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문화전 5부: 화훼영모- 자연을 품다(동대문디자인플라자 디자인박물관)
DDP에서 시리즈로 진행하는 간송문화전 5부- 주제는 '화훼영모', 회화 장르전이다. 아래는 대략 전시순 주요작품(이전에 언급했던 작품들은 대부분 제외했다.).
● 이양도(공민왕); 고려시대 그림이라고 전하는 것 자체가 극소수라서 나오면 눈여겨보게 된다. 오른쪽 양은 엉덩인지 목인지 분간이 안 가는 게 특징인데 처리한 수법이 실수라고 보기는 어렵고, 의도적으로 착시효과를 노렸다면 이유가 수수께끼. 그냥 유머였을까?
● 지곡송학(유자미); 거의 8~90%는 조선후기 모작. 아마추어 눈에도 보이는 걸 보면 여기서도 분명 짐작하고 있을 텐데 전시설명을 보면 구렁이 담넘어 가듯이 은근슬쩍 넘어갔다- 우리가 보기엔 그냥 나쁜 관행. 전시구성상 공민왕(14c) 다음에 바로 16c로 넘어가기 때문에 15c 그림이 하나 있으면 좋긴 하지만 그냥 점잖게 ‘전칭작이지만 구도나 기타 수법상 15c 스타일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다' 정도로 써놓으면 안될 것이 무엇인가?
● 백액대호(고운); 처음 보기엔 약간 민화풍이나 다시 보면 슥슥 그렸지만 기가 살아있는 호랑이다.
● 매조문향/야우한와(김시); 소품이지만 둘다 수작이고 정상급 솜씨.
● 기우취적(이경윤); 소도, 나무도, 바위도 한쌍인데 형태 감각이 좋다. 소들은 아주 사이가 좋아 보이는 것이 표정에 감정이입이 되어 있다. 그리고 비현실적인 크기로 소에 ‘얹힌’- 마치 피터팬에 나오는 팅커벨 같은- 당적을 부는 목동이 전반적으로 나른하고 목가적인 정서에 더해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부여한다. 노래를 부를 때 소리를 잘 내는 것 만큼이나 감정을 싣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그림도 감정을 넣어서, 정서가 느껴지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어렵다고 본다면 이 그림이 든 진열장에서 가장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
●단풍서조/기우취적(김식); 깔끔하지만 정적이고 선에 기가 부족해서 할아버지(김시)의 기예를 다 배우지는 못했다고 보인다.
● 비폭노안(윤신지); 김시/이경윤 스타일인데 선에 힘이 좋다. 바로 옆에 자수가 출품된 선조의 딸 정혜옹주의 남편- 부부의 작품을 나란히 볼 수 있다는 게 흥미롭다.
● 포도(이계호)/설조휴비(조속)/설월조몽,백로탄어(이건); 모두 잘된 그림들이고 대략 17c 전반기의 수준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작품들.
● 추순탁속(조지운); 처음 보면 화면 상단의 조가 느슨한, 혹은 허술한 듯 하지만 볼수록 전체적으로 어우러진 느낌. 표현효과가 좋다.
● 향원익청(강세황); 전시설명 그대로 멀리서만 봐야 좋은 게 아니라 가까이서 봐도 좋은 그림. 아마도 만장일치로 이 장르에서 강세황의 대표작일 것이다.
● 고매서작(조속); 역시 아마도 조속의 대표작, 별로 흠잡을 데가 없다. 아버지는 격조가 있고 아들(조지운)은 풍류를 아는, 예술가 기질이 다분한 그림을 그린다- 멋쟁이 부자.
● 잉어(이광사/이영익); 주인공 초대형 잉어는 물론이고 옆에 피라미, 마름까지 깎아먹는 게 없는 잘된 솜씨.
