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전시 review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적벽도 연구초(1/3)

이현욱 2018. 5. 23. 22:51

(‘소동파, 조선이 사랑한 선비’라는 제목으로 지난달 중순(~4.22)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서화관 주제전시실에서 진행했던 전시에 전적벽부를 배경으로 한 적벽도가 2점 나란히 걸려 있었다. 하나는 단원의 '적벽야범'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이 글의 주제가 되는 작품- 원래 '전 안견, 15c 후반'으로 표시가 되어 있던 그림인데, 이번에 보니 '작가미상, 16~17세기'로 바뀌었다. 박물관에서 아무 근거없이 적진 않았을 거고, 누군가는 논문을 썼으니까 의거해서 했을 터인데 도서관에 들를 일이 있어 키워드 검색을 해봤더니 의외로 나오는 게 별로 없었다- 한데 읽다보니 각주로, 참고문헌으로, 무슨 고구마 줄기 캐듯이 이어져서 나중엔 시중에 나와 있는 한국/중국미술사 책들을 쌓아놓고 뒤지게 되었다는 이야기...)

 

1. 작품 개요

   화가가 안견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도 예전부터 거의 확실했지만 제작연대가 16~7세기라면 200년 세월이니, '언제 그렸는지 우리도 모르겠어요'라는 이야기나 진배가 없다. 하지만 정말로 이 그림 안에 단서가 그렇게도 없을까? 실제 그림을 찬찬히 하나씩 뜯어보자는 이야기다.

   일단 그림이 보존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화면 오른쪽 암벽과 폭포를 그린 부분은 군데군데 많이 지워졌다(그림 좀 본 사람은 아마도 좌하단의 인물 부분이 가장 눈에 들어올 것인데- 대충 봐도 필력이 좋기 때문이다- 인물화 쪽에 관해서는 아래 3장에서 따로 이야기할 것이다.). 산수 쪽에서 세세히 판독이 가능한, 실력을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은 ‘수지법’, 곧- 우리 눈으로 센 걸로는- 대략 5종류 정도의 수목의 가지와 잎을 묘사한 부분 뿐이다. 상기한 '적벽야범' 외에 마침 전시실 반대편에 '김홍도필 서원아집도(6폭 병풍)'이 걸려 있어 (앞뒤로 왔다갔다 하는 수고를 좀 하면) 두 작품을 수지법 부분만 비교를 해볼 수 있었는데, 표현 양식이 달라서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선에 실린 힘이 이 그림이 더 좋았다. '서원아집도'와 이 정도 차이를 느끼게 할 수 있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상당한 실력이다. 사실 애초에 이 그림이 안견의 전칭작이 된 것도, '웬만한 16c 산수화보다 필력이 좋고- 또 외견상 그림도 많이 낡아 보이고- 15c까지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이 시기 산수화의 대명사가 누구냐? 당연히 안견밖에 없다.' 이런 단순논리였을 것이다. 한데 제재 특성상 그림 안에서 산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그렇지 이 작품의 장르는 엄연히 소동파의 전적벽부를 주제로 한 고사인물화고, 사실 15c 조선에서 인물화의 대명사는 문헌에 의하면 안견이 아니고 최경이었다.

