해서도 결국은 이루어질 수 있었겠지만 충선왕이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 '지름길'을 놓아준 것이다. 특히 조맹부(1254~1322)는 이때 여생이 8년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니, 충선왕이 아니었으면 고려 최고 인재가 사실상 원대 이후 중국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자기 입으로 자기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것을 직접 들을 기회는 없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래서 고려가 잿더미에서 문예의 복원을 추진하던 이 시기에 충선왕이- 고려를 위해서 정치적인 업적은 남긴 게 별로 없다- 수행한 이 '연결고리' 역할은 의미가 있는 것이고, 특히 고려말/조선초 미술사에서는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제현이 1320년에 과거시험관(지공거)를 맡아서 발탁해준 인물들 중에 이곡이 있었고, 그 아들이 바로 목은 이색이다- 부자가 모두 원나라에 가서도 최상위권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해서 2대가 원에서 관직을 지냈다. 곧, 두 사람 모두 최소 수년 이상 대도에서 생활하면서 원의 문물을 익혔다는 이야기다. 이색과 그 제자들이 이성계파 vs. 반이성계파로 갈라지고, 다시 그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수양대군파 vs. 반수양대군파로 갈라지게 되지만, 여말선초에 주요한 문인들은 관리든 사인이든 주류가 다 이 계통인 것이다- 그럼 그 사람들의 서화감상 이론이나 지식이 어디서 왔겠는가?(나중에 언제 기회 되면 이야기하겠지만, 15c 전기 조선의 원대 서화에 대한 지식과 평가는 원 당대의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모르는 게 있었다면 원4대가처럼 대도에 진출하지 않고 조용히 시골에 앉아서 그림 그리던 화가들 뿐이다- 연경 사람도 모르는 걸 한양에서 어떻게 알겠는가?)
안평대군이 송설체만 베끼고 조맹부식 미술사관은 몰랐다고 상정한다면 상식 이하의 발상이다. 그렇다면 15c 전기 조선에서 유송년은 그림이 아무리 좋아도 '복고'의 대상이, 지향해야할 목표도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도 아닌 것이다. 안평대군이 자기 예술세계를 확립하기 위해서 송설체를, 안견이 원대 이곽파를 연구했다면, 최경의 주된 인물화 연구자료도 충선왕/이제현의 대도 활동기 주변에 있었을 것이다. 1280~1320년 경에 대도에서 가장 황실의 애호를 받은 인물화가가 바로 오도자-이공린 전통의 백묘화는 왕진붕, 진당 복고를 지향하는 채색인물화는 유관도였다. 이것은 최경의 화풍에 관한 상기 2가지 기록에도 어긋남이 없다. 갑자기 최경 혼자 유송년이라면, '뜬금없다'가 바로 이때 적절한 표현이다.
결론은 최경이 유송년을 배웠을 확률보다는 유송년이 누군지 몰랐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다. 최경이 혹 유송년을 봤다면 아마 "고화비고"와 정확히 반대의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우와, 그림 죽인다! 화가 누구야? 유관도 형인가, 같은 유씬데?"
최경에 관한 가장 큰 수수께끼는 왜 그림이 하나도 안 남아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최경의 진적이 없는 것은 '임진왜란' 네 글자로 다 설명이 된다. 안견도 '몽유도원도' 한 점 뿐이고, '1:0'의 차이는 그냥 '운'이지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안견은 전칭작이 근 20여점이 있고, 심지어 안견이 은퇴한 이후에 최경에 이어서 도화서내 서열 2위였던 안귀생도 (실제로는 17세기 정도 작품으로 추정되는) 화조도 전칭작이 국립중앙박물관에 하나 남아있다- '안귀생인' 도장 찍어서 팔면 임란 이후에도 혹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성현이 "용재총화"를 쓸 때까지만 해도 15세기 화단의 '투톱'으로 찍어서 거명을 했고, (아래서 곧 보게 되겠지만) 안견의 후배면서 장수를 해서 안견보다 활동기간이 최소 20년이상 더 길었던 최경이 왜 전칭작 하나가 없을까?
