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서예실 교체전시
소장품이 정말로 빈곤하거나 아니면 좀 게으른 전시실. 벽면 하나에 비석 조각을 박아넣고 놀리고 있고 그 좌우 벽면도 반쪽은 또 기타 설명문, 성덕대왕신종 탁본 등등 으로 때워서 전시실 공간에서 실제 쓰는 건 한 반 정도? 설명문이야 기능이 있는 것이니까 필요하다고 볼 수 있지만 진열장에 비석을 넣어놓는 것은 글쎄, 이게 '역사관'이면 또 모를까 '서화관'인데 이래도 되는 것인지? 작년 초 이후엔 2~3점 정도 외엔 새로운 걸 본 기억이 없기 때문에 그 반도 대략 4번 정도 교체할 수 있는 수효의 작품들로 계속 돌리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처음 가보거나 아예 안 가본 사람들을 위해서 한 2번만 나눠서 정리하면 될 듯하다. 아래는 현재 전시된 것들 중에 주요작품들.
● 단속사 신행선사비 탑본(영업); 글씨 이만큼 쓰면 세상에 무서울 게 별로 없을 것 같은 그런 글씨. 서화 좋아한다는 중국 손님들 데려와서 '왕우군의 집자비노라' 하면 열에 여덟, 아홉은 ‘잘 새겼다’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 할 것이다. 진적이건 아니건, 대작이건 소품이건, 값이 얼마건 관계없이 지금 이 방에서 순수하게 미적인 관점에서 딱 하나만 골라봐야 한다면, 이것이다.
● 태자사 낭공대사비 탑본(김생 집자); (i) 애초에 석공이 새긴 솜씨가 좀 부실했거나, (ii) 풍화가 심한 곳에 세웠거나, 아니면 (iii) 너무나도 유명한 비석이라 탁본을 너무 떠서 이미 글자가 많이 뭉개진 상태.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이유가 셋 중의 무엇- 혹은 전부?- 인지는 모르겠지만 ‘신품’을 볼 수 없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전문가들이 보면 뭐가 더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일반인들이 봐선 원래 획이 왕희지체보다 상당히 굵어보인다는 것 외엔 딱히 보이는 게 없다. 김생이 글씨 못 쓴다는 오해를 주지 않게끔 추가설명이 필요해 보이는 전시품.
● 적선(선조); 큰 글씨로 단 두 글자지만 선조 글씨의 특색, 개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 호방하고 살집이 굵다.
● 행서대련(흥선대원군); 我書意造本無法 此老胸中亦有詩(아서의조본무법 차로흉중역유시; 내 글씨는 마음가는대로 만들어진(씌여진) 것이라 본래 법칙(혹은 법수)가 없지만, 이 늙은이의 흉중에도 역시 시가 있다네); 흥선대원군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를 많이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이고 얼핏 보면 그런 것 같긴 하다. 그러나 이것은 문구도 의미심장하고 대원군의 득의작이라 할 만할 것이다.
● 제사설(강세황); '제사'라는 주제에 맞추어 단정하게 써서 지금껏 본 표암 강세황의 글씨 중에선 겉보기엔 동기창 글씨와 아마도 가장 비슷한 분위기가 아닌가 싶다. 다만 본래 강세황과 동기창 글씨는 느낌이나 본질이 다르다. 동기창의 스타일은 송나라 서법을 '잘못 배웠다' 혹은 '잘못 베꼈다'고 정리해도 크게 봐선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따라는 했지만 보다 속이 좁고 그릇이 작은 글씨. 표암 글씨엔 이런 '꽁한' 기운은 없고, 글씨가 보다 윤택하고 곱고 예쁘다. 몽유도원도 발문의 안평대군 글씨, 조선전기의 송설체와 느낌이 비슷한 데가 있다. 가운데 작은 진열장에 강세황의 작품으로 '제사설'처럼 무거운 주제가 아닌 소품들이 더 있는데 비교해서 볼 수 있다.
● 무이구곡(윤순거); 전시설명은 광초라 하지만 정신까지 ‘광초’류는 아니고 품격이 느껴지는 초서. 이만큼 품이 있는 초서로 이보다 연대가 뒤지면서 더 잘 쓴 것을 찾기가 아마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첫 두폭은 좀 몸을 풀듯이 시작해서 흐름이나 전체적인 비례가 살짝 깨진 감이 있는 대목이 없지 않지만 3번째 폭부터는 정말 물흐르듯이 흘러서, 단순히 선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시각적으로 짜릿한 쾌감을 준다.
여기는 같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쓴 것으로 이삼만의 것도 소장하고 있어서 본 기억이 있고, 그 때는 분명히 전시설명하고 본문의 해서체와 번역이 같이 적힌 것이 놓여 있었는데 이번엔 왜 안 놓았는지 모르겠다. 초서는 한문학 박사라도 서예를 따로 배우지 않으면 못 읽는 글자가 많을 것이다. 하물며 일반인이야... 전시설명의 해서를 한 폭 읽고 병풍의 초서를 한 폭 보고, 이런 식으로 보면 훨씬 감상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늘 전시설명에 포함이 되어 있어야 하는 일.
마지막으로 중앙에 있는 작은 진열장:
● 표암유묵/서첩;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쪽이 표암의 본령에 더 가까운, 유려한 글씨들.
● 적취병(송시열); ‘양송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같은 계통의 글씨로 묶이지만 송준길이 글씨를 '아주 아주' 잘 쓰는 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어쩌면 상대적으로 좀 단정치 못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차라리 개성이 보다 확실한 송시열을 선호하는 쪽이다. 기세가 보통이 아니어서 한 당파의 영수로 충분한 자격이 있는 호방함이 있다. 이것도 설명을 보면 우이동의 여러 지명을 쓴 첩인 모양인데 그냥 놔두고 한장씩 넘겨줘도 좋으련만 우리의 기억으로는 최근 몇년간 이 '적취병' 외엔 본 기억이 없다.
● 맞은편엔 추사 김정희 인장 '상설전시', 그 중 ‘士大夫當有秋氣(사대부당유추기; 사대부는 마땅히 추상같은 기상(혹은 기개)가 있어야 한다)’, 문구와 글씨가 제법 어울린다. 그 옆에는 정갈한 해서로 사경에 안평대군/김생 이름 붙은 것들을 논한 글이 있는데 역시 전시설명을 보면 아직 청 옹방강체의 영향을 짙게 받고 있는 시기의 것이라고. 우리가 지지하는 견해는 김정희는 '추사체'를 쓰기 전 글씨가 미적으로는 더 뛰어나다는 것- '독창성'이 전부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