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전시 review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적벽도 연구초(2/3)

이현욱 2018. 6. 19. 22:30

(전편에 이야기했던 대로 '각주' 내지는 '보충설명'에 해당하는 내용부터 언급하고 시작한다.)

 

(i) 우선 우리는 설명의 편의상 작자미상의 '계산추색도'-> 마원의 '화등시연도' 순으로 설명을 했지만, 두 그림은 제작연대가 선후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 소장처의 공식 견해는 남송 조기지만, 일단 '위조의 흔적'이 발견된 작품은 끝까지 의심을 해봐야 옳기 때문이다. 혹 가짜를 보물로까지 지정했겠느냐는 분도 있겠지만, 그런 사례는 한국에도 있고 찾아보면 다른 나라에도 또 있을 것이다- 작품의 진위 문제는 동양이든 서양이든 피할 수 없는 '뜨거운 감자'다. 다만 남송 후기~원대 작품 정도만 되어도 우리의 논지에는 큰 무리가 없다- 첫째로, 만약 그림의 순서가 바뀐다면 옆으로 '수평이동'을 하기 시작한 그림들이 '변각구도의 압력을 받아서' 여백이 더 넓어졌다고 해석해서 주지에는 큰 변화가 없다(오히려 이쪽이 16c 전반기 조선 그림들을 이해하는 데 더 편리할 수도 있다). 둘째로는,  우리가 직접 본 그림 & 조선 그림과의 유사성, 이 2가지 요건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작품을 찾는 게 어렵지 이 '계산추색도' 자체가 소조의 '산요누관'처럼 대체불가능한 경우는 아니어서 '수평이동'을 하면서 여백이 더 넓어지는 다른 남송/금대 그림으로 대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편에도 언급했지만 우리가 본 기억으로는 필력은 남송초기 기준으로는 아주 뛰어나진 않고, 명대 이하의 위작이라면- 즉 명대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무명으로 사라진 불운한 천재'라고 부를 수도 있는 실력이긴 한데 정확한 것은 전문가가 감정을 해봐야 알 것이다.

 

(ii) 우리의 설명대로라면 마원이 굉장한 '혁명가'로 들릴 수도 있는데- 우리의 주제에 필요한 큰 줄기 위주로 '가지치기'를 좀 했기 때문이다- 보다 엄정하게 이 주제를 취급하려면 곽희와 소조 사이에 이당이 들어간다. 이당은 북송의 마지막 대가인 동시에 '월남'한 이후 남송화원의 전범이 되면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중요한 화가고, 기준작인 '만학송풍'(李唐 萬壑松風)은 여전히 정면대칭구도를 취하고 있지만 그 안의 공간구성이 곽희 '조춘도'와는 달라서 남송대 구도변화의 단초를 보여주게 된다. 대륙이나 대만에서 나온 책들 가운데 '청계어은도(清溪漁隱圖)'도 예시하거나 언급하고 있는 경우를 한 3종을 봤는데- 나온지 좀 오래된 책들을 번역했다는 게 이유일지 모르겠다- 이당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배제하는 것이 낫고, 우리가 알기로는 이것이 소장처인 대북고궁의 판정이다. 대개 소장품의 진위가 문제가 되면 학술 수준이 낮고 권위주의가 팽배한 사회일수록 거의 '내로남불' 수준의 '내진남가'- 즉, 내 건 무조건 진짜, 남의 건 되도록 가짜라는- 주의로 일관하는 기관들이 많고, 반대로 좀 '개명한' 나라의 기관들은 고증이 잘된 것들은 인정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느 쪽이건 '물건 주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대개는 믿어주는 게 좋다(물론 사람이 하는 일에는 늘 실수가 있기 마련이라, 얼마 전에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가짜라고 홀랑 팔아먹은 그림 한점이 밖에 나와서는 루벤스의 진품으로 판정이 나서, 판 가격에 거의 0이 하나 더 붙은 추정가로 도로 경매에 나오는 바람에 구설수에 톡톡히 올랐다는 뉴스가 나오긴 했다.). 이당의 또다른 전칭작인 '강산소경(江山小景)'의 경우는 역시 소장처인 대북고궁의 최신 견해로는 필법이- 이당은 고사하고- '수제자' 소조보다도 차라리 염차평(1160년대 도화원에 들어갔다고 보기 때문에 대략 마원보다 한 세대 정도 앞선다)에 근사하다고 보아서, 대략 그 세대 남송화원의 작품으로 본다. 이것도 사실확정이 어려운 부분인데, 여튼 마원이나 하규가 '혁명가'가 맞더라도 이당- 소조- 남송화원 선배세대를 통해 진행된 변화의 토대 위에 서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지적될 수 있다.