만약 최경이 유관도식의 자유분방한 화풍을 구사했다고 가정하면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가설이 나온다. 곧- 아마도 선배 유관도처럼- 어느 순간 '검열'의 희생양이, 언급을 기피하는 화가가 되었다가 결국 잊혀졌다는 것이다(사실 서양에서도 사정은 비슷해서, 미켈란젤로가 '올 누드'로 그린 벽화를 교황이 바뀌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그의 제자가 '중요부위'에 잎사귀를 그려서 덮어야만 했다.). 마치 고려가요가 '남녀상열지사'라고 해서 개사를 하거나, 아니면 채록을 하지 않고 그대로 유실되게 놓아 둔 것이나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한 유추이지만 실제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지 보다 더 상세하게 추론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 최경의 영향력이 언제까지 지속되었느냐가 우리의 '적벽도'의 제작연대의 하한과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조선은 '일단은'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출발한 국가였다. 정치 이데올로기로 채택하는 건 상대적으로 쉬웠지만 사회/문화생활에선 오랜 관습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서 충돌을 빚게 된다('프리 섹스' 하던 사회에서 갑자기 애들한테 '순결 서약' 같은 것 받으려고 하면 그게 씨가 먹히겠는가?). 그래서 임진왜란이 중요한 것이 이런 큰 전쟁과 격변이 기존의 관습을 해체 내지는 파괴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경의 영향력이- 최소한 '비주류'로라도- 지속되었던 하한은 아마도 임진왜란이 발발한 때까지일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만약 우리의 이 가설이 옳다면, '적벽도'가 살아남은 이유는 그림에서 이곽파 스타일로 된 산수 부분이 차지하는 면적이 워낙 넓어서 안견의 전칭작으로 '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는 것이다. 1편 첫머리에서 우리가 이 전칭은 '단순논리'였을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최소한 이 그림의 산수 부분이 이곽파 계통이라는 것과 '안견=이곽파'라는 분명한 공식을 갖고 분류한 것이니 전연 근거없는 것은 아니고, 17세기 이후 구한말까지 어느 시점엔가 이 그림이 안견의 이름표 밑에 숨을 수 있게 해주는 데는 충분했을 것이다.
반면에 조선 전기를 더 '근엄했던' 사회로 보고자 하는 관점이라면 최경의 영향력이 16c초까지라도 지속되었을 수 있었을지- 이를테면 조광조 같은 사람이 위 '소하도' 비슷한 그림을 봤다면 얼굴 표정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 '적벽도' 같은 경우는 주수요층이 문인들이고, 이 시기 조선에서 문인이라 함은 다 성리학 공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보다 유효한 의문이 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1520년대 중반까지는 최경의 명성이 유지되었을 것이 더 유력해 보인다.
그 근거는 바로 최경의 '장수'이다- 실록에 최경이 거의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기록이 1490년에 '노인' 자격으로 가자가 되어서 당상관에- 물론 명예직으로- 올랐다는 내용이다. 즉, 1490년엔 확실히 최경이 생존해 있었고 아무리 사회분위기가 변해도 유명 화가의 흔적을 지우는 데는 적어도 한 세대는 걸렸을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추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1470년 이전에 태어난 세대는 최경을 만난 적도 있고, 직접 그림 그리는 것도 본 사람들이었다는 것이고, 이런 생생한 기억을 단번에 통째로 지우는 데는 적어도 '마녀사냥'이나 '종교재판소' 정도는 필요한 것이다- 조선의 경우는 아마도 '임진왜란'이 그 역할을 했을 것이다. 5
(그리고 위 실록의 기록으로부터 최경이 최소한 1421년 이전에 출생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조선 사회에서도 '노인' 자격으로 대접받으려면, 최소 '인생칠십고래희'라는 그 고희는 되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도- 왕이 아닌 한은- 70세부터였다. 한데 문관들도 칠십이 되면 자동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최소요건'이 칠십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최경의 신분이 낮았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1490년에 팔십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즉, 할머니(정희왕후) 때부터 왕실의 총애를 받았던 노신에게 성종이 내린 팔순 선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추측이 옳다면 최경은 일러도 1411년생일 것이고, 덤으로 경력상 최경보다 약간 선배로 나타나는 현동자 안견의 생년도 최소한 1411년 이전이었으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록에서 성종조 전후에 문관이 아니면서 최경처럼 '노인으로 가자'된 사람들 중에 족보가 추적이 되는 사람들이 있으면 모아서 당시의 나이를 평균 내면 가장 합리적인 추정치를 얻을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니, 능력되는 분들은 한번 해보시기 바란다.)