   다음으로 산수 부분에 관해서 꼭 알아야 하는 기본 정보는- 이미 70년대 나온 논문부터 지적이 되어 있다[각주:1]- 이 '적벽도'가 중국 요녕성박물관 소장의 대진작 '계당시의도(戴進 溪堂詩意圖)'와, 특히 '1사분면', 즉 우상단 1/4은 거의 그대로 따온 것 같이 닮아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로부터 이 그림이 절파 화풍이 조선에 유입된 이후에 그려졌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대진은 절강성 출신이지만 선덕연간(1426~35)에 북경에 가서 궁정화원이 되었다가 참소를 받아 쫓겨난 다음에도 적어도 1442년 경까지는 북경에서 살았다고 추정한다. 해서 이론상은 이 시기 이후에 언제든 조선에서 북경으로 사행을 간 사신들이 대진 내지 대진풍의 그림을 입수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최소한 1450년, 즉 15c 전반기까진 조선이 대진 포함 어떤 명나라 화가의 영향을 받기는 고사하고, 누구의 이름이라도 알고 있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조선초는 아직 고려말의 유풍이 남아있던 때이고 회화도 중국 것이라면 명이 아니라 원대 회화의 영향이 이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반면 17c 후반으로, 즉 윤두서(1668~1715)/겸재 세대 이하로 가면 이런 화풍 볼 가망이 줄어든다. 그렇다면 같은 200년이라도 16~17세기보다는 1470~1670년경이 보다 유력한 추정일 것이고, 필력만 봐선 '심증'으로는- 필법이나 양식상으로 뒷받침만 할 수 있다면- 1470~1592년, 혹은 그 이내로 더 좁히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이제 더 구체적인 단서를 찾아볼 단계다.

 

2. 구도 분석

2.1 송대 산수화 구도론

   자, 이 절은 우리의 주제인 '적벽도'의 구도 분석을 위한 예비 지식으로 먼저 중국의 송대 산수화 구도 변천사를 살펴볼 것이다(이번에 시중에 나와있는 중국미술사 책들을 몇 종 펼쳐 놓고 해당 내용을 찾아 보니 하나 같이 설명이 애매모호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원래 '미술'에 관심이 있었지 미술'사'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미술사 책을 보고 그림을 배운 것이 아니라 그림을 보고 미술사를 배웠기 때문에 예시 도판만 봐도 대충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짐작이 갔지만,그림을 안 보고 교과서로만 먼저 배우는 학생들은 전부 가다가 삼천포에 빠지기 딱 좋게 되어있더라는 것. 여기 최대한 명료하게 정리를 해놓았으니 도움이 되길 바란다.).

 

(- 혹 이전에 이 블로그를 방문한 적이 있는 분이라면 알겠지만 우리는 원래 저작권 신경쓰기도 싫고, 그외 몇 가지 이유로 블로그에 '멀티미디어' 파일은 일체 활용을 안 하는 게 기본 방침이나, 이번 만큼은 주제 특성상 그림을 첨부를 안 하면 쓴 우리가 봐도 무슨 이야긴지 헷갈릴 것 같아 이번 한번 만큼은 예외로 했다.

- 그리고 아래에서는 세부를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게 가급적 큰 이미지를 넣었는데 구도를 보기 위해선 그림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게 브라우저 상에서 화면을 한번 축소해서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번거롭겠지만 그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해하리라 믿는다.

- 나중에 어떤 이유든 이미지가 깨진 경우, 혹은 우리가 이름만 언급하고 이미지를 첨부하지 않은 경우에는- 우리는 한글전용론자지만- 화가·작품명 순으로 한자이름을 병기해 놓았으니 브라우저 크롬 쓰시는 분들은 선택해서 마우스 오른쪽 클릭만 하면 바로 ‘google에서 검색’ 메뉴가 나오는 걸 아시겠고, 기타 브라우저는 복사해서 붙여넣기 하고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을 하면 대개 고해상도 이미지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는 달리 표시하지 않았을 때는 모두 대만 대북고궁박물원이다.)

 

 