 

(iii)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유념해야 할 점은 구도 이론이라는 게 본질적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해온 방식과 같은- '진화론'이 아니라 '생물의 분류'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즉, 논리적 일관성을 갖고 유형을 나누어 정리할 수 있으면 좋은 이론이지, 구도란 본래 '옳고 그름'이나 '순서'를 따지는 문제와는 거리가 좀 있는 것이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이를테면 그럼 곽희 이전엔 소조의 '산요누관'식 구도가 없었겠느냐는 질문이다- 우리의 견해로는 그런 그림이 안 남아있다면 종이나 비단이 못 견뎌서 그림이 없어진 것이지 실제로 안 그려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왜냐? 수학이 만국공통어인 이유는 숫자 개념이나 사칙연산 뿐 아니라 대각선/삼각형/원(호) 같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기본 도형들도 인류의 머리 속에 거의 '내장'되어 있는 범주이기 때문인 바, 이 기본 도형들은 산수화의 제재인 자연을 볼 때 사람이 그것을 통해서 형태를 인지하는 '렌즈' 역할을 하게 되고, 다시 그것을 화폭에 옮길 때는 형태를 구현하는 수단이 된다. 즉, 구도란 어떤 의미에선 그냥 이런 기본 도형들을 이용한 조합인 것이고, 그러므로 그 어떤 구도든, 언제 어디서 누구든 그릴 수 있는 개연성을 늘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도를 특정한 시대/연대와 결부시키려면 그림의 제재, 제작형태 등등과 같은 요소들과 결합해서 '대세'를 이루는, 전형적인 유행이 있었던 경우라야 한다. 북송대는 (적어도 지금 남아있는 가장 신빙성이 높은 작품들로만 봤을 때) 긴 세로축에 압도적인 주산을 중심으로 자연 그 자체를 정면대칭구도로 그려넣는 양식이- 횡권의 경우도 대개 주산이 북한산 보현봉 일대처럼 옆으로 길게 퍼지는 형태로 정면대칭구도를 이룬다- 전범이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북송-> 남송/금대의 구도변화를 설명하는 데 우리가 채택한 '구도의 분류'가 가장 적합한 설명방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그리고 우리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산수화의 경우에는 연대를 위아래로 더 연장해도  '중심축'과 '각도 내지 시점'을 결합해서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으면서 가장 포괄적인 '구도의 분류' 방식으로 유용하다.).

   자, 이제 우리의 주제인 '적벽도'로 돌아갈 차례다.

 

2.2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되풀이한다'

   일단 요점은 이 그림의 구도는 산수 부분의 모델인 '계당시의도'와 다르다는 것이다. 우선 아래 이미지에서 산봉우리가 화면 중앙에서 툭 튀어나오고 상단으로 갈수록 조금씩 오른쪽 뒤로 물러나면서 좌상단에 여백을 넓게 남기는 것을 확인해 보기 바란다.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앞절에서 우리의 산수화 구도론 설명을 이해한 사람은 이제 이 '계당시의도'의 구도가 전형적인 '변각구도+α' 형태라는 것을, 즉 변각구도의 여백에 '뭘 이것저것 더 그려서 채워넣은'  방식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헷갈리게 하는 요인은 원말명초 이곽파 양식을 보여주는 1사분면의 우람한 산봉우리지만 이 작품은 기본중심축이 대각선이다. 이제 드디어 이 글의 주인공 격인 적벽도를 볼 차례이다.

 

(이미지출처; 이뮤지엄(http://www.emuseum.go.kr))

 