3.2 정두서미묘와 '홍농도호도'
자, 이젠 마지막으로 간략히 이 인물화의 필법을 들여다볼 차례이다. 위에서 이 그림의 '정서'가 유관도로 대표되는 원대 자연주의/사실주의 화풍을 받아들인 최경풍이라는 것은 충분히 논증했지만, 필치는 '소하도'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가 1편에서 인용한 70년대 논문부터 이미 지적된 것과 같이 이 그림의 의습선, 곧 옷자락 묘사는 '정두서미' 묘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출발점이다.
일단 '정두서미묘(釘頭鼠尾描)'란 문자 그대로 '못 대가리+쥐꼬리' 묘법이다. 요점은 옷자락 주름을 묘사한 선이 '굵기'가 변한다는 것이다. 즉, 시작 부분은 마치 못 대가리처럼, 굵은 꼭지점을 찍듯이 시작해서, 끝부분은 꼬리가 가늘어지면서 마치는 것이다. 전하기로는 오대북송대 무동청이 개발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많이 보이는 것은 남송대 풍속화이다.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위의 것은 남송 화원화가 이숭의 '시담영희'(李嵩 市擔嬰戱)이다. 보면 등장인물들마다 '적벽도'와 비슷한 수준으로 심하게 주름진 정두서미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원래는 이 ‘정두서미’가 원래 촌백성들의 거친 옷감으로 된- 동시에 잘 구겨지는- 복식을 묘사하기 위해서 개발된 수법이라는 것이다.
한데 이 묘법이 명초쯤 가면 고사인물화용으로도 쓰이게 된다. 이젠 남송대부터도 이삼백년 세월이 흘러서 '정두서미묘= 송대 수법= 고풍'이니까, 그림에 이 묘법을 쓰면 '옛날 사람'이라는, 즉 시대배경이 옛날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새로운 코드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명대 궁정화원들이 고사인물화를 그릴 때, 대진 세대인 선덕화원의 예단의 '빙방도'(倪端 聘龐圖)-> 유준(15세기 후반 활동)의 '납간도(劉俊 納諫圖)'-> 주단(16세기 초)의 '홍농도호도(朱端 弘農渡虎圖)'까지 일제히 정두서미를 들고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순서대로 연대가 내려올 수록 묘법의 '떨림' 내지는 '지저분함'이 점점 더 심해지는데- 여기에 오위(1459~1508)의 영향력이 작용했다고 보는 것도 매력적인 가설이긴 한데, 정말로 입증할 수 있을지는 우리는 잘 모르겠다- '적벽도' 수준과 맞아떨어지는 것은 바로 16c 이후의 작품들이다.
위의 것은 상기 주단 '홍농도호도' 중의 인물 부분이다(그림 전체는 북경고궁 홈페이지에 가서 화가 이름으로 검색하면 확대가능한 페이지를 제공한다). 아래 '적벽도' 국부 이미지와 비교해보면 둘 사이에 해상도 차이가 좀 있지만 유사성은 알아볼 수 있을 것이고, 화면 가운데 옆얼굴들끼리, 곧 '홍농도호도'의 보따리를 받쳐들고 있는 시종과 '적벽도'의 한손으로 퉁소를 쥐고 있는 손이 서로 살짝 닮아 있다- 그렇다, 다시 한번 주단인 것이다. 이 그림은 결국 산수건 인물이건 16c초 주단 세대의 필법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한양이곽파'와 '북경이곽파' (2) : 결국- '계당시의도' 때에 이어서- 다시 한번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주단이었을까? 답은 아마도 마침 그때(16c초)가 조선화단이 북경을 쳐다볼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일단 인재가 없었다- 16세기 주요 화가인 김시(1524~93)는 안견하고 최소한 백살 이상 차이가 난다. 그리고 16세기 전반기의 가장 중요한 화가로 기록되어 있는 이상좌(?~?)는 사노비 출신으로 발탁이 된 인물이다- 역으로 말하면 그만큼 도화서에 인재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천재 계보'는 끊어졌고, 고려에서 물려받은 원대 화적을 연구해서 재해석하는 작업도 15c 전기 선배들이 다했다(우리가 위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여몽전쟁 탓에 그 위로는 남은 유산도 별 게 없었다). 곧, 화단의 내적동력은 다 소진했는데 쇄국정책을 쓴 조선에선 유일하게 외부세계로 뚫린 창이 북경이었다. 그럼 영감을 얻을 데가 북경화단 외에 달리 어디가 또 있을까? 이렇게 보면 16세기 조선화단에서 '명풍'의 유행은 거의 필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그때 북경에서 가장 핫한 화가 중 한명이 주단이었다. 동시에 주단 개인적으로 조선이 좋아할 요소들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전편에도 언급했듯이 주단은 죽석도를 잘 그렸고, 소위 '화훼죽석'이라는 화목이 정식교육 받은 화가들한테는 기본이기는 한데 궁정화원이면서 대 그림으로 이름을 날린 경우는 그렇게 흔치가 않다. 