    우선 가장 유명한 그림부터 시작한다. 위의 것은 11c 중엽(1072년) 북송 곽희의 조춘도(郭熙 早春圖)이다. 북송식 정면대칭구도를 볼 수 있다. 즉, 화면 상단 중앙에 우람한 '주봉'을 우뚝 세우고 시작해서 대략 좌우대칭으로- 물론 '데칼코마니'처럼 기계적으로 맞추진 않는다- 그림이 짜인다. 화면에 상대적으로 여백이 적고 묘사하는 내용이 많기 때문에 경물들 사이에 밸런스를 잡는데 아주 섬세한 주의를 기울여야 좋은 그림이 나온다.(이미지 파일로도 어느 정도는 확인할 수 있지만 실제로 보면 이것은 '산 따로, 나무 따로' 그린 산수가 아니고 산석은 몸통이요, 나무는 팔다리처럼 거기서 뻗어나와서 산이 거의 '의인화'가 되어서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를 이룬다- (완전히 다른 미학을 갖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화가들이 산과 나무를 유기적으로 조합하려고 애쓰지만 그 조화가 이렇게 잘된 것은 우리는 처음 봤고, '기운생동'에도 다 '레벨'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이 그림을 보고 배웠다.)

   자, 그럼 곽희의 후학들은 여기서 어떻게 구도변화를 줬을까?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화면 '상단' '중앙'에 주봉을 놓는 구도가 출발점이기 때문에 그것을 '옆으로' 밀거나, 아니면 '아래로' 밀거나 선택지는 2가지 뿐인 것이다.

 

 

   위의 것은 12c 중엽(1130~60년경) 소조의 산요누관(蕭照 山腰樓觀)이다. 소조는 북송말기 화원에서 활약했던 이당이 나라가 망하자 남쪽으로 피난길을 가던 중에 얻은 제자다(원래 기록은 산적질 하다가 이당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고, 금나라 군에 항거한 의병이었다고 좋게 포장해준 경우들도 있던데, 뭐 혼란의 와중이라  '겸업'했을 수도 있겠다- 산적이라고 애국심이 없는 건 아니니까 도적질하다가 낙오한 금나라 병사를 만나서 한대 패주면 그 순간은 '의병'도 될 테니 말이다.). 즉, 남송화단 초창기에 딱 화업을 시작한 사람이고, 왕조교체기의 화풍의 변화를 보여주는 화가다. 그림을 보면 주봉을 옆으로 살짝 밀어서 반대쪽에 공간을 만든, 가장 초기적인 단계이다.(이 그림은 아쉽게도 우리가 실물을 볼 기회를 놓쳤다. 웬만하면 우리가 직접 본 그림 위주로 넣으려고 했는데 아래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이 시기 이런 구도의 그림이 희소해서 이 작품은 대체가 어렵다.)

 

 

   위의 것은 작자미상(남송초기 추정)의 계산추색도(溪山秋色圖)이다. 여전히 '수평이동'이지만 소조보다 확실히 옆으로 더 밀면서 여백이 더 넓어졌고, 화면 중단에 우측으로 살짝 대각선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한국식 용어로 '편파삼단구도'에 가깝고 구도만 놓고 보면 조선 그림 중에는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소상팔경도 중에 '산시청람'과 가장 근접해 보인다. 혹 휘종의 전칭작으로 소개된 자료가 검색될 수 있는데 그림 위에 찍힌 휘종의 화압, 곧 '사인'과 '어서' 인장은 모두 나중에 위조한 것이고, 산이나 나무 묘사엔 북송식 필법이 많지만 구도가 상기한 정면대칭 양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것이 역시 남송초기작으로 보는 중요한 근거이다. 어쨌든 휘종의 것이 아니라고 판정이 났음에도 이 그림은 2012년에 대만의 '중요고물'(그쪽 용어로도 국보는 국보고, 우리의 보물쯤에 해당하는 그 다음 등급을 지칭하는 용어다)로 지정이 되었는데, 우리가 보기엔 그림이 솜씨가 얌전해서 가작이긴 하지만 양식사적인 중요성이 더 크게 작용한 걸로 보인다.