   차이가 보이시는지? 대진이 뒤로 후퇴시킨 최상단의 산봉우리 한층을 이 화가는 반대로 앞으로 잡아빼서 그림에 '지붕'을 만들었다. 완전한 창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본으로 삼은 그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조작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능한 한 가지 해답은 이 화가의 구도감각이 화면 상단 중앙에 주봉을 놓는 방식에 완전히 젖어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차근차근 그림을 살펴 보면 이렇게 '지붕'이 덮여서 왼편에 여백도 별로 없는 상태에서 다시 그림의 '어깨'에 해당하는 부분에 작은 봉우리를 배치하는 것은 불가피했는데, 일단은 우하귀에서 출발하는 대각선을- 즉, '오픈카'에 갑자기 지붕을 올리긴 했지만 원래 모델은 어디까지나 변각구도 계통인 것이다- 살려야 했기 때문이지만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화면 상반부는 '삼각산' 모양으로, 약간 비대칭인 '유사 정면대칭구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아마도 화가로선 이 점 때문에 이런 처리가 더 만족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대각선도 살리고 '삼각산'도 만들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화면 좌하단 끝에 삿대에 의지해서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서있는 사공이- 인물군 중에서도 한눈에 먼저 들어오기 때문에 주연보다 더 빛나는 조연처럼 보인다- 그림 우측 상단에서 시작되는 대각선을 받으면서 화면 아래쪽 절반은 'X'자 구도를 완성한다. 혹은, 이 사공을 왼쪽 하단 꼭지점으로, 말하자면 화가가 '텐트'를 치기 위해서 박은 ‘대못’으로 본다면 전체적으로 큰 '오각형'을 형성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 그림의 구도는 유사정면대칭구도와 변각구도가 더해진 특이한 '하이브리드' 구도이다. 기본 변각구도로 된 그림을 모델로 출발했지만, 결국은 ''자 모양으로 균형잡힌 구도를 만든 것이다. 이 화가의 이와 같은 구도감각은 안견의 전칭작들 중에 '사시팔경도'보다도 차라리 '설천도'에 가까운- 혹은 더 이른- 것이고, 이는 이 그림의 제작연대를 15c 후반까지 상정해볼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왜냐? 지금 남아있는 안견의 전칭작, 혹은 소위 '안견파' 그림들은 설천도-사시팔경도-소상팔경도의 순으로 (화면의 중심축이 옆으로 수평이동을 하면서) 여백이 넓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여기에 '순서'를 개입시킬 수 있는 이유는 15세기 조선화단에서 산수화의 대명사였던 현동자 안견이 곽희로부터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다. 안견의 유일한 기준작인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을 몇 개 장면으로 나눠서 이은 스토리가 있는 그림이기 때문에 가로로 긴 형태로 되어 있지만 그 안의 공간구성방식과 가장 유사한 것은 곽희 '조춘도'이다. 혹 대칭이 안 맞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우측 절반은 도원을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특수한 고안으로 부감법을 썼기 때문이다. 좌반부는 정면구도로 되어 있어 안견이 통상적인 세로축 형태의 산수화는 정면대칭구도로 그렸으리라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이것도 상상이 잘 안된다면 '대조군'이 되는 그림을 하나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 경우는 '몽유도원도'와 대략 비슷한 크기에- 둘다 가로 1m가 조금 넘는다- 유사한 양식으로 지목된 원나라 화가 이승의 '불도오비구도'라는 그림이 있다[각주:1](가끔씩 이름이 여럿인 그림들이 있어서, 이 작품은 다른 논문[각주:2]엔 '설법산수도'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고, 구글엔 '유마설법도'(李升 維摩說法圖)로 검색해야 그나마 국부 이미지라도 나온다- 이것은 우리는 실물은 고사하고 질 좋은 도판도 못 본 그림인데, 다행히 소장처의 '온라인컬렉션'에 포함이 되어 있다.).

 

(이미지 출처= 소장처= 클리블랜드 미술관)

 