소위 '송죽매 삼청'에 해당하는 제재들이 기원은 중국이라도 고려 때 이후로 애호하기로는 한반도가 대륙보다 더했으니, '대를 잘 치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화원'은 조선 사람들에게 꽤 호감을 샀을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기한 대로 주단이 이곽파였다는 사실이다. 안견에게 물려받은 유산에 뭔가 변화를 주고자 하는 시점에, 우리랑 '같은 과'면서 하는 게 뭔가 다른 주단식 이곽파 필법은 당시 조선의 이곽파들에게 안성맞춤인 도구였던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그림 중에는 간송미술관 소장 '추림촌거'가 가장 주단 필법에 가까운 작품이다. 이 그림은 구도 자체가 딱 '성무+당체(= 주단식 이곽파)'이고, 그림 상단의 산에 가로로 날카롭게 찍은 태점이 '오리지널' 성무가 아니라 주단식 필법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기엔 거의 '빼도 박도 못하는' 경우다. 이 그림은 원래 18세기 조선 수장가 김광국의 "석농화원" '습유'편에 포함이 되어 있던 것이고, 그 '별집', 곧 "화원별집"이라고도 부르는 화첩 안에 들어있던 것이 바로 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설천도'이다- 산석의 표현법이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김광국이 '같은 필법'이라고 인지하고 안견으로 전칭시킨 것이고, 물론 둘다 이 '적벽도'와 마찬가지로 16세기 전기에 제작된 것이다. 결국 이 '적벽도'/'추림촌거'/'설천도'와 같은 작품들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한양이곽파와 북경이곽파의 만남'이다. 14세기 후반에 각각 왕조교체기의 혼란을 겪고 나서 15세기에 문물을 재정비할 때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던 두 화단이 다시 동기화하기 시작한 것이다.(그리고 이 패턴은 얄궂게도 조선이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통의 단절을 겪은 후에 다시 한번 반복될 운명이었다...) |
결국 이 '적벽도'는 산수나 인물이나 15세기 최경의 히트작을 철저하게 16세기초 명대 궁정회화, 특히 주단의 필법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데는 지금까지 고증한 것 외에 한가지 근거가 더 있는데, 그것은 다시 한번 적벽(부)도라는 제재가 갖는 특성이다. 북송대 이래로 끊임없이 그려진 '스테디셀러'들 몇 가지 중에서 아마도 중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청명상하도일 것이고- 북송 장택단/명 구영/청 (궁정화)원본까지 연대별로 대표작들이 이어지면서 필법과 세부내용이 시대에 따라 변주되어가며 끊임없이 그려진다- 이 적벽부도나 소상팔경도는 중국과 조선에서 같이 인기가 있었던 주제에 속한다. 지금 안견파로 분류되는 16세기 전기 소상팔경도들이 15세기 안견의 원본을 16세기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라면, 이 '적벽도' 역시 마찬가지 과정으로 제작된 '최경파' 그림인 것이다- 급하게 강가의 암벽 대신 산수화에서 산을 따오고 세부 필치, 곧 준법이나 인물화 묘법은 모두 최신 유행하던 북경식/주단식으로 바꾸었지만, 산수 부분의 주봉을 화면 상단 중앙에 놓은 구도, 인물 부분의 절묘하게 삿대에 의지해서 자세를 튼 사공의 역동적인 자세, 자연주의/사실주의적인 과감한 노출, 독특하게 악기를 2개 포함시킨 구성은 모두 1470년 이전에 (최경에 의해서) 확립된 것이다. 곧 철저한 '15세기식 화면구성+16세기초식 세부필법'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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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결론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i) 이 '적벽도'의 가능한 제작연대는 가장 넓게는 1501~1592년이고, 좁혀 본다면 16세기 전반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하게는 1506~1525년간이다. ① 주단이 정덕연간(1506~21)이 되어야 확고부동한 명성을 얻게 된다는 사실 ② 주단 화풍 수용의 가장 초기적인 단계로 보이는 그림 내용 ③ 문인들을 주 수요층으로 하는 제재 특성상, 연대가 더 내려갈 수록 성리학적 규범이 일상생활을 규제하게 되는 조선사회에서 고려의 유풍이 남은 그림이 향유되기 어렵다는 것 등이 그 근거이다.