● 노응탐치(심사정); 이 그림은 제목이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곧, 매 아래 꿩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연상 작용에 의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그리 보이는 것 뿐, 실상은 매가 꿩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이 그림은 바로 요번 문화전 1부에도 나왔었고, 그때는 우리도 매가 꿩을 노리는 상황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했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이 매의 눈인데 눈동자를 안구 정중앙에 딱 찍어놓았다- 즉, 이 매는 지금 정면에 다소 거리가 떨어진 곳을 바라보고 있지 바로 아래쪽의 꿩을, 표적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심사정이 원래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걸까?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이 그림과 구도가 유사한 '호응박토'가 있는데 거기서는 분명히 눈동자를 내리 깔고 있다- 이미 잡은 토끼를 바라보고 있는 듯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더 큰 건수(곧 최하단의 꿩 한쌍)을 노리는 듯 아래쪽을 향한 눈빛이, 놀란 듯 위를 올려다 보고 있는 꿩 한마리의 시선과 딱 장단이 맞는다. 그러고 보면 이 그림의 화면 상단에는 작은 새가 6마리 그려져 있지만 상기 '호응박토'의 까치 2마리가 빚어내는 그런 긴장감이 없다- 나무 위쪽의 4마리는 심지어 아래쪽 상황에 별 관심도 없어 보인다. 막 사냥감을 덮치려는 순간의 긴박함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i) 이 매는 이미 배가 부른- 어쩌면 뱃속에 토끼하고 꿩이 한마리씩 통째로 들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매, 어디론가 날아가기 위해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매다. 그렇다면 위쪽의 작은 새들이 한가한 것도 다 설명이 된다. 이를테면 ‘동물의 왕국’에서 대초원에서 사자 무리가 사냥을 하면서 한바탕 풍파가 일어난 다음엔, 자기 동료가 희생되었는데도 태연히 그 옆으로, 원래 자리로 돌아와서 영양들이 풀을 뜯는, 바로 그 장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사람은 순간 흠칫 놀라고 속이 타지만 알고 보면 별 상황이 아니라는 것, 여기에 '트릭trick'이, 화가의 의도가 있다는 설명.
(ii) 아니면 다른 가능성은 솜씨 좋은 화가의 모작이라는 것이다. 곧 그림의 스토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혹은 무시하고- 심사정의 필법만 전력을 다해서 모사했다는 것. 그렇다면 화면 상단의 새들도 원래는 산만하지 않고 서로 연결되는 시선, 표정을 갖고 있었을 터이니 역시 다 설명이 된다.
우리는 어느 쪽이 맞는지는 모른다. 그림이 필력은 좋아서 혹 모작이라고 해도 심사정과 거의 대등한 수준의 화가다. 나중에 여러 기관이 협력해서 심사정 특전을 할 기회가 있다면 상기 '호응박토'와 나란히 걸어놓고 보면 좋을 것이다.
● 어약영일(심사정); 물로만 2단으로 중복된 구도가 약간 재미가 없지만 잉어나 굽이치는 물결 묘사는 뜯어볼수록 필력이 좋다.
● 모구양자/야수압영/국추비순(단원); '모구양자'는 개들의 묘사가 내용상으로나 화면구성상으로나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서 약간 다른 스타일이지만, 이 작품들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정중동'이다- 화면구성이 한가한 것 같아도 뜯어보면 최소한의 선으로 화면에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다. 넓은 여백에 여유로운 화면, 부드러운 필치로 된 그냥 ‘시정(詩情)’이라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겠지만 이 ‘정중동’이 바로 단원의 수준에 걸맞는 솜씨. 우리는 3년전에 봤을 때까지만 해도 이 작품들의 아름다움을 다 이해하지 못했었다.
● 포도2폭(황집중); 포도알이나 잎보다 특히 가지에 집중해서 주인공을 삼은 스타일이 독특하다. 아주 흥미롭게 봤던 작품.
● 포도이숙(심사정); 이것은 보다 전통적인, 포도알이나 잎에도 비중이 실린 작품. 완숙한 솜씨다.
● 추일한묘/서과투서/과전전계/계관만추(겸재); 선도 색깔도 선명한 스타일, 예쁘다. 예전 처음 봤을 때 겸재가 이런 것도 그렸구나 감탄했던 작품들.
● 죽원양계/연당원앙/해당청금/풍국명금/산당수금/군연농춘(장승업); 원래 10폭짜리라고. 죽원양계가 좀 잘 되었고, 군연농춘이 제일 못 되었는지 모른다. 전체적으로 조석진/안중식보다는 필력이 낫지만 장승업의 제일 잘된 작품은 아니다. 서양화라면 ‘장승업 workshop’ 제작이라고 분류했을 것 같은 작품들.
● 세류황사(김득신); 깨끗한 윤곽선의 펜+잉크 느낌, 품은 좀 떨어져 보이지만 투명하고 곱다.
● 나월불폐(신윤복); 개도 잘 그렸지만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있는, 감정이 들어가 있는 그림.
● 황묘농접(단원); 위에 언급한 3작품과는 달리 색깔도 많이 쓰고 화면에 들어간 것도 묘사한 것도 더 많은 스타일, 물론 훌륭하다.
문화전은 일단 여기서 마감이고 언론보도에 따르면 앞으로는 형식이 달라질 모양- '용두사미'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3.27(일)까지, 하루 남았다.