   보면 전체적으로 유사성이 보이지만 구도 측면에선 특히 좌반부는 '몽유도원도'와 그림 생긴 게 완전히 다르다- 즉, 이 그림은 처음부터 '대각선으로' 흐르는 물을 기준으로 화면이 반분되어 있어 변각구도에 이곽파가 융합된 원대 양식을 보여준다. 또다른 측면에서는 원대 세로축 산수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하양안(一河兩岸)' 구도 중 물이 비스듬하게 흐르는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에 여기서 이 화가가 통상적인 산수화를 그릴 때 어떤 구도를 좋아했을지를 익히 짐작할 수 있고, 동시에 각 장면을 정면구도로 그려서 옆으로 더한 '몽유도원도'의 화가가 긴 세로축에 그림을 그렸을 때 곽희의 '조춘도'식 구도를 택했으리라는 것도 논리에 비약이 없는 추론임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몽유도원도'의 이미지를 보면서 차이를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이것은 워낙 유명한, 쉽게 찾을 수 있는 그림이기도 하고, 또 위 '유마설법도'와 구도를 한눈에 비교할 수 있게끔 대략 해상도를 맞춰서 넣었다).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보시다시피- 당장 물이 '가운데 산을 끼고' 양 옆에서 '위아래로' 흐르지 않는가?- 이 그림엔 변각구도의 흔적이 잘 안 보인다. 연대상으로 보나, 그림 세부에 보이는 원대 이곽파식 필법으로 보나, 안견이 변각구도를 못 봤거나 몰라서 이렇게 그렸을 확률은 '제로'이다. 현동자도, 최대 후원자였던 안평대군도 모두 조맹부식 '복고주의'를 이념으로, 특히 산수화에 있어서는 북송(곽희)의 재현을 목표로 해서 의도적으로 선택한 결과다. 그리고 이렇게 일단 화면 중앙에 주봉을 놓는 구도가 전범이 되고 나면 안견을 추종하는 후학들이 변화를 주기 위해선 그것을 옆으로 미는 것이 택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경로다. 비유하자면 넥타이 유행과 같은 것이다- 폭이 좁은 넥타이가 한동안 유행한 다음엔 다시 넓어지는 것 외엔 별달리 방도가 없다(그래서 넥타이는 보관이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에 깨끗하게 잘 걸어만 두면 유행이 돌아오면 다시 매면 된다). 즉, 결과적으로 우리가 앞절에서 설명한 북송-> 남송대로 넘어가면서 나타나는 산수화 구도변화가 다시 반복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되풀이한다'는 이 절의 소제목의 의미이고, 우리가 전편에서 '산수화 구도론'부터 시작한 이유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설명을 주의깊게 읽었다면 최소한 이 '적벽도'의 경우에 구도분석이 왜 중요한지는 이해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조선은 연대가 더 늦기 때문에 정면대칭구도의 유행만 끝나면 사시팔경도/소상팔경도/(절파의 자극을 받은) 변각구도가 동시에 함께 다시 나타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이 '적벽도'처럼 심지어 변각구도로 된 모델을 '유사 정면대칭구도'로 뜯어고치는 그림의 제작연대는 그것이 대세였던 시기에 최대한 가깝게 위치시키는 것이 당연히 더 합리적인 추론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림의 다른 요소들은 어떤 연대를 가리키느냐, 과연 구도분석에서 얻은 이 가설과 부합할 것이냐가 될 것이다.

 

   여기서 잠깐 '16~17세기 제작설'의 근거로 보이는 논거[각주:3]를 살펴보고 지나가자면, 첫째로 이 '적벽도'의 화면 우상단을 다 차지하고 있는 산봉우리가 명대 초기 원체화에 뿌리를 둔 후기 절파양식이라는 것과, 둘째로는 화면 우하단의 '오른쪽에 삼각형으로 돌출한 절벽'이 장로나 장숭의 화풍이라는 것, 크게 2가지이다(더 근본적인 문제는 과연 '계당시의도'가 대진의 것이 맞느냐, 즉, 모델 자체가 후기 절파 작품이 아니냐는 것이 되겠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따로 다루겠다.).

   우선 첫째는 해당 논문에서 상기 '뿌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시한, 오른쪽 측면에 치우쳐서 '크게 돌출한 바위'가 있는 예시 도판인 곽순의 '청록산수도'(郭純 靑錄山水圖)가 공교롭게도 적벽도로도 불리는- 이미지 파일을 한번 보고 싶다면 이것은 아예 'Guo Chun Red Cliff'로 검색하는 게 가장 빠를 것이다- 그림이기 때문에 왜 착오를 일으켰는지 이해는 가는데, 문제는 우리의 '적벽도'의 화면 우측을 다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위'가 아니고 그냥 '산봉우리'라는 것이다. 또, 이 페이지를 브라우저에서 한 50% 정도로 축소해서 위아래로 스크롤을 좀 해보면 흥미롭게도 화면 전체에서 산이 차지하고 있는 면적이 '계당시의도'와 거의 같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그림은 그냥 모델에서 충실히 따왔을 뿐, 무슨 '더 진전된 형태'도 아니고 후기 절파 양식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다.

   이제 그림을 다시 보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적벽(부)도는 기본적으로 강변에 바위 절벽이 솟아있는 '강가 그림'이다. 근데 이 그림은 화면 상단엔 첩첩이 산봉우리가 솟아있고 우하단도 원래는 계곡의 폭포가 시내로- 모델 그림의 제목이 괜히 '계'당시의도겠는가?- 떨어지는 장면인 것이다. 해서 화가가 분주하게 작업을 해서 모델에서 숲이나 누각, 다리 같은 경물들을 다 걷어냄과 동시에 물이 차지하는 면적을 늘리고, 폭포도 수원을 표시하는 화면 우중단의 것은 지우고 우하단의 것만 남겨서, 마치 하천의 지류가 암벽을 타고 흘러내려서 강물의 본류에 합류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결과적으로 볼 만한 '강가 그림'을 그려내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이것은 말하자면 영화로 치면 바닷가에서 실사로 찍은 것이 아니라 풀장에서 세트 놓고 찍은 버전인 것이다.