(ii) 이 '적벽도'는 15세기 중엽 최경의 원작을, 제작 당시 유행했던 16세기초 북경 필법(주단)을 입혀서 재해석한 현존 유일의 '최경파' 작품이다. 최경의 진적이 남아있지 않은 탓에 위에서 유관도의 '소하도'를 이용한 복잡한 '삼각 논증'을 펼쳐야만 했지만 '최경'의 것이 아니라 최경'파'의 작품임을 논증하는 데는 이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믿는다.
사공이 '섹시한' 적벽(부)도도, 사공이 없는 적벽(부)도도, 중국에서도 그리 흔하게 볼 수 없다. 중국에 비하면- 면적과 인구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턱없이 남은 그림이 적은 우리 나라에서 이런 범상치 않은 유형들을 한 전시에 같이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 조상들의 개성과 예술적 재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이 '적벽도'는 보존상태가 썩 좋지는 않지만 필력이 우수하고, 16c 초 이전으로 연대를 확정할 수 있는 그림 중에 이만한 크기가 되는 것이 국내에 별로 없다는 데서 나오는 희소성과, 절파 화풍 유입의 초기 단계를 보여주는 양식사적 중요성을 같이 갖고 있다. 이 정도만으로도 우리가 보기엔- 중국 그림 베낀 것이 창피하다는 식의 유치찬란한 쇼비니즘(chauvinism)이 아니라면- 보물급의 가치는 충분한 그림이고, 무엇보다도 초상화를 제외하면 15세기 인물화풍의 흔적을 담고 있는 거의 유일한 작품이다.
후일에 안목이 있는 학자가 나온다면, 이 ‘적벽도’를 빼놓고 조선전기 회화사를 논하지 못할 것이다.
Fin.
- 설영년, 조력, 상강, "중국미술사 3, 오대부터 송원까지"(다른생각, 2011) pp. 320~322 참조; p. 321에 위에 우리가 구한 것보다 조금 더 상태가 좋은 도판이 있다. [본문으로]
- 이성희, "꼭 한번 보고 싶은 중국 옛 그림- 중국회화명품30선"(로고폴리스, 2017) pp. 186~199 참조. 이 그림의 내용에 관해서 우리가 찾은 한글로 된 가장 자세한 설명이다. [본문으로]
- 한데 이 그림 아이디어는 좋은데 필력이 단원 기준으로는 약하기 때문에 원본이 아니라 모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를테면 절벽을 올려다보고 있는 소동파의 자세가 무슨 목디스크 환자처럼 어정쩡하게 되어 있는데, 이런 처리는 '단원풍속도첩' 중의 잘된 그림에서 볼 수 있는, 3초 안에 다 그린 것 같으면서도 선들이 이루는 각도의 조화가 완벽한 그 솜씨가 아니다. 아마도 원본에도 절벽과 배의 윤곽선들과 꼭대기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조응시키기 위한 어떤 의도적인 형태의 왜곡이 있었던 것을 잘못 베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 안휘준, "안견과 몽유도원도"(사회평론, 2009), p. 187 주석 70; 아래 '채문희귀한도'는 p. 188 주석 71 참조. [본문으로]
- 성종실록 244권, 성종 21년 9월 20일 기사 2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사이트(http://sillok.history.go.kr/)에서 한자이름 '崔涇'으로 검색하면 최경에 관련된 기록들을 원문과 함께 볼 수 있다. [본문으로]
- 소상팔경도 계통에서 이 '적벽도'처럼 15세기식 구도에 가장 충실한 것이 바로 일본 유현재 소장본으로 알려진 것이다. 박해훈, "한국의 팔경도"(소명출판, 2017) pp. 74~5 도판 참조; 이 여백이 없는 빽빽한 구성은 중국애들 쓰는 표현으로 '치밀한 포국이 북송식'이라는 관념을 갖고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다만 이 정도 해상도 도판으로는 15세기 후반 필법인지 16세기 초기 것인지 판정하기는 어렵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