   한데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남송시기 이런 유형의 그림들이 희소한 편이다. 사실 송대 그림이 남은 게 별로 없어서 북송대처럼 화단의 '대세'를 이루는 구도가 따로 없이 짧은 기간에 여러 구도가 혼재하면 작품 숫자가 많을 수가 없는데, 12c 말이 되면 마원이 '일각구도'를 들고 나오면서 또 일대변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위의 것은 마원의 화등시연도(馬遠 華燈侍宴圖)이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산수화는 아니지만 일각구도가 뭔지 살펴보기엔 충분하다(혹은 오히려 더 좋은 예이다). 일단 보면 위에 여백이 아주 휑하게 남아있는 것이 눈에 띌 것이다. 이 여백은 2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먼저 사실 비운 '면적'만 놓고 보면 바로 위의 '계산추색도'도 만만치 않다- 중요한 차이라면 화면 우상단의 산부터 시작해서 그림이 비스듬하게 놓였다는 것이다. 즉, 바로 위의 두 그림들처럼 중심축을 '수평이동'을 해서, 옆으로 밀어서 만든 여백이 아니라 처음부터 화면을 '대각선'으로 자른 여백이다. 다음으로 곽희파 화가라면 틀림없이 화면의 저 넓은 윗 공간에 하단의 누각과 어울릴 만한 멋진 산봉우리를 하나 통채로 그려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원의 산은 옆으로 밀어도 뭐가 나올지 짐작도 안 되게 윤곽선만으로 간략하게 그려졌고, 그나마 다 '잘렸다'- 산보다는 차라리 그 앞의 키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이 그림에선 훨씬 더 중요한 경물이다. 화면을 대각선으로 자르다 보면 자연히 시점은 삐딱해지고, '전경(全景)' 산수가 안 되고 경물이 잘려 나간다. 반대로 조감도 스타일로 전경을 안 그리고 자유롭게 먼산 봉우리 몇 개, 시원도 없는 물줄기 하나 그릴 거라면 기왕 정면/대칭구도에서 벗어나서 여백을 줄 바에야 옆으로 밀어서 단조로운 수평선으로 단을 쌓는 것보다는 대각선으로 비스듬하게 잘라야 훨씬 변화의 여지가 많아지고 표현의 자유가 넓어진다. 즉, 이렇게 (i) 대각선 구도와 (ii) 전경산수로부터의 탈피가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탄생한 것이 바로 '마일각'이다. 

   그리고 화면을 대각선으로 잘라서 절반을 비우면, 자연히 그림이 그려지는 부분은 네 귀퉁이 중 어느 한쪽('일각')으로 몰리게 된다. 이게 영어로 하면 또 'one-corner'니까, 서양학자들이 쓴 책으로 공부한 사람들도 '코너'로 몰아야 (변각구도라고) 한다고 꼭 언급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방금 설명했듯이 경물이 한 귀퉁이로 몰리는 건 '결과'지 '원인'이 아니다. 어떤 그림이 변각구도인지 아닌지 알아보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정말로 '한쪽 구석에만 다 몰아넣은' 그림을 찾는다면 바보짓이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언급만 하고 아직 설명하지 않은 '아래로' 민 구도를 보면 우리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더 확실하게 이해가 갈 것이다.

 

 

   위의 것은 하규의 관폭도(夏珪 觀瀑圖)이다. 이것은 원래 선면에- 접선이 아니라 송나라식 단선이다- 그린 소품이다. 보면 위에 여백을 좀 띄워서 상단 중앙에 산봉우리가 그려져 있다. 그럼 이것은 북송식 정면대칭구도일까? 답은 '아니오'이다. 역시 거의 윤곽선만으로 간략하게 그려진 이 산은 더 이상 그림의 주인공이 아니고, 그냥 '병풍' 정도 역할이기 때문이다. 제목이 '관폭도'인데 폭포도, 구경하는 사람들이 들어가 있는 누각도 모두 그림 오른쪽 귀퉁이에 있고 모든 중요한 사건은 사실상 화폭의 아래쪽 절반에서 다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하'반변(半邊)'의 의미이다(하규 그림 중엔 알기 쉽게 위나 아래쪽 절반을 더 확실하게 비운 작품도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이 '관폭도'가 구도 설명할 때는 더 좋은 예이다.).