화가가 굳이 이런 방식으로 작업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유력한 설명은 이 작가가 절파 그림을 아직 많이 보지 못했는데 달리 베낄 모델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아마도 주문을 이렇게 받았을 것이다:

 

   "소동파 선생의 전적벽부를 최신 유행하는 '북경스타일'로 그려주시오."

 

   이렇게 단정지을 수 있는 이유는 필치로 보아 이 '적벽도'의 작가가 훈련받은 화원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요구를 받았건, 아니면 스스로  '기대수요'를 의식했건, 수요 측의 요구가 없이 맘대로 그리라고 하면 본인이 창작을 해서 그리든, 아님 하다 못해 위 '몽유도원도'의 기암을 베끼든, 직업화원이 암벽이 서있는 강변을 그릴 줄 모른다는 게 어불성설인 것이다. 아마도 이 화가는 '계당시의도' 하나를 가지고 '북경스타일' 산수화도 그리고, 이 '적벽도'도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돌려막기'의 흔적이 보인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이 그림이 중국이 아니라 조선에서, 그것도 아마도- 명나라 그림에 대한 수요를 제한된 공급이 아직 따르지 못했던- 16세기 초 이전에 그려졌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함의한다. 북경의 화원이 이를테면 대진이 그린 적벽(부)도의 모작은 쉽게 못 구한다손 치더라도, 적벽(부)도에 가져다 쓸 절파 필법으로 된 모델 그림을 못 구했다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는 상황이 잘 없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최소한 16세기 중엽이면 그동안 유입된 명나라 화적도 쌓인 축적이 있고, 무엇보다 조선 화단 안에서 절파 화풍이 확산되기 때문에 국내에서 '자체 생산'한 중국 화풍의 모델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 마지막으로 그럼 상기 둘째, '오른쪽에 삼각형으로 돌출한 절벽'은 어찌 되는가? 역시 무관하다. 장로나 장숭의 특징적인 화풍으로 지목되는 그림들(이를테면 장로의 '어부도'(張路 漁父圖)나 '관폭도'(觀瀑圖; 영문이름은 'A Scholar Contemplating Waterfall'))은 모두 '넓은 바위면'을 노출해서- 기암의 가장자리에 껏해야 나무 몇 그루나 덩쿨들 정도 달려 있다- 흑백의 대비든 뭐든 표현효과를 가져오는 기법이다. 반면 위에서 보다시피 이 적벽도의 우하단엔 폭포가 양갈래로 흐르고, 여러 종류 나무가 한 가득이다. 바위는 그 사이에 가려서 눈 크게 떠야 보이는 ‘배경’일뿐이다. 서로 부류가 다른 표현양식이고, 그렇다면 두 작품 사이에 남는 유일한 공통점은 모양이 '삼각형'이라는 것 뿐인데 우리가 위에서 구도론을 설명할 때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삼각형 같은 ‘기본 도형’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이것도 못 믿겠다면 도판을 하나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실물로 봤건, 도판으로 봤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림 중에 이 '적벽도'의 우하단 1/4을 차지하고 있는 '삼각형' 절벽과 외관상 그나마 가장 유사한 것은 사실 이 작품이다.

 

 

   구름과 물줄기로 경계지어진, 이 ‘오른쪽에 삼각형으로 돌출한 절벽’이 어떻게 보이시는지? 그렇다면 과연 이 그림은 누구의 것일까? 정말로 장로나 장숭의 것일까, 아니면 대진의 것일까? 혹은 그도 아닌 제3의 인물인가?(정답은 다음편에... 약올리는 게 아니라 그림을 볼 때는 언제나 스스로 '생각'이라는 걸 하는 습관을 들이라는 의미이다.)

To be continued...

  1. 안휘준, "안견과 몽유도원도"(사회평론, 2009) pp. 152~153 참조 [본문으로]
  2. 홍선표, "조선회화"(한국미술연구소, 2014) pp. 130~131 참조 [본문으로]
  3. 한정희, "동아시아 회화 교류사"(사회평론, 2012), pp. 174~79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