   마일각이나 하반변이나 그게 그거라고 설명하는 책들도 있던데, 결과적으로 보면 틀린 얘기는 아니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래쪽 '반변'만 놓고 보면 일각구도로 채워져 있기도 하거니와 보다 근본적으로 일각구도가 나오기 전엔 이 '아래로' 미는 구도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 그림의 주제가 되는 풍경(산과 물)을 온전히 묘사하는 전경 산수를 그릴 거라면 위쪽 반을 비우는 건 그냥 '공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백을 폭넓게 쓰고 산수의 묘사가 자유로운 일각구도가 나와야 화면의 중심축을 위아래로 밀어도 '그림이 된다'. 반대로 그림이라는 게, 일각구도라고 해서 종이나 비단을 대각선으로 반 접어서 '금 안 넘어가게' 그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경물이 그림 하단을 넓게 차지하게 되면 딱 '하반변'처럼 보인다- 바로 위 '화등시연도'가 딱 그렇게 보이지 않는가? 그러니 그냥 합쳐서 '마하파의 변각구도'로 이해해도 상관은 없는데 다만 옛 사람들이 왜 굳이 '마일각'과 구분해서 '하반변'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그 이유는 알고 넘어가라는 것이다- 즉, 화면의 중심축을 위아래로 밀어서 여백을 주었다는 의미다. 이제 이 '관폭도'를 굳이 '4등분'해서 '우하귀'만 들여다보지 않아도- 결과적으로 그쪽이 가장 '까맣게' 보이긴 한다- 딱 보면 '변각구도구나' 하고 알 수 있지 않은가? 곧, 구도를 파악할 때는 언제나 그림의 내용이, 핵심 경물이 뭔지를 먼저 판단해야고, 다음에 그것들을 연결해서 '중심축'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우리가 보기엔 '변'하고 '각'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산수화 구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길이다.

(혹 자하고 컴퍼스 들고 작품 위에 복잡하게 선을 그리는 서양식 구도 분석 예시를 본 기억이 있는 분들은 위 '관폭도'의 화면 상단의 산들이 우하향하면서 만드는 선이 화면 하반부의 우상향하는 선과 교차하면서 'X'자로 대각선 구도를 이루는 것을 지적할 수 있을 터인데, 산수화의 경우는 정면대칭구도->('수평이동'->) 변각구도로 넘어오는 이 스토리를 기억하고 있으면 대개는 굳이 그런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후 원대부터는 중국회화가 진당~남송/금대까지 쌓인 유산을 돌려가면서 모방하는, 주로 '복고주의'로 일관하는 시대기 때문에 구도 역시 딱히 '대세'라고 부를 만큼 지배적으로 유행하거나 새로 나타나는 구도는 없다. 이를테면 소위 '원대 이곽파'라고 불리는 조지백/당체/주덕윤 같은 화가들도 전부 강남 출신이기 때문에 '지역 전통' 변각구도를 모를 수가 없다- 즉, 북송식 구도를 그대로 모방한 그림도 그리지만 변각구도도 다 그릴 줄 안다는 이야기. 또는 마하파를 기반으로 이곽파적인 요소가 합쳐지는 명대 절파의 경우에는 기본 변각구도의 여백에 '뭘 더 그려서 채워넣은'- 밸런스를 잘 못 맞춘 경우에는 이것이 바로 절파 그림이 어수선하다고 욕먹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식으로 화면을 짜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들은 실제 그림을 보면서 확인하면 되지 굳이 따로 배울 필요가 없고, 요는 원대 이후는 구도도 단순모방과 융합·변형이 공존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까다로운 주제라서 '주석' 내지 '주의사항'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이 좀 있는데, 다음 편으로 넘긴다.)                             

To be continued...

  1. 안휘준, '속전 안견필 적벽도 연구'(홍익미술 3호, 1974; "한국 회화사 연구"(시공사, 2000) pp. 451~462에 재수록되어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